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을유세계문학전집 105
알베르 카뮈 지음, 김진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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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읽는다. 아련한 기억에 따르면 당시 나는 이 작품을 옳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아직은 세상사를 이해하기 위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여 이름값에 휩쓸린 매우 표피적인 감상에 불과하였다. 지금은....? 의외로 생소하거나 이질적인 요소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뫼르소의 사고와 행동, 그에 대한 사형판결이 대체로 이해된다고나 할까.

 

나는 그렇기는 하지만 실상은 그런 게 나한테는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다고 말했다......나는 결코 인생을 바꾸지는 못하며, 아무튼 모든 인생이 가치있고, 여기서의 내 인생도 전혀 마음에 거슬리지 않는다고 답했다......내 인생을 변화시켜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P.54)

 

뫼르소는 타인과 굳이 관계를 맺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자기 자신의 일상생활에만 관심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발전시키거나 반추하는 모습은 없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그의 덤덤한 태도, 마리의 결혼 의사에 대한 그의 건조한 반응. 그렇다고 그를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삶에 특별한 매혹과 애정을 지니지 못한 그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노력이다. 단조롭지만 평온한 일상의 안분지족과 허무주의적 삶의 태도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그는 휘청거리고 있다. 그는 선구적인 현대인이다.

 

타인의 죽음이, 어머니의 죽음이 나한테 뭐가 중요해요? 당신의 하느님이나 사람들이 선택하는 인생, 그들이 고르는 운명이 나한테 뭐가 중요해요? (P.143)

 

뫼르소의 현대인으로서의 특성이 요즘이라면 그런가 하고 수용되겠지만, 이 작품이 발표된 1940년대라면 사정이 다르다. 전통적, 기독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뫼르소는 별종이자 이단이다. 뫼르소의 생각과 행동은 사회 구성의 근본을 뒤흔드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의 반응에 대해 예심판사와 검사가 예민하게 반응하고 격렬하게 추궁하는 사유는 분명하다. 썩은 싹을 초기에 도려내지 못하면 전체로 퍼져나가 걷잡을 수 없이 되리라는 것을 그들을 본능적으로 예감한다. 아랍인의 살인 자체는 오히려 경미하다. 그의 반사회적, 반기독교적 가치관이 더욱 중죄다. 뫼르소에 대한 사형판결은 이로써 정당하다.

 

저 인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은 마음의 공백이 하나의 심연이 되어 사회가 궤멸할 수 있을 때에는 특히 그러합니다. (P.122)

 

내가 한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규칙들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사회와는 아무런 유대가 없으며, 또 내가 인간 심성의 기본적인 반응조차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따를 줄도 모른다고 그는 공언했다. (P.123)

 

뫼르소는 햇빛 때문에 살인을 하게 되었다고 해명한다. 이 무슨 생뚱맞은 터무니 없는 변명이란 말인가? 당대 사람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그의 주장을 배척한다.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기에. 독자라면 그의 해명에 타당성이 있음을 수긍하게 된다.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햇빛은 의식의 명료성, 이성의 합리성을 흐물거리게 한다. 그 순간 무언가에 의한 번뜩임과 충동적인 선택은 사후에 제아무리 뒤돌아봤자 설명은 요령부득이다. 뫼르소로서도 햇빛 외에 다른 사유를 대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 내리쬐는 햇빛은 강렬한 생명의 의지인 동시에 그 작렬하고 파열하는맹렬함으로 인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자 동시성을 지닌 존재다.

 

2부는 법정 드라마로서 제1부보다는 훨씬 흥미진진한데, 당대 프랑스의 사법제도의 허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검사와 변호사가 주고받는 공방전을 떨어져서 바라보는 뫼르소의 태도는 청중 및 독자와 다름없다. 법정은 뫼르소와 뫼르소가 저지른 살인 자체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다투는 뫼르소는 뫼르소에서 타자화된 다른 뫼르소다. 재판에서 중요한 것은 뫼르소의 부도덕성이다. 장례식장에서 카페오레를 마시고 담배를 피운 것처럼 당대의 관습이나 도덕률에 위배된 행동을 한 그 자체가 되돌릴 수 없는 중죄의 증거로 제시된다.

