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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소설을 다 읽었다.몰입하게 하는 소설이다.사건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실거린다.또 사건의 흐름은 상하좌우에서 사정없이 뺨을 때리는 미친 봄바람같다.작가는 질퍽거리는 내면여행 타령에는 시간을 쓸 틈이 없어보인다. 숨이 벅차다.그나마 친철한 작가는 스스로 변사 역할을 맡아 헐떡거리는 독자들을 잠시 쉬어가게끔 해준다. 등장인물들은 신체변형을 이루어낸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이다.마치 조엘 피터 위트킨의 <머이브리지의 대역>이란 사진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그러면서도 소설속 주인공들은 현실에 비릿한 숨결을 내뱉고 있다.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현실 속에 있지만 신화나 전설속에서나 나옴직한 인물들이다. 인물들은 모두 '욕망'이란 공통된 상징으로 수렴된다. 인물 자체가 가진 외형적 특징은 최근 한국 소설에서 그다지 만나 본적 없는 설정이라 독특한 즐거움이 있다.
.... 뱀같이 작은 눈에 쥐의 형상을 한 노파,거대한 양물을 가진 반편이 도련님,살이 방바닥을 덮어버린 걱정,여성에서 남성으로 변해버리는 금복,둘이면서 하나인 쌍둥이 써커스단 자매,수백킬로를 넘는 벙어리 춘희...그외에도 또 있다.죽을 때까지 비린내를 버리지 못하는 생선장수,얼굴의 반을 잃고 파괴를 정체성으로 삼는 철가면,수만마리의 벌꿀을 몰고다니는 야수같은 노파의 딸....
이 인물들이 서로 촘촘한 관계를 맺고 소설을 이끌어 나간다.기묘한 이야기이다.하지만 읽다보면 뭔가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뭔가 속고 있다는 혐의가 내 피해의식 때문일까? 그런데 다시금 양보하고 생각해봐도 허용의 범위 안에서 속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원래 소설이란게 그럴싸한 이야기로 사람을 속이는 행위이니 이런 속임을 당한 듯한 느낌은 소설의 미덕에 대한 칭찬일 수 도 있다.하지만 또하나의 혐의가 있다.평론가들도 뒤에서 말한 장르의 혼성모방이다.작가 스스로도 수많은 장르의 수혜를 입었다고 밝히고 있으니 결코 나의 피해의식이 허황된 것 만은 아니다.영화로도 제작된 적 있는 안정효의 <헐리웃 키드의 생애>를 떠올려 보자.주인공의 친구 임병석 말이다.어린 시절 부터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한다.주인공에게 영화적 헤게모니를 빼앗기지도 않는다.폐인이 다 된 그가 건넨 시나리오.각종 평단에서 최고의 영화라고 추켜세운다.주인공은 그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찜찜한 감정을 없앨 수 없다.결국 찾아낸것은 임병석이 어린시절 보았던 여러 영화들을 조금씩 짜집기를 했다는 것이다.'태양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뭐 어쩔것인가'가 대량복제 시대의 예술이 가진 자족적 한계이고 감상자의 슬픈 운명이라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시선으로 받아들인다.
