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북유럽 신화 그림이 있는 옛이야기 2
김원익 지음 / 지식서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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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권째 북유럽 신화 개설서다. <에다 이야기>를 포함하면 네 권째인 셈이다. 덕분에 생소했던 신들과 거인들의 이름도 이제는 비교적 친숙해졌고, 북유럽 신화 체계도 어느 정도 머릿속에 들어올 정도가 되었다. 이 책에서 기대하는 점은 두 가지다. 먼저 그림이 있는이라는 표제와 같이 풍요로운 도판이 주는 효과다. 아무래도 글자보다는 이미지가 이해도와 흥미도를 높이는데 유리한 게 사실이다. 다음은 저자다. 김원익은 그리스신화 전문가다. 신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소개하는 입장에서 북유럽 신화를 어떻게 다룰지 기대감을 품게 한다.

 

책의 만듦새는 매우 좋다. 특히 고급용지를 사용하여 책의 가치를 높이고 있는데 컬러 그림 130점을 수록하기 위해 선택으로 보인다. 이 도판이 이 책의 최대 강점이라고 할 만하다. 중세와 근대의 유럽인들이 북유럽 신화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일목요연하게 그림으로 생생하게 입증된다. 굳이 책 내용을 살피지 않더라도 그림만 보더라도 북유럽 신화의 흐름이 느껴질 정도라고 하면 과언일까.

 

북유럽 신화는 크게 두 가지 줄기로 구성되는데, 세계 창조에서 라그나뢰크로 이어지는 신들의 이야기가 하나이고, 통상 반지 이야기로 불리는 뵐숭 가문과 니플룽 가문의 이야기가 다른 하나다. 이 책은 두 가지 이야기를 모두 싣고 있어 초심자가 북유럽 신화 전반의 구조와 흐름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

 

이 책에 다소나마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저자의 과도한 친절이라고 하겠다.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이 완전무결하고 논리적으로 구축된 신화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앞뒤 맥락이 맞지 않고 시간순서도 제멋대로 인 점을 그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작자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다소간 과한 점이 있다. 작자 자신도 이를 인식하고 있어 머리말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북유럽 신화의 원전에서는 이야기의 단절이나 비약이 자주 보인다.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도 많다. 중요하지만 너무 짧은 이야기도 허다하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만 했지,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필자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런 빈 공간들을 채워 보려고 애를 썼다. 그 과정에서 이야기의 핵심을 해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잘못이 있다면 필자의 지나친 상상력 탓이다. (P.11)

 

기존 책들과는 전개와 해석을 달리하는 대목이 간혹 존재하는데 무엇이 더 원전에 가까운지, 더 올바른 해석인지 알 수 없다. 잘못하면 운문 에다마저 펼쳐 들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까 우려스럽다. 몇 가지만 간단히 살펴본다.

 

오딘 형제가 거인 이미르를 죽여서 세계를 창조하는 대목 중 이미르의 시체 구더기에서 난쟁이와 요정을 만들었다고 한다(P.29). 땅속의 난쟁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요정마저 구더기의 변신이라고 하니 의외다. 다른 책에서는 그런 내용을 읽은 기억이 없는데, 확인이 필요하다.

 

북유럽의 신들이 단일 신족이 아니라 아스 신족과 반 신족으로 구성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 단계로서 두 신족 간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다. 이 책에서는 오딘이 두 신족의 왕이라고 하면서 오딘의 통치 아래 두 신족이 존재한다고 기술한다. 그러면서 사이가 벌어지면서 전쟁이 발발했다고 한다(P.38). 오딘이 신들의 왕이라면 누가 감히 왕에게 반역하여 전쟁을 일으킨다는 말인가? 상식적으로 전혀 별개의 두 신족의 결합과 최고신 오딘을 함께 연결하기 위한 무리수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앞서 읽은 최순욱의 책에서는 로키를 불의 신으로 파악하고 있다. 반면 김원익은 로키와 불의 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단언한다(P.83). 불의 신 로기를 로키와 동일시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로 이해할 것인지의 차이점이다. 로키를 신족이 아닌 거인으로서 장난과 말썽의 화신으로 간주하고 그것이 지나쳐 마침내 신족과 등을 돌리는 존재로 해석할 것인가? 또는 로키의 불안정한 속성을 쉴 새 없이 형체를 바꾸는 불의 본질로 이해하여 그의 변덕스러운 본성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 대목은 조금 더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로키가 토르의 아내 쉬프의 금발을 잘라버려 발생하는 사건은 신들에게 여섯 가지 절대 보물을 안겨다 주는 해피엔딩으로 연결되는 유명한 이야기다. 로키가 대장장이 난쟁이들을 꾀어 신들의 보물을 만들게 하는 장면인데 앞선 책들과는 내용상 차이가 있다.

