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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퍼온글] 키보드를 마우스처럼 쓰는 법

알아두면 편리한 자판 사용법 입니다.

1. 인터넷을 검색하다 앞화면으로 가고 싶다면, 마우스 대신 ◀━를 사용(back키).
-마우스로 뒤로가기... 이제 그만...

2. F1 = 인터넷 도움말.

3. F3 = 파일찾기.
찾고 싶은 파일...이제 쉽게 찾을 수 있음.

4. F4 = 주소창.
주소를 고를 때도 자판의 화살표를 이용하면 무척 편함.
아래로 위로 잘 골라서 엔터키를 치고, 이동하고 싶은 주소로 이동.

5. F5 = 새로고침.
검색하다 빨리 새로 고치고 싶을 때 마우스 필요 없음.

6. F6 = 주소창 블럭 설정.
이 기능은 주소창에 저장되어 있지 않는 새로운 주소로 이동 할때 사용하는데, F6키를 누르면 블럭이 설정되고 이때 Delete키를 치면 주소창이 지워짐.

7. F11 = 화면을 넓게 보고 싶을때 사용.
위, 아래에 메뉴창이 사라지면서 화면이 아주 넓어짐.

8. Ctrl + N = 현재 페이지가 하나 더 생김.
로그인까지 되어서....

9. Ctrl + W = 화면 순간 삭제.
야한거 보고 있을 때 갑자기 누가 오더라도 보던 페이지가 사라지니까 뭐했는지 절대 알 수 없음.

**Alt 키와 Ctrl키의 사용**

1. Alt 키 + 왼쪽/오른쪽 화살표 키.
웹 페이지의 앞,뒤 전환.
-바로 앞에 보았던 페이지나 다음 페이지로 쉽게 전환이 가능.

2. Ctrl'키 + R키.
지금보고 있는 페이지의 내용을 다시 읽어 줌.

3. Ctrl + D.
여러 홈페이지를 돌아다니다 마음에 드는 홈페이지가 있으면 북마크 (Book-mark) 기능을 사용하지만, 'Ctrl + D'키를 누르면 더욱 쉽게 해결됨.

4. Ctrl 키 + B 키
북마크를(즐겨찾기 편집창) 편집하거나 정리할 때 사용.
바로 북마크 폴더로 이동.

5. Ctrl 키 + N 키.
현재의 창을 그대로 나두고 또 하나의 새로운 창을 만들 때 사용.
- 파일을 다운 받거나 서버로 부터 응답이 늦어질 때, 이 단축키를 열어 다른 링크 사이트로 접근이 가능.

6. Alt 키 + F4 키.
현재 열려있는 창을 닫을 때 사용.

7. Ctrl 키 + O 키.
웹 사이트의 주소창만 띄워 새로운 사이트를 열려고 할때 사용.

위에서 설명한 것 중 많이 사용하는 것.
Alt + <- (왼쪽 화살표) ▶ 이전 페이지로
Alt + -> (오른쪽 화살표) ▶ 다음 페이지로
Alt + F4 ▶ 열려있는 창 닫기(Ctrl + W 와 비슷)
Ctrl + R ▶ 문서 다시 읽어 들임
Ctrl + B ▶ 북마크(즐겨기 편집창) 폴더로 이동
Ctrl + D ▶ 북마크에 추가
Ctrl + N ▶ 새로운 창 생김
Ctrl + O ▶ 새로운 주소 입력창 열기

▷마우스 볼과 같은 기능◁
↑ ↓ 키는 볼을 굴리지 않아도 현재창을 위, 아래로 쉽게 움직일 수 있음.

 

 

마우스 고장시 키보드를 마우스처럼 사용하는 방법

 

키보드를 이용해서도 마우스 포인터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평상시 마우스와 동시에 쓸 수도 있지만, 마우스가 고장나서 작동하지 않을 때는 정말 유용하게 쓸 수 있겠죠? 윈도우의 마우스키 기능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 마우스키 설정 방법 ★

평상시 마우스를 이용해 설정해 두면 쉽게 되지만, 미리 설정해두지 않고 마우스가 작동 불능 상태가 된 경우 키보드를 이용해 설정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Tip]아래 각 항목의 이동요령은 방향키와 엔터로 창을 열고, 열려진 윈도우창 내에서 필요한 아이콘으로 이동하는 방법은 Tab키를 몇 번 눌러 어느 아이콘 이름에 점선이 생기면 방향키로 해당아이콘으로 이동하고 엔터를 하면 열립니다.

1. 키보드의 윈도우키를 눌러 [시작] -> [설정] -> [제어판] -> '내게 필요한 옵션' 열기
2. '내게 필요한 옵션' 창에서 Tab키를 몇 번 눌러 위의 '키보드'탶에 점선이 생기도록 한 후 오른쪽 방향키로 마우스탶으로 이동 -> 다시 Tab키를 눌러 '마우스키 사용'이라는 아래 체크옵션 글씨항목에 점선이 생기도록함 ->여기서 '스페이스바키'를 한 번 눌러 '마우스키 사용'옆 □에 ∨표시가 되도록 함 ->다시 Tab키를 눌러 '확인'으로 이동 후 엔터하여 설정

이렇게 하면 화면 오른쪽 하단 작업표시줄[트레이]부분에 마우스 모양이 생기고 지금부터 키보드
오른쪽 숫자패드를 눌러 마우스 포인터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포인터의 상하좌우 대각선 이동은 1,2,3,4,6,7,8,9키
클릭하려면 숫자키 5
더블클릭은 +키
드래그는 0키를 한 번 누른 후 숫자패드 방향키로 이동
(드래그를 끝내려면 Del키를 누름)


만약, 마우스키가 작동하지 않으면 키보드 오른쪽 위에 있는 NumLock키를 눌러 램프에 불이 들어온 상태에서 작동해 보세요.

