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싸우듯이
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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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후장사실주의자로 알려진 8명 중에 소설가는 4명이다. 오한기, 이상우, 박솔뫼, 정지돈. 나는 오한기와 이상우는 포기했고, 박솔뫼와 정지돈은 아직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정지돈의 경우 「건축이냐 혁명이냐」, 「미래의 책」,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를 읽었었지만 무슨 내용인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단행본으로 쭉 읽다보니 흐릿하게나마 그림이 잡히는 듯했다. 물론 아홉 편의 단편 중에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없었지만, 정지돈의 작품론을 대충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홉 편의 단편들은 '장'과 '우리들'로 나뉘어 있는데, 이 기준은 작품에 '장'이라는 인물이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다. '장'으로 분류된 네 편의 단편은 공통적으로 어떤 인물이 책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그린다. 그 책은 가상의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기도 한데, 이 과정 중간중간에 특정 작가(사데크 헤다야트, 보리스 사빈코프 등등)와 관련된 사실들이 '인용'된다. 이것 때문에 그의 소설을 두고 지식조합형 소설이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인용은 기억상실에 걸린 '화자-나'(「뉴욕에서 온 사나이」)가 세계를 이해하려는 방식에 가깝다. 에리크가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판본을 모으고(「눈먼 부엉이」), 장이 일기에 사빈코프의 『창백한 말』을 받아적는 것(「창백한 말」) 역시 이와 연결되며, 작가가 소설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관련이 있다. 「일기/기록/스크립트」에서 인용되는 유리 로트만의 표현을 빌리자면, "날마다 반복되는 평범한 행위들이 의식적으로 예술 텍스트의 규범과 법칙을 지향"하는 행위시학의 방식, 예술과 삶이 뒤섞이는 방식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가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에리크는 자신도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글을 쓰라고 말했다.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는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고 했다.

- 「눈먼 부엉이」 (34)


장의 이야기는 그가 글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한 것이었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그에게 어느 날부터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문장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그 양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 노트를 가득 채웠으며, 회사 일에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는 쏟아지는 문장에 파묻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정신을 잃거나 몽유병자처럼 떠돌기도 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생소한 공원이나 카페, 건물의 계단 위였다. 장은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 「미래의 책」 (104-105)


'우리들'로 넘어가면 작품의 서사는 더 줄고 인용이 압도적으로 늘어나는데, 이 역시 '장'에서 살짝 드러났던 메타소설적 요소가 더욱 강화된 것이다. 「주말」은 어느 날 서해안의 항구들을 여행한 뒤 고다르의 「주말」(1967)을 보며 떠올랐던 이야기의 인용이며, 「건축이냐 혁명이냐」 역시 고다르의 「김중업」을 찾다가 발견하게 된 황손 이구와 그가 살았던 건축사(史)의 인용이고, 「나는 카페 웨이터처럼 산다」도 책을 찾다가 발견하게 된 프레데릭 키슬러와 레이몽 루셀에 대한 인용의 연속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작가가 소설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살짝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대화의 내용보다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며, "소위 말하는 미술품보다 이런 기록물이 더 미학적"이라는 것.


어느 순간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이라는 프랑스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그의 책 반딧불의 잔존이 국내에 번역되었다는 말을 하자 동기는 반가운 기색을 드러내며 지금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사진작가 아르노 지쟁거와 파리의 팔레 드 도쿄에서 환영의 새로운 역사Nouvelles Histoires de Fantômes라는 전시를 진행 중이며 전시의 부제는 새로운 유령의 이야기라고 했다. 전시장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과 아르노 지쟁거가 수집한, 언뜻 봐서는 연관을 찾을 수 없는 다양한 이미지와 수집물로 가득하며 그러한 이미지는 통상 말하는 예술적인 무언가가 아닌 단순한 기록 사진과 사소한 물품이 뒤섞인 것들로, 이를 통해 기획자들의 이미지의 도서관, 그러나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찾을 수 없고 고정된 정보가 존재하지 않으며 기묘한 확장성과 통일성이 있는 이미지의 궁전을 만들어냈다고 말하며 이는 아비 바르부르크로부터 이어져온 프로젝트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박찬경이 한 이야기, 자신은 이상하게도 1960년대에 찍힌 다큐멘터리 사진, 전혀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없는 사진을 보며 매력을 느끼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미술품보다 이런 기록물이 더 미학적이기 때문에, 빈티지한 취향이나 사회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아름다움 그 자체로서 그런 기록물이 앞서기 때문에 그런 기록물을 수집하는 행위로 작품을 만들어왔다고 한 말을 떠올렸다.

- 「건축이냐 혁명이냐」 (165) (강조는 인용자)


물론 나의 이 독법으로는 「만나는 장소는 변하지 않는다」를 설명할 수 없다. 이 작품은 화자인 '정지돈'이 엔카베데(소련의 정치경찰)에게 붙잡혀 콜호스로 가다가 돌아오는 이야기다. 이 작품에도 여러 인물들이 나오지만 내가 알아본 인물은 조지 스마일리밖에 없다... 물론 그것이 나에게 더 공부해야 되나라는 고민을 안겨주진 않는다. 이 소설집은 아는 만큼 보이는 소설들의 집합이고, 이 소설집이 아니었다면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을 인물과 책과 영화 들의 쓰나미 같아서 도저히 찾아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소설을 쓰는가.



