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게 지나의 희망인지도 모른다. 국경을 넘거나 벙커를 찾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희망. 과거를 떠올리며 불행해하는 대신, 좋아지길 기대하며 없는 희망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대신 지금을 잘 살아 보려는 마음가짐.
불행이 바라는 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 P55

원한다면 내가 이발도 해 줄게.
건지는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빗어 올리며 질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 머리 기르니까 약간 원빈 같지 않아?
나는 다시 놀랐다. 원빈이라니. 놀라운 말이다. 재앙 이후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단어였다. 틈만 나면 사이드 미러를 보며 머리를 빗어 올리던 건지는 그러니까, 그때마다 원빈을 생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어떨 때 보면 강동원 같기도 하고,
건지는 계속 놀라운 말을 했다.
- P61

이렇게 달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우리만 모르는 해답을 다른 이들은 찾아낸 것 아닐까. 살아남은 모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낯설지 않은 생각이었다. 어른이 된 뒤 지속적으로 들던 의구심,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덮치기 전에도 종종 하던 질문들……. 목숨을 걸고 한국을 빠져나와서도 비슷한 생각만 하고 있다니. 사고의 시스템 자체가 바뀌지 않아 달라진 상황에서도 같은 질문만 던지는 나는결국 단과 다를 바 없다. 업그레이드되지 않은 내비게이션 같았다. 아니라면, 나란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은 질문만 던져 댈 그런 인간인 것이다. 생에 마지막 숨을 내뱉으면서도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고민할 인간.
- P87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처럼 시간 개념도 널뛰었다. 엊그제가여름이었는데 벌써 연말이라거나, 추석 지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설날인가. 그렇게 놀라다 보면 어느새 1년이 지나있었다. 월급 들어오는 날짜를 기준으로 한 달을 가늠했다.
정해진 날짜가 되면 통장에서 돈이 우수수 빠져나갔다. 열심히 버는데도 늘 쪼들렸다. 중요한 일을 다음으로 미루거나 대충 처리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가족 여행, 가족사진, 생일 파티, 칭찬과 위로, 오늘은 어땠어? 키가 이만큼이나 컸네, 안아주고 사랑한다 말하는 것, 오늘을 기억하고 내일을 기대하는것,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잘 자라고 말해 주는 것.
정신을 차려 보면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 P89

이러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아도 소용없었다. 아이들이 아니면 개수대의 그릇에게 화를 냈다. 세탁기 속 뒤엉켜 있는 빨래에게 화를 냈다. 소음이 심한 청소기를 돌리며 화를 냈다. 허공을 떠도는 먼지를 향해 화를 냈다. 화장품 살 시간을 따로 내지 못해 아이들 로션을 같이 발랐고 세탁소에 겨울 외투 맡길 시간이 없어 가을 점퍼를 연말까지 입고 다니다 몸살을 앓기도 했다. 말라 죽은 화분과 유통 기한 지난 음식과 철 지난 옷들과 낡은 신발과 재활용 박스와 고장 난 물건 등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집 안 곳곳에 그저 쌓여 갔다. 집은 점점 좁아졌고 아이들의 비밀은 늘어났고 단은 말이 줄었고 나는 비쩍 말라 건조해졌다. 분명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데, 최선이 답은 아니란 생각이 세금 고지서처럼 주기적으로 날아들었다. 삶이 마디마디 단절되어 흘렀다. 직장에서의 나와 아이들 앞에서 나와 단을 대할 때의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내가 징그러울 만큼 달랐다. 나라는 사람이 흐트러진 퍼즐 같았다. 애초의 내가 어땠는지 밑그림은 기억나지 않았고 퍼즐은 흩어진 채 여기저기 떠돌았다. 무언가 미세하게 어긋나고 있어서먼 훗날 완벽하게 분리될 것만 같았다. 나와 내가 나와 단이 나와 아이들이,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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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른 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노래도 언젠가는 지긋지긋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하나밖에 없는 어떤 개별 단위가 끝나는 것이다. 삶은 반복되고, 진퇴하며, 연속하는 흐르는 시간이 아니다. 역사가 시간의 서사라는 (역사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가는 세월은 잡을 수 없지만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인생은 바로 이곳에서, 단 한번 일어나는 일이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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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시나요? 어떤 기록을 시작하는 ‘시간이 쌓인 기록은 그게 무엇이든 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란 건 원래 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이야기니까요. 무엇이든 기록해보세요. 매일 기록하는 사람은 하루도 자신을 잊지 않습니다.
그건 곧, 하루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말과 같아요.. 그래도 시작이 막막하게 여겨진다면, 먼 훗날 이 기록을 들여다볼 자신을 떠올려보세요. 싸락눈처럼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어떤 기록 앞에서, 조금 피로하고 차분한 낯빛을 한 내가 혼잣말을 하고 있는 모습을요.
- P211

