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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암 ㅣ 창비아동문고 19
정채봉 지음, 이현미 그림 / 창비 / 2001년 7월
평점 :
동화작가 정채봉의 작품집이다. 표제작 ‘오세암’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유명세를 탔지만 그 외에도 수록된 23편의 단편동화들 모두가 음미할 가치가 있는 작품들이다. 전 4부 구성인데, ‘오세암’은 제4부에 해당된다.
제1부의 동화들은 흰구름을 화자로 삼고 있다. 경계 없이 이리저리 정처 없이 떠도는 구름은 예부터 사연이나 소식의 전달자 역할을 하였다. <메가두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특히나 흰구름은 먹구름과 달리 맑고 경쾌하며 깨끗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이미지를 지닌다. 이는 작가의 모토라고 할 수 있는 맑은 이야기, 즉 “보기에 좋은 것”(P.3)의 구현이다. 평화와 기쁨, 행복을 여기에서 얻을 수 있다.
작중에서 흰구름의 말은 곧 작가가 독자에게 들려주고 동감해주기를 바라는 강한 바람이 깃들어있다.
“나는......수많은 일들 가운데서 맑은 것만 가려서 보고 있어.” (‘강나루 아이들’)
“넓은 하늘을 온통 내 흰구름으로 가득 덮고 싶은 날이었어.” (‘강나루 아이들’)
“나는 이 아름다움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높은 산 위로 올라갔어.” (‘꽃그늘 환한 물’)
“기쁨으로 가득 찬 내 가슴이 뭉게뭉게 부풀어오르는 한낮이었어.” (‘풀꽃 꽃다발’)
“내 가슴은 평화로 가득 출렁거리곤 하지.” (‘하늘나라 우체부’)
“교통 순경도 그리고 그의 윗사람도 함께 너털웃음을 웃었지. 나도 기분이 좋아 뭉클뭉클 웃었고.” (‘신호등 속의 제비집’)
제1부의 7편 외에도 제2부의 ‘천사의 눈’, ‘모래성’, 제3부의 ‘진주’와 제4부의 ‘오세암’에도 흰구름의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정채봉의 동화들은 종교적 소재와 배경을 삼는 이야기가 제법 있다. 먼저 불교의 소재. 제1부의 ‘꽃그늘 환한 물’, 제2부의 ‘바다 종소리’, 그리고 제3부의 ‘오세암’이 여기에 해당한다. 기독교의 소재는 더 빈번하다. 제1부의 ‘풀꽃 꽃다발’, ‘저 들 밖에서’, 제2부의 ‘문’, ‘성모님의 유치원’, ‘천사의 눈’, 제3부의 ‘진주’, ‘별이 된 가시나무’.
작가의 종교적 요소의 도입은 특정 종교에 대한 관심과 신봉의 차원은 아니다. 종교 일반이 지향하는 생명 사랑과 존중,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 선에 대한 추구 등의 가치관은 사람들의 삶을 보다 바르고 따뜻하고 풍성하게 하는 면에서 근원적 동질성을 지닌다. ‘꽃그늘 환한 물’과 ‘오세암’, ‘풀꽃 꽃다발’과 ‘성모님의 유치원’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작가의 동화들을 읽으면 무척 기분이 좋아지고 흐뭇해진다. 여기에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동에도 일체 악한 구석이 없는 연유도 있다. 장편이라면 평면적으로 흐를 수 있지만 단편이기에 흠이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작가도 스스로의 작품 성향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은가.
‘꽃그늘 환한 물’의 스님의 언행의 아름다움, ‘풀꽃 꽃다발’의 아름답고 고귀한 꽃다발은 물론, ‘위문 온 매미’의 김 일병을 본다. 독자마저 절로 행복해진다.
“크지는 않지만 깊은 산속에서 피는 풀꽃 같은 눈빛이랄까, 아무튼 병영에서는 보기 드문 고요한 눈이었어.”
“날아오르는 매미, 팔랑거리는 나뭇잎 그리고 휘파람을 부는 김 일병. 이들보다 행복한 이들이 어디 있을까.”
씽씽 칼바람이 부는 광장 모퉁이의 장님 부부와 이를 돕는 신사와 부인 간의 대화(‘저 들 밖에서’의 거들어 드릴까요? - 환한 얼굴 – 크리스마스 인사 – 감사합니다)는 각박하고 냉엄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요인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가난한 자,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은 ‘성모님의 유치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하느님은 저 이름없는 꽃일지도 모른다.” (‘성모님의 유치원’)
그렇다면 ‘풀꽃 꽃다발’과 ‘거울 나라’의 풀꽃은 무명과 소외의 은유를 넘어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순수와 자연의 상징이 아닐는지.
