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타의 유대인 지만지 희곡선집
크리스토퍼 말로 지음, 이희원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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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에 난데없이 마키아벨리가 등장해서 놀랐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출판된 지 50년 정도 지났을까 대중을 상대로 하는 연극 무대에서 거리낌 없이 그가 등장한다니 새삼 마키아벨리즘의 전파력이 대단하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과 어쩔 수 없이 비교된다. 유대인 상인, 그들의 탐욕과 파멸, 기독교인의 유대인 박해 등에서 여러 공통점을 지닌다. 셰익스피어가 말로에게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해야 하리라.

 

돈을 위해서라면 딸도 죽일 수 있는 탐욕의 화신 바라바스는 무한한 정복욕의 소유자 탬벌레인이나 무한한 지식을 추구하는 파우스터스와 같은 말로의 다른 비극적 주인공들과 함께 인간적인 욕망을 극한으로 추구하다가 파멸을 맞이하는 새로운 비극적 인물이며, 르네상스적 인간의 전형이다. (P.208-209)

 

몰타의 유대인 바라바스를 해석하는 관점이 여럿 있다. 통상적으로 그를 물욕의 화신으로 르네상스적 비극의 전형으로 이해한다. 이 책의 작품해설도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본다. 여기서 바라바스의 파행을 단순히 재물을 향한 탐욕으로 평가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있다. 몰타 총독의 재산 몰수 행위를 전후한 그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이후의 그는 철저한 복수에 모든 관심과 역량을 기울인다.

 

(마키아벨리)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것뿐, 즉 그 유대인에게 / 합당한 호의를 베풀어 달라는 것뿐이다. / 그리고 그가 나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 더 나쁜 대우를 받지 않게 해 주시길. (P.8, 서막)

 

마키아벨리의 변호를 의례적이라고 치부하고 싶지 않다. 바라바스는 몰타에서 성실한 상인으로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모았다. 적어도 그에게 고리대금업은 주된 사업이 아니다. 그런 그를 벼랑으로 밀어낸 것은 몰타 총독 페르네즈다. 터키인에게 바치는 공물을 무조건 유대인에게서 그것도 재산의 절반을 빼앗는 만행에 기독교인은 아무런 반대가 없다. 그들의 눈에 유대인은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놓은 최초의 저주를 받은 족속일 뿐이다. 바라바스의 항변은 이런 대답으로 돌아온다.

 

(페르네즈) 진정하라, 바라바스. 너에게 정의가 행해진 것뿐이다.

(바라바스) 각하의 지나친 정의가 제게 지나치게 부당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P.35, 12)

 

역지사지라고 바라바스 같은 억울하고 부당한 처지- 총독의 결정에 항의하였다고 전 재산을 빼앗긴다 -에 놓이면 누군들 복수를 맹세하지 않겠는가. 이런 그에게 도덕과 윤리를 고려하고 수단 방법의 정당성을 요구한다면 가당키나 하겠는가. 착한 아비게일조차 아버지의 복수 행위는 정당하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그의 행위를 판단하는 데 여기에 인종 차별과 종교 갈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그는 스스로 악당으로 변모한다.

 

이 희곡에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모두 등장한다. 다만 신도이든 종교인이든 올바른 신앙을 지닌 인물은 찾기 어렵다. 기독교인은 유대인을 박해하고 탄압하는 걸 정당하게 여긴다. 유대교인 바라바스와 이슬람교인 이타모아는 악인을 자처한다. 자코모 수사와 베르나딘 수사는 바라바스의 재산을 노리고 서로 다투는 치졸함을 보인다. 바라바스가 아비게일을 죽인 행위는 흔히 비난받기 쉽지만, 처자식보다 종교와 가문을 더 우위에 두는 사례를 봉건시대에서는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있다. 그로서는 도저히 배교와 배신한 아비게일을 용납할 수 없다.

