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아 프랑수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르주 상드 지음, 이재희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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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요정 파데트>, <마의 늪>에 이어 계속 읽는 조르주 상드의 전원소설이다. 목가적이니, 전원풍이니 하면 시골과 자연 속 아름답고 낭만적인 정경만 머릿속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도시와 시골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는 이런저런 성격과 사고, 행동 유형 그리고 관습과 문화가 섞이고 부딪치기 마련이다. 어찌 조화와 평화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작품에서도 시골의 아름다움보다는 환경과 역경을 헤쳐 나가는 한 개인의 뛰어난 자질이 유독 돋보인다. 바로 사생아프랑수아다. 여기서 먼저 정리할 대목이 있는데, ‘사생아란 표현이 버려진 아이 또는 고아를 지칭하며, 통상적 의미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어쨌든 전통 사회에서 사생아는 부정적 존재로 인식되고 취급되기에 온전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경우가 흔치 않다고 한다. 작품 내에서도 사생아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여러 폄하적 발언이 반복된다.

 

다른 사생아들은 그들의 숙명 때문에 거의 항상 굴욕적인 삶을 살아갔고, 사람들은 그들에게 애당초 기독교인으로서의 긍지마저 박탈당한 인생이란 것을 너무나 가혹하게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사생아들을 그들을 낳아 준 사람들에 대한 증오 속에서 자라났다. (P.77-78)

 

주인공 프랑수아는 다르다. 물론 블랑셰 부인의 거둠과 보살핌, 부인 자신의 온후한 인품의 영향을 받은 점에서 유리할 수 있지만 결국 세인의 은연중 괄시와 냉대를 극복하고 멋진 청년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수아 자신의 미덕과 노력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세베르 부인이 그를 유혹하려고 시도했으며, 자네트도 그를 자신의 남편감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냉정한 시어머니, 방앗간 사업에 무심한 데다 드러내놓고 외도까지 하는 남편, 와중에 점점 어려워지는 살림살이를 힘겹게 이끌면서 지탱해가는 블랑셰 부인. 여기서 독자는 당대 시골의 삶이 결코 관념적이거나 이상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들렌은 놀라서 사생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아이의 두 눈 속에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의 눈빛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었다. 더없이 선하면서도 더없이 의연한 그 무엇인가에 이끌려 마들렌은 어안이 벙벙했다. (P.46)

 

블랑셰 부인의 프랑수아를 향한 보살핌과 애정은 매우 순수하고 따뜻한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프랑수아의 말과 눈에서 아마 그녀는 프랑수아의 참다운 인간성을 발견하였으리라. 그녀는 프랑수아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하지만 남편과 주변 사람은 그렇게 순수한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물론 블랑셰 부인을 비방하려는 악의적 의도로 한 말이겠지만, 피가 섞이지 않은 남녀 사이, 게다가 훌쩍 멋진 청년으로 성장한 프랑수아와 블랑셰 부인의 나이 차는 십여 세밖에 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발언을 통해 볼 때 십여 세 연상연하의 결혼은 당대에 드물지 않았음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모함과 우려도 결코 허튼소리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블랑셰 부인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며, 프랑수아도 결정적 계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머니로서 사랑한다고 믿는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순수한 모성애이자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라고 믿었다.

 

제아무리 프랑수아가 뛰어난 청년이라고 하더라도 인위적, 우연적 요소가 추가되지 않았다면 소설은 좋은 방향으로 진행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가 시골 사람으로서는 드물게 읽고 쓸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이 있었다는 점, 나중에 생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점이다. 프랑수아는 남편의 빚과 죽음으로 몰락한 블랑셰 부인과 방앗간을 되살릴 수 있었고, 이제 그는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블랑셰 부인과 대등한 지위에 이르게 되었다.

 

우리[농민]의 노고, 지주들의 땀 한 방울, 돈 한 푼 들어가지 않은 경작의 대가로, 그 땅의 가치가 두 배로 오르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다시 회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힘없는 잉어들은 늘 대어의 사냥감이 되고, 우리의 탐욕 때문에 벌을 받는다. (P.186)

 

프랑수아가 세베르 부인의 음모를 파헤치고 블랑셰 부인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작가는 시골 토지 소유와 관련한 부조리를 고발한다. 시골 농민은 소작농으로 열심히 경작하지만 거의 모든 대가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에게 돌아간다는, 어찌 보면 인류사에서 항상 되풀이되지만 근원적 해결이 어려운 현상. 이 작품이 사회고발 소설이라면 이 사안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집중적으로 조명하겠지만, 작가는 더 이상의 진전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실상 이 작품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대목은 프랑수아와 마들렌, 즉 블랑셰 부인의 결혼이라는 설정이다. 작품 속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시종일관 혈연에 근거한 모자 관계에 준하는 돈독한 가족에 가깝다. 마들렌은 프랑수아를 큰아들로, 프랑수아는 마들렌을 어머니로 여겼다.

 

마침내 마들렌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프랑수아는 그녀가 자기를 남편으로 받아들인 데 대해 무릎을 꿇고 감사했다. (P.246)

 

모자간의 애정이 갑작스럽게 남녀 간의 사랑으로 바뀌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사랑의 성격이 일순간에 완전히 뒤바뀌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인정해야 가능하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 두 사람의 사랑은 언제부턴가 남녀 간의 사랑이었지만 외관상 모자간의 것으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위장하였다는 것. 후자가 진실에 가깝다면 블랑셰가 우려하고, 세베르와 마리에트가 주고받은 대화는 근거가 있는 셈. 자네트는 프랑수아에게 이 점을 분명하게 깨우쳐 준다.

