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드팀전 (드팀전 서재) &gt; 문학</title><link>http://blog.aladin.co.kr/apple21/category/16894711</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그맘때가 올 것이다.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이 그 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</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07 Mar 2026 00:20:41 +0900</lastBuildDate><image><title>드팀전</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77882183398718.jpg</url><link>http://blog.aladin.co.kr/apple21/category/16894711</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드팀전</description></image><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누군가의 고요가 되어야 한다 - [고요는 어디 있나요]</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11440164</link><pubDate>Thu, 16 Jan 2020 17: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1144016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636617&TPaperId=1144016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2228/15/coveroff/k90263661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636617&TPaperId=1144016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고요는 어디 있나요</a><br/>하명희 지음 / 북치는소년 / 2019년 12월<br/></td></tr></table><br/>겨울의 풍경처럼 그윽한 소설이다.<br>소설 속 주인공들 사이에서 눈사람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br>문장 사이로 오름 위의 떠 있는 소슬한 달빛과 바다를 지나온 바람의 안부가 느껴진다.<br>고요는 어디 있는가?<br>그녀는 말한다.<br>"세상 구석구석에서 자기의 가장 좋은 것을 주고받는 그 잠깐이 모여 저녁의 고요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br>&nbsp;나는 그동안 고요를 홀로 있는 것과의 연계 속에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작가는 '관계'를 말한다. 현명하게도 그 관계가 생의 찰나라는 것 역시 놓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들이 주고 받는 생의 짧은 반짝임이 '고요'였고 '행복'이었으며 '생의 진짜 의미'다.그래서 하명희 작가의 소설 속에는 외롭거나 힘든 사람은 있지만 혼자 있는 사람은 없다.&nbsp;언 땅을 파던 노인도, 참새를 돌봐주는 예술가들도, 남의 찻잔을 오래 간직하고 있던 치매 노인도.하물며 눈사람마저도 함께 있다.<br>&nbsp;소설 속 고요가 나그네의 겨울처럼 쓸쓸하지 않은 이유는그녀의 생이 누군가의 편에 함께 서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여전히 무심하고 존재는 못처럼 녹이 슬어가기 마련이다.겨울의 심장을 만진 우리들의 손은 제대로 펴지도 못할 만큼 곱아 있다.하지만 '하수관을 폴짝 뛰어다니던' 그녀는 '보리차'를 끓인다.그녀의 손에서 짙은 프랑스 홍차향이 아니라 소박하고 훈훈한 향이 난다.<br>몇 몇 더 애정이 가는 작품은 있지만 하나 하나를 이야기하지는 않으련다.나는 하루에 한 두 장 씩 아껴 읽었다. 핸드폰으로 찍어 위아래로 빠르게 넘기는 사진이 아니라 필름 카메라로 찍어 인화한 사진을 넘겨보듯 말이다.한 장 한 장 글로 인화한 사진이 주는 여운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글이 그렇게 요구했다. 나는 그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br>언제부터인가 책 선물을 하지 않았다. 독서의 취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명희 작가의 책을 읽고 나니 저녁의 고요를 나누듯 책을 선물하고 싶어진다.꼭 이런 메모를 남기고 싶다."몰아보는 드라마처럼 다루지 말고 한 주를 기다리는 설렘으로 하루 하루 읽었으면 좋겠어요."<br>벚꽃을 기다리지 말고 눈사람이 사라지기 전에 읽기를 권한다. 믿어도 좋다.p.s) 지금부터는 사족이다.<br>&lt;고요는 어디 있나요?&gt;를 읽고 나서 나는 던컨 브라운의 Give me, take you를 계속 들었다. 노래와 닮았다.https://www.youtube.com/watch?v=CMylB85NsW0]]></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2228/15/cover150/k90263661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22281569</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존재의 골다공증은 흙 속으로 사라지고 - [내가 가장 착해질 때]</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5222338</link><pubDate>Sat, 19 Nov 2011 05: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522233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041024&TPaperId=522233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99/73/coveroff/899304102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3041024&TPaperId=522233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내가 가장 착해질 때</a><br/>서정홍 지음 / 나라말 / 2008년 04월<br/></td></tr></table><br/>인연이란&nbsp;늘 순간이다. 오늘 아침 강변을 걸으며 본&nbsp; 보라빛 작은 제비꽃...&nbsp; 경남 합천에 사는&nbsp; 농부 시인 서정홍을 먼 발치서&nbsp;보았다. 아이의 유치원에서 마련한 아버지 교실에서였다. 문장의 첫 단어를 한 두번 더듬는 그의 어투와&nbsp;58년 개띠의&nbsp;서리 맞은&nbsp;은빛 머리칼이&nbsp;생생하다.&nbsp; 리뷰는 결국 그&nbsp;소소한&nbsp;인연이 만든 것이다.&nbsp;&nbsp;&nbsp;&nbsp;&nbsp;
&nbsp;몸살 기운이 채 가시지&nbsp;&nbsp;않았지만 약속은 지켜야했다.&nbsp;첫째 아이 예찬이는 유치원 교실에서 놀았다. 아내랑 둘째 재원이랑 맨 뒷자리 앉은뱅이 의자에 앉았다. 농부 시인 서정홍은 아버지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자리는 머리털 나고 처음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nbsp; 그의 강의는 예상했던 '바람직한 아버지의 상' 과는 다른, 주로 생태주의적 가치에 대한 것이었다. 때로는 과격한 말로 때로는 웃음 섞인 말로, 땅과 자연, 이웃과 가치로운 삶의 문제를 자신의 귀농 경험과 섞어서&nbsp; 이야기했다.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대단한 각성도 없었다.&lt;녹색평론&gt; 한권만 펼쳐봐도 다 알 수 있는 이야기,&nbsp;머리로는 수 십번도 더 이해했던 이야기.&nbsp;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
&nbsp;말문이 트여 잠시도 쉬지 않는 둘째 재원이의 이야기를 듣다가 멀리서 온 농부의 이야기를 듣다가 하면서 두어시간이 지나갔다.<BR><BR>&nbsp;농부는 합천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타야 한다며 일어섰다. 양복 입은 아버지들도 하나 둘 자리를 떳다. 유치원 교무실에는&nbsp;나름 유명한 출판사에서 낸 산문집과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에서 낸 그의 시집이 조신하게 놓여 있었다. 7000원,5000원의 꼬리표를 달고서. 책 좋아하는 사람의 기본적 습성은 종이 냄새를 맡으면 표지라도 한번 보거나 최소한 한번 쯤 열어보는 시늉이라도 한다는 것이다. 책이라는 것에 대한&nbsp; 예의 같은 것. 개인적 습성에 더하여, 마지막 버스 놓칠까 시계를 훔쳐보던 가난한 농부에 대한 예의까지 겹쳣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nbsp; 시집&nbsp;&lt;내가 가장 착해질 때&gt;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왔다.&nbsp;&nbsp;<BR><BR>&nbsp;아이들을 재웠다.&nbsp;새로 들여온 시집을 아무데나 펼쳤다.&nbsp;<BR><BR>'아...' 글자 읽는다는 짐승의 오만함이여... '선생님, 그 정도는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구요' 라는 식의 그 잘난 벽이&nbsp;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nbsp;한 편 두 편 세 편. 시 하나 하나가&nbsp;가슴에 남는 스냅사진처럼,&nbsp;또는&nbsp;펑펑 울리지는 않지만 돌아와서 앉으면&nbsp;눈물&nbsp;고이게 하는 영화의 작은 장면들 같았다.&nbsp;&nbsp;벤야민식의 '충격'인 셈이다.&nbsp;충격이 반드시&nbsp;몰고오는 내면의 붕괴 역시도. 미학적으로 거창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nbsp;미력한 나머지&nbsp;책과 글 속에 깊이 허우적 거리고 있던 즈음이어서 강한 '환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좋은 인연이란&nbsp;이런 것이리라.&nbsp;<BR><BR>시집의 제목이기도 한&nbsp;&lt;내가 가장 착해질 때&gt;라는 시다.&nbsp;&nbsp;<BR><BR>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nbsp;&nbsp;<BR><BR>나는&nbsp;내가 착해지지 않는&nbsp;이유를 알게 된다. 언제 흙을 만지며 씨를 뿌려본 적이 있었지? 지난해 마지못해 나가서 흐지부지하다가만 한살림 공동 텃밭? 집에 기르던 작은 물고기의 주검들만해도 그렇다. 처음에는 고운 티슈에 싸서 아들과 함께 아파트 화단에 묻어주었다.'좋은데로 가세요'라고 기도하면서. 그런데&nbsp;십 여&nbsp;마리 보내고 나서는 이제 휴지에 싸서 예찬이 모르게 종량제 봉투에 넣는다. 하지만 아이들도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물고기의 죽음에는 관심을 보이지만 그 주검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는다. 그런 내가 도대체 '생명'에 대해 뭘 읽고, 뭘 느끼고, 뭘 알고 있다는거지?&nbsp;&nbsp;<BR><BR>&lt;이른 아침&gt;&nbsp;<BR><BR>감자밭 일구느라/괭이질을 하는데/땅속에서 개구리 한 마리/툭 튀어나왔습니다//&nbsp;<BR><BR>날카로운 괭이 날에 한쪽 다리가 끊어진 채 나를 쳐다봅니다.//&nbsp;<BR><BR>하던 일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nbsp;<BR><BR>하루 내내/ 밥도 먹히지 않았습니다./물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nbsp;&nbsp;&nbsp;<BR><BR>농부는 마을에서 청년 회장을 한다고 했다. 그 날도 부산까지 강의하러 가면 마을 어르신들이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십여가구 사는 산골에는 이웃이 119이고 응급대원이기 때문이란다. 지난 번에도 강의하러 멀리 간 사이 이웃의 나이 많은 어르신이 위급한 상황이 되서 아내 혼자 마산으로 창원으로 늦은 시간에 헤메었었다고. 농부는 자기에게 예수님과 부처님은 그 산골 마을에 사는 이웃집 할머니들이라고 했다. 평생을 가난과 시름 속에 살았고 온몸에 안아픈 구석이 없지만 또 해마다 봄이 되면 검정고무를 무릎에 대고 기어다니면서 씨를 뿌리는 사람들. 그의 시에는 그가 예수처럼 부처처럼 여기는 시골마을의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이&nbsp;많이 등장한다. '농사는 힙으로 짓는게 아니여 '라는 덕산 할아버지, 겨울 햇살 아래 낡은 포대를 기우는 인동할매,&nbsp;큰 병이 스무가지나 된다고 겁주는 의사의 말에&nbsp;찬조출연해준 서른가지의 병을 가지고도&nbsp;일한다는 수동할매, '낮에 죽더라도 자식들 퇴근하고 나서 알려주라던' 혼자 앉아서 돌아가신 생비량 할머니, 무 열뿌리 훔쳐간 도둑이 누군지 알아도 모른척 해주는 단성 할머니. 다 예수고 부처인데 농부가 어찌 그들의 단잠을 방해할 수 있겠는가. &nbsp;&nbsp;&nbsp;<BR><BR>&lt;완행버스 안에서&gt;&nbsp;<BR><BR>안의 장날, 완행버스 안에서/ 고사리 취나물 들고 이고/ 숨 가쁘게 올라온 샘골 할머니와/나는 같은 자리에 앉았습니다.&nbsp;<BR><BR>할머니는 앉자마자/ 금세 코를 골았습니다./나물 냄새보다 더 진한/ 땀 냄새와 함께/헝클어진 머리가/내 어깨에 닿았습니다.&nbsp;<BR><BR>봄나물 뜯느라/ 해보다 먼저 일어나고/ 언덕으로 무덤 사이로/ 이리저리 헤메고 다녔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내 어깨가 너무 작습니다.&nbsp;<BR><BR>할머니 단잠을 깨울까 봐/ 나는 숨조차 쉴 수 없습니다.<BR><BR>사랑?&nbsp;연대?&nbsp; 글로 배운 사랑은 '접촉'을 두려워한다. 모든 혐오는 접촉에 대한 혐오라는 말을 내가 이해하는 바는 그렇다. 그럴싸한 변명을 둘러대더라고&nbsp;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나도 역시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면 만질 수 있다. 예수가 문둥병자를 치료한게 사랑이&nbsp;아니라 예수가 그를 만지신게 사랑이다. 하지만 글로 배운 사랑은 만질 줄을 모른다.&nbsp;흙을 만지지 않아서 그런것이다. 햇빛을 만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nbsp;농부는 내게 계속 질책한다.&nbsp;&nbsp;<BR><BR>농부의 시집&lt;내가 가장 착해질때&gt;에는 그 외에도 가난 속에 반짝이던 아름다운 순간들, 또 아내와 가족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일기투의 평범한 문체로 쓴 글들이 여러편 실려있다. 가난한 집에 들어와 애지중지 모았던 상품권을 훔쳐간걸 보다가 모두 도둑의 편이 되어가는 가족들. 외식하기 전에 아이들 밥을 먹이고 나가던 아내,&nbsp;고열에 생사의 고비를 넘는 순간 통장에 모아놓은 3만 7천원을 양로원에 가져다 주라던 열살 무렵의 아들, 울며 불며 곡을 하다가도 언제그랫냐는 듯 향불과 조문객들 먹을거리를 챙기는 고모, 누가 버린 쌀을 가지고 강정을 만들어온 처제등등..&nbsp;<BR><BR>물론 가난한 날의 아름다운 추억과 살가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는 뼈골빠지게 살아도 힘들기만한 농민들의 모습이, 웃음을 잃지 않으려 하지만 한편으로 씁슬해질 수 밖에 없는 장면들이&nbsp;들어있다. 더 끌고 올라가면 생태문제나 농정 문제까지도 가지고 갈 수 있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다. 농부의 말마따나 쉬운 시이다. 하고싶은 말은 많겠지만&nbsp;농부는 그저 담담히 자신의 눈에 비친 바를&nbsp;자기의 언어로 풀어낼 뿐이다.&nbsp;강의 중에 몇차레에&nbsp;걸쳐 농부는 자신의 직업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이라고 했다.&nbsp;&nbsp;&nbsp;<BR><BR>&lt;농사일지2&gt;&nbsp;<BR><BR>"바쁜 논밭일 다 제쳐 놓고,일당 오만 원 짜리 산성 보수 작업하러 간 우리 신랑, 오늘 품삯 받아 오면 얼마나 좋을까"&nbsp;&nbsp;<BR><BR>&nbsp;지을 사람 없어서 내버려둔 산밭 개간하여, 고추 모종 함께 심던 희연이 엄마가 뜬금없이 던진 그 말에, 나뭇가지에 앉아 놀던 새들은 그 마음 아는 듯 울어댄다.&nbsp;<BR><BR>그렇지, 그렇고 말고. 농촌 살림살이에 돈 오만 원이&nbsp;뉘집 똥개 이름이 아니지, 그 돈이면 글자 배우고 싶다는 큰 딸&nbsp;희연이 공책도 사 주고, 안의 장날 고등어라도 몇 마리 사서 고된 일에 지친 신랑 돌아오면 저녁 밥상 구워 올릴 텐데......&nbsp;<BR><BR>&nbsp;희연이 엄마 소박한 꿈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노랑나비 너울너울 춤을 추고&nbsp;<BR><BR>&nbsp;아득한 이야기들도 있지만&nbsp; 시집 &lt;내가 가장 착해질때&gt;가&nbsp; 아름다운 것은&nbsp;'존재의 골다공증'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nbsp;도시의 이름난&nbsp;여류,남류 시인들, 비평가들과 그 친한 친구들이 남발해대는 뼈 숭숭 뚫린 시어들과는 굵기가 다르다. 마치&nbsp;장기간&nbsp;입원하고 나온 환자들 같은 시들이 칭송받는 시대가 아니던가?&nbsp; 존재의 심연을 헤메다 익사 직전 건져낸 시어들.그것들 중에도 분명 소의 정수리를 때린 것들이 있을게다. 하지만 농부의 시는 다르다. 마치 니체의 춤을 추는 현자처럼 태양 아래 춤을 춘다. 고추밭 사이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정자 나무 아래 이름도 모르고 먹는 팥빙수를 먹는다. 참꽃을 보다가 괭이자루 던지고 하루 퍼질러 앉아 쉬기도 하며 말이다.&nbsp;&nbsp;<BR><BR>&lt;모심는날&gt;&nbsp;<BR><BR>환갑 진갑 다 지난 밀양아지매/모심다가 흙 묻은 손 씻지도 않고/ 논두렁 가에서 오줌을 눈다&nbsp;<BR><BR>오줌 누는 소리/ 어찌나 시원하게 '들리는지/ 함께 모심던 아지매들/한바탕 웃어 대는데/밀양아지매/당당하게 한마디 내뱉는다.&nbsp;<BR><BR>"이년들아, 너거는 똥구녕도 없나? 웃기는 와 웃어 쌓노. 오줌만큼 좋은 거름이 어디 있다꼬."&nbsp;<BR><BR>논 개구리 한 마리가/ 밀양 아지매 하얀 엉덩이를/ 가만히 바라보는 한낮&nbsp;<BR><BR>산골 마을 다랑논에서 부르는/ 정겨운 노랫소리/ 봄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흘러가고....&nbsp;<BR><BR>나는 최근에 이렇게 아름답게 봄풍경을 묘사한 시를 보지 못했다. 봄바람처럼 시원하다.&nbsp;&nbsp;<BR><BR>이렇게 긴 리뷰를 쓰게 된 것도 결국 그 먼발치에서 본 인연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도의 수고로움은 좋은 시를 길러 주신 분에 대한 내 예의이다.&nbsp;&nbsp;<BR><BR>농부는 그의 시&lt;시를 읽다가&gt;에서 이렇게 말한다. '책방에서 사천 원 주고 산 오래된 시집 속에 배우고 깨칠 게 하도 많아 사만 원 주고 사도 아깝지 않겠구나 싶다. 그럴 때는, 문득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찾아온다. 그 마음 그대로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시인이 쓴 짧은 시 한 편 읽어 드리고 싶다' 라고 말이다.&nbsp;(농부는 김남주 시인의 '옛 마을을 지나며'를 인용한다.)<BR><BR>&nbsp;내가 농부 시인에게 다시 돌려드리고 싶은 말이다.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99/73/cover150/899304102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997324</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밤은 밤대로 저를 지키려고 사방을 꽉 잠가둔다 - [달콤한 내세]</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4643169</link><pubDate>Fri, 18 Mar 2011 10: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464316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90072&TPaperId=464316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84/14/coveroff/893749007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90072&TPaperId=464316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달콤한 내세</a><br/>러셀 뱅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br/></td></tr></table><br/>&nbsp;"저녁이 하는 일이란/ 천지간에 어둠을 깔아 놓은 일/ 그걸 거두려고 이튼 날의 아침해가 솟아오르기까지/ 밤은 밤대로 저를 지키려고 사방을 꽉 잠가둔다."&nbsp;
&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nbsp; 김명인,&lt;천지간&gt;중에서&nbsp;
상실은 사람을 부유(浮뜰 부<br/>㉠뜨다<br/>㉡떠다니다<br/>㉢가볍다<br/>">浮遊놀 유<br/>㉠놀다<br/>㉡즐기다<br/>㉢떠돌다<br/>">遊)하게 만든다.&nbsp;&nbsp;상실을 경험한 사람은&nbsp;언제 터질지 모를 거대한 고무풍선에 몸을 맡긴 것과 유사하다.&nbsp;대부분은 운명의 여신이 다른 대상을 찾아 우리를 시큰둥해하며 내려놓을 때까지&nbsp;묵묵히 올라탈 수&nbsp;밖에 없다. 그리고 삶의&nbsp;일정 부분은 운명의&nbsp;여신들의 몫이라는 것을 수용하기까지&nbsp;꽤나 많은&nbsp;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삶은&nbsp;다른 '너머' 를 만들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실을 얻기도 한다.&nbsp;하지만&nbsp;깨달음조차 우리의 인식과 실천에&nbsp;항구적인 항체를 만들지 못하는 것 같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매번 이름을&nbsp;바꾸어 달고 또 다른&nbsp;처방전을 요구하는&nbsp;변종 바이러스같다.&nbsp;
&nbsp;&nbsp;<BR>&nbsp; 아이들이 모여 산다는&nbsp;'달콤한 내세'는 없다.&nbsp;아니 역설적인 형태를 취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달콤한 내세'는 '쓰디쓴 현세'를 심장이 찟기는 통증만큼이나 강하게 인정하는 순간에 도착할 수 있는 상태이다.&nbsp;'젓과 꿀이 흐르는' 피안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천국'이니 '이데아'니 하는 류의 '내세' 따위는 없다.&nbsp;그것은 도착적이며 기만적인 환상이다. 삶 너머는 아무것도 없다. 그 너머의 것은 애써&nbsp;상상해보려해도&nbsp;불가지의 영역일뿐이다. 불가지의 영역은 헤아려서 안되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nbsp;그러면 뿌리 뽑힌 존재론적 조건에 대해 우리는 비극적 전망 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nbsp; 애초부터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에 충실히 비극적 삶이어야 할까?&nbsp;&nbsp;존재의&nbsp;조건이 존재의 양식에&nbsp;그대로 반영된다는 생각은&nbsp;즉물적이며 허무주의적이다. 우리는 오히려 부서진 채 -니체의 말처럼- 춤을 출 수 있다.&nbsp;&nbsp;&nbsp;&nbsp;<BR><BR><BR><BR>&nbsp;"우리 모두, 그러니까 나와 니콜, 사고에서 살아남은 아이들과 살아남지 못한 아이들. 우리 모두는 이제 완전히 다른 마을 사람들이 된 것 같았다. 우리는 달콤한 내세에서 외딴 마을을 구성하고 사는 것 같았다."&nbsp; 러셀뱅크스,&lt;달콤한 내세&gt; P299&nbsp;<BR><BR>&nbsp;&nbsp;&nbsp;눈 덮인 뉴욕 북부의 시골마을, 평소와 다름없던 그날, 아이들을 태운 버스가 추락한다. 다수의 아이들이 사망한다.&nbsp;(소설은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nbsp;사적 정의감인 '분노'로&nbsp;자신의 업을&nbsp;정당화하는 합리적인 변호사 미첼 스티븐슨. 그는 이 사건의 원인 규명과 배상을 위해 희생자들의 부모들을 만나러 다닌다.&nbsp;단순히 운전자의 과실이 아니라 도로의 상태나 안전 시설등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시 당국과 교육 당국에 막대한 배상을 목적으로 소송을 할 요량이다. 비교적 순탄하게&nbsp;소송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사고 생존자 니콜 버넬을 만난다.&nbsp;&nbsp;&nbsp;<BR><BR><BR><BR>&nbsp; 소설은 사건을 중심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동시에&nbsp;마을 공동체의 가려진 모습도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다.&nbsp;아톰 에고이안의 영화에서&nbsp;니콜은 마지막 대사를 통해 '각자의 규칙에 따라 살아가는' 이라는 방식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구분한다. 죽은 자들은 육체적으로, 그리고 영혼까지 이제 '다른 세계'의 마을 사람이 되었다. 각자의 '달콤한 내세' 속에 존재하게 된다.&nbsp;&nbsp;<BR><BR>그러나&nbsp;'삶과 죽음'을 이원론적으로 나눌 수는 없다. 우리라는 공통의 현존재들은 삶의 시작과 동시에 죽음을 부여안고 사는 존재들이다.&nbsp; 마을 공동체가 죽음을 조금의 잔여도 남기지 않고 삶의 한 부분으로 끌어 안고 가는 모습에서&nbsp;죽음을 삶의 일부라고 여기지만 결국은 타자의 것으로 인정해버리는 통속적인 깨달음의 것과는 다른 차원을 만난다. &nbsp;마을 공동체 전체와 그 구성원들이 죽음 자체를 삶의&nbsp;지워지지 않는 문신으로서, 존재의 기본적 전제로 안고 가는 것이다. 죽음의 뼈를 그대로 드리운 채 삶을 이행하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삶의 본질로서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한 것이다.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송이라는 법률적 절차를 통해 죽음의&nbsp;직간접 원인에 대해 대속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방식이 변호사 미첼의 것이었다. 하지만 소설은 그 반대방향을 향한다.&nbsp;&nbsp;<BR><BR>소설 속&nbsp;희생자의 유족이자 베트남 참전군인인 빌리 안셀이 사건 이후의 삶을 '베트남전'의 트라우마와 비유하는&nbsp;장면이 있다. 이것은 빌리 안셀의 개인적 경험에 의한 것이지만 결국 마을 전체에도 해당하는 것이다. 즉 마을 전체가 이제&nbsp;아이들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통해&nbsp;삶을 영위하는' 방식과 대면해야하는&nbsp;요청에&nbsp;맞닥드린 것이다.&nbsp;&nbsp;영화 속 아톰 에고이안은 이런 죽음을 통한 삶의 영위라는 과제를&nbsp;오래된 유럽의 구전설화인 '피리부는 사나이'를 통해 상기시킨다. 피리부는 사나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사라져 버린 아이들의 세계에 사는 마을의 사람들은 어떤 존재적 변화를 겪어내고 강요받은 삶과 대화할 것인가.&nbsp;&nbsp;<BR><BR>&nbsp;&nbsp;&nbsp;&nbsp;&nbsp;<BR>&nbsp;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은 평온한 마을 공동체의 이면과 삶의 다층적인 변부들을 보여준다.&nbsp; 우화적인 사회소설이 추구하는 추악한 공동체의 위선 같은 것과는&nbsp;크게 상관없다. 물론&nbsp;무탈한 마을 공동체 안에 도덕적인&nbsp;흠결 등이 있고 그것이 사건의 중대한 반전을 쥐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nbsp;소설이 마을이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도덕적 일탈을 고발하거나 집어내기 위해서 씌여진 것은 아님에 틀림없다.&nbsp;근친상간의 트라우마는 사건 진행의 숨은 열쇠이며&nbsp;사건의 방향을 변모시키는 매우 중대한 계기가 된다. 그것은 결국 사고 피해자인&nbsp;니콜과 돌로레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계기가&nbsp;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삶의 봉합과 새로운 지속을 위한 사건 전개상의 도구이지 그것이&nbsp;공동체의 도덕성과 숨겨진 개인의&nbsp;성적 음험함등을 고발하기 위한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nbsp;&nbsp;&nbsp;<BR><BR>소설 속에는 얼음길에 미끄러져 세상을 등진 아이들 말고도 사실 숨은 아이가 하나 더 있다. 변호사 미첼의 딸이다. 영화는&nbsp;소설에 비해 이 역할에 비중을 좀 더 많이 둔다. 그리하여 '변호사 미첼-딸/ 마을주민-희생된 아이들' 이라는 이중 구조가&nbsp;연결된다. &nbsp;영화 첫 장면도 변호사 미첼과&nbsp;딸의 대화부터 시작된다. 미첼의 딸 조이는 부모의 이혼,마약과 방탕한 생활 등으로 이미 부모와는 척을 지고 있는 상태다. 오로지 마약을 구매하기 위한 돈이 필요할때만 뉴욕의 변호사인 아빠에게 읍소한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조이의 어린 시절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비춰진다.&nbsp;영화 포스터의 스틸화면으로도 알려진 그 이미지이다. 미첼의 과거 회상 장면인 것 같기도 하고 지금처럼 뒤죽박죽이 되기 이전의 어떤 평화로운 상태에 대한 이미지인 것 같기도 하다. 아톰 에고이안은 아예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딸의 친구와의 비행기 속 만남이라는 씬을 설정하여 변호사 미첼이 또 다른 방식으로 딸아이를 '내세'로 보낸&nbsp;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게끔 한다. 소설과 영화 둘 다 딸의 HIV양성반응이라는 전화장면을&nbsp;통해 파국적이지만 단 한번의 기회가 될 수 있는 모종의 재회를 암시한다.&nbsp;<BR><BR>&nbsp;&nbsp;<BR><BR>&nbsp;앞서 이야기했던 영화 포스터로도 쓰인 평화로운 장면은 변호사 미첼의&nbsp; 인상적인 일화를 담고 있다. 앞으로 소설이나 영화를 보게될 사람들을 위해 일종의 예의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성 싶다. 그 일화 속에는&nbsp;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삶/죽음'&nbsp;에 대한 은유가 담겨있다.&nbsp;영화 속에서 버스가 추락하고 난 이후 다음에 등장하는 컷트도 바로 그 장면이다.&nbsp; 소설 속에서 미첼이 이야기 했던 그 경계선에서의 섬뜩한 '명쾌함'이란...참으로 ...(소설 속에만 이 '명쾌함'이란 단어가 나오는데...미첼이 들고 있던 소독한 면도날도&nbsp;어쩔 수 없는 '명쾌함'이란 단어가 주는 예리함보단 날카롭진 못했을 것이다. 거기서 가장 적절하며 필요했던 단어가 바로 그 '명쾌함'이었다니 그것을 찾아낸 작가에게&nbsp;경의를)&nbsp;이 책은 어쩌면 '죽음의 그 명쾌함'에 대한 역설적 오마주, 그 절대적 불가능성에 대한 오마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nbsp;&nbsp;&nbsp;<BR><BR>러셀 뱅크스의 &lt;달콤한 내세&gt;는 사실 아톰 에고이안의 영화&lt;달콤한 내세&gt;를 보고 난 이후 찾아 읽게 되었다.&nbsp;영화가 좋을 경우만 하는 짓이다. 세간의 평가처럼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영화였다. 러셀 뱅크스의 소설은&nbsp;사건의 진행과 주인공들의 사건 전후의 일상,그리고 사건과 관련된 내면의 움직임등을 각 장마다 다른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적으로 입체화한다. 반면 아톰 에고이안은 주로 미첼 변호사의 시선과 생존자의&nbsp;증언을 병치&nbsp;시키고 있다. 대신 효과적인 교차편집과 인서트편집을 통해 사건을 둘러싼&nbsp;내밀한 정서들을 표현한다.&nbsp;매체는 다르지만 둘 다 매우 뛰어난 스토리텔러들임에는 틀림없다.&nbsp;&nbsp;&nbsp;<BR><BR>&nbsp;&nbsp;죽음이나 죽음을 통한 상실은 매일&nbsp;분만실에서 신생아가 세상 빛을 보듯 발생한다.&nbsp;병원에서, 차도 위에서, 쓸쓸한 여관방에서.&nbsp;상실의 문턱을 넘어서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nbsp;또 영원히 함께 하기도&nbsp;마땅치 않다.&nbsp;애써 그것을 떼어내려하는 것도 작위적이며 또한 지나치게 그것에&nbsp;묻혀있어도 부자연스럽다. 결국 부서진채로 다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계속 물을 수 밖에 없다. 거대한 슬픔은 그런 질문을 정당화 해준다. 그리고 언젠가 행복이란 것은 결국 과거의 것을 쓸어담으며 오는 것은 아니라는 진부한 진실과 만날 때까지도,&nbsp;그리고 그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그 질문과 대면할 수 밖에 없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584/14/cover150/893749007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841412</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디테는 &lt;프레드릭&gt;이었을지도 몰라... - [영국 왕을 모셨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3170895</link><pubDate>Sun, 25 Oct 2009 06: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317089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7586&TPaperId=31708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19/86/coveroff/895460758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7586&TPaperId=317089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영국 왕을 모셨지</a><br/>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02월<br/></td></tr></table><br/>햇빛에 반짝이는 몽돌같은 소설이다.&#160;&#160;
동글 동글한 자갈돌들이 서로 부딪히며 까르륵 거리듯&#160;책장을 넘길 때 마다&#160;손 끝에 웃음이 묻는다. 그런데&#160;넘긴 손 끝에는 늘상&#160;조그마한 그을음이 따라 붙는다.&#160;까만색 그을음. 그렇다. &lt;영국왕을 모셨지&gt;는 몽돌처럼 '까맣게' 빛난다.&#160;&#160;'블랙 코미디'라고 하던가.&#160;그러나 차가운 금속성의 검은색은 아니다.&#160;&#160;비로드의&#160;검은 색이다.&#160;&#160;판소리에서 좋은 광대는 사람을 웃기다가 울리다가 쥐락 펴락한다. 좋은 블랙 코미디 작가도 이와 같다.&#160;쥐고 흔드는 면에서는 그 역시 광대이다.&#160;그들의 일광설을 따라&#160;들락 말락 하다보면 해는 어느 새 뉘엿 뉘엿 산너머로 떨어지는 법이다.&#160;보후밀 흐라발 역시 좋은 작가답게 그렇게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독자를 '쥐고 흔든다'.&#160;웃음의 스타카토와 한숨의 리타르탄도로 말이다.&#160;&#160;&#160;&#160;
&#160;주인공 디테는 꼬마라는 뜻이다. 견습 웨이터다.&#160;&#160;<br />
"명심해라! 넌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 하지만 또 명심해라. 넌 모든 걸 봐야하며 모든 걸 들어야 한다!"&#160;&#160;<br />
&#160;마치 구중궁궐 내명부에 들어간 신출내기 궁녀에게 상궁마님이 건네는 말 같다. 초보 웨이터 디테의 처지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전제 권력을 중심으로 탐욕과 음모가 넘실대는 궁중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후자는 돈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권력과 부의 이면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이다. 시골출신의 웨이터 보조 디테는 부자들의 삶을 보며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에 '돈'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 그에게 삶의 목표가 생긴 것이다. 디테가 바라보는 부자들은 좀 오묘한 인물들이다. 멋진 옷을 입고 멋진 여인들과 함께 멋진 요리를 먹지만 무료한 삶의 무언가를 채우기&#160;위해&#160;부질없는 재미나 싸움, 토론을 즐긴다. 그 모든 것이 '부자들의 취향'일&#160;뿐이다. 디테는&#160;티호타 호텔, 파리 호텔 등 조금씩 성격이 다른 호텔을 거쳐 가며 그들을 겪는다.&#160;거리의 여인들을 사서 관음의 쾌락만 즐기는 금융인들,&#160;근엄함을 잊어버리고 아이로 돌아가버리는 장군, 대통령 등등. 디테를 그들을 관찰하고 그 이야기만을 그대로 전할 뿐 다른 어떤 도덕적 판단을 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비춰지는 인물들은 그냥 한편의 오페라부파의 주인공들처럼 소동을 벌이고 또 언제그랬냐는 듯 돈을 지불하고 사라지는 사람들이다. 디테가 그리는 인물들 면면은 그 모두 줄이 달린 목각인형들 처럼 희화되어 있다.&#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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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디테는 '영국왕을 모셨던' 지배인 스크르지바네크의 지도 아래 제법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웨이터로 성장한다. 그리고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신 웨이터가 되기에 이른다. '영국왕'을 모셨던지 '이비니시아황제'를 모셨던지 그닥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자기 프라이드로 언급되는 일이지만 그건 오랜 경험의 축적에 대한 은유일 뿐이다. 디테의 경우도 실제 '아비시니아 황제'를 모신 경험적인 사건과 그가 '아비니시아 황제'를 모신 일의 경험적 가치,또는 의미론적인 가치에는 시차가 발생한다. 그런 면에서 디테는 더 많은 '아비니시아들'을 모시고 나서야 비로소 '황제를 모신 웨이터'로서의 '초라한 위용'이라는 역설적 위치에 다다르게 된다. 그건 오랜 풍파를 겪어온 사람이 가진 삶의 혜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160;&#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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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호텔 웨이터로서 세상의 부조리함과 부와 권력의 뒷모습들 바라봐오던 디테의 삶에도 이제 역사적 사건의 끼여들기 시작한다. 2차 세계대전의 암운이 체코에도 "드리운 것이다.&#160;그 동안의 희비극은 소동극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통과해야하는 힘없는 디테를 가학적인 상태로 던져놓는다. 디테는 우연히 민족주의적 체코 청년들에게 곤경을 겪는 리자라는 열성 나치당원을 돕다가 사랑에 빠진다. 그는 이제 친독 부역자가 된 셈이다. 작가는 이제 허구와 역사가 중첩되는 그로테스크한 희비극의 연출에 골몰하게 된다. 독일 신부 리자를 임신 시키기 위한 당국과의 합법적 교섭이 시작된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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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간호사 손이 어찌나 능숙한지 그녀는 몇 분 뒤에 정액 두 방울을 종이에 묻혀 들고 나갔다. 삼심분 뒤 내 정액은 아리안 여자의 질에 적합하며 수태를 시킬 수 있는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결과 독일 명예-혈통 보호청이 내가 독일 혈통의 아리안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며 도장을 힘있게 찍어 결혼허가서를 건네주었다. 반면에 체코 애국자들은 같은 도장을 그렇게 꾹 눌러 사형에 처해졌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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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후에 디테가 공산 체코정부로 기소당한 주된 이유는 '독일 신부의 임신'과 관련이 있다. 디테 역시 자신의 죄가 직접적으로 나치에 부역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160;역사적 상황을 이용하거나 외면한 죄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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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사는 여기 이 사람들과 또 다른 네명을 판결에 따라 총살한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었다. 매일 죄 없는 새로운 많은 사람들이....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손에&#160;성기를 잡고 다른 손으로 책상에 놓인 포르노 사진을 넘기고 있었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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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굳이 이런 인용을 한 것은 디테가 겪게 되는 불운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 책에는 처음부터 성적인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애로틱하다기 보다는 귀엽거나 혹은 위의 예처럼 아이러니하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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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독일은 패망한다. 그러면 리자와 디테는 이제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 사이에 유전적으로 우수하며 과학적으로 개량된 혈통의 아이는 어떻게 될까?&#160; 하여간 내게 이 희비극의 결말 부문이 주는 청각적 자극과 그로 인한 상상력은 나중에도 이 책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진격해 오는 탱크 소리 '쿵쿵쿵'과 끊임 없이 못 박는 소리 '쿵쿵쿵' 이라니... 솔직히 나는 그 청각적 효과가 너무도 강해서 이 책을 덮고 난 이후에도 책이 '쿵쿵쿵'거리는 것 같았다. 작가도 디테도 못질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을 과감하게 삭제해 버렸기 때문에...그 침묵의 효과가&#160;청각적 이미지를&#160;더 긴 잔향으로 남긴다.&#160;이정도 까지만...&#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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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물론 이 책에서 좀 어색한 부분도 있다. 인물 개인의 심경변화에 중요한 사건이 되는 부자들의 수용소 '비둘기'&#160;장면-일종의 존재론적인 발견-이나 벌목하는 곳에서 만난 불문과 교수와의 만남-일종의 인문학적&#160;발견-&#160;같은 것들은 극적 전환 대목이 된다. 그런 두 번의 계기 후에&#160;변하게 된 디테의 모습은&#160;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무언가 좀 급작스러운 것 같다. 또는 인생을 깨달은 자들이 닿게 되는 예의 '수도승'과도 같은 삶이&#160;통상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배경 마저 눈 덮인 인적 없는&#160; 산골이 되다 보니 더욱 그렇다.&#160;호사스로운 호텔리어의 삶과 눈 덮인 수도자의 삶이 극적 대비를 이루게 되어 효과적이기는 하다만 말이다.&#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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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소설은&#160;희극과 비극을 종횡무진하지만 작가는 결말부분에서 눈덮인 겨울 산속에 인동초를 하나 피운다.&#160;설원을 뚫고 온 마을사람들말이다. 그들은 와서 별 일을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장면이 없었다면&#160;책장은 분명&#160;쓸쓸히 덮여 졌을 것이다.&#160;사람을 '겪어야','영접해야만' 만 했던 늙은 디테에게, '아비니시아황제'를 모셨던 바로 그 디테에게, 사람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160;흰 눈 처럼 쓸쓸하지만 그렇게 해피앤딩인 셈이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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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그런데 혹시&#160;사람들 떠난&#160;바닷가에서 한가롭게 햇빛쬐는 몽돌들, 그&#160;포옹 사이로 바닷물 빠지는 소리 들어 보셨나요?&#160;이 소설에서는 그런 소리가 납니다. ^ ^ ;&#160;&#160;
p.s) 제목에 나오는 '프레드릭'이 누구냐구요?&#160; 햇빛을 모으는 프레드릭이에요.&#160;엄마들은 많이 아실껄요.그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동화책 주인공이랍니다<br />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19/86/cover150/895460758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98682</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책을 불 태우는 사회는 사람도 불 태울 수 있다는..데자뷰 또는 실제 - [화씨 451]</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3105711</link><pubDate>Thu, 17 Sep 2009 18:1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310571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739084&TPaperId=310571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9/coveroff/898273908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739084&TPaperId=310571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화씨 451</a><br/>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03월<br/></td></tr></table><br/><br />