 

나는 엄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담배를 피웠다, 나는 잠을 잤다, 나는 카페오레를 마셨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뭔가가 법정 전체를 술렁이게 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내가 유죄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P.108-109)

 

뫼르소는 항소를 포기한다. 항소로 구할지도 모르는 구차한 삶에 큰 의미를 갖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신부의 면담도 거절한다. 종교는 자체의 독선성으로 그에게 특정 가치관을 강요하므로 그는 결코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가 신부의 옷깃을 거머쥐며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 대목은 웅변적이다. 이렇게 뫼르소는 사회와도 종교와도 타협을 거부한다. 그에게 남은 길은 오로지 사형집행, 즉 죽음뿐이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이야말로 처절할 정도로 솔직하고 진실한 영혼 아니겠는가.

 

사형 집행보다 더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요컨대 그가 정말로 한 인간의 이해관계가 걸린 유일한 관심사다는 걸 어째서 나는 몰랐단 말인가! (P.131)

 

내게 남은 일은 나의 사형 집행일에 구경꾼이 많이 와 주기를 바라는 것, 그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 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P.145)

 

이 작품에서 유독 주목되는 인물이 있는데 법정 안의 젊은 기자다. 그는 재판 내내 그를 주시하는데 사형판결이 확정되는 순간에 그를 외면한다. 뫼르소는 그 기자에게서 자신의 분신 같은 인상을 받는데, 또한 작가 자신의 분신이기도 하다. 카뮈가 기자 출신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자. 법정이 어떻게 흘러가든지 작가는 뫼르소를 이해하고 있음을 기자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이 책은 소설 본문 외에 50면에 가까운 방대한 주석을 추가하고 있다. 단순한 부가 설명에 불과한 예도 있지만 작품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깊이 있는 해석을 추가하고 있어 매우 유익하다. 또한 40면에 이르는 풍부한 작품해설도 새삼 독자가 이 작품의 심층적 이해를 할 수 있도록 제공한다. <이방인>같이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라면 매우 유용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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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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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만에 <햄릿>을 다시 읽는다. 몇가지 스치는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해 본다.

 

‘To be or not to be’의 해석

 

죽느냐 사느냐라는 해석으로 워낙에 친숙하다. 엄밀히 말하면 순서를 바꾸어 사느냐 죽느냐가 올바르겠지만. 옮긴이는 다르게 해석한다, ‘있음이냐 없음이냐’(3막 제1, P.94). 주석을 통해 자신이 왜 존재론적 해석을 하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부기한다.

 

이 대사를 읊조릴 당시의 햄릿의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 유령이 알려준 덕분에 햄릿은 부왕 사망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은폐하기 위해 미친 척한다. 그럼에도 한가닥 의혹이 여전한데 유령의 말이 진실성에 대한 확신이다. 햄릿은 연극을 통해 왕의 반응을 알아보려고 준비한다. 그리고 제3막에서 이러한 대사를 내뱉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도 엉뚱한 해석은 아니다. 바로 이어지는 장문의 대사는 죽음을 가벼이 여겨야 함에도 죽음의 두려움으로 그러하지 못함에 대한 비판과 자기 각오를 담고 있다. 햄릿은 철학자가 아니다. 극중 대사와 행동을 보면 그는 매우 재기발랄하고 해학적이며 연극에도 조예가 깊으며 오필리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다정다감한 성격의 인물에 가깝다. 그런 그가 갑자기 생뚱맞게 존재론적 철학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위 대목을 존재론이 아니라 행동론으로 시각을 보는 게 현실적이다. 계획한 연극으로 유령의 증언의 진실을 확인했을 때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진실을 알면서도 그대로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고 행동으로 나설 것인가의 문제.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왕자의 지위를 유지하고, 다음 왕의 자리에 올라설 수 있다. 오필리아와의 사랑도 결실을 이룰 수 있다. 반면 행동에 나서면 이 모든 걸 잃게 되며 자신의 목숨도 버려야 한다. 즉 이 대목이 포함된 햄릿의 전체 대사는 자신의 행동 선택에 대한 갈등을 내포한다.

