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1.2.

















서리북 18호 읽기 시작. 어느덧 겨울이 성큼 다가왔는데 이제 여름호를 읽고 있다내전이 일어나는 조건에 대한 분석도 흥미로웠고,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정확히는 국가의 붕괴가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법칙을 고안한 책도 눈길이 갔다(물론 서평자는 이 책의 저자의 데이터베이스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다).
















최현진_우리는 지금 얼마나 안전한가


월터가 내세우는 핵심 개념은 '아노크라시(anocracy)'. 이는 완전한 민주주의도, 완전한 독재도 아닌 중간 상태의 불안정한 정치 체제를 말한다. 그녀는 어떤 나라가 내전을 겪게 될지 여부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지표는 그 나라가 민주주의를 향해, 또는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움직이고 있는지”(32)라고 말한다. 내전은 정치 체제가 안정되어 있을 때보다 민주화 과정이 정체되거나 역행하는 중간단계에서 더 자주 발생한다. (17)


그러나 제도적 취약성만으로 내전이 발발하지는 않는다. 월터는 그 위에 '파벌주의(factionalism)'가 결합할 때 내전 가능성이 급격히 상승한다고 분석한다. 파벌주의란 인종, 종교, 고향, 언어 등 정체성에 기반한 정치적 분열로, 정치 경쟁이 타협이나 합의가 아닌 배제와 대결로 귀결되는 양상을 말한다. 이 파벌주의는 종종 집단의 정체성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종족 사업가(ethnic entrepreneur)'들의 전략과 결합하여 사회 분열을 심화한다. 이들은 공포감을 자극하고 부추겨 유권자 집단을 가두려는 방편으로 민족이나 종교와 같은 정체성 기반의 혐오를 유포하며, 자신의 권력쟁탈전을 정당화한다. (17-18)


중요한 점은, 시민들이 이러한 파벌화 과정을 '정치적 진보''정당한 권리 요구'로 오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월터는 "시민들이 하룻밤 사이에 협소하고 이기적인 파벌로 조직되는 것은 아니다”(83)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공동체를 지키고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에도 사실은 내전으로 가는 길을 밟고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 내전은 대개 점진적이며, 일상적인 정치 갈등과 분열이 누적된 결과다. 어느 순간부터는 기존의 정치 제도가 더 이상 중재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대화가 봉쇄되며, 극단주의만이 목소리를 얻는다. (19)


폭력을 촉진하는 또 하나의 핵심 요인은 '지위 격하(downgrading)'이다. 단지 가난하거나 억압받는다고 해서 내전이 발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단 권력을 잡았다가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이 특히 싸움에 나설 가능성이 높았다." (93) 자신들이 누리던 정치적 특권이나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했다고 느끼는 집단은 종종 무력 충돌로 반응한다. 이는 이라크에서 수니파 엘리트가 축출되었을 때처럼, 과거의 지위가 현재에 비해 하락했다고 느끼는 경우 강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감정은 단순한 상실감이 아니라 생존의 위협으로 인식된다. (19)


지위 격하는 '희망의 상실'과 연결될 때 더욱 폭력적으로 변한다. 월터는 "한 집단이 미래를 내다보는데 계속 고통만 받을 뿐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유일한 길로 폭력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116)고 말한다. 이 희망 상실은 시위가 실패하거나 체제가 변화 가능성을 보여 주지 못할 때 심화한다. 평화적 시위는 체제를 바로잡으려는 최후의 필사적인 시도"이며, "평화적 변화를 추구하는 낙관주의자들에게 남은 마지막 카드" (122)인데, 이마저도 좌절되면 시민들은 점차 극단으로 내몰린다. 많은 내전은 오랜 평화 시위의 실패 이후에 발발했다. (19-20)
