&lt;화씨 451&gt;의 세계는 평화롭다.&#160;'평화롭다'는 것이 핵심이다.모두 행복하다. 이게 핵심이다. 이 둘은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 가장 원하는 미래상이 아니던가. 여덞가지 어려움(불교에서 말하는 '팔고')의 세상 속에 고립무원으로 던져진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만큼 간절한 것이 어디있겠는가? 그래서 &lt;화씨 451&gt;의 세상은&#160;표면적으로 평화롭고 또 행복하다. &#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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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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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160;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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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좋은 평화와 행복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라는 질문이 봉쇄되고 억압되는 한에서만 만들어지는 위선적인 평화와 행복이기 때문이다.&#160;배부른 돼지는 용납되지만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권력에 의해 차단당한다. 의문을 갖는 행위, 다르게 생각하는 행위, 즉 철학하는 행위&#160;자체를 아예 막는데 디스토피아적 세계의&#160;묘미가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질문하지&#160;않는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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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수 몬태그에게 이웃집 사는 소녀 클라리세가 이런 말을 한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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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질문을 하면 그냥 생각 없이 금방 대답을 하시고, 대답을 생각해 보려고 걸음을 멈추거나 하시진 않았거든요." 그리고 뭔가 어리벙벙해하는 그에게&#160;사울이 바울되는(여기엔 이견이 있다.원래 두 이름을 동시에 썻다는) '사건' 이라 할 만한 질문을 던진다.&#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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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아저씬 &#160;행복하세요?"&#160; 몬태그는 비로소 존재와 세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원자화된 개인에서 타자에 대해,관계에 대해 비로소 생각하기 시작한다.&#160;그는 &lt;화씨 451&gt;이 시작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회의의 거미줄&#160;속에 있는 걸린 사람이된다.&#160;방화-기계로서의 몬태그는 책 전체에서 보자면 그다지 길게 나오지 않는다.&#160;그에게 존재에 대한 의심은 클라리세를 만나기 1년전 공원에서 만난 파버 노인과의 조우에서부터 내재해있었다.&#160;클라리세를 만난 후 1년전 기억이 환기된 것은 그 안에 이미 회의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소설의 흐름상&#160; '방화-기계' 몬태그에 대해 그다지 길게 할애할 필요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160;&#160;몬태그는 방화서에 배치된 로봇개(수배자 정보를 맹목적으로 쫓도록 만들어진 기계동물)에게&#160;불편함을 느끼며&#160;그 도구를 통해 '도구화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유비한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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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저놈(로봇개)에게 기억시켜 놓은 거라곤 그저 쫓고 사냥하고 죽이는 일뿐이지요. 저놈이 아는 게 그것뿐이라면 우리가 부끄러워 할 일입니다."&#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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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몬태그의 '흔들림'은 그래서 중요하다.이것은 일종의 '본원적 경험',즉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몬태그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킨 일은 클라리세의 실종과 분서 과정에서 책과 함께 분신한 어느 노파와 관련된 사건이다.&#160;이런 체험은 몬태그를 더 이상 주입된 세계에 머물 수 없게 만든다.&#160;&#160;한나 아렌트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무세계성'이 '사건'을 통해 '세계에 대한 자각'으로 변모한 것이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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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몬태그가 로봇개와의 유비를 통해 예시했듯이 &lt;화씨451&gt;의 세계는 '억압가설'에 토대를 두고 있다.&#160;권력 집단 내지는 권력의 중심 같은 것은 소설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푸코의 말처럼 권력은 그저 힘으로 관계속에 작용하고 있으며 어느 곳에나 임재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런 권력의 말단 대리인은 소설 속 갈등의 구현을 위해 존재한다. 많은 것을 알고 있음직한 방화서장 비티이다. 그런데 비티라는 캐릭터는 상당히 많은 부분이 신비에 쌓여 있다.&#160;내러티브적이라기 보다는 시적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영화적이라기 보다는 연극적 인물로 더 적합하다. 비티와 몬태그의 대화 장면들은 마치 헤롤드 핀터의 희곡 속 상황같다. 그가 각색한 영화&lt;추적&gt;속의 마이클 케인과 주드로의 대화장면 같기도하다. 소설 속에서는 노련하며 냉소적인 비티가 늘 이긴다.&#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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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물처럼 존재하는' 권력의 집행기구를&#160;찾긴 힘들어도&#160;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억압 구조를 찾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레이 브래드버리가 직조한 소설 속&#160;세상은 가시적인 두 개의 억압 장치 안에서 작동한다. 이 뒤에 권력 기구가 숨어있다. 먼저 하나는 거대 외연을 싸고 있는 '전쟁의 공포'이다.('전쟁'은 디스토피아 세계의 감초다.)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전쟁의 정치화' ,즉&#160;전쟁이 늘 낮은 구름 위에서 일상을 장악하고 있는 곳이 &lt;화씨451&gt;의 세계이다.&#160;폭격기가 수시로 굉음을 내며 하늘을 가르는 데도 도시 속 사람들은 무감각할 만큼 나른하다. 또다른 장치때문이다. 마치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을 구현한 듯한 것이 브래드버리가&#160;예견한 미래상이다.&#160;입체 벽멱 TV와 난무하는 정보 속에서&#160;사람들은 감각적인 쾌락 안에서만 살아갈 뿐이다. 인민의 아편&#160;TV가 되시는 것이다.(브래드버리는&#160;후기에 실린 인터뷰에서도 영화&lt;물랭루즈&gt;와 TV CF를 예로 들며&#160;0.5초의 짧은 컷트의 자기장 속에 빨려 들어가는 수동적 대중들의 비존재성을 지적하고 있다. ) 몬태그의 부인인 밀드레드는 전형적인 TV피플로 등장한다. 그녀에게 세계는 TV와의 매개없이는 불가능하다. 현대문명에 비판적인 영화감독들이 좋아하는 60년대 도시 외곽의 중산층 부인처럼 무미건조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그녀다. 그러면서도 행복해하고 이어질 드라마의 귀추에 생의 행복을 투사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녀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TV와 수면제를 빼놓고 그녀는 아무런 관계적 만족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브래드버리는 소설 초반부터 수면제라는 소품을 통해 그녀가 누리고 있다는 만족감이 사실은 왜곡된 형태임을 보여준다.(진정 행복한 사람은 수면제를 먹지 않는다.!!)&#160;&#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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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lt;화씨 451&gt;에서 브래드베리가 보여주는 미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은 사실 50년전의 것이다 보니 올드패션하다. 또한 구성이나 인물들의 관계에서도 무언가 성긴 구멍들이 있다.사실 SF소설을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스토리의 급진적 진행에 비해 얼개가 성긴 경우가&#160;종종 있어보인다. 예를 들어 악역으로 등장하는 비티 서장의 경우 해박한 그의 이야기로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캐릭터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160;그에 대한 전후 설명이 부족하다.( 연극 대본 작업에서 작가 역시 이부분을 다시 첨가한 것으로 알려져있다.)&#160; 올드패션한 설정도 살펴보자. 작가의 상상력 역시 그 시대의 범주 안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인정해야만 한다. 핵전쟁이 등장하고 불로 책을 소각하고, 헬기가 수색하고 하는 장면들은 완벽한 미래상이라기 보다는 가까운 실현가능성이 있는 사실성에 바탕을 둔 상상적인 글쓰기이다. 66년 프랑소와 트뤼포가 만든 영화처럼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오래된 미래'같은 미래상이다. 스티븐 다라폰트감독이 &lt;화씨 451&gt;을 영화화한다고 하는데 각색 과정에서 미래세계를 그린다면 이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아마 하늘로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소각 대상인 책은 종이 책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160;&#160;하지만 이것이 이 소설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브래드버리의 &lt;화씨 451&gt;은 &#160;미래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사실은&#160; 우화적으로 현실을 그리고 있는 SF 소설의 거대한 지류와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lt;화씨451&gt;에서 중요한 주제는 통제되는 미래상이라기 보다는 인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런 전체주의적 질서와 통제 권력의 억압, 그리고 그에 따라 왜곡되는&#160;인간성과 사회상의 측면이기 때문이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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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미래상에 대해서도 사실적인 의미에서 재미있는 요소들이 있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미디어에 대한 것을 좀 보자. 브래드베리는 '책의 소각'이 단지 물질적 소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현재의 우리도 몬태그처럼 책을&#160;물리적으로 태우고 있지는 않지만 '분서'행위를&#160;하는 문화 속에 있다는 말이다.&#160;예를 들어 세익스피어의 &lt;햄릿&gt;을 한 장으로 요약 정리할 수 태도&#160;, 그리고 그것을&#160;바쁜 세상에, 알아야 할 것 많은 세상에&#160;합리적이라고 믿는 태도,이 역시&#160;'분서'와 같은 것이다.결국 책의 그 내밀함과 접촉하여 소통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브래드버리가 당대의 다이제스트식 출판문화를 꼬집고 싶었던 듯 하다. 이는 악역으로 나오는 비티 서장의 입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된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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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햄릿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 드립니다.' 해서 보면 기껏해야&#160;한 페이지 정도 설명해 놓은 게 다가 되었지. 그러면서 광고엔 이렇게 나오고, 이제 당신은 모든 고전들을 완전히 통달할 수 있습니다. 읽으십시오!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알겠나? 보육원을 나와서 대학을 들어갔다가는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는 거네. 지난 5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사람들의 지적인&#160;문화형태라는 건 그런 식어었네"&#160;&#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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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TV는의 향응이다. 통제권력의 이데올로기적 장치구실을 하고 있다.&#160;소설에서 보여지는 TV 프로그램은 크게 쌍방향 소통형 프로그램과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조지 오웰의 &lt;1984&gt; 버전 텔레비젼보다 진일보한 형태라고 할까?) 하나는 린디와 이웃 집 여인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인데, 대략 추측컨데 시청자의 피드백이 반영되는 드라마 같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상상은 5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브래드버리의 상상력만큼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TV 실험들과 징후들은 한 두가지씨 보이곤 한다. 리얼리티 쇼는 몬태그의 추격씬을 생중계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마치 영화&lt;트로먼쇼&gt;의 야생버전처럼 어떤 에피소드 하나 정도를 생중계하는 방식은 요즘 기술로도 가능하다. 한때 미국에서 바람난 남편부인잡는 프로그램이 인기가 있었던 적이 있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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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베리는 전쟁을 통한 디스토피아의&#160;전체적인 붕괴를 새로운 희망의 전제조건으로 그린다. 지배집단에 대한&#160;대중적 저항의 가능성 자체가 미비한 상황 속에서 전면적 파괴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보인다. 마치 나치 독일의 철저한 패망 이후 재건이 가능했던 것 처럼 말이다. 이것 역시 브래드버리가 가진 한계의 한 측면이 될 것이다. 브래드버리가 새로운 미래의 맹아로 그린 '북피플들'은 제 때에 저항하지 못한 지식인들이 주류다. 그들에게는 후회와 미래에 대한 가능성만이 잔존할 뿐인다. 그런면에서 그들은 '분서'의 공모자는 아니어도&#160;협조자들인 셈이다. 지식인 파버의 자탄에서도 드러나듯이 '시대의 후퇴'를 방관했던 업은 결국&#160;그들에게도 돌아왔다. 브래드버리의 혜안 중에 뛰어난 점은 권력과 이 들이 서로를 간섭하지 않으며 병존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발본색원 자체는 애초 불가능하기 때문에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치시키는 편이 나았고 실기한 지식인 그룹들은 양팔을 잃은 장수처럼 소수의 유목민이 되어 세대 유전을 통한 지식의 전수만을 먼 미래를 위해 남겨둘 수 밖에 없는 수동적 존재로 남게 되었다.&#160;(어떤 중핵만 건드리지 않는 다면&#160;무엇과도 공존할 수 있는...') 지식인 파버와 방화수 몬태그의 저항을 위한 대화는&#160;통속적이긴 하지만 '지식인-대중'의 상호관계에 대한 브래드버리식의 비유다. 몬태그식의 '이성없는' 급진적 행동주의가 갖는 위험과 '행동없는' 관조적 이성주의가 갖는 문제를 거의 대놓고 보여준다. 물론 브래드버리식의 상호작용을 통한 변증법적 타협의 길도 슬쩍 흘린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놓고... 그렇다고 사회주의 소설처럼 구호조로 꺼내지는 않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미국적 세련됨이라고 해야하나..<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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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화씨451&gt;은 '분서'에 대한 이야기지만 사실 '분서될 수 없는' 책의 위대함에 대한 예찬이다. 우리에게 도서관만 있다면 다시 인류 문명을 세울 수 있다는 말처럼 인류의 위대한 지적 전통에 대한 브래드버리의 숨은 애정이 배어있다. 물론 인류는 도서관에 다 적혀있어도 같은 실수를 여러차레 반복할테지만 말이다.&#160;다시 영화화가 곧 된다고 하니 수 년 안에 스크린으로 만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br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9/cover150/898273908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20907</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네 이름을 말하라-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요 - [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3027399</link><pubDate>Thu, 13 Aug 2009 11: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302739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90159&TPaperId=302739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8/68/coveroff/s26203639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90159&TPaperId=302739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a><br/>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09월<br/></td></tr></table><br/>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네 목표는 그곳에 이르는 것이니/그러나 서두르지는 마라/ 비록 네 갈 길이 오래더라도/ 늙어져서 그 섬에 이르는 것이 더 나으니/ 길 위에서 너는 이미 풍요로워졌으니 이타가가 너를 풍요롭게 해 주길 기대하지 마라. ....&#160;콘스탄티노 카바피의 시&lt;이타카&gt;중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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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바피의 시는 &lt;오뒷세이아&gt;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또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언젠가 이 시를 보고 &lt;오뒷세이아&gt;라는 텍스트의 안팎이 이야기하는 것을 이처럼 잘 함축한 시도 드물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로이를 떠난 오뒷세우스가 이타케까지 돌아오는 데 20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내가 &lt;오뒷세이아&gt;를 다시 발견한 시간과도 거의 비슷하다. 이젠 말하기도 쑥스러운 나의 10대 시절에 이 책은 '기이한 모험집'이었다. 그러나 먼 바다를 돌다가 &#160;나이 40 줄에 이르러 보니, 지난 시절 상상력을 붇돋우던&#160;독성 강한&#160;기담은 예전만큼 강한 자극을 주지는&#160;않는다.&#160;그 대신&#160;남루해진 오뒷세우스에게서, 또는 신과 같은 오뒷세우스에게서&#160;삶의 그림자가 끌고온 향기들을 맡게 된다.&#160;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이 흥미롭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160;오래 묵힌 밀주처럼 진득하다. 두 번의 &lt;오뒷세이아&gt; 사이에 나는 아들에서 아버지가 되었고,-그것도 두 아이의,- 젊은 시절의 고민들을 채 해결하지도 못하고&#160;또 다른 시간이 만든 짐들만 어깨에 얹고 있다. 지난 시간이 가져다 준&#160;서당개&#160;생활에서&#160;주워들은 풍월들, '길 너머를 그리워하다' 결국 '길 위에서 죽고 말것'이라는 평범한 깨우침 정도를 얻었을까.&#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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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낯선거리에서 풍경의 원근법이 무너짐을 이야기한다. 거리감의 상실은 사물들을 2차원 도상 위로 올려놓기 때문에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낯선 도시에서 몇 개월 살아본 사람은 이런 경험을 이해할 것이다. 동서남북조차 모호하고 매일 가는 길인데도 무엇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 일주일 쯤 지나고 나면 비로서 사물들이 하나씩 독자적인 소리를 내고 한데 엉겨붙어 있던 사물들이 하나씩 자기 영토를 확인시켜준다. 같은 영화를 두번 이상 보면 이제 줄거리말고, 구성이나 음악,대사, 미장센들을 보게 되고 또 상징적 은유들을 찾아보게 된다. 그래서 사실 요즘은 새로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과거에 본 책들을 다시 한 번 더 읽을까 하는 생각도 문득 문득 든다.&#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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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은 &lt;오뒷세이아&gt;에서 가장 눈에 들어 온 것은 구성이다. 역자 해제에 의하면 &lt;일리아스&gt;,&lt;오뒷세이아&gt;는 '트로이 서사시권'의 8권 중 &#160;2번째,7번째 서사시에 해당한다. 하지만 다른 모든&#160;시들을 앞도할 만큼의 분량과 내용이다. 그만큼 중요하며 흥미롭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특히 이 서사시들은 구비전승 과정을 통해 내용적 풍부성이 확보된 것이 확실하다. 호메로스를 단일인물인지 집단의 총체적 인물이지 두고 논쟁이 있었다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일것이다. 그 사실이 어떻든 간에 &lt;오뒷세이아&gt;의 구성이 가진 '압축성과 입체성'은 '시대의 연마'를 거쳐서 이룩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 같다.&#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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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아리스토텔레스는 &lt;시학&gt; 23장에서&#160;호메로스의 우수성에&#160;대해 이렇게 말한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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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는 앞에서 말한 것을 되풀이하자면 이점에서 다른 시인들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그는 트로이 전쟁이 시작과 결말이 뚜렷이 존재하는 하나의 전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는 전체에서 한 부분만을 다루었으며 그 밖의 사건들은 그저 에피소드로 쓰고 있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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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뛰어난 점은 바로 단일한 사건을 중심으로 한 압축성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160;&lt;오뒷세이아&gt;를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는가?&#160; 생각보다 쉽다. '한 남자의 귀향이야기' 가 그것이다. 신의 미움을 받아 고생 고생하다가&#160;집에 돌아왔으나 다른 남자들이&#160;아내를 탐하고&#160;집안을 거덜내고 있다.&#160;계략을 짜서 이들을 처단한다.&#160;&lt;오뒷세이아&gt;가 이 내용이다.&#160;물론 각자의 에피소드들이 기발한 상상력으로 뇌를 자극하고 인간의 운명과 고난에 맞서는 용기로 감동을 자아내고는 있지만 이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160;이런&#160;드라마전개의 중심축에 탁월함을 부여하는 것이 구성의 입체성이 아닐까 싶다.&#160;시간의 도치와 압축. 영화용어로 치자면 플래쉬백의 적극적 활용으로 극적인 탄력을 높이는 것이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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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오뒷세이아&gt;는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면 된다. 하나는 처음부터 4권까지 텔레마코스이야기, 5권부터 13권까지 오뒷세우스의 귀향이야기 그리고 이하 이타케에서의 복수극이다. 4권까지 '텔레마토스 이야기' 에서는 오뒷세우스의 아들이 주인공인데 이를 통해 전후 사정들을 소개하고,또 미래의 갈등을 미리 보여준다.물론 오뒷세우스는 이때 바닷가에 있을테니 이를 전혀 모른다. 5권부터 오뒷세우스가 등장하는데, 시작은 신들의 회의로부터다.&#160;제우스가&#160;칼립소로 부터 오뒷세이아를 풀어주기로 결정하는 과정이 나오는데 오뒷세우스를 방해하는 포세이돈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이진다.이 장에서는&#160;모든 이야기가 명백히 3인칭 시점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시점은&#160;다음 장에서 바뀐다.&#160;&#160;6권은 이타케를 앞둔 마지막 도착지인 파이아케스족의 나라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160;영화편집으로 보자면&#160;텔라마코스의 씬과 거의 교차편집되는&#160;장으로 거의 동시간대 벌어진 일어거나 조금 후에 일어난 장면인 셈이다.&#160;이렇게 현재의 시간들을 교차하는 형태로 붙여놓으며 6권까지 현재 상태의 갈등요소들을 재현한다. 하나는 완성되지 못한 귀향, 그리고 고향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 오뒷세우스만 모르지 독자들은 이미 신탁의 내용을 통해 그가 고생끝에 이타케에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독자들을 극의 파국 직접까지 도입부에서 끌고와서 긴장감을 높여놓는 것이다. 그게 뭐가 대단하냐고? 그렇다. 지금봐선 요즘 TV드라마에서 초보작가나 연출가들도 쓸 수 있는 구성이다. 그런데 이런 구성이 기원전 8세기에 만들어졌다면-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고 이런 형태로의 완성은 아마 더 후가 아니었을까 싶긴하지만- 이 작가를 우리가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호메로스는&#160;오뒷세우스의 귀향을 앞두고 다시 서사시를 거꾸로 돌려서 회고하는 방식으로 향하는 전환점을 만든다.&#160; 7권부터 시작되는 오뒷세우스의 고난들이 그 이야기이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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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오뒷세우스는 이타케에 도착한다. 후반부의 복수극이 시작되면서 페렐로페의 구혼자들에게 마지막 한방을 먹이기 위한 잠행이 시작되는 것이다.&#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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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160;'복수극'에서도 호메로스는 '지연의 효과'도&#160;적극적으로사용한다. 마이클 티어노의 &lt;스토리텔링의 비밀&gt;에서는 &#160;알프레드 히치콕의 말을 이렇게 인용한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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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영화 속에서 테이블 밑에 있는 폭탄이 갑자기 터진다면 좋은 영화가 아니다." 즉 갑자기 복수가 시작되고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면 독자들이나 관객들은 멍해지는 것이다. 만약 오뒷세우스가 이타케에 도착해서 아이기스를 두른 아테네의 도움으로 일거에 구혼자들을 제거해버렸다면 어떻게 될까? &lt;오뒷세이아&gt;는 분명 반쪽 서사시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수는 지연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쉽게 이야될 것이다. 이런 '지연의 효과'를 위해서는 먼저&#160;독자는 음모를 알지만 극중 인물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어야한다.&#160;&lt;오뒷세이아&gt;에서는 텔레마코스와 오뒷세우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복수의 준비'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있다.&#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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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혼자들은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걸인으로&#160;변한 오뒷세우스를 모욕하는 장면이 있다. 독자들은 '이런 바보같은 곧 죽게될 운명인데' 라고 연민과 함께 작중인물의 어리석음을 책하게 된다. 이게 무얼 의미하는가? 별거 아니다. 이미 텍스트에 깊이 빠져 버린 독자를 의미한다. 모욕의 정도가 높아질 수록 독자의 복수에 대한 쾌감은 비례한다.&#160;그런데&#160;이런 드라마작법은 인류학적인&#160;공통 유산에서 나온 것 같다. (서사 구조라는 것 이야기다.)&#160;&#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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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우리의 전통 소설&lt;춘향전&gt; 또는 판소리&lt;춘향가&gt;를 떠올려 보자. 이몽룡이 과거 급제를 하고,&#160;짐짓 거지 행세를 한다.&#160;오뒷세우스도 아테네의 도움으로 걸인으로 변신한다.&#160;오뒷세우스가&#160;두 가지 목적으로 -하나는 누설 시&#160;복수의 좌절 우려와 식솔들의 충성 여부 확인- 거짓 행세를&#160;한 것 처럼 이몽룡은 '공무 집행'과&#160;'춘향의 진정성'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끝까지 자신의 신분을 숨긴다. 또한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160;위해 화살의 시험을 거치는 것 처럼 이몽룡은&#160;'금준미주 천일혈'로 시작하는 시&#160;한&#160;소절로 마지막 한 방을 예비한다. 이런 복수의 전조 앞에 몇 몇 눈치빠른 이들은 줄행랑을 치며,어떤 이들은 그런 징후조차 부인하고 결국은 '이빨로 흙을 물게 된다'&#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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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lt;오뒷세이아&gt;는 오랜시간 사랑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완성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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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lt;오뒷세이아&gt;의 주인공 오뒷세우스라는 인물에 대하야 이야기를 해보자.&#160;그는 간계와 지혜가 아테네에 버금갈 만큼의 지략가이며 전사이다. &lt;삼국지연의&gt;의 여포나 장비가 아니라 주유 정도 되겠다. 아킬레우스를 트로이 전쟁에 불러들인 것도, 트로이 목마를 고안한 것도 그의 지혜이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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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의 &lt;오뒷세이아&gt;에서 그의 첫번째 대사는 의미심장하여 눈여겨 볼만한다.&#160;칼립소가 제우스의 명령을 받잡고 오뒷세우스를 풀어주겠다고 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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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이여! 그대는 나를 보내줄 생각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게 분명하오."&#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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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뜻일까?&#160;&#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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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이 말에서 나는&#160;오뒷세우스가 상징하는 알레고리의 가장 중요한 한 대목을 본다. 그것은 '의심'이다. '오뒷세우스는 의심하는 인간'이다. 물론 텍스트의 맥락 상 보면 '신들의 장기판'에서 놀아나던 인간이 신들의 장난질을 못믿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lt;오뒷세이아&gt;에서 최초로 그가 뱉어낸 이 말은 '의심하는 인간'으로서의 신들의 세계를 의심하는, 그래서 결별하려는 '의심'으로 읽어내면 큰 울림을&#160;갖는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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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lt;오뒷세이아&gt;를 '탈신화화를 목표로 하는 계몽의 알레고리' 로 읽어낸 이들이 20세기 가장 음울한 책이라는 &lt;계몽의 변증법&gt;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이다. 그들은 &lt;오뒷세이아&gt;를 '주체가 신화적 힘들로부터 도망쳐 나오는 도정" 이라고 말한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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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우스가 얼마나 주체적으로 영리한 지는 뗏목을 떠다닐 때 그를 불쌍히 여긴 레우코테아의 충고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창조적으로 변용하는데서도 보여진다. 그녀는 뗏목을 버리라고 말하는데 그는 다 듣고&#160;나서 이렇게 말한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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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괴롭구나! 그녀가 나더러 뗏목을 떠나라고 명령하니...나는 아직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거야. 나의 피난처가 될 것이라고 그녀가 말한 땅은 아직은 멀리서 볼 수밖에 없으니까"&#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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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뒷세우스는 신들에 의탁한다. 그렇지만 그 자신의 지혜와 재능을 적절히 조합해내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필연적 운명을 수용하고 거기에 이성이라는 능력을 통해&#160;운명의 거센 풍파를 헤쳐나가는 것이다.&#160;운명을 거부하지 않느며 운명에 맞서는 용기가 바로 그리스적 용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하다.&#160;&#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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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세이렌'과 관련된 우화를 통해 오뒷세우스의 '도구적 이성'과 자본 아래 '소외'되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알레고리로 읽고 있는 유명한 글을 남긴다.&#160;그들은 오뒷세우스로부터 '시민적 개인'의 탄생을 소급해서 읽어내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오뒷세우스는 생존의 본능을 위해 자연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반복적 현상으로 인식하고 이를 인간의 이성적 능력으로 지배하려는 근대적 개인의 원형이 되는 것이다. 물론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목적은 이렇게 지배적인 '자기동일성'에 근거한 '근대적 이성'과 '도구적 이성'을 '반성'과 '성찰'을 통해 다시 계몽하려는&#160;의도였다. 그들이 '계몽하지 않는 계몽'에서 무서운&#160;폭력을 바라본것은 그들이 겪었던 나치의 정신을 근대적 이성이 언제라도 불러들일 수 있는 최종적 기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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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뒷세우스의 모험담은 초반부에 나오는 이야기다.&#160;오뒷세우스가 포세이돈의 미움을 받게 되는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다. 즉 오뒷세우스의 '하마르티아'(비극적 고통을 만들어내는 과오)인 셈이다. 이런 고통은 엄밀하게 말해서 개인의 잘잘못과는 무심하게 발생하곤 하는데 그리스인들은 그런 존재의 불가해적 운명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간 어찌 어찌 하여 오뒷세우스의 전함들은 퀴클롭스들이 사는 섬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거대한 퀴클롭스들이 양을 키우며 살고 있다. 오뒷세우는 외교적&#160;방법을 택하다가 전우들을 잃는다. 우선 오뒷세우스는 크게 '참는다.'. 그리스의 중요한 덕목이라는&#160;'절제' 를 여러번 다짐한다.&#160;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눈물을 참던 그마저도 전우를 잃어야한다는 대목에서&#160;눈물을 머금지만 그래도 그는 '참는다'. 그리고&#160;어떤 신의 도움도 받지 않고&#160;기다림 속에서 나온&#160;자기 지혜를 바탕으로 퀴클롭스에게 포도주를 먹인다. 폴리페모스가&#160;묻는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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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너는 자진하여 그것을 한잔 더 주고 네 이름을 말하라.".....오뒷세우스는 "내이름은 '아무도아니'요" 라고 답한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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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160;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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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60;언어는 사고를 위장한다. 의복의 외적 형식으로부터 그 바탕에 놓여 있는 사고의 형식을 추론하는 것은 그만큼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의복의 외적 형식은 몸의 형식을 드러내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의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lt;논리철학논고&gt;&#160;<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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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우스의 저 대답은 다른 퀴클롭스들로 하여금&#160;그를 비존재화시켜버리는 위력을 발휘한다. 오뒷세우스의 '아무도아니요' 라는 대답은 단순한 기지라고 하기에는 거의 혁명적이다. 아도르노는 오뒷세우스의 여정이 '이성의 자기동일화'를 위한 과정이라고 했다. 그 안에는 이미&#160;'랑그와 빠롤'의 자기 분리 마저도 포함하는 이성의 포용적 간특함이 들어있다.&#160;삼류독자로서 나는&#160;오뒷세우스의 대답이 중요한 정치적 파괴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무도 아니요'를 몇 년 전에 본 영화&lt;브이 포 벤테터&gt;의 마지막 장면과 연계시킬 때 쉽게 그려진다. 모든 이들이 '아무도 아닌' 것이 되는 순간-영화에서는 동일한 브이의 가면을 쓰고 광장에 나타난다-&#160; 거대한 퀴클롭스들을 무너뜨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이다.&#160;오뒷세우스의 여행이 자극하는 상상은 종류도 다양하니 그 정도를 하나 더 추가한다고 고전의 바다가 넘치거나 범람하지는 않을게다. 정치적 해방의 가능성은 지난 시절의 강박적 회귀나 또는 찬란한 반짝임에 대한 자기 상찬에서 나오지는 않을 듯 하다.&#160;그것은 그저 '내가 자청한 고난'이며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자의 '뼈아픈 후회'일 뿐이다.&#160;그날은 '사건'이라 할 만한 절박이라는 조건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것' 에서 나올 지도 모른다.&#160;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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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8/68/cover150/s26203639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86827</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왠 허공이 저리 너그러운지 - [배꼽]</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2920672</link><pubDate>Mon, 22 Jun 2009 17: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292067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2863&TPaperId=292067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98/52/coveroff/893642286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2863&TPaperId=292067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배꼽</a><br/>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04월<br/></td></tr></table><br/>&nbsp;시다. 그렇다.&nbsp;깃털같은 가벼움이며 진흙뻘 같은 육중함이다.&nbsp;&nbsp;
