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박현섭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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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은 뒤통수 치기다. 단편소설을 읽으며 한편으론 가해자의 뻔뻔함과  피해자의 황당함이란 이중감정을 즐긴다.뒤통수를 맞는 대상이란 대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거나 무뎌진 감성이거나 너무나 당연시 여겨온 의식의 화석조각들이다.책의 말미에 이르러 '아...'하는 탄성을 또는 '하....'하는 자성을 뿜어내지 못하게 한다면 내게 단편소설로 크게 인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전적 소설론의 단어를 빌자면 '머리 맞으며' '카타르시르'를 느끼는 것이다. 최근에 본 몇몇 단편소설들은 늘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사족삼아 예를 들면 카사이스의 <러시아 인형>,로맹 가리의 소설들,로제 그르니에의 <물거울>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현대 소설이 자리잡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안톤 체호프이다.

 결론 부터 말하자면 체호프는 역시 현대소설의 개척자라고 부를 만했다.나는 그의 단편집을 읽으며 몇번이나 고개를 끄떡이고 자성과 탄성의 한숨을 쉬었는지 알 수 없다.그의 소설은 단편소설이 가져야하는 미덕을 전부 가지고 있다.짧은 문장과 빠른 호흡,그리고 뛰어난 풍자성.이것말고도 단편소설이 가지고 있는 묘사의 서정성까지 .... 한마디로 현대소설의 시금석이 될 만하다.

가장 직접적인 사회풍자가 돋보이는 단편은 처음에 실린 < 관리의 죽음>이다.알아서 기는 소시민의 극단적 소심증이 결국은 그를 죽음으로 까지 이끌고 간다.물론 한 희극적인 인물의 에피소드로 볼 수도 있지만 소시민의 작은 실수마저 위협했던 사회분위기를 생각한다면 그다지 희극적이지 않다.최근에 본 영화<효자동이발사>에서 독재자의 면도를 하다가 살을 베고 노심초사하던 송강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그는 그날 밤 사형장에서 총살당하는 악몽에 시달린다.우리에게도 소시민을 더욱 작아지게 만들었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어디가나 말조심 자나깨나 다시보고..... ^^ 체호프가 살던 19세기말 제정러시아 역시 억압적인 사회분위기였나보다.<관리의 죽음>은 알아서 기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멋진 풍자였다.

체호프의 풍자가 사회적인 곳에만 머문것은 아니다.그는 인간 본성과 그 이면의 이기성에까지 깊은 풍자의 칼날을 던진다.<베짱이>나 <베로치카>에서는 허망한 욕망으로 인해 몰락하는 여인이라던지 자신의 삶을 내던져 사랑을 구하지도 못하며 머릿속으로 사랑과 세상을 만드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비웃는다.<내기>에서는 두 인물을 통해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준다.하나는 돈욕심에 수감생활을 자청하는 인물이고 또 하나는 남은 재산을 위해 약속을 저버리며 살인을 기획하는 인물이다.결과는 긴 시간 수감생활을 통해 내면의 눈을 뜨고 만 수감자의 변화를 통해 욕망의 부끄러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묘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은 <미녀>와 <주교>였다. 역을 지나며 바라본 두 명의 미녀에 대한 이야기와 어머니를 만난 주교의 이야기가 전부이다. 너무나 단순하고 평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물을 어떤 감성을 가지고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 사물은 수없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다는 전형을 보여준 작품들이라고 생각한다.특히 <미녀>에서는 체호프의 서정적묘사가 뛰어나다.<주교>의 경우 자유롭고자 하는 주교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직함이 주는 권위로 그를  어려워하는 주변인물을 통해 우리가 타인의 명함으로 인해 좋던 나쁘던 얼마나 많은 이미지를 만드는지 보여준다.이 작품에서는 어머니조차 그를 어려워함으로써 주교를 외롭게 만들고 만다.