 

원문보기 : http://blog.daum.net/oldkp/9444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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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호박방 1 중에서

예카테리나궁 [Ekaterina]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교외의 푸슈킨에 있는 18세기 바로크 양식의 궁전.
구분 궁전
소재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교외의 푸슈킨
건립연도 1756년
건립자 B.F.라스트렐리
설계자 B.F.라스트렐리
건축양식 바로크
규모 길이 306m, 방 55개

1756년 건축가 B.F.라스트렐리에 의해 건설되었다. 일명 여름궁전으로 불린다. 18세기 러시아의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당시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 남쪽 교외의 푸슈킨에 있다. 명칭은 표트르 1세의 황후인 예카테리나 1세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궁전 길이는 306m이며, 방이 55개가 있다. 궁전은 프랑스식(式)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고, 각 방마다 색깔에 따라 '녹색 기둥의 방', '붉은 기둥의 방', '호박(琥珀)방'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궁 안에는 총 2만여 점에 달하는 소장품이 있었는데,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를 침략한 독일군이 6톤에 달하는 호박방의 호박을 약탈해 감으로써 이 방은 빈 채로 남아 있었다.
약탈당하기 전까지 호박방은 정교한 장식과 화려함으로 인해 세계 8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그러나 독일군의 폭격으로 인해 많은 건물이 파괴되고, 호박도 약탈당하였다. 뒤에 건물이 복원된 뒤, 소련 정부는 1979년부터 호박방의 복원을 위해 종적이 묘연해진 호박을 찾았으나 모자이크 일부만을 찾았을 뿐 나머지는 찾지 못하였다.
그 뒤 800만 달러의 예산과 30명의 전문가를 동원해 11년에 걸친 복원작업을 했으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작업은 중단되었다. 그후 1999년부터 다시 복원작업을 시작해 2003년 6월 호박방이 재현되었는데, 칼리닌그라드산(産) 호박과 꿀벌색 석재만도 7톤이나 들었다. 사방 14m, 높이 5m의 방으로, 원래 이 방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표트르 1세에게 선물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호박방

코사크 족

러시아어인 ‘카작(Kasak, Kazak)’이 바뀐 말로 스스로를 카작으로 불렀는데 이 말은 터키어의 ‘자유인’을 뜻하는 말을 기원으로 삼고 있다. 또한 집단으로서의 카자크를 가리키는 러시아어는 카자체스트보이다.
전사집단으로 특화된 슬라브계 민족 으로 남부 스텝 러시아 국경지대 살던 슬라브 민족이 이 지역의 투르크계 민족들과 혈통적-문화적으로 융합되면서 형성된 민족 이다. 이색적으로 러시아어를 쓰며, 러시아 정교를 믿는 특이한 민족이다. 코사크 정신의 핵심은 승무와 의리 그리고 애국심과 충성심인데 이는 종교가 다른 이민족들과의 접경지대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탓이다.

이들은 16세기 이반 대제 이후, 러시아 황실로부터 봉급을 받으면서 군역에 종사하는'특수민족'으로 발전했다. 무사집단이지만 농도제를 기반으로 성장한 서구의 기사와는 다르며 코사크는 '무장한 자유인'을 뜻한다. 그래서 아직도 러시아 정부의 관료나 지도자와는 별도롤 전통적인 통치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선거에 의해 수장을 선출하여 모든 중요한 문제를 합의로 결정하는 민주적인 자치를 행하고 공동으로 러시아·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건제후, 그리고이웃한 투르크 타타르계 유목부족 등과 싸워 자기의 토지를 확대하였다.
16∼17세기의 타타르 및 투르크의 침입에 위협을 느낀 러시아와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카자크에게 무기 ·탄약 ·식량 ·자금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국경을방비케 하였다. 러시아 제정의 강화와 더불어 위정자는 카자크 상층부에 갖가지 특권을 주어 회유하면서 카자크 자치의 축소를 기도했으나 17세기 후반의 S.라진, 18세기 후반의 푸가초프를 지도자로 한 농민전쟁은 이에 대한 하층 카자크의 반항이었다.
 18세기에 이르러 유력수장(首長)들은 정부의 관등(官等)을 얻어 지주귀족화하였고 카자크는 광대한 토지와의 교환조건으로 제정 러시아의 비정규군으로서 전투집단에 재편성되었다.
20세기 초기에는 전국에 걸쳐 11개의 카자크 군단이 각 지방 군관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1912년 카자크 총인구는 약 400만, 그 중 약 45만이 군사요원이었는데 그 주력은 기병 150연대였다. 10월혁명 후 국내전에서는 대다수의 카자크는 중립을 지켰으나 극빈층은 새로운 소련정권을 지지하였고 부농층은 백위군 측으로 돌았다.
소련체제의 확립과 더불어 특권계층으로서의 카자크 집단은 해체되었고 부농박멸운동과 농업집단화가 진행되었다. 1936년 카자크의 적군 참가 제한이 폐지되었고, 새로 편성된 카자크 사단은 독 ·소전쟁에서 용명을 떨쳤다.

호박 [, amber]

지질시대의 수지()가 석화한 것.
굳기 2.0∼2.5
비중 1.0∼1.1
색깔 밀황색·납황색·적갈색

화학성분은 C40H64O4이다. 단괴상·역상(礫狀)을 나타내며 밀황색·납황색·적갈색으로 투명 또는 반투명하다. 지방광택을 가지며 패각상의 단구는 무르다. 굳기 2.0∼2.5, 비중 1.0∼1.1이다. 287℃에서 녹고 불꽃을 내고 타며 특유한 냄새가 난다. 또 알코올·에테르·벤졸로 다소 침식된다. 퇴적암 속에서 발견되며 특히 탄층(炭層)에 수반되는 경우가 많다. 발트해에서 투명하고 아름다운 것이 산출되며 오래 전부터 파이프나 장신구 등으로 귀하게 쓰이고, 특히 속에 벌레가 들어 있는 것은 값이 비싸다. 호박은 해수보다 가볍기 때문에 해안에 있는 모암(母岩)으로부터 바다에 떨어져 파도에 밀려 기슭으로 밀려와 이전에 발트해에서는 바닷속에 들어가 그물로 건져냈다고 한다.

폼페이의 날



Karl Brulloff. The Last Day of Pompeii. 1830-1833. Oil on canvas. The Russian Museum, St-Petersburg, Russia.

구이차르디니(Francesco Guicciardini)

1483. 3. 6 피렌체~1540. 5. 22. 피렌체 근처 산타마프게리타아몬티치.
피렌체의 정치가·외교관·역사가.
그가 쓴 〈이탈리아사 Storia d’Italia〉는 당대의 역사를 다룬 매우 중요한 저서이다.