 

난쟁이들은 로키의 말이 별로 실속은 없지만 약간의 황금과 수고만 들이면 되는 일이었기에 그리 손해 보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P.128)

 

로키의 단순한 감언으로 난쟁이들이 이렇게 엄청난 보물을 만들어 신들에게 선물로 준다고 하는 설정은 신빙성이 미약하다. 두 대장장이 집단 간 자존심을 건 경쟁이라고 하는 게 보다 설득력이 높다.

 

토르와 티르가 히미르를 찾아가는 이야기에서도 의문점이 존재한다. 우선 히미르와 티르의 관계가 모호하다. 티르는 히미르의 친아들인가 아니면 의붓아들인가. 친아들이라면 히미르가 티르를 죽이려고 그렇게 사납게 날뛴다는 게 상황에 맞지 않는다. 의붓아들로 보는 게 그럴 듯하다. 한편 토르와 요르문간드의 낚시 대결에서 요르문간드가 간신히 풀려난 게 누구 덕택인가 하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요르문간드 자신의 필사적 노력 때문이라고 하는데(P.172), 다른 책에서는 겁에 질린 히미르가 낚싯줄을 끊어서라고 풀이한다.

 

마지막으로 우트가르드에서 토르가 거인들과 힘 대결을 벌이면서 고양이를 들어 올리려고 애쓰는 대목을 보자. 토르가 끙끙거리며 온갖 힘을 쏟았지만 겨우 고양이 뒷발을 살짝 들어 올렸을 뿐이다(P.192). 이 책에서는 거인들이 이를 바라보며 조소를 날리지만, 이 고양이가 사실 요르문간드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살짝 들어 올린 것만 해도 엄청난 사건이라고 할 때 우트가르드-로키의 반응이 매우 심각해야 함이 마땅하다.

 

한편 뵐숭과 니플룽 가문의 수 대에 걸친 우여곡절은 잘 정리되어 니벨룽의 반지이야기 전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신의 손바닥에 좌우되는 영웅의 생을 포함하여 최고 신 오딘의 음울한 의지가 인간계를 완전 좌우하고 있어 씁쓸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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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락 산의 제왕 시튼의 동물 이야기 4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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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락 산의 잭은 회색곰을 주인공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왑과 유사성을 지닌다. 둘 다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며 일대의 제왕으로 군림하였고 난폭하다는 평판도 비슷하다. 어린 시절 사냥꾼에게 가족을 잃고 외톨이로 성장하였다는 점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면 양자의 삶은 전혀 다른 길을 따라갔고 그들의 마지막도 전혀 달랐다.

 

이 작품은 제법 적잖은 분량으로 단편집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발표되었다. 게다가 잭의 일생은 자체로 극적인 대조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어 흥미진진함과 동시에 딱한 생의 여로에 공감과 연민을 이입시키기에 충분하다. 철부지 아기곰 잭의 재롱과 순진함, 그리고 영리함을 보며 우리는 잭이 조금이나마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란다. 한갓 애완동물로, 나아가 돈벌이 수단으로 취급당하는 그들에 대한 동정심과 함께 동류 인간들을 향한 혐오감마저 감출 수 없다. 따라서 잭이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을 때 독자의 환호는 당연하였다. 작가마저 독립기념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정도로.

