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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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의 서사는 독자에게 불친절하고, 미숙 자신을 향한 서사에서도 그러하다. 더 파고들면 더 아플 것을 알기 때문일까? 투박한 크로키 같은 묘사가 문턱을 만들어도, 씻어낼 수 없는 가난의 냄새와 가족의 폭력은 내용이 아닌 배경으로 배어들고, 거기에서 오는 묵직한 서글픔이 오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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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컬렉션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 전11권 - 가난한 사람들 + 죄와 벌 + 백치 + 악령 +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석영중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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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작정하고 쭉 읽어볼 수 있을까? 사놓은 《죄와 벌》도 그대로 있지만, 언제나 긴 분량과 이명들에 부담을 느끼지만, 그래도 항상 끌려하는 건 어릴 적 아침부터 밤까지 완주했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대한 기억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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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울리뷰오브북스 1호》의 이슈는 '안전의 역습'이었다. 'ISSUE RE-VIEW'의 처음을 장식한 것은 김홍중 교수의 〈무해의 시대〉였고, 이 글은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진희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때가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196

















  김홍중의 진단으로 보면, '무해한 사회'에 대한 지향은 21세기 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형성된 안전에 대한 욕망의 결과물이다. "사회적 삶은 '이웃에게 무해하라'라는 새로운 인륜적 명령으로 재구성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피해에 대한 공감, 가해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해에 대한 의지가 일상적 삶을 지배하고 있다."(24쪽) 안전과 무해에 대한 "강도 높은 욕망은 진실, 도덕, 미학의 규범 그 자체를 찢고 변형"(26쪽)시키고 운동을 이끌고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바꿔나간다.

  '우리' 중 누군가의 죽음은 광범위한 애도를 낳았고, 죽음을 야기한 유해의 구조에 책임을 묻는 분노 어린 집합 행위가 발생하였다. 이것은 반복적 파동으로 물결치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사회 공간에 풀어 놓았다.

  왜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왜 가난한 청년들이 부유한 부모를 만난 자들보다 더 많은 사고를 겪어야 하는가? 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쉽게 살해되어야 하는가? 왜 택배 노동자의, 콜센터 직원들의, 요양원 수용자의 호흡기는 바이러스에 더 쉽게 노출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사회적 평등을 '안전의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신체가 몰래 촬영되어 불법 사이트에 공개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자유,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지 않고 연애를 할 수 있는 자유,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지 않고 연애를 할 수 있는 자유, 혹은 라돈에 의한 저선량 피폭을 걱정하지 않고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자유가 아닌가? 왜 안전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동시에 자유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안전으로부터의 자유' 혹은 '자유로부터의 안전'이라는 매우 독특한 관념에 도달했다.) 우리가 누군가와 연대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위험, 불안, 공포를 함께 겪는 자들의 연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안전이 결핍된 존재자들의 새로운 연대, '무해의 연대'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27~28)

















  이러한 관점에서 김홍중은 21세기의 정치를 '생명정치'의 시대, 위험사회의 틀로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기를, "신체에 가해지는 환경의 유해성을 통치"(24쪽)하기를 원하고, 전방위적인 안전망을 구축하기를 원한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는 데 실패한 권력에 우리는 완강히 저항하고 '탄핵'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안전을 향한 욕망은 더욱 증폭된 듯하고, 욕망하는 우리는 "관리되는 세계의 완벽한 합리성"(30쪽)을 기대하는 위험사회의 시민과 닮았다. 하지만 파놉티콘과 같은 위험사회를 비판해 온 유럽의 비판적 지성들과 달리(김홍중은 여기에 슬라보예 지젝과 조르조 아감벤을 포함시킨다), 김홍중은 '무해'라는 시대적 키워드에서 "유사한 위험을 공유하는 타자들과의 연대감"(33쪽)을 발견한다. '우리가 겪는 유해'에 대한 인식에서 '우리가 가하는 유해'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며 여러 형태의 유해와 위험을 걷어내기 위해 새로운 실천을 감행하는 것. 이 흐름 속에 페미니즘이 있고, 장애에 대한 이해와 권리투쟁이 있고, 비거니즘과 동물 해방이 있다. "무해를 향한 욕망이 강해질수록, 인간이 환경에 가하는 유해에 대한 윤리적 인식은 그만큼 더 선명해져 간다. 무해의 감각에 눈뜬 자는 자신의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 다른 존재의 삶이 삭감되어야 한다는 이 사태를 윤리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34쪽) 이러한 성찰에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윤리학이, "내가 있는 자리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었던 자리의 점유"(34쪽)라는 윤리적 인식이 있다. 윤리는 점차 인간 너머로 확장되어 가고, 내가 보장받는 무해가 타자에게도 보장되길 바라는 연대의식이 있다고 김홍중은 보는 것이다.
