로렌초 데 메디치 지배 때 피렌체의 저명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498~1505년에 피렌체·페라라·파도바 등지에서 로마법을 공부했으며, 그뒤 피렌체에서 법률 실무에 종사했다. 1508년 알라만노 살비아티의 딸인 마리아와 결혼했으며 같은 해 자신의 가족 회고록과 1378~1509년의 〈피렌체사 Storie fiorentine〉를 쓰기 시작했다. 〈피렌체사〉는 1494년 이후의 이탈리아 공화제 연구에 중요한 사료이고 구이차르디니의 역사 분석·서술 재능을 보여주는 저서이다. 그가 1511년 피렌체 대사가 되어 아라곤의 페르난도 국왕에게 파견되어 있었을 때, 1494년부터 계속 망명생활을 해온 메디치 가문은 당시 스페인 군대의 압력을 받고 있던 피렌체로 돌아와 권력을 회복했다. 1514년에 피렌체로 돌아온 구이차르디니는 다시 법률실무에 종사했으며 오토 디 발리아라는 치안위원회의 위원이 되었고 1515년에는 시뇨리아(최고행정관) 정부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13년 교황 레오 10세로 즉위한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1516년에 구이차르디니를 모데나 총독으로 임명했고, 이듬해에는 레조 총독까지 겸하게 했다. 그는 1534년까지 계속 교황을 위해 일했다.
새로 교황령이 된 이 지역들은 외부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고 내부에서도 혼란이 있었지만 그는 그곳을 통치하는 데 뛰어난 수완을 보였다. 엄격하고 때로는 가혹하기조차 한 그의 정책은 질서회복에는 효과적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에 대한 인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레오 교황과 동맹관계에 있던 신성 로마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사이에 이탈리아 북부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레조는 교황령의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1521년 7월 구이차르디니는 교황군의 전권대리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종종 자신의 직무와 관련되는 당시의 정치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형태로 많은 비망록과 논문을 썼는데, 1521~25년에 쓴 〈피렌체 정부론 Dialogo del reggimento di Firenze〉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책에서 그는 피렌체의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제는 베네치아식의 귀족정치체제라고 주장했다. 교황군의 전권대리로서 그는 용기와 결단력을 발휘하여 1521년 12월 파르마가 프랑스에게 함락당하는 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같은 달 교황 레오 10세가 죽고 아드리아누스 6세가 즉위한 뒤 모데나와 레조 총독직을 박탈당했으나 1522년말 다시 복직되었다. 1523년 아드리아누스 6세가 죽자 그는 자신이 총독으로 있던 두 도시를 원래 그곳을 지배했던 페라라 공작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비록 페라라 공작과의 싸움에서 레조는 빼앗겼지만 모데나를 지킬 수 있었다.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은 클레멘스 7세로 즉위한 뒤 구이차르디니의 공적을 인정해 그를 1524년 교황령의 최북단 도시 로마냐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파비아 전투 뒤 카를 5세의 군대가 남하하려 하던 위험한 상황에서 구이차르디니는 교황에게 많은 조언을 했으며, 1526년 1월에는 교황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로마에 갔다. 그는 카를 5세에 대항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를 주장하며 교황 자문회의에서 뛰어난 역할을 했다. 1526년 5월에 이루어진 코냐크 동맹은 어느 정도 그가 노력한 결과였으며 그해 6월 교황군의 지휘관으로 동맹군에 참여했다. 그러나 부르봉 공작이 이끄는 황제군이 피렌체와 로마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하자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태어난 도시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었다.
클레멘스 교황의 정책 결과 피렌체가 위기에 처하자 메디치 정권에 대한 반대의 소리가 높아졌다. 우르비노 공작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 가까이에 도착하고 메디치가 그를 마중하러 도시를 떠나자(1527. 4. 26) 피렌체에 반란이 일어났다. 도시 방어를 돕기 위해 그곳에 막 도착한 구이차르디니는 처벌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반란자들의 항복을 받아내 부르봉 공작군의 공격으로부터 시(市) 행정부 건물을 보호할 수 있었다. 며칠 뒤 부르봉 공작군은 로마를 장악했고 피렌체에서는 메디치가가 축출되고 공화정부가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로마에서 클레멘스 교황의 권위가 무너지게 되자 구이차르디니는 교황 전권대리로서의 자리를 지키기 어렵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그가 맺어왔던 메디치가와의 오랜 관계로 인해 공화제가 다시 들어선 피렌체에서 의심을 받게 되었다. 피렌체에서는 강경 공화파가 승리해 교황과 타협하려 했던 니콜로 카포니 장관이 물러났으며(1529. 4), 뒤이어 황제군이 들어왔다. 이 때문에 어려움에 빠진 구이차르디니는 1529년 9월 피렌체를 떠나 교황청으로 갔다. 그뒤 메디치가를 피렌체에 다시 들어서게 하려는 교황의 노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한편, 피렌체 시민을 위해 유리한 조건을 얻어내려고 애썼지만 1530년 3월 피렌체에서는 그를 반역자로 선고했다. 1528~30년 구이차르디니는 피렌체의 역사에 관한 2번째 저서를 집필하기 시작해 그의 정치관과 사회관을 가장 간결하고 다채롭게 표현한 격언과 성찰(省察)의 묶음인 〈회상록 Ricordi〉을 펴냈다. 그의 정치사상은 친구인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유사한 점이 많지만 때로는 더 급진적이다. 그는 오랫동안 교황을 위해 일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교회를 비판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논의'에 관한 고찰 Considerazioni intorno ai 'Discorse' del Machiavelli〉에서 로마역사를 과학적인 정치의 한 전형으로 본 마키아벨리의 의견에는 반대했다. 구이차르니나는 피렌체에서 공화정부가 무너진 뒤 교황 대표자격으로 돌아와 공화당원 추방에 앞장섰다. 1531년 클레멘스 교황은 그를 볼로냐 총독에 임명했으나 1534년 파울루스 3세가 즉위하면서 총독직에서 물러났다.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 공작의 법률 고문으로 활동하는 한편, 자신이 교황의 참모로 있었던 시기의 이탈리아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뒤 몇 년 동안 수정을 거친 이 책은 1494~1534년 사이의 이탈리아 역사를 다룬 그의 더 큰 야심작 〈이탈리아사〉의 줄기를 이루었다. 그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1536년으로 추측되는데 죽을 때까지 계속 수정했다. 그는 책에 기술한 많은 사건들과 직접 관련이 있었던 정치가였고 사료를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데 있어 앞선 인문주의자들을 본받으면서도 또한 그들을 능가한 역사가였기 때문에, 〈이탈리아사〉는 격동과 침략의 시기인 16세기초 근대 이탈리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역사책이 되고 있다.
1537년 알레산드로가 살해당한 뒤 구이차르디니는 코시모 공작이 그 뒤를 이을 수 있도록 도왔는데, 아마도 공작의 권력이 지나치다고 생각해 이것을 제한시키고자 하는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새 통치자 아래서도 여전히 고위직책을 맡기는 했으나 자신의 희망과 개인적 야망이 만족되지 않자 말년에는 산타마가리타아몬티치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자신의 최고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사〉의 완성에 몰두했다.

