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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 펭귄클래식 7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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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을 내서, 스터디 몇 개를 만들었다. 그 중 셰익스피어 작품분석 토론 중, 이번 주 주제가 리어왕이다. 작품을 보는 여러 견해 중 내가 정한 관점은 주인공인 리어왕의 비극이다.

리어왕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비극의 극한 상황들을 묘사한 작품으로 그의 고통이 작품에 폭풍우나 비로 묘사되는 부분이 있다. 리어왕이 극한의 고통 속에 수난을 겪은 것은 11장에 나오는 그의 성격과 더불어 거너린과 리건의 사악함에 넘어가는 불행을 초래하였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비극 주인공과 다르게 리어왕은 어리석고, 독단적인 그의 성격으로 인하여 처음부터 과오를 범한다. 세 딸에게 왕국을 삼등분하여 나눠준다는 것부터 어리석은 것이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왕국의 분할은 신으로부터 받은 왕권과 의무를 포기한다는 의미로 이것은 질서파괴인 것이다. 그는 왕국을 분할하는 공적인 자리에서 딸들에게 그에 대한 사랑의 정도를 표현하라고 종용한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코딜리아에게 애정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코딜리아는 언니들과 달리 “nothing”이라며 표현할 것이 없다고 한다. 리어왕의 잘못된 질문을 거부한 그녀의 대답은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당연하고도 진정한 사랑에 흥정이나 조건을 붙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리어왕은 그녀의 깊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결국엔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인 것이다. 리어는 왕과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상실하고 광기를 보인다.

셰익스피어의 비극론에 의하면 우리는 완성을 향해 가면서도 영광스러운 선과 함께 오직 자기 고문과 자기 허비를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는 악을 탄생시키는 한 세계의 설명할 수 없는 사실 또는 모습과 직면해 있다. 그리고 이 사실 또는 모습이 비극이다(53)라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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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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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멘티에게 환경에세이 책 추천을 의뢰받고 추천해 준 책이다. 미국 대학교 1학년 필독서 목록에도 있고, 다시 읽으면서 많이 공감한 책이다.   

“봄이 와도 자연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그처럼 즐겁게 날던 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봄은 왔는데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곳에는 진정으로 봄은 온 것인지 아니면 자연 그대로의 봄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놓은 봄이라 일컫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봄이 왔다. 하지만, 동물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가고. 사람들도 어딘지 모르게 아프다. 숲 속에 있어야 할 새들은 종적을 감추고,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의 봄.

봄이 되어도 정적만이 감싸고 봄은 침묵하고 있다. 이 침묵의 봄은 나방을 잡기위해 뿌린 DDT(Dichloro Diphenyl Trichloroethane)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침묵의 봄>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구의 역사는 DDT 이전과 DDT 이후로 구분된다. 봄이 왔지만 모든 생명이 죽어가는 침묵의 봄. DDT와 자연에 대한 무절제한 정복욕심으로 일어난 폐해에 대한 사례를 보여준다. 

나방때문에 농작물을 많이 수확하지 못하여, 살충제를 뿌렸고, 그 살충제는 천적인 새들까지 죽였다. 그 결과 벌레들은 살충제에 내성이 생겨 살충제 성분은 더욱 더 강력해지고, 결국 동물들이 죽거나 병들고 그러한 동물과 식물을 섭취한 인간 역시 어린아이는 죽어가고 어른들은 어딘지 모르게 아프게 되었다. 당연한 듯이 뿌려왔던 살충제는 인간에게도 악영향을 미치고 악순환의 고리안에 갇히게 된 것이다. 

'침묵의 봄'으로 인해 4월 22일이 지구의 날로 제정되었고, ‘레이첼 카슨 환경운동본부’가 만들어졌다. ‘지구는 우리 인간만의 것은 아니다’라는 인식에서 출발해 그 지구를 그동안 우리 인간은 잘 다듬고 잘 만들어왔던 것이다. 하지만, 자연보다 역사가 짧은 인간이 자연을 만들고, 통제하고, 또한 보호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자연이라고 정의내린 이 거대한 visible/invisible substance가 과연 인간이 보호할 수 있는 대상인 것인지 의문이 든다. 자연재해라는 것도 결국에는 인간이 만들어 낸, 편의를 위해 변화시켜 놓은 부작용의 결과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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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생거 사원 을유세계문학전집 73
제인 오스틴 지음, 조선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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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없었다. 운동도 멀리했고, 예술, 문화생활도 없는 외딴 섬에서 지낸 기분이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한 가지를 하면, 다른 것은 할 수가 없다. 나는 왜 멀티가 안 되는 것인가. 보통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멀티가 잘된다고 들을 것 같은데. 결론은 능력의 차이인 듯하다. 이제 나름 운동도 하고 문화생활도 하는 당분간 자유 신분이 되었다.