 

(바라바스) (아비게일에게 방백) 기독교인을 속이는 것은 죄가 아니란다. / 그들 자신이 속임수를 신념으로 삼고 있는데다가, / 이단자들과의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P.90-91, 23)

 

어딘가 익숙한 대사가 아닌가. 바로 <탬벌레인 대왕 제2>에서 헝가리 왕이 신 앞에서의 맹세를 어기고 나톨리아의 왕의 배후를 공격하는 논리도 위와 유사하다. 이처럼 부도덕하다는 점에서 모든 종교가 동일하다.

 

(페르네즈) 저주받은 바라바스, 천한 바라바스, 내가 / 너나 너의 불행에 측은함을 느껴야 하느냐? / 아니, 나는 이렇게 너의 반역의 대가를 지켜볼 것이다. / 넌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P.200, 55)

 

이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주인공인 바라바스는 물론이고 딸 아비게일, 로도윅과 마티아스, 두 명의 수사, 이타모어, 벨라미라와 필리아-보르자가 비참하게 목숨을 잃는다. 수녀원의 수녀들, 많은 터키 병사들도 몽땅 죽는다. 유일하게 생존하는 인물이 몰타 총독 페르네즈다. 그의 생명 부지는 천행인데, 단지 그가 바라바스 못지않은, 차라리 그보다 더 간교한 인물인 탓이다. 그는 자만심에 빠진 바라바스의 뒤통수를 친다. 결국 생사와 성패는 선악이 아니라 언제든 타인을 배신할 수 있는 교활함의 미덕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말로는 오직 바라바스만 비판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작품 속 모든 인물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 극의 대다수 인물들은 계급, 인종, 종교와 관계없이 마키아벨리즘을 자신들의 삶의 방식으로 채택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말로는 탐욕적인 인간들의 위선을 가차 없이 풍자한다. (P.208, 작품해설)

 

작품의 대단원은 생뚱맞다. 몰타 총독은 터키 왕자 칼리마스를 포로로 잡고 선언한다. 터키가 다시 쳐들어와도 당당하게 맞서 물리치겠다고. 전반부의 굴종적 자세와는 천양지차다. 실제로 몰타를 방어한 기독교 세계의 자신감을 반영하는 장면이리라.

 

(페르네즈) 온 세계가 당신을 구하러 오겠다면 오라 하시오. 우린 우리를 지켜 낼 테니. / 몰타를 정복해 우리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보다 / 바닷물을 마셔 마르게 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오. (P.203,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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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이야기
폴린 레아주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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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발표된 화제작이자 문제작이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충격을 주었을 작품인데, 어찌 보면 당대의 시각에서 오늘날의 야설로 여겨졌을 것이다. 야설과의 차이점은 성적 행위에 적나라한 직접 묘사가 덜하다는 점과, 심리묘사의 비중이 매우 높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성기를 지칭하는 묘사가 중립적이거나 완곡하다는 점이 더욱 그러하다.

 

현대 에로티시즘 문학의 걸작으로 간주되는 <O 이야기>의 주된 성적 행위는 사도-마조히즘이 차지한다. O는 애인 르네를 따라 루아시로 들어가고 그 일원이 되며, 스티븐 경에게 양도된다. 루아시와 스티븐 경이 주창하는 성적 판타지는 무조건적 강간, 채찍질로 대표되는 고문, 항문 성교 등이다. O는 여기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며, 오히려 쾌감을 느낀다. 또한 O와 자클린 간 여성 동성애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이 작품에서 소개되고 묘사되는 여러 성적 행위의 실제성을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저자 자신의 의견처럼 연인에게 보내는 연애 편지’”로 이해하는 게 온당하다. 현실 세계에서 이를 실현하는 것은 당대나 현대 모두 쉽지 않은 일이며 현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개연성도 충분하다. 사랑하는 남성에게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싶어 하는 한 여성의 성적 환상이라면 그 무엇을 꿈꾸어도 비난할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페미니즘 관점에서 이 작품을 가타부타하는 건 실체 없는 허상에 대한 논평이라 생각한다.