 

잭은 왑과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왑이 인간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나무뿌리와 열매 같은 먹이를 선호한 반면, 잭은 양과 소 같은 육식을 선호하였으니 이해의 충돌은 필연적이 되었다. 시에라 산맥에는 자연 상태의 먹이가 부족하였을까? 아니었다, 그건 잭이 채식주의자가 되지 못할 운명이었고 고기에 대한 본능적 선호였을 뿐이다. 눈앞에 영양이 풍부하고 손쉬운 먹잇감이 있는데 굳이 힘들게 땅을 뒤적거리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무엇보다도 잭은 살상 자체를 즐겼다. 수많은 소들과 양들을 잡아먹은 악명이 자자한 주변 일대의 육식 회색곰들이 결국 한 마리를 지칭하는 것이었을 때 잭과 인간들 사이에는 불구대천의 관계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잭의 파멸을 의미했다. 야생동물이 제아무리 사납고 영리하고 운이 좋다고 하더라도 작심하고 뒤쫓는 인간들을 영원히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거대한 곰은 앞발에 코를 묻은 채 우리 안에 엎드려 울었다. 정말이지 길고도 가슴 쓰라린 맹수의 울음이었다. 마치 영혼에 상처를 입어 희망과 삶이 꺼져 가는 사람이 우는 듯했다. (P.127)

 

사냥꾼과 덫과 총으로도 제압할 수 없었던 탈락 산의 제왕을 패배시킨 것은 달콤한 미끼와 강력한 수면제였다. 인간들은 정면 대결로는 도저히 잭을 이길 수 없었기에 동물적 본능의 유혹을 이용하였다. 우리는 야성과 자유를 상실하고 애완동물처럼 던져주는 먹이와 속박에 익숙하고 길들여져 가는 제왕의 미래를 상상하고 싶지 않다. 야생동물에게 자유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다. 어미 여우가, 야생마가 이미 처절하게 입증하였고 늑대 왕은 스스로 삶을 포기하였다.

 

잭은 삶을 선택하였고 살아남았다. 시튼은 잭의 향후 삶이 얼마나 지속될지 그리고 어떠한 양태를 갖게 될지 섣불리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잭의 눈은 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멀리 탈락 산과 바다가 있는 방향”(P.131)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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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곰 왑의 삶 시튼의 동물 이야기 2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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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된 두 편의 동물기 중 <회색곰 왑의 삶>은 이전에 읽었기에 비교적 친숙하지만 후자인 <샌드힐의 수사슴>은 이번에 처음 접하는 이야기다. 양자 모두 단독으로 발표되었고 시튼의 여타 동물기에 비하면 제법 많은 분량을 가지고 있다. 미루어 짐작건대 회색곰과 수사슴의 삶의 단편적 면모가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그네들의 희로애락을 긴 호흡으로 기술하였으리라.

 

1. 회색곰 왑의 삶

 

회색곰 왑의 일생에서 독자가 발견하는 특징은 우선 최상위 포식자임에도 어린 시절 그가 겪었던 고난과 고통이다. 어미를 비롯한 가족을 모두 잃은 새끼 곰은 무력하기 짝이 없고 그를 괴롭히는 모든 짐승은 그에게 결국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랑과 우정을 기대할 수 없을 때 그에게 남는 감정은 오로지 분노와 증오일 따름이다.

 

무뚝뚝하고 까다롭고 난폭하며 성질 나쁜 왑의 일면에 익숙했던 사람들이 보호구역 안에서의 순하고 얌전한 회색곰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한 연유도 결국 우리가 바라보는 야생 동물의 모습이 참으로 편린에 불과함을 강조할 뿐이다. 아울러 야생동물 보호구역이 갖는 미덕과 존재의의이기도 하다.

 

이 보호구역 안에 사는 동물들은 사람을 피하려 하지도 않았고, 두려워하거나 공격하지도 않았고, 서로에게도 훨씬 더 너그러웠다.

