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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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한 이상주의자였던 적이 있었다. 정답만을 강요하는 사회/학교에서 자유를 찾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거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 스무 살이 되면 공부나 기타 행동에 대한 강요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낭만을 쫓는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시절. 교과서 속 지식이 아닌 진정한 앎의 세계를 찾아 헤매며 글을 쓰겠다는 신념으로 충만했던 시절. 그때의 나는 아마 주변 또래들과 내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남들과 달리 수능을, 좋은 대학을 넘는 진정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돌이켜보면 그저 책 몇 권을 더 읽었던 사람이었지만.


『인간 실격』을 읽으면서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때의 내가 요조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시기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성전처럼 떠받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다. 그때의 나도 요조가 품었던 질문 중 일부를 앓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가 아니어서, 그의 삶이 마냥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 역시 "인간"이라는 종의 질서에 편입되었기 때문일까?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19쪽)


어린 시절부터 요조는 자신이 '인간'과 다른 종(種)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요조는 인간에 대한 "최후의 구애"의 방법으로 익살을 선택한다. 익살은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타자의 경계심을 풀어주는 것이다. "음산한 도깨비 같은" 자신을 받아줄 수 없는 인간 세계에서 요조가 살아남는 방법은 스스로를 낮추는 익살이라는 연기였다. 하지만 요조가 동질감을 느꼈던 다케이치는 그의 연기를 알아채고, 그 앞에서 요조는 자신과 가까운 모습을 내보인다.


"나도 이런 도깨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40쪽)


그리고 호리키가 있다. 요조는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사람으로 다케이치와 검사를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호리키도 요조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것 같다. 다만 그는 "인간"답게 요조를 이용했을 뿐. 어쨌든 호리키와 만난 덕분에 요조는 자신에게 공포를 주는 "이 세상의 합법"에서 "비합법"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세상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를 질책하고,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파멸로 치닫는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파멸은 끊임없이 죄가 쌓이는 과정이다.


요조의 여성 편력은 그가 여자를 다른 인간만큼, 아니 그들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생물로 여겼다는 점에서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가 두려워하는 인간 세상의 원형이 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그가 창녀를 묘사한 부분을 보면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에게 항상 실체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세상의 남성성이 그를 여자와 "동류"라고 인식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언제나 인간과 세상에 몸을 움츠리고 있던 요조가 변한 것은 세상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서부터다. 호리키와의 대화 도중 그는 문득 세상이 실체 없는 것이 아닌 개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야비한 술꾼"으로 전락해 무뢰한으로 파멸해간다. 세상이 부여하는 억압과 멸시를 못 이긴 나머지 세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그가 무뢰한이 되어가는 과정 역시 자신을 '인간'으로 받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반항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97쪽)


요조의 파멸은 자신의 구애를 받아주지 않은 인간에 대한 도피 또는 반항처럼 읽히기도 하고, 소속될 수 없음에 대한 죄의식이 쌓이는/쌓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요조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요조가 보여주는 끊임없는 자기비하와 죄의식의 밑바탕에 나르시시즘이 깔려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난 요조가 아니라 요조 너머에 보이는, 자의식으로 충만한 다자이 오사무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亂麻)의 그 밑바닥...... 아아, 알 것 같다. 아냐, 아직...... 하며 머리에서 주마등이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115쪽)


죄와 벌을 반의어라고 생각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자신에게 내려진 벌이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는 이야기일까? 그렇다면 요조의 죄의식과 그의 삶에 부과된 비극은 별개라는 뜻인가? 여러가지 생각들이 뒤엉키지만 명료한 답을 내기는 어렵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그에게 커다란 벌이 닥쳤다는 것, 그에게 있어 "무구한 신뢰"의 상징이었던 요시코가 강간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그가 의탁했던 마지막 희망마저 더럽혀지면서 그의 몰락은 끝을 향해 간다. "신뢰는 죄인가요?"부터 "무저항은 죄입니까?"까지. 그리고 그 끝에는 "인간 실격"의 낙인을 찍는 정신병원이 있다. 인간 실격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요조를 바라보며, 요조가 끝내 속할 수 없었던 인간이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이 세계에 의문을 갖는 순간이 오지만(카뮈의 말을 빌리면,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순간이다), 요조처럼 세상의 모든 것에 민감해지고 그들과 어울릴 수 없음에 고통받다가 결국 파멸에 이르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요조처럼 앓는 듯하지만 결국 세상과 타협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신을 별개의 종으로 인식했던 요조를 자의식 과잉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격리시켜 버린 세상과 인간이 과연 옳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 소설에서 보게 되는 것은 끝없이 추락하는 요조가 아닌, 그를 끝없이 낙하하게 만드는 세상, 인간, 나, 우리다.


