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 길들이기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셰익스피어 전집 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도해자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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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길들이기>는 한바탕 우당탕하는 셰익스피어 초기의 희극이다. 한 성질 사나운 여성을 바람직한 사회 질서의 틀 내로 교화하는 내용은 당대에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한 의미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문학작품은 시대 풍조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부여받는다. 이 희극은 오늘날 변화된 인권 및 페미니즘 관점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로 논의되고 있다. 이 책의 옮긴이의 말작품 해설은 변화된 의미 부여를 잘 나타낸다.

 

비단 페미니즘이 아니더라도 이 작품의 몇 가지 내용은 비판받기에 충분하다. 당사자가 원치 않는 결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사회의 보편적 결혼관습이기에 그렇다 하자. 페트루치오가 밝힌 결혼의 목적은 비단 개인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담론이 필요한 사안이다.

 

(페트루치오) 돈만 많으면 페트루치오의 / 신붓감으로 충분해. 내 구애의 춤에서 / 장단을 맞춰 줄 수 있는 건 재산이지. (P.49, 12)

 

페트루치오에게 결혼은 순전히 재산 증식의 수단일 뿐이다. 여기에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이라는 오늘날 통용되는 보편적 의미가 개입될 여지는 없다. 21장에서 그가 카테리나의 아버지에게 결혼 지참금의 액수를 요구하는 장면 또한 이를 명확히 한다.

 

페트루치오가 아내 카테리나를 이른바 길들이는 방식 또한 논란이 될 만하다. 그는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자행한다. 음식 안 주고, 잠 못 자게 하며 친정에 못 가게 하는 등 일련의 행위는 요즘이라면 제아무리 가정 내라고 할지라도 가정폭력으로 고발당하기에 십상이다. 페트루치오가 카테리나를 길들이는 방식은 그가 스스로 내뱉듯이 매를 길들이는 방식이다. 동물을 대하는 방식을 자신의 아내에게 스스럼없이 적용했다는 점에서 그가 아내를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난다.

 

(페트루치오) 나는 내 소유물의 / 주인 노릇을 할 거니까. 신부는 내 물건이자 재산이죠. / 신부는 내 집, 내 가재도구, 내 들판, 내 창고, 내 말, / 내 황소, 내 당나귀, 그 무엇이 되었든 내 것이죠. / 이런 신부가 여기 있는데, 누구든 건드려 봐요. (P.101, 32)

 

남편이 아내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을 주장하고 이 주장이 인정되는 분위기가 바로 당대 사회이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자 일개 재산에 불과하다. 아내가 남편과 대등하게 맞선다는 생각은 용납될 수 없기에 교화가 필요하고 교화의 궁극적 목적은 차라리 본능이라고 할 정도의 절대적 복종이다.

 

(카테리나) 당신이 / 저것을 뭐라고 부르든 옳은 말이에요. / 카테리나에게도 항상 옳은 말일 거예요.

(호르텐시오) 페트루치오, 하고픈 대로 하게. 자네가 승리했군. (P.141, 45)

 

지적으로 뛰어나고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센 카테리나는 남자를 우습게 여기며 비혼주의자임을 선언한다. 그런 그녀가 별다른 저항 없이 페트루치오가 결혼하게 되는 까닭이 궁금하다. 그녀의 고집 정도라면 아버지의 강요쯤은 가뿐히 물리쳤을 텐데. ‘작품 해설에서는 페트루치오의 능력이 다른 남자들보다 그나마 우수하기 때문에 그녀가 타협책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석하는데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건 이미 카테리나의 주체성에 한계가 있음을 자인하는 꼴에 불과하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페트루치오와 결혼하면 앞날이 평탄하지 않을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며, 어차피 결혼할 거라면 한때나마 성질을 죽여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더욱 뛰어난 인물을 고르는 전략을 택할 수도 있다.

