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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과 황금별 - 세계문학 8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원복 옮김 / 종문화사 / 200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괴테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부친 "마왕"을 듣고 있다.
가수가 마왕,아버지,아들,그리고 해설까지 1인 4역을 맡아서 노래를 해야한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가수의 목소리 연출을 주의깊게 들어야 재미있는 곡이된다. 시의 내용과 연주는 음산하다.처음부터 시작되는 말발굽 소리.셋 잇단 음표의 연탄으로 추운겨울 벌판을 급하게 달려가는 아버지와 아이.말의 질주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마왕이 아이를 부른다. "귀여운 아가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내가 너와 함께 놀아줄께. 수많은 꽃들이 가득하고 나의 어머니는 황금 가운을 많이 가지고 있단다."... " 아버지, 아버지 마왕이 나에게 약속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
<마왕과 황금별>은 미셀 투르니에게게 1970년 공쿠르 상을 안겨준 소설이다. 투르니에의 이 소설은 문명과 원시,신성과 세속, 소유와 희생, 역사와 신화라는 대립각의 상관 관계를 2차세계 대전이라는 장을 통해 신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나간다. 주인공 아벨 티포주는 어려서부터 소위 '왕따'를 당한다.하지만 그의 내적인 침잠은 운명적 예지 능력으로 발전하게 된다.거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중학교 시절 친구 네스트로이다. 이 둘의 관계와 대화는 소설 전반에 걸쳐 큰 틀로 작용한다. 네스트로는 주술적 마력을 가진 친구이다. 네스트로가 티포주에게 알려준 '성 크리스토프의 생애'는 이 소설에게 전이와 변용을 거치게 되지만 중심축으로서 기능한다. 성 크리스포트는 쉽게 말하자면 악당짓을 하다가 예수를 알게되고 자신을 희생하여 의를 이룬 사람이다.친구 네스트로는 왕따인 티포주를 무등태우며 성 크리스포트식 '짊어지기'의 의미를 인식한다.티포주는 네스트로가 학교에서 불타죽은 이후 십여년이 지나 그의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짊어진다' 의 의미를 육화한다.
"짊어진다" 는 것은 결국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한 존재에 대한 무게감을 온전히 수용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투르니에는 이 "짊어진다"는 행위를 단순한 순교적 희생으로만 파악하고 있진 않은 듯 하다. "짊어진다"는 행위에 선행되는 것은 사실 육체에 대한 소유권이다. 타인의 육체에 장악력을 바탕으로 희생은 이루어진다. 티포주가 정비공장 시절 어린아이들을 응시하거나 사진을 찍는 행위 등은 관음증적인 소유욕을 의미한다. 그의 순수한 존재에 대한 과도한 애착은 후에 인간사냥꾼이란 변용된 형태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 소설 사건의 진행과 공간의 변화가 역사적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형이 예상되는 티포주가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거나 비둘기 사육병에서 포로수용소로 옮겨진다거나 포로신분에 칼테보른의 모집담당관이 된다거나 하는..... 이 일련의 사건들은 우연에 가깝다. 하지만 티포주는 이것이 전부 상징적인 작용에 의한 운명의 전이라고 생각한다. 티포주가 가진 성향중에 하나는 일상에서 부딪치는 사건들이나 현상을 계시나 상징,기호로 읽는 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의 한글판 제목인 <마왕과 황금별>의 직접적인 의미는 이탄지에서 발굴된 미라이다. 티포주는 진흙속에서 수천년을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으며 시간과 함께 존재해온 미라의 존재에 존경을 품는다.이 마왕의 모습은 결국 소설 끝부문에서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상징으로 이해된다. 로민텐 숲속의 아지트 '캐나다'가 아우슈비츠의 보물창고 '캐나다'로 의미가 전복되는 것등등 이 소설에 나오는 사건들은 이중적 상징으로 볼 수 있다.하나는 그 사건 자체가 담고 있는 의미성이 신화에 영향을 받은 상징이다. 두번째는 소설 속에서 모든 사건들이 다음에 올 사건들에 대한 계시이며 또 다른 상징적 복선이 된다. 티포주의 날것에 대한 애착은 변용된 상징으로 오발사고로 죽은 어린아이의 사체에 대한 애정으로 전이된다.또 정비공장 시절 어린아이에 대한 애착은 나폴라의 집단 숙소에 널부러져 자고 있는 소년대원들에 대한 응시나 아이들과의 목욕을 통한 정화과정으로 바뀐다.
티포주가 식인귀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독일 사령관 괴링과의 사냥에서 이다. 이 소설 속에서 사슴은 존엄성을 가진 인간일 수 도 있고 또 문명일 수도 있다. 나치스의 마왕은 집단 학살과 도륙을 통해 이 문명파괴에 쾌락을 느낀다.티포주는 자신보다 더한 식인귀가 있음을 알고 놀란다. 티포주가 뒤에 본인도 모르는 사이 조력하게 되는 나치즘의 폭력성은 티포주를 정화시키기 위한 시련의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예수의 순교에 있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고통이 그런 역할을 하듯이 말이다. 티포주의 경우는 그 결과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운명의 힘이란 불가역성에 의존한다.그는 자신이 칼테보른의 식인귀로 불리운다는 것을 소문을 통해 듣는다.괴테의 시에 나오는 영상이 그대로 인용된다.티포주는 아이들을 사냥하여 나치의 국가주의에 희생양을 만드는 제사장이 된 것이다. 이 소설이 단지 신화의 재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소설의 양상을 띠는 것은 신화와 상징을 통한 파시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로민테른의 숲속에서 칼테보른 나폴라의 소년교육대까지 나치즘이 사회에 갖는 식인귀적인 속성이 상징적인 은유를 통해 드러난다.
나치즘에 간접적인 조응자로써 티포주의 정화과정은 에프라임이라는 한 소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소년은 유대인으로 성경에 의한 예언적 힘을 믿는다.티포주는 이탄지의 마왕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자신의 '짊어지는'행위의 종착역이 거의 다 이르렀음을 안다. 소련군의 공격이 이어지고 티포주는 소년의 순진함이 피로 얼룩진 세상에 대한 유일한 희망이라 믿으며 갈대숲의 마왕처럼 아이를 짊어진다.소설 속 티포주의 삶은 이 정화과정을 통해 예언이 현실화되는 자기충족성을 얻게된다.
<마왕과 황금별> 책 뒷표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20세기 전쟁문학 가운데 부동의 위치에 선 최고 걸작. 보통 우리나라에서 '전쟁문학' 하면 리얼리즘 작품을 떠올린다.하지만 신화와 종교,현실과 환상이 이렇게 잘 직조된 작품을 만나고 보면 생각이 바뀐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아벨 티포주를 생각하면 이미 고인이 된 안소니 퀸이 그 역에 어울렷을 것 같다. 안소니 퀸이 또 다른 전쟁문학의 대표작 게오르규의 <25시>에서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일까? 안소니 퀸을 스크린에 불러올 방법은 이젠 없겠지만 머릿속에서 <마왕과 황금별>의 아벨 티포주와 <25시>의 주인공 모리츠의 마지막 웃음 장면이 오버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