요조의 수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오랫동안 그를 불안과 공포 속에 가두었던 세상이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세상이라는 이름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받아줄 생각이 없다. 요조의 깨달음처럼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이 '인간' 세상의 진리지만, 지나가기만 할 뿐 세상의 폭력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 세상을 향해 작가는 말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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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8-2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의 이 책을 오래 전에 읽었습니다. 어빙 고프만의 저서를 보면서 오사무가 새삼 대단해 보였습니다. 고프만이 하고 싶은 페르소나 얘기....이미 오사무가 이 책에서 요조를 통해 극명히 보여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저는 이 책을 3번 읽었는데, 첨에는 왜 이따위 책을 작가가 썼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 책의 가치가 돋보였습니다. 아무 님의 리뷰로 다시 보니 새롭네요!^^

아무 2016-08-28 01: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는 읽으면서 고등학생 때가 많이 생각나더라구요 ㅎㅎ 고프만의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읽으면서 인간실격과 비교해보면 이 책이 새롭게 보일 것 같아요. 별점이 더 올라갈 수도..ㅎㅎ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독서 모임에서 다음에 다룰 책으로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선정했는데, 나는 이미 한 번 읽은 책이어서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방인』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대략 6~7년 전에 읽고 처음 읽는 것인데, 줄거리도 가물가물해서 몇몇 장면들만 기억하고 있고, 엄청 읽기가 어려웠다는 기억만 남아있다(그래서 난 지금도 『이방인』보다 『페스트』를 더 좋아한다). 이후 개정판이 나왔을 때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해서 사두긴 했지만 여태껏 한 장도 읽지 않았었다.
















1) 오늘의 한국어가 허용하는 한 가장 간결하고 단순한 문장과 단어로 번역하도록 노력했다. 가장 단순한 것이 항상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결코 아니므로 그에 따르는 위험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2) 독자의 가독성을 돕는 의역을 가능한 한 피하고 원문의 탈색된 문체를 그대로 유지, 표현하고자 했다.

3) 카뮈의 원문이 가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는 한,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인과 관계나 시간적 선후 관계에 대한 해석을 임의로 추가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 '2015년 새 번역에 부치는 말' (2015, 8쪽)


얼마나 바뀌었는지 비교해보자는 마음에 두 가지 판본을 대조하며 읽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지만, 읽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져서 1부의 1절, 뫼르소가 '엄마'의 장례를 치르는 부분까지 비교해본 뒤 포기하고 개정판에 집중했다. 앞 부분을 비교해보면서 눈에 띄었던 차이점은 이렇다. 1) 기존 전집판에서 "엄마"와 "어머니"가 혼용되어 쓰이던 것을 "엄마"로 통일했다(현재 2부의 앞부분까지 읽었는데, 뫼르소가 "어머니"라고 지칭하는 표현은 딱 한 번 나왔다). 2) 기존에 한 문장으로 번역했던 문장을 둘로 쪼개어 번역한 것이 많았다. 3) 기존 판본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던 이중 부정문을 많이 없앴다. 4) 부사어, 관형어 등의 수식어가 줄었다. 5) 기존에 한 문단으로 처리한 것을 둘로 나눈 것이 종종 있다. 기타 등등. "가독성을 돕는 의역을" 피했다고 하지만, 나는 개정판이 훨씬 잘 읽히고 눈에 잘 들어온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 카뮈가 『이방인』에서 구사하는 구어체 느낌을 더 잘 살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방인』은 소설에서 흔히 구사하는 문어체(단순과거)가 아닌 구어체(복합과거)로 쓰여졌다. 자세한 것은 네이버 지식백과(링크) 참조)


특이했던 것은, 영안실 안에 있는 여자 간호사를 '아랍인' 여자 간호사라고 밝힌 점, 그리고 양로원 원장이 뫼르소에게 반말(정확하게는 하게체)을 하는 걸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간호사의 경우는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레몽의 여자도 무어인(전집판은 아랍인이라고 썼다)이었다는 점 때문에 그런지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 고민되는 부분이다. 반말의 경우, 뫼르소와 원장이 이미 서로 아는 사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존대에서 반말로 바꾸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음 부분은 조금 마음에 걸린다.