사실 안톤 체호프의 책은 이 책이 처음이었다.하지만 앞으로 그의 팬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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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물고기 2004-05-18 01:38   좋아요 0 | URL
전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님에도 유명작가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것에는 늘 주눅이 들곤 합니다. 저에게는 체홉이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이죠. 단편소설의 거장이란 타이틀 때문이라도 한번쯤 보았을 법한데, 어쩐지 체홉과는 인연이 잘 닿지 않고 비켜가기 일쑤더군요. 리뷰 말미에 체홉의 책이 처음이라는 고백, 힘을 실어주시는군요. 이번 기회에 얼른 읽어야지, 하고 다짐을..
그리고, 빼드로 빠라모를 읽으셨군요. 저도 읽는 내내 머리 속이 뒤죽박죽 돼서, 처음 얼마간은 읽은 곳 또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해야 했습니다. 나중에 포기하는 심정으로 읽다 보니 꽤 매력적인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요. 낯선 작가, 낯선 작품인지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또, 서재결혼시키기는 확실히 멋진 에세이지요!
(말이 길어졌습니다. 근데 덧글 달아도 되나요? 너무 말끔해서 망설이다 쓰긴 썼습니다만.)

드팀전 2004-05-19 09:31   좋아요 0 | URL
^^ 관심있게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침에 메일로 덧글이 달렸다고 왔더군요.냉큼 찾아봤습니다. ^^ 저도 님의 글을 즐겨 보고 있습니다.앞으로 참여적인 모습을 보여드려야겠군요.^^오늘은 날씨가 흐른데 분위기 업 업 업 하세요....
 
폭설
김영현 지음 / 창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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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쯤 김영현의 소설을 보았다.책 제목이 무척 맘에 들었기때문이다.단편집 <깊은강은 멀리 흐른다>였다.당시 지배적 분위기였던 민중적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소설집이었다.당시의 리얼리즘 소설들과 비교해 충분히 비교우위를 가진 소설이었다.같은 소재를 다루고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섬세한 문체와 소설적 서정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아직도 남아있다.그 이유때문이었을까? 당시 선후배들 생일 선물로 김영현의 소설집을 몇권 사준 기억이 난다.

김영현의 <폭설>은 지극히 전형적인 후일담소설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일담 소설에 큰 점수를 주지않는 편이다.이 책 역시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로 고개를 끄덕이기 보단 조금은 삐딱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한 시대를 함께 고민했던 사람들이 시린눈으로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학이란 것 역시 시대의 고민과 작가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크게 유리될 수 없다면  후일담류의 문학작품이 쏟아진 것 또한 당연하다. 90년대 중반 한치를 알 수 없던 시대적 분위기가 어느사이 갑자기 안정을 되찾은 듯 했다. 사회과학 서점들은 경영난으로 문을 닫고 거리의 투사들은 하나둘 제갈길로 흩어져 자기 살길을 찾는 데 급급했다. 아직 갈길이 먼데도 불구하고 눈앞에 보이는 작은 변화는 침소봉대되어 사회의 우경화를 이끌었다. 사람들은 많이 실망하고 많이들 절망했다.하지만 이미 시작된 흐름을 돌릴길 없어 강건너편 멀어져가는 연인을 바라보듯 그 시대를 보내고 말았다. <폭설>은 작가도 밝혔듯이 지나온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이다.작가가 그렇게 밝히고 있으니 아직도 후일담이냐고 나서서 따지기도 뭣한것이 사실이다. 그에게도 나름대로 지나온 시절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정리해야 할 권리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후일담도 지겨워질 무렵 또 다른 후일담을 들고 나오니 진부하다고 해야할지 작가의 개인적 기록으로 애정을 가지고 바라봐야 할 지 난감하다.

