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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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다 읽었다.몰입하게 하는 소설이다.사건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실거린다.또 사건의 흐름은 상하좌우에서 사정없이 뺨을 때리는 미친 봄바람같다.작가는 질퍽거리는 내면여행 타령에는 시간을 쓸 틈이 없어보인다. 숨이 벅차다.그나마 친철한 작가는 스스로 변사 역할을 맡아 헐떡거리는 독자들을 잠시 쉬어가게끔 해준다. 등장인물들은 신체변형을 이루어낸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이다.마치 조엘 피터 위트킨의 <머이브리지의 대역>이란 사진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그러면서도 소설속 주인공들은 현실에 비릿한 숨결을 내뱉고 있다.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현실 속에 있지만 신화나 전설속에서나 나옴직한 인물들이다. 인물들은 모두 '욕망'이란  공통된 상징으로 수렴된다. 인물 자체가 가진 외형적 특징은 최근 한국 소설에서 그다지 만나 본적 없는 설정이라 독특한 즐거움이 있다.

 .... 뱀같이 작은 눈에 쥐의 형상을 한 노파,거대한 양물을 가진 반편이 도련님,살이 방바닥을 덮어버린 걱정,여성에서 남성으로 변해버리는 금복,둘이면서 하나인 쌍둥이 써커스단 자매,수백킬로를 넘는 벙어리 춘희...그외에도 또 있다.죽을 때까지 비린내를 버리지 못하는 생선장수,얼굴의 반을 잃고 파괴를 정체성으로 삼는 철가면,수만마리의 벌꿀을 몰고다니는 야수같은 노파의 딸....

이 인물들이 서로 촘촘한 관계를 맺고 소설을 이끌어 나간다.기묘한 이야기이다.하지만 읽다보면 뭔가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뭔가 속고 있다는 혐의가 내 피해의식 때문일까? 그런데 다시금 양보하고 생각해봐도 허용의 범위 안에서 속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원래 소설이란게 그럴싸한 이야기로 사람을 속이는 행위이니 이런 속임을 당한 듯한 느낌은 소설의 미덕에 대한 칭찬일 수 도 있다.하지만 또하나의 혐의가 있다.평론가들도 뒤에서 말한 장르의 혼성모방이다.작가 스스로도 수많은 장르의 수혜를 입었다고 밝히고 있으니 결코 나의 피해의식이 허황된 것 만은 아니다.영화로도 제작된 적 있는 안정효의 <헐리웃 키드의 생애>를 떠올려 보자.주인공의 친구 임병석 말이다.어린 시절 부터 영화에 관한 모든 것을 수집한다.주인공에게 영화적 헤게모니를 빼앗기지도 않는다.폐인이 다 된 그가 건넨 시나리오.각종 평단에서 최고의 영화라고 추켜세운다.주인공은 그런 인기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찜찜한 감정을 없앨 수 없다.결국 찾아낸것은 임병석이 어린시절 보았던 여러 영화들을 조금씩 짜집기를 했다는 것이다.'태양아래 새로운 것이 없으니 뭐 어쩔것인가'가 대량복제 시대의 예술이 가진 자족적 한계이고 감상자의 슬픈 운명이라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시선으로 받아들인다.