 

2. 햄릿은 우유부단한 인물인가

 

흔히들 햄릿형과 돈키호테형으로 인물의 성격을 양분할 때 햄릿형은 신중하지만 우유부단하다고 인식한다. 이 작품에서 과연 햄릿은 우유부단한 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초반부터 햄릿은 우울하게 등장한다. 부왕을 잃고 어머니가 삼촌에게 재혼한 그의 처지에서는 기쁠 일이 없으리라. 행동파라면 유령의 말만 믿고 바로 왕을 살인할 수도 있다.

 

햄릿은 보다 확실한 증거를 갖길 바란다. 자기의 모든 것을 내걸어야 하는데 섣불리 유령의 말만 신뢰할 수 없다. 유령이 악마의 변신일지도 모르니. 연극의 반응으로 햄릿은 왕의 불의를 확신한다. 마침 왕이 홀로 기도할 때 그를 죽일 수는 기회가 찾아왔지만 햄릿은 실행하지 않는다. 기도 중에 죽이면 그가 천당으로 가게 될까 우려해서다. 그가 결코 구원받지 못할 때를 노려서 죽여야 비명에 가서 저승을 헤매는 부왕의 복수에 적합하다. 매우 신중하고 사려깊고 주도면밀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너무 앞뒤를 잰다고 여길 수도 있다. 햄릿 또한 스스로를 책망한다.

 

(햄릿) 잔인하고 음탕한 악당! 아니, 이 무슨 못난이란 말이가! , 참으로 장하다. 고귀한 부친이 살해당한 아들, 천국과 지옥으로부터 복수를 재촉받은 내가 창녀처럼 말로만 내 가슴을 비우고, 순 잡년 잡놈처럼 저주를 퍼붓다니! 역겹구나! ! (2막 제2, P.87)

 

(햄릿) 헌데 이 무슨 짐승 같은 망각인지, 혹은 결과를 너무 꼼꼼하게 생각하는 비겁한 망설임인지 그 생각을 쪼개봤자, 반에 반만 지혜이고 나머지는 비겁함이겠지만 난 내가 왜 이건 하리라고 살아 말하는지 모르겠다, 해치울 명분과 의지, 힘과 수단이 있음에도. (4막 제4, P.149)

 

햄릿과 반대적 인물은 레어티즈다. 그는 자신의 부친 폴로니어스가 죽음을 당하자 추종자들을 이끌고 성을 급습한다. 왕에게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하고 허튼수작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부친을 죽인 인물이 햄릿을 알게 되자 그를 죽이기 위해 수단의 정당성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레어티즈가 극중에서 마구 날뛰는 인물이 아니므로 그의 이런 과감성 내지 저돌성은 햄릿과 대비된다.

 

(레어티즈) 허튼수작 마라고. 충성 따윈 지옥으로! 맹세는 흑마왕에게! 양심과 은총, 저 끝없이 깊은 구덩이로! 저주도 불사하리. 내 입장은 이렇다. 이승 저승 상관않고 무슨 일이 닥치든지, 철두철미 아버님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그 말이다. (4막 제5, P.157)

 

3. 왕비가 시동생과 재혼한 까닭은 무엇일까

 

부왕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햄릿을 더욱 비통하게 만든 것은 어머니 왕비가 불과 두 달만에 시동생인 왕과 재혼한 행위다. 원시부족의 형사취수제도 아닌데 이러한 선택은 기독교 국가에서는 인정받기 어려운 근친상간 행위다. 햄릿의 통렬한 비난도 무리는 아니다.