인터뷰에도 나오지만 작가가 가장 큰 관심을 드러내는 사람은 장 뤼크 고다르다. 매체에 대한 고민과 문학과 예술에 대한 조예를 영화에 녹여내는 방식, 그리고 매체를 뛰어넘어 영화에 대한 정의를 바꾸겠다는 의지 등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고다르에 대한 이야기는 2분 10초쯤부터 나온다). 소설에 대한 그의 생각이 많이 녹아있는 글이 「일기/기록/스크립트」인데, 그는 서두에서 하스미 시게히코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미술도 문학도 어느 순간 연주자의 시대가 되었다"고. 이후 그가 니콜라 부리오의 "기호 탐험가semionaut"를 인용하며 지목하는 소설가는 제발트, 데이비드 실즈, 엠마뉘엘 카레르다.


데이비드 실즈는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2014)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위대한 인물이 방에서 홀로 걸작을 쓴다는 생각을 이제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병리학 실험실, 쓰레기 매립지, 재활용 센터, 사형선고, 미수로 끝난 자살 유언장, 구원을 향한 돌진으로서의 예술이다.” 그는 소설가였지만 어느 순간 픽션 쓰기를 그만둔다. 그는 자신이 끌어 모은 온갖 잡다한 메모와 기억을 콜라주한다. 그의 글은 논픽션인가, 에세이인가, 자서전인가. 이건 그냥 책이다. 빌렘 플루서는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1987)에서 새로운 창작자는 자기 스스로를 더 이상 독창적인 창작자로서가 아니라 언어 배열자로서 인식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가 조작하는 언어도 역시 그에게서는 더 이상 그 자신의 내면 속에서 집적되어 있는 원자재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을 매개로 배열되기를 그에게 강요하는 하나의 복합적인 체계로서 나타난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시간 흐름들을 짜깁기하고 있다. 그는 더 이상 행을 따라가면서 읽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망을 짜고 있다.” 잘나가던 소설가였던 카레르 역시 어느 순간 픽션 쓰기를 그만둔다. 카레르의 리모노프(2011)는 논픽션인가 팩션인가 에세이인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나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는 어떤가.

- 「일기/기록/스크립트」 (289-290) (강조는 인용자)


그는 사람들이 흔히 '형식'이라고 규정하는 것에 의구심을 품고 있는 듯하다. 현재에 적확한 형식이 있다는 환상을 부정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으려는 거부감이 그의 작품에서 움틀댄다. 그는 어쩌면 자신을 "어떤 사조가 개가를 올리는 그 시점에 이미 거기서 이탈"하려는 작가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는 "우리는 외친다. 볼라뇨라고."를 패러디해서 "우리는 외친다. 후장이라고."라고 외치며 열광하게 될까. 나는 이에 대해서 회의적이지만, 그들이 배수아나 정영문의 흐름을 새롭게 이으려고 노력하는 작가들로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거대한 잡학사전 같은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인용하고 있는 작품은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의 마지막 부분이다. 마지막에 모든 일에 실패하고 다시 필경을 시작하는 그들의 모습을 인용한 것은 필경-인용이야말로 새로운 예술-삶의 모습, 김수환이 『책에 따라 살기』에서 말하는 "책 읽기 모델"이라는 암시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소설이 앞으로 소설이 나아갈 새로운 방향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내 좁은 눈이기에 판단을 유보해둔다..

‘책에 따라 살기’는 유리 로트만이 쓴 표현으로 행위시학이라는 로트만의 연구영역의 "집중적인 고찰 대상"이다. 행위시학이란 "날마다 반복되는 평범한 행위들이 의식적으로 예술 텍스트의 규범과 법칙을 지향했으며 직접적으로 미학적인 것으로 체험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김수환에 따르면 삶과 예술을 섞어놓으려는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러시아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 예술-삶의 뒤섞임은 모든 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예술이 결과적으로 닿았던 최종적인 형태이며 작가들이 탐구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주제이다. 그러니까 김수환/유리 로트만의 ‘책 읽기 모델’은 예술-삶이 맞이하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 아닐까.
- 「일기/기록/스크립트」 (300-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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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30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리 로트만 진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영화적 서사와 소설의 서사인가... 뭐 그런 책이 있었었었는데 말입니다..