 

무수한 음란물에 노출되고 있는 현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이 소설의 내용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성적 묘사보다는 성 심리 자체가 더욱 흥미롭다. O는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가학적 행동에 관대하며 오히려 감미로움과 흐뭇함을 느낀다. 전형적인 피학적 속성이다.

 

지금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벗어난 의지에 내맡겨진 적이 없었고, 지금보다 완벽한 노예상태에 빠진 적도 없었을 뿐더러, 그렇게 된 것 자체를 지금만큼 행복하게 받아들인 적 또한 없었다. (P.84)

 

아무리 능욕을 당한다지만, 아니 오히려 능욕을 당하고 있기에, 바로 그 능욕을 통해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데서 오는 일종의 감미로움이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 굴복을 자처하기에 느끼는 기쁨, 자신을 순순히 개방함으로써 얻는 즐거움 같은 것 말이다. (P.114)

 

소설 속에서 되풀이하여 표현되는 O의 피학적 성향은 그녀가 단지 독특한 성적 취향을 지녔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O는 애인 르네를 극도로 사랑한다. 사랑의 정도가 매우 깊기에 그녀는 르네가 원하는 것은 무조건 따르고 순종하려고 한다. 그녀에겐 고통보다 복종의 행복이 더 큰 것이다. 스티븐 경에게 양도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르네가 원하기에 O는 이를 따랐을 뿐이었고, 나중에는 스티븐 경에게서 더욱 철저한 주인-노예 관계를 터득하였다.

 

O는 죽고 싶지 않았지만, 애인의 사랑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치러야 할 고통이라면, 그 고통을 감수하는 자신을 애인이 그저 흐뭇하게 여겨주기만을 바랐다. 오로지 그의 곁으로 데려다 주기만을 말없이 얌전하게 기다릴 뿐이었다. (P.41)

 

르네,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사랑한다고...... 당신을 사랑해...... 나를 가지고 얼마든지 당신 원하는 대로 해도 좋아...... 다만, 나를 버리진 말아줘, 제발 부탁이야, 나를 버리지 마......” (P.133)

 

작가는 성적 노예화에 빠지는 O의 모습을 뜻밖에도 장엄하게 묘사한다. 그녀는 성적으로 부도덕하고 타락한 게 아니다. 그녀는 자기 헌신과 복종을 통해 오히려 정신적으로 승화되는 것처럼 비친다. 고대 신전의 무녀와 여사제가 그러한 역할을 맡았던 것처럼 말이다. 자아를 전적으로 바치면 순전한 이타가 되고 영혼은 순결해진다고 보는 것일까. 작가의 펜에서 O는 성녀(聖女)로 화한다.

 

몸을 함부로 내돌림으로써 존엄해진다는 것은 분명 놀랄 현상이나, 거기 존엄한 무언가가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어떤 광채를 일으켜 빛나는 듯했다. 모든 거동에서 침착함이 배어났고, 얼굴에서 알 수 없는 고요함과 더불어 은자들의 눈빛에서나 떠오를 법한 내면의 미소가 은은하게 번지는 것이었다. (P.66)

 

사실 그녀의 입을 범했던 모든 입들, 젖가슴과 음부를 유린했던 모든 손들, 아랫도리를 쑤시면서 그 창녀성을 여지없이 증명해 주었던 모든 성기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녀를 신성한 존재로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것도 르네가 보기에 스티븐 경이 증명해 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O가 스티븐 경의 품을 벗어나올 때마다 르네는 그녀에게서 신의 흔적을 찾았다. (P.157)

 

우리는 새로 얻은 링과 인두자국이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러운”(P.238) O의 심리에 대부분 공감하지 못한다. 그토록 피학적인 O가 도리어 자클린과의 관계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맡는 것 자체로 보아서도 O의 성향을 일면 화하기 어렵다. 차라리 적당히 이성애와 동성애를 넘나들며 쾌락을 즐기되, 소위 변태적 성적 행위에는 거리를 두려 하는 자클린의 태도가 일반인의 정서에는 더 가깝다.