  김홍중은 '무해의 시대'를 바라보며 윤리적 연대를 찾고 있지만 과연 우리 사회의 무해지향성은 거기로 나아가고 있을까?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가 시시때때로 보았던 뉴스들은 "봉쇄된 자아의 순수성에 대한 환상, 완벽한 면역 체계에 대한 비현실적 열망, 비자기非自己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과도한 '안전주의'"(33쪽)에 더 가까웠던 것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재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의료서비스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는지, 어떤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혐오에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지, 어떤 형태의 가난을 겪었는지/겪고 있는지, 어떤 제도와 정책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어떤 정책이 부재한 채로 그 부재의 영향을 받으며 사는지 등등이 전부 명命의 조건"(황정은, 《일기》, 34쪽)인 사회에서 우리는 나의 안전만을, 나의 무해만을 신경쓰며 거리두기라는 이름 아래 울타리만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김홍중의 주장에 마냥 동의할 수 없는 것, 무해의 시대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나의 부정편향 때문일까? "팬데믹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 사회의 구조를 드러내는 재난"(황정은, 《일기》, 35쪽)이듯이, '안전'과 '무해'는 우리 사회의 인식론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어임에는 틀림없다. 김홍중이 '무해'에서 발견한 낙관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타자를 향한 윤리적 예민함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만이 위험사회에서 "타자와의 건강한 관계를 맺을 능력을 상실한 '후기 자본주의의 나르시시즘적 주체'"(30쪽)로 전락하지 않는 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위험사회》를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비인간의 얼굴들, 도처에서 ‘우리도 살고 싶다, 죽이지 말라‘고 외치는 이 얼굴들도 이제 외면할 수 없다. 고통의 자리는 역동적으로 분열되어 간다. 거기에는 절대적 경계도 없고, 특권적 위치도 없다. 더 괴로워하는 존재는 언제나 어딘가에 있으며, 반드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무해의 시대는 고통이 회피되는 시대가 아니라, 이제껏 인정되지 못했던 새로운 고통을 기왕의 것들과 연결하는, 강인하고 질긴 망網이 엮어지는 그런 시대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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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11-13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리뷰오브북스는 이런 수준의 서평들이 올라오나보네요.... (..... 지적이긴 하지만 마음이 멀어진다...ㅋㅋㅋ..) 인용된 부분들로 김홍중님의 글 전체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듭니다. 아직 절판이 안되어 있다면 구해봐야겠어요. 지금 시점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인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시작한다니...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 소설을 읽어보셨나요? 저는 최은영이 관계에서 무해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의 무의식을 들여다 보고 있다고 느꼈어요. 무해한 존재는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상처주지 않겠다는 의도가 배태하고 있는 나르시시즘에 대해서도 선명하게.. (그러니까 무해를 표방한 제목이고 표지이지만, 무해함을 비트는 소설로 읽었는 데... 이후의 담론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갸웃. 뭔가 유행처럼 무해무해 이렇게 간 건 아닐까 싶은.) 인물들은 계속 실패하고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렴풋이 알게되요. 소설을 읽는 내내 그 감정들이 너무 선명했고, 이 소설의 감정을 내가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거의 완벽하게 위로 받은 느낌이었다지요.(그렇지만 소설이 가리키는 방향은 ‘쉽게 이해하지 않을 것‘ 이라는 아이러니).. 이걸 어떻게 설명하려고 하니까 굉장히... (에효...) 어렵네요.......... 제가 감상적(?)으로 읽은 소설에서 ‘윤리적 연대‘라는 말을 끼우니 호기심이 매우 동하는군요. 그러니까 예민해진 나머지 관계자체로 부터 끊임없이 달아나는 저는... 후기 자본주의의 나르시시즘적 주체 그 비슷한 걸까요?