아무 2016-07-30 14:03   좋아요 0 | URL
저도 에코 때문에 기호학 공부를 해볼까 생각할 때쯤에 이름만 듣고 읽어보진 못했는데, 이번에 찾아볼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건 몰라도 지적인 자극은 충분히 준 소설집이었습니다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7-30 14:11   좋아요 0 | URL
정지돈 정지돈 하네요.. 여기저기서.... 그래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솔직히 고백하면 전 한국 소설 스타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 글 읽으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 2016-07-30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나면 실망하실지도 모릅니다. 저도 흥미롭지만 소설로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ㅎㅎ 그래도 영화에 대한 지식이 저보다 많으신 곰발님은 다른 재미를 찾으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전 고다르 영화를 한편도 본 적이 없어서..^^;;

곰곰생각하는발 2016-07-30 14:22   좋아요 1 | URL
전 제가 읽은 책 가운데 팔 할은 재미없어 하기에 추천한 책이 재미없다고 실망하지는 않습니다. 유독 책 거의 안 읽는 사람들이 추천해 달라고 해서 추천하면 재미없다고 지랄하더라고요...
그래서 책 안 읽는 사람이 책 추천해 달라고 하면 추천 안 합니다..ㅎㅎ

cyrus 2016-07-31 13:17   좋아요 1 | URL
To. 곰발님 // 캐공감입니다! 전 제 동생에게도 책 추천하지 않습니다. 동생이 책을 많이 읽지 않거든요. 보긴 하는데 거의 여행 에세이를 선호하기 때문에 제가 다른 분야의 책을 추천하는 의미가 없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7-3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실히 깨닫게 되죠. 책 안 읽는 사람에게 책 추천하다가는 욕만 잔뜩 먹는다는 사실. 책 추천은 알라디너끼리 하는 게 최상입니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김엄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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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삶'과 '생활'이라는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생활'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삶을 산다는 것은 착각이고, 사실 모든 것이 지리멸렬한 '생활'로 편입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주인공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무기력하다. 실제로는 열심히 무언가를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의 행동도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제스처가 아닌, 그냥 일상으로 편입되어버리는 소극에 불과하다. 그래서인지 단편 안에서 비슷한 문장 구조가 반복되거나 변주되고 이를 이용한 언어 유희가 종종 등장한다.


영철은 집에만 오면 밥 생각이 없어졌다. 그에 비해 아내는 온종일 밥 생각뿐이었다. 그녀에게는 끼니 해결이 하루 일과 중 가장 큰 고민이었다. 영철이 출근한 뒤에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었고, 영철이 퇴근한 뒤에 그와 함께 먹는 밥은 더 맛이 없었다. 그녀는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고민을 토로했다. 엄마, 뭘 먹어도 맛이 없어. 나 알지? 뭐든지 맛있게 먹는 거. 김영철이랑 같이 살면서부터 입맛이 죄다 떨어졌나 봐. 어쩌면 좋아? 친정 엄마는 오이지와 게장을 추천했다.

- 「영철이」 (87쪽)


나도 며칠 그랬어. 그럴수록 잘 먹고 잘 자야 돼. 당신 밥은 잘 먹고 살아? 아내가 물었다. 밥맛이 없네. 혼자 먹어도 맛이 없고, 동생 식구랑 같이 먹으면 더 맛이 없으니. 아내는 영철에게 오이지와 게장을 추천했다. 

- 「영철이」 (106쪽)


비슷한 문장이나 단어의 반복이 주는 리듬감이나 언어 유희가 단편들을 읽는 하나의 재미이긴 하나, 이것이 가끔 과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이를테면 "괜찮찌개" 같은 것들(「그의 사정」). 이런 문장의 반복들이 특징없는 인물들과 결합하면서  무의미함과 덧없음이 증폭되는데, 이런 인물들을 그려내는 데는 작가의 세계관이 한몫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는 "떡이나 개, 가끔은 좆"으로 요약되는, 원하는 고기를 먹기 위해 사장이 주는 "그 개 같고 좆같은 떡을" 받아먹으며 자아실현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돼지우리의 세계다.


라라 양은 내가 아는 돼지 중에 가장 똘똘하고 예뻐요. 내가 잘 먹이고 잘 키워줄게요. 뭐든지 잘 먹어야 해요. 자, 아아. 사장은 서빙 아줌마가 놓고 간 인절미를 라라의 입 앞에 내밀었다. 그다음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아앙. 라라가 그 개 같고 좆같은 떡을 받아먹은 것이다. 라라는 인절미를 모두 삼킬 때까지 웃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저것이 라라가 말하는 직업윤리와 자아실현의 길이라면, 과연 그녀는 돼지였다.

- 「돼지우리」 (28쪽)