카보숑컷 [cabochon cut]

구형(球形)이나 타원체의 산 모양으로 연마한 것을 말한다. 스타루비 ·묘안석 또는 오팔과 같이 특수한 색채효과를 지닌 보석이라도 그 효과를 내기 위해서 실시된다. 비취나 터키석과 같은 불투명 또는 반투명한 보석이나 장식석에 널리 응용된다.

드가 - 콩코드 광장



Edgar Degas. Place de la Concorde. 1876. Oil on canvas. Collection of Margarete Scharf, Berlin. Now in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고갱 - 두 자매



Paul Gauguin. Piti Teina. (Two Sisters). 1892. Oil on canvas. Collection of Otto Krebs, Holzdorf. Now in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반 고흐 - 밤의 하얀집



Vincent van Gogh. The White House at Night (La maison blanche au nuit). 1890. Oil on canvas. Collection of Otto Krebs, Holzdorf. Now in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코레지오 - 성가족



Correggio. Madonna and Child with St. John. c.1515. Oil on wood. Museo del Prado, Madrid, Spain.

보티첼리 - 여인의 초상

Alessandro Botticelli. Portrait of a Lady (Smeralda Brandini?). c.1470-1475. Tempera on panel.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UK.

Alessandro Botticelli. Portrait of a Woman. c.1475. Tempera on panel. Palazzo Pitti, Galleria Palatina, Florence, Italy.

뒤러 - 막시밀리언 1세의 초상



Albrecht Durer. Portrait of Maximilian I. 1519. Oil on panel.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Austria.

벨리니 - 마돈나와 아이



Jacopo Bellini. Madonna and Child. Tempera on panel. Galleria degli Uffizi, Florence, Italy.

쿱카 [1871.9.22~1957.6.21]

체코슬로바키아의 화가로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활약했다. 주요 작품에 《예술가와 그 부인의 추상》, 《뉴턴의 위반》 등이 있다.
원어명 František Kupka
국적 체코슬로바키아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체코슬로바키아 오포티노
주요작품 《예술가와 그 부인의 추상》《뉴턴의 위반》

오포티노 출생. 1888년 프라하의 미술학교에서 배우고 베네치아를 거쳐 1895년 파리로 나왔다. 1906년부터 새로운 회화의 탐구를 시작, R.들로네의 오르피즘의 영향을 받고 1912∼1913년 비대칭적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발표하는 등 기하학적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1936년 파리, 1946년 체코에서 회고전이 열리기까지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살롱 데 레알리테 누벨의 리더였으며, 1958년 파리의 근대미술전에서도 회고전이 열렸다. 주요작품에 《예술가와 그 부인의 추상》《뉴턴의 위반》 등이 있다.

파에톤 [Phaethon]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태양신 헬리오스와 클리메네의 아들.
원어명 Phaæthon

파이톤이라고도 하며 그리스어로 ‘빛나는’ 또는 ‘눈부신’이라는 뜻이다. 부모에 대해서는 헬리오스의 아들인 클리메노스와 샘의 님프 가운데 하나인 메로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제우스와 이오의 아들인 에파포스에게 자신이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했다가 거짓말쟁이라는 모욕을 당한 뒤에 태양신의 아들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헬리오스를 찾아갔다. 헬리오스가 성인이 되어 찾아온 아들에게 자신이 아버지임을 인정하고 어떤 소원이든 들어 주겠다고 맹세하자, 태양 마차를 몰게 해 달라고 하였다.
헬리오스는 이른 아침마다 태양 마차를 몰고 큰바다 오케아노스 동쪽 끝에서 세상에 빛을 뿌리며 솟아 올라 낮이 끝날 무렵 오케아노스 속으로 뛰어들었다. 태양 마차를 모는 일은 제우스도 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었으나 이미 맹세를 하였기 때문에 허락할 수 밖에 없었다. 태양 마차를 끄는 네 마리 말은 파에톤이 타자 이전보다 무게가 가볍다는 것을 느끼고는 무섭게 돌진하였다. 파에톤의 통제를 벗어난 말들이 고삐가 풀린 듯 하늘 위로 치솟아 올랐다가 지상으로 접근하는 등 제멋대로 날뛰었으므로 태양의 열기에 강과 바다가 말라 버릴 지경이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인들의 피부가 검은 것은 이 때의 열기로 피가 살갗으로 몰렸기 때문이며, 리비아의 사막도 이 때 생긴 것이라고 한다.
제우스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파에톤에게 번개를 던져 죽게 하였다. 에리다누스강에 떨어진 그의 시신을 흐르는 물의 님프인 나이아스들이 주워 묘지를 만들고 비문을 새겨 주었다고 한다. 파에톤의 누이들은 그의 운명을 슬퍼하여 강가의 포플러 나무로 변하였으며, 이들이 흘린 눈물이 강에 떨어져 호박(琥珀)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케팔로스를 납치하여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도 파에톤이고, 에오스가 타고 다니던 쌍두마차의 말 이름도 파에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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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랑인 줄 몰랐을까
바스 카스트 지음, 조경수 옮김 / 이레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우리 주위에는 일명 ‘작업의 달인’들이 있다. 수시로 파트너를 바꿔가면서 연애도 하고 싸움도 하고 화해도 하고 이별도 하고, 그리고 또 사랑에 빠지고... 한마디로 사랑을 잘 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연애에 소질이 없는 사람은 “누군가 나에게 와서 내 이름을 불러주기”만을 기다릴 운명을 타고 났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좌절에 빠진 수백만 솔로들에게 희망을 주는 책이 있다. 독일 《타게스슈피겔》지의 과학전문 기자 바스 카스트는 수십 년간 다양한 방법으로 사랑을 연구해온 과학자들의 실험을 바탕으로 ‘사랑의 과학’에 대한 책인 《왜 사랑인 줄 몰랐을까》를 썼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은 누구나 연애를 잘 할 수 있도록 타고났으며, “본능에 충실”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남자/여자를 내 방식대로 꼬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문제는 그 ‘본능’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이다. 《왜 사랑인 줄 몰랐을까》는 커플 심리학과 연애행동 연구의 핵심 성과들을 통해 ‘사랑의 본능’을 과학적으로 파헤친다. 책에 소개된 과학 실험과 그 결과들 중에는 우리 눈을 번쩍 뜨이게 하고, 뒤통수를 후려치고, 아하 그렇구나 하고 회심의 미소를 짓게 하는 내용들이 많다.