아무 2021-11-14 17:31   좋아요 1 | URL
크게 이슈 리뷰와 책 리뷰, 에세이로 나뉘어져 있고, 이슈 리뷰에 저런 글들이 많이 올라오는 편입니다 ㅎㅎ 0호랑 1호에서 김홍중의 글을 보고 혹해서 《은둔기계》를 샀는데, 프롤로그만 읽어봤지만 도전하고픈 마음을 불러일으키더라구요. 예전에 겨울서점에서도 다룬 적이 있어서 궁금해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김영민의 먹물누아르‘ 시리즈가 웃기고 재미있었는데, 2호부터는 나오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조금 아쉽...
김홍중이 《내게 무해한 사람》을 가지고 온 건 이 시기의 키워드가 ‘무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 그 후에는 전혀 다루질 않았습니다. 저도 예전에 읽었을 때 너무 좋았는데(개인적으론 《쇼코의 미소》보다 좋았던), 이 느낌은 너무나 감정적인 것이어서 어떻게 리뷰로 정리를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올리지 않았더니 내용이 차츰 가물가물해지고 있습니다 ㅎㅎ 그래도 처음으로 〈그 여름〉과 〈모래로 지은 집〉을 읽었을 때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어요..
˝후기 자본주의의 나르시시즘적 주체˝라는 건 위험사회의 시민을 향한 슬라보예 지젝의 비판을 재인용한 것이었습니다. 김홍중은 부정하지만.. 저 비판은 어떤 점에선 한병철이 꾸준히 전개하는 논지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구조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기 쉽다는 뜻으로 저는 항상 읽는데, 그러니까 항상 읽는 사람으로 정신 바짝 차려라! 라는 뜻으로 저는 (제 맘대로) 해석합니다. 그게 꾸준히 읽는(또는 읽어야 할) 이유 중에 하나겠죠?😊

공쟝쟝 2021-11-14 20:13   좋아요 1 | URL
댓글로 인용해오신 학자분들 (한병철 등등)의 텍스트를 읽어본적이 없어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느낌 아니까 ㅋㅋ) 김홍중의 낙관론에 던진 물음표에 제가 푹 찔렸거든요. 관계에서 조심스러워지려는 노력이 관계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제가 자꾸 나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 드는 바람에… 여튼, 저는 이 리뷰 읽고 동해서 리뷰오뷰북스 0권 1권 중고에서 구입해봅니다 ㅋㅋ
정신 바짝 차려라ㅋㅋㅋ 읽어야할 이유로 좋네요 ㅋㅋ
 
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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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북플의 여러 기능 중에는 '지난 오늘'을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활동량이 적은 편이었으므로 자주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눈에 띄는데, 과거의 기록을 볼 때마다 낯뜨거운 얼굴이 되는 일이 잦았다. 과거의 나의 글에서 비치는 미숙함, 투박함, 어리석음이 '왜 그때의 나는 이렇게 썼을까', 또는 '왜 그때의 나는 이렇게 생각했을까'라는 질문을 피워내고 거기에서 부끄러움이 타오르는 것이다(이따금 내가 쓴 댓글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때 드는 감정은 어린 시절에 썼던 일기(고등학생 이후로 쓰지 않았던 그것)를 다시 들춰보았을 때 느꼈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때로는 지우거나 비공개로 전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두는데, 아무리 부끄러운 일이었어도 그때의 내가 가졌던 감정과 생각들 역시 나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공적인 공간에 게시하는 글이지만, 이런 글들도 내가 건너온 시간을 기록한 일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범람하는 에세이의 시대에 황정은이 첫 에세이로 《일기日記를 내놓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일기야말로 에세이의 맹아(萌芽)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가장 사적이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 누구나 쓸 수 있었던 에세이, 텍스트의 외연을 확장시킬 가능성을 품고 있었을 에세이의 근원이 일기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일기'라는 제목과 형식에서 어떤 결의 같은 것을 느꼈다.  자신이 그동안 느꼈던 생각과 감정을 맹아의 형태로, 다시 말해 원형(原形)으로 담담히 써보겠다는 작가의 결의를.


가장 사적인 형식이기에 '나'라는 세계의 바깥으로 나온 일기는 빛을 보지 못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장 사적이어서 소중할 수 있는 감정과 상념이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감정을 말한다는 것"(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172쪽)이라는 말처럼, 일기는 가장 사적인 글이라는 사소함으로 바깥의 당신과 연결되고자 분투하는 글쓰기가 아닐까. 그리고 황정은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언어를 허투루 보지 않으려는 감각으로 자기 고유의 상념을 바깥과 연결하려는 듯하다. 그리고 오랜 독자로서 나는, 그 상념들이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었으면 바라는 것이다.