떡 이외의 모든 음식에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우라라가 사장이 주는 떡을 넙죽 받아먹는 장면, '나'가 자신의 손이 "돼지 족"이 되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은 '돼지우리'라는 고깃집 이름과 연결되며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우라라와 '나'는 사장에 대한 강한 거부감도, 번듯한 직업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도 보여주지 않는다. 우라라는 의식주 중 '식'만을 중요하게 여겼기에 고기만 먹으면 되는 (비)정규직에 지원했을 뿐이고, '나' 역시 불어오는 살을 바라보며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돼지우리 속에서 살아가는 돼지족(族)의 자화상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이들이 보여주는 일상은 현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하루하루를 들여다보면 제각기 다른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것들이 삶의 전환점이 되거나 의미를 획득하지 않고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듯이, 그들이 도박장에서 운수 좋게 삼뻑을 하거나, 바다로 갑자기 떠나거나, 어떤 새 폴더도 아닌 '느시' 폴더에 매뉴얼을 저장하기로 하는 행동들도 어떤 전환점이 되지 않고 일상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Y에게 사기를 친 김수동이 누군지(「어느 겨울날」), 왜 하필 '느시' 폴더인지(「느시」), 왜 E가 발목을 돌리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지(「고산자로12길」)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어차피 작가는 해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단편들은 발표된 순서대로 실려있는데, 뒤로 갈수록 안 그래도 약했던 인물들의 활동은 점점 더 축소되는 모습을 보이고, 점점 더 무기력해진다. 심지어 「고산자로12길」과 「느시」로 가면 인물들은 이름마저 상실하고 a, b, c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회사에서 얼마든지 대체가능한 일상을 보내는, 일하다가 다른 듯 비슷한 메뉴의 점심을 먹고 뒤풀이를 하는 패턴만 보여줄 뿐이다. 단편집을 처음 읽을 때는 충격적일 만큼 단조롭고 무기력해서 흥미있게 읽었지만(무사건성이라고 불러야 할까?), 신선함에 익숙해진 뒤에도 이런 작법이 의미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시의성은 가질 수 있겠으나, 삶과 생활의 경계마저 붕괴된 인물들의 무기력한 삶을 그려낼 뿐 질문을 품고 있지는 않다는 인상평으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아마 그래서 등단작인 「돼지우리」가 제일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장편소설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건 나는 이제 직업을 가진 거야. 여기가 내 첫 직장이니까 축하나 해줘. 나는 직업윤리를 엄수하는 성실한 일꾼이 되겠어. 라라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진짜 내가 돼지가 되었다 치자. 너도 들었지? 본연의 모습을 찾는 거래. 자아실현이야. 그거야 말로 내가 바라는 거야. 이제 떡 같은 면접은 집어치우는 거야. 자유야 자유. 나는 내가 되는 거야. 돼지가 되는 거라고. 라라는 입을 크게 벌리고 괴상스럽게 웃었다. (「돼지우리」, 27쪽)

너는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냐? 대뜸 영철이 팔광에게 물었다. 테트리스요. 팔광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테트리스? 벽돌 쌓는 게임 말이냐? 영철이 소주를 홀딱 원샷하며, 되물었다. 그냥 쌓기만 하는 거 아니에요. 이상하게 쌓으면 죽어요. 잘 쌓아야지 없어지고 다시 쌓을 수 있어요. 또 쌓고 없애면, 벽돌이 내려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요. 나는 그 속도를 따라서 계속 쌓고 없애야 돼요. 속도를 못 따라가면 나는 죽어요. 없애기 위해서 쌓는 것 같지만, 쌓기 위해서 없애는 거예요. 팔광은, 테트리스를 신앙 삼은 듯, 허공에 대고 빠르게 이야기했다. 미친놈, 그게 왜 인생이야? 영철이 헛웃음 치며 물었다. 죽으면 열 받거든요. 팔광이 단호히 대답했다. (「삼뻑의 즐거움」, 42-43쪽)

행복이 뭐예요? 다섯 살 된 영철의 조카는 TV를 보다가 이것저것 영철에게 자주 물어보았다. 행복이 뭔지 모르니? 영철이 조카에게 되물었다. 몰라요. 조카가 대답했고, 나도 몰라, 너도 죽을 때까지 모를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제 너희 아버지가 케이크를 사 와서 네 기분이 어땠니? 조카에게 물어보았다. 빨리 초 켜고 싶었어요. 불 끄고 먹고 싶었어요. 빨리 먹고 싶었어요. 조카는 어제 먹은 케이크의 기억이 생생했는지 양팔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게 행복이란다,라고 영철은 말해주려다, 아이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니 어쩌면 조카에게는 그것이 행복일 텐데 싶어서, 그게 행복이란다, 말해주려다, 아무래도 영철이 생각하기에 행복이란, 행복이라는 게 그러니까 그렇게 그런 게 아닌데 싶어서, 그랬구나, 케이크를 좋아하는구나,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철이」, 103-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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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2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집 읽었씁니다. 말장난 같다고나 할까요. 적당히 쓰면 좋은데
과도하게 쓴 느낌.. 오히려 말장난을 위해서 서사를 비튼 것 같기도 한 작품 읽은 듯한 느낌..
뭐야. 이거 이런 생각이들더군요..

아무 2016-07-21 13:47   좋아요 0 | URL
말장난이 과하다는 느낌이 분명히 있죠. 사실 뒤로 갈수록 서사도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 작품이라.. 언급하지 않은 작품은 개인적으로 정말 별로여서 할 말이 없었던 작품입니다. 표제작이라든가.. 기타 등등..
한번쯤은 읽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른 작품도 계속 볼지는 잘 모르겠네요 ^^;;

cyrus 2016-07-2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장난은 곰발님처럼 읽는 사람 마음을 밀당하면서 써야 재미있습니다. 이 책을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괜찮찌개’는 억지스러운 표현으로 느껴집니다.