 

동생인 비앙카를 보라. 그녀는 극 중에서 여러모로 비앙카와 대비되는 빼어난 신붓감으로 칭송되며 여러 남자의 구혼을 받고 자신이 남편감을 선택한다. 비앙카는 환경을 직시하고 결혼 시장에서 자신이 우위에 설 수 있는 방안을 완벽히 실현한 얌전한 고양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자매 중 더 성공적 결혼에 도달한 사람은 비앙카이며, 이 점에서 그녀는 카테리나보다 뛰어나다.

 

남편에게 순종하게 길들여진 카테리나가 다른 여성들에게 남편에 대한 도리를 장문의 대사로 설파하는 52장은 이 희극의 일대 하이라이트다. 11장과 52장의 카테리나는 전혀 다른 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대목을 두고 옮긴이는 카테리나의 표면적 복종이 전략적 선택이므로 페트루치오의 외견상 승리도 환상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표면적 굴복 후 카테리나의 대사들에서 드러나는 과장과 익살, 그리고 남성 인물들을 겨냥한 조롱 때문이다. 카테리나의 복종은 오히려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P.5)

 

따라서 이 작품은 여성의 복종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절대적 순종은 남성의 환상에 불과한 허구임을 보여준다. (P.6)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초기작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페미니스트가 아님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옮긴이의 말작품 해설은 기본적으로 이 희극을 심오한 후기작과 동일하게 해석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극작품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인간 내면의 복합적 성격을 보여주며 사건과 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는 것이다. (P.173)

 

이 작품을 <맥베스><햄릿> 등과 동등한 수준에서 해석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 복합적 성격과 다양한 해석이라는 심화된 의미 부여는 과잉 해석의 우려가 크다. 카테리나의 불복종의 근거로 제시되는 마지막 대사의 과장과 익살은 당대 희곡의 전형적 특징이다. 이를 두고 내심 조롱한다고 볼 근거는 미미하다. 외형적 꾸밈이든 내면적 순종이든 카테리나가 페트루치오에게 굴복하였음은 사실이다.

 

작품 해설에서 슬라이와 카테리나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한 대목에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양자 모두 당대의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니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교화 역시 정당하다. 교화의 주체는 당연히 각각 영주와 남편이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당시 청교도들처럼 자신의 연극에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대거나 심각한 교훈이나 삶의 진리를 찾으려 하지 말고, 트라니오가 루첸티오에게 충고하듯, 지치고 긴장된 일상 삶에서 기분 전환을 위해 그리고 활기를 되찾기 위해 연극이 필요하며,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극을 즐겨 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P.178)

 

옮긴이는 작품 해설결말에 가서 갑자기 기존의 견해와 상치되는 해석을 내놓는다.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 따지지 말고 희극으로서 극 자체를 즐기라는 게 작가의 의도일 수 있다고. 서막의 슬라이가 재등장하지 않는 이유 또한 작품의 희극성에 충실한 작가의 의도적 설정이라는 해석을 다른 곳에서 인용하여 기술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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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피드의 날 미래의 문학 7
존 윈덤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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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도서관에 이 책이 있을 줄 예상 못 했다. 이 소설의 아동용 축약판의 효과 덕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원작이 아동용처럼 흥미진진할 활극일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은 완벽히 오판이다. 이 작품은 진지하다, 그것도 대단히. 서문에서 언급되었듯이 이 작품은 명상적이고 논설적인 특징”(P.9)이 작품 전반을 두드러지게 지배한다.

 

전반기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스페이스 오페라 계열이었지만, 후반기의 작품은 작가 스스로가 논리적 환상소설이라고 지칭한 것처럼 더 진지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P.521)

 

작품해설에서는 작가 존 윈덤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정리한다. ‘아늑한 파국의 대가라는 호칭은 그에 대한 비난인 동시에 칭찬이다. 20세기 중반 양 이념 체제 사이에 놓인 영국인의 불안 반영은 중산층이 최적이다. 하류층은 먹고사는 일에 당장 관계없으면 관심 두지 않으며, 상류층은 이따위 고민을 하기엔 너무 고상하고 남의 일에 불과하다. 오직 중산층이야말로 당대 사회의 불안과 모순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이 작품에는 인류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위협적 존재가 연달아 세 건이 나타나는데, 혜성(으로 인한 시력상실)과 전염병이 먼저 영향을 미친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괴멸적 파국은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철저히 절망적이지는 않다. 시력상실에 자포자기하여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살아남은 누군가는 있을 것이며, 그네들이 어떤 식으로든 생존을 영위할 것이기에.