최정규_무너질 것 같은 국가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터친에 따르면 인류 역사상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주기적 붕괴 패턴을 만드는 두 개의 힘은 엘리트 과잉생산과 전반적 대중의 궁핍화이다. 위에서 얘기한 의자 뺏기 게임은 점점 늘어나는 엘리트 지망생들과 그 과정에서 점점 늘어나는 탈락자들을 묘사한다. 이 게임이 진행되면서 일부 엘리트들은 의자를 놓고 멀리 돌지 않고 가까이에서 도는 척만 할 수도 있고 노래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경기자들을 슬쩍 밀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 할 수도 있다. 게임의 룰을 교묘히 어기면서 자리를 차지하려 애쓴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여 보자.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구경꾼'들은 더 많은 ''을 내야 한다. 게임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구경꾼들은 점점 가난해진다. 그렇게 되면 이 장난스럽던 게임은 꽤 현실적인 모습을 갖춘다. (29-30)


자신의 삶을 넘어서 타인의 삶에 대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그만한 지위에 도달해야 한다. 부자는 늘어나는데, 이들이 차지할 수 있는 지위의 수는 고정되어 있으니, 이들 사이의 경쟁이 점점 심해진다. 말하자면 부자가 늘어나면서 엘리트 지망생들이 너무 많이 늘었고, 이들 사이의 자리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지위 경쟁에서 탈락하는 지망생들이 많아진다. 이를 가리켜 터친은 '엘리트의 과잉생산'이라고 부른다. 엘리트의 과잉생산이라 부를 수 있는 하나의 경향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대중의 궁핍화'라는 또 다른 경향이 병행한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파이도 커지지만, 이중 상위 1퍼센트가 차지하는 몫이 커지면 일반 노동자들의 임금이 전체 파이에서 차지하는 몫은 점점 감소한다. 상대적 임금의 저하, 기대수명의 감소, 그리고 자살, 약물 중독에 따른 절망사의 급증 등은 '대중의 궁핍화'라는 두 번째 경향을 보여 주는 지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원천은 사회의 상층부로 부를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부의 펌프'. (30)


터친에 따르면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바로 이렇다. 1980년대를 시작으로 천만 달러 자산을 보유한 슈퍼 리치의 수가 급증했다. 이후 천만장자의 수는 전체 인구의 0.08퍼센트에서 0.54퍼센트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자산이 500만 달러 이상인 가구 수는 7, 백만장자의 수는 4배 증가했다. 부자의 수는 증가했지만, 권력을 주는 지위의 숫자는 고정되어 있다. 공적 선거에서 직접 선거 자금을 대는 후보자의 수가 증가하고, 200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개인적으로 100만 달러 이상을 쓴 후보가 19명이나 된다. 선거에 승리하고자 하는 비용은 엄청나게 증가했다. 당선된 하원의원의 경우 평균 지출액이 199040만 달러에서 2020235만 달러로 증가했고, 상원의원은 같은 기간 390만 달러에서 2,700만 달러로 크게 늘어났다. 부가 상층부로 집중하면서 엘리트 지망생들이 너무 많이 늘었고 지망생들 사이에서의 자리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낙오되는 지망생들의 불만이 쌓여 갔다.(24-25) (30-31)


그의 이야기 속에서는 엘리트들의 분화와 엘리트 경쟁에서 탈락한 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들이 지배계급을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새로운 대변자로 등장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상세하게 다루어지는 반면, 그가 말하는 힘의 다른 한 축인 대중의 궁핍화와 분노는 부분적으로만 다루어진다. 그의 서사에서 대중은 수동적으로 동원되는 대상으로만 다루어진다. 어쩌면 이것이 현실일지도 모르고, 혹은 이들의 움직임을 세분화하고 분석적으로 다룰 데이터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정치적 불안정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대중의 분노는 왜 스스로의 목소리로 조직화하지 못하고 탈락한 엘리트들에 의해서만 대변되고 그들에 의해서만 동원될 수 있었는지, 탈락한 엘리트에게 열광한 대중은 정확히 누구인지 (미국의 경우 다시 한번 백인 남성 노동계급인지, 아니면 대타협 시기에조차 배제되었던 이들인지, 혹은 누구였어야 했는지), 대압착 시기 동안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는 어떻게 현실에 반영될 수 있는지 등의 질문은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다. 엘리트 지망생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분노를 반영할 수 있다면, 그것이 불가피하다면, 우리의 역사는 터친의 말대로 같은 패턴을 계속 반복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합의에 기초한 제도가 마련되고 그 제도가 부의 펌프의 작동을 막을 수 있다면 (역사는 아주 예외적이지만 이를 해낸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제도가 더 많은 대중을 포용해 낼 수 있다면, 운명적 반복을 조금은 늦추게 되리라는 작은 희망을 품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34-35)