아무 2016-07-21 14:47   좋아요 0 | URL
`괜찮다`는 말을 반복, 변주하면서 나왔던 말이었습니다. 그것도 밑줄에 적으려다 그냥 안 적었는데.. 말장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밀당이죠. 제가 매번 곰발님 글을 보며 감탄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요즘 마음속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 중 가장 큰 것은 당연히 사드 배치 문제와 개돼지 발언이다. 하지만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는, 언론에서 '문학동네발(發) 공급률 인상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출판사와 서점 사이의 문제다. 나는 이 소식을 문학동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처음 접했는데, 여기에는 온라인서점과 도매 유통사에 대한 공급률을 인상하면서 보낸 공문과 이로 인해 타격받을 수 있는 중소형서점에 직접 거래를 제안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https://www.facebook.com/munhak/posts/1740862802595651)


인상과 관련해서 국민일보에 기사가 났고[(링크)문학동네, 공급률 인상서점계 동네서점 죽이기반발], 문학동네에서는 이 기사에 대한 반박문을 다시 페이스북에 올렸다(홈페이지에도 올라갔을 것이다). 요지는,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의 공급률 인상을 위해서는 도매 유통사 공급률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것. 국민일보의 기사는 오보이며 한쪽의 입장만 들은 악의적인 기사라는 것. 인상으로 인해 운영이 어려워진 동네서점의 경우 직접 주문해달라는 제안을 했다는 것(입장 전문 링크). 결국 갈등 끝에 문학동네는 공급을 중단했다. [링크_문학동네, 서점에 책 공급중단]


페이스북에서 이 게시물을 읽기 전까지 나는 공급률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몰랐기 때문에 출판 관련 이슈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이것이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급속하게 추락하고 있는 출판업계의 실태를 보여준다는 사실은 알 것 같다. 소위 대형 출판사라고 불리는 문학동네도 몇 년째 신규 사원 채용을 못한다는 사실은 참 아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문학동네가 취한 행동이 무조건 옳다고 지지하기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있다.


1) 문학동네는 중소형서점이 주문할 경우 선입금 조건을 걸었으며, 10권 이상 주문할 것을 요구했고, 반품률을 8% 이내로 고정시켰다. 이는, 중소형서점이 직접 거래를 하기 위해서 항상 일정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어야 함을, 그리고 책의 판매율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소위 3대 문학 관련 출판사 중 가장 규모가 큰 문학동네의 책을 모두 현금으로 구매할 수 있을 만큼의 자금력이 중소형서점에 있을지, 작금의 출판 현실을 고려해보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2) 두 번째 입장을 발표하면서 문학동네는 글 말미에 '본 게시글에 공감해주시고 공유해주신 분들 중 500분을 추첨해서 문학동네가 역량 있는 신예작가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제정 시행하고 있는 ‘젊은작가상’ 올해 수상작품집을 선물해드리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달았다. 이건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대형 출판사가 논란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한국의 역량 있는(적어도 문학동네에서 있다고 판단한) 신예작가들의 작품이 이런 언론 플레이에 이용할 수단밖에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도서정가제가 출판업계에 미친 영향으로 옮겨간다. 나는 보통 기사들을 볼 때 댓글을 꼼꼼히 보는데(보고나면 마음이 항상 좋지 않은데도 계속 본다), 책값이 왜 이렇게 비싼가, 도서정가제 단통법 폐지 안하냐는 댓글이 대다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책이 그 가치에 비해서 헐값에 취급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다른 문화생활에 비해 책 소비에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출판업계도 지금 상황에서 책값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종이의 재질 문제나 양장본 남용 문제 등등. 물론 이런 걸로는 새발의 피겠지만.


출판업계도 억울한 점이 있을 것이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출판사의 리퍼브 도서 판매는 금지시키면서 중고서적 판매는 허용하는 등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에 유리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으니까. 그런 불만이 쌓여서 문학동네가 총대를 멘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도매 공급률을 올리는 것이 인터넷서점 및 대형서점에 영향을 줄 것인지, 아니면 중소형서점만 덤태기를 쓰고 사장(死藏)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내 좁은 소견으로는, 문학동네가 지금 취하는 행동은 '아니다'라고 말할 것 같다.


법에 대해서도, 출판계 사정에 대해서도 모르는 일개 독자의 입장이라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섣불리 판단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다만 일개 독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워낙 굵직굵직한 일들이 터지고 있는 요즘이라 중요한 일임에도 그들만의 리그로 묻히는 것 같아 안타까워 몇 자 적었다. 물론 나는 무슨 이슈를 가리려고 이걸 터뜨렸네 하는 음모론을 믿지 않는다(너무 속이 빤히 보이는 북풍은 제외하고). 다만 하루에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사건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아수라의 세계에 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모든 일에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것뿐인데, 이것은 눈뿐만 아니라 마음의 힘도 필요하다..