&nbsp;시는 아폴론의 눈길 피한&nbsp;위대한 패잔병이다.&nbsp;젊은 신의&nbsp;눈길을 피한 시는 화살처럼 날카롭고 예리하다. 뜨겁다.성마르다. 그들은&nbsp;성에 굶주린 전쟁터의 군인들 마냥 가슴에 대고&nbsp;검붉은 인두를 꺼내든다. 불에 달군 인두다. 아니&nbsp;아직 채 마르지 않은 이름모를 이의&nbsp;피가 묻은 칼이다. 상처에 더 깊이&nbsp;살을 밀어넣는다. 그것은 칼이다.또 살이다.&nbsp;시는&nbsp;남은 모든 육체성을 그대로 대상에 전한다.&nbsp;그 때 우리는 잠시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불같은 고통이 빠져나갈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왼쪽 가슴 아래께'&nbsp; 온 깊은 통증은 여전히 쑤신다.&nbsp;
문인수의 &lt;배꼽&gt;은 그렇다. 나는 작년에 이 시집을 여러번 펼쳐 읽었다. 하지만 리뷰를 쓸 수 있는 날까지 기다리다가 한 해를 훌쩍 넘겼다. 장마철에 읽은 시집을 다음해 장마가 시작되는 날 다시 편다. 아마 리뷰를 쓰지 못한 것은&nbsp;두 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하나는 시를 읽는 내 능력의 부족함일 것이다. 시인의 꾹꾹 눌러쓴 언어적 제련에 비교될 수 밖에 없는 자괴감때문일 것이다. 하나는 개념어로 펼쳐낼 수 없는 시의 직접성 때문이다. 시나 아포리아를 다시 글로 옮길때 마다 느끼는 내가 느끼는 묘종의 불편함이 있다. 그것은 비재현의 문법을 가진 음악을 글로 옮길때 느끼는 것과 유사하다. 물론&nbsp;언어의 옷이라도 걸치고 있는 시나 아포리아가 낫긴 하다만. 이런 것들에 리뷰를&nbsp;쓴다거나, 언어의 힘을 빌어 정리를 하고 나면&nbsp;정들었던 물건들을 재활용센터에 보낼때 느끼는 만족감과 허탈함 같은 것들이 동시에 떠오른다. '탁탁탁 정리 끝. ok.&nbsp;다음'&nbsp;
문인수의 &lt;배꼽&gt;은 정말 여러번 곱씹어 읽어도 아깝지 않을 시집이다. 볼 때 마다&nbsp;허공 한 구석을 보게 만든다. 읽을 때 마다&nbsp;새어나오지 못하는 가라진 음성을&nbsp;들어야 한다.&nbsp;&nbsp;
&nbsp;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쟁애인 마흔 두살 라정식씨가 죽었다./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중략)&nbsp;
떠먹여주는 사람&nbsp;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 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nbsp;
#@$&amp;*&amp;.......? (선생님 저 욱을 때도 아주실 거죠?)/ 그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울음보를 떠트렸다. $^&amp;##@#%^%^&amp;&amp;(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nbsp;&nbsp;&nbsp;&lt;이것이 날개다&gt; p84-85
시인에게는 '잃어버린 세계'와&nbsp;'폐허가 된 현재' 를 쇠사슬처럼 연결하고 있는&nbsp;증표가 바로 '배꼽'이다.&nbsp;배꼽이 없는 사람이 없듯이 우리 모두는 '얼룩말 가죽'같은 법원 앞 횡단보도를 아랑곳없이 건너는 '생사의 숱한 기로를 이제 흐릿하게 지우기도 하는' 모성의 세계가 있었다.&nbsp;&nbsp;
저 할머니 이제/ 법이란 법 다 졸업한 '무법자'일까,신호등/빨간 불빛 따위 아랑곳없이/무인지경의 횡단보도에들어선다.까마득한/.....시꺼먼 길바닥이/문득 흰 젓 먹은 듯 고요하다. 풍금처럼 흐르는 모법이 있다.&nbsp;&nbsp;&nbsp; &lt;얼룩말 가죽&gt; 중에서 p22-23&nbsp;&nbsp;
모성의 세계,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그의 어머니를 형상화한 &lt;뻐꾸기 소리&gt;,&lt;조묵단전&gt;등에 반복되어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몇 해전 돌아가진 할머니의 작은 은비녀를 기억하는 나는&nbsp;아흔 일곱에 미장원에 가서 파머를 한 작가의 어머니와 그리고 한 세기를 짊어져온 잘라진&nbsp;머리 칼&nbsp;속의 비녀를 '탈골'이라고 더듬는 대목에서 정말 '헉'이란 소리가 나왔다...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nbsp;&nbsp;
...&nbsp;단단한 비녀! 아 (&nbsp; )탈골이다. &lt;조묵단전&gt; 비녀뼈 p99&nbsp;
&nbsp;작가는&nbsp;두고 온 세계에 대한 일종의 우수같은 것이 있다.&nbsp;그리고 그가 고개를 돌려 눈길을 보내는 곳에는 '웅크리고 있는','흉가'가 된 세상이 있다.&nbsp;&nbsp;
삼켜버리고 싶은 과거는 맛이 없다.대개/거칠고 쓴데,저기/들어가 웅크리는 슬픔은 또/누구인지.언제/ 둥근 종소리 날까,/ 그렇게 깊이 날고 전소되겠다/&nbsp; &lt;흉가&gt; p30&nbsp;
마을 뒤, 산 밑에 오래 버려진 송산서원에서/ 나는 폐허에게 묻는다.이쯤에서 그만/풀썩 무너지고 싶을까./ 이것저것 깨묻는다.&nbsp; &lt;송산서원에게 묻다&gt; p102&nbsp;
작가에게 두 세계가 같은 고향을 같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단어가 '배꼽'이다.&nbsp;어머니와 아들이 '배꼽'을 통해 연결되는 것이다. 땅에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다 다 가지고 있는 '배꼽'. 사실&nbsp;아이의 비릿한 탯줄을 자르기 전까지 나는 단 한번도 '배꼽'의 효용과 그&nbsp;위대한 상징적 징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내가&nbsp;스무번은 넘게 읽었을&nbsp;'배꼽'과 관련된 아이의 동화책에는 그 상징적 징표에 대해 아주 명료하게 정의한다.&nbsp;대충 기억에 의존해서 말해보자면'배꼽'은 '우리가 알에서 태어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의&nbsp;표시'이며 '엄마와 아빠의 사랑의 증표'라는 것이다.&nbsp;그런면에서 '배꼽'을&nbsp;만들거나,&nbsp;'배꼽'을 자르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연결의 시간을 후대와 갖지 못한 것은 모든 남성의&nbsp;영원한 빈틈이다. (나는 나의 어머니와만 배꼽으로 연결될 뿐 나의 아들이나 딸과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위대한 여성이여!)&nbsp;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lt;배꼽&gt;p 47&nbsp;
이제 어떤 해소가 남아 있는가? 세계는 그렇게&nbsp;사랑으로부터 이미 멀길을 떠나왔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저 폐허의 집뿐이다.&nbsp;이것은&nbsp;열혈 청년의 비판의 도마 위에 올라야 하는 허무주의인가 비관주의인가? 차라리 철지난 낭만주의와&nbsp;저속한 낙관주의가 더 가식과 자기 기만,자기 협잡&nbsp;은 아닐까? 작가는 '송산서원'처럼 '대답하지 않는다.'&nbsp;&nbsp;
차들이 검은 비닐봉지 하나를 연신 치고/달아난다/ 비닐봉지는 힘없이 떳다 가라앉다 하면서/찢어질 듯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지만 도통/소리가 없다. 연속으로 들이닥치는 무서운 속력 앞에/뒤에,두둥실/ 왠 허공이 저리 너그러운지.&nbsp;&nbsp; &lt;비닐봉지&gt;p26&nbsp;&nbsp;&nbsp;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왔다, 싶은 모양이다.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창공이다. &lt;이것이 날개다&gt; p85&nbsp;
"오늘 아침엔 경운기 시동이 참 잘 걸리네요."/ "그래,기분이 좋구만."/ 별다른 뜻이 없어도 오래 아프게 된 말/ 송사에 답사. 상가엔 꼭 상복을 입은 이별장면,별사가 따로 있다. &lt;경운기소리&gt; p19&nbsp;
지금은 쓸쓸한 춘궁, 그래도 봄날은 올 것이며/씹어먹어도 먹어도/굽은 등 떠밀며 또 봄날은 갈 것이다. &lt;동백 씹는 남자&gt; p87&nbsp;
작가는&nbsp; 다시 묻는다.&nbsp;존재의 한 파편을 언뜻 바라본 자로서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사람들에게&nbsp;묻는다.&nbsp;마치 최승호의 시&lt;북어&gt;를 연상시키는 &lt;도다리&gt;란 시다.&nbsp;
대형 콘크리트 수조를 자세히 들여다 보니/ 아, 겨우 알겠다/ 흐린 물 아래 도다리란 놈들이 납작납작 붙은 게 아닌가/......당신의 비애라면 그러나/바닥을 치면서 당장,솟구칠 수 있겠느냐,있겠느냐&nbsp; &lt;도다리&gt;p32&nbsp;
문인수의 &lt;배꼽&gt;은 -상투적이지만- '절창'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시들이 '물 반 고기 반' 처럼 득실거린다. 독거노인의 모습을 그린&lt;꼭지&gt;, "죽는 거시 낫겄어야,참말로" 라는 '절창'으로 끝나는 '절창'을 담고 있는 &lt;만금이 절창이다&gt;, '극약 같이 짧은 시'만 쓴다는 서정춘 시인에 대한 시들.시끌벅적한 생명을 노래하는 &lt;녹음&gt;,&lt;봄&gt;등등....어느 하나 '탈골'시켜서는 안될 시들이 가득하다.&nbsp;&nbsp;
한해 딱 한 권의 시집만 읽기로 작정한 이가 있다면 문인수의 &lt;배꼽&gt;은 목록에 들어가도 부족함이 없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98/52/cover150/893642286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985204</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죽음은 확실하나 생명은 불확실한 것 -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2847687</link><pubDate>Sun, 17 May 2009 00: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284768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172715&TPaperId=284768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3/88/coveroff/89601727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0172715&TPaperId=284768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a><br/>필립 K. 딕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br/></td></tr></table><br/>봄비가 장맛비처럼 내린 하루다.&#160;&#160;
2019년 지구에도 매일 비가 내린다.&#160;일본 신주쿠의 어느 거리처럼 보이는&#160;'천사의 도시' LA는&#160;오래된 고철의 도시다. 빗방울에 오래된 녹이 묻어내릴 것 같다. 리틀리 스콧 감독의 영화&lt;블레이드 런너&gt;에 대한 이야기다.&#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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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쇼츠키감독의 &lt;매트릭스&gt;가 나오기 이전까지&#160;SF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 중에 한편이 바로 &lt;블레이드러너&gt;였다. 이 영화의 원작이 바로 그&#160;유명한 필립 K&#160;딕의 소설&lt;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gt;이다. 영화와 소설은&#160;전체적인 스토리라인에서는 유사한 부분들이 있지만 결코 같지 않다. 원작자 필립 K 딕의 상상력도 뛰어나지만&#160;거기에 새로운 옷을 입혀 원작을 뛰어넘는&#160;제2의 작품을 만들어낸 리틀리 스콧 감독의 능력은&#160;두말할 필요가 없다. (행여 이 작품을 아직 못본 젊은 세대가 있다면&#160;찾아서 봤으면 한다.) 필립 K딕의 원작과 리틀리&#160;스콧 감독의 영화를 단순 비교하면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다. 원작에 없는 내용과 설정들이 새로 영화에 등장하고 또 원작에서&#160;매우 중요한 장면들이 영화에서는 삭제된다. 예를 들어&#160;영화&lt;블레이드러너&gt;에서 가장&#160;멋진&#160;룻거 하우거와 해리슨 포드의 마지막 옥상씬은 소설에 없다.&#160;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다. 4년이란 운명을 다 채운 리플리컨트 로이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160;마지막 대사를 빗물 속에 남긴다.&#160;&#160;
"난 당신들,인간들은 믿지 못할 것을 보아왔어. 오리온좌 곁에서 불타던 전함, 탄호이저 게이트 근처에서 어둠 속을 가로지르는 C-빔의 불빛들도 보았지. 모든 순간들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빗 속의 내 눈물처럼..... 이제 가야할 시간이야."&#160;&#160;
이런 장면은 리틀리 스콧감독의 독창적인 것이다. 원작에서 안드로이드 로이는 영화의 영웅적 애수를 닮은 죽음을 선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죽음이 그리스 영웅의 죽음을 연상시킨다면 원작에서 그 죽음은 오히려 아킬레우스의 칼에 몸을 베인 이름 없는 트로이 병사처럼 처리된다.&#160;
"릭은 로이 배티를 쏘앗다. 총을 맞자 키 큰 로이 배티의 사체가 철쩍 날 듯이 뛰더니 바닥으로 떨어졌고, 잘 깨지는 재질의 부품을 잔뜩 모아 만든 것 같은 그의 몸이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160;
이 장면만 보면 영화가 물론 더 흥미롭다. 그렇기 때문에 필립 K 딕의 원작은 별 볼일 없는 것일까? 절대 그렇지가 않다. 주제의식에 대한 집중방식과 형상화의 유형이 다를 뿐이다. 영화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를 추격당하는 리플리컨트의 행위를 통해 직접적으로&#160; 질문하고 있다면 소설은 이 문제를 추격자이자 주인공인 데커드라는 대상을 통해 끈덕지게 성찰하고 있다. 소설 속에 마지막 명장면이 없다면 대신 안드로이드 갈란드를 은퇴시키고 나서 벌어지는&#160;사냥꾼 필 레시와 데커드의 장면이 있다. 매우 흥미로우며 철학적인 질문들을 담고 있는 장면들인데 영화 속에서는 나오지 않는다.&#160;일시적 협조관계에 있는 필 레시와 데커드는 상대방도 자기도 안드로이드일지 모른다는 불신 속에&#160;인간/안드로이드에&#160;대한 정체성 질문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기억이 조작된 안드로이드들은 자기가 안드로이드인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160;안드로이드라면 처형에 있어서도 사무적이리 무감각한 데커드는 오히려 안드로이드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 아닌가?&#160;안드로이드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 기계에 지나지 않는 안드로이드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기계에 부분적으로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인간적인 특징이 아닌가?&#160;이 장면에서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정체성 뿐 만이 아니라 주인공인 인간 데커드의 정체성마저도&#160;균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160;&#160;&#160;&#160;
<br />
&#160;
영화와 소설의 차이점은 이외에도 여럿 등장한다. 소설 속에 중요한 장치인 '머서주의'나 '전기동물'같은 것들은 아예 영화 속에 언급되지 않는다. 필립 K딕은 인간/비인간의 정체성부터 시작해서 궁극적으로는 그 질문을 '생명', '생' 과 같은 범주까지 끌고 가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데커드가 안드로이드를 처지하고&#160;도달한 지점은&#160;결국 '생'이라는 주제였다. 일종의 '생의 유일성'과 '생명의 불꽃'에 대한 범신론적 깨달음같은 것이다.&#160;영화에서도 그 문제를&#160;궁극적으로 유인해내기는 하지만 소설에 비해서 슬쩍 묻힌다.&#160;리틀리 스콧의&#160;영화 마지막은 몇 가지 버전이 있는데 디렉터스 컷의 경우 리플리컨드 레이첼과 데커드가 함께 달아나는 씬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레이첼도 도망한 리플리컨트이기 때문에 추격당해야하는 신세이다. 하지만 경찰서 소속의 가프는 선물이라도 되는 듯이 그녀를 놓아준다. 가프의 은빛학이 그녀의 아파트앞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결국 도망치더라도 그 끝은 '죽음'이다.&#160;물론 영화에서는 또다른 질문이 중요한 토론 쟁점이 되기도 했다. 데커드는 안드로이드인가? 라는 점말이다. 리틀리 스콧은 열린 대답을 내놓았지만&#160;리플리컨트쪽에 힘을 싣는 인터뷰를 했었다.&#160;인간이든 리플리컨트든 결국 시간의 차이가 존재할 뿐 '죽음'이라는 것을 피해 갈 수 없다. 결국 소설이나 영화는 공히 '죽음' 이라는 것을 통해 '생'의 정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죽는 모든 것은 '생'이다. 그것이 인간이든 안드로이드든 두꺼비든. 하지만 죽지 않는것. 영원한 생명은 이미 '생명'이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가장 비인간적이며 비자연적이다. 영원한 생명만큼 영원한 악몽도 없을 것이다.&#160;
영화말고 소설 속에 나오는 몇 가지 아이디어들은 사회적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예를 들어 2021년(소설은 2021년 1월 3일 하루동안 일어난 일이다.) 지구는 디스토피아적이다. 미래사회는 배제를 중심으로 한 인간종의 구분이 이루어진 인종주의적 사회다. 이것은 피부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는 핵전쟁의 낙진으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필립 K딕이 이 소설을 쓴 시점은 1960년대 후반이다. 혁명의 시대이자 또 핵공포의 시대였다. 인류는 이제 4부류로 구분된다. 화성이라는 식민지 개척을 위해 지구를 떠난 사람들,&#160;&#160;지구에 남겨진 자들, 그리고 그 중에 낙진피해가 심해져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특수자'들, 그리고 인간은 아니지만 노예인 안드로이드. 화성은 지구를 버리고 지구인은 특수자를 배제한다. 그리고 인간은 안드로이드를 부품으로만 취급한다. 전통적인 의미의 계급적 메타포처럼 보이는 설정이다.&#160;
필립 K딕의 원작에는 시대적인 그림자가 묻이 있는데, 앞서 말한 핵전쟁의 공포같은 것이 1차적이다. 그와 함께 지금의 작가라면 전혀 다르게 그렸을 문제들이 자본의 문제들이 이 소설에서는 시대적 한계로 드러난다. 필립 K 딕의 시대는 일종의 '정치의 시대'였다. 사회의 여러 힘들이 쟁투를 벌이고 있었고 그것의 타도대상이든 조절대상이든 공적인 권력에 대한 가능성이 결코 포기되지 않았던 시대이다. 최소한 그 시대에 자본은 아직 사회적 권력이나 정치권력에 복속되거나 아니면 최소한 조절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다.&#160;이 소설에서는 거대자본으로&#160;안드로이드를 만드는 로젠연합이 등장한다. 이 기업의 기술력은 인간과 구별이 거의 불가능한 안드로이드를 만드는 곳이다. 당연히 우주식민지 건설에 있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곳이다. 그런데 이 곳에서 만든 넥서스 6가 문제가 생겼다. 일종의 하자가 생긴건데 이렇게 되면 넥서스 6의 기술은 폐기되게 된다. 기업 입장에서 막대한 피해이자 식민지 건설에서도 거대한 피해를 보게된다. 그런데 그 기술이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러 경찰서 소속 프리랜스 인간사냥꾼 데커드가 달랑 기계 하나 들고 찾아간다. 경찰서장도 넌지시 이 방문의 의미를 이야기하긴 하지만 여전히 단일한 공권력이 이런 전지구적 자본을 견제할 수 있다는 믿음같은 것이 깔려있다.&#160;이런&#160;것을 빼놓고도&#160;데커드 혼자 로젠연합이라는 거대기업에 대응하는 방식은&#160;어쨋거나 개연성이 너무 떨어지는 설정이다.&#160;&#160;
이 책에 등장하는 몇 몇 장치들, 머서주의나 감정이입기 같은 것은 물론 SF적인 상상력이기는 하지만 마치&#160; '이데아와 시뮬라르크'가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결합된 것과도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머서주의라는 것이 결국은 TV 화면앞의 장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커드는 머서와&#160;오히려&#160;합일을 시도한다.이 기계는 인류의 총체적 소통기계인 셈이다. 자기의 경험과 타자의 경험이 감정이입기와 머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자율적이라는 감정마저도 조절되고 관리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이런 식의 전개는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1984'식의 통제사회의 다른 버전이다. 비릿한 소통이며 파국적인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형상화이다.&#160;거기에는 일종의 네크로필리아적인&#160;욕망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160;&#160;
&#160;Mors certa , vita incerta&#160;
...이 책에서 싫었던 거...너무 친절하게 주인공의 반응과 심리를 '작은 따옴표'로 설명해주려는 장르적인 서술 의지...마지막에 와서 사건을 종결을&#160;위해 기아 변속을&#160;과감히 한 것..책 좀 더 두꺼워지면 어때.]]></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3/88/cover150/89601727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38853</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결코 가질 수 없는 분홍 잿빛의 위대함이여 - [롤리타]</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2779395</link><pubDate>Sat, 11 Apr 2009 16: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277939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0300&TPaperId=27793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9/78/coveroff/893746030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0300&TPaperId=277939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롤리타</a><br/>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06월<br/></td></tr></table><br/>미성숙이 나를 왜 매혹하는가, 그것은 순수하고 젊고 금지된 요정의 아름다움이 주는 명쾌함 때문이라기보다 많은 것이 약속되지만 거의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틈새를 무한한 완전성들이 메꾸어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코 가질 수 없는 분홍 잿빛의 위대함이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lt;롤리타&gt; (p 359-360)&#160;&#160;
나보코프, 흐흐흐, 당신은 정말 웃긴 사람이야.&#160;내가&#160;만약 단 한 단어로 당신을 타임캡슐 속에 봉인해야 한다면 나는 당신을 그런 기억으로 담아 둘 것 같다. 물론 웃긴다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160;재미있다는 뜻일 수도 있고, '나 원 별것도&#160;아닌게'&#160;하는 식의 싸늘한&#160;미소일 수도 있어. 하지만 당신이 만드는 그것은&#160;이항적인 구분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 그래서 마치 3월 봄바람과도 같아. 3월의 봄바람을 아나? 그것은 따뜻한가?&#160; 그렇다면 차가운가? .아니.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아. 그냥 3월의 봄바람만큼의 웃음이지. 당신이 만드는 웃음은 어느 초등학교 교실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해. 선생님이 칠판에 무언가 잔뜩 쓰고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지. 한 아이가 자신있게 손을 들어, 그런데&#160; 소년은 순간적으로 어떤 의심이&#160;들었나봐. 그 의심은 올라가려던 팔을 무의식적으로 잡아당기지.그래서 엄마가 새로 준 점퍼의 팔굽있는 부분이 제대로 펴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접히지. 당신이 그래. 나는 그 어쩡쩡한 점퍼의 주름과 양눈가에 자신감과 의혹 사이를 진자운동하는 아이의 눈망울을 보듯 당신이 만든 웃음을 바라본다. 당신의&#160;문장안에는&#160;정말 다양한 종류의 웃음이 담겨있어.&#160;미학적이게 웃긴다고 하면 그건 분명 당신의 문장을 두고 하는 말일게야.&#160;물론 당신이 만든 험버트도 아주 흥겹지. 사랑에 조바심난 노친네, 롤리타의 젊은친구들까지 견제하느라 얼마나 애간장이 타겠어. 그리고 또 미성년자 약취유인범과도 변별점을 찾으며 롤리타와 그걸 하려고 하니 얼마나 애써야했겠어. 흐흐흐(아.. 늑대같은 웃음은 아니야?&#160;나는&#160;미성숙한&#160; 여자애들은 좋아하지 않아.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말이야..)&#160;
어쨋거나 당신이 웃긴건 사실이고,이건 당신을 저평가하는 말은 결코 아니야.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뒤늦게 당신을 만났지만 당신에게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어. 지난 해에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기뻐한,당신이 이국의 언어로 쓴 첫번째 소설 &lt;어느 망명작가의 참인생&gt;과 당신의 자서전인 &lt;말하라 기억이여&gt;도 한달음에 읽고 싶어졌어. 물론 조금 시간은 필요할 거야. 오뉴월에 바람난 개처럼 이것 저것 들추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그렇지. 내 이런 습성도 좀 고쳐질만도 한데 나이가 들어도 결코 바뀌지가 않는다. 하지만 내일 모레까지 논문을 내야하는 것도 아니고 이번주말까지 맡은부분의 발제를 해야하는 것도 아니니 뭐가 어떻겠어?&#160; 봄바람의 향기가 더 짙어질때 당신을 다시 펴보던 코 끝에 입김이 어는 시절에 당신을 다시 집어들던...아무도 개의치 않을텐데. 흐흐. 나는 가끔 책을 읽을때 가장 '자유'로와져서 보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해. 당신이 글을 쓸 때 그랬을 것 처럼 말이지.&#160;
당신의 소설은 묘한 아이러니에 처해졌어. 당신은 '예술은 예술일 뿐'인 사람이잖아. 그런데 당신의 명성을 알린 책&lt;롤리타&gt;는 이제 미디어적인 용어가 되어 버렸어. 어린이 성범죄와 관련된 기사에는 그래서 가끔 당신의 이름이 오르기도 해. 부고기사들 사이에서 오타난 상주의 이름을 보는 것 같지. 흐흐흐. 당신의 &lt;롤리타&gt;는 말이지. 대중들 사이에서 '도덕주의' 법정에 소환된 피고의 모습이었나봐. 물론 초기에 비평들에서 역시 이 부분은 문제가 되었다더군. 당신의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그 때도 수입이 되니 마니, 어디까지가 삭제되었니 무삭제판이니 하는 말이 있었다니까. 물론 당신에게도 책임이 있긴 하지. 사실 강한 주제잖아. 그리고 또 당신의 표현수위도 말이지. 어린 의붓딸에 빠진 홀아비 '험버트 험버트' - 당신은 그를 여러형태로 불러, 나는 그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를 때가 가장 좋아-의 사랑과 관능, 그리고 절제와 욕망 사이의 팽팽한 긴장들을 도대체 어느 누가 당신처렴 표현할 수 있겠어. 당신의 문장 한 줄 한 줄을 큰 소리로 읽고 싶을 정도야. 만약 사랑의 대상이 반인륜적이라는 부분을 제체놓고 본다면 당신은 최고의 연애술사야. 선수란 말이지. 거기에 선수들의 허당짓들까지도 짐짓 아닌척 하면서 슬슬 풀어내는 것까지 더하면 당신은 진짜 프로야. 거기에 보는 이들을 좀 가지고 놀기도 하지. 마치 장날의 약장수가 사설을 풀면서 쪼르르 앉아 있는 아이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 처럼 말이지. 인정해야겠군. 나야 말로 당신이란 약장사에 정신줄 놓고 따라가다 해지는 줄 몰랐던 그 꼬맹이라고 말이지.&#160;&#160;
물론 당신의 소설에는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의 흥겨움과 구절양장 꼬부랑길을 걷는 재미만 있는 것은 아니야. 당신의 &lt;롤리타&gt;는 말이지...음...어떻게 말하면 좋을까?&#160; 말하자면 험버트만큼이나 지적이지. 소설이 시작하면 당신의 험버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죽어있어. 그리고 롤리타- 빌어먹을, 리처드 실러부인이라며...나중에 알았잖아. 당신은 하여간 늘 이런식이지만-도 딴나라사람되어 버린 거지. 당신은 험버트가 남긴 장문의 배심원 증언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최소한 사형은 스스로도 너무 과다하다고 믿는 지적인 구대륙의 이 용열한 백인의 자기변명서말이지. 모르지. 지적이며 상냥하고 예의를 아는 신사였으니 유럽식 자존심으로 진실만을 이야기할지도...당신은 군데 군데 당신이 만든 퍼즐을 풀어갈 조각들을 숨겨놓지. 나는 사실 처음부터 당신이 그런 게임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까치가 날아가며서 떨어뜨린 감처럼 등장하는 험버트와 롤리타 주변 인물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지. 물론 그렇다고 당신이 떨어뜨려 놓은 모든 흔적들을 다 수렴해서 하나로 꿰지는 못했어. 이게 무슨 범인 밝히는 추리소설도 아니잖아. 흐흐흐&#160;&#160;하여간 당신이 복수의 일념으로 퀼티를 만난 것은 잘한 일이야. 당신의 복수장면은 아주 그럴싸했어. 왠지 내게 그 장면을 영화로 만들라면 '뮤지컬' 처럼 해보고 싶더군. 팀버튼 식의 세트나 의상으로 무대설정을 하고 말이지. 조금 시기는 빠르지만 로버트 레드포드의 &lt;위대한 개츠비&gt;같은 분위기로 당신과 롤리타의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퀄티와의 대면장면에서 갑자기 &lt;가위손&gt;이 되버리면 어떻게 될까? 영화는 박살나고 평론가들의 몰매를 맞겠지만 '허...' 하는 바람빠지는 웃음을 만드는데는 공헌을 할꺼야.&#160;험버트와 퀄티의 대결을 역자는 '반사실주의'와 '사실주의'의 대결이라고 해석을 했더라구...당신이 작품 전체를 통해서 소설/반소설 사이의 여러가지 예들을 보여주고 있기때문에 그런 해결의 돌파구로 그 장면을 해석하는 것이 결코 낯설지는 않아. 그래도 당신은 옛날 사람이 되나서 그런지 여전히 실체와의 결별을 선언하지는 않는듯해. 비록 사실주의와의 결별은 선언했겠지만. 요즘 애들은 좀 더&#160;애니메이션적이고 사이버하다구. 당신의 포스트모던한 방식에 영향을 받은 요즘 사람들의 영화는 이미 그런 '자기증명의 과정'조차 불필요하다고 본다구.&#160;&#160;
어쨋거나 험버트의 전체주의적 시선만 계속봐서 목이 좀 아프기는해. 왜 그런거 있잖아. 한 쪽 방향으로 목이 돌아가서 뻣뻣해진 거. 시선고정.험버트와 당신의 시선고정이 만든 디스크야.흐흐. 그 시선이 전체주의적이지만 모든 것을&#160;관통시키고 고정시키지&#160;않아서 다행이야. 전지적 주체와&#160; 유동성의 주인공이 동인인물이 된다는 것이 흥겹지. 그 사이의 떨림이 재미있었다니까.^^ &#160;결국&#160;그런 시선이 결코 압제적일 수 없는 것은 환상이라는&#160;빈공간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160;&#160;
소설 속에서 험버트는 이런 말을 하지.&#160;
&#160;"내가 미친 듯이 소유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창조해 낸 것이었다. 또 다른 환상적인 롤리타, 아마도 실제보다 더 리얼한 롤리타. 실제의 그녀와 겹치고 둘러싸며 나와 그녀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며 의지도 의식도 없는 소녀, 정말 그건 그녀 자신만의 삶이 아니었다."
나는 이 소설의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모두 이 문장과 어떤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선생님, 정말 '소설' 을 잘 쓰신거에요. 정말 '소설' 말이죠.]]></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9/78/cover150/89374603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97801</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죽지 않으려는 시체.. - [솔라리스 (반양장)]</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2552374</link><pubDate>Tue, 27 Jan 2009 21:5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255237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086115&TPaperId=255237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39/69/coveroff/8901086115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086115&TPaperId=255237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솔라리스 (반양장)</a><br/>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김상훈 옮김, 이부록 그림 / 오멜라스(웅진) / 2008년 07월<br/></td></tr></table><br/>&lt;솔라리스&gt;를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이다. 그는 1972년 동명의 영화를 만들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혁명이 영상에 자리를 내준 90년대를 거쳐온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보다 영화를 볼 수 있는 창구가 적었던 시절이다. 자고로 금지는 더 큰 열망을 낳는 법이다. 그 당시 타르코프스키는 매니아들 사이에서 올림포스에 사는 신족처럼 취급되었다. 그의 영화&lt;희생&gt;,&lt;노스탤지아&gt; 같은 작품들은&#160;일종의 신탁이었던 셈이다. 실제 그의 영화는 중독성이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강한 수면제가 발라져있다. 가끔 졸다가 눈을 떠보아도&#160; 상징적인 이미지가 언뜻 언뜻 지나간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보는 시적인 영상들은 '장자'와 '나비'를 서로 혼동케 하기도 한다. 내가 알던 한 지인은 타르코프스키의 기획은 그런 '몽매'의 상태를 영화적 장치로 이용하여 자신의 영화를 초현실적 단계로 이끌어가는 것은 아닐까라며 웃었다. 하여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명성은 어떤 의미로든 강력했다. 그 때문일까 &lt;솔라리스&gt;의 원작자도 그의 그림자에 가렸다.
옮긴이의 글에도 원작 &lt;솔라리스&gt;가 그 동안 SF팬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원작시나리오 정도로 취급받는 역전된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나 역시&#160; 타르코프스키 때문에 &lt;솔라리스&gt;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영화 전체를 보진 못했다. 내게 직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따로 있다.&#160;지젝의 &lt;기묘한 영화강의&gt;라는 영상물이다. 그 영상물에서 지젝은 직접 내레이터로 출현한다. 그는 그의 책에서 예로 들었던 영화물들을 직접 설명하면서 정신분석학적인 영화 비평을 시도한다. 영화&lt;솔라리스&gt; 역시 그렇게 소개된다. 지젝은 프로이드의 리비도에 대한 왜곡을 먼저 비판하면서-리비도 결정론적인 곡해-타르코프스키의 &lt;솔라리스&gt;로 들어간다.&#160;닫힌 문을 뚫고 나오는 레야의 모습도 나오고 책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결말도 나온다. 타르코프스키의 결말에서 지젝은 '아버지의 법'에 복종하는 프로이드적 결말을 읽어 낸다.&#160;&#160;
스타니스와프 램의&lt;솔라리스&gt;는 일종의 정신분석학 텍스트이다. 나는 최근에 읽었던 지젝의 책들의 복습 문제처럼 이 텍스트를 읽었다.&#160;( 편의적이고 작위적인 방식이어서 그다지 권할 만한 것은 아니다.) 대신 어떤 개념들을 자기화 해내는 방식- 학문적 엄밀함을 요구하기란 어렵다-으로, 소설을 즐기며 분석의 틀들을 대입해 본다는 것은 책을 읽는 또 다른 방식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160;&#160;
먼저 영화 예고식으로 줄거리를 그려보자.
지구로 부터 한참 떨어진 우주. 솔라리스라는 스테이션에 주인공 캘빈이 도착한다. 그렇지만 무언가 이상한 예감이 든다. 스테이션이 마치 유령의 집같다. 켈빈은 자기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기바리안이 이상증상을 보이며 죽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스테이션에 있는 나머지 두 동료들인 스노우와 사토리우스도 공통되었지만 각기 다른 이상 증상을 겪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증상은 캘빈에게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먼저 매혹적인 것은 '솔라리스&#160;'라는 행성이다. 아니&#160;생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두 개의 태양이 떠있는 행성에 사는&#160;'바다' 가 '솔라리스'다.&#160; '생각하는 바다'는 밀물과 썰물을 바라보며 혀를 낼름거린다는 동화적 상상력을 극한으로 확정시킨다. 그 바다는 안개에 휩싸여 있고 끈적한 물질처럼 되어있다.그리고 가장중요한 것인데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한계를 훨씬 넘는 형태의 고등진화된 생물이다. 렘은 솔라리스라는 행성이 발견되고 나서 지구에서 있었던 각종 연구들을 장황하게 설명해준다. '솔라리스학' 이 그것이다. 모두 각종 가설들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 명확하지 못하다. 모두 이런 생명 행성의 존재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바다'를 둘러싼 다양한 과학적, 또는 철학적 주제들을 켈빈이 읽는 솔라리스 관련 저서들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조금 지루할 수도 있지만 상당히 흥미롭다. 마치 과학사 논쟁이나 철학사 논쟁을 보는 듯 하다.&#160;
흥미롭지만 또한 미지의 것이 가져다 주는 공포로 인해 '생각하는 바다'는 양가적 대상이다. 하지만 승무원들이 공통으로 겪는 증상이 확인되면서 '생각하는 바다'는 상상하기 힘든 공포가 된다. 이것은 우리의 트라우마, 음침함, 타나토노스적 욕망등을 물질화하기 시작한다.&#160;&#160;
머릿속에만 있던 그것이 어느 순간 피와 살이 되어 현실로 나타나지. 문제는 그게 전부야...우리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곳에'도착하게 되고 곧 진실-우리가 가능한 언급하기를 꺼리는 진실-과 맞부딪치는 거야. 이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지.....우리 자신의 추악함을 마치 현미경으로 보듯 몇 백 배나 확대한 것과 말야&#160;&#160;&#160;&#160;&#160;&#160;&#160;&#160;
나는 공포영화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또한 SF소설은 쥘 베른 이후에는 거의 본적도 없는 듯 하다. (물론 SF영화가 더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하지만 이런 설정은 정말 최악의 공포다. 소설이 안타까운 건 음악이 없다는 것이다.그렇지만 자기 트라우마의 물질화라는 설정은 가히 최고 공포를 연상시킨다.(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서는 음악으로 이런 긴장상태를 잘 유지했던 것 같다.) 나는 사실 이 소설을 보다가 어둠 한 편에서 나의 어떤 트라우마들이 형상화되어서 나오면 어떨까 생각하고 소름이 돋기도 했다. (물론 '나는 트라우마같은 것이 없어요.'라고 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길 바라면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160;그러니까 나같은 이를 비롯해서 인간에 대해 뭘 해도 이해가 잘 안되는거다. 또한 심리학 실험에서 거짓말 반응에 걸려서 실험 비적격 대상자가 될것이기도 하다. 심리학 실험에는 실험자의 정직도를 알아보기 위한 문항들이 몇개씩 있다고 알고 있다.)&#160;&#160;
주인공 캘빈은 그의 자살한 아내를 만난다. 캘빈이 그냥 홧김에 던진 말이었는데 그것때문에 그녀는 자살한 것이다. 그녀는 캘빈이&#160;자고 있는 동안에 나타났다. 잠이라는 소재는 프로이트의 주전공 아닌가.(잠을 자야 꿈을 꾸지)그렇지만 이 존재는 꿈과는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지가 아닌 물질화된 대상이다. 지젝은 '살아 있는 시체들의 귀환'이라는 말을 썻다. 그는 현대 대중문화의 근본적인 환상이라고 말한다. 즉 죽음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거듭거듭 산 자를 위협하기 위해 귀환하는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다. 소설 속에서 귀환한 레야는 직접적으로 캘빈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무의식의 귀환은 자살만이 탈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미치게 한다. 그렇다면 왜 죽은자들이 돌아오는가?&#160; 지젝은 라캉이 이에 대해 아주 쉽게 답변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죽은 자의 귀환은 상징화 과정(이게 제대로 이루어져야 맘고생 없지 뻔뻔하게 잘살 수 있다.)에 있어서의 교란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라캉은 &lt;햄릿&gt;의 햄릿왕과 &lt;안티고네&gt;의 안티고네가 이 상징적 채무를 물질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60;&#160;
레야라는 존재를 일종의 '실재'의 침입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캘빈은 솔라리스 스테이션에서 일종의 사물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다. 즉 존재가 고통 속에서 고집하는 금지된 경계 영역으로 말이다. 무의식은 어떤 비지식의 토대 위에서 그 일관성을 유지해야하는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우리의 상징화 작용 속에 비상징화되는 중핵들이 봉쇄되어야 한다. 지젝은 '징후'로 이를 설명한다. 즉 주체가 자신에 관한 어떤 근본적 진실을 무시해야만 존해하는 어떤 특정한 형성물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캘빈처럼 실재의 조각 정도가 아니라 실재가 전면적으로 침입할 때 그런 징후는 스스로 와해된다.&#160;&#160;
'생각의 바다'가 끌어낸 레야라는 대상-나중에 이런 대상들을 '파이-생물'이라고 부른다.재미있는 것은 실재계에서 상상계로 향하는 관계를 지젝이 파이라고 부르고 있다. - 은 정확히 말하자면 캘빈의&#160;증상으로서의 레야이다. '여자는 남자의 증상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여성이 남성에게 일관성을 부여하는 한에서만 남성이 존재함을 가리킨다. 남성의 존재는 사실 그 자신에 대해 외부적이며 여성은 무이다. 이 '무' 를 통해서 실재적인 주체성의 창출이 가능한 것이다. 지젝은 1930년대 필름 느와르의 팜므 파탈이라는 여성 존재를 통해 이 과정을 설명한다.('여자는 없다.'라는 말을 페미니스트적 오해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lt;솔라리스&gt;속에서 캘빈의 죄책감에 의해 만들어진 레야는 여기서 특이한 행동을 통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레야는 캘빈의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캘빈의 의식 밖의 영역에 대해서는 '무'에 가깝다. 아무런 코딩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레야가 스스로 '비존재'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바다'가 주체의 트라우마를 통해 구축해낸 물질화된 '시뮬라르크'가 특별한 매게 없이 자기 인식을 시작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유령이 유령인지 스스로 아는 것이다.' 이거야 말로 '죽은 신도 못하는 일'을 스스로 해내고 있는 것 아닌가? 레야는 몇 몇 특정한 동물과 인간만이 한다는 '자살'을 시도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육체화,정신은 금새 다시 복원된다. 자해와 복원의 고통스러움을 복기해야하는 캘빈은 이제 돌아온 그녀가 '비존재'임을 알면서도 혼동을 겪게 된다. 여기서 스타니스와프 렘의 매력이 나온다. 만약 레야라는 존재를 단지 캘빈의 무의식정도로만 취급했다면 이 책 &lt;솔라리스&gt;의 매력은 절반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생각의 바다'는 원래 상호주관성이 결여된 영역이다. 즉 '레야'라는 존재가 대상/응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단순한 '시뮬라르크'만은 아니란 것이다. 이것은 상호주관성이라는 인식영역에서는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쉬운일이다. 하지만 '생각의 바다'는 완전히 '비인격적' 존재이다. 그렇기때문에 '존재론적' 고민을 하는 레야의 탄생은 마치 진화론의 지적 설계론을 풀어낸 것 같다. 실제로 책 후반부에서 스노우와 캘빈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160;
그 신은 무한을 창조했지만 자신의 능력의 척도여야할 무한이 결국은 그 자신의 끊없는 패배를 가능하게 하는 척도가 되버렸던 거지....불와전한 신 ..이거야말로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 속죄나 구원이 목적이 아닌,아무 목표도 없이 다만 그곳에 존재할 뿐인 신이기 때문이지.&#160;
스타니스와프 렘을 비롯해서 외계인 또는 미지의 세상과 조우하는 인류를 다룬 영화들은&#160;일련의 공통된 주제들이 있다. 조금씩 다른 변주를 취하고 있지만 결국 '인간'에 대해 어떤 종류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지? 우리는 과연 진리와 독대할 수 있는지? 의식의&#160;한계는 어디까지 인지? 그 영역 밖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또한 우리는 어떤 형식으로 타자에 접근해왔는지? 어떤 접촉 양식을 취해왔으며 어떤 소통의 방법들을 이룩해왔는지?&#160; 이 과정에서 우리의 이성과 이로부터 추출되기도 하는 폭력은 어떤 패턴을 밟아왔는지?&#160;소설&lt;솔라리스&gt;에서 우리는 수시로 이런 질문들을 추출해낼 수 있다.