층계로 나서자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조그만 영안실로 어머니를 옮겨놓았네. 다른 원생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원생이 하나 죽을 때마다 이삼일 동안 다른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거든. 그렇게 되면 일하기가 어려워져." (2015, 28쪽)


층계로 나서자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시신은 조그만 영안실로 옮겨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지요. 원내에서 사망자가 생길 때마다 2, 3일 동안 다른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일하기가 어려워진답니다." (2009, 24쪽)


원장에 대한 서술이 많지 않아서 성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무적이고 인정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없었는데, "하나 죽을 때마다"라는 표현에는 사무적이고 비정한 느낌, 원생들의 죽음을 귀찮은 일로 인식한다는 인상이 실린 것 같다. 과잉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런 몇 가지를 제외하면 개정판의 번역이 훨씬 나은 편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책의 구성인데, 전집판에는 사르트르의 해설, 피에르-루이 레의 카뮈 입문서 전문, 로제 키요의 논문이 함께 실려 있지만, 개정판은 김화영 교수의 해설만 실렸다. 해설이 감상에 방해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해설이나 부록을 다 읽어보는 입장에서 다양한 시각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가 그만큼 줄어 아쉽다. 김화영 교수의 해설도 60여 쪽에 이르는 분량을 자랑하고 나 역시 신뢰하는 편이지만, 민음사판에 실은 해설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아 자료를 상쇄할 만한 만족감을 주는 건 아니다. 나 같으면 양장본으로 안 만들고 저 자료를 넣었을 텐데... 괜히 양장본으로 만들어서 가격만 올랐다.


다시 읽으면서 눈에 띄는 점은, 햇살이나 빛에 대한 뫼르소의 서술이 상당히 안 좋게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 읽을 때는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문제의 총살 장면 이전에도 햇살/빛은 따귀를 때린다거나, 머리를 쿡쿡 찌른다거나, 눈이 피로해지게 만든다는 식으로 서술된다. 이런 것들이 일종의 복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미국판 서문'이나 '《이방인》에 대한 편지'에서 카뮈가 생각하는 『이방인』의 의미가 생각보다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점도 이번에 읽으면서 알았다. 예전에 나는 대체 무엇을 읽은 것인가... 이번에 다 읽고 나면 예전에 읽다 포기했던 사르트르의 해설부터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내용이 기억에서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장면, 뫼르소의 일갈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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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06-30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읽었는데 그 부분이 가장 인상깊었지요. 햇살이 따가웠다는 것. 거의 그 장면만 기억납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좋았구요.

아무 2016-06-30 09:51   좋아요 0 | URL
저도 이방인에서 기억나는 게 따가운 햇살과 마지막 부분에서 뫼르소의 일갈이에요. 시지프 신화를 읽고 다시 읽으니 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많이 띕니다. 이런 게 재독의 즐거움...^^

북깨비 2016-06-30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뮈 전집을 내고 나서 다시 같은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냈어요? 그럼 카뮈전집 시지프 신화를 샀는데 그것도 개정판이 나왔나요? 아흐응~ 전집본 하나씩 천천히 사모으려고 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일까요 ㅠㅠㅠ

아무 2016-06-30 11:03   좋아요 0 | URL
이방인 개정판은 작년 12월에 나온 걸로 되어 있네요. 시지프 신화는 이번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다시 나왔는데(번역자는 똑같이 김화영 교수) 많이 수정했다고 합니다. (http://blog.aladin.co.kr/m/mramor/8583402) 저도 새로 사진 않을 거 같긴 한데..ㅠㅠ 이미 갖고 있는 책의 전면 개정판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마음이 휘청하죠. 다시 사야하나 하는 마음에..ㅠㅠ

북깨비 2016-06-30 11:47   좋아요 1 | URL
흑흑 아무님 제 심정을 정확히 아시는군요. 시지프 신화를 불과 몇달전에 구입해서 더 휘청했어요. 그나마 표지가 새로나온 민음사 것보다 전집본 것이 맘에 들어서 위안이 됩니다.