 

저 끔찍하고 낯선 괴물들이야말로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어찌어찌 만들어 낸 것이었고, 또 우리 나머지가 무분별한 탐욕으로 인해 전 세계 각지에서 기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저놈들의 존재 때문에 자연을 비난할 수조차도 없는 일이었다. 저건 인간이 길러 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P.382)

 

반면 트리피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내고 활용을 위해 대규모로 인공 재배를 하는 식물이다. 사람은 산업적 목적을 위해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그것을 생산했는데 그것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암암리에 외면하였다. 당시에는 충분히 통제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으므로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인간은 항상 그렇게 오판한다. 자신이 모든 상황을 조절할 수 있다고, 신이 아님에도 신처럼 행동하며 신이 하지 않는 잘못을 저지른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확신하고 있는데, 그건 바로 저놈들이 위험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거야. (P.103)

 

눈멀고 전염병에 겨우 살아난 사람들은 더듬더듬 생존의 길을 모색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들의 눈앞에 트리피드가 등장한다. 작중의 트리피드는 영리하다는 점에서 매우 지능적이다. 그들은 사람의 약점이 어딘지 알며, 공격 기회를 노리며 엄폐할 줄도 안다. 그들이 돌기를 두드리며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 그리고 메이슨네 농장을 포위 공격하는 장면은 충격과 공포를 자아내는 압도적 실체를 드러낸다.

 

우리가 그놈들보다 더 우월한 특징은 단 하나뿐이지. 바로 시력이야.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지만, 그놈들은 볼 수가 없지. 우리가 시력을 빼앗기고 나면, 그런 우월함도 사라져 버리는 거야. 아니,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이 되겠지. 우리는 그놈들보다도 더 열등한 신세가 될 거야. 왜냐하면 그놈들은 시력 없는 생활에 적응되어 있는 반면, 우리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P.101)

 

전통적 법 규범과 사회체제가 송두리째 무너진다. 평화와 안전의 보장은 더는 불가능하다. 남은 식량을 두고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전개되고, 정상인과 맹인 간 지위의 우열과 역할 분담이 불가피하다. 과거와의 이별. 고통스럽지만 낯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이런 당혹감과 자괴감, 고통스러운 현실 인식은 작품 내에서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본 것들이 모조리 현실임을, 그리고 결정적임을 비로소 시인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결코 말이다. 내가 이제껏 알던 모든 것이 끝나 버렸던 것이고... (P.125)

 

아니에요. 이 세계는 끝장났어요. 그리고 우리만 남았어요...이제는 우리 나름대로의 삶을 도모해야만 해요. 도움의 손길이 결코 오지 않을 거라고 가정하고 계획을 세워야만 해요... (P.436)

 

사람은 어차피 혼자 살 수 없다. 살아남고 세대를 영속하기 위한 집단 형성이 필수다. 과거에 너무나 당연시하던 물자들을 이제는 없이 살거나 하나하나 직접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집단은 서서히 소멸할 것이다. 작품 내에서 윌프레드 코커와 듀런트 여사의 집단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거부한다. 그들은 단지 일정 시간 버티기만 하며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마이클 비들리 일행의 논리는 충격적이고 비도덕, 비윤리적으로 보인다. 그들의 주장은 코커와 빌의 귀에 낯설고 터무니없으며 부정의 하게 들린다. 코커는 이 집단을 깨뜨려버리며(나중에는 자신의 오판을 인정한다.) 빌은 현실적 타당성을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신네 무리가 애초부터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요. 다만 옳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고, 옳지 않은 것처럼 들렸을 뿐이지. (P.309)

 

인간화된 식물과 비인간화된 인간의 접점은 셔닝 농장을 접수하고자 하는 전체주의 집단에게서 확연히 드러난다. 누가 봐도 명백한 군사 독재적이며 봉건적인 농노제 발상은 인류가 기껏 수천 년 동안 힘겹게 쌓아 올린 인간 존중의 정신을 근본에서부터 전복한다. 오죽하면 차라리 트리피드가 낫다고 작중 인물이 토로하겠는가.