&#160;&lt;솔라리스&gt;의 원작자 스타니스와프 렘은 타르코프스키와 2002년에 있었던 소더버그의 리메이크 작업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논쟁의 핵심은 두 영화가 공히 '소통과&#160;인간 인식의 한계' 문제보다는 '로맨스'쪽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있다. 두 영화 모두를 보지 않은 입장이라 무어라 말하기 어렵지만 내가 영화 감독이었어도 그런 방향으로 따라가기 쉬울 성 싶다. 원작 &lt;솔라리스&gt;의 후반부는 다분히 설명적이고 철학적이다.&#160;'솔라리스학'이라는 것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과 서술들은 드라마적 진행에 있어서는 방해가 된다. 물론 이런 논쟁의 함의를 읽고 지적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 역시 많을 것이다. 요는 렘의 &lt;솔라리스&gt; 후반부는 드라마라는 측면에서&#160;취약하다는 것이다.&#160; 2% '행동'이 부재하거나 이펙트가 약하다. 이미지의 결합과 분배를 통해 초현실주의적인 영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감독들은 이런 드라마 구조에 대해 고민하기 마련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lt;시학&gt;에는 '예술은 모방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 미학을 한 줄로 요약한 이런 말이 나온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삶,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우리가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은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160;
영화&lt;솔라리스&gt;의 감독들이 '생각하는 바다'인 솔라리스보다 주인공인 캘빈과 레야의 문제로 자꾸 시선을 옮겨가려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해 줄 수는 있다.&#160;영화&lt;솔라리스&gt;를 최근에 구하고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또 다른 방식의 리뷰도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39/69/cover150/8901086115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396900</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지푸라기 하나를 가지고도 위대하게 싸우는 것 - [햄릿]</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2505786</link><pubDate>Mon, 05 Jan 2009 15: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250578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32937790&TPaperId=250578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40/95/coveroff/898899683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32937790&TPaperId=250578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햄릿</a><br/>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정환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08월<br/></td></tr></table><br/>A man who could not make up his mind..... 로렌스 올리비에의 1948년 영화 &lt;햄릿&gt;은 이런 문구로 시작된다. 생각해보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햄릿'을 한 줄로 요약한 문장이다. '작심하지 못한 한 인간' 햄릿의 이미지는 생각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여석기의 &lt;나의 '햄릿' 강의&gt;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런 햄릿 상이 19세기의 산물이었다고 말한다. 괴테의 &lt;빌헬름 마이스터&gt;에서는 햄릿을 빗대어 " 갸날픈 꽃이나 자랄 수밖에 없는 화분에 오크 나무를 심어 놓은 격" 이라는 구절이 나온다.&#160;유약한 햄릿이라는&#160;상식적인 이름은 현재의 시대에도 통용되고 있다. 과거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미지 역시 그런 역사의 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160;
김정환 역의 '세익스피어전집' 중 &lt;햄릿&gt;을 가장&#160;먼저 읽었다.&#160;과거처럼 줄거리나 쭉 쫓아가고 싶지는 않았다.&#160;수 백년 동안 다른 이름의 '햄릿'이 있어 왔듯이 내 독서에도 다른 양상으로 읽히는 '햄릿' 을 주조해 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지난 한 해 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자기를 과장하여 말하는 습관을&#160;지속하며 말한다면- 실존의 고민들을 '햄릿'의&#160;부스러기 속에 비추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160;결국 우리 모두가 그리스인인 것처럼 우리 모두는&#160;햄릿이기도 하다.&#160;그런데 그런가?
&#160;대개의 고전이 그렇겠지만 햄릿 역시 문제적 작품으로 해석의 다양성이 &lt;햄릿&gt;을&#160;&#160;&lt;햄릿&gt;이상으로 만들었다. 나는 먼저&#160;가장 구하기 쉬운 로렌스 올리비에의 1948년 영화&lt;햄릿&gt;을 봤다.&#160;나중에 한 번 더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가장 인상적인 것은 흑백대비가 강한 공간 설정이었다. 첫 장면의 파수꾼 교대 장면과 궁전 복도씬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160; 다른 하나는 햄릿이 왕비 거트루드를 비판하는 침대 씬이다. 그 둘의 키스 장면은 보다가 깜짝 놀랐다. 다분히 오이디푸스적인 키스였다.&#160;뒤에 읽었던 여석기의 &lt;나의 '햄릿' 강의&gt;에서는 내가 올리비에의 영화에서 본 장면들에 대한 해석이 나온다. (나는 여기서 쪽지 시험을 맞춘 아이처럼 철없는 자부심을 느꼇다.)&#160;20세기 초반 &lt;햄릿&gt;에 대한 프로이트적&#160;해석이 부각된 적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어네스트 존스의 &lt;햄릿과 오이디푸스&gt;에서 촉발된 것이다. 로렌스 올리비에의 키스씬은 정확히 그의 반영처럼 보였다. 침대라는 장소 설정부터가 그런 느낌을 준다.&#160; 프로이트적 해석에 의하면 결국 햄릿은 복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햄릿은 살부의 욕망과 어머니와의 동침 욕망이 공존하는 존재인데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낸 존재가 바로 삼촌 왕인 클로디오스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의 투사가 바로 그이기 때문에 햄릿의 에고는 제지당하는 것이다. 여석기 교수는 이런 가설을 도식적이라고 비판한다.&#160;&#160;
앞서 말했듯이&#160;여석기의 &lt;나의 '햄릿'강의&gt;는 괜찮은 조타수 역할을 해주었다. 텍스트와 텍스트 바깥의 것을 나누어 본다면, 개인적으로 텍스트 외적인 것의 재미가 더 컸다. 판본의 문제라든지&#160;햄릿을 둘러싼 역사적 논쟁들,그리고 책 후반부에 나오는 햄릿과 관련된 연극,영화등에서 해석의 문제들. 실제로 텍스트 부분은 조금 더 보강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회가 되면 여석기의 책만 따로 리뷰를 작성할 생각도 있다.&#160;&#160;
&#160;이번에 햄릿을 읽을때는 평소 안하던 짓을 했다. &lt;햄릿&gt;의 영어 원문을 놓고 함께 읽었다. 판본도 잘 모르고 해서 그냥 최근에 나온 signet 시리즈의 페이퍼 북을 구했다. 이 책에도 원본 텍스트 이외에 읽을꺼리가 꽤 있다. 서론을 비롯해서 대여섯개의 에세이들이 있는데 꼼꼼히 읽어보면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대충 눈으로 훑어보다가 포기했다.&#160;&lt;햄릿&gt;은 연극대본이고 또 운문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낭독의 즐거움'을 느껴보고 싶었다. 독특한 리듬감은 번역으로는 결코 감당해 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lt;햄릿&gt;처럼 언어유희가 잘배치된 책에서는 그 단어와 운율을 직접 보기 위해서는 원문이 필요하다.&#160;
햄릿 1막에 왕 클로디어스와 햄릿의 첫 대면 장면이 있다.언젠가 알라딘의 로쟈님이 번역 비교를하면서 예로 들었던 문장이 나온다.&#160;
왕 클로디어스: but now,&#160;my cousin&#160;&#160;Hamlet, and my son (그렇고 자, 내 친척 햄릿,그리고 내 아들)&#160;&#160;
햄릿&#160;: A little more than kin, and less than kind (친척보단 조금 더 친하고, 자식보단 조금 더 친한)&#160;
번역은 여러 형태가 있는 걸로 안다.어찌되었거나 비교급 뒤에 kin과 kind를 배치해서 생기는 운율적 효과를 옮기기는 힘들다.&#160;여석기의 &lt;나의 햄릿 강의&gt;에는 이 문장 뒤에 나오는&#160;햄릿의 대사를 통해 번역자의 곤란함을 말한다.
"Not&#160;so, my lord, I am too much in the sun"&#160;
천만의 말씀, 볕을 너무 받아 아들 노릇이 눈부십니다: (여석기 역)&#160;
그게 아니죠,폐하,오히려 햇볕을 너무 많이 쬐고 있는 거죠(김정환 역)&#160;
김정환 역은 원문대조해서 보기 좋은 점이 거의 직독직해에 가깝다. 행을 원문에 거의 맞추고 있다보니 따라 가기 좋다. 그런데 저 문장을 처음 봤을 때 김정환 역으로는 '엥...뭥' 그랬다. 오히려 여석기 역이 클로디어스가 '햄릿 너 너무 우울해 보이는데...'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 비꼬는 식의 대답으로 어울린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in the sun이 앞서 말한 and my son의 댓구라는 것이다. 번역자는 그것까지 옮길 수는 없다.&#160;&lt;햄릿&gt;에 등장하는 이런 문장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160;특히 운문이라서 읽다보면 입에 감기는 무언가가 있는데 대개가 대조나 비교,동음이의어,또는 이음동의어등을 통한 말장난들이다. 원서와의 비교 낭독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다.&#160;
햄릿 5막에 나오는 이런 말들도 한 번 읽어 보자. 이건 우리말로 번역되어도 그런 효과를 발휘하기는 하지만....밑줄 그은 말이어서 옮겨보자&#160;
참새 한마리가 떨어지는 데도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 그게 지금이라면,앞으로 오지 않을 것. 앞으로 오지 않을 거라면,지금일 것.지금이 아니라면 그래도 올 것.&#160;
There is special providence in the fall of sparrow. If it be now, 'tis not to com. if it be not to com, it will be now. if it be not now, yet it will come&#160;&#160;
낭독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무지에서 오는 짜증을 감당해야 한다. 현대어도 아닌 옛날 잉글리쉬를 뜻도 모르면서 따라 읽는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lt;햄릿&gt; 읽기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160;그래서 나같은 이가 자주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160;
&lt;햄릿&gt;의 주인공들의 독백을 1막부터 하나씩 따로 읽어보면 주인공 햄릿의 내면적 변화가 드러난다. 특히 5막에서 햄릿은 과거와의 어떤 단절이 있다. 그가 4막에서 포틴브라스의 군대를 보고&#160;했던 독백처럼 '위대하다는 것은 위대한 명분없이는 움직이지 않는게 아니라,지푸라기 하나를 놓고도 위대하게 싸우는거다' 라는 위치에 올라섰다. 여석기의 책에는 그래서 5막에는 독백이 없다라고 한다.&#160;햄릿의 독백만 모두 따로 떼어 읽어 본 것도 이번 &lt;햄릿&gt; 읽기의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인생의 어떤 국면마다 바뀌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개인 안에 들어 있는 비겁함과 용기,선과 악 사이의 끊임없는 대결처럼 보이기도 한다.&#160;&#160;
&#160;햄릿을 읽다가 '존재'와 '죽음' 사이, 그 어떤 공간에 대해 생각한다.&#160;&lt;햄릿&gt;의 첫번째 대사가 '너는 누구냐' 라는 질문이었고 햄릿의 마지막 대사가 '나머지는 침묵이로다'이다. 죽음은 말을 할 수 없다. 햄릿이라는&#160;텍스트 안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수시로 등장하지만 형식상으로도 그런 틀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존재' 에 대해 말하길 좋아하지만 '죽음'에 대해 말하기 싫어 한다. 아니 오히려 '죽음'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것도 안다. 특히 좀 의식있다는 사람들,좀 읽었다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데&#160;모두 거짓이다. 샛빨간 거짓이다. 자기 조차 속이는 거짓이다. 그런 초연함 속에서도&#160;당신은,아니 나는 왜 그렇게 살고 있는가? 초연한 그대는 새치기 하는 자동차에 욕지거리를 하고, 더러운 승냥이가 당신의 이웃을 물어뜯고 있어도&#160;눈만 살짝 돌리며 어제처럼&#160;아이에게 밥을 먹인다.&#160;살아 생전 언제나 '죽음'은 타자이다.&#160;햄릿 역시 실존의 딜레마 앞에서 언제나 '죽음'이란 것 때문에 애를 먹었다. 그 '죽음'을 두려워하든 비웃든 부러워하든,어떤 형태로든 그 앞에 이 문제는 장애였다. 우리는 '죽음' 앞에 겸손할 수 있을까? '죽음' 앞에 걸려 있는 나를 넘어갈 수 있을까? 언제쯤 되면 이런 미력한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 누군가&#160;내 생명줄을 손아귀에 쥐고 흔들때, 그 때서 비로소 '삶'과 '죽음'의 진실에 눈을 뜰 것인가?&#160;&#160;내가 큰 궤적을 그리며 땅으로 쓰러질 때야 비로소&#160;살아 있는 것의 의미를 알 것인가?&#160;나는 나를&#160;왜 구타하지 못하는가? 사라지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160;
가을이 깊었는데 이 애벌레는 아직 나비가 못되었구나.(바쇼)&#160;&#160;]]></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40/95/cover150/898899683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409551</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내 구원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 적이라면... - [죽음과 소녀]</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2336757</link><pubDate>Mon, 06 Oct 2008 14: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233675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71279&TPaperId=233675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93/76/coveroff/893647127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71279&TPaperId=233675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죽음과 소녀</a><br/>아리엘 도르프만 지음, 김명환.김엘리사 옮김 / 창비 / 2007년 07월<br/></td></tr></table><br/>"혁명은 군부의 최종 승인을 필요로 한다."&#160;&#160;
뜬금없이 '왠&#160;반동적인 발언인가?' 하는 의심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한 쪽에서는 군대를 없애자고 퍼포먼스를 하는 마당에 말이다. 그리고 '군정종식' 을 외치던 YS,DJ 도 대통령 한 번씩 다 해먹은 이 시대 이 땅에서 말이다. 
먼저 이 말을 해명하기 위해 두 가지 전제를 이야기 해야 겠다. 첫째, 여기서 말하는 '혁명'은&#160;요즘 유행하는 '문화혁명'이나 신비주의적인 '의식혁명'을 뜻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혁명은&#160;가끔&#160;모든 혁명적 좌절을 '영속혁명'의 대의 아래서 '성공'으로 치장하는&#160;신학적인 측면이 있다. 이것이&#160;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대의를 잊지 않기 위한 전술로 효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160;여기서&#160;'혁명'은 고전적 의미의&#160;'정치 권력'의 전복이나 소유와 관련있는 '클래식한 의미의&#160;혁명'이다. 두번 째로 이&#160;말이 귀에 거슬리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산층 진보'의 '이데올로기적 과격성'을 잠시 덮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160;그들 중&#160;한 명이다. 추락의 낭떨어지에서 줄타기를 하는 다른 모든 중산층들 처럼. 그러므로 굳이 이를 폄하 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단 '중산층 진보'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공중부양'으로&#160;정치시키는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160;의외로&#160;모니터 상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실재보다 훨씬&#160;당당하게 급진 좌파적이며 아나키스트적인 흥분을 많이 목격하곤 한다. 자기주장이 담는 내적 모순에 대한 이론적 성찰은 별로 관심이 없다.&#160;이런 '흥분파'는 한 줌의 '군부' 가 어찌 '혁명'의 위대한 기치를 좌우할 수 있느냐고&#160;분개할 것이다.&#160;하지만&#160;'자기정초적&#160;흥분' 만&#160;정돈하고 본다면 이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160;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결국 군부가 마지막 도장을 찍어 주어야 한다. 군부가 혁명 성패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귀에 거슬리게 들리지만...) 그렇기 때문에 혁명 세력들은 외부 무력에 상응하는 자체적인 무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러시아 혁명이다. 아니면 최소한 군부가 혁명적 시기에 중립 내지는 유보적 입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치명적으로 실패한 예가 바로 살바도르 아엔데의 칠레다. (칠레의 역사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아리엘 도르프만에게 '슬픈 칠레'는&#160;어머니의&#160;자궁과도 같다.&#160;이 책에 실린 그의 작품들은&#160;탯줄을 통해 다시 그 역사적인 칠레와 연결된다.&#160;여정은 칠레라는&#160;한 나라에 머물지 않고 역사와 그 안의 사람들이라는 보편성 으로&#160;승격된다. 대충&#160;여기까지만 들어봐도 이 책이 요즘말로 'COOL'&#160;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160; 여기에는 '프라다를 입은 악마'도 등장하지 않고 '쇼퍼홀릭'들도 나오지 않는다.&#160;자본주의적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TV화면을 통해 이미지로 소비되는 -수잔 손택식으로 말하자면- 고통받는 타인의 모습들이 모두 주인공이다. 첫번재 희곡&#160;&lt;과부들&gt;에서는 남편과 자식을 군부에 빼앗기고 찍소리도 못하는 과부들이 나온다. &lt;죽음과 소녀&gt;는&#160;성고문 피해자가 등장한다. &lt;경계선 너머&gt;에서는&#160;하루 아침에 이산가족이 되는 노부부가 나오고 &lt;연옥&gt;은 입에 담기 힘든 범죄를 저지른 남녀가 무간지옥에서 들려주는 귀곡성이 흘러나온다.
나태한 현실을 고발하는 '리얼리즘'을 '진보'와 등치시키는 사람들은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겠냐만은-이런&#160;읽을 거리에 관심을 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반쪽이다. 이 책은 '자연주의'로서의 '리얼리즘'이 아니다. 아리엘 도르프만의 말은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형식 사이의 전통적인 미학관을 보여준다.
"실제 인간의 고통에서 나온 것이므로 역사적인것이지만 동시에 직접적인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명하는 재현의 미학적,문법적 법칙을 따른다."&#160;
이&#160;희곡집에 등장하는 네 편의 희곡은 역사의&#160;핏빛 강물 위에&#160;떠 있다.&#160;특히 아픈 역사로 점철된 한국민에게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글들이 한 자 한 자 우리들의 언어로 씌진 듯 한 착각을&#160;불러 일으킨다.&#160; 등장인물들이 많은 &lt;과부들&gt;은 아프카니스탄의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흙냄새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훨씬더 비의적이다. 검은 강물 사이로 떠오르는 사라진 사람들과&#160;연속적인 사건들은 마치 스릴러를 보는 긴박감을 준다. 그러면서 인물들 사이의 다층적인 입장과 갈등들이 오래되 고성을 타고오르는 덩쿨처럼 뒤섞인다.&#160;강물에 떠오른&#160; 한 구의 시체를 두고 그 안에서 모두 실종된 자기 가족의 얼굴을 읽어내는 장면은 묵뚝한 슬픔이 가진 보편성으로 독자까지 끌어들인다. 이 작품은 결국 한 편의 연극을 위한 대본임에도 읽고 나면 말없는 강물의 묵묵함처럼 대하드라마를 본 듯 한 느낌을 준다.
네 편의 희곡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또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작품은 역시 &lt;죽음과 소녀&gt;이다. &lt;과부들&gt;이&#160;'쿠르릉 쿠르릉' 거리는 어두운 강물 소리를 계속 귓전에 남기면서 진행된다면 이 작품은 계속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의&#160;제1 주제로&#160;양 쪽 귀를 괴롭힌다. (그의 작품이 상당히 청각적이라는 사실을&#160;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깨닫는다. &lt;경계선 너머&gt;는 포성으로 &lt;연옥&gt;은&#160;소리가 없는 '무음'으로 청각적이다.) 이 작품&lt;죽음과 소녀&gt;는 94년에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에이리언의 여전사 시고니 위버를 기용하여 &lt;진실&gt;이란 제목으로 영화화했다.&#160;영화 첫 장면과 끝장면에 공연장에서&#160;슈베르트를 듣고 있는 시고니 위버가 나온다.
이 작품은&#160;현실적이다.&#160;'진실과 화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것은 정녕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그냥&#160;'정의로운 사람들과 그들의 역사가 나쁜 놈들 입에서 진실을&#160;말하게 하면 된다.' 라는 단순함으로는&#160;이런 딜레마들을 헤쳐나갈 수 없다.&#160;과거사 위원회로 뽑힌&#160;운동경력이 있는 남편과&#160;남편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고문의 후유증을&#160;안고 사는 여자, 그리고 정말 고문 협력자였는지, 아니면 아니었는지 끝까지 모호하게 남겨진 의사. 이들 세 명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진실'과 '정의' 그리고 '현실' 을 둘러싼 다층적인 양상을 목도하게 한다.&#160;아내의 '사적복수론'과 그를 설득하려는 남편의 '역사 처벌론'은&#160;팽팽한 긴장감이&#160;느껴지는 대목들이다.&#160;독자들은 아내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할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의&#160;현실적 논리는 결코 외면할 수 없다. 마치&#160;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 던지는 문제를 다시 재현하는 듯 하다. 결국 이들은 절충안을 찾는다. &#160;&#160;아리엘 도르프만은 그리고 독자에게&#160;묻는다.
"우리가 과거의 수인이 되지 않고 어떻게 과거를 살아 있게&#160;할 것인가.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진실을 희생시키는 것은 정당한가? ...그리고 가장 큰 고통을&#160;받은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는 얼마나 죄죄를 짓고 있는가?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것 중 가장 큰 딜레마는 ,민주적 안정을 만들어내는 국민적 합의를 깨지 않고 어떻게 이런 쟁점들과 씨름할 것인가? "
나는 아리엘 도르프만이&#160;&lt;죽음과 소녀&gt;에서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그래. 이게 '정의야' 이렇게 하면&#160;해결 돼. 나머지는 부차적이야" 라고&#160;1분쯤 생각하고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명품족'만큼이나 혐오한다. 아니면 천재성에 질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lt;죽음과 소녀&gt;에서의 문제 의식은 &lt;연옥&gt;으로 이어진다. &lt;연옥&gt;은 처음에 읽다보면 '뭐야..이게 어찌 되는거야' 라고&#160;운전대를 어디로 잡아야하는지&#160;&#160;갈팡질팡하게 만든다. 사무엘 베케트의 &lt;고도를 기다리며&gt;처럼은 아니지만 시공간도 모호하고&#160;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남녀가 서로 비켜가면서 이야기하는 부분들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건이 무엇인지를 앞선 작품들처럼 한 번에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점점&#160;&lt;연옥&gt;은&#160;정신병동의 하얀빛 처럼 환한 매력을 선보인다.&#160;그리고 책을 다 덮고 나면 가장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lt;연옥&gt;을 꼽을 수 밖에 없다. &lt;연옥&gt;은&#160;정치사적 상흔을 다루지는&#160;않는다.&#160;그렇지만 아리엘 도르프만이 지속적으로 부여 잡고 있는 '진실과 화해 그리고 치유'에&#160;대한 이야기를 사이코드라마와도 같은 형식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서로를 치유하는 목적이라는 측면에서 본 사이코 드라마이다.)&#160;&#160;&#160;&#160;
&lt;연옥&gt;의 배경은 말 그대로 '연옥'이다. 처음에는 이 배경조차 이해가 되지 않아서 허발질을 했다는 것이 사실이다.&#160;배경을 설명하지&#160;않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저 하얀 방이라고만 무대를 설정한다. 남녀는 일종의 '무간도'와도 같은 '연옥'에 와있는 것이다.&#160;작가가 후기에 그곳이 단테적인 연옥이 아니라 불교적인 공간이라고 말한 것은 이 장소가 '윤회'를 준비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회'에 앞서 남녀가 해야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이 작가가 평소 즐겨찾는 주제를 풀어나갈 자리로 본 것이다.&#160;주인공들은 서로를 심문하는 위치에서&#160;'스스로의 정화'를 요구한다. '정화'되지 못하면&#160;끝없이 이&#160;'중음'의 공간에서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160;
남자:&#160; 딱 하나 알고 싶은 게 있어. 윤회는 끝이 날까?
여자: 네가 그녀를 치유할 수 있다면, 그럴거야.
&#160;극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위치가 서로 뫼비우스띠처럼 얽힌다. 단순히 한 사람의&#160;심문자가 피심문자가 되는 성질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상처로서 심문자가 되기도 그 반대역을 맡기도 한다. 이들은 서로가 연속되는 연할 속에서도 서로를 감추며, 속인다.
여자" 나는 너의 담당 사건이야. 너의 유일한 담당 사건이지, 내가 돌아가면, 너도 돌아가는 거야.내가 지워지면, 그들이 너도 지워버릴 걸.맞지?
&#160;작가는 극의 끝으로 다가가면서 그들의 인격너머에 있는&#160;그곳가지 서로 닿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중적인 심문/재판은 연기를 하는 자들의 인격을 붕괴시키고 그들의 자아를 가린 베일을 찢어버리는 방법이다." 
나는 인간은 결코 그 지점까지 닿을 수 없다라고 생각한다. 자아의 베일을 벗는 다는 것은 그걸 작동하는 또 하나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런데&#160;그곳은 '공백'이다. 어떻게 '공백'을&#160;언어로 밣혀낼 수 가 있다는 말인가? &#160;우리는 자신에게나 타자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있으나 그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작업이다. 어쨋거나 작가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현실적인 이유에서 이 극을 진행시켜 나간다. 그에게는&#160;'소통'의 일종의 희망이다. '폭력과&#160;공포와 배신으로 오염된' 세상에서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첫 단초는 '소통'으로 부터 찾아야 한다는&#160;낙관적인 믿음이다. 그러면서 이 작품이 갖는 의미를 질문이라고 말한다.
"어제 우리에게 가해진 경악할 일들이 우리가 내일 다른 사람에게 저지르는 공포를 불러오는 이 때, 내가 희망하는 바는 적어도 이 희곡이 비난과 분노의 순환을 감히 어떻게 깨고 넘어설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었다."
이 책의 매력적인 점 중에 하나는 각 편 마다 작품 속 인물들이 태어나는 산고와 작품에 나타난&#160; 작가의 문제 의식들을 작가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간혹 '이런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구나' 하는 지점을 작가의 입을 통해 만날 때는 정답을 맞추고 우쭐해진 소년같아진다. 그러나 내가 더 크게 위안을 받을 때는 가끔은 현실의 언어난수표 속에서 내가 언어로 형상화하지 못했거나, 차마 이해받지 못할 두려움에 말하지 못하는&#160;질문들에 작가가 촉수를 뻗어있을&#160;때, 나는 가끔 그럴 때 '외롭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160;&#160;&#160;]]></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93/76/cover150/893647127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37621</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연애 잘하려면 고전을 읽으라구... - [거장과 마르가리타]</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2275578</link><pubDate>Mon, 01 Sep 2008 12: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227557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18642&TPaperId=227557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21/93/coveroff/893201864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018642&TPaperId=227557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거장과 마르가리타</a><br/>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김혜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05월<br/></td></tr></table><br/>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그 루카치, &lt;소설의 이론&gt;
그렇다. 자동차 배기가스 때문이다. 아니 술집의 네온 싸인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도심에서 별을 볼 수는 없다. 작은 곰을 찾겠다고 옥상 위로 올라가는 소년이 없으니 밤하늘을 쳐다보는 어른은 더더욱 드물 수 밖에.
하지만&#160;소년! &#160;실망할 필요는 없다.&#160;너무 오랫동안 굳은 상처는 굳은 살이되어서 아프지도 않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알라딘 천장에 뜨는&#160;별이 있지 않은가?&#160;&#160;또한 매주마다 시대의 교양인을 위한 영화 잡지에도 별이 뜬다.&#160;안도의 한숨을 쉬자....oh! no.no. .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자.
'떠 봤자. 별은 다섯뿐이다.'
청천 하늘엔 잔 별도 많구요.이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이미 간파하셨을 것이다.
"왜 별은 다섯뿐일까?" 가 내 수심의 뿌리이다. '많아봐야 고작...다섯이라니. 이건 부당하다'
나는&#160;고전을 읽을 때 머릿 속에 환청이 들린다. 그 음악은 '감탄'을 도입부에 베이스 라인으로 깔고 간다.'둥 둥 둥둥' . 그리고 이어서 색소폰과 트럼펫같은&#160;생각이 잼을&#160;한다. 하나는 이런 감사의 멜로디를 쫓아간다. '이걸 읽지 않고 죽었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랄라라'&#160; 그리고 또 다른 멜로디는 탄식의&#160;가사를 쫓는다. '도대체 뭘 하다가 이걸 이제야 본 거야. 띨띨띨..'
미하일 불가코프의 &lt;거장과 마르가리타&gt;에 대한 나의 소견은 다 밝혔다. 할머니 손등같은 인문학의 리뷰를 던지고&#160;쾌청발랄 리뷰를 쓰니 9월 아침처럼&#160;좋다.&#160;
&#160;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해도..너의 목소리가 들려어어..너의 목소리가 들려어...너의 목소리..너의 목소리이이... .&#160; - 델리스파이스 &lt;차우차우&gt;
모스크바 거리에 나타난 볼란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매력적인 -이름이 여럿인 -친구가 전 서리이자&#160;하-노리츠(예수)의 제자라고 자임하는 마태에게 이런 말을 한다.&#160;
&#160;&#160; "너는 마치 그림자들을, 그리고 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어.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는 건 어떤가. 만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의 선은 무슨 일을 하게 될까? 또 만약 이 지상에서 모든 그림자들이 사라진다면, 그때 지상의 모습은 어떻게 될 것 같나? 그림자는 사물과 인간들로부터 만들어지지. 여기 내 검의 그림자처럼.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은 나무와 살아 있는 존재들이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너는 지구 전체를 벗겨버리며고 하고 있어! 벌거벗은 빛을 즐기려는 너의 환상으로 이 지상의 모든 나무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벗겨내버리고 싶은 건가? 너는 어리석어."&#160;

<br />
&lt;거장과 마르가리타&gt;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160;부분이 여기다.&#160;나는 물론&#160;메피스토펠레스의 발푸기르스의 밤에도 볼란드의 아파트에서 열린 만월의 무도회에도 초청받지 못했다. 내가 설마 이 부분을 좋아했다고&#160;'선 의지'로 무장한 '계몽주의자'들이 비난한다면 나는 당당히 꼬리를 내릴 터이다. "아니요. 그냥 취소할께요.&#160; 선이 반드시 승리하는 권선징악의 전래동화와 헐리우드 영화가 좋아요." 라고 사상전향을 할 것이다.
&lt;거장과 마르가리타&gt;에 볼란드 일당을 따라가다가 이게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검색에는 나와 있지 않다.(&#160;TV 드라마 이야기는 나와있다. )볼란드 일당의 행각을 보다가 문득 떠오른 감독이 '팀 버튼'이다.&#160; 볼란드 일당의 캐릭터는 마치 '팀 버튼 표' 영화에 나오는 악당들과 거의 흡사하다. 귀여운 그로테스크함도 그렇고, 베헤못과 코르비예프의 장난끼어린 짓도 그렇다. 악마 대장 볼란드와 고양이 베헤못의 체스 두는 장면은 진짜 배를 잡고 넘어지게 만든다.
나는 팀 버튼이 &lt;거장과 마르가리타&gt;를 분명히 봤을 것이라고 내 맘대로 추측하고 싶다. 아니 크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내 맘대로 우겨버리고 싶다. 소설이 다루는 주제와 풍자는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더라도, 지금 유명한 헐리우드 감독 중에서 &lt;거장과 마르가리타&gt;를 가장 그럴싸 하에 영화로 만들어 줄 사람 하나를 뽑자면 당연히 '팀 버튼' 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약간은 환상적이며서, 만화같은 미장센들도 너무 잘 어울린다. 그러므로 국내에&#160;불가코프의 팬들보다 대략 11배쯤 많을 팀 버튼의 팬이라면&#160;&lt;거장과 마르가리타&gt;를 읽고 팀 버튼에게&#160;제작 압력 이메일을 보내자...물론 팀 버튼이 영화를 잘만들어도 결코 불가코프의 소설을 따라잡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영화와 소설을 단순 비교하는&#160;초등학교 방학 숙제형 감상만 피한다면 팀 버튼이 만든 영화도 즐거울 것이다. 원작이 뛰어나니까 말이다.&#160;
&lt;거장과 마르가리타&gt;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볼란드와 일당이 도착한 후 나흘 간의 소란과 거장이 쓴 본디오 빌라도의 이야기다. 모스크바와 예루살렘이 시공간을 확확 건너뛰며 아주 빠르게 진행된다. 역자 해제를 보면 이 시공간은 대칭적으로 배치된 것이다. 뭐 구조를 몰라도 흰 눈이 내릴 것 같은 모스크바 거리와 타는 목마름의 예루살렘을 오고가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다. 거기에 2000년 정도이 시간 이동까지 있다. 이런 시간여행을 기획하다니, 미하일 불가코프는 '볼란드'의 일행이 되어버린 '거장'이다.(중의법인거 알지..밑줄 쫘악)
&#160;모스크바는 좌충우돌이다. 검은 마술사 볼란드의 등장 이후에 생긴 일이다. 이 일당은 재기발랄,깜찍하다. 특히 인간들이 '서류'에 얽매이는 것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그래서 뭐든지 '서류조작'을 통해 인간들을 설득한다. 도저히 믿지 못할 일도 '서류' 보여주면 다 통한다. 근대사회에서 '서류'는 어쩌며 '존재'에 선행하는지도 모른다. 즉 '서류'가 있어야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주민등록증' 없으면 '비존재'가 되는거다. &#160;TV 다큐멘터리나 진보적 잡지에 실린 '서류' 없는 '호모사케르' 들의 삶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면 좋을 듯 하다. 하여간 스탈린의 러시아 역시'서류' 한 방이면 다 된다. 거기에 볼란드 일당은 필요하면 알리바이까지 만들어주는 친절한 악마들이다. 그러니 모스크바가 몇 일 동안 헤괴한 일을 수습정리하게 위해 바둥거린 것은 당연하다.
'빌라도의 이야기는 거장의 소설을 통해, 또 볼란드의 입을 통해 액자소설처럼 구성된다. 페르 라게르비스크가 예수 대신 사면된 바라바를 모티브로 상상력을 펼쳐 &lt;바라바&gt;를 썼다. 이걸로 노벨상도 받았다. 소설 속 거장은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림으로 영원히 예수와 함께 이름을 남긴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게 상상력의 면류관을 씌운다. '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의 외아들...&#160;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조기 교육이 중요한게 초등학교 때 외운건데도 아직 기억이난다. 하여간 빌라도, 이렇게 운빨이 없을 수가 있나 싶다. 어쩌다가 저 기도문에까지 이름을 남겨서 만대에 이렇게 오명을 남기는가? 아마도 불가코프 역시 그런 빌라도가 불쌍했고 그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혹했다 싶었나 보다. 거장을 통해 빌라도의 울먹이는 소리를 대신 들려준다.
&lt;거장과 마르가리타&gt;에서 주인공들은 불행한 거장과 그의 연인 마르가리타이다.&#160;"사랑은 골목길에서 갑자기 살인자가 튀어나오 듯이 우리 앞에 나타나 우리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난 사람들이니 주인공은 주인공이다.그런데 도대체 왜 그들이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아야 하는 건가? 나는 볼란드와 그의 일행이 조연상 후보에 올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쉽다. 물론 그들이 아쉬워할 일이야 없겠지만...어쨋든 그들이 수상 무대에 오른다면 분명히 모스크바에서 했던 것 보다 더 깜찍한 흑마술 쇼를 보여줄 텐데 말이다.