 

마들렌이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기에 프랑수아의 생각이 그러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악마에 걸고 부인하던 마들렌의 변심은 놀랍기 그지없다. 이러한 사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적어도 내 관점으로는 흔쾌히 인정하기 어렵다. 내가 애들이 말하듯 틀딱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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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슈킨 선집 : 희곡.서사시 편 - 보리스 고두노프.집시.폴타바 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2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최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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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품>

희곡 편 : 보리스 고두노프, 파우스트의 한 장면, 인색한 기사,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석상 손님, 페스트 속의 향연

서사시 편 : 가브릴리아다, 집시, 눌린 백작, 폴타바, 안젤로, 청동 기사, 황금 수탉

 

푸쉬킨의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무래도 <대위의 딸><예프게니 오네긴>으로 대표되는 소설이다. 이 책에 수록된 희곡과 서사시는 나를 포함한 일반독자에겐 아무래도 생소하다. 그렇기에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푸쉬킨의 다른 모습을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러시아 음악계는 일찍부터 푸쉬킨의 작품에 주목하였는데 특히 많은 오페라 작품의 대본으로 푸쉬킨을 선택하였다. 차이코프스키(<스페이드 여왕>, <예프게니 오네긴>, <마제파>(폴타바)), 라흐마니노프(<알레코>(집시), <인색한 기사>), 림스키코르사코프(<황금 수탉>,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무소르그스키(<보리스 고두노프>), 큐이(<페스트 속의 향연>) 등의 면면에서 그의 인기를 확인할 수 있다.

 

푸쉬킨은 러시아 문학계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작가가 아니다. 그는 서구의 문학 전통을 충실하게 흡수하고 러시아 특유의 문화를 조화하여 서구와 구별되는 러시아 만의 문학 세계를 창출하였다. 이를 희곡과 서사시에서 특히 찾아볼 수 있는데, 무엇보다 셰익스피어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제재와 형식 모두에서 셰익스피어 사극의 직접적 연관성이 나타난다. <눌린 백작><안젤로>는 셰익스피어의 <루크리스의 능욕>, <자에는 자로>에 대한 패러디다.

 

전반부는 희곡 편이다. 가장 먼저 장편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이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다툼이라는 면에서 일련의 영국 사극과 <맥베스>의 러시아 버전이다. 정통성 면에서 보리스나 참칭자 모두 차이점이 없다. 보리스는 공포와 사랑, 그리고 명성”(1)의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유능한 통치자다. 그가 어린 황태자를 암살하고 황제 추대를 짐짓 사양하는 연출은 희귀한 사례가 전혀 아니다. 그리고리가 참칭자임을 반란 세력은 모두 알고 있다. 그가 진짜 황태자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반 보리스파의 상징일 뿐이다. 귀족들은 그를 내세워 보리스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중에 그를 허수아비로 부려 먹건 폐위시키건 그때 가서 정하면 된다.

 

여기서 푸쉬킨은 보리스 몰락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 그의 정통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통치가 귀족과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반감을 초래하였기에 일개 참칭자에 의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는 것. 출신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바스마노프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장면과 아들에게 전해주는 긴 유언을 보면 우리는 보리스가 흔한 말로 평범한 폭군이 아니라 비범한 황제였음을 알 수 있다.

 

보리스가 황태자를 살해했다고 비난하던 세력이 도리어 보리스의 부인과 아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대목은 권력 앞에서 모두가 마찬가지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 와중에 백성들은 생존을 위해서 우는 시늉을 하느라 양파를 문지르거나 침을 바르는 연기를 보여준다. 언뜻 보면 바람에 흔들리는 들풀처럼 마냥 연약한 부류로 보이지만 마지막 장에서 보리스 가족의 살해를 경악 속에 침묵”(25)으로 대응하는 그들에게서 진실을 파악할 줄 아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푸쉬킨은 이 작품의 원제에 희극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무엇이 희극일까, 전혀 희극적 내용이 아닌데. <작품 해설>을 보자.

 

이 작품은 두 통치자의 유사성과 그들이 이루어 가는, 또 그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역사에 대해 아이러니한 웃음을 보내는 푸슈킨의 시선이 담겨 있다. (P.468)

 

<파우스트의 한 장면>은 권태를 제재로 한다. 유독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권태가 주요 제재로 나오는 것은 무엇일까. 일각의 주장처럼 사상적 진보를 억누르는 정치적 체제로 충분한 설명이 가능할지 아니면 또 다른 까닭이 있을지 궁금하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처럼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도 권태는 가능하다. 한가하든 분주하든.

 

<인색한 기사>는 인색한 부자인 알베르와 아버지 남작의 상반되는 행태에서 인색함의 본질을 되새긴다. 남작은 재물 축적을 숭배하며, 자식에 대한 사랑은 인색하다. 알베르는 재물 낭비를 숭배하며, 아버지에 대한 존경은 인색하다. 아버지를 고발하는 아들, 아들에게 누명을 씌우는 아버지. 결투를 제안하는 아버지, 결투를 수락하는 아들. 이쯤 되면 막장 집안이다. 영주의 분노로 결투는 성사되지 않지만, 과도한 정신적 흥분으로 늙은 아버지는 숨을 거둔다. 행복과 명예와 영광을 품고 있는 황금을 그대로 놓아둔 채. 진부한 표현이지만 죽고 난 다음에 수북하게 쌓인 보화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알베르의 불효를 비난할 수 있지만, 애당초 그렇게 자식을 키운 책임에서 아버지 남작은 자유롭지 못하다. 작가가 굳이 인색한 기사라고 표제를 단 이유 역시 같은 의미리라. 끔찍한 시대, 끔찍한 마음이여!” (P.164, 3)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내용은 영화 <아마데우스>와 비슷하다. 성공한 음악가이지만 재능 면에서는 모차르트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는 살리에리. 그의 뿌리 깊은 시기는 천재를 향한 범인(凡人)의 공통적 감정이다.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과 헌신을 무색하게 만드는 게으른 방탕아. 존경할만한 구석은 털끝만큼도 없건만 그가 만들어낸 음악은 천상의 경지다.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과연 살리에리의 말대로 세상에 헛된 희망만을 일으킬 뿐 소용없는 존재일까. 그나마 소수의 선택받은 한가한 운 좋은 사람들.”(P.180, 2)의 덕택으로 우리는 천국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이데아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지 않은가.

 

(살리에리) 그리고 내가 옳았다! 드디어 나는 / 나의 적을 발견했고, 새로운 하이든은 / 나를 열광으로 경이롭게 취하게 한다! (P.175, 1)

 

위 대목에서 새로운 하이든이 베토벤을 지칭하는 거라면, 살리에리는 하이든에서 자신을 거쳐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음악의 정통성을 찾으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석상 손님>의 주인공은 난봉꾼 돈 환. 이 책에서는 돈 구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돈 환의 러시아식 명칭인 듯하지만 매우 낯설다. 푸쉬킨은 돈 환의 이야기 중에서 그의 최후 장면을 선택하였다. 자신이 죽인 기사단장의 미망인 돈나 안나를 유혹하는 데 성공하는 돈 환. 그는 기사단장 석상에게 나중에 와서 문간의 파수나 보라고 조롱하는 만용을 부린다. 석상과 함께 땅속으로 가라앉는 돈 환은 권선징악의 전형이다. 다만 여기 불쌍한 돈나 안나가 남는다. 그런데 돈나 안나를 향해 돈 환이 내뱉은 말, 즉 자신은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못하였다는 고백은 단지 거짓과 유혹일까 아니면 진심의 토로일까?