+) 정가제 시행 이후 도서 매출이 전체적으로 급감했다고 하는데, 인터넷서점은 10% 할인 + 5% 적립금까지 주면서 무슨 돈으로 굿즈에 사은품까지 이것저것 주는지 내 좁은 소견으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알라딘 17주년 이벤트에 참여해 굉장히 많은 상품을 받았다. 본투리드 에코백, 『가만한 당신』 신문, 부채, 마음산책 스티커, 엽서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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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3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13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7-13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번 상황은 씁쓸하네요. 뭐 저도 상품에 욕심이 많은 놈이지만, 저런 출판사의 홍보는 불편하게 느껴져요. 선물을 내세워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동시에 출판사를 옹호하는 독자들의 반응을 확인시키는 고도의 전략 같습니다. 이러면 독자들은 일방적으로 출판사의 편을 들어주게 됩니다.

아무 2016-07-13 16:56   좋아요 0 | URL
페이스북 댓글 반응은 8대2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꼭 사은품 때문이라고 볼 순 없겠지만, 너무 저급한 전략이라 말이 안 나왔습니다..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수작으로도 보이고.. 공급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듯 싶습니다..

samadhi(眞我) 2016-07-14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 하는 짓이 꼭 남양유업 행태랑 비슷하군요. 제가 무척 좋아했던 출판사인데 정말 씁쓸합니다. 누구를 위한 도서정가제인지. 언 놈 뱃속으로 눈 먼 돈이 들어간 건지...

아무 2016-07-14 08:51   좋아요 0 | URL
남양우유는 지금도 안 먹습니다. 문학동네 저도 참 좋아했는데,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줄은 몰랐네요. 다 어렵다고 하면 돈 챙기는 왕 서방은 대체 누구인지 참...

Aid. 2016-07-20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인터넷 서점 같은 경우에는 할인율이 고정되면서 예전 할인해주던 금액이 수입으로 들어오니 그 금액으로 굿즈 등 이벤트에 더 힘을 쏟고 있는거 같아요.

아무 2016-07-20 17:33   좋아요 0 | URL
아마 그렇겠죠? 여러모로 적립금 혜택이나 굿즈의 비중이 많이 늘었습니다. 전 차라리 그 돈이 책의 품질에 갔으면 하는데요.. 이 글을 쓴 이후에도 몇 번의 입장발표와 기사가 있었는데, 볼 때마다 답답한 건 똑같습니다. 전국서점조합연합회도 그렇고, 문학동네도 그렇고...

cyrus 2016-07-21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문학동네가 서점 공급률 인상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를 했더군요.

아무 2016-07-21 14:23   좋아요 0 | URL
검색해보고 알았습니다. 아직 문학동네 페이스북에는 안 올라왔더군요. 요 며칠 동안 계속 확인하다가 `서점연합회와 문학동네에 고함`이라고 쓸까 하다 참았는데.. 감시 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이긴 하지만, 며칠 간 이루어진 논의에 독자는 안중에도 없더군요. 결국 독자층이 늘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는 문제겠죠..
 
에리직톤의 초상 이승우 컬렉션 1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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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의 여신 데메테르의 신성한 정원에는 숲의 요정들이 둘러싸며 놀던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에리직톤은 요정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를 도끼로 쓰러뜨렸다. 분노한 데메테르는 리모스를 보내 그에게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느끼는 저주를 내렸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음식을 먹어치웠지만 배고픔을 면할 수 없었다. 부자였던 그는 음식을 구할 돈이 더 이상 없게 되자 자신의 딸까지 팔았다. 아버지에 의해 팔려진 그녀는 예전에 자신의 순결을 앗아갔던 포세이돈에게 도움을 청했다포세이돈은 그녀에게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변신의 능력을 주었다. 그녀는 모습을 바꾸어 그녀의 주인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그녀의 능력을 알게 된 에리직톤은 되돌아오는 딸을 다시 팔아가며 허기를 채워나갔다. 그러나 그의 끝없는 배고픔은 자신의 몸을 모두 뜯어먹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설은 데메테르가 아닌 시어리어스의 숲이라고 적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저격사건을 모티프로 창작된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병욱('나')를 제외하면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정상훈 교수와 그의 딸 혜령으로 대표되는 수직지향적 인물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며, 수직적 관계의 회복 없이 수평적 관계의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혜령은 후반부에 가서야 이를 명시적으로 드러낸 듯 보이지만 이전의 모습에서도 이런 세계관을 지니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정상훈 교수의 설교를 잠시 보자.