평화와 풍요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미덕이다. (P.79)

 

야생곰은 어떤 최후를 맞이할까? 사냥꾼의 총에 맞아 죽거나 다른 곰과 영토싸움을 하다 부상 당해 죽기도 하고 드물게는 늙고 병들어 자연사할 것이다. 고독하지만 강력한 회색곰 왑의 권력도 영원하지는 못하니 그것 또한 자연의 순리라고 하겠다. 젊은 곰 로치백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제왕으로서 장렬한 전개를 바랐던 이들에게 왑의 최후는 기대에 반하는 것이었다. 독자는 동물 영웅을 기대하지만 왑의 선택은 고요와 평안이다. 병약하고 노쇠한 왑이 진정 바라는 게 무엇일까?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는 죽음. 야생 동물로서는 드물게 찾아오는 선물 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왑의 선택에 실망해서도 안 되고 실망할 수도 없다. 일생을 쉴 틈 없이 치열하고 숨 가쁘게 살아 온 그로서는 최선의 죽음일 것이므로. 독자의 값싼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일생을 망칠 수는 없으니.

 

2. 샌드힐의 수사슴

 

사냥꾼에게 쫓기기는 오히려 수사슴이 더욱 심하다. 회색곰 사냥은 자칫 사냥꾼의 목숨을 교환해야 할 중대사인 반면 겁 많은 사슴은 여러모로 스포츠로서 사냥에 적합한 대상물이다. 게다가 수사슴의 뿔은 얼마나 멋진 장식물이던가. 작가가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냥이라는 행위의 주체로서 인간과 대상으로서 동물의 관계다.

 

타 존재의 생명을 빼앗는 행위의 정당성은 자기 존재의 생존 차원에 기인한다. 수많은 자연 다큐에서 매번 보게 되는 살상 또한 먹이사슬의 불가피성으로 자연법칙의 일환으로 간주된다. 우리네가 기르고 도축하는 가축들도 인간의 생명 유지라는 관점에서 일부의 맹렬한 반대주장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얀이 샌드힐의 수사슴을 쫓고 잡으려는 목적은 단지 정복욕과 소유욕이다. 그것의 힘차고 아름다운 몸뚱이에서 피를 뿜어낼 때의 쾌감을 즐기고, 빼어나게 멋진 뿔을 영원히 박제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것, 그래서 오로지 나 혼자만의 것으로 독점하고자 하는 욕망. 사냥꾼이라면 대체로 유사한 동기와 목적을 갖게 마련이다. 동물에게 생명체의 감정을 가져서는 뛰어난 사냥꾼이 되지 못한다. 언제 어느 순간이건 오로지 대상물로서만 인식해야 한다.

 

얼마나 당당하고 생명력이 넘쳐나는가! 존귀하고 거룩해 보이기까지 했다. 임금이었다. 가죽 옷을 입고 그에 어울리는 왕관을 쓴......그 티 하나 없이 맑고 평화로운 눈동자를 보자 총을 든 암살자는 용기를 잃었다. (P.130)

 

얀은 성공적인 사냥꾼이 될 수 없다. 문제는 그의 능력이 아니라 감정적 측면이다. 인간과 대등한 개별적 생명체로서의 존재를 의식할 때 누가 감히 살상을 감행할 용기를 갖겠는가. 죽이고자 하는 대상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말이다. 더구나 이 수사슴처럼 왕자다운 당당함과 고귀한 품격을 갖춘 동물에게 말이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동안,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는 동안 얀은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 얀은 눈을 마주치면서 녀석의 생명을 빼앗을 자신이 없었다. (P.158)

 