 

<페스트 속의 향연>은 자칫 불건전하고 비윤리적인 사상을 옹호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수많은 인명을 빼앗고 마을을 황폐화한 페스트를 찬양하다니. 이런 말이 있다, 삶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실감할 수 있는 존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불멸의 존재는 삶에 대해 절박함이 없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만이 삶을 찬양할 수 있다. 페스트는 인간 삶의 절대적 위협이기에 역설적으로 그만큼 삶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의 크기는 커질 수밖에. 작가는 이렇게 의장의 입을 빌려 주장한다.

 

후반부는 서사시 편이다. 모두 7편을 담고 있다. <가브릴리아다>는 기독교적 기준으로 매우 불온한 작품이다. 동정녀 마리아가 여호와의 은총을 받아 예수를 낳았다는 성서의 기록에 완전히 배치된다. 신에 앞서 사탄과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품에 안았으며, 마리아는 이를 전혀 이상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시는 젊은 시절의 시인답게 육체적 쾌락의 가치를 역설한다. 아담과 이브의 권태를 즐거움과 행복으로 바꿔준 게 뱀, 즉 사탄이며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육체적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는 주장은 참신하다. 미남 가브리엘이 신도 탐낸 미인 마리아에게 매혹을 느낀 것 또한 당연하다. 신을 오쟁이 진 남편들의 옹호자”(P.256)로 지칭하는 시인은 자신의 미래를 예감했던 것일까.

 

<집시>는 비극이다. 알레코와 젬피라의 사랑은 <카르멘>의 호세와 카르멘의 그것과 동질적이다. 집시와 더불어 살고 사랑하지만, 집시의 가치 기준을 지니지 않은 남자. 자유로운 영혼과 더불어 자유로운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는 여자. 남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문명사회를 떠나 집시와 합류하였지만 끝끝내 집시를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오늘날 연인도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지만 그것이 깨질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한다. 결혼에 이르러도 이혼하는 사례가 빈발하는 현실이다. 하물며 젬피라처럼 젊고 아름다우며 자유로운 영혼에게 그것을 강제할 수 있겠는가. 노인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알레코에게 남은 것은 오직 비극적 선택일뿐.

 

<눌린 백작>은 패러디다. 루크리스[루크레티아]는 타킨의 능욕 시도를 정말로 거부할 수 없었는가. 루크리스의 능욕으로 로마 왕정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게 사실일까. 눌린 백작은 권태에 지친 안주인 나탈리야의 마음을 잘못 읽고 밤에 몰래 들어갔다가 뺨을 얻어맞은 채 나오고 만다. 이틀 아침 동안에 이 작품을 쓰면서 푸쉬킨은 무척 즐거웠으리라. 독자는 루크리스의 소극성에 대비되는 나탈리야의 적극적 저항과 정조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꼬리를 만 채 도망치듯 떠나는 눌린 백작과 뒤늦게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펄펄 뛰는 지주 남편, 여기까지는 모양이 좋다. 잠깐, 가장 크게 웃는 스물세 살의 이웃 지주는? 여기서 푸쉬킨이 단지 패러디만 시도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앞부분 나탈리야의 생활 모습과, 눌린 백작과 안주인 간 식탁 대화와 함께 그가 정작 노린 것은 다른 데 있음을 깨닫게 된다.

 

<폴타바>를 맨 나중으로 미루고 다른 시들을 먼저 살펴보련다. <안젤로> 역시 셰익스피어 작품에 대한 패러디다. <눌린 백작>에 비하면 패러디성은 약하고, 극 작품을 단순화한 구조의 시 작품으로 변용하였다. 사랑과 애정의 자연스러운 표출을 억지로 막는 인위적 법 규범은 실행 불가능하다. 법률 집행의 수호자인 안젤로조차 비난받아 마땅한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욕정을 채우려고 하지 않는가. 원작에 비해서 더 마음에 드는 점은 순결한 이사벨라가 공작과 난데없이 결혼하는 이상한 설정이 없어서다.

 

<청동 기사>페테르부르크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페테르부르크, 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다양한 이력을 자랑하는 도시. 표트르대제가 유럽을 향한 창으로 네바강 하구에 설계한 계획도시이자 러시아 제2의 도시. 러시아인에게, 그리고 시인에게 있어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라는 거인의 당당함과 제정 러시아의 위대한 힘을 내비치는 자랑스러운 상징물이리라.

 

찬미는 여기까지다. 시인은 곧바로 1824년의 대홍수를 꺼내 든다. 거센 역풍으로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도시를 완전히 침수시킨 강의 어마어마한 위력. 사랑하는 여인 파라샤와 소박한 미래를 꿈꾸는 예브게니, 높이 솟은 청동 기사상에 매달려 겨우 목숨을 구한 예브게니. 그의 여인이 살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의 꿈은 대홍수로 산산조각이 난다. 절망에 빠진 채 방황하던 그의 눈앞에 불쑥 나타난 청동 기사상.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그에게 감사해야 하는지, 자연을 거스르고 바다 밑에 도시를 세운그 사람의 파멸적 의지를 비난해야 할지. 연약한 예브게니는 다만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잃는다.

 

<황금 수탉>은 일종의 우화다. 거세된 현자의 지혜로 평화를 이루었지만, 샤마한 공주의 마술은 현자보다 강력하다. 왕자들은 서로 다투다 죽고, 매혹에 압도된 황제는 슬픔도 지혜도 모두 잊는다. 그렇다, 이것은 사랑의 마술이자 주문이다. 그것 앞에서는 제아무리 현명하고 뛰어난 인물도 암컷을 욕망하는 한 마리 수컷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의 본능은 강력하지만, 이것에 빠진 채 인간의 기본적 본성을 잃는다면 비극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때 가서 사랑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평화를 지키던 황금 수탉의 공격으로 비극은 완성되고 공주는 사라지고 상황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종료된다, 교훈적으로. 시사적이다.