 

이 소설을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적당히 잘 쓴 야설이라도 결국 야설일 뿐이며, 누군가의 판타지를 반영한 글에 불과하다. 현실과 환상은 다르다. 엄격한 종교 윤리 기준으로 보면 성적 환상도 죄악에 속하지만, 그렇다면 대부분 현대인은 모두 죄인일 것이다. 요즘 추세는 오히려 감추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발로를 권장하고 있으므로 읽지 않으면 몰라도 읽는다면 예전의 야설은 이렇구나 하고 가벼운 흥미로 넘어가면 족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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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스 박사의 비극 영국 르네상스 극문학선 9
크리스토퍼 말로 지음, 이성일 옮김 / 소명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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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파우스트>가 원체 유명하다 보니 그의 순전한 창작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엄연히 독일의 민간 설화가 원전이다. 문학 작품화로 따지면 말로의 이 작품이 괴테를 2백 년이나 앞선다. 괴테도 분명 이 작품의 존재를 알았고 의식했을 것이다. 둘 다 시곡 형태를 취한다. 괴테의 작품을 먼저 읽은 독자가 이 희곡을 접하면 성근 느낌을 갖는데, 그만큼 괴테가 설화를 정교하고 치밀하게 엮고 확대하였음이며 오히려 이 작품이 원전에 가까운 고졸한 맛이 있다.

 

줄거리는 대동소이하다. 지식의 극한을 추구한 포스터스 박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을 추구하고자 한다. 인력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악마와 거래를 하는데,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신의 권능을 획득하려는 것. 이후 온갖 모험 후에 그의 영혼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희곡 전반을 흐르는 기조는 지극히 기독교적이다. 인간으로서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는 신과 기독교 관점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다. 작품 내내 선한 정령악한 정령이 등장하여 포스터스의 행동과 결정에 대해서 촌평과 조언을 하는데 물론 그는 이를 알 수 없다. 외적인 존재로 보자면 천사와 악마일 것이고, 내적인 존재로 치면 양심, 도덕 vs 비양심, 비도덕이라고 하겠다.

 

(선한 정령) 정다운 포스터스, 천국과 천상의 것들을 생각하게.

(악한 정령) 아니야, 포스터스, 영예와 부를 생각해. (P.44, 5)

 

말로는 루시퍼와의 거래 후 포스터스의 행적을 좇는다. 누가 우주를 창조했는가를 묻거나 세상과 만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명성을 누리기도 하지만, 벨제버브의 일곱 가지 죄악을 보고, 교황의 따귀를 때리거나 말 장수를 저급한 마법으로 속이는 등 온당치 않은 행동도 자행한다. 무엇보다 트로이의 헬렌을 욕망하여 그녀, 실은 그녀로 분한 마녀와 동침하는 죄악을 범한다. 이로써 포스터는 되돌릴 길 없는 타락의 길 끝에 다다른다.

 

(노인) , 저주받은 포스터스, 비참한 것, / 네 영혼으로부터 하늘의 은총을 몰아내고, / 하느님의 심판 자리의 왕좌를 피하는구나! (P.110, 13)

 

이쯤에서 상기해야 할 대목은 포스터스와 악마 간 계약은 누구의 강요도 없는 자발적 행위였다는 점이다. 메피스토필리스를 불러내서 루시퍼와 영혼 거래 계약을 제안한 건 어디까지나 포스터스이다. 선한 정령의 속삭임 또는 양심의 발로에 의해서든 포스터스는 신에게 과오를 빌고 회개의 길로 돌아올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선택하지 않는다.

 

(포스터스) , 포스터스, 너는 무엇이란 말이냐? / 결국에는 죽을 운명인 인간일밖에- / 네 운명의 순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 절망은 내 상념을 불신으로 채우는구나. (P.94, 11)

 

참회하면 용서받을 줄 알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포스터스 자신도, 악한 정령도 모두 알고 있다. 그것을 포스터스의 무지와 교만이라고 칭해도 좋다. 따라서 그의 지옥행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있음이다. 그가 메피스토필리스를 탓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 마지막 순간에 후회와 갈등으로 번민하는 포스터스를 메피스토필리스가 악마의 권세로 위협하자 그는 즉시 사죄하고 악마에게 충성을 다짐한다. 이 장면만 보더라도 그에게 신과 악마의 권능 격차는 명확하다.