먼저 기묘한 인물들의 설정을 한번 떠올려본다. 그로테스크한 일본영화를 보는 듯하다.평론가들은 전설과 신화속 인물을 거론한다.하지만 작가가 영화에 더 깊이 경도되어 있는 사람임을 미루어 볼 때 오히려 영화 속의 신체변형적 인물들에 혐의를 두고 싶다. 노파와 딸의 원색적인 야생성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나라야마 부시코>속 마을과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오래된 원한이 원초적 욕망과 결함되어 마치 귀혼이 들린 듯한 강렬한 이미지를 생성해낸다.책 말미에 어떤 평론가는 인물을 시대 상징으로 읽는다.읽는 거야 서로 지마음이니까 뭐라 할 건 없지만 인물을 중심으로 전근대(노파)-근대(금복)-탈근대(춘희)로 구획짓는 것은 진짜 선무당 사람잡는 짜?是甄?작가 역시 어느 정도 인정은 하면서도 특유의 웃음으로 '그럼 재미없지 않나요..'라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대답한 것 같다. 쌍둥이 자매는 어떠한가.둘 이면서도 하나인 캐릭터는 정신분석학에서 뭐라는 지 모르겠으나 영화의 스릴러 영화의 주요소재이다.쌍둥이는 아니지만 히치콕의 유명한 영화<싸이코>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와 정체성을 공유한다.쌍둥이 자매 역시 책 말미로 오면서 언니가 동생이고 동생이 언니이고 또 언니가 언니이고 동생이 동생인 상태로 평생을 살아 왔음이 밝혀진다.그렇다고 무슨 엽기적 행각을 펼친건 아니니 이상한 시선으로 볼 필요야 없다. 주인공 춘희는 조엘 피트 위트킨의 사진속 주인공보다는 훨씬 근육질의 통뼈였을 것이나 작가가 말한 '거대한 것의 비극'이라는 점에서는 정서적 동일성을 같는다.영화 <빅 피쉬>에서 주인공이 동굴에서 끌어낸 거인의 뒷 모습.평생 주인공의 친구가 되준 그 거대하면서 슬픈 표정은 춘희의 얼굴과 오버랩된다.춘희의 영원한 친구인 코끼리까지 더불어 생각해본다.우리 영화 <오아시스>의 뇌성마비지체아-아마 문소리가 연기했던-의 상상속에 코끼리가 등장한다.그러다 보니 데이빗 린치의 <엘리펀트 맨>까지 생각이 미친다.선천적 기형으로 서커스단에서 일하며 거대한덩치로 인해 코끼라라 불리우는 사람. 물론 이 모든 생각은 짧은 지식을 이것 저것 섞어놓은 가당치 않은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이 또 빚지고 있는 것은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이다.먼저 소설의 배경이 되는 평대-남발안을 떠올려본다.근대화의 공간으로 수많은 욕망이 서로 교차한다.또 현실과 신화.산 자와 죽은 자가 자연스럽게 공존한다.현실에 있는 공간인지 현실 속에 고립된 신화의 공간인지 알 수 없다.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의 중심무대인 마콘도가 그러했다.새롭게 철길이 들어서고 근대적 욕망들이 모여들지만 그곳은 전설과 미신이 공존한다.오히려 그것들이 현실에 힘을 작용하여 변화를 주도한다.후안 롤포의 <빼드로 파라모>의 공간 꼬말라는 어떠한가.아예 산자와 죽은자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공간이다. 이 소설 속 평대라는 공간은 남미 소설의 공간에 비해 신화성은 떨어진다.그렇기때문에 현실 속 인물들의 실제적 갈등과 욕망의 충돌이 실제감있게 들어설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작가의 시나리오 작가 경험은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의 합에 주도면밀하다.이 소설의 구성 역시 드라마나 시나리오의 구성에서 혜택을 입었다.어느 한 사람 헛되이 등장하지 않고 평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딱 아귀가 맞는다.잘 만든 영화가 그렇듯이.이걸 구성의 힘이라고 한다.소설이 이런 드라마적 아귀맞춤에 순응해야 하는 가는 읽는 사람마다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오히려 작위적이고 진부하다고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하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이런 딱떨어지는 맞춤이 가진 매력을 모른채 하긴 어렵다.

작가는 소설<고래>가 '거대한 것의 슬픔'이라는 모티브에서 출발했다고 한다.우연히 마주친 덩치 큰 여고생이 준 이미지였다고 한다.언젠가 나 역시 거대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작아 보이는 모순적인 감정이었다.소설 속 고래는 푸른 바다에서 떠밀려 나와 자신의 내장까지 바닥에 흩어내며 놓여있다.주인공 금복이 그렇게 거부하고자 했던 죽음의 이미지이다.죽음에서 벗어나려는 삶의 의지는 욕망이란 형태로 현실에서 구현된다.구전 소설에서 나옴직한 성공과 몰락,그리고 춘희로 이어지는 삶. 개망초로 상징되는 죽음은 춘희라는 순수를 통해 정화된다.그녀가 쌓아 놓았던 석양을 머금은 붉은 벽돌 처럼말이다.

좋은 소설이면서도 무언가 불안하게 만드는 소설이다.기묘한 여운이 작품과 작가에게 남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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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2-25 11:10   좋아요 0 | URL
와~굉장하네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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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월령가'라고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세시풍속과 시기별 농사일을 노래 형식으로 만든 노래이다. "정월이라....어쩌구 저쩌구...달도 밝고...어쩌구..."   뭐 그렇다. 10년도 훨씬 지난일이니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탓 하지는 마시라. 분필 맞아가며 배웠던 추억이 떠올라 도저히 참을 수다 하시는 그런 분들을 위해 알려드린다.