 

이제 <폴타바>. 수록된 서사시 중 가장 장편인 동시에 역사적 사건을 제재로 삼은 역사시다. 때문인지 상당히 많은 시인의 주석이 덧붙여 있다. 러시아와 스웨덴 간 북방전쟁을 다루었는데,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우크라이나 카자흐 족장인 마제파가 주인공이다. 이 인물은 후대에 이르러 매우 유명해졌는데, 러시아 제국에 정면 도전한 실패한 영웅으로서 여러 시인과 작곡가들이 작품을 썼다.

 

러시아 사람인 푸쉬킨은 마제파를 달리 본다. 여기서 마제파는 늙은 족장으로서 친우로 여겼던 코추베이를 배신하고 그녀의 딸이자 자신에게는 대녀인 마리야를 꾀어낸다. 마제파를 가리키는 시인의 표현은 부정적이다. 악당, 교활, 거짓, 사악, 범죄, 냉혹, 뻔뻔함 등. 러시아로서는 저항 세력의 대장이었으니 서구 측과는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게 당연하다.

 

코추베이와 이스크라의 어찌 보면 억울한 죽음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코추베이를 고문하면서 숨긴 재물을 요구하는 오를릭을 통해 시인은 마제파 세력의 비도덕성을 강조한다. 카자흐의 시각에서 볼 때 마제파는 민족의 독립 투쟁을 이끈 영웅이다. 오랜 기간 머리를 숙이고 복종하는 채 은인자중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스웨덴 국왕과의 연합이 성공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은 채. 스웨덴 국왕 카를과 카자흐 마제파의 연합 세력과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 간 일대 회전이 바로 폴타바 전투다. 여기서의 승전을 계기로 북방전쟁은 결정적으로 러시아 우위로 넘어서는데, 이 서사시의 두 주인공, 마제파와 마리야 역시 비극으로 치닫는다.

 

역사는 영웅을 기억한다. 푸쉬킨의 의도와는 반대로 마제파는 시인과 음악가들의 덕택으로 역사적, 예술적 영웅으로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 불쌍한 마리야는? 가족을 버린 채 남자 하나만을 보고 따라왔건만 사랑하는 이에 의해 아버지는 목이 잘려버렸다.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제정신을 잃은 그녀에게 시인은 더없는 동정을 표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침략국보다는 피침략국이자 약소국인 우크라이나에 마음이 쏠림은 당연하다. 우리도 같은 처지에 있으므로. 그래서일까,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해 봉기하는 마제파의 외침이 남다르게 다가옴이.

 

(마제파) 사랑스러운 자유와 명예 없이 / 우리는 바르샤바의 보호 아래 / 모스크바의 전제 군주 아래 / 오랫동안 고개를 숙였소. 하나 이미 / 우크라이나가 독립할 / 시기가 온 거요. / 피 흘리는 자유의 깃발을 / 표트르를 향해 쳐드오. (P.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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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늪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조르주 상드 지음, 이재희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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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상드의 전원소설 중 하나다. 으스스한 표제와는 달리 내용은 지극히 전원적이고 단선적이다. 남녀 주인공의 결혼, 시골 배경이라는 점에서 먼저 읽은 <사랑의 요정 파데트>와 공통점을 지닌다. 다만 순수하고 흐뭇함을 자아내는 정도에서 전자에 다소 못 미치는데, 주인공의 연령 차이가 결정적이다. 제르맹은 스물여덟 나이에, 애 셋이 딸린 홀아비다. 마리는 방년 십육 세의 처녀다. 누가 봐도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조건, 게다가 마리는 애초에 나이 많은 사람을 배우자감으로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제르맹을 동네 아저씨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양치기로 가는 길에 제르맹과 동행하였으며, 못된 농장 주인으로부터 달아나는 길에 제르맹의 도움이 없었다면 곤욕을 치를 뻔하였다.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구원해 준 남자에게 아무래도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마리의 어려운 집안 살림을 알고 제르맹은 남모르게 식량을 구원해준다. 마리 입장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제르맹과의 결혼을 받아들이게끔 상황이 돌아갔다. 마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노모의 생계도 고려해야 한다. 제르맹은 마을에서 부농에 속한다. 솔직히 독자의 시각에서 보더라도 마리는 선택의 여지 없이 제르맹과 결혼하는 게 당연하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작가와 제르맹이 짜놓은 거미줄에 걸린 마리는 옴짝달싹 못 하는 처지다.

 

여기까지가 삐딱한 독자의 관점이라면 사랑과 결혼에는 다양한 층위가 존재한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마리는 제르맹의 호의를 마다할 수 있고, 그의 청혼에 명확한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그녀가 결국 제르맹을 남편감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대에 연령차가 많은 혼인이 없지 않았으며, 마리와 제르맹의 나이 차는 띠동갑이니 요새만 해도 허용되는 수준이다. 게다가 그녀는 제르맹의 인성을 직접 보고 겪었으니 오판할 여지도 적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계기가 홀바인의 판화와 한 농부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소박한 시골 생활과 풍습을 그리려고 했다고 밝힌다. 미안스럽게도 엄청나게 감동적이거나 순박함을 느끼지 못하는데, 단순하고 직선적이며 인위적인 작품 전개가 감동을 깎아 먹는다. 그럼에도 상드의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우리는 예술의 사명을 정서와 사랑의 전도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소설은 평화롭던 시대의 비유와 우화를 다시 부활시켜야 하며, 그것들의 묘사에서 발생하는 공포를 덜어주기 위해 예술가는 조심성과 화해의 몇 가지 방법을 제안하는 것보다 더 중대하고 더 시적인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P.11)

 

제르맹에게 맞닥뜨린 게랭 미망인과 마리는 양극단의 전형이다. 부유하고 도시적이며 세련된 데다 허영과 교태를 부리며 구애자들을 거느리는 걸 자랑하는 미망인과, 찢어질 듯 가난하며 순박한 시골 처녀. 제르맹은 마의 늪에서 길을 잃고 하룻밤을 보내는 과정에서 마리의 아름다움과 영리함, 따뜻한 마음씨를 발견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애를 기분 좋게 잘 돌보는 태도에서 아빠로서 고마움과 애정을 품었을 것은 당연하다.