처음 노생거 사원을 읽을 때는 마음에 드는 남자 고르는 말랑한 로맨스 소설인줄알고 (물론 그런 내용도 있다) 평범 소녀 캐서린에 감정입하며 응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계속 읽다보면 노생거 사원에 가서 장르가 호러로 바뀐다. 대단한 오스틴!

이 작품은 18세기 당시 여성의 지위를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보는 연구가 많고, 캐서린의 사교계적응을 위한 교육을 통한 성격 변화과정 등에 대한 연구가 있는데 이 작품의 관점 중 하나는, 캐서린은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의 요소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금발의 홍조를 띄는 아름다운 고아 소녀가 아니라, 평범한 시골 목사 가정의 10명의 형제, 자매 중 건강한 예쁘다고 할 수 있는(almost pretty) 성격과 기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열다섯 살쯤 되자 눈에는 생기가 돌고 몸매도 태가 났다. 그리고 갈수록 영리해지면서 깔끔해졌다.” 라며 캐서린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어느 날 이웃인 앨런부부가 바스(Bath)로 휴양을 가자고 제안하여 그곳에서 틸니에게 첫눈에 반하고, 시골소녀의 사교계 입성기와 짝사랑을 그리는 로맨스 코미디의 포인트가 나타난다.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는 두 명의 남자사이에서 사랑에 대해 알아간다. 캐서린이 읽는 소설을 인정하는 남자와 소설은 여자들이나 읽는 이야기책이고, 진짜 독서는 역사이라고 말하는 남자사이에서 말이다.

<노생거 사원>에는 그 당시 부적합한 도덕적 기준으로 여성의 성장을 막고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의 수동적 위치를 강화시키는 이념을 비판하는 구조도 나타나 있다. 여성에 억압적인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며, 그것을 유지하는데 공헌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현실관이 나타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며, 오스틴은 캐서린이 단념한 인식의 성장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당대 여성이 지적이고 도덕적 소양을 갖추고 있음에도 남성을 의식해야하는 소극적 입장에 있었으므로, 여성의 세계가 권력 지향보다는 인간의 보편적 통찰로 전환하는 것에 사회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작품에서도 보이듯이 여성은 소설을 더 좋아하고 역사의식이 없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침묵의 위치에서 천사’, ‘여성스러운 여성이 되기를 강요받는 교육받은 여성작가들의 글에서 영국의 통치권 안에 있고 통치는 표준이라는 견해에 여성은 통치권안의 하부목소리라는 구조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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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11-04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을 읽으려고 두 번이나 시도했어요. 그런데 줄거리에 몰입하기 힘들었어요. 이상하게 저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으면 집중이 안 돼요. 가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혼동하기도 해요. 왜 그럴까요? ^^;;

Angela 2019-11-04 22:38   좋아요 0 | URL
오스틴의 소설이 19세기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고 사회통념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여성이 주인공인데, 그들의 이름이 cyrus님과 안 친한 이름들인가 봐요^^ Elizabeth Bennet (오만과 편견), Fanny Price (맨스필드 파크), Emma (엠마), Anne Ellis (설득). 그런가요?^^
 
벚꽃동산 열린책들 세계문학 22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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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라는 거, 완료라는거. 그다지 기분이 좋은것만은 아니다. 무엇인지 모르는 이 허망함. 그 당시는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그냥 지나간 시간을 붙잡고만 싶달까한 걸음을 얻으며 젊음을 버렸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젊음은 포기하는게 좋겠다. 

이 극은 1904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초연된 4막극으로 벚꽃동산의 소유권 이전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당시 러시아 전체 귀족사회의 몰락을 어느 한 귀족가문(라네프스카야)의 몰락을 통해 그려낸 연극이다.

주인공 라네프스까야 부인은 5년 동안 비워 두었던 자기 영지로 딸들과 함께 돌아온다. 라네프스까야 부인의 경영 부실과 낭비로 영지가 남에게 넘어가기 석 달 전이었다. 부인도 두 딸도 이 옛 농원에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지만, 부인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고 딸들인 바랴나 아냐에게도 아무 대책이 없다.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웃에 살고 있는 농노 출신 신흥사업가 로빠힌뿐이었다. 그는 영지를 세분하여 별장 대지로 팔자는 것이지만, 이 지방에서 가장 멋지다는 벚꽃동산이 있는 이 농원을 아끼던 부인은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 때 이 지방의 만년 대학생 트로피모프가 찾아오게 되고, 그는 이상에 불타는 청년이었고, 열일곱인 아냐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리고 그는 아냐에게 낡은 집을 버리고 자유로워지라고 권한다.