  " 손가락 쫙악 펴서 인터넷 검색창에 '농가 월령가' 를 치세요."

"달싸쵸"(우리 와이프가 그렇게 불렀다. 똑똑한 친구같으니..) 이 책의 형식은 '농가월령가'를 그대도 빼어박았다. 머리가 유달리 비상한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아...12장으로 구성되었군" 하신다. 그럼에도 꼭 확인하고 싶으시다. (원래 포커판에서도 지는 패를 들고도 꼭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은 책을 사서 펴 보면된다. 그리고 펼친 김에 읽으면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니 이 아니 좋을 쏘냐. '농가월령가'가 반복되는 세시풍속을 1년 12달로 나누었다면 '달싸쵸'는 한 사람의 출생, 성장, 죽음의 기록을 12단락으로 나눈다. 거기에 각 장은 맛있는 요리로 시작된다.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레서피... 주인공 티타의 가문에 전수되어 온 멕시코 전통 요리가 주재료이다.티타 가문의 이야기가 얇게 저린 부재료로 쓰인다. 이 두 이야기가 때론 강한 불에 때론 옅은 훈제 연기에 데워져서 '달싸쵸'라는 멋진 요리 하나가 완성된다. 물론 남미 특유의 에로틱한 정서와 마술적 리얼리즘의 세계가 향긋한 향신료로 미식가를 감동시킨다.

앞 문단을 다 읽기 귀찮은 분을 위한 공식: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멕시코 요리 + 티타가문의 가족사 + 티타의 사랑+ 섹스+ 마술적 리얼리즘+페미니즘 + x(x= 읽는 독자가 마음껏 추가해도 되는 미지수)

이 소설은 원래 영화를 만들려고 기획되었다고 한다. 결국 작가의 남편을 통해서 영상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그런 선입견때문인지 소설의 줄거리와 형식이 헐리우드 영화구조를 닮아 있다. 선악의 구조가  명확하다. 마마 엘레나를 중심으로 한 전통가치를 수호하는 세력과 티타와 그녀의 큰 언니로 대표되는 새로운 가치 세계의 대립이 간단명료한 이분법으로 나뉘어 있다. 불행하게도 마마 엘레나는 이사벨 아엔데의 <영원의 집>에 나오는 가부장적 아버지처럼 살아 생전 가치체계의 변화를 겪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의 딸 로사우라를 통해 그 가치가 이어져 간다.오히려 현실성이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이 구세대의 가치관은 죽음이란 형태로 소멸해 간다. 이 과정이 현실적이긴 하지만 조금은 판에 박힌 듯 하다. 물론 믿음직한 남미의 딸 답게 저자는 마술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들 삶의 변화를 형상화한다. 로사우라의 희안한 신체왜곡,마마 엘레나의 죽음과 그 영혼의 재생,죽은 나차의 영혼의 등장 등등.결론 역시 에브리 바디 해피로 끝난다.물론 이게 맘에 안드는 건 아니다. 녹차 아이스크림으로 후식을 한 것 처럼 깔끔하게 떨어진다. 읽는 독자입장에서는 뭔가 덜 닥고 나온 것같은 것 보다야 낫다. 마치 비데하고 뜨뜻한 바람으로 엉덩이 드라이 한것 같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음식과 성의 결합이다. 영화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의 작품을 처음 봤을때 " 음식과 성의 결합"이란 단어가 생경했다. 지금도 별반 달라지진 않았다. 식욕과 성욕이 둘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조금 통속적 용어를 써서 "먹는다"(이거 아주 귀에 거슬리지만 ..이런 말들을 남자 애들이 ›?때문에 리얼리티를 위해 쓴다) 는 말이 주는 반페미니즘적 공통어 외엔 떠오르는게 없었다.사실 아직도 음식과 성이 어떠한 알레고리로 결합되는지 잘 이해하고 있진 못하다.오히려 이 소설에도 등장하지만 어떤 향기가 최음의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그게 어떠한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지 알 수는 없으나.내 상상력 부족인지 아니면 인문학적 지식의 부족인지 알 수 없지만 내게 음식은 음식이고 성은 성이다.^^ (뭔가 좀 더 아시는 분은 멋지게 설명해달라.) 또 한가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요리에 난 전혀 관심이 없다.이유는 무슨 요리인지 본적도 없고 재료를 소개해도  머릿속에 그려지지가 않으니 좀 답답할 뿐이다.물론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신기하다.별개의 음식들이 모여서 제3의 맛을 만들어내다니.거기에 그럴싸한 장식까지 갖추어지면 요리는 눈과 입을 동시에 즐겁게 해주는 아트가된다.드라마 대장금을 봐도 이영애 만큼 멋지게 나오는게 수랏상에 오르는 음식들 아니던가.내가 남미 요리를 한 번도 먹어본적 없다는게 아쉬운 뿐이다.