cyrus 2016-06-30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정판이 나올 때 저는 구판은 책장 장식품으로 사용하고, 개정판은 도서관에서 빌려 봅니다. 구판과 개정판의 번역 차이가 크지 않으면 개정판을 사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사실 책 살 돈이 있으면 개정판도 장만하고 싶습니다. ㅠㅠ

아무 2016-06-30 17:23   좋아요 0 | URL
저도 웬만해선 개정판을 사지 않는데(아무래도 돈의 압박이..) 이방인은 번역 논란이 불거진 적도 있고 해서 궁금한 마음에 샀어요. 근데 생각보다 차이가 큽니다.. ㅎㅎ 시지프 신화는 못 살 거 같아서 도서관에 신청만 했어요. 언제 올진 모르겠지만..ㅠ
 
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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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것은 오웰의『1984』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다. 두 작품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으로 자리잡았고,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정치사회적으로도 자주 인용되는 텍스트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두 작품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들이 살던 시대는 "감독관들, 설계자들, 감시자들이 없이는 미래의 사회라는 것을 생각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디스토피아적 각본과는 정반대로, 이러한 결과는 독재나 종속, 억압이나 노예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체제'가 사적 영역을 '식민화'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선택하고 행동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혐의를 (옳게 혹은 그릇되게) 받고 있는 족쇄와 사슬이 근본적으로 녹아버린 데서 발생하였다. 질서의 경색은 인간 주체의 자유가 만든 인공물이자 침전물이다. 이 경색은 '브레이크를 푼' 전반적 결과이며 규제 철폐, 자유화, '유연화', 증가된 유동성, 재정·부동산·노동시장을 풀고 조세 의무를 풀어준 결과이다. (13쪽)


바우만은 우리가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시대를 액체근대, 또는 유동하는 근대로 규정한다. 그가 바라본 현대 사회는 단단하고 굳건했던 질서들이 액화된 사회, 공적인 것들이 사적 문제에 침식된 사회, 그로 인해 대문자 정치(Politics)는 사라지고 생활정치만 남은 사회, 아고라가 없는 사회다. 과거 비판이론은 사적인 자율성을 공공성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지만, 이제는 역으로 사적인 것이 넘쳐나는 생활세계에서 공공 정치가 자신의 기능을 되찾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두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오웰과 헉슬리의 시대를 지배했던 여호수아 담론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액체근대』에서는 해방, 개인성, 시/공간, 일, 공동체라는 다섯 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유동하는 근대를 고찰한다. 각각의 테마가 명료하게 나뉘어 논의되는 것은 아니어서, 각 장의 테마가 아닌 다른 테마들이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 구성이 허술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다섯 개의 테마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체 근대의 질서가 액화되면서 해방된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의 개인적 부담, 이 두 가지는 생산자 주체가 소비자로 전환되면서 도래한 소비자주의와 연결된다. 이는 일이 갖고 있던 위상이 훼손되어 "소비자의 미학적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고 즐겁게 해주는 능력 여부로 평가"되는 현실과도 관련되며, 자유와 책임의 무제한적 제공 아래 불안에 빠진 개인을 유혹하는 공동체주의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왜 현대 사회의 개인은 소비(쇼핑)에 집착하는가? 그것이 불확실성의 시대와 범람하는 사적 자유, 그리고 무한한 기회 속에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본보기, 생계에 필요한 기술과 같은 자기계발의 방법들도 쇼핑한다. 하지만 그것들 역시 조만간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며, 세상에 "무한한 목표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소비는 멈추지 않고 만족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 바우만이 비유한 대로, 고체 근대(생산자 사회)가 지향했던 것이 "건강"이라는 기준이었다면, 액체 근대(소비자 사회)가 지향하는 것은 "균형 잡힌 몸매(fitness)", 즉 콕 집어 정의내릴 수 없기에 도달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액화되고 이동성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공간은 여전히 무겁고 부동적(不動的)이며, 그로 인해 한때 정복의 상징이었던 공간의 가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동 역시 마찬가지다. 고체 근대 시기에 자본과 상호 결속을 유지했던 노동은 몸이 한결 가벼워져 전지구적으로 노는 자본을 따라가지 못한다.