얀이 진실로 수사슴을 통해 성배를 발견하고 부처의 가르침을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다. 3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발자국을 통해 깊은 통찰을 얻게 될 기회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얀은 절대로 그 수사슴을 죽이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시튼의 여러 이야기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냥꾼이 실패의 쓴맛을 본 사례라고 하겠는데, 그럼에도 사냥꾼 자신도 글쓴이도 독자도 모두 흐뭇한 마음으로 실패를 축하하게 됨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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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럼포의 왕, 로보 - 내가 만난 야생 동물들 시튼의 동물 이야기 1
어니스트 톰슨 시튼 지음, 장석봉 옮김 / 궁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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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 동물기를 다시 읽는다. 이전에 읽은 책이 아동용으로 분류된다면 이번부터 읽게 되는 책은 일반독자를 위한 것이니 보다 시튼의 원형에 가까울 것으로 기대한다. 이 책은 야생 동물 이야기를 다룬 시튼의 첫 번째 책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이 수록된 대표작이라 할 만한다. 수록된 이야기 목록은 아래와 같다.

 

1. 커럼포의 왕, 로보

2. 세상에 둘도 없는 까마귀

3. 달려라, 솜꼬리토끼

4. 내 괴짜 친구, 빙고

5. 여우의 눈물

6. 야생마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7. 낮과 밤의 두 얼굴, 양몰이 개 울리

8. 아름다운 메추라기, 빨간목깃털

 

시튼이 등장시키는 동물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늑대, 여우, , 토끼, 말은 물론 까마귀, 메추라기(보다는 들꿩이 적절하다)처럼 들짐승과 날짐승은 물론, 반드시 야생 동물에 국한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듣고, 직간접으로 겪은 동물들을 각각의 고유한 개체로서 존중하고 있다. 그는 과학적 시선이 동물들을 개별 종으로 환원하여 각자의 독자적 개성을 박탈하는 것에 반대한다.

 

나는 자연사가 동물들을 지나치게 일반적으로 다루는 바람에 많은 것을 잃었다고 믿고 있다. 열 쪽 분량의 소묘로 인간의 관습과 풍습을 얼마나 그려 낼 수 있겠는가? 그 정도 분량이라면 차라리 어느 위인의 삶을 설명하는 데 할애하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내가 이야기하려는 동물들에게 적용한 원리이다. (P.7)

 

여덟 편의 이야기에 대해 하나하나 기술하지는 않으련다. 이전에 읽은 논장 판 5권 세트에 전편이 분산 수록되어 있으며 개별적 촌평은 다시 읽어보아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시튼의 태도는 분명하다. 그는 동물 사냥에 무조건 반대하지 않는다. 기술의 도움을 얻지만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발휘하여 뛰어난 상대 동물에 맞서는 사냥꾼에게도 정당한 찬사를 보인다. 그가 안타까워하고 동정하는 경우는 단순한 재미와 탐욕으로 무자비하게 목숨을 앗아가는 인간의 몰지각한 행위와 그에 따라 속수무책으로 스러지는 생명의 고귀함이다. 비교적 객관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시튼도 이때만큼은 분노를 표출한다.

 

야생 동물들에게는 정녕 아무런 도덕적. 법적 권리가 없는 것일까? 단지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 그토록 심한 고통을 가할 수 있는 권리가 인간에게 과연 있는 것일까? (P.312, ‘아름다운 메추라기, 빨간목깃털’)

 

모든 생물은 생존을 위해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며 한치의 방심은 곧 생명 박탈로 이어진다. 야생은 엄혹하다. 비록 연민의 마음을 갖지만 그것이 개입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임을 알고 있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한 종의 생존은 다른 종의 생명을 대가로 하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피식자의 목숨은 시한부에 가깝다. 새끼일 때 잡아먹히거나 운 좋으면 늙고 병들었을 때 그러할 뿐. 그래서 시튼의 동물 이야기는 항상 슬픈 결말을 맺는다. 이 책의 까마귀와 솜꼬리토끼, 야생마와 메추라기의 최후는 비극적이다. 포식자도 마찬가지다. 늑대와 여우조차도 슬픔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시튼은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최후까지 생존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인 불쌍한 영혼들에게 헌사를 바친다. 그는 감히 영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불쌍한 솜꼬리토끼 몰리! 몰리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스스로 영웅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자신들의 세계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다 간 수많은 영웅들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했다.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몰리가 행한 전투는 매우 훌륭했다. 몰리는 뛰어난 동물이었고, 그 바탕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P.122-123, ‘달려라, 솜꼬리토끼)