전 세계에 중계되는 최고의 쇼가 될게 뻔하다.ㅋㅋ

사족)) 
&lt;거장과 마르가리타&gt;에서 몇 몇 구절을 썩먹었는데..."진실을 말하는 것은 쉽고 기분 좋은 일이다."같은 것들 말이다.&#160;덧붙이자면 강 건너에서 말이다.&#160;'이명박은 쥐다 ' 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쉽고 기분 좋은 일인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안한다. (알겠지만, 사회와 냉전중인 부적응자가 하는 말이니 무시해도 된다.흐흐 )
또 한가지 잠결에 있는 와이프에게 ' 운명을 함께 나누는 이' 라고 불러주었더니 잠결에도 웃으면서 좋단다.ㅋㅋ "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운명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에서 훔쳐왔다. 거 봐라.. 고전 읽으면 다 좋은거라구..연애하려면 고전을 읽으라구, 소년!!&#160;이 책이 고전이냐구?&#160; "몰라. 하지만 고전이&#160;될 거야."
&#160;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21/93/cover150/893201864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219380</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단테에게 가기 위해 극복해야하는 가르시아 효과 - [단테 신곡 강의 - 서양 고전 읽기의 典範]</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2232195</link><pubDate>Fri, 08 Aug 2008 11: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223219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801033&TPaperId=22321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70/6/coveroff/899280103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801033&TPaperId=223219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단테 신곡 강의 - 서양 고전 읽기의 典範</a><br/>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안티쿠스 / 2008년 01월<br/></td></tr></table><br/>나는 아직 단테의 &lt;신곡&gt;을 읽지 않았다.
&#160;&#160;아무리 각종 단체에서 수 십년 동안 '필독' 이니 '100대 명작'이니 해도 돌아앉은 돌벅수처럼 끄떡하지 않았다.&#160;필름을 이 십여년 전으로 돌려보자. '레드 썬.!!'
&#160;&#160;고등학교 다닐때 사실 단테 표 &lt;신곡&gt;라면의 겉봉지를 뜯은 적이 있다.&#160;요즘처럼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팔팔 끓는 날씨 속에서도 단테표 라면이 끓였다.&#160;면발 넣고 스푸 넣고...그러나 뚜껑한번 열어보고&#160;지옥문 닫히듯 '쿵' 닫아버렸다. &lt;정석수학&gt;과 &lt;성문종합영어&gt;의 익숙함이 차라리 나았다. &#160;의고투의 말투와 발음도 안돼는 주석 속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인물들은 최악이었다. 역시 '라면은&#160;몸에 않좋다.'는 고금의 진리 되뇌이며 &lt;신곡&gt;과 돌아섰다. 내게 &lt;신곡&gt;은 DIVIINA COMMEDIA가 아니라 '신 한번 보려다가 곡소리나는 책' 이었다. 
그리고 이제 " 우리네 생명길 한 가운데에서/어두운 삼림에 있음을 알았을 때 (도모노부 역)' 다시 &lt;신곡&gt;을 만나려고 한다. 단테 시대보다 인간의 평균 연령이 늘었을 테니&#160;단테가 말한 '인생의 반고비' 가 물리적으로도&#160; 내 나이 즈음이 아닐까 한다. 이제 다시 단테의 &lt;신곡&gt;을 만날 용기가 생긴 것이다. (내 나이가 이제 그렇게 되어서 일지도)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che la diritta via era smarrita.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lt;단테 신곡 강의&gt;는 &lt;신곡&gt;으로 가기 위해 먼저 만난 책이다. 어린 시절 한 번 채한 음식은 나이가 들어도 먹기가 꺼려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가르시아 효과'라고 한다고 들었다. &lt;신곡&gt;에 이미 데인&#160;나 역시 조심스럽게 가고 싶어서&#160;이 책을 고른 것이다. 결론부터 먼저&#160;말하자면&#160;나처럼 &lt;신곡&gt;에 소화불량을 겪었던&#160;사람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소화제가 될 듯 하다. 물론&#160;단테 전공자이거나 각종 서지분석의 대가들에게 이 책은 시시할 수도 있다. '뭐 다 아는&#160;얘기를&#160;하네.' 라고&#160;말할 수도 있을 법하다.&#160;그런 사람들에게도&#160;이마미치 도모노부의 강의에 직접 참가해서 질의 응답을 하던 일본의 노교수들의 겸허함 정도는 책을 읽고 배워도 될 듯 하다.
도모노부 교수 역시 단테 전공자는 아니다. 저자의 약력과 본문 내용을 살펴봐도 어림짐작 할 수 있다. 그는 철학전공이었고 주로&#160;철학이나 미학관련&#160;책들을 펴냈다. 그런 그가 단테에 대해 전문가가 된 것은 순전히 개인적 관심과 그에 이어지는 '토요공부법'에 의한 것이다.&#160;철학 공부에도 빠듯했던 그는&#160;스스로 규칙을 정해&#160;매주 토요일 밤 3시간씩 단테와의 연애를 한다. &lt;신곡&gt;을 읽고 비교분석하고 정리작업을 한다. 이 책은&#160;그렇게 오래 숙성된 개인적 노력의 결과이다. &#160;
저자는 단테의 &lt;신곡&gt;으로&#160;곧바로 들어가지 않는다.&#160;단테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베르길리우스를 먼저 말한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가&#160;서사시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던 호머를 되짚어간다. 그러닉까 계보로 말하자면 "호머-베르길리우스-단테'&#160;로 이어진다. 도모노부 교수는 서사시의 전통과 각 작가들의 차이점을 비교분석하면서 &lt;신곡&gt;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준다.&#160;강유원의 &lt;서구정치사상&#160;읽기&gt;라는 책에도 보면&#160;'호머-베르길리우스-단테'의 문장을 비교하면서&#160;시대적&#160;에피스테메의 차이를 예로 드는 장면이 있다. 도모노부 교수의 분석틀과 거의 똑같다.&#160;다른 책에는 과문하니까 이것이 일종의 서사시 전통을 해석하는 고전적인 방식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lt;단테 신곡 강의&gt;는 이렇게&#160;호머와 베르길리우스의 그리스.로마문화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단테의 신곡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책 초반부에&#160;이야기한다. 그리고 4번째 강의 부터 '지옥'으로 들어간다. 저자는&#160;매 강의 도입부에&#160;지난번 장에서 언급했던 것들을&#160;복습하는 차원에서 정리해 준다. 너무 많은 내용으로&#160;두서가 없어진&#160;뇌세포들을 짧고 간단하게 줄맞춤해주는 셈이다. 도모노부는 단테를&#160;대단한 문학가로만 평가하는 것에 반대한다.그가 평가하는 단테는 비록 실패했으나 현실의 정치가였으며 성찰적인 철학자이다.&#160;시적 영감은 자기 개혁으로 이어진다.그리고 이것은&#160;역사의 목적으로서 구원에 이르는&#160;사고의 원형을 형성한다. 도모노부는 단테의 이러한 사상이 비코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160;&#160;&#160;&#160;&#160;
단테는 이제 지옥문 앞에 서 있다.
"영원한 것 외에는 나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 없으며, 그리하여 나 영원토록 서 있으리라, 너희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야마카와 역)
아주 유명한 지옥문의 자기 소개식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을 수 십번도 더 읽었다. 그런데 너무 좋다.&#160;읽으면 읽을 수 록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것이 '고전'의 포스가 아닌가 싶다. 또한 단테 이후 동서양의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장을 읽고 감동하고 좋아했을 것을 상상하면서 나 역시 그들과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는데 무한한 동류의식을 느꼈다. 내가 '고전'을 읽고 나면 뿌듯해지는 것 중 하나는 이런 황당한 상상력도 한 몫을 한다. 단테를 버나드 쇼도 읽지 않았을 까, 오스카 와일드도 읽었겠지,토마스만도, 카잔차키스도...햐...나도 그들이 본 걸 같이 보는구나. (우리는 같은 독자!!) 이런 생각들을 하면 인류의 위대한 인물들과 한 무리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주어서 무엇보다 흐뭇하다. (물론 다짜고짜 내맘대로 하는 상상이지만...^^ )&#160; 도모노부 선생은 지옥의 공간성을 이야기하면서 지옥이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의 상상이 고착화되서 지옥은 땅 속 깊이 천국은 하늘 저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내게 '그건 아니지' 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단테가 뒤에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빛의 천국이야 나는 모르겠다만 지옥은 이 땅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160;인류가 겪어온 수많은 전쟁, 기아, 살육,&#160;착취, 배신 등을 생각하면 지옥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단테는 '희망'에 주목한다. 즉 '희망'을 버린 모든 곳이 '지옥' 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별'을 '희망'의 상징으로 읽어서&#160;천국,연옥,지옥에 나타나는 별의 이미지를 그때 그때 상기시킨다.
연옥편에서는 단테의 텍스트와&#160;르 고프의 명저 &lt;연옥의 탄생&gt;(바람구두님의 리뷰를 본 적이 있다.)를 소개하면서&#160;그리스도교가&#160;세속적 질문들에 대응하는 방식들을 이야기 한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태어난 사람들과 태어나자 죽은 아이들의 사후심판같은 것들 말이다. 르 고프는&#160;그런 문제에 대한 답변을 찾는 과정에서 13세기 이후 연옥 개념이 일반화된다고 말한다. 단테에게 연옥은 '불로서 정화하는 곳'이며 지옥처럼&#160;완벽하게 닫힌 구조는 아니라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이 열려 있는 곳으로&#160;정의한다.
도모노부 선생은&#160;&lt;천국&gt;편이&#160;철학적이고 교리적인 내용이 많아서 &lt;지옥&gt;편에 비해 외면받는다고 아쉬워한다. 그가 보기에 단테의 궁극적 목적은 '천국'에 이르는 길을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을 잊고 과정의 흥미진진함만을 쫓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는 것인 셈이다. 단테는 천국의 진리를 인간의 진리 범주 밖에 두고 있다. 인간의 격과 신의 격은 다르기때문이다. &lt;천국&gt;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관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고등학교때까지 교회를 다녔던 삐딱한 교인이었기이 한결 이해하기 좋았다. 일단 내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lt;신곡&gt;에는 '인간의&#160;희망과 의지가 우주를 움직이는 신의 사랑에 의해 작동'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가 있다.&#160;&lt;신곡&gt;가지고&#160;고등학교 학생처럼 종교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면&#160;그 신이 왜 그의 아들을 내려 보냈는지. 그리고 대속의&#160;과정이 인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같은 것들에 대한&#160;선이해는 필요할 듯 하다.
&lt;단테 신곡 강의&gt;를 읽다보면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낭독의 즐거움'의 문제이다. 단테의 &lt;신곡&gt;은 일종의 정형시이다.&#160;(로쟈님의 단테 페이퍼를 참고하시길..) 압운이 규칙적으로 반복된다.&#160;랩에서 '라임'이라고 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냥 저냥 이태리어 발음이야 대충 따라 간다해도&#160;도저히 그 '운율'을 흉내내지 못하겠다.&#160;책에는 '딴따 딴따'하면서 초등학교 음악시간처럼 몇 개의 예를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 귀로 한번도 들어 본 적이&#160;없으니 '과연 이렇게 읽는게 맞나? ' 싶다. 누군가 멋드러진 이탈리아어로&#160;읽어주는&#160;몇 몇 구절을 들어보고 싶다. (인터넷 검색을 해서 좀 찾아봐야 겠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독도'와 관련이 있다. 단테와 '독도'라니 '소주'와 '야채 비빕밥' 같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일본 이기기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일본에만도 단테 &lt;신곡&gt;의 번역본이 20여종이 넘는다고 한다. 그것이 중역을 포함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쪽발이' 일본은 '밥통' 과 '자동차' 만 잘만드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160;인문 사회적 토대는 상당히 깊고 저력이 있다. 일본의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짝' 신고&#160;'전자제품' 판 돈으로&#160; 문화 강국이 되었다는 식의 발상은 아주 저열하다. 그런 발상 머물고 있다면 '독도'를 지킬 수 없을 것 같다.&#160;
요즘 기업에서도 인문사회학에 관심을 갖는 듯 하다. 기업들이 직원들을 위해 강좌를 열기도 하고 의식있는 직장인들도 관심을 갖고 그런 가보다. 그런 관심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결국 '말 잘 듣고, '돈 잘벌어 올' 예비 CEO들을 창출하기 위해 인문학이 '이윤창출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인상이 있어서 의심쩍은 눈빛을 거둘수가 없다. 인문학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저마다 다른 답들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제 단테의 &lt;신곡&gt;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니던 &lt;신곡&gt;에 대한 '가르시아 이펙트'로 부터는&#160;벗어났다. 그리고 덤으로 한줄 한줄 아주 천천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마음 속에 담아둔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70/6/cover150/899280103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00627</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나 이런 웃긴 시를 봤나 - [그는 걸어서 온다 - 윤제림 시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2193017</link><pubDate>Fri, 18 Jul 2008 11: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219301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5613&TPaperId=219301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04/43/coveroff/89546056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5613&TPaperId=219301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그는 걸어서 온다 - 윤제림 시집</a><br/>윤제림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04월<br/></td></tr></table><br/>윤제림의 시는 웃긴다. -그래... 웃긴다.
물론 이 시집에 어설픈 간판쟁이처럼 이름을 달아줄 몇 몇 단어들이 내 주머니 속엔 있다. 이 친구들이 서로 치고 나가겠다고 열 바짝받은 냄비 속 옥수수 마냥 각축 중이다.&#160;하지만 간판을 팔레트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160;결국 한 두가지 주종을 이루는 색을 골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웃긴다' 라는 경거망동한 단어를 그 주머니 속에서 뽑아 들고 말았다. 
&#160;도대체 웃기는 걸 '웃긴다'는 말 말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 까? 내가 홍길동도 아닌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 이라 부르지 못한데서야 말이 되겠나.
싸리제 너머/비행운 떳다//&#160; 붉은 밭고랑에서 허리를 펴며/호미 든 손으로 차양을 만들며/남양댁/소리치겠다.//&#160; "저기 우리 진평이 간다"
우리나라 비행기는 전부 진평이가 몬다// ......&lt;공군소령 김진평&gt;
청소당번이 도망갔다/ 걸레질 몇 번 하고 다 했다며/ 가방도 그냥 두고 가는 그를/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괜히 왔다 간다"/ 가래침을 뱉으며/ 유유히 교문을 빠져나가는데 / 담임선생도 / 아무 말을 못했다. //.......&lt;걸레스님&gt; (중광 1935-2202)
안 우낀가?&#160;나만 웃긴가. ^^
&#160;&#160;마지막 시의 압권은 '담임선생도 아무 말을 못했다' 가 아닐까 싶다.&#160;그 벙찐 선생의 얼굴과 세상만물의 모든&#160;실을 끊고&#160;교문을 나서며 '씨-익'하고 웃는 걸레스님의 얼굴이 생각나지&#160;않는가?&#160; 일종의 니체적인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웃긴 시 한 편 더 보자.&#160;길다.
1. 화장실 다녀오느라 일행을 놓친 할머니 한 분이/ 줄지어 늘어선 유치원 아이들을 헤치며/ 아무 버스나 기웃거립니다.// 노란 버스와 아이들 역시 동무 하나가 안 보이는 지/ 선생님들은 손나팔을 만들어 선창을 하고/ 아이들은 합창을하듯 따라 부릅니다. 코-끼-리!
2. 사람과 차들의 단풍숲을 헤치며/ 대열을 빠져나온 버스 한 대가 어중간히 멈춰 섭니다.// 좁다랗게 열린 차창 하나에 서너 명의 할머니들이 매달려서/ 합창을 합니다. 밀-양-댁! // 좁다란 차창을 빠져나온 꼬깃한 손수건도 한 장 다급하게 소리를 칩니다.
3. 밀, 양, 댁이 열심히 뛰어갑니다// 할머니를 태운 버스가 조심조심/ 사람과 차들의 단풍숲 사이로 길을 냅니다// 그 길 끝에 아이 하나가 서 있습니다 /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입니다// 코, 끼, 리입니다.&#160;&#160; ... &lt;관광버스가 보이는 풍경&gt;
안 웃긴가? 안 웃기면 정말 당신은 과묵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메마른 사람이다. 컴퓨터로 글을 봐서 그럴지도 모르니 당장 시집을 사서 편안하게 '해우소'에 앉아서 읽어봐라. 당신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거다.
잡지에 글을 쓰는 평론가 신형철은 '시치미'의 어원에 장광설을 늘어 놓으며 윤제림의 전법이 '시침떼기'라는 것을 말한다. 앞의 세 시에서는 '진평이', '담임선생', '코, 끼, 리' 가 그런 '시치미'다. 그리고 이렇게 시치미 뚝 떼고 시인은 무리를 뒤로 하고 혼자 씩 웃으며 가는 거다. 윤제림의 시는 그래서 웃기는데 박장대소의 웃음이 아니다. 혼자 입을 실룩거리거나&#160; 입 한 쪽이 실에 의해 잡아당겨 진 듯 웃는 그런 웃음이다.
&#160;거기까지 좋았다. 그런데&#160;평론가의 글에서 그리고 저자의 약력에서&#160;내가&#160;윤제림이 '광고쟁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광고쟁이'를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자본주의의 꽃' 아닌가 ? 내 전공도 이 쪽과 관련이 있어서 친구들 중에도 광고밥 먹는 사람들이 꽤 많다.&#160;내겐 윤제림의 '시치미'떼기 전법이 요즘 유행하는 광고수법과 거의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좋다는 의미도 나쁘다는 의미도 아니다. 웃긴다는 의미다.^^ )&#160; TV 광고에서 '유머'는 중요하다. 이런 유머를 만들어 내는 방식 중에 하나가&#160;끝가지 그 광고 비밀을 움켜쥐고 있다고&#160;&#160;마지막 한 두 컷에서 폭로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볼까... 도서관에서 책고르는 것 만큼 너무 많아서 쉽게 떠오르지가 않는데...최근 광고중 영화배우 김수로의 '해드뱅잉'&#160;CF&#160;떠올려 보자.(잘 모르겠으면 검색해서 보시라.)&#160;김수로가 딮 퍼플의 &lt;SMOKE 0N THE WATER&gt;에 맞추어&#160;무아지경 상태에서 해드뱅잉을 한다. 잘도 한다. 날라리 논 가닥에 제대로 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주변 사람들이 김수로를 쳐다보고 있다 (자막: 지치시죠?) 김수로는 해드뱅잉을 한 것이 아니라 과하게 존 것이다.&#160;&#160;그리고 '활력 발효유...000" 마지막에 한방 김수로의 애드립이 결합된다. 쪽팔리니까 빨리 나가려고 옷을 입다가 거꾸로 걸치고 나간다. 15초 안에 반전이 이렇게 일어난다.
윤제림의 시를 계속 읽다보면 끝에 어떤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다리게 된다. 이게 관성화되니까 마치 해외 유명 TV광고 모음전을 보는 듯 하기도 하다. 이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또 하나의 반전이-내 말로 '반전'이다- 있다.
그의 시에는 웃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는&#160;평론가 이홍섭의 화엄세간론을 빌자면 부처님의 옅은 미소 속에 세상과&#160;사람에 대한 따뜻하면서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시를 광고와 달리 조금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반전이다.(앞의&#160;세 편의 시도 웃음속에 짠한 무언가가 있다.)&#160;이 범주는 우리의 촌정서에서 비롯되지만&#160;지엽적인데 머무르지 않는다. 더 넓은 세상과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다는 말이다.
낡고 지친 고깃배가 도망을 치면 얼마를 가랴.해경 순찰함에 끌려 배 들어온다. 목포항구 중국 배 하나 들어온다. 이 배엔 누가 탔나. 연변서 온 이가 박가. 길림 사는 최서방. 이룡강서 나온 장소저...갑판 밑에서 탄식하며 기어나오는데. 천리 뱃길 허사로세. 용궁 꿈도 헛꿈이로세. 어이 돌아가리. 빈손으로 어이 가리.&#160; ...(중략)... 어린 처녀 하나 유독 슬피 우는데, 아이고 아버지 불쌍한 우리 아버지. 이렇게 소리 높여 제 애비만 찾으며 울더라.&#160;&#160;&#160;&#160;&#160;&#160; ...&lt;심청가&gt;
절묘하지 않은가. 광고 전법은&#160;이렇게 사회적 맥락과 이어지면서 강한 효과를 발휘한다. 거기에 '심청전'이라는 우리 고전과의 접목이라니...울림이&#160;있는 시다.&#160;나는 이 시를 읽으며 예전에 봤던 신문기사를 떠올렸다. 선박 회사에 사기를 당한 조선족들 말이다. 꽤 오래 부산항에 억류되어 있었다. 상륙하지도 못하고 본국 송환까지 비참함 생활 속에 있었다. 브로커에게 돈 탈탈 털어 한국에 건너 왔을 텐데, 한국땅을 코 앞에 두고 땅을 밟지도 못했다.&#160;브로커는 이미 도주했고 단 한 푼도 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경찰도 딱한 사정을 이해하지만&#160;법적으로 돌려 보낼 수 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160;윤제림은 그 안에서 심청이를 본 것이다.&#160;비슷한 시를 또 보자.
나 어릴 때 학교에서 장갑 한 짝을 잃고/울면서 집에 온 적이 있었지/ 부지깽이로 죽도록 맞고 엄마한테 쫓겨났지/ 제 물건 하나 간수 못 하는 놈은 밥 먹일 필요도 없다고/ 엄마는 문을 닫았지/ 장갑 찾기 전에 집에 들어오지도 말라며
그런데 저를 어쩌나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저 늙은 소년은 손목 한 짝을 흘렸네/ 몇 살이나 먹었을까 겁에 질린 눈은/ 아직도 여덟 살처럼 깊고 맑은데/장갑도 아니고 손목을 잃었네/ (중략)
어찌할거나 어찌 집에 갈거나/ 제 손목도 간수 못 한 자식이// 제 움푹한 눈망울을 닮은/ 엄마 아버지 아니 온 식구가, 아니/ 온 동네가 빗자루를 들고 쫓을 테지/ 손목 찾아오라고 찾기 전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찾아보세나 사람들아...(중략)....걔 엄마 아버지한테 보이기라도 해야지/ 장갑도 아니고/ 손목인데.//
이제 웃음은 입꼬리를 내린다. 내가 사랑한&#160;윤제림의 웃음은 이런 것들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빛이 난다.&#160;구재 런닝이 새 런닝보다 빛날 때가 있다. 건강한 땀이 만들어낸 초코렛빛 피부&#160;위를 살며시 덥어주고 있는 구재 러닝은 표백제 냄새를 풍기는 새 런닝보다 훨씬 더 하얗다.
얘야, 이 사진 좀 보아라/ 엄마가 한국으로 돈 벌러 갔을 때란다/...모처럼 쉬는 날이라서/ 우리나라 사람들 열 댓명이 놀러 갔었지/ 아주 유명한 절이었다.
절 이름? 뭐더라. 엄마도 찾아봐야 알겠다// 네 아빠가 사준 것이라서/ 한 번도 안쓰고 넣어둔/ 수건 한 장.// 여기 있다/ 풀. 국. 사 관광기념
그래./ 엄마가 지금 네 나이에 돈 벌러 갔던/ 먼 동쪽 나라의/ 늦은 봄날 오후였다/ 풀. 국. 사였다.
.....&lt;풀국사&gt;
좀 심각해진 것 같으니, 다시 웃으며 끝내자. 아...그리고 마지막 한가지 더. 윤제림의 몇 몇 시에서는 하이쿠의 짧은 향기가 나기도 한다.
&#160;리뷰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시의 제목은 &lt;춘향가&gt;...더운 여름에 윤제림의 &lt;그는 걸어서 온다&gt;로 한 번 살짝 웃어주자. 운주사 와불들 처럼...끝.
부여중학교, 오늘도/ 이층 창가에 서서/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여선생을 이기려면//
나는 아무래도, 여기/ 표 파는 여자나 되어야 할까봐요./ 정림사지 오층석탑/ 당신을 흔들자면//
]]></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04/43/cover150/89546056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044390</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다 - [로드]</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2151621</link><pubDate>Mon, 23 Jun 2008 11: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215162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5907&TPaperId=215162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18/84/coveroff/600080706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5907&TPaperId=215162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로드</a><br/>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06월<br/></td></tr></table><br/>우리는 시간의 손아귀에 있다.<br />
진실은<br />
인간이란 태초부터,<br />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br />
아는 것이다.<br />
&#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 옥타비오 파스 &lt;산 일데폰 소야곡&gt; 중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딜때 마다 흑진주 빛 코울타르 위를 걷는 마음이었다. 곤충을 유혹하여 생의 마지막 숨결을 앗아가는&#160;거대한 식충 생물의 위장 , 책 장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것이 그 위액을 덮어쓰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책의 겉표지가 &#160;끈끈이 주걱의&#160;거대한 아가리였던 셈이다. 이미 하얗게 벌린 입 속으로 들어온 이상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식충 식물의 진액 속에서&#160;화사한 봄&#160;날을 상상하는 것은&#160;오히려 현재의 지옥보다 더 큰 '지옥의 추억'이다.
코맥 맥커시의 &lt;로드&gt;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왜&#160;온통 지구가 잿빛으로 변했는지, 왜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는지, 왜&#160;까마귀가 없는지, 왜 곡식들은 밑둥만 남고 말라버렸는지...&#160;이&#160;불친절함과 하드보일드한 문장들은 대가의 아우라가 주는 차가운 매력이다.&#160;조각가 자코메티의 움직이는 사람들을 글로 만나는 듯 문장과 단락들을 포정의 칼 솜씨로 뚝뚝 잘라내는 매커시의 능력은 그의 이름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무뚝뚝하고 뼈만 남은 문장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살덩어리들이 문장들을 꾹꾹 채우고 있다.
매커시는 '지구 최후의 날'-정확히는 '인류 최후의 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단 한 문장도&#160;언급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인류 최후의 날' 이후에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160; 하지만 매커시의 디스토피아를 유추해 볼 수는 있을 듯 하다.&#160;그의 시대에는 '3차 세계대전'이니 '핵전쟁'이니 하는 말이&#160;일상적인 공포로 작동할 수 있던 시대였다.&#160;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말들은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도 진부한 것이 되었다. 대신 '지구온난화',(영화 '투모로우) ,&#160;'치명적 바이러스' ( 영화 '지구 최후의 날', '둠스데이')&#160;같은 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160;그러나&#160;30대 이상의 세대에게&#160;그것은 SF적인 상상력이면서도 언제나 '실존'하는 공포의 하나였다. 영화 &lt; 그 날 이후&gt;와 &lt;요한계시록&gt;의 '불로써 심판하는 하나님' 과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이 하나의 팔레트 위에서 섞이던 시절이었다. 매커시의 주인공들이 역시&#160;'핵전쟁' 이후의&#160;세대처럼 그려진다.&#160;햇빛을 포함한 모든 빛들이 잿빛 안개 속에서 희미하다. 식물들도 동물들도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바다는 이미 검은 폐유처럼 변했다. 핵겨울을 연상시키듯 비와&#160;눈이 시시 때때로 엄습한다.
'인류 최후의 날' 이후 두 남자가&#160;남는다. 아버지와 아들. 나는 감정이입에 아주 능란한 작자여서 그런지&#160;소설의 설정 자체부터 가슴이 쿨렁 내려앉았다.&#160;절망적인 길을 가는 두 남자와&#160;화분 가에서 일일초를 바라보며 연신 방긋거리는 우리 부자를 같이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소설을 소설답게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학문하는 자로서는 치명적이겠으나 소설읽는 자로는 오히려 긍정적인 상황일 수도 있다고 위안했다.&#160;그 때문인지&#160;나는 '인류 최후의 프로메테우스'들을 보면서 몇 번이나 책을 내려 놓아야 했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내려 앉은 가슴을 손으로 더듬 더듬 찾아서 다시 원래 자리에 갖다 놓아야 했다.
공포는 공기처럼 가득하다. 단 한 순간도 단 한 공간도 그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공포는 때로는 의식의 영역을 넘어서 잠자는 순간에도 찾아온다.&#160;세상에는 그들 말고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다. '살을 먹는 자들'이다. 그들이 이런 재앙의 원인제공자도 아니고 재앙을 이용해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무리들도 아니다. 인간과 야만 사이에서 생존의 이름으로 '살을 먹는자' 들로 떠도는 것이다.&#160;마치 영화 &lt;매드맥스&gt;나 영화&lt;둠스데이&gt;의 생존자들처럼 말이다. 물론 영화 속 무리들처럼&#160;&lt;로드&gt;의&#160;무리들은&#160;중무장을 하지도 조직화되지도 않았다. 그저 생존을 위해 무리를 짓고&#160;무리 중&#160;죽은자가 생기면 먹는 것이다.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될&#160;사람들도 그렇게 처리할 것이다.
&#160;"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냐?" 고...부디 당신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160;남자는 공포와 존재론적 절망&#160;속에서 죽음에 대한 유혹을 가까스로 참아낸다. 죽음은 오히려 이&#160;모든 것을 '초월'하여 영원한 '무'를 가져다 줄 것이다. 차라리 그 영원한 '무'에 이르러야 모든&#160;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160;그렇게 하지 못한다.&#160;그것은 죽음과 자기 사이에 그가&#160;살려내야만 할 한 아이가&#160;있기때문이다.
아이는 여러번 묻는다. "우리는 좋은 사람인가요?" ....남자는 "좋은 사람이야" 라고&#160;대답한다. 하지만 그도 이제는 그런 확신을 할 수 없다.&#160;그는 아이를 보호하고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160;훨씬 더 복잡한&#160;그물 속에서&#160;발바둥쳐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남자는&#160;약탈자 무리 중 한 명을 처치해야했고&#160;함께&#160;가기에 짐이 되는 아이를 길에 내버려 두어야 했다.&#160;길에서 만난 눈 먼 노인을 그냥 지나치려했고 그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것에 대해 언쟁을 해야 했다. 소설 속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고 가장 절박한 것은 배고픔이다. 이 둘 사이의 변증법은 홉스가 인용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 구약 욥기의 '리바이어던'의 시대가 우리에게 체현된 것이다. '리바이어던'의 공포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다보면 얼음비를 맞은 것처럼 온 몸이 오싹 거린다. 하지만 이런&#160;긴장감은 책읽기를 힘들게 한다. 그 때쯤 되면 매커시는&#160;지하 벙커의 풍족한 먹거리를 주인공들에게&#160;제공해서 독자까지 그런 텐션으로 부터 이완시켜준다. 공포 영화에서 쫓고 쫓기는 장면&#160;뒤에 나오는 아침 장면 같은 그런 긴장의 이완말이다.&#160;&#160;<br />

아이는&#160;묻는다. "우리는 좋은 사람인가요? "&#160;&#160;&#160;
선(善), 우리가 원한 것은 선이었다.<br />
&#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 세상을 올바르게 하는 것<br />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의지가 아니었다.<br />
&#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 부족한 것은 겸손함이었다.<br />
선을 원했던 우리 역시 결백하지 못했다.<br />
계율과 개념,<br />
&#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 신학자들의 오만함.<br />
십자가가 몽둥이로 변하고,<br />
&#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 사람들의 피를 제물로 바치며,<br />
죄악의 벽돌로 집을 짓고,<br />
의무적인 성찬의 전례를 공포하는 것.
&#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160; 옥타비오 파스 &lt;산 일데폰 소야곡&gt;<br />

하지만 소설 &lt;로드&gt;는&#160;처음부터 이 소설이 이렇게 고생만 진창하다고 끝나지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두 남자는 자신들을 스스로&#160;위안하며 '불을 운반하는 사람' 이라고 말한다. 신화는 말해주지 않던가? 불은 운반하는 사람은 그 불을 인류에게 전달하는 소임을 마친다.&#160;&#160;지금 우리가 불을 자유자재로 쓰고 있고 있는 것이 그 예가 아니던가. 유럽 고성에서 기어나온 유럽작가들의 디스토피아가 영구순환적인 디스토피아에서 끝난다면 헐리우드도 사랑한 이 미국 대가는 애초부터 '희망'이 있음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긴 우울 속에서 몇 번을 책을 내려놓았다.하지만 '그들의 품 안에 불있다' 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추동력이 되었다. 십 만 번의 절망 속에도 단 한 번의 희망이 있다면 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힘' 아니던가?
여기서 끝으로 가기에 앞서, 소설 &lt;로드&gt;의&#160;속의 긴장감과는 다른 재미있는 구석이 있어서 잠깐 생각해본다. 그것은 '총'이다.&#160;소설 속에서 '총'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이다. 이것은&#160;다분히 미국적 환경에서 나올 수 있는 미국적 소재이다.&#160;주인공은&#160;애초에 세발의&#160;총탄을 가지고 있다. 한 발은 자존감을 위해 여자가 써버렸고 또 하나는&#160;주인공이 가족의 보호를 위해 썼다.&#160;주인공은 항상 아이와 떨어져서 염탐해야하는 상황에서 아이에게&#160;총을 준다.&#160;적을 죽이라고 주는 것이 아니다.소설 속에서&#160;아버지가 아이에게 목구멍 깊이&#160;총구를 넣으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식에게 자살하는 방법을 알려주어야만 하는 그&#160;심정은&#160;다른 말이 필요치 않을 만큼 절절하다.&#160;또 한편으로는 앙드레 말로의 &lt;인간의 조건&gt;에서 죽음의 공장 앞에서 카토프의 선택 같은&#160;희생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카토프의 선택보다는 쉬웠을 것이다. 아버지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기때문에.&#160;'총의 소유'는 이 곳에서 '힘'의 소유,'안전의 소유'와 상당히 연관깊다. 약탈의 무리들 역시&#160;제대로된 총을 가지고&#160;있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스포일때문에 조심스럽다.) 작가는&#160;'산탄총과 탄창'이라는 진보된 총을&#160;한 번 언급함으로써&#160;독자에게&#160;단기적이지만 미래에 대한 모종의'안도감'을 선사한다. 흔히 매커시를 서부 개척시대라는&#160; 통속소설의 주제를 문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한다.&#160;그런데 &lt;로드&gt;에서 등장하는 디스토피아 역시 서부 개척 시대의 무법 상태와 비슷한 판형이다.&#160;또한&#160;미국 수정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무기 사용'에 대한&#160; '자유주의적 접근' 역시 미국적 정서에 바탕을 둔 부분이 있다.소설은 한편에서는&#160;유럽의 신화적인 디스토피아에서 아이디어를 빌어오면서&#160;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미국적 도판들이 또 인용되고 있는 셈이다.
소설&lt;로드&gt;에서 아이는&#160;'우리가 괴물과 싸우기 위해 괴물이 되지 않아야 함' 을 계속 상기시킨다.&#160;어쩌면&#160;이것은 '인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눈먼 노인에게 아버지는 '만약 이 아이가 신이라면 어쩌겠습니까? "라고 묻는다.&#160;인간의 아이는 신이 사라진 시대에,인간에게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것이&#160;'인간'이라는 점을 일깨운다.&#160;홉스적인 세상에서&#160;가장 두려운 것은 '인간'이다.&#160;아무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160;소설 &lt;로드&gt;속의 세상도 그러하다. 하지만 아이는&#160;신뢰할 수 없는 인간 만큼이나&#160;우리들처럼 좋은 사람이 있다는&#160;하나의 희망에 대해 놓치지 않는다.&#160;믿을 수 없는 인간이지만 또 인간을 믿지 않고는 인류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역설이 여기서 작동한다. 험난한 여정을 마치면서 노작가는&#160;온몸을 다 던질 수&#160;있는&#160;단 하나의 사랑이 살아 있다면 인류는 아직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160;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본다. 
우리도 그들 처럼&#160;'길'의 중간에 멈춰서 있다.
&#160;]]></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18/84/cover150/600080706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188422</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누구에게 말하나 비통에 대하여 -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2062037</link><pubDate>Thu, 24 Apr 2008 16: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206203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0924139&TPaperId=206203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8/54/coveroff/8920924139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20924139&TPaperId=206203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a><br/>윌리엄 케네디 지음, 장영희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02월<br/></td></tr></table><br/>&lt;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gt;는 LED 옥외광고 간판처럼 이름을 수시로 갈아입는다.이 책의 원제목은 'Ironweed' 이다. 이 책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는 '억새인간' 이었다고 한다. 20여년전 일이다.&#160;이 책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잭니콜슨 주연의 영화&lt;ironweed&gt;의 한글제목은 '엉겅퀴 꽃'이다.장영희 교수는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라고 예감있는 제목을 달았다. '억새인간' 이나 '억새풀' 보다는 나은 제목같다. 원제목인 &lt;ironweed&gt; 자체가 외설적이라고 생각한다. 뭔가 좀 숨기는게 있어야지 에로틱이 될 터인데 '노숙자=억새풀' 이란 연쇄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직접적인 상징작용이 왠지 탐탁치 않다.