한 편 장녀인 바랴는 남몰래 로빠힌을 사랑하고 있었다. 어머니 라네프스까야 부인 역시 바랴를 로빠힌과 결혼시키려 마음먹고 있었다. 부인은 로빠힌의 재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흥자본가인 로빠힌은 몰락귀족인 바랴에게 구혼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벚꽃동산은 아무 대책도 없이 경매에 붙여지게 된다. 낙찰자는 로빠힌이었고, 그는 영지를 소유하고 나자 별장지로 분양한다는 자기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수년 묵은 벚꽃나무를 잘라내자, 농노 출신 로빠힌은 이 아름다운 영지를 소유하게 돼 기쁘고, 라네프스까야 부인은 눈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며, 바랴는 기분이 언짢아진다. 영지가 팔렸으니, 라네프스까카야 일가는 사방으로 흩어진다. 바랴는 언제까지 기다려도 구혼하지 않는 로빠힌에게 자존심이 상하여 가정부 직업을 찾아 나서고. 라네프스카야 부인은 파리에서 살 결심을 하고. 아냐는 여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길을 떠나고,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 극은 19세기 말 러시아에 상업자본의 바람이 불고 그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지주 귀족들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다 완전히 몰락하는 인간 집단의 모습과 그것에 적응하여 성공하는 신흥부자들의 모습까지 보여준다.

대부분 비평은 그녀를 과거에 집착하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인물로 신문물을 거부하는 허망한 고집을 가진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여성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반면, 이 작품을 읽고 난 후, 나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마치 내가 라네프스카야가 된 것처럼 슬펐다. 화려한 과거의 몰락,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안타까움, 남은 한 줌의 자존심이라도 붙잡고 싶은 안쓰러운 인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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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별 2019-11-03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 문학 집중읽기 하고 있어요~~^^ 한번읽을때와 두세번 읽을때는 사못 다르네요. 첫번째는 카페라테맛?

Angela 2019-11-03 22:27   좋아요 0 | URL
집중읽기 후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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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이라는 것을 위해 몇 달 동안 정신없이 논문이라는 것을 쓰고 드디어 심사가 끝났다. 졸업은 정말 끝인 것인가, 아니면 다시 시작을 위한 break time 인가. 어쨌든, 간만에 전공이 아닌 취미를 위한 독서를 해야겠다

이 소설의 배경은 29세기다. 삶의 중심은 기계의 톱니바퀴중인 하나인 <>가모여 <우리들>이 된다. 개성 있는 <>는 없고, <우리>만이 존재한다. 제국에도 모반을 꿈꾸는 인간들이 있다. 여기서 인간들은 인간이 아닌 하나의 번호로 인식되어 소설의 화자인 번호 D-503은 우주선 <인테그랄>의 설계자이며 책임자다. 그는 모반자 중 한명인 I-330과 사랑에 빠져, 그녀의 모반에 가담한다. 그러나 모반은 결국 좌절되고, <제국>의 모든 번호들은 뇌수술을 받고 제국에 충실한 번호로 다시 개조되고, 모반자들은 처형당한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감시를 받는 번호들은 즉 인간들은 통제시스템으로부터 통제를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자신들을 감시하는 그들을 자신들을 수호해주는 천사로 여긴다.

<우리들>에 나오는 번호의 독백을 보면, “그 자체로서의 사소한 이 사건은 내게 각별히 훌륭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것은 나를 원기 왕성하게 해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군가의 꿰뚫는 눈길이 사랑에 가득 차서, 아주 사소한 실수에서나, 아주 사소한 부정확한 발걸음에서 나를 보호해주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다소 감상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내 머리 속에는 또다시 저 똑같은 연상이 떠오른다. 고대인들이 꿈꾸고 있던 수호천사 말이다. 그들이 단지 꿈꾸고 있었을 뿐인 것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 시대에 실현되었는가.” 감시와 통제는 푸코나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감시(CCTV)나 빅브라더 같은 소재의 영화(트루먼 쇼)도 많이 상영되었다. 아일랜드의 번호들은 자신이 복제인간으로 인간을 위해 죽음으로 가는 길을 파라다이스, 유토피아라고 여기며 선택받기를 기다린다. <우리들>에서 모든 번호들, 즉 인간들이 기계의 부속품처럼 경애하는 번호여러분으로 불리고 번호로만 기능하는 인간 존엄과 자유가 말살된 단일제국에서 개인의 개성이 완전히 무시되는 것은 단지 이데올로기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만연되어 있다. 자유, 평등, 행복의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결국에는 디스토피아가 되는 현실 속에 어디로 가야되는지를 모르는 아포리아의 상태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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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11-01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하고 논문 쓰느라 고생하셨어요. 안젤라님. ^^

Angela 2019-11-01 22:00   좋아요 0 | URL
이런 칭찬 인사 처음받아서 너무 기분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cyrus님~^^

초록별 2019-11-03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벚꽃동산 다음번에 읽은책~~^^ ‘나‘가 아니고 ‘우리들‘ 제목을 넘 잘 지었어요...

Angela 2019-11-03 22:28   좋아요 0 | URL
예브게니 자먀찐에게 감사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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