남미 소설들을 그다지 많이 봤다고 할 수는 없다.하지만 이름난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한두편 쯤은 본 것같다.(보르헤스는 아직 노려보고만 있다.아직 내 내공으로는) 아직 까지 남미 작가들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그들의 소설에는 삶에 묻어 있는 역사가 있다.또 산자와 죽은자가 동시에 공존하는 세상이 있다.이 책에는 거기에 더하여 향긋한 요리의 향기와 한 숨 놓게 하는 행복한 결말이 있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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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2-22 19:03   좋아요 0 | URL
멋진 리뷰네요^^
 
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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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라니까 근방에 있는 환자(?)들이 무슨 신앙 간증서인지 안다. 나 원 참..행복하신 분들...이런 착각을 하는 분들께 표지의 담배 꼬나문 친구가 답을 한다.'메롱' 이라고. (특정 종교에 누가 되는 말을 하면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되긴 힘들다.^^; 그래도 ^^)

젊은 작가 이기호는 소설 읽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메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작가는 기존의 소설이 가진 서사나 영혼의 울림을 위한 모종의 심각함,인위적으로 영롱한 표현을 위한 작가의 뼈빠지는 노력에 고개를 돌린다.마치 역사의 광풍 중 고갱이만을 겪으며 살아왔다는 듯 술자리에서 후배세대들에게 자기 과시와 자기위안을 동시에 부풀려대는 투쟁가 세대의 '침튀김'도 이 작가에겐 없다.물론 과거로 부터 유산을 많이 수혜받지 않았다고 늘 신선한 것은 아니다.단절은 새로운 건축이 바탕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법이다.작가는 각 단편마다 새로운 문체나 전달형식을 통해서 새로운 작가의 도래를 알린다.

우선 <최순덕 성령충만기>의 장점은 읽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이 책은 1년가야 책 한두권 안 읽는 책 알레르기 환자들에게도 그냥 툭 건네주기에 부담없을 정도다.책 보는데 습관을 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읽는 행위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진다.그러므로 장편보다는 단편,복잡하고 관념적인 서사보다는 사건이나 에피소드중심,우울한 정서보다는 밝고 딱 떨어지는 경쾌함을 선호한다.물론 이건 내 개인적으로 책 안보는 사람에게 책선물할 때 기준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시비를 걸면 할 말은 없다. 이 책의 문학성을 폄훼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에서 <최순덕 성령충만기>라는 단편은 위의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흔히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사람을 '이야기꾼'이라고 한다.우리 소설가중에서 가장 대표적 이야기꾼이라 하면 성석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최순덕 성령충만기>로 작가 이기호 역시 이야기꾼의 그룹에 명함을 하나 파게 되었다.그러니 당연히 기존의 맹주들과 비교되는 것은 수순일 지도 모른다. 가장 많은 비교는 역시 성석제와의 비교일 것이다.내가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도 아니니 딱 잡아 어떤 부분이 같고 다르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개인적인 느낌 정도를 언급할 수 있을 성 싶다.