 

파우스트 설화는 성경의 에덴동산 이야기와 유사성을 지닌다. 지극히 순수하고 깨끗한 존재인 아담과 이브를 타락시킨 뱀의 유혹은 인간에게 내재한 악의 속성에 다름없다. 선악과는 영어로는 지식 나무의 열매라고 하니 그 열매를 먹으면 선악을 판단할 수 있고 모든 지식을 깨우칠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이 전지적 존재가 되면 신은 설 자리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지식을 추구하는 파우스트는 독일 민간 버전 화한 에덴동산 전설이다.

 

(포스터스) 정령들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것을 가져오게 만들고, / 아리송한 의문에 대해 속 시원히 대답해 주도록 하고, / 내가 바라는 기막힌 위업을 이룩하도록 할 것인가? (P.20, 1)

 

말로가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을 극화한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적으로 기독교적 가치관에 근거하여 르네상스 정신이 가져온 인간 중심 관점은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음에 대한 경고로 독해할 수 있다. 또는 인간의 본성 자체는 제아무리 신이 가로막고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앎에의 욕구를 막을 수 없음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포스터스는 종교적 양심과 구원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 길이 비록 일신의 비극과 사회적 매장으로 이어질지라도 우주와 세상을 알고자 하는 욕망을 억누를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르네상스 정신이 지향하는 인간 본위 사고의 근간을 다루는 동시에 나아가 먼 훗날 무한한 지식욕이 가져오는 현대 사회의 윤리적 문제점마저 예지한다고 볼 수 있다.

 

프롤로그와 15개의 장,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된 작품이다. 주제 자체가 워낙 무겁다 보니 작가는 4장과 8장에 가벼운 소극(笑劇)을 삽입하고 있다. 분위기 전환 목적과 함께 포스터스가 어렵게 쟁취한 마법이 하찮은 의미밖에 지니지 못함을 풍자한다. 이는 11장에서 포스터스와 말 장수 간 일화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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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우현주 옮김, 김상근 해제 / 살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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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는 비교적 짤막한 작품이다. 이 책에서도 본문은 90면이 미처 되지 않는다. 김상근 교수의 해제가 50면을 차지하니 깊이 있는 해제를 기대할 만하다. 시중에 나와 있는 유이한 번역본 중 유일한 이탈리아어 원전 번역이다.

 

카스트루초는 14세기 피사와 루카의 영웅 군주다. 마키아벨리보다 2백 년 전의 인물이며, 게다가 조국 피렌체의 적국 출신을 마키아벨리는 무슨 까닭으로 주인공 삼아 글을 썼을까? 이 작품은 그가 루카로 협상 갔던 시절에 썼다고 하는데, 이미 그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체류하던 시절 비로소 그의 존재를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카스트루초의 생애를 다시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 속에서 비르투와 포르투나에 관한 훌륭한 본보기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P.11, 들어가는 말)

 

비르투와 포르투나라면 <군주론>에서 자주 접했던 용어다. 거기서 마키아벨리는 전형적인 인물로 체사레 보르자의 사례를 들었다. 자신의 비르투로 영광과 성공의 절정기에 오르려는 찰나 포르투나의 시샘으로 물거품이 되고만. 카스트루초 역시 체사레와 비슷한 본보기라고 마키아벨리는 제시한다. 미천한 출신, 자신의 역량만으로 루카와 피사의 군주가 되고, 토스카나 지역의 패권을 놓고 피렌체와 자웅을 겨루었던 인물. 피렌체 연합군을 대파하고 필생의 꿈을 목전에 둔 찰나. 어이없게 병마로 쓰러진 영웅.