〈일기〉로 시작해 〈일기〉로 끝나는 열한 편의 일기에는 파주로 이사를 한 뒤 겪는 작가의 다양한 일상이 담겼다. 황정은의 오랜 독자는 읽으면서 작가의 일상을, 또는 작가의 소설이 발아(發芽)된 원체험을 새로이 알아가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읽으면서 오랫동안 내 눈을 붙잡아두었던 것은 언어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일상에서 쓰는 단어에 담긴 무심함을 포착해내던 작가의 시선은 일기에서도 여전하다. 특히 "안다"에 대한 서술을 보면서 나는, 오래 전 '이해한다'는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던 일이 떠올라 흠칫 놀랐다.


내 이웃들이 반달터에 두고 있는 관심을 나는 안다고 썼지만 실은 '아니까'라고 쓰는 데 하루를 망설였다. '안다'고 쓰거나 말해야 할 때 나는 매우 축소된다. 내가 그것을 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내가 그걸 모른다는 것을 안다. 알아버린 것을 모르는 척, 안다고 말해야 할 때 나는 순진한 척을 하며 무언가를 단념하고 있고 그래서 안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는 늘 얼마간 책임을 지는 일로 느껴진다. (29쪽)


산보를 하고 식물을 기르는 장면을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이효리가 고사리를 말리는 장면을 보며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에 과정이 있다는 걸 알아가는 일이라는 생각을"(164쪽) 하는 대목을 읽으면서 '내가 아는 황정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구나.'라고 생각하며 안도하기도, 매년 목포항을 찾는 작가의 모습을 보면서 처연함에 젖어들기도 했다. 많은 이야기들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 일기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였다. 빨간 머리 앤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소년〉과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맹아가 된 경험과 《어린이라는 세계》를 거쳐 아동 학대의 현실로 이어지는 과정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이를 통해 작가는 에세이에 흐르는 정조를 서서히 독자에게 물들인다.  학대 당하는 어린이를 보호할 수 없는 구조(構造)와 어른의 상투성을 지적하는 작가의 말이 호소력을 갖는 것은 이러한 연결 때문일 것이다. 그 정조의 끝에서 "매번 미안하다는 손글씨 릴레이를 반복할 수는 없다. 몇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미안하다는 말만으로는 바뀌지 않는다."(60~61쪽)라는 문장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자문하게 된다. 나도 혹시 아파하기만 했을 뿐, 어른의 상투성을 버리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쭉 읽으면서 나는 아마도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보다 좋은 글은 없겠다고 짐작했었다. 〈흔痕〉을 읽기 전까지는.


〈흔痕〉은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고 쓴 독후감의 형식을 취하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내용은 가장 내밀하고 아픈, 그래서 더욱 처절한 경험이다. 그래서 바깥으로 내놓을 때 가장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경험. 감추고 싶었던 흔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을 고통이었겠지만, 그래도 이를 내놓은 것은 《헝거》가 자신에게 전해준 용기를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려는 마음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읽는다. 이 경험이 당신만의 것이 아니며, "그 수치심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183쪽) 그렇기에 더욱 용기를 내어 발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흔痕〉이 전하는 이야기는 가장 사적이고 깊숙한 경험이면서 동시에 그 힘으로 타인과 연결을 이루는, 그래서 감정의 울림이 독자에게 크게 닿는 일기이다. 거기에서 나는 근원적인 감정의 맹아를 보고, 처연한 문장에 담긴 고통을 느끼고, 그 상처를 생각하며 아파하는 것이다.


새로 지을 집터에 원래 살던 맹꽁이를, 아이들이 냅다 던져버린 가물치를, 6716번 버스에 탔던 트랜스젠더 여성을, "전에 거기 머물던 사람들과 그들이 겪은 일"(131쪽)을, 세월호 유가족을 생각하며 쓴 일기들을 읽으며, 여전히 작가는 이 세계가 '비-존재'로 만들어버리려는 존재들을 호명하고 있구나, 우리가 세계의 문법에 익숙해져 무심코 뱉는 혐오와 차별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소설보다 구체적인 체험의 모습으로 오는 감정은 더욱 곡진하고 처연하다. 앞으로 작가가 쓸 소설들도 이토록 폭력적이고 엄혹한 세계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분투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한 명의 독자로서 작품을 오래오래 만날 수 있도록 작가의 건강을 염려하고 희구한다. 언제나 독자들에게 건네는 인사처럼, 당신도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





그래도 나는 자주 바란다고 말하고 믿는다고 말한다. 예컨대 당신의 건강을 바라고 사람의 선의를 믿고 굳이 희망하는 마음을 나는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믿음 말고, 희구하며 그쪽으로 움직이려는 믿음이 아직 내게 있다. 다시 말해 사랑이 내게 있으니, 사는 동안엔 내가 그것을 잃지 않기를. - P160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마음들을 나도 사랑합니다.