 

 

실험 1.  남자는 쳐다보기만 해도 넘어온다

 

연애를 걸 때 칼자루를 쥐는 쪽은 누구일까? 많은 과학자들이 이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실험을 실시했다. 심리학자 데브라 윌시와 제이 휴이트는 매력적인 여성이 매일 저녁 8시에서 9시까지 칵테일 라운지에 앉아 있으면서 남자들에게 각기 다른 세 가지 태도를 취하도록 하고 반응을 관찰하는 실험을 했다.


1) 매우 도발적인 태도: 바에 있는 특정 남자를 반복해서 쳐다보고 그와 눈을 마주치면 미소를 짓는다.

2) 도발적인 태도: 1과 같은 행동을 취하지만 미소는 짓지 않는다.

3) 새침한 태도: 남자에게 시선을 한 번도 주지 않는다.


결과는 매우 명백했다. 1)의 경우 60퍼센트의 남자가 실험 도우미의 테이블로 왔다. 2)의 경우는 다가오는 확률이 20퍼센트로 떨어진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는 여성에게 다다가는 남성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단 한 명도 없었다.

 

결론: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쳐다봐주어야만 다가온다.

 


 

실험 2.  눈길을 주는 데도 요령이 필요하다

 

과학자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보다 구체적으로 시선의 효과를 실험해보았다. 독일 막스플랑크 인간행동학 연구소의 트라미츠 연구원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 도우미 에스테르는 아름다운 여배우다. 뮌헨의 잘나가는 술집으로 가서, 연구자는 사전에 유혹하는 요령을 훈련받은 에스테르를 바에 앉히고 카메라로 그녀의 모습을 촬영했다. 에스테르는 정해진 시간 간격에 따라 카메라가 남자인 양 유혹했다.

 

연구자는 촬영한 필름을 가지고 연구소로 돌아와 일군의 남성들에게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남자들은 화면 속에 있는 여배우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수록 준비된 레버를 세게 밀도록 했다. 레버 옆에는 버튼이 있는데, 이것은 미모의 여배우가 자기와 사귀고 싶어 한다고 100퍼센트 확신할 때 누르도록 했다. 그 결과는?



-미모의 여배우가 맨 처음으로 수줍은 듯한 시선을 한 번 보내는 것만으로도 8퍼센트의 남성이 그녀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확신하고 레버를 밀었다. 영상이 시작된 지 고작 29초만이었다.

 

-여배우가 두 번째로 잠깐 눈길을 주자 다시 11퍼센트의 남성들이 ‘이 여자는 나를 원해’라고 생각했다. 36초만이다.

 


-48초에 다시 한 번 시선을 주자 세 번째로 ‘누르기 물결’이 몰아쳤다. 그중 몇몇 남성들은 다른, 더 미묘한 유혹 신호에 반응했는데, 바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는 행동이었다.

 

-77초째에 다시 네 번째 시선을 보내자 남자들의 50퍼센트가 화면 속의 낯선 여자가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2분이 지날 무렵, 다시 한 번 시선을 주자 남자들의 71퍼센트가 여배우가 자신을 사귀고 싶어 한다고 확신했다.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신중한 남성 한 명도 5분이 지나자 버튼을 눌렀다.


결론: 여자가 딱 한 번만 쳐다봐도 그녀에게 꿍꿍이가 있다고 믿는 남자들이 있지만, 대부분 몇 번의 도발이 필요하다.


이때 버튼을 빨리 누르는 남성과 늦게 누르는 남성의 차이는, 남성 본인이 이성 교제에 대해 갖고 있는 자신감과, 상대 여성에 대한 그의 취향의 차이뿐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징적인 점은 남성들은 일단 어떤 여성이 자기에게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 굳어지면 이런 확신을 절대로 버리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여성 실험 도우미가 거절의 신호로 등을 돌렸을 때도, 남자들은 자신의 판단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험 3.   원하는 남자를 꼬시려면 위기 상황을 만들어라

 

두 명의 캐나다의 심리학자들은 유혹에서 장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캐나다 밴쿠버의 자연공원 캐필라노 캐니언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보행자용 현수교가 있다. 이 다리는 폭이 1미터 남짓한데 비해 길이는 140미터나 된다. 거대한 삼나무들에 둘러싸인 채 좔좔 소리를 내며 흐르는 캐필라노 강 위로 70미터 높이에 매달려 있다. 난간은 낮고 다리는 끊임없이 기우뚱거리고 흔들린다.

 

강 상류에는 다리가 하나 더 있다. 단단한 삼나무 목재로 되어 있고 강 위로 3미터 높이에 있으며 흔들거리거나 기우뚱하는 위험 요소는 없다.

 

연구자들이 고용한 예쁜 여성이 간단한 설문지를 들고 공원에 가서 각각 두 개의 다리 위에서 남자들에게 설문지를 작성해달라고 부탁한다. 대부분의 남성은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다. 실험 도우미는 자연 풍광이 창조적 표현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중이라고 하면서 연구에 대한 자세한 사항이 궁금하면 ‘시간이 더 있을 때’ 전화하라며 설문지를 다 작성한 남자들에게 종이 한 귀퉁이에 전화번호를 적어준다.