 

카스트루초의 극적인 삶은 자체라도 매우 감동적이며 흥미진진하다. 마키아벨리는 길지 않은 글을 통해서도 독자에게 카스트루초라는 인물의 존재감을 확연히 각인시킨다. 그 역시 카스트루초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음은 그의 조국이 루카임을 아쉬워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압권은 카스트루초의 유언에 있다. 해제의 김상근교수 말마따나 이는 마키아벨리 자신의 유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하는 포르투나는, 내가 먼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충분한 판단력을 주기는커녕,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P.71)

 

그러므로 너는 너의 지략과 내가 행했던 비르투에 대한 기억, 그리고 현재의 승리가 너에게 가져다주는 명성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두지 말거라. (P.73-74)

 

여기서 카스트루초는 포르투나의 무정함을 한탄하면서도, 비르투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말 것을 당부한다. 포르투나는 예측할 수 없기에 말 그대로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데 포르투나에 기대서는 안 되고 철저하게 비르투를 통해 쟁취하라는 것을. 카스트루초의 삶의 역정이 그러하였듯이.

 

이 책의 특색은 본문 못지않은 해제의 비중이다. 해제가 없었다면 이 책의 가치는 상당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작품 전개를 같이 따라가면서 그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꺼내놓는 솜씨는 확실히 전문가답다. 김상근 교수는 특히 인간 일반을 강조한다. ‘인간 일반이란 보편적인 인간성을 뜻하는 걸로 이해된다. 거기서 제아무리 뛰어난 비르투를 지닌 인물도 결국은 포르투나의 변덕에 스러질 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는 새 시대에 적합한 새 인간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옛 시대새 시대를 초월해서, 항상 존재하고 있는 인간 일반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P.104-105)

 

너무 비관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나는 <군주론>에서 인간성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문장을 찾지 못하였다. 마키아벨리는 인생철학에는 관심 없다. 그는 현실 정치가다. 그는 당면한 이탈리아 정치 체제의 해법을 제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자신의 주장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은 현실 정치와 사회가 부정적이어서이다. 그는 세상 사람이 모두 선하다면 그는 자신의 주장이 잘못이라고 단서를 덧붙이지 않았던가.

 

들어가는 글카스트루초의 유언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결국 마키아벨리의 진의다. 인간은 포르투나의 한계가 있음에도 비르투에 의지하여 인생을 영위해 나가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특히 영웅과 군주들에게 더욱 요구되는 자질이다. 카스트루초의 죽음이 단순히 비극으로 비치지 않고 장엄함을 풍기는 까닭이 그러하다.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생애>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는 조작되었거나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기술되었다. 카스트루초의 신비로운 출생 이야기부터 조작된 것이다. (P.127)

 

이 작품은 전기물이 아니라 전기소설이다. 마키아벨리는 사료에 충실하지 않다. 사실과 허구, 조작, 날조를 꺼리지 않고 과감하게 손대어서 이 작품을 썼다. 그는 무슨 이유로 무리수를 두었던가. 자기가 필요한 인물과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의 행위로 우리는 미지의 잊혀진 영웅 카스트루초 카스트라카니의 실상을 눈앞에서 더욱 생생하게 알게 되었고 체사레 보르자처럼 카스트루초도 역시 불멸의 인물로 거듭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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탬벌레인 대왕 2부
크리스토퍼 말로우 지음, 김성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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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는 탬벌레인이 페르시아, 튀르크, 이집트를 정복하는 승승장구의 여정을 그렸다. 사실 역사적 사실로만 보자면 1부에서 전부 다루었기에 2부는 불필요하다. 1부가 비교적 역사에 근거하였다면, 2부의 이야기는 작가의 순전한 상상과 역사의 자유로운 편집에 기반한다. 2막에서 헝가리의 왕 지기스문트와 나톨리아의 왕 오르카네스의 동맹과 배신이 그러하다. 오르카네스는 자신이 마치 훗날 술레이만 대제인 것처럼 발언한다.