 

어디 몰리뿐이겠는가! 자유의 상실 대신에 기꺼이 죽음을 감내한 로보.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벼랑 아래 몸을 던진 야생마. 새끼의 구출이 불가능함을 깨닫자 노예의 삶 대신 죽음을 안기는 어미 여우의 모성. 그들 모두가 진정한 동물 영웅이라고 할만하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로보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여우는 눈물 흘릴 필요가 없으며 야생마도 자유롭게 평원을 달릴 수 있었으리라. 아름다운 메추라기도 총탄에 숨이 끊어질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들이 문명이라는 명분으로 자신의 생활 영역을 확장하여 자연의 경계를 침범할수록 야생은 위축되고 멸절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렇게 보면 야생 동물의 삶을 더욱 비극으로 만든 것은 인간의 존재라고 하겠다. 동물 이야기를 읽으면서 갖게 되는 양가적 감정이 더욱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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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여행 -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신들의 이야기
최순욱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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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앞서 읽은 <에다 이야기><북유럽 신화>는 전자는 원전이고, 후자는 현대적으로 재구성된 신화 이야기라는 각자의 미덕이 있다. 다만 북유럽 신화를 더 깊이, 더 넓게 이해하고 싶은 독자로서는 다소간 아쉬운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무척 시의적절하다. 저자의 약력을 보면 의아하지만 지적 호기심에 충만한 열정적 아마추어리즘의 산물은 건조한 프로페셔널보다 대중성과 흡인력에서 대체로 우위에 있다고 언급하고 싶다. 오히려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가려운 점을 적절히 잘 긁어주고 있다라고.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평설이라는 점이다. 산문 에다와 운문 에다를 고루 활용하여 북유럽 신화의 전반을 훑고 있으며, 전체로서 신화의 일관된 틀과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세계의 창조에서 라그나뢰크로 이어지는 신화의 선형 체계를 존중하되, 그리스 신화 또는 인도 신화 등 타지역의 신화도 소개하고 비교함으로써 보편적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한 신화의 현대적 변용이라는 관점에서 일본의 판타지 소설과 공상과학 애니메이션에 깃든 북유럽 신화의 요소도 건드리고 있다. 북유럽 신화의 초심자, 그리고 심화 이해를 희망하는 독자에게는 유용한 책이다. 후반부에는 북유럽 신화의 파생으로서 반지 이야기도 함께 다루고 있는데, 게르만 부족의 내부적 다툼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는 이 제재가 지니는 중대한 의미와 함께 라그나뢰크로 이어지는 신호라는 설명을 읽으면서 과거에 일독은 단지 겉핥기에 불과했음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미처 간과했던 인상적인 몇 가지 사항을 검토해본다.

 

아스가르드의 신은 아제 신족과 바네 신족의 혼합이다. 뇨르드와 자식인 프레이야, 프레이르는 바네 신족에 속한다. 두 신족은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지만 승패를 가리지 못한 채 평화조약을 맺고 하나가 된다. 이는 책에서도 지적했듯이 서로 다른 신을 섬기던 집단 간의 융합 과정을 신화화한 것이니, 우리네 단군신화에서 곰과 호랑이도 동일한 의미다.

 

북유럽 신화에서 거인은 신과 대등한 지위와 능력을 지닌다. 토르의 활약이 없었다면 아스가르드는 진작에 거인들에게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오딘과 지혜 대결을 벌인 바프투르드니르, 토르 일행을 농락한 우트가르드-로키만 보더라도 그들의 지혜 또는 힘은 참으로 막강하였다. 이런 거인들이 신들-엄밀히는 토르에게 쉽사리 제압당하는 것은 당대인의 소망이 반영된 결과라는 비평은 함의가 매우 깊다.