 

(햄릿) 아니, 그녀가 - 오 하느님, 이성 없는 동물이라 할지라도 더 오래 슬퍼했으련만 헤르쿨레스와 내가 다르듯이, 아버지완 생판 다른 내 삼촌 아버지의 동생과 결혼했어. 한 달 안에, 쓰라려 불그레한 그녀의 눈에서 가장 부정한 눈물의 소금기가 가시기도 전에 결혼했어 오 최악의 속도로다! 그렇게 민첩하게 상피붙을 이불 속에 뛰어들어! (1막 제1, P.25)

 

여기서 왕비의 선택을 헤아려 보자. 극중 햄릿의 나이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인다. 5막 묘지 장면에서 유추할 수 있는 나이는 삼십인데 이는 지나치게 많아 보인다. 어쨌든 햄릿의 나이로 보건대 왕비는 사십대 후반 정도일 텐데 미모로만 보자면 클로디어스가 굳이 형수와 결혼을 추진할 이유가 없다. 왕비 또한 새삼 정욕에 불타오라 도덕률을 어기면서까지 무리한 재혼을 감행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당시 덴마크의 왕위는 세습제가 아니라 선출제였다고 한다. 5막 제2장에서 햄릿은 자신이 국왕 선출에서 낙마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햄릿이 삼촌을 더욱 싫어했는지도 모르겠다.

 

(햄릿) 자네 생각엔 내가 이제 내 임무로서 선왕을 시해하고 어머닐 더럽혔으며, 내가 희망했던 국왕 선출에 불쑥 끼고, 내 목숨을 노리고 그 따위 속임수로 낚시를 던진 놈을 이 손으로 빚갚음이 양심상 떳떳하지 않겠어? (5막 제2, P.192)

 

덴마크 국민과 신하가 그를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여 충성을 바치는 모습, 그리고 극중에 보이는 그의 올바른 국정 판단을 보건대 햄릿과 유령이 말한 대로 클로디어스가 그렇게 형편없지는 않다. 어쨌든 햄릿의 세력은 미미했고 클로디어스가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여 왕으로 선출되었다. 왕비 입장에서는 통탄할 일이다. 가족이 따로 언급되지 않는 걸 보면 클로디어스는 홀몸이다. 햄릿을 그의 유일한 아들로 만들면 다음 후계자 자리는 확고해진다. 클로디어스 처지에서도 전왕의 아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면 지위가 한층 공고해진다. 왕이 자신의 후계자가 햄릿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행위가 이를 입증한다. 왕이 햄릿을 제거하려고 계책을 꾸민 것은 햄릿이 자신의 지위를 불안하게 하는 행동을 하면서부터다. 한편 햄릿으로서도 슬픔과 불만은 있지만 이미 짜여진 판을 차마 뒤집지는 못하였다. 유령의 개입이 없었다면.

 

() 바라건대, 무익한 비통을 땅에 던져버리고 나를 아버지로 생각해라. 왜냐하면 온 천하에 알리노니, 왕자가 내 왕위 계승자요,......내 격려와 위안 속에 나의 최고가는 중신이요 조카이며, 내 아들로서 여기에 머물기 바란다. (1막 제1, P.23)

 

4. 오역 ?

 

아래 문장에 따르면 부왕은 그리 훌륭한 왕이 아님을 햄릿 자신이 인정하는 꼴이 된다.

 

(햄릿) 아니, 이건 청부 살인이지 복수가 아냐.

놈은 아버지를 그가 육욕에 푹 빠지고

모든 죄악이 활짝 핀 오월처럼

싱싱할 때 앗아갔다. 그리고 하늘말고

그의 벌이 어떨지 누가 아랴? (3막 제3, P.125)

 

인터넷에서 찾아 본 원문은 이러하다.

 

O, this is hire and salary, not revenge.

He took my father grossly, full of bread,

With all his crimes broad blown, as flush as May;

And how his audit stands, who knows save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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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정글 - 세계의 숨은 걸작 1 : 영국 높은 학년 동화 22
존 로 타운젠드 지음, 정지인 옮김, 윤봉선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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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에 등장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극단적이다. 기본적으로 주인공의 보호자 역할을 담당하는 어른은 대체로 무기력하고 무능하며 무책임하기 일쑤다. 아이들을 학대하지 않으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렇다고 주인공 청소년이 혼자만의 힘으로 모든 난관을 헤치고 사건을 해결하며 해피 엔딩을 이루지도 못한다. 도중에 인정 많고 능력 있는 어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동화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팽개치고 집을 떠나버린 월터 삼촌과 도리스 아줌마가 그러하며, 딱한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돕기 위해 헌신하는 토니 목사님과 실라 선생님, 그리고 밥 삼촌이 또한 그러하다.