그해 처음으로 시작하길 잘했지 , 빛선 전염병 때문에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또 겨울이 오기까지 네 번의 계절이 통째로 사라진 것만 같은 해였는데, 덕분에 평범한 일상을 자주 들여다보게 되었지.
해가 바뀌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지 모른다는 낙담 속에서도 고개를 들면 보이던 것은 평범해서 소중한 풍경들, 겨울날 아침의 차고 맑은 공기가, 여름날 저녁의 노을이, 봄날 오후 머리 위로 지던 꽃잎이, 좋다고, 아름답다고, 그러니 이 삶엔 아직 다행한 일이 많다고 생각했었지,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일상이라고, 그래서 이런 기록을 시작할 수 있었고, 지난 시간을 이렇게라도 남겨두어서 정말 다행이야.
- P212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게 편한 방식으로 기록하되, 오로지 나의 즐거움을 위해 지속하세요. - P209

그리고 저는 그날, 그동안 듣지 못했던(어쩌면 물어본 적 없어 답해줄 일 없었던)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물두 살의 엄마가 대구에서 섬유 공장에 다녔다는 것. 못 배운 게 한이 되어서 야학이라도 다니려고 고향집으로 돌아왔을 때, 외할아버지가 나이 꽉 차서 여자가 무슨 공부냐, 시집이나 가라며 아빠와 중매결혼을 시켜버린 것,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인숙 씨의 꿈은 그 후 중풍 걸린 시할머니 수발을 들고,
돌아서면 쌓여 있는 집안일과 농사일을 해치우는 사이 영영 멀어져버린 것, 그럼에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어제의 슬픔을 잊고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려 한다는 것….
- P191

그러고 있으면 먼 미래에서 다 울고 난 얼굴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보입니다. 나는 두 개의 인생을 살 뻔했다.
고, 할머니의 영상을 남겨둔 인생과 남겨두지 않은 인생. 엄마 아빠의 바지런한 하루를 찍어둔 인생과 찍어두지 못한 인생, 전자가 훨씬 다행스럽지 않으냐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인생은 늘 그런 식으로우리를 가르치는지도 모르겠어요.
- P184

자신의 관심 분야에서 시작해 이런 기록을 지속해나가면콘텐츠 선점 효과도 있고, 나중에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자기만의 콘텐츠가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온라인 공간에 내가 상시로 열어둔 전시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이 계정은나의 작은 미술관이고, 내가 전시해둔 것들을 구경하고 둘러보러 사람들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들은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남기거나 ‘나도 이런 기록을 한번 해봐야겠다 생각하고 돌아가 자기만의 기록을 시작하겠죠.
- P164

어떤 점에서 눈길이 갔는지, 왜 좋다고 생각했는지 의견을 덧붙여서요. 나중에 내가 하는 일에서 어떤 발상이나 기획을 해야 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은 점을 저축하듯이기록해두는 거예요..
트위터의 마음함이나 인스타그램의 보관 기능도 이런 방식으로 쓸 수 있지만, 내 의견을 덧붙여둘 수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정확히 이 포인트에서 좋았다. 다음에 이런 방식으로 응용해볼 수 있겠다, 하는 의견을 덧붙여두지 않으면 나중에 보았을 때 왜 저장해둔 것인지 잘 생각나지 않기도 하거든요.
때문에 이런 경우에도 내가 보관하거나 캡처해둔 것을 ‘영감 노트‘ 계정에 따로 올리는 과정을 거치는 게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같은 종류의 기록을 한군데에 모아두는 것입니다. 어떤 기록을 활용해야 할 때 서랍 여러 개를 뒤져서 찾는 것보다야 한 개의 서랍 속만 찾아보면 되는 게 효율적이니까요 - P156