 

이렇게 강력한 거인들이 왜 비슷한 능력을 가진 신들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는 걸까. 이것은 고대 북유럽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북유럽 신화의 거인들은 북구의 혹독한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다. (P.363)

 

이에 따르면 망치 묠니르를 휘두르는 토르는 단지 싸움꾼 천둥 신이 아니다. 토르가 죽인 거인은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거친 자연의 형상화이며, 따라서 토르는 농업의 신이요, 농부의 수호자”(P.79)라는 점이 흥미롭다.

 

토르 못지않게 로키에 대한 해석 역시 관심이 쏠린다. 로키가 아스가르드에 머물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책에서는 로키를 불의 신으로 설명한다. 불은 인간에게 매우 유용하지만 잘못될 경우 전부를 불살라버리는 양면성을 가진 존재다. 아스가르드에 필요하지만 위험한 존재인 로키와 동질성을 지닌다. 저자는 트릭스터의 관점으로 로키를 설명한다. 로키는 아제 신들과 함께 지내지만 그의 본성은 거인이다. 신과 거인은 존재론적으로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볼 때, 로키는 언젠가 신들을 배반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봐야 한다.

 

로키는 불의 신이면서도 불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로키가 종종 들불이라는 뜻의 로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도 짐작이 갈 것이다. 로키가 불의 신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있으면 앞장에서 설명한 로키의 성격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P.132)

 

이 책에는 앞선 책들에서 간과하거나 깊숙이 다루지 않은 이야기들이 여럿 있다. 앞서 소개했던 오딘과 지혜 대결을 벌인 바프투르드니르, 인간의 신분을 만든 헤임달, 신과 결혼하려다 목숨을 잃은 난쟁이 알비스, 브리징아멘을 갖고자 하는 욕망에 굴복하여 난쟁이들과 밤을 보낸 프레이야 이야기는 흥미로운 동시에 완전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신들의 일면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예전에 <니벨룽겐의 반지>를 읽었지만 단지 독일 중세의 전설 또는 서사시 정도로만 이해하였다. 이제 북유럽 신화의 시각에서 반지 이야기를 바라보니 전체적 구도와 저작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옴을 이해할 수 있다. 게르만 일부 종족에서 벌어진 갈등과 분쟁, 그리고 몰락 정도가 아니다. 북유럽 신화사에서 라그나뢰크의 전조이다.

 

뵐숭 가문과 니플룽족, 그리고 훈족과 구드룬이 벌이는 혼돈으로 가득한 핏빛 이야기는 이제 곧 라그나뢰크가 일어날 것이라는 신호에 다름 아니다. (P.449)

 

신과 거인의 대립, 아스 신들과 로키의 갈등, 그리고 이어지는 발더의 죽음으로 인한 혼란은 어디까지나 아스가르드와 요툰헤임에 국한된다. 세계 전체를 뒤흔들 대사건이 되려면 인간들의 세상, 즉 미드가르드조차도 살육과 배반, 혼돈으로 뒤섞여 세상의 정화가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것이 신화와 전설, 역사가 혼재된 반지 이야기가 라그나뢰크에서 갖는 의미라고 하겠다.

 

라그나뢰크는 절대로 사악하거나 어두운 것이 아니다. 물론 밝은 것도, 선한 것도 아니다. 라그나뢰크에는 그저 창조와 죽음이 하나로 얽혀 있을 뿐이다. (P.497)

 

파괴를 통한 창조, 창조를 위한 파괴. 이것이 라그나뢰크다. 타락한 세상을 태초의 불꽃 거인 수르트르의 불로써 정화함으로써 이제 신과 거인의 시대는 끝났다. 물론 신들의 후예는 잔존하였지만 그들은 더 이상 불멸의 존재로서 권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후 세계는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시대로 변모할 것이다. 오딘과 프레이야가 대비했지만 막지 못했고, 토르와 로키조차도 벗어나지 못한 운명의 굴레. 독자의 안타까운 심정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바퀴는 거스를 수 없음을 북유럽 신화는 뚜렷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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