이 소설에는 후일담류의 소설에 나오는 전형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시국관련 수감자였던 형섭과 그를 기다리던 연희,그리고 주변에 비슷한 성향을 가지며 이들을 도와주는 조연들.또 극좌모험주의라고 할수있는 성유다와 그 주변인물들. 성유다의 캐릭터는 소설중에서 거의 종교지도자의 수준으로 그려진다.이 부분이 자못 어색하기도 하지만 한때 지하조직의 지도부들이 신비화된 것에 비교해보면 아주 현실과 이반된 것은 아니다.한가지 아쉬운점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몫이다.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주체적인 듯 하면서도 늘 사랑과 외로움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이다.물론 20대라는 나이가 남과 여를 불문하고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가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부분일 것이다.하지만 형섭과 유다등에 비해 연희,미경,애림은 나름대로 주체성을 지니면서도 사랑에 목말라하는 무언가로 그려진다.마치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대상으로서 말이다. 결혼을 앞둔 미경이 마지막으로 형섭을 만나러 온다거나 만난지 몇번 안돤 형섭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으며 의지하는 애림...그리고 형섭을 기다리다 유다를 만나 그의 아기를 가진 연희조차 끝까지 사랑하던 남자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여자는 순정으로 기다리고 남자는 그들이 남겨 놓은 슬픔에 마음이 짠하다.이것은 좀 진부한 스토리아닌가 한다.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이 과거의 이야기를 멜로로 풀어낸다는 것은 아니다.물론 작가는 그 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그 과정을 너무 드라마틱하게 형상화하고 싶은 열정에서 였을까 ...베스트셀러극장 대본 공모 당선작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름대로 이 소설을 각색하여 잔잔한 베스트셀로 극장으로 만든다면  괜찮은 작품이 될 듯하다.수미일관되게 폭설도 내리고 폭우가 내리는 날 공사장 사고도 나고...연희의 유골은 강가에 흘러보내고 ....유다는 법정에서 안중근의사처럼 당당하게 자신의 최후변론을 마치고......눈내리고 모두 가버린 교도소 앞에서 새로운 만남.....딱 그림이 나온다.

 작가에겐 분명히 그가 한복판에 있었던 시간들을 되새김질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독자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말이다.그렇다며 김영현은 <폭설>로 그 일을 마쳤다.이 작품이 독자에게 큰 감동을 줄지 또는 작가 자신의 씻김굿이 될지  알 수는 없지만 이제 그 작업은 끝났다. 그렇다면 이제 독자는 그에게 새롭고 신선한 무언가를 요청해도 무리가 되지 않을 성 싶다.그의 새로운 작품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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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머리 여가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3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오세곤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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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 형님을 안다. 중학교때 제도권 교육에 회의를 느끼고 뛰쳐 나온 사람이다.그후 10여년 독서와 소일로 자력갱생하다가 늦깍이 사회학도가 되었다. 그 형의 중학교 일이다. 수학 시간이었다. 요즘은 음수개념을 초딩때 배우는 걸로 아는데 그땐 중학교때 마이너스를 배웠나보다. 3의 음수는 -3이라는 것이 이해가 안됐다고 한다. 즉 마이너스란게 도대체 어디 있는 수인가 말이다. 예를 들자면 책상위에 연필이 하나가 있다가 어떻게 없는 연필 두개가 더해지면  없는 연필 하나가 되는가? (수식으로 나타내면 1+ (-2) = -1  이 되는 상황이었겠지.^^ )  궁금증을 참지 못한 어리한(?) 형님은 수학선생님께 강력히 어필하셨다.  결국 학교내 폭력의 당위성에 대해 충분히 내재화한 평범한 수학선생님은 형님을 향해 어퍼컷과 이단 옆차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손날 치기를 감행하셨단다. 이유는 간단하다.그러면 그런줄 알지 일부러 알면서 의도적 수업방해다. 바로 이게 그의 죄명이다.  아 ...교실 바닥에 버려진 휴지처럼 뒹굴던 형님.그분은 그때 결심하셨단다.' 나와 함께 할 곳이 아니구나. '.