원문과 비교해서 읽는 수준은 못되기 때문에 번역에 대해 뭐라고 할 만한 위치는 아니다.그러나 장영희 교수의 번역이 비교적 매끄럽게 읽히는 것은 사실이다. 윌리엄 케네디의 문장이 갖고 있는 위트와 유머러스함을 표현해 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이 느껴진다. 인문사회 서적이 아닌 문학 책의 번역에 있어서도 가끔은&#160;한국어 문법에 맞지&#160;않는&#160;문장들을 경험한다.&#160;그런 마당에 작가가 가진 문장의 깊은 속내까지 요구하는 것은&#160;무리일 때가 많다.&#160;이 책은 그런 면에서&#160;한국 소설을 읽을 때 느껴지는 편안함을 준다. &#160;
이제 조금 삐닥하게 나가보자.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이 왜 '퓰리처상'을 받았고 또 '20세기 영문학 100선'에 들었는지&#160;의문이다.&#160;식견 높은 분들의 견해이기 때문에 수상을 취소하라고 일인 시위를 하지는 않겠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 일이니까 공소시효도 지났다. 이 소설은 내게 그저 그랬다. 잭 니콜슨의 얼굴만 잔뜩 떠오른다.나는 영화를 보진 못했다.그렇지만 스틸 사진 몇 컷으로도&#160;잭 니콜슨이 주인공 프랜시스를 덮어 버린다.&#160;꽤나 어울리는 캐스팅이었음에 틀림없다.&#160; 영상 이미지의 전제성이 문자를 장악해버리는&#160;것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160;문제는 이 책의 문장들이 갖고 있는 뛰어난 유머와 삶을 통과하는 서걱거리는 재미들이 헐리우드식 결말로 가기 위한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 처럼 느껴질 때이다. 이 책의 인물들과 인물들 간의 관계,그리고&#160;장치들은&#160;전형적인 헐리웃표다.'돌아온 탕아, 따뜻한 가족의 품에 안기다."&#160;
이 책이 퓰리처상을 받은 해인 84년은 레이건의 시대이다.&#160;카우보이 정부 밑에서 '레이거노믹스'와 '강한 미국' 이 대표적인 브랜드가 되었다.&#160;70년대 미국을&#160;교란시킨 유약한 진보의 시대가 문을 내리고 전통적 가치의 회복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건강한 미국의 상징인 '가족주의'로의 복귀였다. 모든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근간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그런 흐름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죄책감으로 떠돌던 주인공이 결국 따뜻한 가족의 품에서 불안한 행복을 얻는 결론은 그런 상관관계를 자꾸 떠올리게 한다.이런 스토리야 말로 소시민의 감수성을 젖게하는 전형적인 '잔잔한' 헐리우드 영화의 단골 메뉴 아니던가? 싸가지 없는 부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인격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된다던가, 재능은 있지만 사고뭉치 운동선수가 동료애를 통해 하나로 된다거나.....이 모든 것들이 '통과의례'의 형태만 달리했지 상징적인 '가족'의 이름으로의&#160;통합을 목표로 한다.&#160;그게 뭐 딱히 나쁘냐고?&#160; 길게 토론하면 여러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그렇지만 이해하기 쉽게&#160;이렇게 말하자.나는 이런 스타일에 지루함을 느끼는 취향을 가졌다.
도대체 처음과 마지막에 바람처럼 왔다가 들꽃처럼 사라진 루디는 왜 그렇게 억지로 나와야 되는지? 그의 우발적인 죽음에 '그는 은하수가 어딘지 아는 사람이었다'라는 키치적인 답변은 무슨 코미디인가?&#160;프랜시스의 귀가를 위해 반드시 사용되어야 하는 소품처럼 루디와 헬렌은 죽는다.&#160;모텔에서 조용히&#160;생을 마감하는 헬렌이 가진 영혼의 고귀성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 장치는&#160;베토벤 교향곡 9번이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지만 그녀가 떠돌이가 되기 훨씬 전,사랑에 배신 받기 훨씬 전,그녀의 마음을&#160;영혼을 휘감았던 곡. 작가는&#160;이 곡을 통해 너덜너덜한 부랑아 헬렌의 삶에 빛이 있었고 그 빛을 안고 가게끔 만든다.(왜? 그래야 우리가 덜 불편하니까..) 죽음의 순간에 헬렌은 부랑아에서 성녀로 뒤바뀐다. 베토벤LP와&#160;가지런히 펼쳐진 머리칼 등은 헬렌을 고귀한 영혼으로 만든다.가련을 넘어&#160;숭고로 넘어가려는 의도가 너무 직접적이다.
나는 이 소설을 사회적 관점에서 노숙인들에 대한&#160;이야기로 읽지는 않는다. 실제 그들은 5미터 밖에서도 냄새가 난다. 물론 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탈취 되었다. 탈취는&#160;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는 '탈취됨'으로 우리가 그들이 가진 영혼으로 다가갈 수 있게&#160;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탈취됨'으로 인해 노숙자로서 그들의 존재는 무존재가 된다는 것이다.&#160;물론 실재 이 인물들에게 냄새가 난다면 이것은 르포타쥬가 될 터이지 소설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불만을 갖지는 않으련다.&#160;탈취를 통해서라도 그들의 영혼과 접촉했다면 이 아니 좋을쏘냐....다른게 &#160;'키치'가 아니다.
내게 이 소설에서 두 가지 인상적인 것은 '야구'와 '죄책감'이다. 프랜시스의 과거를 구성하는 두가지 중요한 요소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다가&#160;초등학교 5학년 때 새로 사서 얼마 쓰지 않았던 야구 글러브가 다시 만저 보고 싶어졌다.&#160;아직 집에 고이 모셔 놓고 있다. 그 글러브로 공을 받고 던지고 해보고 싶어졌다. 다른 하나는 '죄책감'이다. 나는 원래 이 리뷰를 쓸 때 '리뷰' 대신 그 '죄책감'에 대해 쓰려고&#160;했다.
&#160;만약 비오는 어제 이 리뷰를 썻다면 나는&#160;식모 '정금'이와 관련된 나의 '죄책감'에 대해 썻을 것이다. 책에 대한 지루한 이야기는 몇 줄로 압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의 관음증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리뷰는 길어졌다.&#160;]]></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8/54/cover150/8920924139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85431</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어처구니 없는 도스토예프스키 - [바덴바덴에서의 여름]</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1933337</link><pubDate>Mon, 25 Feb 2008 12:1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193333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1331&TPaperId=193333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4/49/coveroff/8937461331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61331&TPaperId=193333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바덴바덴에서의 여름</a><br/>레오니드 치프킨 지음, 이장욱 옮김 / 민음사 / 2006년 04월<br/></td></tr></table><br/>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짧은 소리로 '쎄울.." 이라고 외쳤던 것이 27년 전 일이다.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시간이 아무리 빠르다고 하더라도 27년 전이라니.갓 태어난 아기가 애아빠될 시간이다.하기야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 '88 올림픽 굴렁쇠 소년' 기억나며고 물어보면 '잘 모른다'는 대답을 많이 듣는다.지금 대학생들이 한 두 살 먹었을 때 올림픽이 열렸으니 '호돌이'를, '굴렁쇠'를 알 턱이 없다.그들은 가끔 TV자료 화면에서&#160;'서울 올림픽'을 봤다고 말한다.
뜬금 없이 사마란치와 서울 올림픽을 떠올린 곳은 그가 '쎄울'을 외쳤던 곳이 '바덴바덴'이기 때문이다.이 책의 주인공인 전설적인 토스토예프스키가 향하는 곳이기도 하다.
&lt;바덴바덴에서의 여름&gt;에는&#160;서로 다른 두 여행이 교차한다.이 두 여행은 서로 만날 수 없다.시간과 공간이 다르기 때문이다.한 여행은 바덴바덴을 행하고 또 다른 여행은 100년쯤 후에 샹테페테르부르크를 향한다.
러시아를 떠날 수 없었던 의사 치프킨이 '나'가 되어&#160;소설 속의 화자로 등장한다.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흔적을 찾는 여행자이다.소설은 화자인 '나'의 이야기와 실제 회고록에 도움을 받아 재구성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삶을 재구성한다.소설가가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또 소설의 대상이 소설가인 셈이다.작가 치프킨은&#160;영원한 동토의 빙하 속에서 신비롭게 잠들어 있는&#160;거장 토스토예프스키에게 훈기를 불어 넣는다.그의 훈기를 받은 토스토예프스키는 '못말리는' '어처구니없는'&#160;또한 '슬프고도 아픈' 한 피조물이 되어 책 장 사이를 넘어 다닌다.살아난 토스토예프스키는 도박장을 뛰어 다니고 아내에게 돈을 구걸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질투로 반쯤 실성을 하고 유형지에서 겪은 모멸감에 치를 떤다.그 뿐이 아니다.세상으로 인정받기 위해 평론가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또 그들의 무관심에 발끈하여 팔짝 팔짝 뛰어다닌다.때로는 자기를 학대하고&#160;때로는&#160;자기의&#160;자만심에 뿌듯해 한다.
나는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이런 인물들이 좋다.분열적인 자아를 갖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뭐라 한가지 잣대로 잡아 넣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들 말이다.물론 '명명백백' 정도만을 걷는 인물들을 만나면 그에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다들 옮바르고 인간을 초월한 듯한 의지를 보여준다.다들 의지들은 얼마나 강한지...거기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업적까지 보태지면 모두 모두&#160;머리 뒤에서 후광이 비춘다.문제는 대개 그런 인간들이 좀 심심하고 그걸 떠받드는 사람들도 심심하긴 마찬가지라는데 있다.
재미있는 인간들은....그러니까 밀로스 포먼의 영화&lt;아마데우스&gt;에 나오는 모차르트같은 인간들이다.또 영화&lt;불멸의 연인&gt;,&lt;카핑 베토벤&gt;등에 나오는 '괴팍한 노인' 베토벤 같은 사람들이다.연암 박지원 같은 노인네들도 재미있지 않은가?&#160; 미셀 푸코같은 인간들 흥미진진하다.시대의 바람둥이이자 죽음과 늘 손잡고 다니던 로버트 카파같은 사람들은 어떤가? 또 전장에서 시집을 읽어 대던 핸섬가이 체 게바라 같은 인간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리타분한 양반들은&#160;이 '뒤틀림'의 재미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다.바른 생활 사나이들...^^ 아주 바람직하거나&#160;뒤돌아서면 진상이거나 둘 중에 하나는 할 것 같다.&#160;
하여간 소설&lt;바덴바덴에서의 여름&gt;에 등장하는 토스토예프스키는 '어처구니'없는 남자이다.그의 '어처구니없는' 반복되는 행각들은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없다.아이같다고 해야 하는게 딱 맞다.다괴팍하고 가련한 러시아인은 거기에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하다.정치적 옯바름을 이야기해야한다면 토스토예프스키는 '꽝'이다.작가 치프킨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유태인이다.이런 딜레마를 두고 치프킨은&#160;도스토예프스키에게 질문을 던진다.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답변에 대해 스스로 답을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조금은 뻔하고 날카로움을&#160;잃은 답변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책에 대한 소개에서&#160;이 소설이 러시아 문학 전통에 대한 두 가지 논쟁을 재현한다는 글을 읽었다.뭐 대단히 어려운 내용일 수도 있지만 상식선에서 말하자면 '슬라브주의'와 '서구주의'의 갈등이다.이건&#160;러시아의&#160;모든 예술장르와 일상영역에서도 영향을 미치는 러시아의 변방성과&#160;독자성 사이의 밀물과 썰물같은 갈등이다.치프킨은 이 책에서 도스토예프스키와&#160;투르게네프의 대립으로 이&#160;두 기둥의 이야기를 건넨다.그리고 시대를 훌쩍 넘어&#160;이 영상은&#160;솔제니친과 사하로프의 대립구도로 형상화된다.이런 대립 구도는 만들려고 하면 근대&#160;러시아 예술의 지형도 속에 전부 넣을 수 있을 법도 하다.환원론의 오류를 범하겠지만 말이다.소설 속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서구파 투르게네프에게 가급적 잘 보이려고 애쓴다.그렇지만 욱하는 그가 투르게네프의&#160;은빛 안경 너머의 조롱에 찬 눈빛을 계속 견딜 수는 없었을 것이다.
"파리에 가서 망원경을 하나 사서 그걸로 러시아를 자세히 보시지요" 
소설 속에서 투르게네프는 권력과 부가 있으며 예의 바르고 신사답다.반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도박꾼에 가난하고 적당히 비굴하다.거기에&#160;컴플렉스 덩어리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직접 만난다면 누구를 더 좋아할까?
이제 우리는 보험 드는 셈치고 실제 도스토예스스키 같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좀 너그럽게 봐주자.그가 언젠가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그를 비난했던 사람들이 범접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가 있는 '돌아이'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실제 투르게네프보다 토스토예프스키가 더 유명하지 않은가? .
도스토예프스키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담하고 용서빌고 후회하고 섹스하고 질투하고...휘청거리고 잘난 척하고....그림을 보고....글을 쓰고....도박을 한....인간아.당신을 어찌 사랑하지 않겠는가.
책 서문에서 수잔 손택은 &lt;바덴바덴에서의 여름&gt;을 가르켜 '지난 한 세기의 소설과 범소설(parafuction)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며 창조적인 성취를 이룬 작품 중에 하나'라고 말한다.가장 아름다운 성취인지는 모르겠으나 재미있는 작품은 확실히 맞다.
요즘 모 항공사에서 러시아 취항 광고를 하던데....
액설런트 인 플라이트....러시아...가고 싶다.
&#160;]]></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4/49/cover150/8937461331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44996</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영화를 닮은 소설..슬프고도 아픈..그러나 삶은 계속된다. - [천 개의 찬란한 태양]</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1889023</link><pubDate>Tue, 05 Feb 2008 13: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188902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754013&TPaperId=188902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0/18/coveroff/897275401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754013&TPaperId=188902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천 개의 찬란한 태양</a><br/>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br/></td></tr></table><br/>지난 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은 '아프간 선교단체 피랍' 사건이었다.9.11 테러 주범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지목한 미국의 부시정권은 '초록은 동색'이라고 아프간 탈레반 정권을 겨냥하여 폭격을 감행했다.탈레반은 쫓겨 났고 미국의 폭격을 감싼 '인권외교'는 빛을 발휘했다.그 틈새 시장을 그냥 봐 넘길 '한국 기독교'가 아니다.어쨋거나 아프간 피랍 사건은 세상의 한 구석으로 잊혀질뻔한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했다.
소설 &lt;천 개의 찬란한 태양&gt;은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적인 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종류의 삶을 그리고 있다.그 중심에는 '여성 수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두 아프간 여성이 있다.소설은 비참한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는 마리암의 역사로 부터 시작해서 자존감 있는 라일라의 역사로 넘어온다.그리고 이 둘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동일한 역사와 남성의 폭력 하에 놓이게 된다.적대적인 상황 속에서 만나게 되는 이 두 여인은 결국 새로운 생명과 인간의 자긍심이라는 가치 아래 만날 수 있게 된다.
소설&lt;천 개의 찬란한 태양&gt;이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놓치 않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소설의 결말에 이르기 까지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가 겪는 여성으로서의 고통은 참담하다.역사의 폭력에 시달려야하고 가정 내의 폭력에도 저항하지 못한다.저항은 언제나 더 큰 무력으로 잠재워질 뿐이다.이 책은 나보다 아내가 먼저 읽었다.그녀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기 때문이다.지난 해 말 이 책을 읽던 아내는 때론 분노하고 때론 눈물지으며 책을 봤다.아프가니스탄의 역사에서 여성이 당해야 했던 슬픔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공감'이었을 것이다.그런 면에서 보면 이 책은 역사의 가해자들(침략자거나 남성이거나 종교이거나 거대담론..)로 부터 수탈당하고 학대받는 여성들에 대한 '페미니즘'소설로 읽힐 만도 하다.특히 이 책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것은 두 주인공의 역사가 우리 역사에 있어서&#160;피해자로서 &#160;'여성잔혹사'와 그다지 멀지 않다는 기억때문 일 것이다.거기에 '어머니'라는 보편적 가치가 소설의 장치로 등장한다. 적대적 관계 상황에 놓인 두 주인공 마리암과 라일라를 하나로 만들고 연대감을 심어주는 것은 '모성'이다.라일라가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도 또한 마리암이 숙연하게 만드는 희생을 한 것도 모두 '모성'의 위대함이다.인류의 유전자 속에 깊이 아로새겨진 '모성'이라는 '위대함'은 공간적 차이와 역사적 이질감에도 불구하고 깊은 감동을 준다.
또한 이 책은 영화를 연상시키는 듯이 씌여졌다.영화적이란 것은 좋게 말하자면 장면 장면의 스피드가 빠르다는 것이다.한 장 한 장 마다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가능성의 단초가 보인다.그리고 극적인 전환도 빠르게 이루어진다.헐리우드식 영화 기법에 익숙한 독자들의 구미를 맞출만한 구성의 스피디함이다.그렇기때문에 꽤 두꺼운 분량임에도 빨리 읽힌다.평이한 문체와 알기 쉬운 스토리도 물론 한 몫한다.구성은 빠르기도 하지만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다.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는데 몇 장씩 씌지도 않는다.또한 과거 현재를 넘나들면서 어느 시간대에 있는지 헷갈리게 하지도 않는다.주인공의 시점을 수시로 바꾸어서 앞장을 넘겨보게 하지도 않는다.그저 두 개의 선분이 한 점에서 만나고 하나로 수렴된다.마치&#160;다큐멘터리의 구성을 보듯이 그렇게 직선적이고 연대기 순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160;
&#160;나는 이 책을 보면서 문득 이 작품의&#160;영화 대본작업을 할 때-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한다-그다지 어려운 각본 수정 작업 가능하리라 생각이 들었다.얼핏 생각하면 마치 영화 제작을 상정해 두고 소설을 만든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영화적'이다.결말 역시 '해피엔딩'으로 마감하여&#160;대다수의 독자에게 만족감을 준다.(비극적이거나 무한히 열려있는 결말은 얼마나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가!!)
'영화적'이란 것은 사실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이 작품은 헐리우드에서 무척 좋아할만한 소재이다.헐리우드는 스펙터클한 오락물.폭력물만 만들어내는 공장이 아니다.헐리우드는 다양한 소재를 다양한 그릇에 담아낼 줄 안다.그런 면에서 &lt;천 개의 찬란한 태양&gt;은 헐리우드산 휴머니즘 영화의 소재로 그럴싸하다.물론 이 책도 그렇지만 '인권'이란 부분에 강한 스폿라이트를 줄 것이고 '휴머니즘'과 '위대한 희생'에 촛점을 맟줄 것이다.이 '헐리우드식 프로세스'에&#160;빠져 있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은 결국 독자가 읽어내야 하는 부분이다.
최근에 나온 영화 &lt;찰리 윌슨의 전쟁&gt;은 미국 하원의원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막기 위해 아프간 정부와 무장단체들에 무기를 지원하는 내용이다.인권탄압과 문명파괴의 대명사,종교근본주의자 탈레반 역시 미국과의 밀월관계가 지속되었던 시절이 있었다.소설은 다분히 '인권'이란 보편적 주제로 세계에 호소한다.그리고 소설에서 '미국'의 역할은 거의 끝부분에만 등장한다.약간의 우려 셖인 목소리로 말이다.궁극적으로는 탈레반이라는 '큰 악'을 쫓아내고 평화를 이끌어낸 '차악'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고 있다.미국에서 이 소설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미국의 대외관계에서 나타난 '정치적 죄의식'에 대한 눈가림이거나 (또는 무지이거나 ) 미국민들이 '보편적'으로 인권에 대한 의식이 타국민에 비해 뛰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좋은 소설을 그렇게 정치적으로 삐딱하게 읽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lt;천 개의 찬란한 태양&gt;의 '아프간 여성 억압사'에 같이 아파하고&#160;가해자들에게 분노하는 것이면 족하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그런 면에서 나도 아프고 공감하고 분노하고 울먹였다.)그저 그 가해자들의 목록에서 '미국'도 빠질 수 없다는 정도 까지만 이야기하자.
마지막으로 나는 일본에서 만든 한 다큐멘터리를 말하고 싶다.그전에&#160;영화 &lt;천상의 소녀&gt;(영어제목 오사마)를 이야기하는 것이 순서겠지만.이 영화는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던 영화다.칸느와 골든글러브에서도 상을 받았다.탈레반 이후 아프간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장편영화였다. 나는 영화&lt;천상의 소녀&gt;를 보지 못했다.대신 몇 년전 일본 출장길에서 나는 그 영화 제작 과정을 가지고 만든 NHK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영화 제작에 일본NHK가 펀딩했기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세디그 바디막 감독의 시선에서 시작한다.촬영 종료 후 다시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왜 이 영화를 찍었는지" "어떻게 주인공을 선정하게 되었는지" "아프간의 어떤 모습을 그리고 싶었는지"...등등을 이야기한다. 주인공 마리나를 선정하게 된 장면은 인상적이었다.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담고 있는 얼굴을 찾고 싶었다고 했다.전쟁 고아들과 빈민굴을 뒤지면서 수 천명을 캐스팅하기 위해서 만났다.그러던 중 주인공이 될 마리나를 본 것이다.감독은 바로 '이 아이다'라고 계시를 받듯이 그녀를 만났다고 했다.이 주인공은 전문배우가 아니었다. 아픈 아빠와 엄마를 대신해서 일주일째 밥을 굶으며 거리를 뒤지고 다니던 아이였다.감독은 그 아이에게서 '슬픔과 분노' 그리고 그 뒤편에 이런 비참함 상황에 어쩔줄 몰라하는 '자긍심'을 담고 있는 눈을 보았다고 했다.다큐멘터리에서 본 그녀는 정말 그랬다.
다큐멘터리는 영화 촬영 장면 중간 중간 길거리 캐스팅된 거지 아이들이 엑스트라비를 받기위해 몰려드는 것부터 영화와 현실의 아프간의 모습을 동시에 비춰주고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의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었다.영화 촬영은 끝났다.아이는 몇 주간의 배우로서의 역할을 접어야했다.그녀는 약속했던 돈 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두 손에 쥐어들었다.성인 남자가 6개월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라고 했다.그녀는 인터뷰에서 '영화 찍는 동안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으로서 대접받았다.'라고 울먹였다.아이는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에서 어른스럽고 속깊어 보이던 아이가 울기시작했다.감독과 다른 스탭들도 모두 울먹였다.아이는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이 영화가 그해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한다.(이 다큐멘터리도&#160;세계적인 &#160;TV프로그램 페스티벌에서 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촬영이 끝나고 6개월이 흐른 시점에&#160; 제작팀은 다시 마리나를&#160; 찾는다.마리나는 어떻게 되었던 학교를 다니려고 한다고 말한다.짧은 만남이후 다시 마리나는&#160;무너진 담과 벽돌들 사이로 사라진다.카메라는 그 장면을 무려 3분 가까이 롱테이크로 보여준다.아이는 가면서 두 서너번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든다.카메라는 그녀가&#160;회색빛 잔해들 사이에서 작은점이 될 때까지&#160;계속 OFF버튼을 누르지 않는다.제작진은 그 때 마리나가 울고&#160;있었다고 말한다.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영화를 찍고.. 다큐멘터리를 찍고..그리곤&#160;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직장에 나오고 일을 하고 친구를 만나 농담을 하고 술잔을 기울이고...그리고 언제 우리가 그런 일들을 했었는지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삶은 계속됩니다.그래서 그 마지막 장면을 그렇게&#160;날것 그대로 넣었습니다."&#160;]]></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00/18/cover150/897275401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01814</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모욕당한 절름발이 늑대여 그대의 굴로 돌아가라 - [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1846685</link><pubDate>Fri, 18 Jan 2008 11: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184668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2436&TPaperId=184668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6/93/coveroff/895460243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2436&TPaperId=184668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a><br/>바스코 포파 지음, 오민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2월<br/></td></tr></table><br/>&#160;늑대가 심장을 한 웅큼 물어 뜯었다.황금빛 누런 이빨 사이로 너덜 너덜해진 심장의 살점이 보인다.더러운 입 주변으로 선홍빛 붉은 피가 그대로다. 
후텁지근한 야생동물의 콧김. 100년 동안 닫혀있던 창고의 쾌쾌함을 일시에 쫓는다...번뜩인다.그 야생 동물의 회색 빛 털이...번뜩인다...&#160;화살촉보다 날카로운 눈빛.
우아하다....모욕당한 절름발이 늑대는....
&lt;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gt; 앞에 잠시 움찔하며 한 두걸음 뒷걸음질 친다.
1.모욕당한 절름발이 늑대여/그대의 굴로 돌어가라/가서 잠들라 /짖는 소리가 얼음으로 변하고/저주의 말이 녹슬고/횃불들이 흔한 사냥 때문에 죽을 때까지/모두가 빈손으로/자신 속으로 떨어져/절망 속에 자기 혀를 깨물 때까지.............(중략).....나는 네발로 기어 그대 앞으로 간다/그리고 그대의 은총 속에서 울부짖는다/마치 그대의 위대한 초록 시대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리고 나는 내 오래된 절름발이 신,그대에게 기도한다/그대의 굴로 돌아가라고
번역된 시를 본다는 것은 낯선 이국 땅에서 처음 보는 문자로 된 도로 표지명을 보는 기분을 준다.시가 바닥을 구르며 울부짖는 소리가&#160;외국시를 볼 때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시들은 그렇게 외친다. "네가 알고 있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고...그런 정서가 아니라구.." 모든 번역이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시의&#160;번역은 정말로.
요즘 같은 겨울에 어울리는 백석의 시 &lt;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gt;의 마지막 구절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어떻게 '내리고'가 아닌 '나리고'의 미묘함을 번역할 것인가..'어디서'가 아닌 '어데서'의 그 소박함을 잡아낼 것인가...어떻게 눈 덮인 오늘 밤을 '엉엉'이 아니라 '응앙응앙' 울릴 것인가..
절대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불가능하다.바스코 포파의 &lt;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gt;을 읽고 감탄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을 쿡쿡 찌르는 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런 연유에서이다.이 책은 영역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그것이 영어로 씌여졌던 세르비아어로 씌여졌던 둘 다 모르는 내게는 마찬가지 감정을 준다.
바스코 포파.그의 시는 친절하지 않다.초현실적인 상상력과 상징주의적 표현들이 늑대 부러진 이빨처럼 불편하다.첫번째 연작 시로 등장하는 &lt;작은상자&gt;다.
작은 상자는 젖니를 갖고 있다/그리고 짧은 길이와/좁은 넓이와 작은 공허/그 밖의 모든 것을 갖고 있다/작은 상자는 계속 자란다/한때 상자가 들어있던 벽장이/이제 상자 안에 들어와 있다...(중략)....이제 그 작은 상자 안에/축소된 전 세계가 있다/당신은 그것을 쉽게 주머니 안에 넣을 수도 있고/쉽게 훔칠 수도 쉽게 읽어버릴 수도 있다/
작은 상자를 조심하라...
이어지는 &lt;작은상자의 죄수들&gt;들 중 한 구절이다.
작은 상자를 열어라/우리는 상자의 바닥과 뚜껑과/열쇠 구멍과 열쇠에 키스한다/온 세상이 그대 안에 짓밣힌 채 누워 있다/세상은 자기 자신을 제외한/모든 것을 닮아 있다/그대의 맑은-하늘 어머니조차/이 사실을 더는 모르리.....
도대체 '작은 상자'란 무엇인가?&#160; 몇 가지 단어들이 차창 밖 사람들처럼 휙 스치고 지나간다.추천의 글에서 정현종 시인은 영국 시인 테드 휴즈의 &lt;시란 무엇인가?&gt;를 인용한다.그 책 앞머리에 &lt;작은상자&gt;를 '시'에&#160;대한 메타포로 인용하고 있다고 한다.그렇다면 휴즈나 정현종 시인처럼 '작은 상자'는 정말 '시'의 비유이기만 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160;시인들처럼 '작은 상자' 대신 '시'라는 말을 넣고 보면 그럴 듯 하게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만...그런데 그것만이 아닐게다...
바스코 포파의 시선집에는 7편의 연작시가 실려있다.그 중에서 &lt;흰조약돌&gt;은 강한 시각적 인상을 남긴다.
그것은 머리도 팔다리도 없이/나타난다./호시탐탐 미친 맥박으로/시간의 뻔뻔스러 발걸음과 더불어/움직인다./정열적으로 모든 것을 껴안아/움켜쥔다.
달의 눈썹으로 미소 짓고 있는 하얗게 반들거리는 처녀시체.
이어지는 &lt;조약돌의 심장&gt;이라는 시다.앞의 시가 마지막 연에서&#160;충격적인 수축의 강렬함을 남겼다면 이 시는&#160;초현실주의적 영화기법을 이용한 이완과도 같다.수축과 이완이라는 다른 리듬을 갖고 있지만 서로 다른 색깔의 강렬함은 같다.이 두 시는 앞 뒷장 사이에 바로 붙어 있다.
그들은 돌의 심장을 열어보았다/심장 속에 뱀이 한마리/꿈도 없이 실타래처럼 잠들어 있었다/....(중략).....그들은 멀리서 쳐다보았다.뱀은 지평선을 돌아 제 몸을 감더니 계란처럼 지평선을 먹어버렸다.....(중략).....그들은 서로 쳐다보며 씩 웃었다/그들은 서로에게 윙크를 했다.
바스코 포파의 시선집은 낯선 경험과 낯선 시각으로 생각을 이끈다.이것은 일종의 환기다.환상을 통해 환상 너머와 대면하게 하는 방식이다.우리의 현존재 너머에 있는 그 무엇,또는 우리가 두고 온 오래된 기억 너머의 무엇이다.그것들을 환기 시키기 위해 자기증식을 넘어 자기를 포괄해버리는 작은 상자가 나온다.영원을 들여다 보는 조약돌이 등장한다.더러운 이빨을 드러내는 회색빛 늑대의 야생성도 그런 차원에서 경의의 대상이 된다.
포파의 시는&#160;쉽지 않다.하지만 1월의 어느날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바람처럼 영혼의 통점들을 자극한다.자코메티의&#160;조각품들과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떠올리게 하는 시들 몇 줄 적으며&#160;끝낸다.
이제 우리 무엇을 하리/좋았어 .이제 우리는 저녁으로 골수를 먹으리/우린 점심으로 골수를 먹었지/텅 빈 느낌이 나의 내장을 괴롭히네/그러니 음악을 만들자고/우리는 음악을 좋아하잖아/개들이 오면 우린 무엇을 해야하지/개들은 뼈다귀를 좋아하잖아/우리는 개들의 목구멍에 걸려 음악을 사랑하리.&#160;..... &lt;태초 이후&gt;
무슨 일인가/살이 눈 같은 살이/나에게 달라 붙는 것 같았어/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마치 골수가 내 속을 흘러 지나가는 것 같았어/뼛 속까지 시린 어떤 골수가/ 나도 모르겠어/모든 것이 다시 출발하는 것 같았어/어떤 무서운 시작과 함께
당신은 무엇인지 알까/당신이 짖을 수 있을까&#160;......&#160;&#160;&#160;&lt;달빛 속에서&gt;]]></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6/93/cover150/895460243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69326</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겨울방학때 읽는 &lt;일리아스&gt; - [일리아스]</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1781926</link><pubDate>Mon, 24 Dec 2007 12:1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178192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90167&TPaperId=178192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7/76/coveroff/s72203639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90167&TPaperId=178192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일리아스</a><br/>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06월<br/></td></tr></table><br/>&#160;한 해의 마지막 책을 고를 때는&#160;망설이게 된다.마치 어물전에서 놓인 고등어를 고르며&#160;이것 저것&#160;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 처럼.올해 역시 다르지 않았다.쌓여 있는 책들 속에서&#160;머뭇 머뭇 거리는 시간이 길어졌다.책들이 아우성이었다.마지막 구명정에 타려는 것 처럼 제 각각 자기가 승선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시끄러워.' 귀를 막고 소리들을 떨쳐냈다.결국&#160;삼 천년 가까이 묵직하게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있었을&#160;&lt;일리아스&gt;를 마지막 구조자 명단에 올렸다.아킬레우스와&#160;헥토르가 득의만만하게 킬킬 거렸다.
&#160;올 연말은 무척이나 방학이 그립다.생각해보니 흔히 고전이라고 알려진 책들을 본 것은 주로 방학 때였다.&lt;삼국지&gt;,&lt;수호지&gt;,&lt;사기&gt;,&lt;플루타크 영웅전&gt;,&lt;그리스 로마 신화&gt;. 내가 처음으로 &lt;일리아드/오딧세이&gt;를 본 것도 겨울 방학 때였다.긴 시간이 지나 천병희 교수의 두꺼운 &lt;일리아스&gt;를 펼쳐드니 아무런 마음의 부담이 없었던 방학 때가 사무치게 그립다.쉬는 시간 학교 휴게실에서 사먹던 야채 호빵에 대한 그리움처럼 말이다.방학이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방학 때도 결코 만만치 않다고 말한다.내게는 엄살로 보인다.'우리 것만 좋은' 게 아니라 방학은 직장인들의 영원한 로망이다.법적으로 주어진 휴가도 눈치보며 써야하는 직장인들에게는 말이다.
&#160;그리스 서사시는 결국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이다.사실 트로이 전쟁은 신들의 전쟁에 가깝다.신들이 두는 체스판의 말들처럼 영웅들이 울다 웃다 한다.그렇다고 인간이 아무런 숭고함이나 자유의지도 없이 목줄 매단 강어지 마냥 종속된 존재들만은 아니다.그들은 때로 신을 위협하기도 하고 운명에 초연하기도 하다.초연함이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생의 모순의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최고의 방법 아니던가.여기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요즘의 시각으로 보자면 상투적 모습이다.조금 좋게 말하자면 부여된 역할에 대한 완전성이다.물론 이들도 실수를 하고&#160;질투와 미망에 사로잡힌다.그거야 신들도 마찬가지다.그러나 필멸의 인간임에도 영웅들은 끝까지 영웅성이라는 고고함을 잃지 않는다.
주인공 아킬레우스만 보자.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이 인간은 오만방자 천하무적이다.그리스인이든 트로이인이든 그가 최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이 인간은 아가멤논의 모욕에 완전히 삐쳐서 동족들의 죽음은 나몰라 한다.결국 불끈하고 창을 들고 일어서는 것도 파트로클로스라는 친구이자 시종의 부고를 듣고 난 다음이다.&#160;아킬레우스의 사적 분노는 또 오바의 극치를 이루어 신들로 부터도 경계를 받는다.뛰어나지만 막무가내 같은 이 인간은 야수와 인간의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철학자 김상봉 교수는 &lt;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gt;에서 이를 인간이 가진 다양성을 총체적으로 완성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아킬레우스의 극단적 성향은 또 하나의 인간에 대한 전범이 되는 것이다.
&#160;아킬레우스를 비롯해서 &lt;일리아스&gt;에 나오는 거의&#160;모든 영웅들은 죽음이라는 필멸의 운명 자체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아폴론에게 속은 감이 있지만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헥토르 역시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이들에게 운명은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에 그것이 예정에 따라 집행되길 기원할 뿐이다.때로는 운명의 여신은 선택지를 준다.예를 들어&#160;아킬레우스는 운명을 선택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는 편안한 길 보다는 짧고 길이 남을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다.결국 그것도 다 예정된 제 팔자일지 모른다.재미있는 것은 영웅들에게 정해져 있는 운명이라는 것이 신들 조차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데 있다.신들의 초월성을 넘는 운명이라는 것이다.그리스 서사시의 영웅들은 그 초월성 앞에서 운명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의연하게 대처한다.김상봉 교수는 정신의 힘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함으로써 죽음을 초월하는 영원한 가치에 닿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사실 대개의 모든 영웅신화들과 최근의 영웅스토리 영화들까지 이와 유사한 정서를 담고 있다. &lt;일리아스&gt;는 모든 그것들의 원형이 되며&#160;수 천년 전 그리스인들이 지향했던 신과 다르지 않은 인간 정신의 고고함을 담아내고 있다.
&#160;&lt;일리아스&gt;의 가장 명장면은 사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도 아니고 헥토르와 아이아스의 기사도 정신도 아니다.마지막에 있는 프리아모스 왕이 헥토르의 시신을 찾으러 간 장면이 첫 손에 꼽힐 만하다.
&#160;언젠가 집에 갔을 때 아버지와 케이블 TV에서 하는 영화&lt;트로이&gt;를 보게 되었다.영화를 보시던 아버지가 그 장면에서 "야..저 왕이 진짜 멋있구만.."이라고 짧게 말씀하셨다.아마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영화&lt;트로이&gt;에서는 명배우 피터 오툴이 세상의 가장 큰 비극을 겪은 프리아모스 왕 역 맡았다.이 장면은 영화에서는 그 과정이 짧게 그려진다.그러나 &lt;일리아스&gt;에서는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질질 끌고 다니는 장면에서 거대한 슬픔에 울부짖는 프리아모스의 모습이 묘사된다.그의 울음과 절규가 들리는 듯 하다.책에서는 헤르메스의 도움과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 여신의 조언이 큰 역할을 한다.물론 영화&lt;트로이&gt;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영화 &lt;트로이&gt;와 &lt;일리아스&gt;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신의 존재'와 '신의 부재'의 차이이다.영화에서의 '신의 부재'를&#160;좋게 봐준다면 -또한 일리아스를 읽는 한 독법으로도 가능한-신의 존재가&#160;인간들에게 내재된 것으로 이야기를 풀었다는 것이다.그리스 서사시의 신은 분명히 인간성의 한 측면으로서 읽힐 수 있기때문에 무리한 해석은 아닐것이다.단지 생태와 북어의 차이 같이 영화&lt;트로이&gt;와 서사시&lt;일리아스&gt;가 차이가 있다.(북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생태의 싱싱함이 늘상 한 수 위다.)어쨋거나 트로이를 두고 양편으로 갈라서서 싸우는 신들의 모습을 만날 수 없으니 영화로서는 포기해야 했던 부분이 너무 많았을 것이다.(그런데 사실 내게&#160;영화 &lt;트로이&gt;의 가장 큰 문제는 시각의 독재성 때문에 생긴 것이다.책을 읽다가 아킬레우스가 나오면 왜 금발의 브레드 피트가 떠오르고 파리스가 나오면 왜 올란도 볼룸이 들판을 뛰어다니냐 말이다.그 허튼 영상이 식탁 위를 찾아다니는 파리때처럼 잦아서 읽는 내내 힘들었다.)