우선 둘 다 소재를 잡고 해학적으로 상황과 인물을 연출하는데는 탁월하다고 생각한다.이 두 작가 모두 소설의 소재를 사회에서 소외된 인물들 낮은 곳에서 엉뚱함을 발휘하는 사람들로 선정한다.그리고 이 들의 행위와 주변 관계를 통해 인간들이 가진 가식과 욕망의 추리함,세태의 허무맹랑함을 해학적으로 풀이한다. 차이가 있다면 성석제의 인물들이 조금더 현실성을 갖는 다는 것이다.이기호의 인물들 역시 현실에 바탕을 둔 듯하다.하지만 그의 글이 갖는 비현실적 상황 설정(<머리칼전언><백미러사나이>)과 허구임을,즉 소설임을-드러내는 문체(<버니><최순덕성령충만기><햄릿포에버>로 인해 주인공이 갖는 현실과의 붙박이성이 조금 떨어져보이는 것이 사실이다.소설의 형식면에서는 많은 작품집을 낸 성석제와 이기호를 비교한다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을 성 싶다.하지만 보편적 시각으로 봤을 때 성석제가 보수적인 형태를 띤다고 보인다.이기호의 경우 특히 이 첫작품집에서 여러가지 시도를 한다. 첫 작품<버니>는 랩 체라고 해야 할 것 같다.랩의 라임을 구사하 듯이 보도방 삼촌이 된 주인공과 보도방 출신 가수 순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한 장이 넘어 갈 때마다 랩의 후렴구 처럼 동일한 대사가 반복된다. 랩의 라임을 만드는 방법은 가장 중요한 것이 단어의 운율이다.대개 동일 음운의 반복을 기본으로 친다.그렇다 보니 <버니>를 읽는 사람들은 랩을 하듯이 리듬감을 가지고 읽게 된다.<버니>의 경우는 음악만 붙인다면 장편의 노래 가사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랩의 정서와 랩에서 사용되는 단어와 라임의 구성이 훌륭하다.<최순덕 성령충만기>는 과거 영한판 성경책처럼 이단 구분 형식과 각절명 넘버링을 하고 있다.이런 형식은 클라스 후이징의 <책벌레>라는 소설에서 한번 본 적이 있는 듯 하다.거기에 문체 역시 성경에서 쓰는 의고체를 쓰고 있어서 복음서의 패러디 인상을 강하게 한다.

내용적으로 살펴보면 이 책은 총8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다.단편들은 성격상 크게 둘로 나뉜다.문체적 실험과 해학성을 높인 글과 마치 박상우의 소설과 같은 느낌을 주는 환상/그로테스크가 살아 있는 소설들이다.(<햄릭><머리칼전언><발밑으로...>) 둘 다 매력이 넘치긴 하지만 아무래도 전자의 이미지가 선명하여 후자쪽이 눌리는 듯 하다.허나 긍정적인 측면을 보자면 작가가 다룰 수 있는 소설의 영역과 주제의 범위가 한정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가능성으로 비춰진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본 단편은<버니><햄릿포에버><백미러사나이>등이다.요즘 시의성으로 본다면 박정희 대통령과 연계성이 있는 <백미러사나이>가 인상적이다.박대통령 장례기간에 생긴 상처가 박대통령의 눈이된다.주인공은 박대통령의 힘으로 평탄한 인생을 누려간다.하지만 결국 자신의 눈을 침범하려는 과거의 눈과 대결하게 된다.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도 밝힌 그의 편벽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작가는 주인공의 얼치기 운동권 참여를 통해 당시 운동권 내부의 얕음에 대해 비웃음고 있다.하지만 중심적인 풍자는 결국 아직도 자신의 눈이 아니라 박대통령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뒤통수에 달린눈에 의지해 역사를 과거로 돌리려는 사람들에게 작가로써 통렬한 풍자의 칼날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 박대통령에게 자신의 눈을 맡겨버린 뒤로 뛰는 주인공 이시봉을 공원이나 약수터에서 뒤로 뛰는 노인들에 빗댓건은 중의적으로 의미심장하다.

결론적으로 사족하나 덧붙이자.오랜만에 즐거운 소설,한 번에 쭈욱 읽어버릴 수 있는 소설을 만났다.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신인으로서의 신선함 감각과 풍자정신에 조금 더 깊은 내공을 만들 수 있길 바란다.뛰어난 감각만으로도 물론 성공적인 작가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하지만 이런 멋진 해학과 풍자정신이 더 깊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삶의 부조리함을 흩고 올라온다면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가군에 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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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2-12 17:47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오랫만이예요.
리뷰 제목이 넘 재미있어요."담배 꼬나문 표지 폼하고는..."
정말 "메롱"하고 있는 것 같네요.ㅋㅋ
Thanks to 하고 갈께요.
 