하늘처럼 새처럼 실제의 문도 마음의 문도 활짝 열어놓으면 병이 안 생길 것이라는 이야기(‘문’)와 바깥 세상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진짜 세상은 마음 세상이라는 의견(‘거울 나라’)까지 작가가 작중에서 함축하는 메시지의 스펙트럼은 폭넓기 그지없다. 제2부의 ‘모래성’에서 내가 눈물을 끝내 글썽이는 이유는 슬퍼서가 아니라 참된 아름다움에 마음이 정화되어서이다. 참된 사랑이란 무엇이겠는가? 은하처럼 자기를 잊고 헌신하는 것이리라.
제3부는 동물과 사물의 시선으로 바라 본 인간의 모습이다. 우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은하수의 노래’에서 엿보이는 인형의 운명은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떠오르게 한다. 피 토하는 청년과 로사 언니의 모습은 전란 직후 대조적 사회 현실을 살짝 건드린다. 로사 언니와 재회를 기다리다 죽음을 맞이한 할아버지와 아버님의 은혜를 뒤늦게 깨달은 로사 언니 중에 행복한 이는 누구일까?
‘돌아오는 길’은 성 나자로 마을의 옹달샘에서 착상을 하였을 성싶다. 교만한 성수는 외관상 보기 좋은 길, 넓은 길보다는 바위 많은 비탈길과 좁은 길이야말로 겸허히 하늘의 뜻을 따르는 길임을 깨닫게 된다. 어찌 성수만 해당되겠는가.
‘진주’에서 백합은 아름다운 육신을 상징한다. 백합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면서 죽게 될지도 모를 고난을 겪게 되지만 대신 진주조개가 될 가능성도 지니게 되었다. 마음속의 진주는 희망이다.
‘행복한 눈물’은 비장한 우화다. 문득 작품이 쓰인 당대 사회현실을 상기하게 되자 앵무새의 절규는 천근의 울림을 지닌 다짐이자 경고로 이해된다.
“헛보고, 헛살지 말고 바로 보고 바로 살아야겠다.”
“갇혀서 살수록 당당해져야 돼......비굴하게 아부해서 살찌고 사느니보다는 적게 먹더라도 진실되게 떳떳이 사는 삶이 더 소중한 것 아니겠어?”
선배 앵무새는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한 아리스티포스라면, 이 앵무새는 시조새와 같이 양심을 지킨 디오게네스이다. 비록 현실의 문제의 새는 맞아서 죽더라도 시조새의 말처럼 “진실의 횃불이 밝히는 날, 우리 함께 부활하여 저 푸른 하늘을 훨훨 날자꾸나.”
다른 동화들이 분량상 장편(掌篇)에 가깝다면 ‘오세암’은 전형적인 단편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만큼 이 동화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부처가 되는 다섯 살 길손이는 세속의 눈으로 보면 장난꾸러기 철부지에 불과하다. 길손이는 타고난 천성에 따뜻한 마음씨를 갖추었고 순수한 마음을 더해 마침내 성불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길손이의 성품은 “가을아침 물빛처럼 시린 눈총”(P.166)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길손이의 생과 사에 동행하는 친구가 흰구름이라는 점, 작가에게서 흰구름의 막중한 상징성을 염두에 두면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늬 사람들과는 다른 길손이의 마음씀씀이다. 제2부의 ‘바다 종소리’에서 아이가 바라보는 부처님은 피곤해 보인다. 빚쟁이마냥 사람들은 부처님에게 복과 명과 높은 자리를 끝없이 간구한다. ‘오세암’에서의 부처님도 마찬가지다.
“부처님도 참 성가시겠다. 그지, 누나? 사람들이 자꾸자꾸 조르기만 하니까. 나 같으면 부처님을 좀 즐겁게 해드리겠는데......에이......” (P.171)
그림 속 보살님을 소리 내어 웃게 하고 싶어 방귀를 뀌고 시치미를 떼는 길손이, 마음을 다해 부르면 보살님, 즉 엄마가 꼭 오신다고 믿는 길손이.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길손이를 평한다.
“이 어린아이는 곧 하늘의 모습이다. 티끌 하나만큼도 더 얹히지 않았고 덜하지도 않았다. 오직 변하지 않는 그대로 나를 불렀으며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나를 찾았다.” (P.196)
작가의 어휘는 섬세하게 조탁되고 정제되어 있다. 마치 시어마냥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예민한 문장은 맑고 깨끗한 감성을 담고 있다. 통상의 동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지극히 순도 높은 예술적 분투노력의 산물임을 알게 한다. 독자는 이야기 한 편 한 편을 읽어 나가며 절로 마음이 순수해지며 정화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어른을 위한 동화로 볼 수도 있는 게 이 깊고도 투명한 떨림을 아이들이 깨우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데 기인한다. 되풀이하여 읽어도 물리지 않는 옹달샘의 약수를 마시는 청량감이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