 

화자이자 주인공인 빌 메이슨은 틈나는 대로 생각과 사고에 빠져든다. 그는 졸지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혼자가 되었고 막무가내식 행동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해야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작품의 서두 또한 앞이 안 보이는 그가 주위 상황을 탐지하고 생각하고 추론하는 과정으로 시작한다.

 

빌과 조젤라를 포함한 사람들이 가장 당혹스러워한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낸 안정적인 사회체제가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일거에 무너져버렸다는 점이다. 만물의 영장이 발달시켜온 수준 높은 문명의 기반은 시력상실이라는 재앙 하나로 존속 여부가 불투명할 정도로 취약하였다는 점. 그래서 트리피드의 창궐에 변변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 이것들이 겹쳐 드리운 짙은 절망감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일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이거예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전하고 확실해 보였던 세상을 우리가 너무나도 손쉽게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거예요.”

조젤라의 말이 맞았다. 바로 그런 단순성이야말로 이번 일이 준 충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P.222)

 

이런 처지에 대해 하늘을 원망할 수 없음이 후반부에 빌의 입을 통해 언급된다. 이 모든 게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운명이라는 것을. 눈앞에 뻔히 위험이 닥쳐옴에도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와 같이 우리들이 행동 하였음을.

 

정확히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이제 아무도 모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내가 분명히 확신하는 게 하나 있어요. 어떻게 해서이건 간에, 이건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운명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전염병도 있죠. 그건 장티푸스가 아니었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P.472)

 

작품의 결말은 일변 전망적이다. 코젤라와 빌은 전략적 후퇴라는 표현으로 와이트섬으로의 자신들의 퇴각을 정당화한다. 언젠가는 다시 준비를 갖추고 돌아와 빼앗긴 땅을 되찾을 것이기에. 자신들이 못한다면 아이들이 아니면 아이들의 아이들이 대대적인 십자군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믿는다. 아마 믿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살아갈 의미와 희망이 남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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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신은 고양이와 10편의 옛이야기 - 논장 전래동화 3, 프랑스편
샤를 페로 지음, 구스타브 도레 그림, 김경온 옮김 / 논장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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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속의 공주, 빨간 모자, 장화 신은 고양이, 신데렐라. 모두가 동화책에서 또는 아동 만화영화로 친숙하게 접하여 이제는 진부하기조차 할 정도의 이야기들이다. 이런 동화들의 원작 원본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한다. ‘이솝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후대의 각색된 동화와 원작의 내용과 뉘앙스는 비교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페로가 쓴 11편의 이야기 중 전반부 8편은 산문, 후반부 3편은 운문이다. 작가는 산문 동화의 각 이야기를 교훈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동화 장르의 세속적 필요성에 부합하는 태도인데, 그 교훈이 항상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일치하지는 않음이 흥미롭다. 예컨대 푸른 수염에서 작가는 이 동화에 나오는 무서운 남편은 현실 세계에는 불가능하다, 지금은 오히려 부인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밝힌다. ‘신데렐라에서는 신데렐라의 매력을 마법으로 현실화하는 은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빨간 모자의 내용이 일반적인 결말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어 의외다. 비극으로 끝나는 빨간 모자도 그렇지만,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식인귀 출현이라는 전혀 뜻밖의 상황으로 흘러가 우리는 기껏 전반부에 밖에 알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아 물론 공주를 잠에서 깨우는 왕자의 입맞춤도 없다.