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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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파이란.....1) 밀가루에 버터등을 넣을 섞어 반죽한 뒤 과일,잼 등을 넣어 만든 요리.

                 2) 원지름으로 원둘레를 나눈 비,원주율 ...3.141592.......

                 3)^^ ..... 이거 적다가 생각난 영화 <파이란> 의 여자 주인공:

      요즘 이 책의 인기가 상종가를 구하고 있다.그래서 그런지 업데이트 되는 리뷰의 숫자도 봄날 낙숫물 떨어지는  속도로 빨라진다.당연히 좋은 리뷰들도 눈에 많이 띈다. 좋은 리뷰가 많은 탓에 한 글자 더 보태려니 머쓱하다.머쓱함은 곧바로  장난끼로 이어진다.(아...편도선이 부어서 목이 아프네.침 먹어가는 소리가 통증의 예령같다.)  위의 3가지 (파이란 도 포함)와 소설 <파이 이야기>의 공통점은 뭐가 있을까?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해본다. 암기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각종 연상법을 떠올려도 그다지 쉽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에라...이럴 때는 이현령비현령 해도 되는 단어 하나 걸어 놓고 조립식 완구 맞추듯 우격다짐으로 밀어넣으면 된다.

역시 만만하니 " 삶 " 이다. 삶은 계란도 되고 삶은 고구마도 되고 어떤 사람은 라면도 삶아 먹는데...영화<원나잇 스텐드>에 보면 에이즈로 죽어가는 친구가 웨슬리 스나입스에게 그런다." 삶은 오렌지"라고 ...그렇다면 삶이 '파이'가 된다고 문제가 될 건 뭐 있는가? 단 삶이 삶기에도 용이하고 쓰기에도 편리하지만 진짜 살아가기에는 어렵다는게 문제라면 문제겠지.

 과자 파이도 삶이다.왜냐하면 이것 저것 섞어서 반죽하기 때문이다.우리네 삶이란게 원하는대로 마음 맞는 일만 발생하진 않는다.설령 사이가 안좋아도 밀가루와 사과쨈이 섞여서 버무러져야할 때가 있다.좋은 파이가 될려면.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소설의 주인공 파이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사랑스러웠을까? 기회가 닿는다면 물속에 빠뜨리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랬다간 파커의 레프트훅 한방에 생을 달리했겠지.주인공 파이가 호랑이를 다루는 방법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애초에 그 관계는 생존을 위한 훈련이었다.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호랑이와의 쟁투가 없었다면 주인공은 이미 상어밥이 되어있을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상생의 정전치가 구명보트 안에서 이루어진다. 애플 파이에도 사과쨈과 밀가루의 비율이 상호의존적이어야 한다.사과쨈만 좋다고 쨈만 듬뿍바르면 달아서 한두조각 외에 먹기 힘들다. 파이의 생존 원칙 첫번째는 결국 상호의존성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한다.

원주율 파이도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삶과 같다. 원주율은 10에 12승까지 소숫점을 구했다고 하는데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우리의 삶도 계속된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은 또 그 삶을 이어가야한다. 줄초상이 난 집에서도 저녁 밥상은 올라와야한다. 깊은 슬픔과 충격속에서도 삶이 이어진다는게 가끔은 가당치않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땐 조상들의 말을 떠올려야 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