프리아모스의 슬픔은 아킬레우스의 마음을 움직인다.우리는 삶의 여러 부문을 두고 갈등할 수 있으며 또한 폭력과 반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나는 '위선적인 공감' 보다는 '위악적인 갈등'이 훨씬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자가 무난하게 묻어가는 무임승차를 도모하는 반면 후자는 요즘은 부정되기도 하지만 변증법적인 결과물들을 낳아서 세상을 움직인다.'갈등'을 한센병 환자처럼&#160;두려워할 필요는 없다.또한 늘상 통합과 화해를 강조할 필요도 없다.세상에는 함께 있을 수는 있으나 섞일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이를 '관용'과 '화해'의 정신으로 억지로 묶어 놓으려는 갸륵한 마음은 때로는 진실을 허위로 덮거나&#160;폭력이 될 수 있다.오히려 더 중요한 것이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공감과도 같은 신의 피조물로서의 '측은지심'이다.서로 적이 될 지언정 인간임을 망각하지 않는 야수가 아닌 '인간'의 마음 말이다.실제 있었던 이야기였는지 누가 꾸며낸 이야기인지&#160;모르겠지만 한국전쟁과 관련된 우화가 생각난다.
학도병으로 아들을 보낸 어머니가 있었다.어느 춥고 무서운 밤, 집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어머니가 두려워 하며 문틈으로 보니 거기에는 거지꼴을 하고 꽁꽁 얼어붙어 있는 북한군이 서있었다.그는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낙오한 소년병이었다.어머니는 그를 두려워 하지 않고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했다.그리고 다음 날 그들을 쫓아온 군인들도 돌려보냈다.며칠을 쉰 다음 그 소년병은 본대를 찾아서 북으로 올라갔다.그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자신의 아들의 적일 수도 있는 나를 살려주고 진짜 어머니처럼 잘 대접해 주었느냐고 물었다.어머니는 처음에 무섭기도 하고 내 아들을 해코지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있다 그 마음을 풀게 되었다고 말했다.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이 행여 자네처럼 북쪽 어딘가에서 낙오되어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다면 내가 이렇게 자네에게 해준 것 처럼 자네의 부모나 또 아니면 그 누군가가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자네를 돌봤다네...조심해서 올라가게나" 라고 말이다.
&#160;이것이 인간의 마음 아닌가? 다음 날 '적을 숨겨준 부역자' 라고 어머니를 끌고가서 고문하는 것은 무엇이될까?&#160; (또 이렇게 이야기하면 '북한' 좋게 말한다고 하실 분이 있으니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밝힌다.) 전쟁이기때문에 반인륜적인 학살도 명령에 의해 수행하는 것이&#160;인간인가 저항권을 주장하며 불복하는것이 인간인가?&#160;개인의 선택과 사회적 선택이 늘 같은 과정과 결과를 낳을 수는 없다.하지만 한 해를 마감하는 이 시점에 수 천 년 동안 수 억 만명의 마음을 움직였을 &lt;일리아스&gt;를 읽으며 먹고 사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도움도 되지 않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추신&gt; 한 해 동안 여러분 감사했습니다.제 날카로움에 베이신 분들께도 사과와 감사를 드리구요.좋은 글로 저를 1센티씩 키워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또한 제가 물렁 물렁 해지도록 &#160;내버려 두지 않았던 제 주변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사회적,역사적 상황들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강철이 단련되는 것은 모루 위에서라는 말을 믿습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7/76/cover150/s72203639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77643</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외]</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1708052</link><pubDate>Mon, 19 Nov 2007 13: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170805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01681&TPaperId=170805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6/81/coveroff/8931001681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01681&TPaperId=170805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외</a><br/>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01월<br/></td></tr></table><br/>공사장 인부들이 옹기 종기 모여있다.수명이 다한 나뭇가지를 드럼통에 담아 놓고 차가운 입김을 데운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붉은 가을이었다.그러나 오늘 아침은 동장군의 척후병에게 일격을 당했다.TV 속에서 사람들이 종종 걸음을 치며 출근길을 서두른다.까치들 같다.삶을 위한 종종걸음이 안타깝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숭고하기도 하다.누군가 그랬다.비오는 날 우산 속으로 숨어드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이 뭐 별거 있다 싶어 가여워진다고..차가운 날씨에 코트 속으로 자라처럼 목을 움추린 어느 집 가장의 출근길을 보면서&#160;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았다.젊은 날에는 더 그랬다.내가 무언가 하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지금도 그 생각에 큰 변화는 없단다.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인지 내 삶을 돌아볼 나이가 되서 그런 것인지 요즘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이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아무리 피해가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물론 자잘한 것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어떻게 바꿀 수 있다지만 큰 그림까지는 손 대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160;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삶과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삶을 생각했다.그리고 나 역시 '운명' 이란 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지 고민했다.'운명'에 대해서 아마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길을 택할 것이다.단지 차이가 있다면 조금 더 젊은 지금의 내가 '인간의&#160;자유의지'에 대해&#160;한 숟가락 더 힘을&#160;싣고 있다는 정도 일 것이다.그렇다고 내가 무슨 '숙명론자'이거나 하지는 않는다.'숙명론'이란 것이&#160;결국은 세계에 대한 패배의식으로 작용하는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160;작용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인간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의 의지에 따라&#160;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아적인 환상일 뿐이다.중요한 것은 '운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 비극이 했던 것럼 '운명에 대한 태도'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우리들의 운명은 행복한 길도 놓아 줄 것이다.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것은 언제나 '슬픔에 대한 운명'이다.정호승 시인이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 라고 노래한 것은 시인과 우리의 삶이 '슬픔의 도상'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한다는 자기성찰이다.여기서 말하는 '슬픔'은 '부족'에서 오는 '슬픔'이 아니다.철학자 김상봉은 그리스 비극이 이야기하는 '존재론적 슬픔'과 대비하여 그런 슬픔을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그림자'라고 말한다.만약 그것이 슬픔의 정체라면 그런 슬픔을 문학의 이름으로 퍼뜨리는 것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일인지 개탄하고 있다.
&lt;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gt;를 제대로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물론 줄거리 자체를 이야기하라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이 책을 보지 않고도 이미 줄거리들은 전부 알려져 있다.또 운문형태가 아닌 소설 형식으로 이 이야기들은 많이 보급되어 있다.아동판,청소년판 등등 해서 어린 아이들도 이 책을 읽는다.요즘은 그리스 신화의 인기때문에 아마 만화판도 나와 있지 않을까 싶다.결국 이 진부하지만 위대한 텍스트에서 무엇을 공감하고 끌어 낼 수 있는가 이 책 읽기의 요체이다.그 작업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피아노 음악 이야기를 잠깐 하면 좋을 듯 하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무척 아름답다.체르니 상급반 정도되면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들을 칠 수 있다.음표도 많지 않고 엄청난 기교를 요구하지도 않는다.동네 피아노 학원 담너머로도 들을 수 있는 곡이다.그런데 실제 연주가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모차르트야말로 연주하기 힘들다고 말한다.쉽지만 그것은 천상의 소리를 닮아 있기때문이다.어느 유명한 음악가가 말했다는 '질주하는 슬픔'을 잡아낸다는 것이 보통의 내공가지고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이 말년이 되어 모차르트에 돌아가는 것은- 물론 그들의 늙은 몸이 고난도의 기교를 요구하는 낭만파 음악에 적당하지 않기도 하겠으나-그런 이유가 있기때문이다.그리스 비극을 읽는다는것은 모차르트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모차르트의 느린 악장같다.땅이 꺼지는 슬픔이지만 무너질 수 도 없는 그런 운명이 있다.
나는 &lt;오이디푸스왕.안티고네&gt;을 읽고 계속 마음이 먹먹하다.비극의 주인공들이 겪은 슬픔은 다른형태로 변주되어 우리들의 삶에도&#160;눈물을 뿌리고 있다.자신의 완고함으로 자식을 읽은 크레온의 아픔은 유괴되어 살해당한 아들의 영결식장에서 '내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너희들이..."라고 마지막 헤어짐을 허하지 못하는&#160;아버지의 절규와 닮아 있다.살아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처참하게 무너지는 오이디푸스의 슬픔은 어떠한가.'눈물없이 볼 수 없는'이라는 통속적인 표현이 왜 통속적일 수 밖에 없는지 확인시켜주는 운명의 짖궂음 아닌가.
물론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단지 운명과 인간의 존재론적 고민에 대해서만 말하지는 않는다.이들의 비극에는 공동체의 윤리와 개인의 윤리사이의 갈등,또 논쟁을 뜻하는 비극의 안틸로기아적인 주제들이 등장한다.그리스 비극의 사회적 의미와 질문들은 사실 지금 현재에도 적용할 수 있다.안티고네의 결정에 대해 지금의 우리들은 어떤 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베트남에서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대량학살했다.약탈,방화,강간 등등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섬멸작전을 수행했다.대개는 명령에 의한 것이어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변명을 댓다.그러나 같은 공간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다.명령이라도 인간의 존중을 파괴하는 명령은 거부할 수 있다는 저항권의 개념을 알고 잇었던 사람들이다.아니 그건 이후에 알았다 하더라도 인간성이 우선한다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이다.물론 그들의 목소리는 작고 또 잊혀졌다.
크레온의 결정은 국가의 명령이고 안티고네의 저항은 인간성에 바탕을 둔 양심의 소리이다.당신은 언제나 당신의 양심의 소리륻 들을 수 있는가? 당신은 조직과 다수의 명령보다 당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그리스 비극은 묻고 있다.아주 많은 것들을...가슴은 여전히 먹먹한 상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6/81/cover150/8931001681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68108</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강아지 똥 같은 권선생님 - [우리들의 하느님]</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1331962</link><pubDate>Wed, 20 Jun 2007 11: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133196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274028&TPaperId=133196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99/coveroff/8990274028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274028&TPaperId=133196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우리들의 하느님</a><br/>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1996년 12월<br/></td></tr></table><br/>새로운 리뷰공간을 하나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타이틀은 &lt;화장실에서 본 책들&gt;이 좋을 듯 하다.아이와 와이프에게서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화장실이다.요즘은 그것도 매번 그렇지는 않다.뽈뽈뽈 기어다니는 아이가 화장실 반투명 유리창에 와서 드륵 드륵 긁어댄다.중요한 볼 일에 지장이 생긴다.
이 책을 화장실에서 펼치고 있을 때 권정생 선생은 돌아가셨다.훌륭하신 분을 화장실에 모시고 와서 한 켠에서 망자에 대한 모독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그러나 이내 권정생 선생의 글을 읽는 데 가장 좋은 곳이 화장실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주 당당하고 힘차게 읽어 내려갔다.(보던일도 잘 볼 수 있고 당당함은 역시 좋다.)권정생 선생이 아픈 몸을 부여잡고 쓴 불후의 명작 &lt;강아지똥&gt;을 생각해보면 나의 화장실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다만 한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나의 응가를 똥개가 먹는게 아니라 정화조가 먹는다는 것이다.권선생님이 걱정했던 파리 하수도처럼 말이다.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그 맨홀들에 소중한 나의 응가들이 투척된다.그렇다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바로 똥개다.(아 그 많던 똥개는 어디로 갔을까? where all the 똥개s have gone? 영어 쓸라니까 안된다.흐롱) 산책로에서 만나는 강아지들은 전부 인간화의 탈을 쓴 강아지이다.두렵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예쁘지도 않다.살이 피둥 피동 올라서 숨 쉬기도 힘들어보이는 시추부터 탱크탑을 입은 푸들까지..그러고 보니 다들 외국종이다.
&lt;우리들의 하느님&gt;에서 권정생 선생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현재 한국 기독교와 예수쟁이들을 꼬집는다.한마디로 정리하면 오강남 선생의 말처럼 '너희들이 믿는 그런 예수는 없다'라고 할 수 있다.권정생 선생이 믿는 예수는 세상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는 자,남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자,약한 사람들을 보듬는 자로서 예수이다.그런 예수는 매주 주변 교통을 지옥으로 만드는 대형교회에 있지 않다.또 교회 신축에 쓰라고&#160;수 천만원을 희사하는 부자 교인들 사이에 있지 않다.남보다 우리 아들이 잘 돼기만을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 속에 있지 않다.나와 내 가족만 잘먹고 잘살게 해달라는 곳에,입으로만 이웃이라고 외치는 장소에 예수를 갖다 놓은 것이 진짜 신성모독이다.이문재 시인은 '삶의 모델로서 예수를 존경할 뿐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나와 비슷한 생각이다.자신의 삶에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도 그 의미의 본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기독교 목사입네 기독교 신자입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60;'퍼주기'란 말이 있다.배고파서 국경넘다가 죽어자빠지고 일부는 몸팔아서 자식 끼니를 때우는 북녘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물론&#160;정치적으로 복잡한 그물망이 얽혀있다.하지만 그것 때문에 한국의 기독교계가 이런 논리에 쉽게 동조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한국의 기독교는 국가주의,팽창주의,보수주의의 기게가 되어 있다.
(교회안에서) 목사: 예수께서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도들:아멘
(교회밖에서 조중동을 보다가) 목사,신도들 : 북한 정권때문이군.일단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데 퍼주면 안돼지.북한놈들은 하여간 믿을 수가 없어.
가끔 채널 돌리다 기독교TV에서 목사들이 침튀기며 강의하는 것을 본다.어찌나 유치한지.저걸 듣고 감동먹는게 이해가 안된다.그런데 목사님 말씀이라며 주워섬긴다.고개까지 끄덕이며..
'이승엽 선수가 잘하는 것..박지성 선수가 잘하는 것...우리 교회가 들불처럼 한반도에 퍼지는 것..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아끼시고 선택하셔서....'
이걸 들으러&#160;교회에 가야 한다면&#160;하나님이 주신 소중한&#160;시간에 귀를 썩여서 죄송한 일일뿐이다.
권정생 선생은 자연과 하나되는 인간 삶의 복원을 꿈꾼다.그 중심에는 농사일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다.농업이야 말로 하늘과 땅,그리고 인간 이렇게&#160;삼자가 관계 맺는 공간이다.그러나 인간 세상이 산업화되면서 농업은 저기 뒤켠으로 밀린다.농부의 마음이 뒤로 밀려 간다는 것은 자연과 함께 숨쉬는 인간이 인간성으로 부터 소외된다는 뜻이다.(못되게 이야기하면..권정생 선생을 좋아한다며 농업 생존권을 앗아가는 한미FTA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있다면- 권정생 선생과 대치되는 길 위에 있는 사람이다.) 권정생 선생은 문득 문득 전근대시대의 농경사회를 그리워한다.이것은 분명 현실 지평에서 퇴행적이다.역사적으로 우리 사회가 아무리 문제가 많더라도 인정 많았던 농경사회문화로 돌아갈 수는 없다.그저 한 개인과 개인의 삶에 작은 변화를 이끌고 또 이런 작은 변화들을 도모하는 길에서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작용할 수는 있을 것이다.과거를 돌아보며 현재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일깨우려는 의도로 읽으면 될 듯 하다.
사람은 무엇을 알고 믿느냐 보다 어떻게 그걸 따랐느냐에 따라 후대에 평가를 받는다.여기에도 물론 제기할 수 있는 문제는 많다.하지만 권정생 선생은 낮은 자로서 낮은 곳에서 낮은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그가 서있는 땅이 옳바랐고 그가 믿었던 하늘이 옳바랐고 그가 옳바랐다면&#160;다른 차이쯤이야 어찌되던 상관이 없다.
대단한 사회적 명성을 누린 것도 아니고 돈과 명예가 높았던 것도 아니다.그럼에도 그 분이 돌아가신 후 그의 누옥에는 조문객이 이어진단다.그 분의 마음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전수되었으면 한다.
강아지똥 처럼 사신 권정생 선생.. 지금쯤 민들레 홀씨가 되어 천지간을 여행 다니실 듯하다.&#160;]]></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0/99/cover150/8990274028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9954</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세상의 부당함을 가리키고 있는 너희 손가락은 이미 썩었다. - [팟저 - 이기주의자 요한 팟저의 몰락]</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1263575</link><pubDate>Wed, 13 Jun 2007 13:3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126357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40224&TPaperId=126357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7/43/coveroff/899124022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240224&TPaperId=126357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팟저 - 이기주의자 요한 팟저의 몰락</a><br/>베르톨트 브레히트 원작, 라삐율 편역 / 북인 / 2006년 07월<br/></td></tr></table><br/>내 가장 좋은 여자 친구는 연극 배우이다.그녀는 대학을 입학하자 마자&#160;연극동아리에 가입했다.당시 대학교 연극 동아리가 무대에 가장 자주 올리던 레퍼토리가 브레히트였다.대학을 졸업하고 그녀는 정말 연극배우가 되었다.프로연극인인 그녀의 1년 연봉은 운좋은 해에 400만원쯤 된다고 했다.부산에 내려오기 전 까지 그녀의 공연은 거의 전부 다 봤다.연극계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초대권 준다는 것을 늘 마다했다.
브레히트의 작품을 읽다가 그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전화기 뒤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아이와 함께 복지관 문화프로그램 참여하러 왔다고 한다.그 집 아이랑 우리&#160;아이는 3달 터울이다.그녀는 안그래도 점심 먹다가 내 생각 나서 전화 한 번 하려고 했다며 내 전화를 신기해했다.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최근에 읽은 브레히트를 이야기하려는 순간.그녀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어 미안한데 전화 끊어야 겠어.내가 다음에 다시 할께.아이가 저리로 도망간다.잡아야돼 '
'어...그래..브레히트는 보내줄...'&#160; 
' ...뚜뚜뚜...'
그녀에게 브레히트의 미완성 작품 &lt;팟저&gt;를 보내야겠다.지난해 7월 나온 책이었으니 읽었으리 만무하다.아이 키운다고 정신없는 1년차 엄마이기 때문이다.
브레히트의 &lt;팟저&gt;(또는 이기주의자 요한 팟저의 몰락)은 퍼즐놀이다.브레히트는 &lt;팟저&gt;를 완성하지 않은채 남겨 두었다.우리가 만나는 이&lt;팟저&gt;는 편역자 라삐욜(무대미술,행위예술을 하는 한국 사람이다)이 재구성한 것이다.책은 크게 1,2부로 나뉘어져 있다.1부는 브레히트의 단편을 이리저리 묶어낸 &lt;팟저&gt;대본이다.2부는 좀 복잡하다.일종의 해설서에 가깝다.&#160;&lt;팟저&gt;생성사부터 &lt;팟저&gt;에 대한 작품론,그리고 브레히트의 제자이자 동독 최고의 연출가였던 하이너 뮐러의 &lt;팟저&gt;해설,이 책을 편저할 때 누락된 브레히트의 &lt;팟저&gt;관련 메모들이 들어 있다.
&lt;팟저&gt;는 미완성의 열린 텍스트이다.편저자가 이 책을 꾸린 이유는 브레히트의 재료를 다시 한번 손봐서 연극무대에 올릴 수 있길 하는 바람에서이다.그렇기 때문에 편저자는 76년 &lt;팟저&gt; 초연을 주도했던 하이너 뮐러의 작업을 첨삭하면서 라삐욜의 &lt;팟저&gt;를 만든다.이 텍스트를 토대로 또다른 변형이 가능하다.(브레히트가 연출가들에게 주장했듯이)
&lt;팟저 도큐멘트(작업계획들과 메모들,구상들)&gt;은 그렇게 일단은 중점적으로 글쓴이의 공부를 위해 만들어졌다....글쓴이인 나는 아무것도 완성할 필요가 없다.내가 나를 수업한 것으로 족하다...브레히트 &lt;팟저 주석 c2&gt;
&lt;팟저&gt;는 무정형의 텍스트이기 때문에 읽을 때부터 물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불안하다.줄거리라고 할만한 것은 딱히 없다.또 내러티브를 위한 친절한 연결고리도 없다.인물들은 마치 선지자나 혁명가들처럼 불연속적인 언어를 내지른다.거기에 작품과 작가와의 관계가 책 서문에 박힌 이름처럼 딱 달라 붙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 근대 독자의 '작가=작품'의 연결이 흔들린다.이게 누구의 작품인가? 브레히트는 500여장의 메모만을&#160;남겼다.그 메모가 작품인가? 모호해진다. 열려있기 때문이다.내가 능력만 된다면 내 나름대로 &lt;팟저&gt;를 구성해도 브레히트에게 쓴소리 듣지 않는다.(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lt;팟저&gt;의&#160;줄거리는 간단하며 등장인물도 예닐곱명 수준이다.4명의 탈영병이 탱크 위에서 내리면서 극은 시작한다.그들은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면서-팟저는 스스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믿는다-함께 행동하기로 결정한다.그들은 무리 중 카우만의 집으로 숨어든다.이들 중 팟저만이 밖으로 나가서 음식을 구해올 수 있다.팟저는 푸줏간남자들과 다툼을 벌인다.동료들은 발각을 염려하여 행동 강령대로 외면한다.팟저는 카우만의 굶주린(?) 아내와 관계한다.그들은 그녀를 자유화(?)한다.팟저는 스스로를 없앰으로서 나머지를 없애려한다.무리는 팟저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길지 않은 이야기다.또 코러스 기능이 수시로 등장하여 작품을 설명하고 관객의 몰입을 막는다.브레히트를 읽거나 보면서 '감동' '동화' '눈물 뚝뚝' 된다면 브레히트를 모독하는 짓일게다.&lt;팟저&gt;가 다루고 있는 주제는 대단하다.&lt;팟저&gt;에서는 전쟁과 도시,개인의 욕구와 집단의 욕구,급진주의와 반급진주의,이성과 감성,역사적 폭력과 단절,대중의 모순과 희망같은 것들을 이야기한다.20세기 역사와 철학,사회를 관통하는 주제들이 단절된 무운형태의 시적 표현들로 적시되어 있다.(피터 한트케의&#160;인기작품 &lt;관객모독&gt;에서 이런 투로 한 장을 구성한 것을 본적이 있다.예를 들면."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이게 단절된 무운형식의 표현이다.왜 이런 표현을 쓰는지는 알고 나면 재밌고 낭독하면 새로움이 있다.)
작품에서 대립적 구도를 갖는 이는 팟저와 코이너이다.이둘은 &lt;팟저&gt;안에서 상호보완적이다.팟저가 개인주의,아나키즘,급진주의의 축을 잡고 있다면 코이너는 공동체주의,반급진주의,이성주의자로서위치한다.하이너 뮐러는 역사적 스펙트럼 위에서 코이너를 레닌으로 배치시킨다.
(코이너) 그들이 우리를 한명씩 건드리면/그 땐 우린 끝이야.우리는/더 이상 가면 안돼,여기/경계지역에서/그들이 제일 불만스러워 하고 있어 그 다음은: 공장이/있는 곳이지!
&lt;팟저&gt;에서 쉽게 읽히는 정서는 전쟁으로 대표되는 국가/폭력에 대한 것이다.이 전쟁을 중심배경으로 팟저 대 코이너의 대결구도가 형성된다.전쟁 또는 국가,국가 폭력에 대한 &lt;팟저&gt;의 표현은 시이며 프로파간다다.
고기가는 기계를 다루는/자들은 손잡이 말고는/아무것도 다루려 하지 않고/그렇게/인류의 정돈된 대중은/잘못된 목적으로 출동하고/그렇게 새로운/요령과 같은 박자 안의 욕망은 악용된다.
욕망의 구획지어짐에 대한 브레히트식 표현이다.이 욕망은 자본주의하에서 전쟁이란 이름으로 해소된다.고기 가는 기계를 다루는 자들은 전쟁을 다루는 자들이기도 하다.네그리의 &lt;제국&gt;에 보면 이런 뉘앙스의 글이 나온다." 우리는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전쟁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실은 지하 창고의 금고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기억에 의해 쓴거라서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고기사는 기계를 다루는 자들은 적을 규정하고 그들에게 총부리를 대라고 명령한다.팟저는 다르게 말한다.
내 앞에,내가 대항해 싸웠던 상대는:내 형제다/하지만 내 뒤에 그리고 내 형제 뒤에는:우리의 적이 있다.
너희들이 아직 몇 조각 고기 살점을/이빨 사이에 혹은/너희 형제들의 이빨 사이에 가지고 있는 한/너희들은 살육을 멈추지 않는다/게다가/물은 썩는다 입안에서
&#160;뒤/돌아들 봐라 그리고 민족들의 전쟁을/계급들의 전쟁으로/세계 전쟁을/시민전쟁으로 바꿔라,즉 흩어지지 말고/이 전쟁을 너희 나라 땅에서 해라,너희가 너희의 시민계급을 박멸하지 않기 전에,전쟁은/끝나지 않을 테니
이기주의자이며 능력을 갖춘 리더 격인 팟저.그는 급진주의적이며 다중적이다.그가 희망을 거는 인간 이후의 대중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이간다.'각성된 민중'이라는 개념처럼 들린다.팟저는 과거의 것들을 부정하는 정신이다.라삐욜이 브레히트를 니체와 마르크스의 변증법으로 본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일듯 하다.팟저는 부정의 정신을 극한으로 밀고가는 전복을 원한다.(낭독하면 재미있다.)
쳇바퀴처럼 살려는/너희들의 건강하지 않은 욕구/나는 그게 싫다.
부당한 것은 인간적이다/더 인간적인 것은 그러나/부당함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다!
인간에게 인간은/완전히 분간할 수 없는 것이다/모든 뼈와 살을/즙으로 녹여버리는/엄청난 위를 /통과한 것과 같이/네가 진창에서는/물고기와 사과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처럼/그렇게 희뿌연 죽 속에 인간의 목숨이 놓여있다.
그리고 너희에겐 아무/문제가 되지 않는것:비가/위에서 아래로 내린다는 것/그것은 나에겐/도저희 견딜 수 없는 것이다/알파벳에서 A 다음에 B가 오고 그것 말고는/아무것도 오지 않는다는 것.너희들한테는 그게 옮지만/나에게 그것은 완전히 별볼 일 없는 것이다.
세상의 부당함을 가리키고 있는/너희 손가락은/이미 썩었다: 시꺼먼 손가락!/그리고 호소하는 너희들의 팔은 이미 어깨에서 떨어지고 있다!<br />
<br />
이 도시 전체에/전복할 준비와/능력이 되는자가/단지 다섯뿐이라면,/곧 그들과 한 패가 되라/낡은 모든 것은 놔두고/즉시 새로운 것/즉 완전한 전복을 선택하라<br />

그러나 팟저는 패배한다.대중의 패러독스에 의해 또는 자기 함몰에 의한 패배이다.브레히트는 이들이 대중을 떠나는 순간 그 패배가 결정되었다고 말한다.팟저의 마지막 유언..
누가 이 싸움에서 승리할 지/나는 모르겠다/그러나 늘 이기던자는 패배하고 말았다/그리고 지금부터 전 세월에 걸쳐/너희 세상엔 더 이상 어떤 승리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패배자만이/늘어날 것이다.
체제의 영원한 승전가를 예견하는 듯 하다.그러나 모순은 희망을 위한 반전이다.하이너 뮐러는 여기서 '적' 개념을 환기시킨다.완전한 세계개혁프로그램으로 완전한 적 개념이 만들어진다.착취를 살아 있는 자의 한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어떤 절대적인 적개념도 필요없다.아직 끝나지 않았다.&lt;팟저&gt;의 마지막 코러스...
너의 목소리를 움츠려라,연설가여/너의 이름은 칠판에서 지워질 것이다/너의 명령들은/더 이상 수행되지 않을 것이다.허락하라/새로운 이름들이 칠판에 등장하고/새로운 명령들이 지켜지는 것을/옛날 초소를 떠나라.
올해는 6월 항쟁 20주년이다.요즘은 예전 만큼 브레히트가 읽히지 않는다.할 수 없다.읽히지 않음에도 브레히트는 마르크스를 인용하여 이런 말을 후대에게 던진다.
'인류는 실현할 수 있는 것 외에는 더 이상 계획하지 않는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7/43/cover150/899124022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74309</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한대 쭉 빨아볼래.. - [미국의 송어낚시]</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1261066</link><pubDate>Sat, 09 Jun 2007 12: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126106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036248&TPaperId=126106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5/67/coveroff/8992036248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036248&TPaperId=126106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미국의 송어낚시</a><br/>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br/></td></tr></table><br/>리처드 브라우티건의 &lt;미국의 송어낚시&gt;라는 책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160;영화&lt;흐르는 강물처럼&gt;을 떠올렸다.그 영화는 포스터가 유명했다.멀리서 유학온 친구들 하숙방 마다 하나 씩 걸려 있던 기억이난다.얕은 강물과 짙은 녹음,그리고 탱고 무희처럼 날렵하게 날아오른 낚시줄... 그리고 브래드 피트.요즘은 아내와 함께&#160;아시아&#160;아이들 수집하는 취미가 생긴&#160;그이다.많이 쭈그러졌다.그러나 영화&lt;흐르는 강물처럼&gt;에 나올 때만해도&#160;그는 아름다왔다.미국인의 이상형이라는&#160;로버트 레드포드의 후계자가 될 만 했다.특히 영화 속에서&#160;자연과 물아일체된 그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스스로 풍경이 된 &#160;동생 브래드피트의 낚시하는 모습을 바라보며&#160;감동먹었던 형의 나레이션이 생각난다. 브래드 피트가 예뻐서 더 예쁜 낚시 장면이었다.
영화&lt;흐르는 강물처럼&gt;의 여유로움을&#160;생각하며 브라우티건의 &lt;미국의 송어낚시&gt;를 읽는다면 정확하게&#160;10센티미터 바늘에 낚인 것이다.&lt;미국의 송어낚시&gt;에서 저자는&#160;전원을 그리워 하지만 영화처럼 그림 같은 전원의 모습은 책 어느 구석에도&#160;등장하지 않는다.오히려 기계,폭력,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둥둥 떠내려가는 송어 만이 나올 뿐이다.그러니 소설 속에서 통속적인 낭만과 여유로움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제목에 속아서&#160;낚이지 않는게 좋다.
&lt;미국의 송어낚시&gt;는 결코 읽기 편안하지 않다.우선&#160;이 책의 구성은&#160;파편적이다.2-3장 정도 분량의 짧은 연작소설이 이어진다.대략 50개의 짧은 장마다&#160;소제목이 있다.물론 앞에 나왔던 이야기가 몇 마을 건너 또 언급되기도 한다.1000피스 직소퍼즐이 마룻 바닥에 마구 흩어진 듯 소설이 쓰여져 있다.읽다보면 어느 정도 맞추어지기는 하지만 전체의 그림을 다 맞춘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프랑스 영화사에서 '누벨바그 시대' 프랑소와 트뤼포와 같은 작가들이 실험한 ' 점프컷'과 비슷하다.남자와 여자가 뽀뽀를 하는 로맨틱한 장면이 나오려는데 갑자기 다음 장면은 광산 노동자의 일하는 씬으로 구성되는 그런 것들이다.몸에 배인 관습에 배치되는 구성이어서 난망하다.그런데 이 난감함 속에 의미가 발생한다.이 책&lt;미국의 송어낚시&gt;역시 이런'점프컷'들을 다닥 다닥 이어 붙여 놓은 것 같다.그래서 결론이 무었이냐 ? 줄거리 찾지 말라는 이야기다.&#160;줄거리를 찾아내려고 하면 본인만 힘들다.작가가 처음부터 3분 라면처럼 딱 떨어지는 소설 형식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부디 소설을 읽으면 10줄 정도로 소설의 줄거리를 꼭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도 '송어낚시' 바들에 낚이지 말길 바란다.물면 아프다.
이 책은 다양한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책을 이끌어가는 힘이 상징과 은유다.그런데 이것들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빨간 버버리코트는 연쇄살인마의 표적'이란 식의 통속적 은유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책 제목에서 부터 '미국'이라는 특수성이 반영되듯이&#160;즐겨 사용되는&#160;상징과 은유들을 이해하려면 미국 문학,역사,문화 등에 익숙해야한다.그런데 미국인도 전부 다 알 것 같지는 않다.예를 들어 이 책에서 거짓된 아메리카 드림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생각해보자.작가가 그를 거짓된 꿈의 환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 한 프랭클린은 그냥 미국 역사 태동기의 선구자쯤으로 여기고 넘어가기 쉽다.기존 체제에 불복하는 자유롤운 공간으로 제시되는 '모래상자'도 그렇다.아이가 노는 '모래상자'를 '탈주공간'으로 이해하려면 꽤나 많은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한다.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는 귀찮아도 책 뒤에 나오는 역자의 친절한 설명문에 기댈 수 밖에 없다.거의 매 장 마다 앞과 뒤를 오고 가야 하기 때문에 뒤쪽 친절한 보충설명란에 책갈피를 하나 꽂아 놓고 보는게 덜 귀찮다.또한 소설의 전체적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4년 역자가 작가와 나눈 인터뷰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브라우티건은 비교적 자세하게 자신의 문학관과 &lt;미국의 송어낚시&gt;가 가진 소설적 의미와 소설이 탄생하게된 배경에 대해서 쓰고 있다.
&lt;미국의 송어낚시&gt;는 마치 초현실주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이런 류의 영화가 대개 좀 난감한 면이 있는데 가끔 혹하는 마음에 보면 또 아주 신선한 재미가 있다.이 소설은 1967년에 나왔다.이 시점은 20세기 서구 역사에 있어서 가장 자유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시점이다.히피,마약,베트남전,인권 행진,유럽의 68혁명 등등... 소설은 그런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다.작가 역시 사이키델릭한 짐모리슨의 음악을 들으며 마약을 한대 멋드러지게 맞고 펜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니었나 생각된다.최소한 마리화나 정도는 깊에 빨아 들였을 것이다.소설 속 상상에 마약의 중독적인 향기가 배어있다.뽕의 뒷 맛은 그래서 가끔 구질 구질,상상 초월의 설정들을 만들어 낸다.아내와 강가에서 정사를 나누다가 질러버린 정액이 부패한 송어들과 둥둥 떠다니는 작가의 상상에 구역질이&#160;날만한 바른생활 선남선녀들도 이 책에 낚이지 않길 바란다.
정작 중요한 이 책의 주제는 무엇일까 ? 대략 느끼려고 했으나 브라우티건이 인터뷰에서 한 줄로 정리해준다.생각하기 싫으니까 그냥 인용해보자.
제 소설의 핵심적인 주제가 상실,비탄,목가,향수,탐색으로 이어지는 것도 거기에 있습니다.제 소설의 주인공들은 잃어버린 '미국'을 찾아 방황합니다.
그리고 주인공 찾기 강박증에 걸린 독자를 끝까지 괴롭히는 이 책의 주인공에 대한 것도 언급한다.
&lt;미국의 송어낚시&gt;는 사랑도,장소도,책도,꿈도 그리고 작가의 펜촉도 될 수 있는 무형의 것입니다.풍요를 상실한 현대의 불모지에서 부재하는 인간의 정신,꿈,미국을 탐색하는 작업은 언어의 유희나 알레고리 패러디나 농담으로 이루어집니다.현대의 악몽적인 상황하에서는 언어와 아이디어와 내용 사이에 단절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옮겨 놓고 보니 모두 여섯 줄이다..사실 이 여섯 줄이&#160;&lt;미국의 송어낚시&gt;를 참고서에 싣고 싶은 출판업자가 그렇게도 찾는 문장이었을 것이다.또한 엉킨 실타래를 ?다가 절반 포기,절반 짜증에 혼합된 사람들 역시 찾고 싶었던 말일것이다.소설의 주제,작품의 구성,언어표현의 방식까지 다 적혀있다.
이 책에서는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현대인의 상실감,자연과 공존하지 못하는 소외,죽음에의 공포,자본주의의 폐해 등이 송어낚시라는 이름으로 뒤섞인다.어떤 때는 송어낚시가 주체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읽다보면 곧 '송어낚시'가 어떤 행위나 어떤 인물이 아님을 알게된다.작가는 이 뒤죽박죽 혼합을모든 것이 떠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떠있는 물방울들이 이 녀석하고도 붙고 저 녀석하고도 붙고 또 조금 있다가 흘러서 떠내려가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속성은 비자본주의적 요소를 자본주의화하면서 성장한다고 한다.태생이 먹깨미 귀신같은 놈이다.이 유령은쌩까는 성격이 있다.자신이 쓸고 지나간 자리를 돌아보지 않는다.곶감만 빼먹고 씨는 아무렇게나 버려놓는 몰염치한 친구다.자본주의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발전과 개발은 언제나 치워지지 않는 또한 치유되지 않는 배설물들을 남겨놓았다.그게 폐선장이고 폐차장이다.이 페선장과 폐차장에는 산업사회의 쓰레기만 가득하다.미안하게도 거기에 인간들도 갖혀있다.인간이 만든 역사에 인간이 갖힌 것이다.한자로 짧고 굵다.자승자박,자업자득...이 폐선장의 쓰레기들은 넘치고 넘쳐 강을 바다를 산을 덮는다.인간의 역사 발전만큼이나 도도한 흐름이다.브라우티건의 &lt;미국의 송어낚시&gt;는 이런 디스토피아에서도 작은 희망을 이야기한다.송어낚시 쇼티를 외면하고 프랭클린 동상앞에서 모래상자와 노는 아이들 처럼 말이다.