그런데 눈치채셨겠지만 인간이 인간을 향해 저지르는 이런 수평적 폭력은 신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폭력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아벨이 카인에게 무슨 짓을 해서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둘 사이에 분리가 일어났을 뿐입니다. 아벨은 카인이 아니고 카인은 아벨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신과 인간 사이 관계의 궤멸이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의 궤멸을 불러냅니다. (...) 절대자와의 비뚤어진 수직 관계를 방치하고 인간 사이의 평등한 관계만을 기획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21쪽)


이와 반대로 형석과 태혁, 델브루케로 대표되는 수평지향적 인물들이 있다. 이들의 눈에 신이나 신화로 대변되는 수직과 초월의 논리는 현상 구조의 영구화에 기여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들의 동기는 각각 달랐지만, 절대자의 논리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닮아있고, 에리직톤의 초상(肖像)들이다. 결국 그들이 지향하는 것은 신화의 해체이며, 그를 통해 실현되는 해방이다. 태혁이 쓴 글처럼.


이 에리직톤의 신화와 기본적으로 구조가 같은 설화가 「출애굽기」에서 발견된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는 에리직톤의 다른 이름으로 읽을 수 있다. 에리직톤이 실패한 싸움에서 모세는 승리한다.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두 사람의 차이는 그것뿐이다. (...) 그리하여 비로소 인간을 억압하는 잘못된 신화가 해체되면서 경이적인 새로운 신화가 싹트기 시작한다. 새로운 신화 속에서 신적인 힘은 이제 더 이상 억압적인 절대 권력을 후원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잘못된 권력 구조를 영속적으로 보장해주는 대신 억눌린 자들의 옹호자, 노예들의 구원자로 다시 태어나는 신적 권위를 만난다. 신화에 기댄 권력은 사실상 붕괴되고, 안정과 질서의 신화는 자유와 해방의 삶으로 대치된다. 모세에게 와서 비로소 에리직톤은 명예를 회복한다. 그러니까 모세는 비신화화한 에리직톤이다. (244-245쪽)


나는 기꺼이 에리직톤이기를 원한다. 에리직톤의 신화를 부수기 위해 더 많은 에리직톤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에리직톤들이 결속하여 마침내 신화를 부수게 되는 순간에 얻게 될 빛나는 이름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모세이다. 즉 해방자이다. (...)

그러니까 신은 신화를 거부한다. 신화를 창조하고 신화 속에 안주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들, 신과 신화를 이용해 현실을 유지시키려는 자들이다. 신을 신화 속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246-247쪽)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근거한 작품이고, 그만큼 관념적인 색채가 짙다. 하지만 1부에서 중심을 이루던 신과 인간의 관계는 2부에서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결합하며 새로운 의미들을 파생시킨다. 81년에 발표했던 1부에 2부가 붙음으로써, 정확히 말하면 태혁이라는 인물이 추가됨에 따라 관념들이 형체를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태혁이 에리직톤에 새롭게 부여하는 의미들, 더 큰 악의 제거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볼 수 있는지의 문제 등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고민하게 되고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수직의 회복과 붕괴를 놓고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운다.


신이 아닌 인간들의 결말은 처참하다. 그들의 이름은 모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석과 델브루케의 교황 암살 시도는 두 번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노동운동을 하던 태혁은 방화 사건의 주범으로 경찰에 끌려갔다. 수녀원으로 들어가 수직의 회복을 지향하던 헤령 역시 경찰들의 수녀원 습격으로 또다시 상처를 입고, 그들을 지켜보던 주변인 병욱도 외압으로 인해 신문사에서 해고를 당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고아원에 들어간 헤령과 그녀를 찾아간 병욱이 보여주는 태도는 수직과 수평의 공존을 지향하는 듯하지만, 내가 보기엔 수직 안에서의 수평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생의 이면』과도 연결된다. 성(聖)이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속(俗)의 한복판에 있다는 태도.


"(...) 사람들 속에서가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이 단순하고 소박한 진리를 깨닫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모르겠어요. 애초에 신앙과 삶을 별개인 양 구별해서 생각한 게 착각이었다고 해야 할까? 믿음이 삶과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잖아요. 삶에서 떨어져 나간 신앙이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간 신 또한 무의미하겠지요." (294쪽)


나는 비로소 성(聖)의 뜻을 이해할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인도인들은 평범한 바윗덩이에 붉은 고리를 걸어 놓음으로써 그 바위를 성별(聖別)시킨다. 붉은 고리에 무슨 특별한 힘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것은 그냥 붉은색의 평범한 고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 붉은 고리는 그 바위를 성역이라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그 바위는 거룩한 바위로 화한다. 성은 속(俗)의 한복판에, 하나의 문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생의 이면』, 154쪽)


이는 개혁과 형식 사이에서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병욱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개혁과 형식의 포섭은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이기에 둘 사이의 긴장을 항상 유지하는 지향성.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국 절대자와의 수직적 관계 아래에서 수평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신화를 전복하지 않고 유지하겠다는 태도가 아닐까. 이는 정 교수에게 주례를 부탁한 뒤 약혼자 희수에게 전화를 거는 마지막 장면에서 더욱 굳어지는 듯하며, 이후의 병욱은 결국 목회자의 길을 걸을 것 같다는 암시를 내게 준다. 1부의 결말과 2부의 결말이 주는 느낌은 분명 다르지만(정말 다르다. 첫 중편소설인 1부에서 끝났다면 나는 별로 좋은 평가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유의 끝은 비슷한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을 준다. 1부의 결말이 수평을 지향하는 자의 몰락을 보여준다면 2부의 결말은 수평마저 포섭해버린 수직의 느낌이랄까... 내 짐작이 맞다면 정말 기독교적인 결말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그런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까..