 

내용의 신비성, 다의성 못지않은 잔혹성으로 주목받은 푸른 수염은 여러 의문을 제기한다. 푸른 수염이 자신의 전처들을 죽인 이유는 무엇인지? 부인에게 열쇠를 주면서도 열어보지 말라는 푸른 수염의 의도는 무엇인지? 이브와 판도라를 상기시키는 유혹에 약한 여성에게 다시 유혹의 시험을 통해 그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장화 신은 고양이에서 우리는 당대의 엄격한 계급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공주가 잠에서 깨면 외로울까 염려되어 성안의 모든 사람을 거리낌 없이 함께 잠재우는 요정. 막내아들을 드카라바 후작으로 만들기 위해 농부들에게 무서운 위협을 자행하는 고양이. 양자 모두 사회적 하층민에 대한 경시 풍조가 암암리에 배어 있다. 그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백 년 후에 공주가 깨어날 때 낡은 성 안에서 홀로 얼마나 놀랄까 하고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요정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아세요?

요정은 마법의 요술봉으로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건드려서 마술을 걸었답니다. (P.18)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내 손에 조각조각 토막날 줄로 아시오. (P.73)

 

똑똑하지만 못생긴 리케가 잘 생기게 변하고, 아름답지만 멍청한 공주가 똑똑해지면서 이른바 흠잡을 데 없는 한 쌍으로 결합하는 고수머리 리케의 결론에 모두가 흡족하지는 않다. 사랑의 힘의 위대함을 찬미할 수 있지만 껄끄러움이 남는다. 왜 우리는 동생 공주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가? 동생 공주는 애초 리케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지만, 언니 공주의 극적인 변모와 행복한 미래가 두드러질수록 동생 공주의 존재감은 왜소해지고 이내 사라져버린다. 현실 세계의 독자 시각에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 흘리고 있을 동생 공주의 슬픔과 원망이 더욱 커다랗게 다가온다.

 

꼬마 엄지의 전반부는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와 유사하다. 원래 비슷한 이야기인지 그림 형제가 이 이야기를 모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자식을 죽이려는 꼬마 엄지네 부모와 꼬마 엄지 형제를 잡아먹으려는 식인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생존이라는 절실한 문제에 직면할 때 더 이상 가식은 불필요하다. 꼬마 엄지가 꾀로써 식인귀의 재산을 훔쳐 오는 장면 또한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만 이것 또한 현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젤리디스당나귀 가죽은 모두 고통받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고통을 가하는 주체가 남편 임금과 아빠 임금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그리젤리디스를 괴롭히는 남편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요새로 보면 전형적인 의처증에 해당하는데, 이를 묵묵히 견뎌내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그리델리디스의 순수하고 변함없는 마음은 물론 감탄스럽지만 사랑과 미움, 행복과 고통은 언제라도 한순간에 표변될 수 있다는 씁쓸한 진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당나귀 가죽신데렐라와 비슷한 전개 구조를 지닌다. 여주인공의 어려운 생활, 지저분하고 더러운 취급을 받는 외모, 그녀를 애타게 찾는 왕자, 그들의 사랑을 매개하는 유리 구두와 운명의 반지. 여기에는 가족관계의 근본적 결함도 내포한다. 전자는 계모와 전처소생 자녀의 갈등, 후자는 아빠의 딸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 그나저나 그렇게나 사랑하던 아내를 잃자마자 무슨 연유로 미친 듯이 재혼에 목매었던 아빠 임금의 속내가 궁금하다.

 

마법의 요정우스꽝스러운 소원들역시 그림 동화집에 볼 수 있는 해학적 소재의 얘기로서 양자 모두 말의 소중함과 신중함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옮긴이의 말처럼 페로 동화들은 친밀함과 생소함의 상반되는 느낌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대중적 동화와 만화의 서사의 원형으로서 오늘날은 자칫 진부하고 전근대적-특히 페미니즘 시각에서는-이지만 17세기 페로가 쓸 당시의 관점에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작가 자신의 서문은 재미와 교훈이라는 동화의 기본 정신을 강조한다. 요즘은 후자를 많이 경시하지만 전자만 가지고 오래 살아남는 동화는 없다. 부모의 입장에서 그런 동화는 필요가 없으므로.