오늘날 자본은 여행가방에 서류케이스, 휴대폰, 노트북만 담고 가볍게 이동한다. 거의 어디에서든 잠깐 머물 수 있고, 원하면 아무 때나 훌쩍 떠나면 된다. 반면에 노동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오늘날에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나 영원히 고정되어 있을 곳으로 예상되었던 그 장소는 예전의 확고함을 상실하였다. (95쪽)


이런 점에서 무거운 근대에서 가벼운 근대로 가는 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러나 그 골조는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좀더 정확하게는, '불확실성의 원천에 근접함'을 추구하는 일은 하나의 단일한 목표인 즉시성으로 좁혀지고 집중되었다. 더 빨리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 운동의 순간성에 가장 근접한 이들이 이제 세상의 지배자들이다. 그들만큼 빨리 움직이지 못하거나, 자유자재로 떠나지 못하는 범주의 사람들이 피지배자들이다. 지배는 도망가고, 결속을 끊고, '다른 어딘가에 있을' 능력과 이것들을 실행하는 속도를 결정할 권리에 있다. (193쪽)


그러니까 즉시성에 근접한 지배자란 소프트한 자본을 쥔 자를 말하며, 자본을 쥔 지배자는 더욱 더 가벼워지기 위해 노동이 소요를 일으킬 힘을 빼앗고 이동을 막아버린다. 대표적인 것이 합병, 감원 전략 같은 것들이다. 이를 막을 굳건한 질서는 이제 없다. 설령 누군가 막으려고 해도, 신속하게 빠져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끊임없이 자본과 이에 근접한 자가 도망가지 않을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 이 책이 출간된 지 15년이 넘었지만 저자가 바라보는 현실과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비슷하다.


그러나 자본은 전례 없이 초지리적이고, 가볍고, 모든 짐을 훌훌 벗어던진 채 실물 기반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이미 달성한 공간적 이동성은 지리적 구속을 받는 정치집행 주체들을 위협하여 순순히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도록 굴복시킬 정도가 되었다. 지역적 유대를 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다는 위협(암묵적이어서 그저 추정만 되는)에 대해, 책임감 있는 정부라면 그를 통해 이득을 얻고 정부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이 투자를 그만두겠다는 위협을 거두어들이도록 가능한 모든 정책을 실시하면서 최대한 신중하게 사안으로 다루어야 한다. (...) 역설적이게도, 정부들은 자본이 떠나겠다는 사전통고를 촉박하게 하거나 아예 통고조차 없이 훌쩍 떠날 자유를 확연히 보장해주어야만 자본을 제자리에 붙들 희망이 있다. (240-241쪽)


모든 것이 영구적 불확실성으로 귀결되고, 유대와 동반 관계마저 소비되는 사회에서 개인은 불안에 떨고, 자신에게 부과된 선택의 책임에서 회피하고자, 그리고 소속감을 통해 불안에서 해방되고자 공동체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우만이 보기에 현대(아마 90년대 후반일 것이다)의 공동체주의와 공동체들은 자기 주변에 산재한 문제들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개인의 부담을 잠시 벗게 해주는 "짐 보관소"로서의 공동체 또는 "카니발 공동체"이며, 개인의 고독을 해소해주기 위해 희생양을 찾는 "화약고 공동체"다. 이러한 (가짜) 공동체들은 '민족성'과 결합하여 희생양을 찾고, 폭동을 통해 카니발 의식을 치른다(바우만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예로 든다).


짐 보관소/카니발 공동체 들이 지닌 한 가지 효과는, 이것들이 흉내내고 있고(오도하는 방식으로) 맨 처음부터 복제하거나 만들어보겠다고 약속한 '진짜'(즉, 포괄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공동체로 모아지는 것을 제법 효과적으로 피해간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미처 분출되지 못한 사회성의 충동들을 집약하는 대신 분산시킴으로써, 극히 어쩌다 한 번씩 드물게 일어나는 조화롭고도 합심을 이룬 집단적 행동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그러나 허망하게 구제책을 찾으면서 고독을 영구화하는 데 기여한다. (319쪽)

 

그렇다면 이미 막을 수 없을 만큼 액화된 시대에 사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인가? 바우만은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하는 사회학의 임무를 답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거리를 두고 시간을 내는 것", 그리고 "장차 닥칠 숙명을 초래하는 복잡한 원인의 그물망을 알아내는 것"이다.