실험 결과, 현수교 위에서 설문에 응한 남성 18명 가운데 절반인 9명이 다시 전화를 걸어온 반면, 나무다리에서 설문에 응한 남성 16명 중 단 2명만이 프로젝트가 궁금하다는 핑계로 수화기를 들었다. (참고로, 남성 도우미가 설문지를 나눠준 경우는, 단 한 통의 전화벨도 울리지 않았다.)


결론: 높고 흔들리는 현수교는 우리 뇌에 ‘조심해, 위험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위험을 감지한 뇌는 몸에게 경계 태세를 취하도록 신장 위에 위치한 부신에 신호를 보낸다. 부신은 아드레날린을 저장하고 있으며 신경계가 명령하면 이 흥분 호르몬을 분비해, 눈 깜짝할 사이에 신체의 힘이 활성화된다. 그러면 뇌는 이러한 각성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이유를 찾는데,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엉뚱한 원인을 선택하기 쉽다. “이 여자가 내 무릎이 후들거리고 배 속이 울렁거리게 만드는 걸 보면, 내가 이 여자를 아주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 엉뚱한 결론이라고? 천만의 말씀. 이러한 생각을 확실히 입증해주는 또 다른 실험이 있다.


 

 

실험 4. 사랑에 빠져서 가슴이 뛰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뛰기 때문에 사랑에 빠진다

 

젊은 남자들에게 《플레이보이》지 슬라이드를 보여주고 슬라이드 속 여성의 매력을 평가하도록 했다. 이때 연구자는 사전에 피실험자들의 가슴에 마이크를 부착하고 그것을 오디오 기기에 연결해서, 피실험자들은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남자들은 자기 심장박동이 아니라 미리 녹음해둔 박동 소리를 듣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특정 슬라이드에서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소리를 듣도록 설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남자들은 자신의 심장을 더 쿵쾅거리게 만들었다고 믿은 여성에게 압도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었다.


결론: 상대를 원해서 가슴이 뛰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뛰면 상대를 원하게 된다. 고로, 원하는 남자를 내 것으로 만들려면 무조건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장소,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되는 곳으로 가라! 시끌벅적한 바, 낯선 얼굴들로 가득한 컴컴한 댄스클럽, 어스름한 조명의 술집, 시끄러운 음악이 있는 곳 등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실험 5. 여자는 어떤 남자를 좋아하나?

 

남성에게 주로 분비되는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거나 흥분했거나 화가 나거나 공격적이 되었을 때 분비되지만, 극도로 기쁠 때도 수치가 높아진다. 테스토스테론은 남성의 외모를 더욱 남성적으로 만들어준다. 즉 턱이 각지고 턱 끝이 두드러지며 눈썹 뼈가 커져서 눈이 작아 보이게 된다. 눈썹은 숱이 많아지고 입술은 얇아진다.

 

한편 테스토스테론은 면역 체계를 방해한다. 그러므로 신체 방어력이 높을수록 더 높은 농도의 테스토스테론을 견뎌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결국 근육질 외모의 남성이 신체적으로 더 강하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생물학적으로 우위에 있는 “돌쇠형”이 여성들에게 훨씬 더 인기가 높아야 옳다.

 

그러나 피실험자 여성들에게 컴퓨터 모니터 속에 주어진 얼굴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보라고 하자, 많은 여성들이 주어진 남성을 보다 여성적인 외모, 즉 “꽃미남형”으로 바꾸었다. 또한 다양한 “돌쇠형”과 “꽃미남형” 얼굴들을 보여주고 점수를 매기게 하자, 남성미 넘치는 얼굴형은 저조한 점수를 받았으며, 아버지로서의 평가에서도 매우 낮은 성적을 보였다.

 

결론: 여자들은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근육질 과다형 남성에게 본능적인 혐오감이 있는 듯하다.

 

 

실험 6. 여자들은 다정한 남자를 원한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여성들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건강하고 면역력이 강한 남성, 즉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높은 남성을 선호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론을 무시하기라도 하듯, 여성들은 근육질형 남성보다는 여성적인 꽃미남형을 더 좋아했다. 생물학적 우성이 적자생존(자연선택)에서 밀려나는 이러한 결과의 이유는 무엇일까? 심리학자들이 미국의 퇴역군인 4462명의 결혼생활을 관찰한 실험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상대적으로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높은 군인들은

1) 결혼한 비율이 낮다.

2) 결혼을 했더라도 바람을 피우는 비율이 더 높다.

3)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더 많다.

4) 이혼율도 더 높다.


즉 테스토스테론이 많은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우월한 인자를 갖고 있지만,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위험의 소지가 높기 때문에 오히려 테스토스테론 농도가 낮은 남성, 보다 다정다감하고 충실하며 자상한 남자를 원한다는 것이다.

 

 

 

실험 7. 여자의 마음은 오락가락한다


비엔나의 과학자 칼 그라머는 290명의 여성에게 안드로스테논의 냄새를 평가하게 하는 조사를 했다. 안드로스테논은 남성의 겨드랑이 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냄새 인자로 테스토스테론의 분해물이다.

 

실험 결과, 여자들은 평상시에는 이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배란 직전의 여자들은 관대한 점수를 주었다. 즉 테스토스테론은 가임기의 여성에게는 매력을 발휘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악취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여자들도 유전적으로는 강한 남성, 우성 인자를 많이 가진 남성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만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는 문제에서는 문화적 사회적 이득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적 본능이 영향력을 덜 발휘한다는 것이다. 

 

결론: 여자들은 평소에는 부드러운 남자를 원한다. 그러나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는 강한 남자를 원한다. 즉 여자는 갈팡질팡한다. 그러니 여자들은 자기 마음을 잘 살펴본 다음 판단하고 결단을 내려야만 할 것이다.

 

 

 

실험 8.  잘 싸우고 잘 사는 비결― 5 대 1을 지켜라

 

워싱턴 대학 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존 고트맨의 애정연구소는 커플들의 싸움의 유형을 분석했다. 고트맨과 그의 연구팀은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결혼 햇수의 130쌍의 기혼자들에게 일상의 문제거리들을 주제로 15분간 의논하도록 하고 그 장면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이때 싸움을 진정시키거나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등의 긍정적인 행동 유형에는 플러스 점수를, 상대의 화를 돋우고 자극적인 말을 하는 부정적인 행동 유형에는 마이너스 점수를 주었다. 