 

(오르카네스) 잠깐, 지기스문트, 그대는 내가 / 마치 거대한 지구가 / 대포로 천상의 축을 중심으로 흔들리듯 / 비엔나의 성벽을 뒤흔들어 / 대지 위에 무너뜨린 바로 그자였다는 사실을 잊었단 말이오? (P.16-17/11)

 

오르카네스를 주축으로 한 튀르크의 왕들은 힘을 모아 다시금 탬벌레인에게 도전하지만 처참하게 패배하고 포로가 되어 마차를 끄는 인간 말 신세로 전락한다. 탬벌레인의 세 부하, 테켈레스, 우섬카사네, 테리다마스는 각각 페즈, 모로코, 알제리의 왕이 되는데, 이들은 자신의 왕국에서 다시금 정복사업을 벌여 스페인, 아프리카 전역, 우크라이나까지 정복했다고 탬벌레인에게 보고한다. 모두가 허구다. 탬벌레인의 마지막 정복이 바빌론이라는 것조차도.

 

자 그러면 작가는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탬벌레인이 허황한 세계 정벌을 계속하도록 만들었을까 궁금하다. 아마도 예정에 없던 2부를 불가피하게 집필하다 보니 억지로라도 즉,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탬벌레인이 계속 전쟁을 벌이게끔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부가 1부와 다른 대목은 사랑하는 아내 제노크라테와 맏아들 칼리파스를 연달아 잃는 데 있다. 항상 전진과 승리만 거둔 탬벌레인으로서는 난생처음 겪는 상실이자 아픔이다. 특히 1부에서 제노크라테를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을 보였던 만큼 그녀의 죽음은 탬벌레인에게 치명적이었으리라. 그는 아내의 죽음에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마을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신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탬벌레인) 구름보다 더 높게 진지를 쌓아 올려라. / 그리고 대포로 하늘의 성벽을 부수고, / 빛나는 태양 궁전을 난타해서, / 뭇별들이 빛나는 창공을 두려움에 떨게 하라. / 음탕한 제우스 신이 그녀를 천상의 여왕으로 삼고자, / 나의 사랑을 여기서 낚아채 가 버렸으니 말이다. (P.71, 24)

 

이에 반해 장남의 죽음은 비교적 가볍게 다루어진다. 일국의 군주이자 영웅으로서 자신의 명예를 잇지 못할 아들을 스스로 죽인다. 비정한 아버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탬벌레인을 탓하기 어렵다. 칼리파스가 극 중에서 보여 준 행동과 대사를 보면 분명 나약할뿐더러 비겁하기조차 하기 때문이다. 전리품이 될 적국의 후궁을 취할 생각을 하고, 군막에 누워서 자신은 후계자이므로 몸을 소중하게 보전해야 한다는 발언을 본다면 확실히 동생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칼리파스) 내가 나가서, 아무런 손해나 이익이 되지 않는다 해도, / 내가 해를 입을 수 있다. 아바마마의 왕위를 이어 / 내가 갖게 될 모든 재산으로도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말이다. / 카드놀이나 해야겠다. 페르디카스! (P.127, 41)

 

말로는 이 희곡에서 종교와 관련하여 몇 가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우선 탬벌레인을 반튀르크, 친기독교적으로 간주하는 당대의 인식을 수용한다. 이 점은 1부와 2부 모두 동일하다는 점에서 튀르크 세력에 대한 크고 뿌리 깊은 적개심을 확인할 수 있다. 5막에서 시민이 바빌론의 총독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대사에서도 드러난다.

 

(시민) 여기에는 아직도 그루지야의 기독교도가 있고, / [탬벌레인]가 그들의 상황을 항상 불쌍히 여기고 구해 준즉, / 각하께서 그들을 보내시면, 그도 용서해 줄 것입니다. (P.163, 51)

 

지기스문트는 오르카네스와 동맹을 맺지만, 오르카네스가 탬벌레인과 맞서기 위해 후방이 약해지자 신에게 한 맹세를 저버리고 후방을 급습한다. 배신에 대한 오르카네스의 분노와 저주는 참다운 기독교인이라면 뼈저릴 정도다. 결국 소수의 병력으로 맞선 오르카네스에게 참패하고 지기스문트는 전사하고 마는데, 양자 모두 신의 응징이라고 해석한다.