몇 달 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저지르는 행동을 악한 행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아마 '악의 평범성'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말이 나온 듯하다), 나는 그때 프리모 레비의 말을 인용하면서 모르는 것,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논지의 발언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죄'라는 말이 너무 격했던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그때와 지금의 내 생각은 많이 바뀌지 않았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 세상에 던져졌다면, 그리고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 주변의 문제가 무엇인지 관심을 두고 지켜보아야 하지 않을까. 비록 '즉시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문제들, 뉴스들은 "가장 빨리 상하는 상품"이 되었지만, 적어도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문제에 대한 자기 주관을 세울 만큼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바우만이 생각하는 '사회학의 쓸모'일 것이고, 하루에도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 수도 없이 보도되는 현실에서 사회학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 요청되는 이유일 것이다.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질문 없이 "TINA(There is no alternative)라는 주문"을 외우는 행위는 오늘날의 액체 근대 사회에서 겪게 되는 불행들을 보지 않겠다는 안이의 소치다.

사회학을 하는 길에서 `참여`와 `중립`을 선택할 여지는 없다. 참여하지 않는 사회학은 아예 불가능하다. 대놓고 밝히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부터 철두철미한 공동체주의적 입장까지 오늘날 통용되는 수많은 사회학 상표들 한가운데서 도덕적 중립 입장을 취하려 한다면 이는 헛된 노력이다. 사회학자들은 자신들의 글이 지닌 `세계관`의 효과나, 인간의 개별적 혹은 연대의 행동에 그 세계관이 미치는 여파를 부정하거나 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모든 다른 인간들이 나날이 직면하고 있는 선택의 책임을 저버리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사회학이 하는 일은 그러한 선택들이 진정 자유로운지, 인류가 지속되는 동안 그 자유가 유지되는지, 더욱 더 자유로워지는지 잘 살펴보는 일이다.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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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8-2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웰과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이 있었던 건, 예브게니 짜마친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요. <우리들>을 보면 오웰과 헉슬리가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 대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무 2016-08-28 01:09   좋아요 0 | URL
저도 짜마친의 <우리들>이 그 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를 듣고 진짜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아마 9월에는 구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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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다 읽고 나서 오는 저릿한 감정은 말로 어찌 설명할 수 있을지. 오늘은 사랑하지만 내일은 모르겠다는 양희에게 난 반했다. 덤덤한 수준을 넘어선 부동(不動)의 관계가 내게 주는 떨림. 자신의 청춘을 바친 기업에 팽()당한 뒤 살아가는 필용, 그는 다른 메뉴로 바뀌지 않고 사라져 버린 피시버거인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은 그냥살고 있는 양희의 모습은 비웃질 않는 나무 그 자체 같다. 삶을 마주하는 자세는 서로 다르지만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한낮을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런데 문득 조중균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돌아가는 길에 필용은 맥도날드에 더 이상 피시버거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고 아예 사라져버린 그 메뉴란 것에 대해. 만약 피시버거가 사라지지 않고 뭔가 비슷한 것으로 바뀌었다면 불쾌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주 결연하게 사라졌단 말이지. 이제 맛볼 수조차 없게 아주 그냥 끝. 다신 맛 못 봐, , 끝이야, 아주 없어, 이렇게. A가 유사한 A'B가 된 것이 아니라 AA인 채로 사라져버렸다는 건 햄버거 같은 정크 푸드의 역사에서도 아주 비장한 신이었다. (11)


필용과 양희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필용이 앞으로 펼쳐질 인생, 그 과정에서 반드시 이겨내야 할 어려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나서야 갖게 될 성취와 인정에 대해 상상하며 지냈다면 양희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양희에게는 현재라는 것만 있었다. 하지만 그 현재는 지금 생생하게, 운동감 있게 펼쳐지는 상태가 아니라 안개처럼 부옇게, 분명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게 풀풀 흩어지는 것에 가까웠다. 뭔가 생활 자체가 그랬다. (15-16)


사랑한다며?”

,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

사랑하는 건 맞잖아. 그렇잖아.”

,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22)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양희가 돌아서서 동네 어귀의 나무를 가리켰다. 거대한 느티나무였다. 수피가 벗겨지고 벗겨져 저렇게 한없이 벗겨져도 더 벗겨질 수피가 있다는 게 새삼스러운 느티나무였다.

언제 봐도 나무 앞에서는 부끄럽질 않으니까, 비웃질 않으니까 나무나 보라구요.”