 물론 형님의 질문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단지 죄가 있다면 너무 조숙한 질문이며 당연한 질문이었다는 것이다. 대학쯤 가면 우리가 흔히 수학에서 당연시 하는 원칙들이 도출되는 과정을 배운다고 한다. 정말그런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흘려 듣기에 그런 당연한 수학상의 원칙들을 '공리' 라고 한다던데...

이오네스코의 <수업>이란 작품에는 뺄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과 이를 설명하려는 선생이 나온다.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선생은 점점 더 어려운 개념과 점점더 헛갈리는 예만을 든다.나중엔 본인도 언어의 붕괴과정에 도달한다.학생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선생의 언어는 학생의 이해도에 반비례하여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결국 그는 살인이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언어를 강제한다. 우리가 토론에서 또는 일상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폭력성과 권위주의는 <수업>이란 작품속에서 파멸을 길로 형상화된다. 지식의 정도가 다른 사람간에 또는 직장내 위계가 다른 사람간에 대화에는 늘 힘의 관계가 형성된다. 상대방 측이 아무리 민주적이며 열린 대화를 입으로 내뱉더라도 궁긍적으로 대화의 위계는 만들어진다. 그리고 대게 대화가 길어질 수 록 대화는 주입적인 형태로 바뀌어간다. 하지만 대화의 분위기만 좋다면 누구나 이 위계 관계의 폭력성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대화가 끝나면 열린 토론이었다는 식의  권력상위자의  입을 통한 흡족한 분위기로 마무리된다. 이오네스코는 <수업>을 통해 언어와 일상성이 가진 폭력성와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에 대해 말한다.그리고 이것이 결코 끝나는 것이 아님을 지속적인 피해자 내지는 순환구조를 통해 말한다.끝없는 언어의 무의미한 반복은 <대머리 여가수>의 결론에서 두드러지는데 마치 뱀꼬리를 물고 도는 뱀을 연상시킨다. <대머리 여가수>의 경우 등장인물 6명은 한 공간에 있으면서도 단절된 인물들이다. 이들의 단절은- 다른 상황의 정보가 전혀 주어져 있지 않은 상황이므로 -언어가 가진 본질적인 한계때문이다.  마틴부부의 대화는 마치 코미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하다. 이들은 서로의 공통점을 하나씩 찾아나가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그들이 수많은 다른 기억을 조합해 그들간의 관계를 인식한게 고작 서로 부부였다는 식이다. 일상의 대화란 것이 무의미한 음절의 남발이고 고작해야 하나마나한 이야기들의 병렬연결임을 작가는 말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누는 대화의 대부분은 무의미한 말들이다. 사실 그런 말들이 분위기를 돈독하게 하고 관계의 유연성을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그것의 의미성을 따지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그러므로 이오네스코의 일상적 언어에 대한 풍자와  단절성에 대한 지적은 돌아볼 만한 이야기이다.