월가 점령 시위 이후 1퍼센트 대 99퍼센트가 아니라, 0.1퍼센트 대 9.9퍼센트 대 90퍼센트가 문제이며 9.9퍼센트가 새로운 귀족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매튜 스튜어트(Matthew Stewart)더 애틀랜틱기고문에서 9.9퍼센트가 교육과 문화를 독점하면서 나머지 90퍼센트에 대한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이들이 새로운 귀족계급으로 등장했다고 진단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9.9퍼센트는 자신들의 지향을 사회 보편적인 지향인 것처럼 만들고, 나머지 90퍼센트의 지향을 잘 대변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내세우는 집단이다.

대중의 목소리가 9.9퍼센트가 마련해 놓은 논리의 틀에 담겨서 9.9퍼센트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정치적 공간에 의견을 반영하고 의제화할 수 있으려면, 스스로의 목소리를 담아낼 논리와 그것을 전달할 힘이 필요하다. 한편으로 이는 자원과 역량의 문제이고 평등의 문제다. 다른 한편으로 배제된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통로가 마련될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면, 이는 민주주의의 문제다. 평등과 민주주의,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에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 (35-36)
















백승욱_냉전사 쓰기의 난점, 냉전적 서사로 회귀할 함정

 

베스타의 작업은 냉전 공간을 전 지구로 확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이런 공간적 확장과 더불어 냉전의 이해를 위한 출발 시기를 우리 예상보다 훨씬 앞으로 당긴다. 보통 이야기하는 냉전의 출발점은 1947년의 처칠과 트루먼의 냉전 시대 발언, 1949년 중국 공산당의 건국 또는 1950년의 한국전쟁, 아니면 그 모든 구도의 출발점이라 할 1945년의 얄타회담이나 포츠담회담 정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베스타는 냉전 역사의 출발점을 1890년대까지 앞당긴다. 미국과 러시아의 부상, 사회주의 세력의 형성 등 냉전의 핵심적 특징은 상당히 오래전에 형성되기 시작했고, 냉전사의 서술은 사실 '장기 20세기'의 서술과 같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냉전이라는 쟁점은 우리에게 익숙한 체제 대결이나 이데올로기 대결의 차원을 넘어서서 더 큰 질문을 담는 역사 연구 과제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난 한 세기는 그에 앞선 시대와 어떤 차이점을 보이며 그 시대는 어떻게 '냉전'이라는 핵심적 특징을 안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시대의 종결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어떤 함의를 주는가? 이런 물음들을 '세계사'적 냉전 접근을 통해서 묻는다. (40)


중국 현대사 전문 연구자 배경을 지닌 베스타의 냉전 인식에서 독특한 점은, 중국 현대사에서 '마오쩌둥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사회주의 건설기를 분석해 볼 의미가 없는 '암흑기'로 취급해 거의 통째로 무시한다는 점이다. 한국사에 대해서도 단편적 지식을 통해 한국의 근대적 성과에 대한 높은 평가가 확인된다. (43)