 

그럼에도 이 동화의 주인공은 아이들이다. 케빈과 샌드라 오누이와 친구 딕이 그러하다. 케빈 남매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을 때도 어린 사촌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들의 아빠조차도 감히 해내지 못한 행동이다. 케빈은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고, 다른 도시를 홀로 헤매며 밥 삼촌을 찾는다. 샌드라는 홈스테드를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그리고 동생들을 돌보는 책임을 오롯이 감당한다. 딕은 친구를 위해 아낌없는 헌신과 희생을 감내한다. 어린 그가 검블 선착장에서 플릭 일당과 홀로 맞서는 대담함과 용기는 어른들조차도 따라 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다.

 

화사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사실 정글은 화사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낡고 지저분한 동네여서 시청이 철거해 버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 전에 저절로 무너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P.6)

 

객관적으로 케빈네 가족은 가난하다. 일단 그들이 사는 곳인 정글에 대한 서두의 소개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조만간 철거가 진행돼도 이상하지 않을 동네. 월터 삼촌이 가출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삶이 넉넉하고 윤택하지 못했음을 작가는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은 비록 이것에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취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독자의 눈에는 안쓰럽게 비칠 따름이다.

 

나도 사실은 건강한 편이다. 하지만 비쩍 마른 데다 안색이 창백하고 피곤해 보인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좋은 옷도 아니었기에 목사님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P.87)

 

나는 목욕을 하고 난 뒤 토니 목사님의 가운을 입고 앉아서 베이컨과 계란 두 개를 먹었다. 그때까지 그렇게 먹어 본 건 처음이었다. 백만장자가 된 기분이었다. (P.187)

 

케빈 일행을 위험에 몰아넣고 작품에 극적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은 플릭 일당이 맡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어정쩡하게 월터 삼촌도 개입하지만. 케빈과 딕, 그리고 플릭 일당의 만남은 검블 선착장의 아지트에 홈스테드를 구축할 때 이미 암시되었고 막판에 광포한 범죄 현장으로 증폭된다. 여기서 작가의 교묘하게 짜 맞춘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우연이지만 전혀 우연이지 않게 보이는 기술이란. 반면 동화의 특징인 우연적 요소도 나타나는데, 케빈이 밥 삼촌을 우연히 만나는 대목이다. 갖은 고생에도 찾지 못한 삼촌을 정말 뜻하지 않게 마주친다는 설정은 아무래도 무리일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은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가족 소설이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될 상황에서 아이들의 선택은 어떻게든 가족을 유지하고자 한다. 비록 그것이 험난하고 힘겨운 노력을 요구하더라도. 우여곡절 끝에 가족은 재회하고 원래의 삶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해럴드의 입장이 된다면 누구라도 그의 심정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친부가 자신을 버렸다는 상실감과 아픔을. 작아서 쓰지 못하는 헬멧을 챙기고 싶은 이 아이의 마음을 누구라도 탓할 수 없다.

 

나는 더 이상 짜증을 낼 수 없었다. 해럴드는 정말로 마음이 상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나보다는 해럴드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자기 아버지가 자신을 두고 사라져 버린 것이니까. (P.65)

 

이 작품은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극한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상황을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 비록 고달프지만 이런 경험으로 그들은 아이에서 청소년으로 성장하게 된다. 케빈과 샌드라의 책임감을 보면 확실히 알게 된다. 특히 케빈이 위험 상황에서 자신의 두려움과 싸우는 대목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누구나 공감하게 된다. 개인의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 용기를 낸다는 것은 어른조차도 쉽지 않아서다.