 

그는 왔던 길을 되돌아서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안개는 더욱더 자욱해지고, 달은 완전히 가려졌다. 길은 몹시 험했으며 물웅덩이는 깊었다. (P.60)

 

귀신이 출몰하는 불길한 장소로 기술되는 마의 늪은 작중에서 사건의 전개와 반전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늪에서 헤매고 노숙하는 과정에서 제르맹과 마리는 서로의 속마음을 주고받는 친밀한 관계에 이른다. 나중에 못된 농장 주인에게 쫓기는 마리를 늪 근처의 숲에서 구해낸다. 이로써 제르맹은 마리에게 있어 은인이자 구원자의 지위로 올라선다.

 

가엾은 마리, 넌 마음씨가 착해. 난 그걸 알아. 그러나 넌 날 사랑하진 않지. 그리고 네가 불쾌해하고 싫어하는 것을 내가 알까 봐 얼굴을 내게 숨기는 것이지.” (P.137)

 

두 사람의 결합은 조심스럽지만 급격하게 이루어진다. 절망에 휩싸인 채 부르짖는 제르맹의 외침과, 그에 대한 사랑을 문득 토로하는 마리의 고백은 해피엔딩의 대단원이다.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 싶은 독자라면 이어지는 작가의 <부록> 편을 보자.

 

소설 본문에 못지않게 흥미로운 대목은 실상 <부록>에 있다. 시골 결혼식, 색 리본, 결혼식, 양배추라는 소제목을 각각 달고 있는데, 거칠게 말하자면 제르맹과 마리의 결혼을 통해 본 시골의 결혼 풍습 소개다. 삼굿장이와 무덤 파는 사람이 이끄는 신부와 신랑 무리의 팽팽한 대결은 마치 우리네 함잡이의 짓궂은 장난을 연상시킨다. 특히 삼굿장이는 전통문화의 보존과 전승에 중대한 존재임을 작가는 강조한다.

 

결혼식에서 색 리본을 나눠주거나 풍성한 양배추를 지붕 꼭대기에 올려놓는 관습은 이채롭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산(多産)의 기원이었음을 알게 된다. 신성한 양배추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 유일하게 멍청한 주정뱅이라는 점은 문득 디오니소스와의 연관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제르맹의 기쁨의 아침기도.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상정한 가장 단순하고 순박하며 아름다우면서도 순결한 전원의 장면이리라.

 

[제르맹]는 자신이 갈다 놓아둔 밭고랑에서 무릎을 꿇고, 땀으로 아직도 축축한 뺨 위로 흘러내리는 두 줄기 눈물만큼이나 고귀한 심정으로 아침기도를 드렸다.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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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드의 여왕 - 베스트세계문학 18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 신원문화사 / 1993년 7월
평점 :
절판



<수록작품>

스페이드의 여왕

대위의 딸

베르킹 이야기 [벨킨 이야기]

에프게니 오네긴

석상 손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푸쉬킨의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종래 그는 내게 별다른 감흥을 남기지 않아 외면하고 있었는데 <루슬란과 류드밀라> 이후 본격적으로 읽어볼 마음이 생겼다. 처음에는 새 책 새 번역본으로 시작할 생각이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30년 전 구입했던 이 책이 서가 구석에서 자신을 잊지 말라고 애원하는 눈빛을 차마 외면하기 어려웠다. 500여 면에 이르는 두툼함, 살짝 작은 크기 활자의 빽빽함. 요즘은 보통 세 권 정도로 분책하게 마련인데 이를 한 권에 몰아넣었다. 시대적 간극으로 요즘 어휘와 문체와 다른 점은 애교로 넘어간다. 두 편의 희곡 <석상 손님><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감상은 다음 기회로 넘기고 여기서는 소설 작품에 집중한다.

 

1. 스페이드의 여왕

 

일생을 한판에 걸었는데, 그것이 실패했다면 제정신이 불가능하리라. 겔만의 탐욕과 파멸에 쉽사리 돌멩이를 던지지 못함은 우리도 본성에서는 겔만과 마찬가지여서다. 매주 인생 역전을 꿈꾸며 소심하게 번호를 맞추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통상적인 수단으로는 도저히 부의 격차를 해소할 수 없다면 누구나 비상한 방안을 찾기 마련이다. 겔만처럼 절대 필승의 카드 패를 알 수 있다면 나 같아도 주저 없이 올인하겠다. 다만 그의 잘못은 백작 부인을 죽음에 몰아넣은 것이며, 순진한 리자베타를 기만한 점이다. 전자는 의도치 않은 결과라고 핑계라도 대겠지만 후자는 자신의 목적 성취를 위한 도구로 속여넘긴 것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꿈속에 백작 부인의 본의 아닌 등장과 소원을 풀어주라는 분부는 결국 겔만의 탐욕과 부도덕성을 징벌하기 위한 장치였다.

 

2. 대위의 딸

 

분량으로는 경장편, 내용으로는 역사소설에 해당한다. 군더더기 없는 진행으로 분량에 비해 내용적 밀도는 여느 장편소설 못지않게 짙다. 예전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이 작품의 미덕이다. 푸가초프의 반란과 그리뇨프와 마리아의 사랑을 병치시키면서 두 연인 사이에 개입하는 악인 슈바브린의 존재가 팽팽한 긴장감을 일으킨다.

 

슈바브린의 악인성은 독자 누구나 동의하지만, 푸가초프는 작중에서 악인과 영웅 사이의 모호한 경계선상에 놓여있다. 지배층을 위협하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입혔으니 분명 악인이지만, 그가 그리뇨프에게 나타내는 인정미와 반란군의 수장으로서 보여주는 위엄과 당당한 태도는 분명 예사 인물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에게는 무서운 인간이고 냉혈한이며, 악당이었던 이 사내와의 이별에 있어서 내가 품고 있었던 기분을 분명하게 기술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찌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P.156)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의 행보 외에 주목할 점은 하인 사베리치의 충정이다. 그리뇨프에게 고집스러울 정도로 충정을 바치는 그는 일면 엉뚱하다는 면에서 작중에서 유일하게 희극적 역할을 맡아 작품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다. 그가 주인공과 주인에게 취급되는 대우를 생각하면 제아무리 미화해도 당대 러시아 계급사회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난다.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지만 푸쉬킨은 여기에서 러시아 국토의 아름답고 쓸쓸한 분위기를 한껏 나타낸다. 푸가초프 반란과 진압 과정에서 발발한 민중의 고초와 참상에 대해서도 검열을 의식해서인지 간단하나마 지나치지 않는다. 이는 그가 당대 러시아 사회의 현실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음을 방증한다.