마지막으로 실려있는 작품은 <의자>이다. 극으로 볼 경우를 상정해볼때 가장 흥미있지 않을까하는 작품이다. 등장인물은 단지 3명이다.하지만 이 작품에는 보이지 않는 40여명이 등장한다.아니 그들의 의자가 등장한다. 노인과 노파는 일생 일대의 발표를 준비한다. 물론 그들이 직접하진 않을 예정이다.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대표해줄 변사를 초대하고 많은 지인들과 저명인사들을 초청한다.초청했는지 자기들이 찾아왔는지는 희곡에 나오지 않는다.물론 중요한 사실도 아니다. 황제까지 자리를 하고 기자들도 초청된다.가슴이 얹힌 한을 풀어줄 변사도 마지막에 등장한다. 하지만 노인은 모든 것을 변사에게 맡기고 자신의 소임을 다마친다.허나 그렇게 기다른 변사는.... 으 므 므 므 ....이다. ^^      언어에 대한 배신이다. 노인이 말하고자 했던 그 삶의 총체란 것은 결국 으 므 므...아 아 녕 .. 이다. 삶을 마친 노인도 허무하겠지만 보고 있는 관객도 허무하다. 사실 진정 허무해야 하는 것은 언어인데 언어는 인간이 아니므로 허무해하지 않는다.  사실 부조리극을 읽는다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다. 각 문장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들이 등장하고 대화라고 보기에는 주고받음이 불분명한 말들이 부지기수다. 등장인물간에 상호관계성 조차 의심스럽다. 읽고 나면 무언가 본 것 같고 무언가 몽호한 느낌이 많이 든다. 하지만 그 몽환적인 느낌중 한자락이 와닿으면 그게 부조리극이 뜻한 무언가이자 전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ps) 기차는 달리고 복사기는 고장난다... 이런 장난해보면 재밌다.   맷돌은 도는데 TV는 언제 고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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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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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외가는 경북 고령이다. 방학때면 외가에 가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우선 멀리서 내려온 외손자에 대한 외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애틋함이 좋았다.그리고 신록의 우거짐이 내가 여름의 한복판에 와있음을, 즉 아직  나의 방학이 한창이라는 안도감을 주었다. 외갓집 앞으로 길게 늘어서있던 미루나무들은 마치 나를 반기는 도열식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하지만 몇년전 외할머니의 상여소리를 들으며 마지막으로 그곳을 다녀온 이후 간 적이 없다.그때도 아주 무더운 날이었다.상여꾼들의 선창에 매미소리가 화답을 하는 형국이었다. 푹푹찌는 무더위에도 길가의 느티나무들은 장성한 잎을 반짝이며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소설 <현의 노래>를 읽으며 머릿속에 먼저 떠올랐던건 수천년전 그 땅의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풍광들이었다. 그리고 이어 그곳이 예전에는 가야의 중심이었다는 한동안 잊고 지냈던 생각을 했다.

최근들어 김훈의 활약은 눈부시다.늦깍이 데뷔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는 소설과 에세이들은 독자들의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상복도 많은 편이라 장편<칼의 노래>와 단편<화장>이 국내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그리고 이 소설 <현의 노래> 역시 좋은 평가가 예상된다. <현의 노래>에는 김훈의 글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특징이 함축되어있다. 우선 그의 글은 힘이 있다.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글에서 조차 그의 글은 우직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신문기자 경력이 주는 단문의 힘일 수도 있고 허무주의적 의식이 그의 문장에 기름기를 뺀 것일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인 순장에 대한 묘사에서 조차 그는 건조하다.물론 이것이 그의 묘사가 주는 서정성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그의 묘사는 여러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마치 순장의 한복판에서 그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 듯하다.김훈은 애상적인 장면에서 조차 관찰자로서의 거리두기에 충실하다.그리고 짧은 문장들로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한 인상을 남긴다.

김훈의 소설의 특징중 하나는 허무주의적 태도이다.<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가 같은 맥락 위에 놓여 있다라고 한다면 아마 허무주의의 반석일 것이다. 김훈의 허무주의는 불교적 허무주의와 맥락이 닿아있다. 이 소설에 수많이 등장하는 문장을 등식화 하면 이런 것이다. " A는 B가 아니다.그렇다고 B가 A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마나 한 소리 같고 조금 몽롱하게 들리는 소리이다. 하지만 불교적인 세계관에서는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김훈이 소리에 대해 밝힌 부분에서 그의 불교적 허무주의 세계관이 특히 들어난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이다.

" 소리에는 무겁고 가벼운 것이 없다.마르지도 않고 젖지도 않는다.소리는 덧없다."

"사람이 그 덧없는 떨림에 마음을 의탁하기 때문이다.사람의 떨림과 소리의 떨림이 서로 스며서

함께 떨리기 때문이다.소리는 곱거나 추하지 않다."

