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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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대학 동문회에 갔다.물론 이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거대한 학교 동문회가 아니라 같은과 출신의 비슷한 업계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교수들도 있고 공기업 지부장도 있고 이사급도 있었다.70년대 학번부터 80년대 학번...그리고 마지막이 90학번이었다.그 밑으로는 이 지역에 우리과 사람들을 거의 본적이 없다.자주 모이는 모임은 아니고 1년에 한두번 하는 모임이다.비슷한 업계에 있다보니 주제의 공유는 쉽다.물론 입장의 차이는 있겠지만.....1차 횟집,2차 노래방...... 노는건 또 비슷하다.일찍 도망쳤다. 나는 이렇게 여럿이 모이는 만남이 즐겁지 않다.그냥 소수로 만나면 또 다들 다를텐데..여럿이 모이면 하여간 별로다.어제 노래방은 7080콘서트였고....일찍 집으로 돌아온 나는 존재의 비애감 같을 걸 느꼈고..이유는 모른다......집에 와서 자정 가까운 시간에 푸르트뱅글러가 1954년에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들었다.나의 우울한 기분을 알아주는 와이프는 옆에서 함께 음악을 들었다.뱃속의 아이는 베토벤을 좋아하는듯 가끔 발길질을 했고...술 한잔 한 나는 내 멋에 겨워 푸르트뱅글러 신이 몸에 들어온듯 혼자 지휘를 하고 흥얼거리다가....4악장의 첼로 하강에 이어지는 상승부를 따라가다 두 손을 번쩍 들고' 베토벤 만세'를 외쳤다.와이프는 나의 하는 짓을 보면서 그냥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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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6-05-03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지난 주말 애인의 집에서 점심 먹고 이 음반 들으며 드팀전님과 비스무리하게 놀았더랬죠. 협주곡만 좋아하는 사람이라. ㅎㅎㅎ


드팀전 2006-05-03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ㅜ 난 논거 아닌데...."존재론적 우울"이었다니까요.베토벤을 들으며 위안받고 탈출하는 치료과정이었는데...어쨋거나

mannerist 2006-05-0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끙;;; 뭐 눈에 뭐만 보이는 벱인가봅니다. 쿨럭;;;;;

그러고보니까. 얼마전 본 드라마 '연애시대'의 두 이혼남, 이혼녀. 감우성, 손예진이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도 저 대사가 나왔어요. 감우성이 드팀전님과 비슷한 감정에 젖어 '존재론적 우울' - 실제 이 대사를 쳤던 걸로 기억합니다 - 을 논하자, 처음에는 다독다독 위로해주던 손예진이 감우성의 가오를 참다못해 구박을 하기 시작하더군요. "에라~~~ 이 인간아, 내가 잘해줄려고 해도 잘해 줄 수가 없어요~~~ 니가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블라블라블라~~~" 뭐 그 장면 자체는 감우성을 대단히 희화하면서 상대적으로 손예진을 띄워준 장면이었고 그 분위기 반전에 키득거리긴 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쫌 씁쓸하더군요. 그런 기분이 필연적으로 사람을 짓누를 때도 있는데 사춘기 소년의 기우로 치부하며 구박하는게. 저도 지금의 조증을 너머 울증이 올 때가 분명 있을게고... 또 비슷하게 탈출하겠죠.

어제는 집에 출장나온 회사 선배가 자고 가느라 놓쳤네요. ㅎㅎ

드팀전 2006-05-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사춘기 우울 맞아요....근데 나는 화장터에 올라갈 때까지 그럴꺼 같아요...
그래도 동의하삼.베토벤은 위대하다.!! 매너님 혹시 "러브 오브 시베리아"인가 보셨나 모르겠네... 주인공을 괴롭히던 고집불통 중사가 새벽에 절벽 위에서 큰소리로 외칩니다."모짜르트는 위대하다."...ㅎㅎ 드팀전도 외칩니다 "베토벤은 위대하다.만세"

글샘 2006-05-03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만세... ㅍㅎㅎㅎ 좋은 아내군요.
아빠가 우울하시면 아기가 싫어합니다.ㅎㅎㅎ

mannerist 2006-05-03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거 말러 죽을 때의 오마쥬인가요. 죽을 때 '모차르트!'외치면서 죽었다고 하던데. 저역시 미투로 외침다. "베토벤은 위대하다. 만쉐이~"

저는 제르킨/쿠벨릭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들어야겠네요. =)

드팀전 2006-05-03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영화 안 봤으면 꼭 보세요.모짜르트 음악이 영화 내내 나오거든요...연인이랑 보기도 너무 좋고..시베리아 벌판도 너무 멋지고....꼭 보세요.<러브 오브 시베리아>
 



물이 깊어야 큰 배가 뜬다
얕은 물에는 술잔 하나 뜨지 못한다
이 저녁 가슴엔 종이배 하나라도 뜨는가
돌아오는 길에도 시간의 물살에 쫓기는 그대는