 

(오르카네스) 기독교도들이 그렇게 교활할 수가, / 아니, 존귀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 인간의 심장이 그렇게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 그렇다면 만일 기독교도들이 말하듯, 그리스도가 있다 한들, / 그들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P.56, 22)

 

압권은 탬벌레인이 바빌론을 점령한 후 마호메트를 향한 신성모독을 행하는 장면이다. 그는 코란과 이슬람 신전에서 발견한 모든 책을 불살라 버리고, 마호메트에게 도전하고 모욕한다. 이 대목만 보면 마치 탬벌레인은 독실한 기독교도처럼 여겨질 정도다.

 

(탬벌레인) , 병사들아, 마호메트는 지옥에 있다. / 그는 탬벌레인의 말을 듣지 못한다. / 그러니 경배할 다른 신을 찾아보아라. / 만약 있다면,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 그분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그분 외에는 없으니라. (P.175, 51)

 

역사적 사실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데, 티무르는 신실한 무슬림이었다고 한다. 그가 튀르크를 정복한 이유는 종교와 무관하다. 작가가 이런 무리수를 둔 이유는 그만큼 튀르크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감이 강력하다는 반증이다. 유럽의 존망을 위협하던 튀르크를 무찔렀으니 그야말로 기독교도로 삼고 싶을 정도가 아니겠는가.

 

작품해설에 따르면 1부를 탬벌레인의 상승, 2부를 그의 추락으로 해석한다. 2부에서 아내, 아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항상 행운만 충만하던 1부에 비하면 2부에서 탬벌레인은 여러 불행에 맞닥뜨린다. 하지만 이를 그의 추락이라고 간주하는 게 적정할지 의문이다. 군사적인 면에서 그는 여전히 막강하다. 오르카네스의 도전, 바자제스의 아들 캘러파인의 재도전, 바빌론의 정복 등 그의 앞에는 오로지 승전뿐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든든한 후계자가 있다. 임종을 앞두고 탬벌레인은 차남 아미라스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이 못다 이룬 세계 정복을 과업을 성취하길 기대한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도 전진과 정복이라는 야망을 결코 놓지 않는다.

 

(탬벌레인) 나는 태양처럼 황금빛 갑옷을 입고 마차를 타고 / 정복한 왕들 무리를 이끌고 거리를 누빌 것이다. / 내 투구는 다이아몬드로 반짝이며, / 하늘에 춤추는 세 겹의 깃털을 꽂아서, / 내가 셋으로 나뉜 온 천하의 황제임을 알리도록 하겠다. (P.155, 43)

 

탬벌레인의 진면목은 자신이 신의 징벌이자 대리인으로 세계를 정복하지만, 신에게 맹종하는 처지가 아니라 신 앞에서 당당함을 잃지 않는 세상의 지배자를 선포함에 있다. 탬벌레인의 신은 하나가 아니다. 아내가 죽었을 때, 자신이 중병에 걸렸을 때 그는 제우스 신에게 도전한다. 그에게 제우스 신은 신성불가침의 존재가 아니다. 여차하면 자신이 제우스 신처럼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마호메트를 무시하고, 제우스 신과 대등하며, 하나님과 제우스 신을 동일시하는 탬벌레인.

 

르네상스가 무엇인가. 종교로부터의 자유, 고전으로의 회귀가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때 탬벌레인만큼 르네상스 정신을 체현한 인물이 달리 있는가. 이 작품을 탬벌레인이라는 허황한 인물의 상승과 추락이라는 비극으로 해석하는 건 온당치 않다. 신 중심에서 벗어나 인간의 무한한 힘과 자신감, 욕망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탬벌레인은 인간성 그 자체를 한치의 가감 없이 오롯이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전형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죽음조차도 그의 욕망을 꺾을 수 없고 아들들을 통해서 계속 전진하기를 바라는 인간적 영웅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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