먼저 기묘한 인물들의 설정을 한번 떠올려본다. 그로테스크한 일본영화를 보는 듯하다.평론가들은 전설과 신화속 인물을 거론한다.하지만 작가가 영화에 더 깊이 경도되어 있는 사람임을 미루어 볼 때 오히려 영화 속의 신체변형적 인물들에 혐의를 두고 싶다. 노파와 딸의 원색적인 야생성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속 마을과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오래된 원한이 원초적 욕망과 결함되어 마치 귀혼이 들린 듯한 강렬한 이미지를 생성해낸다.책 말미에 어떤 평론가는 인물을 시대 상징으로 읽는다.읽는 거야 서로 지마음이니까 뭐라 할 건 없지만 인물을 중심으로 전근대(노파)-근대(금복)-탈근대(춘희)로 구획짓는 것은 진짜 선무당 사람잡는 짜?是甄?작가 역시 어느 정도 인정은 하면서도 특유의 웃음으로 '그럼 재미없지 않나요..'라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대답한 것 같다. 쌍둥이 자매는 어떠한가.둘 이면서도 하나인 캐릭터는 정신분석학에서 뭐라는 지 모르겠으나 영화의 스릴러 영화의 주요소재이다.쌍둥이는 아니지만 히치콕의 유명한 영화<싸이코>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와 정체성을 공유한다.쌍둥이 자매 역시 책 말미로 오면서 언니가 동생이고 동생이 언니이고 또 언니가 언니이고 동생이 동생인 상태로 평생을 살아 왔음이 밝혀진다.그렇다고 무슨 엽기적 행각을 펼친건 아니니 이상한 시선으로 볼 필요야 없다. 주인공 춘희는 조엘 피트 위트킨의 사진속 주인공보다는 훨씬 근육질의 통뼈였을 것이나 작가가 말한 '거대한 것의 비극'이라는 점에서는 정서적 동일성을 같는다.영화 <빅 피쉬>에서 주인공이 동굴에서 끌어낸 거인의 뒷 모습.평생 주인공의 친구가 되준 그 거대하면서 슬픈 표정은 춘희의 얼굴과 오버랩된다.춘희의 영원한 친구인 코끼리까지 더불어 생각해본다.우리 영화 <오아시스>의 뇌성마비지체아-아마 문소리가 연기했던-의 상상속에 코끼리가 등장한다.그러다 보니 데이빗 린치의 <엘리펀트 맨>까지 생각이 미친다.선천적 기형으로 서커스단에서 일하며 거대한덩치로 인해 코끼라라 불리우는 사람. 물론 이 모든 생각은 짧은 지식을 이것 저것 섞어놓은 가당치 않은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이 또 빚지고 있는 것은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이다.먼저 소설의 배경이 되는 평대-남발안을 떠올려본다.근대화의 공간으로 수많은 욕망이 서로 교차한다.또 현실과 신화.산 자와 죽은 자가 자연스럽게 공존한다.현실에 있는 공간인지 현실 속에 고립된 신화의 공간인지 알 수 없다.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의 중심무대인 마콘도가 그러했다.새롭게 철길이 들어서고 근대적 욕망들이 모여들지만 그곳은 전설과 미신이 공존한다.오히려 그것들이 현실에 힘을 작용하여 변화를 주도한다.후안 롤포의 <빼드로 파라모>의 공간 꼬말라는 어떠한가.아예 산자와 죽은자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공간이다. 이 소설 속 평대라는 공간은 남미 소설의 공간에 비해 신화성은 떨어진다.그렇기때문에 현실 속 인물들의 실제적 갈등과 욕망의 충돌이 실제감있게 들어설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작가의 시나리오 작가 경험은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의 합에 주도면밀하다.이 소설의 구성 역시 드라마나 시나리오의 구성에서 혜택을 입었다.어느 한 사람 헛되이 등장하지 않고 평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딱 아귀가 맞는다.잘 만든 영화가 그렇듯이.이걸 구성의 힘이라고 한다.소설이 이런 드라마적 아귀맞춤에 순응해야 하는 가는 읽는 사람마다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오히려 작위적이고 진부하다고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하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이런 딱떨어지는 맞춤이 가진 매력을 모른채 하긴 어렵다.
작가는 소설<고래>가 '거대한 것의 슬픔'이라는 모티브에서 출발했다고 한다.우연히 마주친 덩치 큰 여고생이 준 이미지였다고 한다.언젠가 나 역시 거대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작아 보이는 모순적인 감정이었다.소설 속 고래는 푸른 바다에서 떠밀려 나와 자신의 내장까지 바닥에 흩어내며 놓여있다.주인공 금복이 그렇게 거부하고자 했던 죽음의 이미지이다.죽음에서 벗어나려는 삶의 의지는 욕망이란 형태로 현실에서 구현된다.구전 소설에서 나옴직한 성공과 몰락,그리고 춘희로 이어지는 삶. 개망초로 상징되는 죽음은 춘희라는 순수를 통해 정화된다.그녀가 쌓아 놓았던 석양을 머금은 붉은 벽돌 처럼말이다.
좋은 소설이면서도 무언가 불안하게 만드는 소설이다.기묘한 여운이 작품과 작가에게 남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