 

까다로운 독자라면 이 소설의 커다란 흠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지나친 우연의 남발. 주인공과 푸가초프의 만남, 주인공과 즈린 소령의 만남, 결정적으로 여주인공과 여왕 폐하의 우연한 만남이 그러하다. 작가의 지나친 개입은 작품 서사의 사실성을 약화시키고 전개와 결말의 설득력을 떨어뜨려 동화와도 같은 인상을 남기는 단초를 제공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작품에 품은 깊은 감명의 끈을 도저히 놓고 싶지 않다.

 

3. 베르킹 이야기

 

이는 사격’, ‘눈보라’, ‘장의사’, ‘역장’, ‘가짜 평민의 딸이라는 다섯 편의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표면적으로는 베르킹[벨킨]이라는 인물이 남긴 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수록작에 일관된 주제 의식을 찾기는 어렵지만, 억지로 찾자면 일상적이거나 평범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유사성을 보여준다.

 

사격은 진정한 용맹성의 의의를 되새긴다. 자신 외에 아무런 책임질 게 없을 때의 목숨과 사랑하는 약혼녀를 포기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목숨을 앞에 두고 똑같은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실비오는 백작을 쏘지 않았지만 쏘지 않음으로써 쏘았을 때보다 더한 사격 효과를 거두었다.

 

눈보라는 눈보라가 일으킨 두 연인의 애꿎은 엇갈림을 통해 운명의 의의를 새삼 상기시킨다. 마리아는 브라지밀과 야반도주하여 비밀 결혼식을 치르기로 하였다. 심한 눈보라는 브라지밀을 낯선 곳으로 이끌고, 그녀가 교회에서 결혼 의례를 치른 인물은 생면부지의 낯선 남자. 그녀는 처녀지만 유부녀가 되었고, 상대방은 총각이지만 유부남이 되었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모른 채 눈보라는 이들을 다른 운명과 장소로로 인도하였다. 그래도 불민과 마리아는 우연히 해후하였으니 그나마 다행이리라. 브라지밀은 후반부에서는 아예 잊힌 존재가 되었으니 참으로 불쌍하다.

 

장의사는 심령과 괴기를 다룬 단편이다. 장사가 잘되어 번듯한 집으로 이사한 장의사. 망자와 환자가 넘칠수록 장의사와 의사는 큰돈을 벌 수 있다. 그들에게 우리는 부자 되세요! 하고 일말의 거리낌 없이 축사를 전할 수 있는지. 장의사의 성공은 전적으로 망자들의 덕택이다. 그러면 이사 턱을 베풀고 감사를 표할 대상은 생자가 아닌 망자임이 마땅하다. 우리의 장의사는 망령들을 초대한다.

 

역장은 딸을 빼앗긴 역장의 삶을 통해 러시아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예쁜 처녀에게 마음을 뺏긴 귀족이 그녀와 함께 몰래 떠날 수 있음은 그럴 수 있다고 양보하자. 딸을 찾아 수소문하다 간신히 귀족을 찾아간 역장을 대하는 귀족은 지극히 고압적이고 폭압적이다. 도니야의 아버지를 냉대하고 내쫓는다. 그에게 도니야는 어떤 가치를 지닌 사람인가? 정식 부인은 당연히 아닐 테고 결국 첩에 지나지 않으리라. 아무리 성장을 갖추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더라도 그녀의 삶은 참다운 행복이 아니기에 역장의 탄식과 슬픔에 마음이 아프게 다가온다.

 

가짜 평민의 딸은 반대로 희극적이다. 이를 오페레타나 뮤지컬로 만든다면 꽤나 흥미진진한 작품이 탄생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언뜻 <로미오와 줄리엣>을 떠올리게 하지만 적대적인 두 아버지는 꼬리 잘린 암말의 덕택으로 화해와 우정의 길로 나아간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당사자인 알렉세이와 리자는 당황한다. 알렉세이는 리자를 하녀 아쿠리나로 알고 있기에 리자와의 결혼이 탐탁지 않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와는 달리 푸쉬킨은 해피엔딩을 지향한다.

 

4. 에프게니 오네긴

 

이 작품은 푸쉬킨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완성에 오랜 시간이 소요된 운문 소설이다. 푸쉬킨의 대표작은 산문 소설로 <대위의 딸>, 운문 소설로 이 작품을 꼽는다. 작가 자신이 이미 시인으로 유명하므로 시 형식으로 소설을 쓰는 게 낯설지는 않다. 서사시와 유사하므로. 산문 대신 굳이 운문을 택한 까닭은 오네긴과 타치아나, 오네긴과 브라지밀의 관계는 <대위의 딸>과 달리 극적인 서사성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차라리 시적 분위기와 정서를 자아내고 유장한 미를 추구한 게 아닐까 추측한다.

 

오네긴은 훗날 오블로모프로 극단적으로 정형화된 잉여 인간의 부류에 가깝다. 푸쉬킨의 오네긴은 레르몬토프의 페초린과 일맥상통한다. 방탕과 냉소와 환멸에 빠진 귀족 자제. 타고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지 않은 채 세상과 삶을 겉도는 인물이다. 무관심, 하품, 싫증 등이 오네긴을 표상하는 어휘들이다. 부족이 아니라 넘칠 정도로 과도함이 오히려 호기심과 관심을 떨어내듯 말이다.