그의 다른 소설이 그렇듯,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사유는 치밀하면서 치열하고, 관념적인 색채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주제와 관념의 무거움을 문장의 힘으로 극복할 줄 안다. 읽으면서 얼마나 밑줄을 많이 그었는지..(물론 원래도 많이 긋는다) 유려하게 읽히는 문장을 빠르게 따라가다 보면, 깊은 사유가 담긴 묵직한 질문들이 에리직톤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형석의 꿈과 사상, 태혁의 손으로 재해석된 신화, 주변인으로서 고뇌하는 병욱의 시선 등 각각의 사유들은 날카롭게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려는, 기존의 신화를 해체하고 자유와 해방의 삶을 찾으려는 시도는 오늘날에도 좌절될 수밖에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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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점은 예전에 읽었던 게 분명한데 이렇게 새로울 수가...로 정리할 수 있겠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얘져서 읽는 장면마다 새로웠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장면은 뫼르소가 사제에게 고함을 치는 장면뿐이었고, 예전에 읽던 책도 이 부분만 접어놓았다. 이전까지 줄곧 눈에 보이는 것만을 묘사하고 말수가 적었던 뫼르소가 죽음을 앞에 두고 폭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고, 그래서 내가 여태껏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의 번역은 개정 전과 후의 차이가 상당히 크다.


나는 그의 사제복의 깃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여 솟구쳐 오르는 가운데 나는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부었다. 그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군, 안 그래?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죄다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도 못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셈이지. 나를 보면 맨주먹뿐인 것 같겠지.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신부 이상의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래, 내겐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만큼이나. (2015, 174쪽)


나는 그의 신부복 깃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버렸다. 너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한 가치도 없어.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너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2009, 156-157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내가 주목한 부분은 '너'가 '그'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란 무엇일까? 김화영 교수의 해설 서두에는 "자유간접화법의 어감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변화도 그 일환인 것일까? 네이버 지식백과의 문학용어비평사전에서는 자유간접화법을 "인물의 생각이나 말이 서술자의 말과 겹쳐져 이중적 목소리로 서술되는 화법"이라고 정의하는데, 거기서 들고 있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직접화법 : He said, "I love her now."
간접화법 : He said that he loved her then.
자유간접화법 : He loved her now.


쓰고나니 '너'와 '그'의 차이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애초에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해설에서 그 단어만 보고 '이 변화가 자유간접화법의 반영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어제부터 계속 고민했었다. 생각해보면 '너'로 표현된 전집판의 경우는 직접화법에 가깝지만, 개정판의 경우는 뫼르소가 하는 말이 뫼르소의 의식이라는 "유리창"을 거쳐 전달되는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구성이 갑작스레 직접화법이 등장하는 것보다 일관성 있는 형식이라는 생각은 든다.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다시 읽으면서 공들였던 부분은 전에 미처 읽지 못했던 해설 읽기였는데,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사르트르는 『시지프 신화』의 철학이 옮겨진 것이 『이방인』이라 간주하고 해설을 썼는데, 상당 부분 연결이 되긴 하지만 기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므로 뫼르소가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부조리의 인간'의 한 전형이라고 보긴 어려울 듯하다. 두 번째로 읽는 것이지만 여전히 이해가 미진한 부분이 많이 남았는데, 어쩌면 그런 애매성이야말로 『이방인』이 지금까지 논의되고 고전이 된 이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뭐라고 딱 규정하기 어려운 것을 남겨둔 채 그냥 마무리해야 될 것 같다. 재독의 감상을 정리하자면, '그때도어렵고지금도어렵다'.


+) "오래간만에 처음으로"는 개정판에도 그대로 남았다. 이 단어의 어감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데, 가운데 쉼표를 넣어봐도 매한가지다. 개정판을 내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손보았는데도 이 부분을 유지하기로 한 이유가 무엇인지, 역자의 설명이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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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04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예 기억이 안 나네요.. 워낙 오래 전에 읽어서.. 역시 책은 다시 읽어야 제맛인 것 같습니다..

아무 2016-07-04 10:32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읽는데 다시 읽는다는 느낌이 거의 안 들더라구요.. 시지프 신화를 읽고 나니 조금 낫긴 하지만, 난해한 건 여전합니다 ㅎㅎ...

cyrus 2016-07-0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판과 개정판을 같이 읽으면서 번역의 차이점을 확인하셨군요. 정말 대단한 집중력입니다. ^^

아무 2016-07-04 19:15   좋아요 0 | URL
정말 집중력이 많이 필요하더라구요. 번역비평하는 분들에게 존경심이..^^;; 저도 처음엔 전부 비교하려다가 금방 포기하고 핵심 장면들만 골라서 비교했습니다. 저 장면은 워낙 차이가 많이 나서 찾아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