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혜 소설 '기억의 바깥'을 읽었다.
장편소설의 경우 오줌 누러 한 번 갔다온 거 말곤 한자리에서 다 읽은 적이 있어도, 내가 단편소설 들고 앉아 한자리에서 다 읽은 거 이번이 처음이다. 한 편을 읽고 나면 그 다음 작품이 궁금해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와, 김민혜 작가가 이렇게 소설을 재밌게 쓰는 분이었나.
김민혜 작가의 첫 소설집이 나온 게 2017년으로, 단편집 제목이 '명랑한 외출'이었다. 돈을 정크로 취급해 퍼포먼스를 벌이는 것으로 자존심을 지키려는 안간힘을 보여준 '정크 퍼포먼스', 아내에 대한 의심을 떨치지 못한 채 함께 파멸해 가는 이야기를 독특한 시점으로 그려낸 '아내가 잠든 밤' 등이 기억에 선명하다. 첫 작품집은 자본주의를 신랄히 비판하면서 현대사회의 비극을 묘사해냈다는 평과 함께 주목을 받았는데, 작가의 결연함을 읽으면서 감동을 느꼈던 것 같긴 한데 재미있게 읽은 것 같지는 않다.
이번에 나온 단편소설집 '기억의 바깥'은 작가가 즐겨 다루는 대상이나 지역적 배경이 크게 바뀐 것 같지 않은데 분위기나 톤이 확연히 달라졌다.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소설이 발전하고 달라지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이런 반응이 나올 수도 있는데, 내가 말하는 ‘달라졌다’의 실상은 사람으로 치면 인물이 아니라 성격 같은 거다. 나이 들면 인물 달라지는 거야 당연하다. 그러나 사람 성격은 안 변한다. 김민혜 작가의 작품에서 변한 것이 그 부분이다. 대상이나 소재나 작가가 지향하는 주제 같은 게 바뀐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 부분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거리' 혹은 ''거리감'이다. ‘거리감’이 생기면서 소설이 재미있어졌다. 재미와 함께 느낀 것 또 한 가지가 편안함이었다. 그 편안함이 어디서 왔을까, 생각했는데 세 번째 소설쯤에서 답을 찾은 게 ‘거리감’이었다. 좀 과장해서 나는 그 순간 ‘아, 이 작가는 이제 선수가 됐구나. 소설을 소설로 적당히 밀어놓고 거리를 조절해가며 들락거리는구나.’하는 생각까지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또 주위에서 많이 듣는 게 우리나라 단편은 재미가 없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한다하는 소설가들 단편 잘 쓰는 거야 두말하면 잔소린데 재미가 없는 건 사실 아닌가. 재미가 없는 이유를 나는 지나친 긴장감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뭐랄까. 지친달까, 피곤하달까. 장편도 아닌 단편을 잡았는데 세상에 뭐 이렇게 기막힌 삶이 다 있나 싶은 강적의 상황과 대치해있고 이러면 정말이지... 싫다. 소설을 읽으면서 긴장감도 좋지만, 맞지 않는 옷을 입었을 때 허리가 불편하거나 어깨가 끼는 옷을 얼른 벗어던지고 싶듯, 소재에 쫓기고 자기주장에 휘둘리는 주제에 절규하며 핏대 세우는 소설은 빨리 덮어버리고 싶다. 말을 말자.
김민혜 작가가 이 소설집에 담은 단편들은 그런 상태에서 전체적으로 슬며시 힘을 빼놓고 적당히 물러나 있다. 사건을 임의나 우연으로 처리했다는 게 아니라 묘하게 어긋나게 틀어놓음으로써 정색하고 싸우는 듯한 모습을 피해 숨 쉴 구멍을 확보해 놓는다. 그런 식으로 대상과 작가의 거리감이 생기니 호흡에 여유가 생긴다. 한마디로 읽기가 편해졌고,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 작품속에 깔아놓은 질문에 독자로서 생각을 하면서도 그 서사적 흐름을 음미하는 재미를 누릴 수 있다. 어떤 분야에서든 선수가 있기 마련, 선수라는 게 딴 게 아니다. 대상을 자기 영토(주방)로 끌고 들어가 자기 방식대로 요리하고 형상을 부여하고 캐릭터 혹은 색깔을 부여해서 이미지를 만들었다 허물었다(들었다놨다)하며 갖고 노는 게 선수다. 단편소설 선수인 김민혜 작가는 이런 거리감을 먼저 확보함으로써 상처와 고통 앞에서 비명을 지르는 대신 침묵과 응시와 자기치유를 시도한다. 김민혜 작가의 단편집과 다른 작가의 단편집과의 차이가 나는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호들갑 떨지 않고 과장 없이 상처와 불안을 그리면서 가만가만 치유의 길을 더듬어나가는 작가의 그림자를 소설의 행간에서 만날 수 있는 것.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작가의 소설 여덟 편을 간단하게 소개해 드릴 테니 훑어보시고 가급적 구매해서 읽어주시길 바란다는 거... 말고 뭐 딴 거 있겠어요.
‘엄마의 문장’에서 철없는 딸 미래는 자신을 위해 험한 일을 하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엄마의 일기를 훔쳐본 뒤 자신만의 문장을 적어나가면서 미래를 설계한다.
‘아인슈페너를 마시는 여자’에서 U는 카페에서 아인슈페너를 마시는 여자의 얼굴이 누군가와 닮은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거리의 ‘기억회복실’을 들락거리는 가운데 그 여자가 자신이 상처를 준 뒤 결혼한 아내임을 알게 된다.
‘울음소리’는 신축아파트를 지을 자리에 울음소리 요란한 맹꽁이의 서식처가 있는 걸 알고 문제가 발생하자 어떻게 꼼수를 써서 강행하려다 폭망하는데, 그래도 내 머릿속에서는 포기하지 않고 설계도가 그려진다.
‘진동의 기원’에서 나는 경주에서 휴대폰 가게를 하다가 지진을 겪고 부산으로 혼자 이사해오는데 웬놈의 방문객이 자꾸 집으로 찾아든다. 경주 지진을 피해 온 나는 내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진동을 느낀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진동의 기원’이 이번 소설집의 대표작이라 생각된다. 이 소설책 가격이 16,900원인데 이 대표작 하나만 읽어도 본전은 뽑은 거다.
‘해뜰참 토스트’는 치매에 걸린 내가 딸 미단을 찾아다니는 이야기다. 치매여서 불안한 60대 여인과 비정규직 교사여서 다음학기가 불안한 30대 여자가 서로를 찾아다니지만 길은 자꾸 엇갈린다.
‘북리뷰어’는 함께 모임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 소설을 악평한 자가 있을 거라 짐작하고 모임을 기획하지만, 악평의 장본인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자신이 모임의 좌장격인 백여사와 불륜관계라는 것을 들킬 위기에 처한다.
‘마음 테라피’는 카페를 운영하는 나와 두 친구가 차를 마시면서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의 고통을 나누는 이야기다. 복병이라면 두 친구 가운데 수연의 남편이 내가 공무원 공부를 할 때 사귀었던 사람이라는 것.
‘다락방의 상자’에서 하야리아 부대가 있던 시민공원 근처 주택으로 이사온 진교는 다락방에서 상자 하나를 발견한다. 상자에는 한국전쟁의 상흔이라면 상흔이고 한때의 문화라면 문화인 미군과 한국 처녀의 애절한 러브스토리가 바랜 편지지에 오롯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