 

어떻든 그녀 이름은 타치아나. / 동생 오리가와는 정반대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얼굴에 / 장밋빛의 싱싱한 맛도 없다. 반기지도 않고 우울하고 말도 없고 / 숲에 사는 수사슴처럼 겁이 많고 / 부모 곁에 살면서도 말 한 마디 못하고 묵묵하기만 했다. (P.311, 2)

 

세련된 도시 귀족 청년의 눈에 촌스러운 시골 아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음은 당연하다. 타치아나의 일방적 사랑에 오네긴이 반드시 응해야 할 책임은 없다. 오네긴에게 보내는 그녀의 장문의 편지를 읽고 오네긴이 아무 반응 없는 까닭,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보이는 정중한 구애의 거절을 갖고 우리는 오네긴을 비난할 수 없다. 원래 사랑은 공평하지 않기 마련이기에 사랑의 실연은 문학의 오랜 제재 아니던가. 그녀의 편지에서 우리는 차라리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시골 외딴곳에서 영원히 갇혀 지내는 삶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구애의 거절로 두 사람 사이가 일단락되었으면 좋겠지만, 오네긴의 괴팍함 덕택에 브라지밀은 결투에서 목숨을 잃는다. 여러 면에서 오네긴과 브라지밀은 대조적이다. 냉정과 열정, 무관심과 사랑. 항상 아쉬워하지만 양극단이 조화를 이루어 중용이 되었으면 모두가 좋았을 텐데. 이 소설에서 유난히 강조되는 장면은 러시아 시골의 전원 풍경이다. 외지고 척박하고 황량한 대지가 아니다. 자연과 평화와 소박한 삶이 한데 어우러진 러시아의 근원이라고 할 만하다. 타치아나가 숨 막힌 사교계와 도시 생활에 진저리 내고 끊임없이 시골과 고향을 희구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훗날 세련된 귀부인이 된 타치아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된 오네긴. 이는 전반부에 대한 완벽한 패러디다. 그 실례가 앞과는 달리 타치아나에게 보내는 오네긴의 편지다. 작가는 이 대목에서 탄식한다. 잃어버린 것의 소중한 가치를 뒤늦게야 발견하는 가련한 인간들이여. 에덴동산의 이브가 그러하듯 우리는 눈앞의 것보다 멀리 떨어진 닿을 수 없고 가져서는 안 되는 금단의 열매에 마음이 끌린다. 그게 인간의 숙명이다.

 

오네긴이 진작에 타치아나의 마음을 수락하였다면 많은 슬픔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오네긴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순간에 없어지겠는가. 그럼에도 타치아나는 현재의 남편에게 충실할 것을 새삼 각오한다. 비록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그녀의 본분임을 잘 알기에. 우리는 그녀의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일말의 아쉬움은 있겠지만 대놓고 불륜하라고 떠밀 수는 없는 법. 오히려 오네긴의 뒤늦은 각성을 안타까워할 뿐이다.

 

! 경쾌했던 나의 청춘이여! / 즐거움 슬픔 달콤한 괴로움이나 시끄러움, 폭풍우, 멋진 연회석상 / 모든 것에 네가 보내 준 모든 것에 나는 감사드린다. / 오로지 너를 받아들였다...마음껏. 그것으로 됐다! (P.389, 6)

 

작가는 오네긴의 실패를 이렇게 해석한다. 눈부신 청춘은 찰나에 불과하다. 기쁜 마음으로 진심으로 청춘의 봄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 우물쭈물 망설이면 어느덧 봄날은 가고 만다. 환멸과 권태에 빠지지 말고 사랑과 열정의 소박함을 맞이해라. 화려한 꾸밈과 겉멋에 속지 않고 소박함과 수수함의 미덕을 발견할 수 있다면 참다운 행복이 이루어질 수 있으리.

 

왜 지난날엔 푸쉬킨 작품의 아름다움과 맛을 찾지 못하였을까. 문장 한줄 한줄, 단락 한 마디마다 새록새록 기쁨과 즐거움,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당시 나는 푸쉬킨을 이해하기에는 좀 어렸나 보다. 빙하가 장구한 세월을 거쳐 암석을 깎아내듯 시간과 경험의 무게가 푸쉬킨에 덧씌운 외피를 벗겨내니 비로소 그의 내면과 속살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고 그저 위안 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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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향곡 -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
M. T. 앤더슨 지음, 장호연 옮김 / 돌베개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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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의 교향곡 매니아 사이에는 BMS라는 작곡가 약칭이 있다. 브루크너, 말러, 쇼스타코비치가 그것이다. 중후장대하고 강렬하며 극적인 대편성 교향곡의 묘미를 한껏 누릴 수 있는 작품들을 이 세 사람은 남겼다. 저자가 이 책에서 천착하는 것은 바로 쇼스타코비치다.

 

쇼스타코비치의 삶은 서양 현대사의 굴곡과 맥을 같이한다. 볼셰비키 혁명과 스탈린의 공포정치, 2차 세계대전과 전후의 냉전 시대까지. 게다가 그는 당대의 가장 저명한 작곡가로서 언제나 당국의 예의주시 대상이었다. 정권은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 찬양과 비판을 번갈아 하며 그를 본보기로 삼아 예술계를 통제하려고 하였다.

 

표면적인 쇼스타코비치의 태도는 공산주의에 순응하는 전형적인 소비에트인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뒤바뀌게 된 계기는 볼코프의 <증언>이 발표된 이후로 스탈린 정권에 반항적이고 냉소적인 쇼스타코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과연 증언이 쇼스타코비치의 목소리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여전하다.

 

이 책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그의 7번 교향곡, 일명 <레닌그라드 교향곡>이다. 이 곡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소전쟁에서 독일에 의한 레닌그라드 포위전 와중에 쓴 작품이다. 70분에 육박하는 장대함, 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에 나타나는 강렬함과 심각함 등이 어우러져 압권을 이루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다. 무엇보다 이 교향곡은 작품 전후, 그리고 서방 초연을 위한 소련과 미국의 협업 등의 음악 이외 요소로 더욱 대중의 흥미를 끈다.

 

이 책은 20세기 전반기 소비에트 사회와 예술을 다룬 역사서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이면서 쇼스타코비치의 간략한 전기이기도 하다. 물론 그 중심에는 전쟁 한복판에서 이 교향곡이 만들어지고 전달되고 연주되고 사람들에게 힘을 준 이야기가 있다. (P.498, 옮긴이의 말)

 

예술작품은 작가와 시대와 동떨어져 난데없이 뚝 떨어지지 않는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레닌그라드 전투의 성격을 알려면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배경, 나아가 나치와 볼셰비키 정권의 탄생과 본질에 대해서도 다가갈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음악 이야기이지만, 음악을 둘러싼 인간과 사회, 역사를 다룬 다큐에 더 가깝다.

 

쇼스타코비치 애호가라면 그가 스탈린 정권에 의해 박해받은 사실을 알고 있다. 5번 교향곡의 성공으로 1930년대의 대공포 시대라는 1차 위기를 넘겼고, 7번 교향곡으로 스탈린 정권의 생명 연장에 기여하였지만, 전후인 1948년 형식주의 비판은 통과하지 못하였다.