 

구스타브 도레는 서사의 기저에 드리워진 어둡고 뒤틀린, 그러나 진실에 가까운 핵심을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재주를 지녔다. ‘꼬마 엄지에서 실수로 자기 자식을 죽이려는 순간의 식인귀의 얼굴은 압권이다. 다만 그의 음산하고 충격적인 삽화는 이게 과연 동화책에 적합한지 근본적 의문점을 제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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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 연발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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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The Comedy of Errors

 

번역본의 표제는 다채롭다. ‘실수 연발또는 실수연발외에 헷갈려 코미디’, ‘착오 희극’, ‘오해 연발 코미디’, ‘실수연발의 희극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극의 내용을 반영하면 실수보다는 오해 또는 착오가 더 적확한 표현이지만, 이로 인한 실수가 빚어내는 해프닝을 염두에 둔다면 실수라는 표현도 무난하다.

 

셰익스피어의 가장 초기작에 속한다. 전성기의 작가에게 발견할 수 있는 잘 짜인 구성과 개성 넘치는 인물, 긴장감 높은 극적 전개와 같은 요소를 동일하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작품을 무대에서 상연하면 쉴 새 없이 뒤바뀌는 인물들의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모습에 관객마저 머리가 얼얼해지고 말 것이다. 게다가 말장난과 더불어 때를 가리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기다란(무려 5면에 걸친다!) 농담을 주고받는, 특히 제2막 제2장에서 시라쿠사의 안티폴러스와 드로미오가 그러한데, 대목은 이 작품의 본질적 요소로서의 희극과 해학을 맛보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착오의 희극은 성립할 수 없다. 안티폴러스와 드로미오가 각각 쌍둥이라서 외모가 똑같다고 하지만, 살아온 지역과 환경이 다르므로 옷차림, 말투 및 태도 등이 분명히 구별될 터이므로 이렇게 등장인물들이 헷갈린다는 것은 지나친 설정이다. 다만 이 작품은 comedy. 표제에 대놓고 희극 또는 소극이라고 적시했으므로 작품도 장르에 충실하다. 여기서 독자는 희극 정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에서 팔짱을 끼고 지나치게 까탈스럽게 굴면 웃음은 사라지고 만다. 코미디는 어디까지나 코미디로 너그럽게 봐주고 웃을 심신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시라쿠사의 안티폴러스) 저분들은 /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모르겠어. / 저분들 말에 맞장구치면서 참아 보자. / 위험을 감수하고 안개 속으로 들어가 보자. (P.52, 2막 제2)

 

주변 인물들의 착오와 오해에 대해 두 명의 안티폴러스는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할 수 없어 어리둥절할 뿐이다. 특히 타지에 와서 모두가 아는 체하는 당혹스러움 가운데서도 혼돈을 부추기는 것은 시라쿠사의 안티폴러스의 모호한 태도다. 그는 아드리아나에 이끌려 함께 식사하며, 앤젤로가 전해주는 목걸이를 주저함 없이 받아든다. 그의 판단은 일단 상황에 따라가면서 지켜보자는 것인데.

 

(루시아나) 신과 같은 남자들은 여성들의 주인이요 / 지배자라는 걸 몰라? 만물의 영장으로 / 이 광활한 세상과 거친 바다의 지배자이며 / 물고기나 새보다 뛰어난 지성과 / 영혼을 타고난 인간이야. / 그러니 남자들 뜻에 따르는 게 좋아. (P.30, 2막 제1)

 

주인공들의 오인된 정체성에 기름을 붓는 것은 에베소의 안티폴러스와 아내 아드리아나 간의 불화다. 남편의 부정에 대한 의심에, 오해 연발로 인한 인물들의 배배 꼬이는 사건들로 부부 간 갈등은 증폭되고 서로는 상대방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품게 된다. 여기서 아드리아나의 비교적 평등주의적 부부관에 맞서 봉건주의적 부부 윤리가 강조되고 있는데 루시아나와 수녀원장은 여성의 복종을 강조한다.

 

시라쿠사의 드로미오의 희극 정신이 작중에서 유달리 돋보인다. 그는 안티폴러스와 틈날 때마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주인으로부터 농담이 지나치다고 핀잔을 들을 정도이다. 4막 제3장에서 보여주는 경관에 대한 풍자는 풍자가, 해학가로서 드로미오의 일면을 잘 드러낸다.