 

나는 다시 커낼 가를 달려가다가 공터를 사이에 두고 오두막이 마주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거기서 멈춰 섰는데, 심장이 쿵쾅대고 다리에서 힘이 쭉 빠졌다. 내가 계속 가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안의 비겁함에 화가 났다. 딕이라면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나 자신을 꾸짖었다. (P.172)

 

작품의 끝은 케빈, 샌드라와 딕이 걸어가면서 티격태격하는 장면이다. 낯설지 않은 게 작품 초반과 똑같은 문장을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다. 작가의 자기표절 또는 실수인가? 여기서 작가의 세심한 의도를 발견한다. 세 명의 아이들의 모습은 사건 전후로 무관하게 처음이나 끝이나 동일하지만, 그때의 아이들과 지금의 아이들은 사정이 다르다는 것을 작가는 보여주고 싶었을 거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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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 개정판
김훈 지음 / 푸른숲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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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김훈 작가의 글을 읽는다. 작가 특유의 문체와 표현 양식이 반갑다. 그는 비루한 일상을 정면으로 다루되 비루하지 않게 만드는 특이한 마력을 지녔다. 그는 평범한 나날과 순간에서 비범한 의미를 찾고 되새김질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이 모든 게 다른 작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김훈만의 것이리라. 그래서 오늘도 이 작가에게 흠뻑 빠진다.

 

이 소설의 화자는 사람이 아닌 개다. 개만큼 인간에게 친밀한 동물이 있을까. 개똥에서 상팔자까지 광활한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개에 대한 평가. 너무 가까운 나머지 천대와 애정의 경계선을 무시로 넘나드는 이 존재만큼 인간을 잘 아는 동물도 없다. 그래서일까 개가 지켜보고 증언하는 인간의 모습은 흥미와 아울러 약간의 두려움마저 예감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눈치가 모자란다. 사람들에게 개의 눈치를 봐달라는 말이 아니다. 사람들끼리의 눈치라도 잘 살피라는 말이다......

개의 말이 너무 건방졌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내 입을 틀어막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P.34)

 

비록 개를 화자로 내세웠지만 어디까지나 사람이 쓴 글이니 개의 마음을 오롯이 전할 수는 없다. 결국 이 글은 사람의 시각과 사고에서 쓴 글이다. 독자 입장에서 다소간 기분이 안 좋더라도 개가 평한 문장이 아니라 작가가 그렇게 썼으려니 너그럽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개는 후각과 청각이 인간보다 뛰어나다. 개에게 후각은 시각의 상위 호환성을 지닌 감각이다. 정체가 모호한 물체도 후각을 통해 비로소 의미가 개에게 다가온다. 우호적인가 적대적인가, 맛있는지 역겨운지 여부가 명확해지는 것이다. 그런 개에게 인간의 냄새는 어떻게 다가올까.

 

사람의 몸 냄새 속에 스며 있는 사랑과 그리움과 평화와 슬픔의 흔적까지도 그날 모두 알게 되었다. 그 냄새는 모두 사랑받기를 목말라하는 냄새였다. (P.42)

 

주인님 몸에서 나는 경유 냄새는 고단하고도 힘찬 냄새였는데, 어딘지 쓸쓸한 슬픔도 느껴졌다. 나는 그 경유 냄새를 아침바다의 차갑고 싱싱한 안개 냄새보다 더 사랑했다. 그것은 일하는 사람의 냄새였고, 내가 지키고 따르고 사랑해야 하는 냄새였다. (P.72)

 

개는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이기에 개의 희로애락은 인간의 그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개도 동일하게 느낄까. 미처 젖을 떼기도 전에 형제와 그리고 어미 개와 이별할 때 강아지의 심정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살던 고향 집이 한순간에 수몰되어 집도 절도 없이 나앉게 되었을 때 밭고랑에 주저앉아 울고 우두커니 서서 담배만 피우던 노인네의 심경을 개도 공감하려나 알 수 없다.