이러한 비유는 이 소설 내에 여러번 등장하는데 즉 분별심에 대한 이야기이다.세상에 있는 만물이 있는 대로의 있는 것일 뿐 선악미추의 구분에서 욕심과 악행이 발생한다는 불교의 기초 원리이다.이 외에도 우륵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마치 선문답을 듣는 것 같다.분별심을 떠나보내려는 빈 마음 안에서 무너져가는 나라를 바라보는 애통함도 순장 행렬 앞에서 노래하는 소리와 춤도 얽혀 얽혀 녹아드는 것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우륵을 중심으로 삼각축을 구성한다.바로 대장장이 야로와 신라장군 이사부이다.이들 셋은 같은 나이이며  공유하는 의식이 있다. 작가는 세상을 건너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이 다르고 그들이 세상을 건너가는 방식이 다르다. 우륵의 대칭축에 있음직한 야로는 쇠로 세상을 건널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움직임에 민감하다.그가 말한 쇠에게는 주인이없다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승리주의적인 역사관이다.지극히 현실적이고 개인의 실리를 추구하는 야로에 반해 쇠를 신봉하지만 낭만적인 구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사부이다. 살육을 없애기 위해 쇠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이지만 쇠가 가져다주는 저 먼 세상에 대해 회의한다. 마치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느낌과 일부 닿아있다. 우륵은 이미 가야의 멸망을 예단하고 소리의 영원성을 통해 이 세상을 건너려한다.소리는 살아있는 울림이며 스스로 울리는 것일뿐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우륵은 소리의 울림으로 가야의 노래를 현재까지 이르게 하고 있다. 통속적으로 말하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것인가?

지극히 주관적이고 논리적 비약이긴 하지만 우륵과 야로를 보며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우륵과 야로를 생각했다. 우륵으로 대표되는 계층은 예술가이고 야로는 테크노라트이다. 개인적 불행이라 생각되지만 내가 만난 예술가와 전문인들은 대개 비정치적이고 탈정치적인 입장의 사람들이었다.또한 스스로도 그러한 탈정치적 입장이 그들 고유의 권리인 듯 믿고 있었다. 19세기 브루주아들이 테크노라트들을 자신들의 계급에 일부편입시키며 세를 안정시키려했던 노력들이 이제는  고착화되어 그 일부가 된 듯하다. 우리는 일제 시대를 겪으며 수많은 우륵과 야로를 만났다.그들중 일부는 붓을 꺽고 총을 든 사람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정치와 예술은 또는 정치와 전문지식은 별개로 규정짓고 그 안에서 자족하였다.특히 테크노라트들은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에서는 기득권의 이익에 충분히 수혜받고 또 불리한 형국에 들어서면 자신들은 전문관료,또는 전문인일뿐이라고 슬쩍 발을 뺀다. 우리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례는 수없이 찾을 수 있다. 가야의 대장장이 야로의 후예일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유한하며 그들이 만드는 역사 또한  그리 길지않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이 또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  울리는 것은 소리가 그렇게 끊어질 듯 이어지며 늘 새로 태어나는 무었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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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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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소년들은 누구나  무인도로의 탐험을 꿈꾼다.어린이 명작동화에 포함되어 있는 <15소년 표류기>,<보물섬>,<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작품들은 소년들의 맘을 태평양 이름 모를 섬으로 이끌어갔다.원시적 삶이 주는 자연미와 무엇이든 최초가 된다는 설레임은 소년을 섬에 대한 낭만으로 가득채우기 충분했다.또 사춘기 시절 본 영화<라군>은 무인도의 은밀함에 대한 성적인 상상력을 배가 시켰다. 당시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던 브룩쉴즈가 아무도 없는 밤에 누드로 수영하던 장면은 아직도 그 섬의 풍광과 어울려 기억된다. 이렇듯 낭만과 은밀함으로 가득한 소설 속 무인도에 대한 상상이 깨진것은 아마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에서 였던 것 같다. 윌리엄 골딩은 그의 소설에서 무인도라는 한계상황에서 생기는 권력과 위계의 폭력에 대해 말했다. 자연으로 비유되던 낭만의 섬은 인간이 발을 들여놓음에 따라 또 다른 세계의 한구석에 지나지 않게 된다.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태평양의 끝> 역시 섬에 대한 낭만이나 무인도에 갖힌 자의 탈출을 위한 투지같은 것을 다루고 있지 않다. <로빈슨 크로소>를 패러디한 이 작품은 시작하자 마자 곧이어 합리적 가치관의 소유자 주인공 로빈슨의 표류로 시작된다. 주인공 로빈슨은 섬에 표류했다는 것을 받아들이자 마자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만들려 시도한다.그가 만들려는 질서는 표류전 그가 받아들여왔던 서구의 과학적 합리적 사고의 세계였다. 로빈슨은 이성적 세계의 건설을 위해 나름대로 법을 만들고 나름대로 도량형을 제정한다.또 무인도안에서 신석기 혁명을 몰고 오듯이 가축을 사육하고 잉여생산물을 축적한다. 자연의 사물을 이성적 인간중심으로 재편하는 것.바로 이성적 인간이 숭고히 여기는 가치관이다.로빈슨은 이에 따라 태평양의 그 무인도를 '스페란차'라는 자신의 왕국으로 꾸며간다.