산 사람이 살아가면서 세상을 낙천적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는 나이가 하나둘 들어가며 깨우치고 있다. 예전에는 슬플때 세상이 끝난 듯 낙담하고 기쁠때 세상을 다 얻은 듯 사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마 꼭 그런 것 만은 아니었다.특히 어려운일이 닥쳤을 때 희망을 잃지 않고 낙천적으로 기다릴수 있는 사람은 가공할만한 내공을 가진 사람이다. 말이 쉽지 실제로 사람들은 작은일에 쉽게 좌절하고 웃음을 잃어버린다.하지만 소설 속 주인공 파이는 어떠한가. 하이브라이드 종교의 힘인지 생명보존의 열망때문인지 자신의 페이스를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하루를 새롭게 만들고 또 하루의 발전에 희망을 얻는 이러한 낙천의 힘은 파이를 구명보트에서 살려낸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영화<파이란>...허참...장난스럽게 써놓고 결국 이것에 답을 해야하다니.이런걸 자승자박이라고 한다. 이것도 삶이다. 정답은 주인공 최민식에게 놓여있다. 젊은날 연극판에서 드라마로 뛰어들어 아기돼지 "꾸숑"으로 각광을 받았다.연기력있고 장래가 유망한 배우의 등장으로 당시 신문들이 호들갑을 떨었다.하지만 그 이후 기대와는 달리 대중들에게서 조금씩 잊혀져 갔다.간간히 얼굴을 비추며 '아 ..캐릭터 있는 배우 최민식이..."하는 정도로 잊혀질 듯 말듯 미약하게 남아있었다. 하지만 송해성 감독은 그를 싱크대에 오줌누는 퇴역 건달로 캐스팅했다. 인간말종 퇴역 건달이 파이란의 편지를 보며 등대앞에서 울던 장면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아...눈물이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 극장의 천장을 쳐다봤던 기억이 새롭다. 영화<파이란>은 돌아온 터미네이터보다 더 멋지게 돌아온 배우 최민식의 제2의 전성기를 알리는 예포였다.결국 그 여세를 몰아 <올드보이>로 세상을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꼭 상이 중요한건 아니지만 깐인가 베니스인가에서 < 올드보이>가  감독상을 받지 못했다면 남우주연상은 당연했다고 한다. 뭐 그동네 규정이 그런건 아니겠지만 심사위원사이의 안배가 있었겠지. 누가 최민식의 전성기를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게 삶이다.( ...어처구니 없다구.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한다.근데 쭈욱 보고 나니 뭐 그럴싸 해보이기도 한다.그게 삶이지 뭐 어쩔것인가?^^)

이 소설이 영화로 제작된다고 한다.영화가 어쩌면 소설보다 더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파아란 바다와 흰 구명보트와 오렌지빛 호랭이...어흥과 빛깔의 대비가 아주 좋다.이 소설이 영화로 되기에 좋은 이유가 또 있다.읽어보신분은 다 들 아실 그 끝에 반전.헐리우드 영화에서 좋아하는 류의 반전이다.입이 좀 근질근질하는데 .... 스포일러가 되진 않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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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1-31 18:59   좋아요 0 | URL
호호, 너무 재밌네요.
이 책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영화 파이란, 최민식과 엮어내시다니, 참.^^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다 - 2000년 제31회 동인문학상 수상작품집
이문구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가끔은 너무 유명해서 선 뜻 손이 안가는 책이 있다.내게 <내몸은 너무 오래..> 가 그런 책 중에  하나였다.특히  00문학상 ,xx 문학상 수상작 처럼은 특정시기에 관심이 증폭되는 작품들은 더욱 그렇다. 이런 책들은 읽는 시기에 따라 몇가지 외부요인에 의한 감정들이 발생한다.우선 책이 작품상이 수상되기 전에 읽는 경우이다.먼저 자신의 책고르는 심미안에 대한 뿌듯함을 느낀다.그리고 무슨 상 수상작 같은 표나 상업적인 멘트가 없는 책을 가지고 있는데 대한 가당찮은 프라이드를 느낀다.다음으로 수상작이 선정된 후 읽을 때이다.우선 서점에서 수상작 벨트를 메고 있거나 빨간 딱지를 두르고 있을 때 한두번 넘겨본다.그리고 당대의 취향에  함께 승차하기 위해 얼른 집어든다.나름대로 책을 들고 지하철 타기에도 쑥스럽지 않다.또다른 감정은 가끔 삐닥선을 타고 싶은 마음에 발생한다.남들이 다 "이상문학상이래 동인문학상이래..." 이러면 괜시리 거기에 편승하고 싶어지지 않는다.이렇게 될 경우 이 책을 만나게 되는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 거기에 몇년의 시간이 흐르면 정말 다시 보기 힘들어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2004년 00 문학상의 수상작이 나왔는데 1999년 수상작을 들고 읽기란 그다지 쉽지 않다.

이문구의 <내 몸은....>은 2000년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이 체질개선을 하고 처음으로 선정한 작품이다. 나는 이 책을 수상작 선정되기 전에 사서 당시 애인-지금 부인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후 잊고 있었는데 결혼 이후 책들도 주인따라 섞이다 보니 책장에 이 책이 꽂혀있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의 첫장을 넘긴건 외국으로 나가는 비행기 안에서이다.지루한 비행시간 동안 이 책은 나를 충청도의 작은 마을로 데려갔다.몇장넘기지 않아 나는 어거지같은 나의 비딱선을 자책했다.  