천국에서도 브라우티건은&#160;마리화나 한대 깊이 빨면서&#160;송어낚시를 하고 있을 것 같다.씨익 웃으며말이지..]]></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5/67/cover150/8992036248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56716</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나는 윤대녕이 아프다 - [제비를 기르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1073137</link><pubDate>Mon, 05 Mar 2007 11:5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107313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697X&TPaperId=107313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7/79/coveroff/893643697x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3697X&TPaperId=107313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제비를 기르다</a><br/>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01월<br/></td></tr></table><br/>나는 '윤대녕'이 아프다.
윤대녕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가슴 한 켠에 통증이 느껴진다.통증은 바늘처럼 날카롭기도 하고 무거운 망치처럼 묵직하기도 하다.간헐적인 통증에 자꾸 가슴에 손이 간다.긴 한숨과 더불어...나의 눈은 자꾸 방 한 구석을 바라보거나 창 문 밖을 멍하니 내다보게 된다.
아픈 곳에는 더 자주 손이 간다.윤대녕의 소설&lt;제비를 기르다&gt;는 다시 아픈 곳을 건드린다.이제 나의 것이 아니라고 믿었넌 그 '상처'들이다.
어린 시절 들었던 '바늘' 이야기가 떠오른다.바닥에 바늘이 떨어졌다.아버지는 어두컴컴한 방을 헤집으며 바늘을 찾고 계셨다.엉거주춤 기어다니며 바늘을 찾는 아버지를 나는 멀뚱 멀뚱 바라보고 있었다.손으로 바닥을 몇 번 쓴 끝에 한 줌의 먼지와 함께 바늘이 모습을 드러냈다.아버지는&#160;바다&#160;밑에 가라앉았던 침몰선에서 보물을 건져낸 듯 뿌듯해 하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작은 바늘은 말이지.아주 위험해.그냥 있다가 밟고 넘어가면 몸으로 들어가서 혈관을 타고 따라 돈다고..'
바늘이 혈관을 따라 타고 돈 다는 것이 사실은 아닐것 같다.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붉은 혈관을 따라돌아다니는 은빛 작은 바늘을 생각하고 몸서리를 쳤다.
'윤대녕'은 사라진게 아니었다.나는 스스로 날개를 꺽고 내려앉았다고 믿고 있지만 '그'는 은빛 바늘이 되어 내 혈관을 돌고 있다.잊고 지낼 때가 많은 것은 그 바늘이 자연선택하여 혈관의 길을 알아내고 벽에 부딪히지 않고 잘 돌았기 때문이다.혈관 벽 역시 바늘이 주는 통증에 어느정도 익숙해 져 있기도 하다.하지만 몸에 들어간 바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나는 '윤대녕'이 아프기 때문에 그 말 이외에 사실&#160;덧붙일 말이 없다.아픈 사람에게 그 통증의 입체적 느낌을 설명하라는 것은 무리가 있다.계란같은 통증 하나가 몸에 들어가 있는 느낌.나와 똑같은 증상을 겪는 사람만이 그 미세한 통증 아닌 통증을 느낄 수 있다.11월의 바람같은 그 느낌말이다.
윤대녕의 이야기는 비슷 비슷하다.소설집 &lt;제비를 기르다&gt;에도 윤대녕스러운 정서는 이어진다.윤대녕이 여기까지 왔다...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내게 윤대녕은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책 후기에 그 스스로도 어떤 벽에 부딪혔음을 말한다.그 벽을 넘었는지 아니면 우회했는지 모르겠다만 그 결과물이 이 책인 것만은 사실이다.이 책으로 윤대녕이 더 성숙했느니 다른 길을 보았느니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내게는 그가 '윤대녕'답게 그에게 주어진 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길 너머를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사람들은 윤대녕의 인물들에서 어떤 '신비성'을 읽는다.하지만 아픈 나는 윤대녕에서 '사실성'이 느껴진다.통상적인 개념의 '리얼리즘'을 말하지는 않는다.)&#160;내가 알던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 속에 있다.
4-5년전 좋아하던 형님과 대학로에서 술을 마셨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 형님은 이미 길 너머를 갔다 온 아니면 이미 길 너머와 길이 하나가 되어버린 사람이었다.) 
형님이 내게 그랬다.'넌 참 힘들겠다 싶다.' 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다.&#160;
&#160;'널 보면 늘 줄타기 하고 있는 사람이 생각난다.왜 있잖아.서커스 같은데서 균형잡고 줄위에 서 있는....보통 사람들은 8할 정도는 땅에 발 붙이고 있고&#160; 나머지로&#160;허공을 그리워 하지..그게 정상적인 거고 그런 사람들이 세상의 다수를 차지하지.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몇몇&#160;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부유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부유 자체가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지.그런데 널 보면...진짜 위태 위태하면서도 줄타기를 잘하고 있어...이렇게 말하면 그렇지만 딱 50 대 50이야. 그래서 널 보면 참 힘들겠다 싶다.차라리 어느 한 쪽이 무거우면 편안해지는 법인데 말이지.그런데 아마 넌...내가 아는 사람들 처럼 영원히 부유하지는 않을거야...대신 말이지. 네가 내려앉았다고 떠다니는 사람들,그리고 아직 내려앉지 않은 사람들을 못났다거나 이상하다거나 정신 못차렸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으면해. 그런 사람을 봐 왔거든.자기가 내려앉더니 지나온 자기의 과거를 부정해버리더라고...쓸모없는 시간낭비나 주체못하는 낭만성정도로 취급해버리더라고'
나는 느낀다.이제 '윤대녕'이 나의 것이 아님을.그렇지만 알고 있다.여전히 '윤대녕'스러운 것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럼 나머지 제비들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일부는 생을 다해 죽고 나머지 제비들은 또다른 곳으로 가겠지' ....&#160;&lt;제비를 기르다 중에서&gt;]]></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7/79/cover150/893643697x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77900</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누런 개 한 마리가 끝없이 따라가고 있다.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 [가만히 좋아하는]</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1063890</link><pubDate>Mon, 19 Feb 2007 19:2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106389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2626&TPaperId=106389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4/62/coveroff/893642262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2626&TPaperId=106389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가만히 좋아하는</a><br/>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04월<br/></td></tr></table><br/>대전 역 내에 있는 서점에서 시집 &lt;가만히 좋아하는&gt;을 샀다.한 손에는 장모님이 보내주시는 꽤 무거운 김치 꾸러미가 있었다.다른&nbsp;손은 어젯 밤 아기가 잠든 사이 스탠드 켜고 이불 덮어쓰고 본 책..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를 갈아 타기위해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플랫폼에서 보릿자루 마냥 기다리기 싫었다.비록 잠으로 귀가길을 빼앗겨 버릴 지라도 몇 줄의 글이 필요했다.햄버거 가게 옆에 있던 서점을 두리번 거렸다.사람들은 자기계발서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 나는 한 쪽 귀퉁이 한 면의 반도 채우지 못한 시집 코너를 기웃거렸다.며칠 전 부고를 들었던 오규원 선생이 시집이 먼저 눈에 띄었다.그러나 계산대 위에 오른 것은 김사인의 &lt;가만히 좋아하는&gt;....
나는 지금껏 시집 리뷰를 단 한편도 쓰지 않았다.그렇다고 내가 시와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은 아니다.한 해에도 대 여섯권의 시집을 읽는다.그런데 이상하게 시집에는 리뷰를 쓰기가 꺼려진다.언제나 부담을 주는 것은 시집 뒤에 달린 문학비평가들의 비평글.왠지 나 역시 그런 준거에 맞게 글을 써야 할 것 같다는 무게감을 준다.내가 문학도들 처럼 그렇게 쓰지 못함을 또한 그렇게 분석할 힘이 없음을 안타까와 하는 사이 실기를 한다.시에 과문하다보니 의외로 시 비평 까지 읽어서 지식을 채우려는 것이 오히려 화가 될 때가 많은 셈이다.거기에다 좋은 시를 읽고 나면 의기 소침해지기 까지 한다.언어를&nbsp; 선별하고 조탁하는 쟁이들의 뛰어남에 어깨에 힘이 빠진다.힘없는 말에 더 채찍을 가해서 아예 주저 앉게 만드는 것은 시인들의 눈이다.내가 시인의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내게 그것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디서 잃어버린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김사인 시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나는 이 시인에게 관심이 갖다.단지 이름때문이다.'사인'이라는 이름은 왠지 모르게 남달랐다.&nbsp;'죽음의 원인' 인가? 아니면 '시그내처'를 말하는 '사인'인가?
&nbsp; "김사인 고객님,여기에 사인해주세요"&nbsp;&nbsp;
아니다.웃자고 한 소리일 뿐이다. 김사인 시인의 이름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생각은 '야..진짜 시인의 이름같다' 라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이었다.이 생각이 언제 들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그런데 그&nbsp;종적을 알수 없는&nbsp;생각이&nbsp;이 시집을 내게 불러들인 머나먼 이유가 되었으니 가끔은 쓸데없는 생각도 좋은 인연을&nbsp;이어주기도 한다.생각이 이렇게 미치니 세상사의 이모저모가 참으로&nbsp;묘하고 재미있다.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시집을 펼쳤다.내 주변 사방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장난치는 소리가 퍼졌다.기차 안에 소리를 줄여줄 차가운 가습기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이가 생기고 나니 아이들이 내는 소음에&nbsp;예전에 비해 너그러워진다.시를 읽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옆에 앉은 내 나이 또래의 양복입은 신사는 계속 짜증스런 반응을 보였다.
&lt;노숙&gt;
헌 신문지 같은 옷가지들 벗기고
눅눅한 요 위에 너를 날것으로 뉘고&nbsp;내려다본다
생기 잃고 옹이진 손과 발이며
가는 팔다리 갈비뼈 자리들이 지쳐 보이는구나
미안하다
너를 부려 먹이를 얻고
여자를 안아 집을 이루었으나
남은 것은 진땀과 악몽의 길뿐이다
또다시 낯선 땅 후미진 구석에
순한 너를 뉘였으니
어찌하랴
좋던 날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만
네 노고의 헐한 삯마저 치를 길 아득하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묻는다
어떤가 몸이여
........................................................
나는 이 시를 내리 세번 읽었다.한번은 빠르게 한번은 느리게 마지막은 작은 소리를 내어...안구에 습기.어젯밤 스탠드의 형광불빛이 눈에 좋지 않았던게 분명하다.
&lt;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gt;
(중략).......그래서 그토록 꼬부리고 숨어 있는 그것이 혹 죽은 것은 아닌가 한순간 걱정되면서 나도 모르게
손이 뻗어가 그것을 건드리니/아아,가만히 움츠리며 살아 있다고 말하는게 아닌가!
그 기척이 어쩐지 우리들 희망의 절망적인 상징처럼 
여겨져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새끼 발가락들을 만나왔던가.안타까와 했으며 무언가 도움이 되고자 했다.그런데 그것이 육화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사회적 부채감을 위한 것인지 늘 질문했다.아..그런데 '새끼 발가락'이라니? 과연 내가 본 것들이 내가 동감했던 것들이 나의 새끼발가락인적이 있었던가? '새끼 발가락'이 내 정수리에 폭포수 같은 차가움을 던진다.
&nbsp;
....오 빌어먹을,나는 먼 곳에 마음을 벗어두고 온 사내/그대 눈부신 무구함 앞에/상한 짐승처럼 속울음을 삼켜 나 병만 깊어지느니...&lt;예래 바다에 묻다&gt;
..열일곱에 떠난 그 사람/흘러와 조치원 시장통 신기료 영감으로 주저않았나/깁고 닦는 느린 손길/
골목 끝 남매집에서 저녁마다 혼자 국밥을 먹는/돋보기 너머로 한번씩 먼 데를 보는/그의 얼굴/고요하고 캄캄한 길.......... &lt;풍경의 깊이2&gt;
...사람 사는 일 그러하지요/한세월 저무는 일 그러하지요/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고/저물녘 봄날 골목을/
빈 손 부비며 돌아옵니다....&lt;춘곤&gt;
자동차 굉음 속/도시고속도로로 갓길을/누런 개 한마리가 끝없이 따라가고 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lt;귀가&gt;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자의 빈호주머니여/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그간의 일들을/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lt;코스모스&gt;
작은 것들의 이야기를 듣는 귀를 가진 시인이다.삶의 노정은&nbsp;딸칵 거리는 소리가 들릴 듯 가깝지만 또 무료배급소 늘어선 줄만큼이나 길다.저물 무렵 느린 햇살을 받고 누웠을 그 길을 생각한다.바람 좋은 저녁은 햇살을 모래가루처럼 흩어놓는다.그 모래가루를 잡고픈 허망한 시선......
일상의 비루함과 작은 것들의 지리멸렬함...시인은 그 작고 지루함에 비록 계피처럼 쓰지만 살아갈 수 있는 미소 한 자락을 퍼올린다.
&lt;꽃&gt;
모진 비바람에
마침내 꽃이 누웠다
밤내 신열에 떠 있다가
나도 푸석한 얼굴로 일어나
들창을 미느니
살아야지
일어나거라,꽃아
새끼들 밥 해멕여
학교 보내야지
&nbsp;
부산까지 오는 기차안에서 나는 몇 번 천장을 바라보며 눈가의 습기를 말려야 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4/62/cover150/893642262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46211</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이문재 산문집 마이리뷰 - [이문재 산문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1036532</link><pubDate>Tue, 09 Jan 2007 17:0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103653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8526600&TPaperId=103653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6/40/coveroff/898852660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8526600&TPaperId=103653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문재 산문집</a><br/>이문재 지음, 강운구 사진 / 호미 / 2006년 11월<br/></td></tr></table><br/>이문재 산문집은 등푸른 고등어같다.그러나 바다를 막건너온 고등어는 아니다.발효의 시간을 거친,이제는 바다보다는 인간과 더 가까와 져 있는 고등어다.그의 문장은 소박한 밥상에 오른 고갈비처럼 맛깔스럽고 그 의미는 한 젓가락&nbsp;꽉차게 잡히는 흰살처럼 두툼하다.그러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은&nbsp;푸른 바다 심연을 누릴 때 처럼 생생하다.시인은 매일 만나는 새로운 것들을 기록하며 등의 푸른 빛이 퇴색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새해 처음 읽은 책이자 오랜 만에 읽은 산문집이다.결론 부터 말하자면 첫 걸음이&nbsp; 너무 사뿐하여 행복하다.김학철 선생의 &lt;우렁이 속 같은 세상&gt; 이후 가장 훌륭한 산문을 만난것 같다.김학철 선생의 산문이 우직한 감나무같았다면 이문재 시인의 산문은 물푸레나무같다.물론 김학철과 이문재 사이에 더 좋은 글들도 많았을 것이다.(나는 과거 유명한 고답적인 산문을 읽는 정도에서 만족했다.)그 중간에 산문을 접해보려고 노력한 적도 있다.그러나 인연이 좋지 않았다.내 나이 또래의 어떤 여류시인의 관념적이며 화려한 산문을 읽다 내팽겨친게 1년도 넘은 일이다.그 후&nbsp;산문과의 '절연'의 시간이라 할 수 있겠다.과문한 탓에 좋은 글을 찾지 않았던 것이 새삼 부끄러워지기도 한다.어쨋거나 오랜 만에 만난 산문과의 해후가 '이문재 산문집'이었으니 분명 행운이다.(아무래도 올 한해 이 책을 여기 저기 많이 선물할 것 같다.) .
길 위에 살면서도 길 너머를 그리워 한 시인답게 이문재는 디지털화한 세상을 천천히 소요한다.이문재 시인의 글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느림' '아날로그' '몸' '걷기' 등이다.시인은 첫 장부터 '나는 아날로그다'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당당히 밝힌다.스스로 아날로그임을 부끄러워하는 나 같은 도시인들에게 이 선언은 자신감을 가지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아날로그선언'은 내게&nbsp;DSLR이 없는 것도MP3가 없는 것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또 90년대 후반쯤 나온 것으로 추측되는-글을 치면&nbsp;가끔 한 줄씩 동시에 나타나기도&nbsp;할 만큼 느려터진- LG IBM 컴퓨터도 불편해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아날로그'는 '기다림'을 특징으로 한다.흔히 인스턴트 식품의 대명사인 '라면'조차 이문재 시인은 '컵라면'에 비하면 '기다림'과 '주체적 이용'이 있기 때문에 이시대의 마지막 음식이라고 이야기한다.만년필이 그렇고 파이프 담배가 그렇다.불편하지만 그것들을 이용하기 까지 '시간'이라는 것이 개입된다. 그 시간은 사물들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짧은 명상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녹차를 마시는 시간을 예로 든다.
'끓는 물이 식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고 또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으며 상대방이 찻잔을 비우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다.와인이 숙성되고 녹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한여름 내내 포도를 키운 먼 곳의 농부를 떠올릴 수 있다.비탈에서 녹차를 따는 아낙네의 깊은 눈망울을 그려 볼 수도 있다.포도를 영글게하고 녹차 잎을 틔워 내는 데에 참여한 우주 전체가 고마울 수도 있다.'
근대의 속도 지상주의는 우리 삶을 점점 피폐화 시키고 있다.사람들은 그것을 발전으로 받아들이지만 늘 그렇지만은 않다.따뜻한 정서의 공간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현대화라는 이름으로 사라져 간다.골목과 마당에 대한 시인의 생각에는 애틋함이 묻어난다.나이 든 사람의 '옛날이 좋았어' 라는 신세타령으로 보기에는 우리가 잃어버리는 정서의 공간이 너무 크다.
'황혼병이라고 있다.저녁이 되면 공연히 불안 초조해지는 질병..내가 다니던 대학교 앞에는 골목이 제법 많았다. 이모집,작은집,큰엄마네같은 단골 주점이 그 골목안에 있었다....언제든 쳐들어갈 수 있는 선배나 친구의 하숙집,자취방도 그 골목과 모두 이어져 있었다....정동에서 인사동까지 걸어가는 골목길이 나를 다스리는데 한몫을 했다.골목이 특효약이었다.....모든 대도시가 골목을 박멸하고 있다...도시의 실핏줄이 바로 골목이다.실핏줄이 없는 인체가 식물 인간이듯이 골목이 없는 도시는 죽은 도시다.'
그러고 보니 내가 다니던 대학도 무지하게 한옥골목이 많았다.그 골목에 면한 친구 하숙방,버스 끊겨 갈데없는 청춘을 졸린 눈을 비비며 창문을 열고 친구가 맞아 주었다.어떤 때는 주인없는 방에 혼자 들어가 자고 있으면 저 멀리 골목에서 친구의 술에 취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도 햇다.저녁 내내 생각을 하고 술기운을 빌어 여자친구를 데리고간 골목길,순진한 입맞춤 한 번을&nbsp;못하고 얼마나 똑같은 골목길을 뱅뱅 돌았는지.......오랫동안 가보지 않았지만 아직도 그 골목길에는 사람의 향기가 나고 있을 것이다.고층 아파트 숲에서는 결코 맡을 수 없는 향기이다.
또한 '마당'에 대한 이문재 시인의 기억도 나를 애틋하게 만들었다.그는 당당하게 이렇게 말한다.'나는 안방이 아니라 마당에서 자랐다' 라고.그 만큼은 아니어도 예전에 내가 살던 집 역시 마당이 있었다.내 유년 시절 기억의 많은 부분은 그 마당에서 벌어졌다.하지만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아파트에서 살게 될 우리 아기에겐 이런 기억은 별나라 이야기가 될 것이다.그 친구가 나이가 들면 '나는 아파트에서 태어나서 아파트 놀이터에서 자랐다'라고 쓸 지도 모른다.쓰고 나니 더욱 안타깝고 애틋하다.
그는 속도의 무한 경쟁 속에서 편리와 편의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비인간적인지 적시한다.수많은 시인들의 감수성의 원천이 되었던 우체국은&nbsp; 편지가 사라지며&nbsp; 각종 공과금 영수증을 보내는 곳으로 바뀌었다.핸드폰은 우리의 새로운 신체가 되어 하늘과 땅,지하를 가리지 않고 우리를 일중독으로 몰아간다.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단 한 순간도 각종 모니터를 떠나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모니터는 눈의 창이고 마음의 창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이 '디지털 대세화'는 우리에게 '기다림'을 앗아가 버리고&nbsp;하늘의 바라보던 푸른 눈빛과 고드름을 만지던 차가운 손을 잊어버리게 했다.시인은 말한다.잊어 버린 몸을 찾고 '발효의 시간'이&nbsp;주는 미덕을 즐기자고 말이다.
시인은 우선 '언플러그'라는 작은 실천을 제시한다.그는 우리가 '전력의 노예'라고 말한다.도시의 삶에 전기가 빠지면 도시의 존립 자체가 없어진다.아파트 단지에 잠시 정전이 되면 난리가 난다.몇 시간 정전이 되면 9시 뉴스감이다.도시인들의 삶은 플러그를 꽂아 놓았을 때만 작동한다.행여 플러그가 뽑히면 심적으로 무척 불안해한다.그는 '언플러그'를 통해서 '자발적 망명'을 하라고 주문한다.만물이 하나임을 깨닫기 위해서 또 근대화의 속도에 잊혀진 나의 속도를 찾기 위해 그는 '걷기'라는 방법을 제안한다.걸음으로서 모든 풍경이 비로소 자기의 것이 되며 세상과 하나가 될 수 있다.
생태주의적 삶을 지향하는 도시인으로서 시인은 한계를 알고 있다.도시적 삶에 반항하면서도 도시에서 먹고 살고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중간자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자신에 대한 자기반성에 치열하다.
'나는 아마도 눈부시게 이 도시의 속도에 적응했던 것 같다.말로는,글로는,시로는 유목민의 속도를 떠들고,쓰고하면서도,내 구체적인 삶은 이 거대 도시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nbsp;생태적인 삶에 대한 동경만 가득한 나같은 이들에게 시인이 보내는 자기반성의 메시지이다.어떤 선배가 올 한해의 다짐으로 '좀 더 까칠해지자' 라고 농담처럼 말했다.그 말이 가르키는 바는 다르겠지만 나 역시 올해 좀 더 나에게 까칠해져야 겠다고 다짐해본다.언제나 문제는 마음으로 부터 손까지의 거리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6/40/cover150/898852660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64004</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치마를 펼쳐 하늘빛을 담다 - [신 기생뎐]</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1028077</link><pubDate>Thu, 28 Dec 2006 17:0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102807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0417&TPaperId=102807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58/64/coveroff/8954600417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0417&TPaperId=102807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신 기생뎐</a><br/>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09월<br/></td></tr></table><br/>&lt;신기생뎐&gt;은 2006년 동인문학상 최종후보까지 올랐다.그러나 상을 받지는 못했다.문학상이란 것이 그렇다.겉표지에 '00문학상 수상' 딱지를 하나 두르고 있으면 눈이 한번 더 간다.미스 코리아가 두른 어깨띠 마냥 '올해의 소설'띠를 두르면 그 아우라가 1년은 보장된다.한해가 지나가 또 다른 후보들이 신문 문화면을 채우면 고별 행진을 하며 스르르 기억에서 잊혀져간다.물론 아니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아주 오래도록 문어다리보다 질기게 독자들의 입맛을 붇돋아주는 책들도 있다고 말이다.맞는 말이다.올해 동인문학상은 &lt;틈새&gt;라는 작품이 받았다.그럼 작년(2005년)에 무슨 책이 받았을까?....국내 문학을 내 몸처럼 아끼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결국 보편적으로 말해 문학상의 유효기간은 1년이다.2007년 '이상문학상 수상집'이 나왔는데 2006년 수상집을 들고 다니면 왠지 뒤깍이 같아보이기 때문이다.
문학상 수상작품이 그럴진대 아무리 아까운 탈락이라지만 후보작을 오래 기억해주는 사람은 많지 않을것이다.하지만 &lt;신기생뎐&gt;은 오래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싶은 작품이다.오히려 '2006 00상' 이라는 시간을 한정하는 딱지가 붙어 있지 않기에 더 긴시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글의 처음을 문학상과 관련된 이야기로 풀어서 그렇지 사실 문학상이나 콩쿠르 우승이니 하는 것이 예술가치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은 아니다.어떤 유명한 사람이 그랬다나.."경쟁은 경마장에서 하는 것이지 예술 작품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이현수라는 작가의 작품은 &lt;신기생뎐&gt;이 처음이다.신문에 난 동인문학상 최종후보군을 보고 보관함에 넣어두었다.물론 다른 몇몇 작품들도 함께.그러다가 수상발표가 난 후에야 책을 주문했다.1등 먹은 책보다 떨어진 책에 더 눈이 간 것은 아무래도 삐딱한 우월감이던가 아니면 곧 잊혀질 책에 대한 연민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좀 더 그럴싸한 이유를 대자면 '소재'의 특이성이 마음에 들었다.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이긴 하지만 '일상사'의 질곡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소설들에 좀 지루함을 느껴왔다.후일담과 일상의 미묘함의 한 시대를 건너더니 요즘은 가벼움을 동반한 일탈이 패권을 잡는듯하다.무식을 무기로한 일반적 편견일 것이다.어쨋건 나의 부족한 식견은 한국 문학을 그렇게 재단하고 있었다.그 와중에 만난&nbsp;&lt;신기생뎐&gt;의 소재는 특이해보였다.
내가 아는 기생이라봐야 책이나 영화로 만난게 전부다.대개 조선시대 황진이의 선후배들이다.가끔 정치드라마를 보면 정치인이나 군부 인사들이 모종의 계획을 도모하기 위해 만나는 요정,그리고 그 종업원 기생 정도가 가장 최근에 간접적으로 만난 기생이다.소설 &lt;신기생뎐&gt; 역시 허구이다.하지만 왠지 인간극장을 보는 듯 하다.즉 소설적 리얼리즘이 돋보인다는 말이다.부용각에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한번쯤은소설이나 영화에서 만나봤음직한 내용들이다.상투적이라기 보다는 무언가 원형의 기억같은 것을 툭툭 건드린다는 느낌이 더욱 강하다.
오래된 소나무 향기를 내뿜은 부용각,어머니의 자궁처럼 낮은 사람들의 사연과 욕망,회한을 묵묵히 그러나 포근하게 안아준다.못난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옴팡진 눈에 박복한 생김의 타박네는 뒤틀려있어 위태로와보이면서도&nbsp;수백년 절을&nbsp;지켜온 일주문의 기둥처럼&nbsp; 등굽어가는 부용각을 건사해낸다.부엌에서 잔뼈가 굵은 그녀는 시장터에서 만나는 욕쟁이 할머니이다.그녀가 내뱉는 말들은 하나의 운율을 이루어 잘만들어진 요리처럼 맛갈나다.욕을 들으며 즐거워지는 것은 그 욕이 세월의 향기속에 숙성되기 때문이다.세속적이지만 약아 빠지지 않았다.실속을 챙기지만 남을 해하지 않는다.무뚝뚝하지만 숭늉같이 -그 말 밖에 없다-그냥 숭늉같은 의리와 인정이 있다.연꽃의 대궁처럼 텅비어가는 기생들을 바라보며 그 텅빈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 부엌 흙냄새가 나는 타박네의 역할이다.타박네의 욕질과 적재적소의 옛스런 표현들은 &lt;신기생뎐&gt;의 비타민같다.몰락의 기운이 서려있는 기생들 속에서 그녀는 거울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햇빛과 같다.유려하게 흐르던 흐름은 타박네가 등장하는 순간 액센트를 받는다.셋 잇단음표가 되고 스타카토가 되어 소설의 스피드를 높인다.&lt;신기생뎐&gt;의 완급이 타박네의 말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이 재미있다.그리고 캐릭터를 보고 웃음을 띄는 순간, 소설속에서 튀어나와 '너는 뭐하는 종잔데...웃고 지랄이여' 라며 머리통을 칠 것 같은 등장인물의 생생함.작가 이현수의 은근한 공력이 느껴진다.
타박네가 소설의 한축을 이룬다고 하지만 &lt;신기생뎐&gt;의 주인공은 역시 기생들이다.이 소설에는 세 명의 기생이 등장한다.채련,오마담,미스 민.....채련과 오마담은 동기이고 미스 민은 차기 부용각의 기대주이다.이 세명은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 왔지만 기생이라는 이름으로 똑같은 한의 정서를 지닌다.그리고 셋은 변증법적으로 하나가 되기도 한다.뛰어난 춤솜씨로 촉망받던 채련은 사랑을 얻을 수 없는 처지를 비관하여 이른나이에세상을 접는다.모두를 사랑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 잔인한 운명을 스스로 끊어버린 것이다.유명한 소리꾼도 고개를 떨구개 만든다는 오마담은 채련과는 다른 방법으로 그 운명과 대면한다.자기를 비우는 방법으로 소리를 지키고 부용각을 지킨다.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슬픔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수많은 남자들에게 몸을 주고 정을 주지만 늘 돌아오는 것은 배신일 뿐이다.오마담은 서운해하지 않는다.그녀는 기생의 삶이 몸에 배게한 허무의 정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지는 벚꽃이 가는 봄을 원망하지 않듯이 대숲의 떠림을 간직한채 그녀는 기생의 운명을 따라간다.미스 민은 마지막 기생이라는 떨리는 감투를 써야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철길 옆의 가난은 그녀를 국악원 대신 기방으로 몰았다.오마담의 허무미와 다르게 그녀는 야망의 푸른빛이 서려있다.소설은 그녀의 기대와 다짐을 통해 사라져가는 문화공간으로서의 기방의 미래에 나지막한 희망을 싣는다.기생들의 캐릭터와 그녀들의 한을 풀어나가는 솜씨 역시 눈여겨볼만하다.특별한 세계를 살아온 그녀들의 이야기가 깨진 독에서 흘러내리는 달콤쌉싸름한 술처럼 흘러내린다.작가는 기생을 전통문화를 이어가는 예인으로서도 파악한다.물론 예인과 기생은 성과 속의 세계로 나뉘어 살고 그렇게 인정받고 있지만 말이다.오마담의 소리,채련이나 미스민의 춤 등 묘사하는 작가의 호흡과 표현력도 근래 소설에서 만날 수 없는 깊은 맛이 난다.몇 번 씩 소리내서 읽어도 아깝지 않은 문장들이 도처에 깔려있다
&lt;신기생뎐&gt;을 읽다가 책장 위에 꽂혀 있는&nbsp;최명희의 &lt;혼불&gt;에 눈길이 갔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58/64/cover150/8954600417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86409</link></image></item><item><author>드팀전</author><category>문학</category><title>사랑은 모든것을 키운다 - [타샤의 정원 - 버몬트 숲속에서 만난 비밀의 화원]</title><link>https://blog.aladin.co.kr/apple21/1008827</link><pubDate>Tue, 28 Nov 2006 11:3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apple21/100882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image.alad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12531607&TPaperId=100882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67/89/coveroff/899114126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12531607&TPaperId=100882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타샤의 정원 - 버몬트 숲속에서 만난 비밀의 화원</a><br/>타샤 튜더.토바 마틴 지음, 공경희 옮김 / 윌북 / 2006년 08월<br/></td></tr></table><br/>나의 정원은 아파트 발코니다.크고 작은 몇 몇 개의 화분이 나의 정원의 전부다.결혼 전 총각 때 키워온 화분 중에서 아직 건재한 녀석들도 있다.그러나 대개는 결혼 후 새로 들여다 놓은 녀석들이다.나의 화분 관리는 나의 인간관리만큼이나 즉흥적이다.평소에 별 관심을 두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애정이 있는 척 바라본다.게을러야 잘 키울 수 있다는 화분들이야 나의 호들갑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그러나 따뜻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녀석들은 무척이나 반갑게 나를 맞이 한다.이러한 '무신경과 과대관심의 반복'은 식물들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애정표현 방식이다.가끔은 와이프가 이미 물을 준 화분에 또 물을 주어서 아이들을 시들시들 하게 만들기도 한다.이 무지몽매한 애정표현으로 몇 몇 녀석은 이미 저 세상으로 보냈다.화분에서 앙상해져 버린 식물들을 걷어 낼 때는 마음이 아프다.화분을 정리하고 나면 곧 잊게될 죄책감도 느낀다.
요즘 집에 있는 화분 중에 요주의 대상은 '벤자민'이랑 '파키라'이다.신혼 초에 화원에서 사온 녀석들인데 최근 관리불량으로 상태가 좋지 못하다.요주의 대상목록에 올라와 있던 '고무나무'는 어젯 밤 마지막 잎을 떨구었다.고무나무의 주민등록은 말소 되었다.(고무나무의 명복을 빈다.못난 주인 만나서...ㅜㅜ) 비교적 키우기 쉬운 식물을 가져오지만 아파트에서 키우는 것은 쉽지 않다.단순히 물만 맞추어 준다고 잘 크는 것이 아니다.빛,토양,습도,환기 등등 식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 관리해야 될 것은 너무나 많다.결국 '식물우기'에는 아이를 돌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lt;타샤의 정원&gt;의 주인공 타샤 할머니는 1년 내내 아이를 돌보듯이 그녀의 정원 속 자식들을 돌본다.봄이 늦은 버몬트의 숲 속에서 겨울나기는 그녀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구근들이 눈 속에서 잘 견디는지 너무 많은 눈 때문에 뿌리가 썩어버리는 것은 아닌지...그녀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기 위해 정성과 땀을 아끼지 않는다.그녀의 정원 속 자식들은 그녀의 애정에 대한 보답으로 봄부터 가을까지 동화 같은 풍경을 선보인다.아름다운 장미와 함박 웃음을 띤 백합,정원의 배경이 되는 옅은 붉은 빛의 돌능금나무.....모든 꽃과 나무들이 그녀의 땀을 먹고 조화롭게 자란다.타샤 할머니의 정원을 보고 있으면-비록 사진이지만-눈이 휘둥그레 해진다.자연이 만들어 놓은 멋진 색의 조합과 부드러운 붓터치에 눈이 큰 호사를 한다.
타샤 할머니의 정원가꾸기에서 가장 큰 감명을 받는 것은 그녀의 끝없는 호기심과 탐구정신이다.지금 타샤 할머니의 연세가 90임을 생각한다면 정말 본받고 싶은 삶의 태도이다.그녀는 동화 속 정원을 꾸리기 위해 해마다 예쁜 구근들과 씨앗들을 얻는다.그녀는 아름다운 것들을 얻기 위해 끈임없이 정보를 얻고 연구한다.그녀의 몸이 갸녈프지만 건강한 이유는 정원일의 노동때문이며 정신이 건강한 이유는 이러한 정열때문이다.그에 비하면 나의 화분가꾸기는 너무 건성이다.모든 일에는 '인과의 법칙'이 적용되는 법.논리적으로도 나의 화분들이 시들 시들해지는 것은 당연한 듯 보인다.다시 한번 너무도 단순한 진리를 깨우친다.사랑은 세상의 모든 것을 키운다는 진리....
타샤 할머니의 정원을 보면서 상상 속으로 나의 정원을 그려본다.누구나 그런 꿈을 꿀테지만 나 역시 아파트살이를 마감하고 싶다.어렸을 때 살았던 마당이 있는 집같은 곳에서 살고 싶다.(어린 시절 우리집 화단에는 덩쿨 장미와 목련,홍매화가 아름다웠다.) 아파트는 집이 아니다.아파트는 사는 공간일 뿐 결코 집이 될 수 없다.집은 정서의 공간이며 기억의 공간이어야 한다.그런데 콘크리트 닭장 같은 아파트는 그런 향기를 머금을 수 없다.그저 포름알데히드나 시멘트 독같은 것이나 내뿜을 뿐이다.마당 있는 집에 사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타샤 할머니처럼 꽉 들어찬 정원을 꾸미고 싶진 않다.타샤 할머니의 정원은 유성페인트로 칠한 정원같다.아름답긴 하지만.그녀의 정원에는 너무 많은 꽃들과 나무들,풀들이 어우러져 있다.꽃잔치 속에 파묻히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조금 여백을 둔 정원을 만들고 싶다.우리나라의 수묵화가 그러하듯이 빈 공간이 보이는 그런 정원이 좀 더 여유로와 보일 듯 하다.마당이 조금 크다면 와이프가 좋아하는 느티나무를 심고 싶다.봄날의 반짝이는 잎새와 가을단풍이 예쁠것이다.여름철에 붉은 꽃이 예쁜 배롱나무도 여러 그루 심고 싶다.8월이 되면 뜨거운 햇살 아래서 붉은 빛이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유실수도 몇 그루 심고 싶다.따먹지 않더라도 작은 나무에 몇 개의 사과,몇 개의 살구,몇 개의 감이 열리면 아이가 나무에 달려 있는 것처럼 귀여워 보일 것이다.연보랏빛 수국도 몇 그루 심어 놓고 싶으며 날렵하여 아름다 붓꽃도 가꾸고 싶다.담장 밑으로 부용꽃과 접시꽃도 심을 것이다.키작은 패랭이도 군데 군대 심어 놓으면 예쁠 것이다.
몸이 고될 것 같다.그러나 생각만해도 즐겁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67/89/cover150/899114126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78933</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