 

인간과 개가 상호 간에 친밀한 존재라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개가 인간에 더욱 의존적이다. 개 없이 인간은 살 수 있지만, 인간 없이 개는 살아갈 수 없다. 야생화된 개는 더는 개가 아니며 단지 인간의 적일 뿐이다. 인간은 개를 경시한다. 개의 고마움과 가치를 올바르게 인정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귀여워하고 용도가 다하면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친다. 시골에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와 유기견센터에서 보호 중인 수많은 개를 보면 반박하지 못하리라. 애완견입네 반려견입네 하며 물고 빨고 하지만 조금만 귀찮아지면 짐스러워한다. 개 중에서 사랑하는 주인 곁에서 평화롭게 일생을 마치는 숫자가 과연 얼마나 될지 의심스럽다. 개들의 최후는 항상 비극적이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보리의 어미와 형제, 짝사랑하던 흰순이, 그리고 생사를 건 싸움을 벌였던 악돌이도 그러하며, 무엇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보리의 장래도 불투명하다. 버림받은 존재로서 보리의 남은 삶은 어떻게 흘러갈지 우울과 슬픔이 교차한다.

 

내 마지막 날들은 며칠 남지 않았다. 할머니가 떠나면 나는 어디론가 가야 할 것이다. 어디로 가든 거기에는 산골짜기와 들판, 강물과 바다,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 새벽안개와 저녁노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세상의 온갖 기척들로 내 콧구멍은 벌름거릴 터다. (P.221)

 

어디 개뿐이겠는가. 보리의 가족들, 보리가 함께 생활한 주인네의 삶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다. 수몰되어 고향에서 내몰린 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가난한 어부로서 근근이 살다가 파도에 휩쓸린 주인아저씨. 생계를 위해 보리를 버리고 도시로 떠나야 하는 남편과 아빠를 잃은 주인네 가족. 사람조차도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개의 처지에 그게 가능하겠는가. 사람이나 개나 서글프고 고달픈 존재들이다.

 

내가 영수의 똥을 먹은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나는 사람의 몸속이 어떤 냄새와 어떤 느낌으로 차 있는지 알게 되었고, 그 따스함과 축축함과 부드러움을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람의 몸 안에 들어가서 한바탕 놀다 온 것처럼 사람을 환히 알 수 있게 되었다. (P.88)

 

똥을 먹는 똥개 취급받은 보리가 똥을 먹음으로써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면 똥을 먹은 보람이 있겠지만, 아기의 순수한 똥과 세파에 찌든 어른의 똥을 어찌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겠는가. 어른의 똥은 보리로서는 도저히 삼킬 수 없을 테니 진정한 똥개라야 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사람을 환히 알게 되었다고 자평한 보리조차도 죽음이라는 현상은 이해 불가능하다. 모든 생명체에게 있어 죽음이란 피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회피하고픈 것이며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러기엔 두려운 현상이다. 개도 죽음을 의식하면 개의 삶을 살아갈지 모르겠다.

 

주인님은 어디에 계시나. 주인님은 왜 땅속에 계시나.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럴 수는 없고 이럴 리가 없고 이래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P.189)

 

이 작품의 보리는 개의 탈을 쓴 사람이다. 개라면 흰순이를 향한 본능을 그렇게 억누르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개라면 진정으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보리는 사람의 아름다움에 홀렸다고 말하지만, 사람의 눈에는 개가 참으로 아름답고 순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개의 순수한 눈빛, 주인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고 불평을 늘어놓지 않는 순진함을 어찌 사람의 그것과 비교하겠는가. 그래서 보리를, 나아가 개를 생각하면 아련하다.

 

사람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개의 고통은 크고 슬픔은 깊다.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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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 속의 세계사 창비청소년문고 10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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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따분하기 마련인 역사를 청소년들에게 쉽고 재밌게 이해시키기 위한 여러 방안 중 하나는 흥미를 끌 만한 특정 테마를 가지고 역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책은 무엇보다 기획력이 매우 중요하다. 다음에 어떤 내용을 수록할 것인지 선별의 미학이 요구된다. 이 두 가지에 적절한 글솜씨가 더해진다면 성공은 거의 보장된 셈이다. 이 책은 의식주의 세계사기획물 중 옷을 주제로 한 책이다.