필용은 양희 뒤에 서서 양희에게로 손을 뻗어보았다. 닿지는 않았다. 앞으로 한 걸음만 더 옮기면 손이 닿을 수도 있었지만 필용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 간절함으로, 연민과 구애의 감정이 뒤엉킨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는 걸, 자기 자신만은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필용은 말없이 르망에 올라탔다. 문산까지 오는 동안 필용이 전율했던 사랑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주 뻥 뚫린 것처럼 없어지고 말았다. 필용은 울었다. 울면서 무엇으로 대체되지도 좀 다르게 변형되지도 않고 무언가가 아주 사라져버릴 수 있음을 완전히 이해했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38)


시간이 지나도 어떤 것은 아주 없음이 되는 게 아니라 있지 않음의 상태로 잠겨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남았다. 하지만 그건 실제일까. 필용은 가로수 밑에 서서 코를 팽 하고 풀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뭔가가 바뀌었을까. 바뀌면 얼마나 바뀔 수 있었을까. 가로수는 잎을 다 떨구고 서서 겨울을 견디고 있었다. 필용은 오래 울고 난 사람의 아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질문들을 하기에 여기는 너무 한낮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정오가 넘은 지금은 환하고 환해서 감당할 수조차 없이 환한 한낮이었다. (43)


3. 정용준, 선릉 산책

 

대성당같은 엔딩은 현실에 없다. 잠시나마 한두운을 이해했다고 여겼던 착각은 정해진 시간이 넘어서자 무너진다. 장애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오만이 아닐까. 그랬기에 결말은 모르겠다.”의 연속일 뿐.

 

4. 장강명, 알바생 자르기

 

문득 채만식의 치숙을 생각했다. 전적으로 은영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작가노트에 나온 것처럼 “‘교활한 서민층 어린애한테 걸려 고생하는 착한 중산층 여자 이야기냐’”고 읽을 수 있겠지만,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은영은 치숙만큼이나 신빙성 없는 화자다. 전체 구조에서는 을이지만 자기보다 못한 병의 입장인 혜미(대화체를 제외하면 그녀는 항상 이름이 아닌 여자아이로 불린다)에게 하는 행동은 유사-갑질과 다르지 않다. 더한 것은, 은영 부부가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어떻게든 퇴직금과 4대 보험료를 받으려 하고, “어시스턴트가 아닌 어드미니스트레이터로 기록된 서류를 받기 위해 따지는 혜미를 욕할 수 있을까. 단지 밀린 월급을 달라고 했을 뿐인데 동전 더미를 던져주는 현실에서, 혜미는 자기 나름의 생존법을 배운 것뿐이다. 사장과 은영의 입장에서 싹싹하지도 않고 나서서 일하지도 않는 혜미가 못마땅했겠지만, 이런 시각은 알바생들을 양산한 구조를 은폐하고 감춘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은영의 시점으로 풀어낸 건 그동안의 장편에서 보였던 작가의 중립적인 시선과 관련이 있는 걸까.


-그건 자기도 몰랐잖아.

-?

-걔 불쌍하다고, 잘 봐주려고 했었잖아. 가난하고 머리가 나빠 보이니까 착하고 약한 피해자일 거라고 생각하고 얕잡아 봤던 거지.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거든. 걔도 알바를 열 몇 개나 했다며. 그 바닥에서 어떻게 싸우고 버텨야 하는지, 걔도 나름대로 경륜이 있고 요령이 있는 거지. 어떻게 보면 그런 바닥에서는 우리가 더 약자야. 자기나 나나, 월급 떼먹는 주유소 사장님이랑 멱살잡이해본 적 없잖아? (170)


6. 최정화, 인터뷰

 

그를 나락으로 가라앉혔던 인터뷰의 원본. 항상 불안에 사로잡혀 있는 그는 어느 호프집에서 인터뷰의 사본을 각색해본다. 한 남성의 허위와 위선, 그리고 불안. 그를 이해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단둘이 남게 되자 나타나는 공감의 결여. 그리고 이를 간파한 남자의 불안이 또다른 사본을 만든다. “아니, 남자였습니다.” 하고.