제가 쓰는 방법은 1번에서 끼적여둔 메모를 주로 쓰는 노트 앱의 각 카테고리에 분류해 넣는 것입니다. 몰아서 하면 양이 쌓여서 더 하기 싫어지기 마련, 매일 밤 자기 전의 루틴으로 삼고서 조금씩 정리하는 것도 좋고, 일요일 밤에 한주의 메모를 정리하며 작은 성취감을 느끼는 것도 좋습니다. 글감을 줍는 과정은 어느 가을날 열매가 구석구석 떨어져 있는 산을 누비는 일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야무진 다람쥐들이에요. 알밤을 주웠다면 알밤 바구니에, 도토리를 주웠다면 도토리 바구니에, 호두를 주웠다면 호두 바구니에 넣어야겠죠. 그렇게 나눠 담은 바구니를 가지고 집에 돌아와 내 곳간을 채워둔 다음, 겨울을 나는 동안 필요한 식량을 꺼내 먹는 것입니다.
- P136

이 기록이 습관이 되면 좋은 점은? 책이든, 노래 가사든,
누군가의 블로그 일기든, 인스타그램에서 본 짧은 글이든,
내가 읽는 모든 것에서 글감을 주울 수 있다는 거예요. 어떤 책의 첫 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이제 막 바닷가에 도착했다‘라고 생각해보세요. 이 해변에서 마음에 드는 조개껍데기 하나를 주워가야지, 마음먹으면 모래 위의 모든 조개껍데기가 함께 집에 돌아갈 수도 있는 ‘후보‘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읽는 모든 것에서 글감을 찾을 수 있어요.
- P134

‘나만의 반복되는 역사‘를 쌓아보세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기록의 시작은 ‘적을 것‘과 ‘적을 곳‘을 분명히 하는 데 있거든요. - P83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는 항상 무얼 시작하기 전,
허튼 데 낭비할 시간 같은 건 없다는 듯 이유와 쓸모를 찾지만, 사실 기록의 쓸모란 기록 그 자체에 있는 걸요. 그러니 시작 전에 알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기록을 시작한 사람만이, 그리하여 눈앞에 자신만의 기록을 쌓아가는 사람만이 기록의 쓸모는, 또 아름다움은 기록 자체에 있다고 말할수 있으니까요.
- P82

이 같은 기록은 ‘나만의 반복되는 역사‘를 쌓아가는 일이에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해도,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건 멋진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로 살아서 할 수 있는 기록이자, 나밖에 할 수 없는 기록이니까요. 그래서 종종 비슷한 마음에서 출발해 다른 종류의 기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면 속으로 반가움의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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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먹어치운 음식은 그의 배를 채운 것이 아니고 그의 식욕을 자극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또 그의 허기를 채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허기를 자극했던 모양입니다. - P195

그러나 에뤼시크톤의 시장기는 먹어도 먹어도 가시지 않았고, 팔아도 팔아도 딸은 지나갔던 계절처럼 되돌아왔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드메티나가 먼 나라의 왕비로 간택되어 갔을 때 딱 한 번 포세이돈은 이 딸을 그 아비에게 되돌려주지 않았지요.
에뤼시크톤은 허기를 견디다 못해 처음에는 제 팔을 잘라 먹고 다리를 잘라 먹고 엉덩이 살을 베어 먹고 하다가, 입술까지 다 베어 먹은 다음에야 데메테르의 복수에서 놓여났답니다. 에뤼시크톤이 있던 자리에는 이빨 한 짝만 덩그러니 남아 있더라는 얘깁니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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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를 만난 후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웃을 수 있다는 건, 나를 향해 웃어 보일 여유가 있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고요. 웃지 못하는 건 대체로 지금의 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에요. 내 일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일상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삶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속도 모르고서 웃는 상대가 밉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지요. ‘그럴 때‘ 같은 건 없는데도 말이에요.
이것저것 하는 사이에 인생이 지나가버려, 그건 토니식의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조금더 자주 웃고 싶어요. 더 많은 것을 지나쳐버리기 전에 나를 웃게 한 농담들을 기록해두고, 삶에는 좋은 순간들도 많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어요.
- P118

생활이란 것 속에는 얼마나 구차한 일들이 많던가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해야 할 때도 있고, 손해 보지 않으려 날을세워야 할 때도 있고, 대충 잘 지내기 위해 대충 존재해야할 때도 있습니다. 일하러 나간 곳에서는 거실 소파에 누워있을 때보다 두 배는 똑똑하게 굴어야 하고, ‘이런 게 중요한 거‘라는 말에 고개 끄덕이며 주식이나 부동산 같은 돈이되는 정보들을 서로 나누기도 합니다. 거기 매몰되어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잊게 돼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이런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그럴 때 저에겐 이야기가 도움이 됩니다. 나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이 삶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이야기, 지구 어딘가에 내가 만나지 못한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눈앞의 이런 삶이 전부가 아니‘라고 다시금 일깨워주는 이야기들 말이에요.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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