다들 평안하시기를.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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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 이사를 꿈꾸며

6.

그저께는 오랜만에 책탑을 정리했다. 바닥에 쌓기 시작한 책탑은 한 번 쌓기 시작하면 정리하기가 쉽지 않아 새로 들어온 책은 재배열되지 않고 계속 위로만 쌓이게 된다. 그러다보니 균형이 맞지 않아 나의 뒤척거림 한 번에 책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일도 잦았다. 간만에 큰 맘을 먹고 책탑을 재배치하면서, 마음 먹은 김에 바닥에 쌓은 책을 조금이나마 줄여보자는 생각으로 책장도 정리를 시작했다. 이래저래 무사히 정리를 마쳤지만 책탑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책탑까지 정리를 한 것이 이례적인 일이라 사진을 몇 장 찍어두었다. 본가에 있는 내 방과는 규모도 책장 크기도 천지 차이인지라 얼마나 더 쌓일지를 생각하면 암담하기만 하다.
















다 읽은 책은 쌓이는 대로 바로 택배로 보내버리기 때문에 지금 가지고 있는 책 중에 90%는 읽지 않았을 것이다. 읽지 않고 끌어안고 있는 책 중에는 새해에는 꼭 조금씩 읽기 시작해서 완독하자고 다짐했던 책들도 있다. 주로 누구나 읽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나는 읽지 않은 (벽돌)책들이 대부분이다. 여전히 그 책들은 책장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번 주의 나는《타타르인의 사막》을 다 읽었고, 《서울리뷰오브북스 2호》를 드디어 펼쳤으며(이미 3호가 나온 지 오래이고 곧 4호가 나올 것 같다), 공쟝쟝님의 엮인글을 보다가 '무해함'이라는 단어에서 《서울리뷰오브북스 1호》에 실린 김홍중의 글(<무해의 시대>)이 떠올라 '무해'에 대한 간단한 단상과 함께 정리해보려 하였으나 생각보다 《일기》의 리뷰가 잘 써지지 않아 뒤로 미뤄두었다(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일기》의 리뷰는 처음으로 한글이 아닌 에버노트에 쓰고 있고, 컴퓨터로 쓰기 → 앱으로 종종 보면서 어색한 부분 찾기 → 다시 컴퓨터로 수정하기의 루틴을 반복하는 중이다. 오늘 처음으로 로지텍 블루투스 키보드(k380)를 사용해 보았고(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노트북 자판과 사뭇 다른 위치 감각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다...


책들을 정리하고 보니 은근히 모이기 시작한 시리즈들이 많은데, 다행히 나는 누군가가 1권을 선물하면 그것을 전부 사야 할 정도의 책수집벽을 가진 것은 아니어서 전체를 모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시리즈는 그리 많지 않다. 몇 개만 나열하자면 이렇다.


1. 조르주 페렉 선집(수집완료)—문학동네 컬렉션이 있지만, 펭귄클래식코리아에서 나온 《사물들》과 《W 또는 유년의 기억》, 열린책들에서 나온 《임금 인상을 위해 과장에게 요구하는 기술과 방법》까지 모아야 시리즈가 완성된다. 다 모았으나 내가 읽은 건 《사물들》,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공간의 종류들》뿐이다.













































2. W. G. 제발트 전집(수집완료)—여기저기에 쪼개져 있는데, 제일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건 역시 문학동네 쪽이다. 창비에서 나온 책은 구판본을 이미 가지고 있었지만 개정판이 (저렇게 깔끔하게) 나와서 새로 구입했고, 《공중전과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3.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수집중)—가장 열심히 모으는 것 같지만 이 중 몇 권이나 읽을 수 있을지(아니, 읽을 능력이 될지) 알 수 없는 책들. 《일반 기호학 이론》은 앞부분을 읽다가 너무 어려워서 덮어두었고, 제대로 읽어본 것은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와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정도다. 내가 무엇을 안 샀는지 헷갈릴까봐 따로 메모를 해두는 컬렉션이기도 하다..