얕은 물은 잔돌만 만나도 소란스러운데
큰 물은 깊어서 소리가 없다
그대 오늘은 또 얼마나 소리치며 흘러갔는가
굽이 많은 이 세상의 시냇가 여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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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하나 제대로 외우고 있는게 없다.고등학교 국어시간 외운 시들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시를 외우는 것은 쉽지 않다.그래도 이상하게 정지용의 <향수>는 이래 저래 기억난다.조용남,박인수의 노래때문이다.시인들과 포크가수들이 모여서 음반작업을 한 적이 있다.지금도 그 작업은 계속된다.<나팔꽃> 이었던 것 같다.백창우도 우리 시에다가 노래를 입혀서 몇 장의 음반을 냈다.<나팔꽃>의 음반에 들어 있었던 시여서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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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너무 많은 시간을 여의고 나서 그때 온전한 허심으로 가득 차 있더라도 지나간 시간 위로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세차게 몰아쳐서 눈을 뜰 수 없고 온몸을 안으로 안으로 웅크리며 신음과 고통만을 삭이고 있는 그동안이 자네가 비로소 돌이 되고 있음이네

 

 자네가 돌이 되고 돌 속으로 스며서 벙어리가 된 시간을 한 뭉치 녹여 본다면 자네 마음속 고요 한 뭉치는 동굴 속의 까마득한 금이 되어 시간의 누런 여물을 되씹고 있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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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춘 시인을 알게 된 건 신경림의 책을 통해서다. 출판업에 있으며 틈틈이 시를 쓴 시인이다.60이 다되어가는 나이에 첫 시집을 낸 시인.그의 시가 뿜어내는 압축미는 대단히 선명하다.<돌의 시간>에서 표현은 조금 다르다.하지만 영겁의 시간을 압축하는 정서는 그대로인 듯 하다.많이 알려진 <봄 파르티잔>.이나< 죽편> 같은 시들을 보면 시인의 시선과 담백한 마음이 한꺼번에 느껴진다.오늘은 몇 년전에 읽고 좋아했던 <돌의 시간>이 문득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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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걷힌 냇가
세찬 여울물 차고 오르는
은피라미떼 보아라
산란기 맞아
얼마나 좋으면
혼인색으로 몸단장까지 하고서
좀더 맑고 푸른 상류로
발딱발딱 배 뒤집어 차고 오르는
저 날씬한 은백의 유탄에
푸른 햇발 튀는구나

오호, 흐린 세월의 늪 헤쳐
깨끗한 사랑 하나 닦아 세울
날랜 연인아 연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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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강원도는 물고기들이 저 낳은 곳을 찾아 돌아오는 시절이다.인터넷으로 황어 한마리가 물살을 헤치며 뛰어 오르는  사진을 보았다.왠지 비장해 보였다.물론 그  다음에는 어도가 너무 높게 설치되어서 오르다가 밖으로 튕게 나가거나 지쳐 죽은 황어떼  사진이 이어졌다.요맘때 물의 수량과 어족의 생태를 고려하지 않은 어도 설치가 문제다.물고기들이 사는 길에 인간의 손길이 닿는 것 까지는 어쩔수 없이 이해한다만 좀 헤아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어려운 길을 돌아 고향을 찾은 황어떼들이 날래고 깨끗한 사랑 하나 낳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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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해남 들 가운데를 지나다가

들판 끝에 노을이 들어

어찌할 수 없이

서서 노을 본다

노을 속의 새 본다

새는 내게로 오던 새도 아닌데

내게로 왔고

노을은

나를 떠메러 온 노을도 아닌데

나를 떠메고 그리고도 한참을 더 저문다

우리가 지금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저 노을 탓이다

이제는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중얼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저문다

해남 들에 노을이 들어 문득

여러 날 몫의 저녁을 한꺼번에 맞는다

모두 모여서 가지런히

잦아드는 저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가슴 속까지 잡아당겨 보는 일이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내밀어진 생의 파란 발목들을

덮어 보는 일이다

그렇게 한번 덮어 보는 것뿐이다

내게 온 노을도 아닌데

해남 들에 뜬 노을

저 수천만 평의 무게로 내게로 와서

내 뒤의 긴 그림자까지를 떠메고

잠긴다

(잠긴다는 것은 자고로 저런 것이다)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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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미황사에서 노을을 기다렸던 적이 있다.너무 시간이 부족하여 미황사에서 바라보이는 섬들만 보다 내려왔다.해남 들녘을 달리는데 논과 산 사이로 붉은 구름과 푸른 구름이 엇갈렸다. 짧은 순간에도 하늘의 색은 수시로 변했다.해남 들녘을 걸어야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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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6-04-28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을지는 길을 달리다 보면 굽이굽이 그 짧은 순간도 다르게 보입니다..참말로 늘 느껴요..
언제봐도 멋진 곳..시원한 곳..공기 좋은 곳..바람 휑 하니 시원한곳...인심좋은 사람들 많이 사는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