 

(시라쿠사의 드로미오) 지친 사람들을 쉬게 해 주겠다고 속여 구속하고 / 쇠약한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긴다면서 / 죄수복을 입히고, 더 많은 것을 착취하기 위해 / 무어인들이 쓰는 창을 휘두르진 않지만, / 곤봉을 휘둘러 사기를 치면서 / 온갖 못된 짓을 하는 잡놈 말입니다. (P.97, 4막 제3)

 

마지막 막에서 헤어졌던 부부와 부자, 형제들이 모두 상봉하며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이지언은 사면을 받는다. 이렇게 모든 오해와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전형적인 희극답다. 게다가 이 모든 소동이 단 하루 동안 벌어지는 것 역시 전통적 미덕의 수용이다.

 

작품해설은 이 작품의 특성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작품은 가치관의 갈등이나 인물 대립보다는 착오와 오해를 기반으로 사건을 이끌어 간다. 그러므로 인물의 개성이나 가치관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인물들의 성격이 아니라 정체성 오인과 착오에서 생겨난 소동이 희극성의 근거로 작용하는 소극(笑劇)이란 말이다. (P.151)

 

어릴 때 집에 십여 권의 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출판사는 동서문화사였는데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나름 열심히 읽은 기억이 있다. 이제는 읽었는지 아닌지도 가물가물해졌기에 올해 상반기에 셰익스피어를 본격적으로 탐독하자는 큰 목표를 정했다. 최종철 번역본으로 주요 작품을 읽고 이제 미번역본은 시기순으로 출판사, 번역자별로 선별하여 차근차근 나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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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 네버랜드 클래식 16
찰스 디킨스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김난령 옮김 / 시공주니어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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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보다도 주인공 이름으로 더 기억되는 작품이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을 앞두고서는 한층 인기가 높다. 스크루지 영감이 크리스마스 유령을 만나서 개과천선하게 된다는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그런 명작을 이제 새삼스레 읽어볼 필요가 있을까 살짝 의구심이 들었지만, 역시 읽어볼 가치는 충분했다. 소설과 타 장르 간의 차이점은 물론이고, 표피적인 줄거리가 아닌 원작의 의도와 표현을 음미할 수 있다.

 

, 그러나 스크루지는 맷돌 봉을 움켜쥔 손아귀처럼 그악스럽고 인색하기 짝이 없는 수전노였다. 스크루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남 등쳐먹기 좋아하고, 교활하고, 악랄하고, 치사하고, 탐욕스럽고, 추잡한 늙은이! 무정하고 냉정하기로는 쇠망치로 두들겨 대도 불똥 하나 튀기지 않을 부싯돌 같고, 음험하고, 제 생각만 하기로 치자면 꽉 다문 굴 껍데기 같다. 내면에 들어앉은 냉혹함 탓에 스크루지의 생김새는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P.11-12)

 

자신이 쓴 작품의 주인공을 이렇게 혹평한 작가가 달리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업에만 매달려 사랑과 이별하고 일체의 인간적 감정과 교우를 단절하는 스크루지. 가난한 이웃에 대한 동정과 관심을 거부하고 조카의 초대를 차갑게 거절하는 스크루지.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의구심마저 들면서도 문득 요즘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스크루지와 대동소이할 거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게 세속적으로 성공의 왕도라고 인정받고 있으므로. 그렇기에 스크루지 영감은 평생을 그 길을 따른 것이리라.

 

스크루지가 바랐던 삶은 바로 그런 삶이었던 것을! 복잡한 인생의 길에서 이리 비집고 저리 비집고 해서 제 갈 길을 헤치고 살아가려면 인간적인 동정심 따위는 얼씬도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세상 이치에 밝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이른바 실속이라고 스크루지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P.13)

 

대다수 우리네에게 크리스마스는 단지 공휴일로 인식될 뿐이나 서구사회는 의미와 분위기가 이 작품에서처럼 확연하게 다르다. 예수 탄생의 의미, 그리스도가 세상에 설파한 교훈은 사랑과 자비, 그리고 용서이다. 일 년 내내, 평생을 이를 실천하면서 살면 최선이겠지만 최소한 크리스마스 무렵만이라도 그 정신을 되새기자는 생각이다. 작중에서 이는 스크루지 조카의 말로 명료하게 표현된다.