 

여기서 저자는 청바지, 비단, 벨벳, 검은 옷, 트렌치코트, 마녀의 옷, 바틱, 나일론, 비키니, 넥타이와 양복의 10가지를 별도의 장으로 나누어 소개한다. 옷 자체, 소재, 색상, 패션 등 광의의 의류 범위 속에 다양한 사례를 포함한다. 결국 저자가 관심 두는 것은 의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다.

 

청바지를 언급하자면 청바지가 탄생하게 된 계기인 골드러시를 소개하면서 이 현상이 미국사에서 갖는 역사적 의미, 나아가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난사를 함께 다룬다. ‘젊음과 자유, 저항의 패션 아이콘으로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청바지가 역사적으로 가슴 아픈 그러나 잊히기 쉬운 사연을 품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비단과 나일론을 통해서는 의류 소재가 인류 생활에 미치는 파급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비단길[실크로드]은 동서 문명교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나일론으로 대표되는 합성 섬유를 빼고서는 현대의 의생활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스타킹을 포함해서.

 

벨벳처럼 부드럽고 매끈하게 전개되었다고 붙여진 벨벳 혁명은 공산 체제의 암울한 시절과 민주화를 위한 유혈의 상흔을 들추어내며 인간을 배제한 이념의 맹목과 공허를 읊조린다. 비인간적인 전쟁을 위해 개발된 옷이 전후에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된 트렌치코트도 마찬가지다. 운치 있는 트렌치코트의 멋에 흠뻑 빠져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혹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상대방을 절멸시키기 위해 화학 무기 개발에 매진하는 국가 간 경쟁에서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지 반문해야 할 것이다.

 

펠리페 2세와 크롬웰, 그리고 잔 다르크를 다루는 장들에서 저자는 의류와의 직접적 연관성보다는 그들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발견하는 데 주력한다. 지도자의 자질과 태도의 중요성은 새삼스럽지 않으리라. 일국의 흥망이 결국 한 개인에게 좌우될 수 있다. 하나의 전설이 된 잔 다르크를 통해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게 됨은 슬프기조차 하다. 저자의 말마따나 마녀사냥은 오래전 과거지사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게 현대에도 방식을 달리할 뿐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역사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가해자가 피해자로 입장이 바뀌는 사례가 많다. 발리섬의 바틱을 소개하면서 인도네시아를 잔혹하게 지배했던 네덜란드가 오랫동안 스페인의 압제에 시달렸다는 역사적 역설. 식민 지배에서 독립을 쟁취한 인도네시아가 주변 섬들에 대한 강압적 지배를 일삼는 어처구니없는 현실. 일본 제국주의는 어떠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장본인 일본이 원자 폭탄 피해자임을 강조하며 가해자 신분을 은연중에 세탁하는 태도는 낯설지 않다.

 

비키니와 비키니섬, 그리고 핵 실험의 관계를 순차적으로 이끌어 나가며 저자는 핵폭탄이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아야 할 존재라고 단언한다. 나아가 원폭 투하의 정당성에 부정적 견해를 취한다. 여기서 나는 저자와 의견을 같이할 수 없다. 원폭 탄생의 부정에는 동의하지만, 원폭 투하의 정당성을 무조건 비난함은 옳지 않다. 핵폭탄의 피해자 다수가 민간인임은 안타깝지만, 현대전은 자체로서 군인과 민간인 구분 없는 비정한 총력전의 성격이다. 원폭 투하 없이 연합군이 조기에 전쟁을 종결지을 다른 방안이 있었는지 따져봐야 한다. 섣부른 원폭 비판은 스스로를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흉내 내는 일본 극우파의 논리구조와 동일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역사 서술에서 비판적 시각과 균형 잡힌 안목의 중요성은 이것이 독자에게 잘못된 믿음과 신념을 전달할 우려에서다. 특히 청소년 대상의 책인 경우는 더욱 유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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