 물론 원천적으로 소통의 대상이 없었던 로빈슨의 세계건설에 장애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원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가장 큰 장애는 로빈슨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회의적 사고 였다. 미셀 투르니에는 진흙탕이라는 회의의 블랙홀을 만들어내었다.주인공 로빈슨은 수시로 진흙탕으로 추락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눌러야만한다. 하지만 로빈슨의 타나토스는 섬과의 육체적 합치라는 조금은 기이한 방식의 결합을 통해 극복된다. 그리고 프라이데이-방드르디의 출현을 맞게 된다.

로빈슨은 방드르디를 노예로 삼는다.기본적으로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당연시 여기던 당시의 서구적 가치관에 비추어 로빈슨의 인종주의적 가치는 자연스럽다.로빈슨은 방드르디를 교육하고 발전시키려하지만 그다지 쉽지 않다.오히려 자연과 동화되는 방드르디에게 묘한 질투를 느끼게 된다.작가는 로빈슨과 방드르디를 통해  이성적 인간중심주의와 자연주의를 대칭시키고 있다.관리하고 계획하고 통제하는 이성과 전체를 거스르지 않으며 동화되는 자연의 대립이다.

결국 로빈슨은 자연에 동화되고 만다. 자신을 무인도로 부터 탈출시켜줄 배가 왔음에도 로빈슨은 섬에 남기로 결정한다.이미 로빈슨의 사고와 인식의 범위는 과거의 로빈슨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이를 두고 자연에 대한 이성의 패배라고 이야기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그러한 양분론자체가 이성적 사고가 만들어 놓는 패러독스이기 때문이다.작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의 문화에 대해 딴지를 걸고 있다.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만든 모든 기획과 역사와 문화가 부질없는 것이라는 뜻은 아닐게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는 것이고 고여있는 것은 썩기마련이다. 특히 식민지 근대를 경험하고 개발독재의 드라이브를 몸속 깊숙이 반도체칲으로 내장해 온 우리에게 과학적 사고와 이를 바탕으로 한 발전 이데올로기는 질문이 필요없는 정언명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가끔은 발전이란 이름의 몰상식과 비이성조차도 이성과 합리의 이름으로 남용되고 있다. 이제는 이러한 사고에 메스를 대야만 할 때이다. 모든 사상이나 생각은 당시에는 절대적 가치로 보일 수 있으나 긴 역사 속에 잠깐 등장하고 또 바톤을 넘겨주는 것이다.우리가 믿는 이 과학적 합리성의 세계 역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면 또 퇴장할 것이다.이러한 때에 작가는 우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대기처럼 우리의식과 행동의 공기가 되고 있는 서구적 합리성, 인간중심적 사고, 자연에 대한 배제 등에 대해 다시 한번 성찰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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