(x가 구입한 것이고, 빈칸은 아직 구매하지 못한 것이다.)


이 외의 시리즈들은 많아도 다 모으겠다는 생각까지는 미치지 않는 것들이다.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 안토니오 타부키 선집, 조르조 바사니 선집, 워크룸프레스의 제안들 시리즈 등등... 언제나 책을 둘 공간을 고민해야 하는 입장에선 이 정도에 그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한편, 지난주에 했던 주문 중 여태껏 오지 않은 책들이 있었다. 한 권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최근에 이제는 준비가 되었나 싶어서 알라딘에 들어가 본 나는 처음 보는 광경을 목격했다. 출판사에서도 재고가 없어 제작 중이라는 알림을.



현재 알라딘에 들어가 보면 《여름 별장, 그 후》는 일시품절 상태라고 뜬다. 제작 중이라는 것은 한 쇄를 새로 찍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한 권만 만들고 있다는 것일까? '모던 클래식' 시리즈를 하나씩 철수시키고 있는 듯한 민음사의 행보를 보았을 때는 한 권만 만들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한 명의 고객을 위해 그렇게 비효율적인 일을 할까 싶기도 하다. '모던 클래식' 시리즈 중 일부는 점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편입되고 있고(이것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작가 한정인 것 같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판형과 문장 부호 표기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안 좋은 소식이다. 더 사라지기 전에 '모던 클래식' 시리즈를 그러모아야 하는 것일까?


책장 정리에 대한 이야기에서 책에 대한 푸념으로 끝나는 페이퍼가 되었다. (나만 못 지킬까 전전긍긍하는 듯한) 연재에 대한 아이디어가 전혀 없는 시기가 (오래) 있고, 아이디어는 많지만 산만하고 아득한 상태로 정리되지 않아 쓰지 못하는 시기가 있는데, 오랜만에 후자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미 시간이 늦었으니 《일기》에 대한 감상을 조금이라도 끄적이러 가야겠다. 다음엔 조금 더 단정한 글을 연재하길 스스로에게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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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10-30 09: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귀여운 민트 알람시계도 이뻐요!!! 남의 집에 있는 책 보는 건 왜 이렇게 재밌을까요?? 더구나 이렇게 정성스런 페이퍼를 접하면 더 그런 것 같아요. 글은 나중에 쉬는 시간에 읽어 볼게요!!

아무 2021-11-01 19:10   좋아요 0 | URL
저 시계를 산 지 벌써 5년이 되어가네요. 알람 기능은 금방 고장이 나서 지금은 시간 확인용으로만 씁니다^^ 구경 중의 제일은 책장 구경인 것 같기도😉

공쟝쟝 2021-10-31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페이퍼도 참 좋으네요. 역시 페이퍼엔 책탑사진이 첨부파일로 들어가야 제 맛입니다. 그나저나 아무님의 책장은... 누가봐도 너무 문과적 문과적 문과적 책장이라고 하실 수 있겠습니다. 전 그래도 주식책이랑 비트코인 책 있음... 지난 달에는 김상욱의 양자역학 책도 구입.. (뭐래) 아무튼 책 수집이나 읽기에는 집착하지 않으나, 좋아하는 작가의 제목은 다 꿰고, 읽은 책에 대한 정리를 좀 해야 읽은 것 같은 느낌, 적어도 내 책장을 파악하고 있어야 안심이 됨(나만 아는 책장 범주화?!) 이런 것들은 저만 하는 것이 아니었더라는사실을 발견해 살짝 안도하며.
제 생각에는 말이죠. 글은 역시 잘 쓰려고 하면 절대 쓸 수 없습니다. 잘쓰려는 마음의 글을 살짝 미뤄두고, ‘이런 글‘을 쓰시기를 권해요. ㅋㅋㅋ ‘주간‘ 아무르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아무 2021-11-01 19:13   좋아요 1 | URL
이 댓글을 보고 분명 과학책도 좀 모았는데?라고 생각하고 찾아보니 과학 관련 책들은 전부 책탑의 맨 아래에 있네요? ㅋㅋㅋ 주식과 비트코인은 제가 정말 1도 몰라서 이제는 종종 걱정을 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살아가는 데 무리는... 없겠죠? 읽은 책에 대한 정리도 꼬박꼬박 해야 하는데 그것도 참 큰일입니다. 메모를 열심히 안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구요(내용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훨씬 많음). 응원과 격려에 감사드리고, 저도 ‘주간‘의 성공을 기원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