관찰 결과, 행복한 커플과 불행한 커플의 싸움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행복한 커플들은 갈등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행동 유형을 보여주는 반면, 불행한 커플들은 싸움에서 지속적으로 부정적 행동 유형을 되풀이했다. 이러한 실험을 바탕으로 고트맨은 부부 한 쌍이 대화하는 모습을 2분만 관찰하고서, 장차 그 부부가 이혼할지 안 할지를 예측할 수 있었는데, 그 정확도가 83퍼센트에 달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행동 유형의 절대적 수치가 아니라 ‘비율’이 더 결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긍정적 행동과 부정적 행동의 비율이 5 대 1일 때 가장 애정 어린 파트너십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싸움만 잘 하면 행복한 커플이 될까? 싸우면서도 계속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나? 진짜 사이좋은 커플이 되기 위한 다른 비결이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줄 실험이 있다.

 

 

 

실험 9. 싸움의 쟁점에 충실하라

 

심리학자 실라스는 다양한 문제로 싸우는 커플들을 보다 자세하게 관찰했는데, 그 결과 행복한 커플들은 대부분 말다툼의 주제, 즉 본론에 훨씬 잘 집중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싸움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배우자에 대한 새로운 정보들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싸움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다.

 

반면 문제 그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무조건 상대를 비난하거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지레 포기하거나, 상대의 말을 아예 귀담아 듣지 않는 경우에는 결혼생활의 만족도가 매우 떨어졌다.

 

결론: 싸울 때는 항상 지금 왜 싸우고 있는지를 잊어버리지 말것.

 

 

 

실험 10. 남의 떡보다 내 떡이 최고

 

행복한 커플은 자신의 파트너가 이상형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어떻게 극복할까?

 

미국의 심리학자 샌드라 머레이는 여러 커플들에게 지성, 유머, 관용, 사회적 능력, 인내심, 개방성, 온정 등의 특성을 열거한 긴 목록을 주고 자기 자신과 배우자의 점수를 매겨보라고 했다. 그 결과 행복한 커플들은 자기 자신보다 배우자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었다.

 

반대로 불행한 커플은 파트너에게 친한 친구들이 매기는 점수보다 더 낮은 점수를 주었다.

 

결론: 행복한 커플은 자신의 파트너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으며, 두 사람이 서로를 더 미화할수록 더 금실이 좋았다.

 

 

출처: <왜 사랑인 줄 몰랐을까>   이레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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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좀 본다는 사람치고 팀버튼을 모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팀버튼 감독의 영화는 한결같이

어디 한군데 장애를 겪거나 특이한 기능을 지닌 존재가

보통 사람들의 세계로 편입해 들어가려 애쓰는 과정을 보여준다.

천편일률적이라 해도 과언 아닌 그의 영화를

기를 쓰고 찾아보는 마니아가 적지 않은 이유는

살인과 폭행과 범죄와 음모가 판을 치는 역겨운 세상에서 펼쳐지는

정말 재수없이 인생에 금간 인물들의 역경이

그것이 애니든 실사든, 팀버튼이라는 감독과 만나면서는

동화처럼 환상적인 세계로 재구성되고

가슴 저미는 로맨스로 새롭게 피어난다는 데 있다.

거기에 더해 팀버튼이 창조해내는 인물들 또한 가만 보면

얘들 혹시 감독의 분신이 아닌가, 싶게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기괴하고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장애를 지녔거나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팀버튼적 상황’에 던져진 주인공들은

따뜻한 감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동정의 여지가 차고 넘친다

특히 그들이 관객들로부터 공감의 지평을 확보하는 건

타자, 혹은 삶의 조건인 상황에 의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고

그 때문에 정상적인 삶의 경계 밖으로 밀려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축출하고 그들에게 다시 위해를 가할지 모르는

정상인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세상을 소망하며

그로 인해 다시 상처를 받는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 때문이다.

 





 

가슴 저미도록 애틋한,

그러나 결국 좌절되는 소망이 야기하는 존재론적 비극이

영화의 설정이 되면서

전편을 채우는 환상과 동화적 색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비극적인 세계가 그려질 수밖에 없는

팀버튼의 영화문법은 ‘유령신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거울을 경계로 대치해 놓은 듯 상반된 두 세계를 배경으로 삼는

그의 다른 영화에서처럼 '유령신부' 역시

눈알이 튀어나오고 뼈다귀와 텅빈 내장을 드러내는 해골의 꼴을 하고 있지만

솔직하고 거침없이 자유로운 감정을 발산하는 유령신부의 저승세계와

장사로 떼돈 번 부모의 재산과 귀족가문의 영예를 정략결혼으로 누리며 살 수 있으나

강압적인 권위와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겉치레의 형식속에 갇힌 빅토리아의 현실세계가

흑과 백처럼 대비되어 보여진다.

과연 빅터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빅토리아,라고 답했다면 팀버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리라.

물론 이 영화에서 빅터는 빅토리아와 결혼해 정상적인 삶의 경계안으로 들어가지만

애니 산업의 상업적 측면을 고려한 해피엔딩을 한꺼풀 벗겨보면

팀버튼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유령신부가 속한 세계임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다.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거기다 인간적으로 건강한 욕구를 지니고서

지극히 정상적인 지적 활동과 감성표현을 하며 살고있다고 확고히 믿는 이들의

이른바 정상적인 삶이란 것이 얼마나 위선적이며 황당무계한지

또한 가공하리만큼 잔혹하고 기괴한 것인지를

팀버튼은 유령신부에서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다.

빌려온 테이프로 영화를 다시 보니 새삼 알 거 같다.