어제는 마침 <인물현대사>라는 프로그램에서 이문구편이 나왔다.책도 다 읽은 마당에 관심이 가서 끝까지 보고 말았다. 이문구의 고향은 충남 보령이다.이문구의 소설에 나오는 쫀뜩한 사투리는 대개 충남 지역의 말이다.소설읽는 동안 나는 처가 식구들을 떠올렸다. 지역은 약간 다르지만 어쨋거나 자랑스런 충청인들로 구성된 처가식구들의 왁자지껄함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특히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연배가 비슷할 장인모님들을 소설 주인공에 대비시켜 그 언어를 연상하면 말의 맛이 그대로 살아났다. 동네 어귀에서  또는 상가집에서 교묘하게 말꼬리 이어가며 싸우는 이들의 모습은 글자로 만든 사람들의 형상이었다. 진짜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도 소설 속 인물들이 나누는 대사를 따라가면 그 장면들과 그 분위기들을 그대로 그려볼 수 있다. 문단의 거목이라는 칭호가 아까지 않은 이문구 선생의 내공덕이 아닐까 한다.

소설가 김영현이 이문구를 평하며 민중의 해학성으로 인해 어려운 시기에도 비관주의로 떨어지지 않았다라고 했다. 이 소설에서도 문장 문장 사이에 넘쳐나는 해학성은 마치 마당극을 펼쳐놓은 듯 하다. 오피스텔촌 작가들의 건조한 웃음이나 재즈카페의 고독을 논하는 젊은 작가들의 뚝뚝 떨어지는 퍼질러진 낭만성과도 크나 큰 거리를 둔다. 이문구의 글은 바로 옆에서 막걸리 마시고 손으로 김치 뜯어먹으며 나눈 이야기들이 바로 문자로 변해버린 살아있는 글이다. 파닥이는 것이 생선만이 아니라면 이문구가 구사하는 사투리도 파닥이는 채소요 펄떡이는 과일이다. 언젠가 신문지상에서 이윤기와 어떤 평론가가 문학에 나타난 사투리를 두고 논쟁을 펼친적이 있다.평론가의 말은 우리 문학작품에 근거를 알수 없는 사투리나 비속어들이 지나치게 난무한다는 지적이었다.이윤기는 반대편에서 논박하였는데...경상도 사람인 이윤기가 한 말. "속닥하다"를 표준어로 고치면 진짜 그 맛이 안난다는 것이었다.나 역시 이윤기의 의견에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공문서나 방송등에서야 그렇다 쳐도 문학작품에서 까지 그런것 신경쓰면 뭐로 글쓰란 말인지...

이 책에서 이문구는 민중의 해학성을 바탕으로 세태풍자의 변을 늘어놓는다.정계를 비판하고 농업정책에 대해 꾸짖고 천박한 자본주의에 대해 욕지거리를 해댄다. 조금 작위적인 모습도 없는 것은 아니다.장광설을 늘어놓는 주인공들을 보자면 충분히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꾸 작가의 모습이 비친다. 꼭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의도가 과한건 아닌가 하는 정도의 비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문구가 글을 쓰게 된 것은 집안내력으로 부터 오는 감시로 인해 살아날 수 있는 길이 작가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불행한 가족사는 우리 역사의  안타까운 부분의 축소판이다.하지만 독자의 이기적인 입장에서는 그 불행이 거대한 밑거름이 되어 문학작품으로 세상에 큰 감동을 주었으니 전화위복이라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이문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다고 한다.그가 이념적으로 양분된 문학계에서 양측모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의 이러한 신념 덕이었을 것이다.

이미 고인이된 이문구 선생. 그의 새로운 작품을 이젠 만날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시간과 함께 고전이 되어 아무 시간에 아무에게나 읽힐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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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5-01-29 12:28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어제 TV<현대 인물사>끝부분 밝에 못 봤습니다. 아쉽더군요. <관촌수필> 아주 오래 전에 읽어었는데...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이 책 한번 읽고 싶군요.^^

로드무비 2005-01-29 15:32   좋아요 0 | URL
술자리가 있으면 쟁반을 들고 안주를 나르는 사람,
마지막 탁자 행주질까지 하고서야 자리를 뜨는 사람 이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