 

1948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금지되었다. 그해 가을에 그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모아둔 돈이 떨어지자 그는 스탈린을 칭송하는 영화들의 음악을 작곡하며 돈을 벌었다. (P.477)

 

당대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저 그러려니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은 스탈린의 공포주의가 얼마나 무시무시한가를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들은 몇백만 사람의 목숨을 깃털처럼 가볍게 여겼다. 반체제라고 의심하면 저명한 지식인, 예술가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거나 유형에 처해졌다. 개인뿐만 아니라 일가족 모두가. 오늘은 무사하더라도 내일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쇼스타코비치는 살아가야 했다. 제아무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혹자는 그가 더 당당하게 정권에 맞섰기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전설적 영웅이 아니다. 그는 보통의, 평범한 소시민이다. 축구에 열광하고, 친구들과 예술에 대하여 교류하며 우정을 나누는 그. 게다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 부모와 친척들을 지켜야 할 의무와 본분이 있다. 이 책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쇼스타코비치는 예술세계에 가려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그의 인간적 면모다.

 

아쉽게도 우리는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목소리를 확인할 수 없다. 그의 공식적인 발언은 시대의 압력을 감안해야 하며, 볼코프의 증언은 진의를 알 수 없고, 후대 친척과 지인의 회상은 오염과 과장을 감내해야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일체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행위였으리라. 그렇기에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생각과 감정을 추정하려는 시도가 나오게 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시기에 자신의 감정에 대해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일기 때문에 누군가가 투옥되고, 편지 때문에 누군가가 총살되는 시대였다. (P.151)

 

그의 삶은 스탈린과 떼어놓을 수 없다. 작곡가로서 그의 주활동기는 스탈린 집권 시대와 정확히 맞물린다. 아니 그의 삶 전체는 공산주의 혁명의 발발로부터 시작하여 냉전과 데탕트, 신냉전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소비에트와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제아무리 속마음은 다를 수 있다 하더라도 어린 시절 체득한 분위기까지 고려한다면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그의 작품 바탕에 깔려있음을 외면하기 어렵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레닌그라드 전투의 배경과 발발, 전개 과정을 통해 비로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관계, 독소전쟁이 불가피하였고 레닌그라드의 처절한 비극이 생긴 까닭은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반복해서 말했듯이 레닌그라드는 스탈린에 의해 이미 짓밟혀졌고, 나치는 이를 마무리하려고 덤벼든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탈린은 전쟁에 앞서 레닌그라드, 나아가 소련 전체의 국방력을 불구로 만들었고, 나치 침공을 자초하였으니.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다.” 한 여성이 일기에 썼다. “우리는 쥐덫에 걸렸다.”

역사상 가장 긴 포위전으로 기록되는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쇼스타코비치 가족은 다른 250만 명과 함께 덫에 걸려들었다. (P.274)

 

나치의 전략이 잔인하지만 지능적이며 효율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전투를 피하고 포위한 채 인명과 물자 유통을 끊어버림으로써 아사시키는 작전을 썼다. 레닌그라드는 스스로 포위를 풀 역량이 없었고, 스탈린은 외부에서 독일군을 무너뜨릴 힘이 없었다. 딱한 것은 레닌그라드 주민들뿐. 이 책은 포위된 채 굶어 죽어가는 도시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한다. 전쟁 자체가 비인간적이지만 아무런 희망도 없이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더없이 비인간적이다. 그 극치는 바로 인육을 먹는 사람들과,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사냥하는 무리들이다. 하지만 이 책은 반대로 극한상황에서도 인간성의 마지막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독일군에게 침을 뱉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들은 땅에서 썩을 겁니다. 수십만, 수백만이 이미 썩고 있어요. 그에 반해 우리의 도시는 굳건하게 버티며,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고 일하고 시를 쓰고 러시아 노래를 부를 겁니다.” (P.392)

 

레닌그라드 교향곡이 이 책의 내용처럼 영미와 소련 간 동맹을 맺는데 정말 결정적인 기여를 했는지는 역사적 검토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서양에서의 연주를 위해 마이크로필름에 담긴 악보가 세계 방방곡곡을 여행하면서 간신히 전달되는 역경은 자체로서도 극적이다.

 

이 책의 압권은 포위된 채 굶주림에 연주자들이 쓰러져 죽어가면서도 레닌그라드 초연을 감행하는 오케스트라와 그 연주를 듣기 위해 참석하는 시민들의 태도다. 그들에게 이는 단순한 교향곡과 연주회가 아니다. 생사를 넘나들며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바로 자신들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이 교향곡을 듣고 열광한 다른 나라 사람들, 소련의 다른 지역 사람들과 차별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와 같은 감정으로 음악을 들었습니다. 이 음악을 와서 들으려고 이 순간까지 살아남은 것이니까요.” 그날 밤 공연장에 있었던 한 여성의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겪은 진짜 교향곡이었습니다. 우리의 교향곡, 레닌그라드 주민들의 교향곡입니다.” (P.450)

 

쇼스타코비치의 5번 교향곡처럼 7번도 시기적으로, 지역적으로 해석의 차가 분분하다. 공산주의의 승리, 나치의 패배 같은 전통적 해석에서 폭압적인 전체주의 일체에 대한 냉소로 보는 해석까지. 거기에 순음악적 접근도 가능하다. 단일한 정답은 없다. 문자적 언어가 아닌 음표로 표현된 음악은 폭넓은 의미를 포용한다.

 

이 책에서 결국 저자가 주목하는 것도 음악과 인간의 관계, 좀 더 명확히 한다면 극단적 상황에서도 용기를 부여하는 음악의 힘과 그것이 실증해 보이는 역사의 실례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파괴하는 음악은 참다운 음악이 아니다. 음악은 인간에게 기쁨과 위안과 용기를 주어서 세상을 살아갈 힘을 주어야 한다. 저자가 스탈린과 쇼스타코비치, 레닌그라드를 제재로 삼아 장대한 다큐를 쓴 의도 또한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는 음악의 힘과 의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은밀한 메시지들과 에두르는 말의 이야기, 암호로 작동하는 음악의 이야기,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비극을 견디도록 힘을 주고,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할 때 감옥 창살 사이로 속삭이게 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여 위안을 주는 음악의 이야기이다. “당신에게 어떤 일이 닥치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P.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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