 

세상에는 굳이 그 덕을 보지 않아도 그냥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참 많아요. 크리스마스가 특히 그렇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요, 크리스마스가 갖는 어느 한 가지 의미를 따로 떼 놓고 생각할 수 있다고 치고요, 크리스마스라는 신성한 이름이나 크리스마스의 유래에서 절로 우러나는 친절과 용서와 자비와 기쁨이 가득한 때라고 생각해 왔어요.” (P.18)

 

그래도 스크루지는 운이 좋았다. 개심 여부는 최종적으로 본인에게 달렸지만,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만과 타성에 물들어 주변의 관심과 조언을 곡해하고 거부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그것은

외로움에 젖은 스크루지의 어린 시절, 그리고 가족의 온기를 유일하게 남겨준 여동생과의 추억이 남겨준 한 가닥 희망의 끈이 아니었을까.

 

과거 크리스마스의 유령을 따라다니면서 그가 발견한 것은 잊고 있던 젊은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과 교훈,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가게 만든 그의 잘못된 선택이다. 현재 크리스마스의 유령이 보여준 서기 가족과 조카네 가족의 행복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바라보면서, 여러 면에 걸쳐 작가가 길게 서술하고 묘사한 크리스마스의 유쾌한 분위기와 장면들. 일상적인 냉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아닌 감사와 축복을 보여주는 그들. 약했던 여동생을 연상시키는 가냘프고 연약한 꼬맹이 팀을 바라보는 스크루지. 그리고 스크루지를 향한 유령의 통렬하기 그지없는 비판.

 

하느님의 눈에는, 저 아이처럼 수백 만의 가난한 자의 아이들보다 네가 더욱더 쓸모없고 살리기에 적당치 않은 인간이니. , 신이시요! 나뭇잎에 붙은 벌레 같은 인간이, 굶주리고 있는 제 형제들 가운데에 쓸데없이 남아도는 인구가 있다는 소리를 하다니!” (P.120)

 

의외였던 점은 스크루지의 개심이 겉으로 표출된 시점이 현재 크리스마스의 유령과의 만남 이후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버림받고 초라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아무에게도 좋은 사람으로 회상되지 않는 미래의 불쌍한 인간의 실체를 아직 목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반복해서 자신이 변할 준비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유령들이 잇따라 그에 출몰하여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목적을 이해하고, 심지어 미래 크리스마스의 유령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따르겠다고 할 정도다.

 

스크루지는 줄곧 마음 속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야 말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지금 보고 있는 환영 속에서 새 사람이 되겠다는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P.156)

 

이쯤에서 그쳐도 충분할 텐데 디킨스는 스크루지를 왜 끝까지 미래의 유령과 동행시켰을까. 이왕 뺀 칼이니 휘둘러야 한다는 뜻은 아닐 텐데. 그것은 시체의 장면에서 명확해진다. 버림받은 시체의 정체를 예감하지만 인정하길 부인하는 스크루지는 변명하고 회피하고자 애쓴다.

 

유령은 그 흔들리지 않은 손가락으로 여전히 시체의 머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당신의 뜻은 알았습니다. 제가 할 수만 있으면 그 뜻을 실천하겠고요. 허나 제겐 힘이 없습니다. 힘이 없어요.”

그러자 유령이 스크루지를 보는 듯이 느껴졌다. 스크루지는 몹시 고통스러웠다. (P.168)

 

자신의 암울한 과오와 비참하지만 엄연한 진실을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직시하고 인정해야만 한다. 시체의 교훈은 스크루지의 마음을 단단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리라. 굳건한 토대 위에 차곡차곡 쌓은 개심과 신심이야말로 앞으로 어떤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변함없이 초심을 지켜나갈 것이므로.

 

나 혼자만이 아닌 더불어 즐겁고 행복한 삶. 그것은 비단 크리스마스에만 국한된 정신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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