팀버튼 하면 왜 자꾸 피터팬과 후크를 섞어놓은 인물이 연상되는지,

심술궂고 유머러스하고 기괴하고 독특하고 대책없이 늙어버린

어린아이의 슬픈 얼굴이 떠오르고 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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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다시 보는 필화사]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대한민국의 문화적 소양과 예술가의 운명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위지혜] 2005-12-26 오전 11:12:57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작가 장정일 /사진제공 <데일리서프라이즈>
▲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작가 장정일 /사진제공 <데일리서프라이즈>

안타깝게도 지금 내 손에는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없다. 구입하려고 해도 구입할 수가 없고, 학교 도서관의 자료를 검색해도 도대체 나오지가 않는다. 공권력의 가공할 위력이다. 그러니 새롭게 읽지 못한 상태에서 기억에 의존하여 글을 써 내려갈 도리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96년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출판되었을 때 재빨리 책을 사서 읽었다는 사실이다. 『아담이 눈뜰 때』를 접한 직후부터 장정일은 관심이 많이 가는 작가였기에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넓게 펼쳐 나갔던 기억이 새롭다.

내가 샀던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아마 강준만 교수가 소장하고 있을 것이다. 음란성 여부로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작가 장정일이 재판을 받을 무렵 강준만 교수는 장정일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에서 강 교수는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한 논의를 제대로 펼칠 수 없다고 적어 두었다. 책을 구할 수 없었던 까닭에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내 생각은 이러했다.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는 강준만 교수가 이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부각시키면 좋겠군. 法典과 예술의 거리를 자리매김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렇다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내 수중에 있는 것보다 강준만 교수에게 넘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우편으로 강 교수에게 부쳤던 이유다.

먼저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재판 관련 일지를 보자. 이 일지는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행복한 책읽기, 2001)의 「변론기: 장정일을 위한 변론」이라는 글 뒤에 붙어 있다. 「변론기」를 쓴 사람은 훗날 법무부장관을 역임하게 된 강금실 변호사다. 당시 강금실 변호사가 장정일의 변호를 맡았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를 끄는 바 있다.

1996. 10. 10 김영사에서 출간
1996. 10. 31.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관계당국에 제재권고 결정
1996. 11. 14. 김영사 상무이사 김영범 씨, 음란물판매죄로 구속
1996. 12. 30. 벌금 700만원 선고
1996. 12. 31. 장정일 씨,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자진출두
1997. 1. 7. 검찰은 장정일 씨에 대하여 구속영장을 청구하였으나 신형근 판사는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
1997. 1. 13. 장정일 씨, 음란문서제조죄 등으로 불구속 기소
1997. 5.30. 서울지방법원 김형진 판사는 작가 장정일 씨의 1심 재판(97고단172호) 선고기일에 실형 10월을 선고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법정구속
1997. 7. 23. 항소심재판부(97노4055호, 재판장 한정덕 부장판사)는 장정일 씨에 대한 보석결정하여 석방
1998. 2. 18. 항소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의 선고를 받고 상고
2000. 7. 상고심(대법원 98도679호)에서 상고기각 확정

논란은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외설을 형법에서 규정하는 ‘음란’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를 두고 벌어졌다. 38세의 유부남과 18세의 여고생이 벌이는 가학/피학적인 성행위라든가 폰섹스, 구강성교, 항문성교 따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익숙한 사고방식과 기성논리를 통렬하게 넘어서고 있다. 그러므로 예술의 범주에서 이해해야 한다.”라거나 “성을 통한 자기모멸을 시도함으로써 경쟁사회로부터 면책과 휴식을 꿈꾸는 한 인간의 심리적 정황을 핍진하게 묘사하고 있으므로 예술 장르 속에서 접근해야 한다.”라는 것이 당시 문학계의 입장이었다. 물론 완고한 법원이 이를 제대로 이해했을 리 만무하다.

나의 경우라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으며 장정일 식의 강렬한 사회성을 느낄 수 있었다. 가부장적인 체제가 어떻게 재생산되는가가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면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의 면모를 장정일 식으로 드러내는 데 필요했던 방식이 포르노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신분석학적인 방법을 도입해서 접근한다면 『내게 거짓말을 해봐』의 이런 측면이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라캉을 공부하면서 내내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새삼스럽게 떠올렸던 까닭도 여기서 기인한다. 혹 관심이 있으시다면 과도한 훈육(체벌)과 가학/피학적인 인간의 생산 관계에 대해 공부를 해 보시라. 그리고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으시라. 짚이는 바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측면이 제대로 이야기되었더라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장정일도 이런 측면을 의도했던 듯하다. 『장정일의 독서일기』(하늘연못, 1997)의 187쪽부터 193쪽까지는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해 바로 말함」이란 쓸데없는 글”인데, 거기에는 자신의 “소설이 끈질기게 천착했던 두 개의 사항”이 소개되어 있다. “하나는 이번 소설에서처럼 나라는 개체를 낳아 준 아버지를 씹새끼로 만드는 것으로 다른 또 하나는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에서 시험된 ‘그는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이고 라이터를 탁자에 놓았다’ 식의 구문은 물론이고 이야기가 지탱해야 하는 최소한의 개연을 파괴함으로써 나의 실존과 호구의 근거가 되는 소설의 모든 형식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는 작가의 이 말에 동의한다. 또한, “한 마디로 이 소설은 성을 주제로 하지 않는다”라면서 “소설 속에 가장 많이 언급된 묘사가 곧바로 그 소설의 주제를 이루지는 않는다”라는 발언에도 동의한다.

그런데, 준엄하신 법관 나리들이 나와 같을 리 없다. 가부장의 자리에 올라서고 싶은 그들이 어떻게 가부장적인 사회를 부정하겠는가. 그들이 ‘체제/아버지/선생님’의 질서와 맞대면하여 그 질서를 균열시키는 데 동의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는가. 그들이 어느 세월에 정신분석학을 공부하여 한 인간의 상처와 내면을 이해하려 들 것이며, 만에 하나 그러한 방법론을 공부했다고 한들 무리 없이 작품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 그저 법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단죄’하면 간단할 것을!

우리 사회엔 문화적으로 소양이 부족한 이들이 너무도 많다. 이것도 심각한 문제인데, 더 심각한 일은 이를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인간들이 꼴사납게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을 가끔 목도하곤 하는데, 『내게 거짓말을 해봐』 필화 사건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이 나라가 나름의 세련을 구가하려면 오랫동안 지긋지긋한 시간을 기다려야겠군. 이게 정신 박힌 예술가의 운명이군.’ 아마 운명이란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게 맞을 거다.   

홍기돈 (문학평론가)

출처 : 컬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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