최정화의 소설 속에서 인간은 내면과 사유가 결여된 공허한 존재이다. 그들은 정합성 없는 사회(언론)를 신봉하고, 타인들의 환심을 사는 데만 신경을 곤두세운다. 키르케고르는 불안이 실존의 전제조건이 된다고 했지만, 최정화가 그려낸 불안한 현대인들에게는 개심이나 구원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다. 이런 회의주의로 말미암아 최정화는 이전 시대의 대표적 작가들과 구별된다. (261)


7. 오한기, 납치

납치라는 모티프가 작품 내용과 상관없이 계속 반복되면서, 떠올린 모티프를 소설로 만드는 데 실패한 작가의 ()일상사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이후 두 번째인데, 전에 읽은 게 더 나은 것 같다. 왜 그의 소설 속 화자는 모두 (실패한) 소설가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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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들의 사생활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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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삼각관계가 있다. '우현-순미-나(기현)', '그-어머니-아버지'. 삼각관계라고 정의할 관계는 아니지만, 이 3자 관계는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 어떻게 보면 이들 사이의 이야기를 통속적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루는 문장은 단단하고 강렬하다.


두 다리가 잘려나간 형을 사창가에 데려다주는 화자가 있다. 소설은 이 두 형제의 사연을 천천히 되짚으면서 시작한다. 우현과 순미 사이의 사랑과 이를 질투하는 나. 결국 '나'의 치기로 우현은 군대에 끌려가 두 다리를 잃었고, 순미도 잃었다. 그리고 이 셋은 모두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가 있다. 그녀가 평생동안 유일하게 사랑했던 그. 민들레 식당에서 처음 만난 둘은 영원한 사랑을 꿈꾸지만, 세상은 그 둘을 갈라놓았고 그가 임종을 맞이할 때가 되어서야 재회한다. 그리고 어머니만을 사랑했던 아버지는 그 과거를 알면서도 평생 그녀와 함께한다.


닮지 않은 듯 보이지만 닮은 두 관계에서 주목할 점은, 이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식물, 정확히 말하면 나무에 있다는 점이다. 우현이 산책하며 바라보는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는 거대한 물푸레나무. 숲 속에 서 있는 소나무와 소나무를 휘감고 있는 때죽나무. "식물과 교감하기 위해서도 진실"해야 한다며 식물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와 그의 사랑을 표상하는 야자나무.


그 열매가 태평양을 건너왔다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그것이 무슨 상징처럼, 예컨대 두 사람의 숨찬 사랑처럼 여겨지는 것이어서 숙연해졌다고 했다. 사랑을 걸었다고 했다. 그들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그 나무에다 전이시켰던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나무가 정말로 자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토양이 다르고 기후가 다르니까......" 그 말을 할 때 어머니는 울컥 속에서 치미는 무언 가를 삼켰다. 토양이 다르고 기후가 다르지만 보란 듯이 하늘을 향해 서 있는 한 그루의 야자나무가 그녀의 눈시울을 축축하게 하고 있었다. 상징목이라는 단어가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처럼 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177쪽)


화자인 '나'는 자신이 형을 불구로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다시 사진을 찍으라고 권유하기도 하고, 순미와 다시 만나도록 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가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어머니의 숨겨진 사랑 이야기, 순미의 숨겨진 상처와 대면하게 되고, 동물적인 충동과 욕망 속에 살았던 그는 점점 그들의 식물지향성을 이해하게 된다. 이때의 식물은 무동성(無動性)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인 나무, "좌절된 사랑의 화신"으로서의 나무를 말한다. 세상이 사랑을 허락하지 않아 나무가 되었다는 수많은 (우현이 수집한) 신화들 속에서, 그리고 삶에서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나무가 되어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는 순미의 꿈을 통해 작가의 식물지향성, 아니 나무지향성은 세상의 동물지향성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끝에 "기후도 풍토도 다른" 야자나무가 자라는 공간, 남천이 있다. 작가가 지향하는 나무-인간의 모습은 그의 단편 제목처럼 '신중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순미와 우현이 마침내 재회했는지는 결말에 나와있지 않다. 그들은 남천에서 재회했을까. 하지만 나는 재회하지 못했을 거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사랑은 결국 소나무와 때죽나무의 모습이어야 가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든, 통속적이고 진부할 수 있는 이야기를 형상화하는 건 작가의 문장이다.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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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6-06-13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요즘 이 책 읽고 있어요 ^^

아무 2016-06-13 17:19   좋아요 0 | URL
저도 <생의 이면> 읽은 뒤에 반해서 열심히 찾아읽고 있습니다 ㅎㅎ 어느 책을 읽어도 특유의 강철같은 문장이.. 여태껏 왜 몰랐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