냉전의 지구사에 이어 냉전에서도 베스타의 업적이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비서구(소위 '3세계)에서의 냉전, 특히 1970년대 (베스타가 '브레즈네프 시대'라고 이름 붙인) 이 지역에서의 냉전이다. 유가 인상에 힘을 얻은 소련이 미소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군사적·정치적 영향력 확장을 주도하고 소련 공산당 국제부가 1930년대 코민테른을 연상시키는 글로벌한 개입 전략을 전개한 이 시대가 어떻게 특정 지역에서 '냉전''열전'으로 전환시켰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베스타의 연구를 통해 잘 알게 되었다. 냉전은 이 분석을 좀 더 넓게 확장해 중동,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 등지에서 미국과 소련의 냉전적 경합이 각 지역의 특수성과 결합해 어떻게 독특한 궤적을 형성했는가를 보여 준다. 이런 지역 서술에서 베스타는 분석을 다면적으로 복잡화하고 전지구적 맥락 속에 위치 지움으로써 값진 성과를 낳았다. (43-44)


이 지역과 구분되게 그다음 베스타가 냉전에서 분석하는 중요한 지역은 냉전의 한 주축인 미국, 그리고 미국 영향하의 유럽(마셜 플랜을 계기로 해서)이다. 여기서 베스타의 분석은 구도의 복잡화,'미국이라는 외적 요인'과 유럽 각국 정치의 복잡성의 뒤섞임, 미국 내에서도 여러 세력과 행위자들의 복합성의 결합이라는 차원을 검토한다. 그럼으로써 냉전이 어떻게 20세기 중후반 독특한 '국가 간 체계' 질서를 구성해 냈고, 그 영향하에 각 지역이 각자의 길을 모색해 갔는지를 보여 준다. (44-45)


이 두 지역과 대조되는 세 번째 서술 대상은 소련 그리고 소련 영향하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다. 그런데 여기 오면 앞서 두 지역을 분석하던 베스타의 태도는 상당히 달라져 아주 단순해진 구도로 이 지역들을 분석하는 것이 확인된다. 분석의 시야는 대체로 소련 '스탈린의 음모'나 마오쩌둥의 폭력적 권력욕에 초점을 맞추는 전체주의적 관점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동유럽의 2차대전 이후의 역사, 소련 현대사, 중국 사회주의사는 한 독재자의 '의도''발언'을 중심으로 그 의지의 관철, 그리고 필연적인 붕괴의 역사처럼 그려진다.

탈냉전 시기, 특히 소련 해체와 각 지역의 문헌 자료의 공개 이후, 냉전 시대 사회주의 국가들의 흑역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그 사회주의 시기에 대한 재조명과 재평가가 중요한 역사적 과제가 되고 있음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그 시기를 현재적 관점에서 보려면, '독재자의 사악한 의도'라는 단순한 전체주의적 시야를 벗어나 베스타가 제3세계나 미국과 연관된 지역에 적용한 성과를 거둔 '복잡성과 글로벌 맥락'이 이 세 번째 지역에도 비슷하게 적용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45)


베스타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공산주의 세력의 등장으로부터 냉전의 형성과 냉전의 붕괴로 이어지는 과정은 매우 필연적이며,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도발과 미국의 수동적 대응의 과정처럼 읽힌다. 그렇지만 앞서도 언급한 최근의 연구 동향, 그리고 케임브리지 냉전사에서도 확인되는 새로운 접근은 2차대전 종결 시점에서 냉전이라는 진영 대립이 지금 생각처럼 그렇게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베스타의 설명 방식은 악의적 소련과 순진한 미국이라는 구도로서 얄타 시기를 다루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최근의 분석은 이 얄타 구상의 형성을 그보다 훨씬 복합적이고 글로벌한 구도로 분석할 수 있음을 확인시키고 있다. 베스타가 '냉전 맹아'의 필연적 확장 발현이라는 관점에서 20세기사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 되면 가볍게 지나치는 것이 2차대전 추축국, 특히 독일 히틀러 국가의 등장과 위협이라는 문제이다. 1차대전 종결의 실패가 2차대전의 독일의 도발로 다시 이어졌고, 그러면 2차대전 종결 방식은 어떻게 독일의 위협(부차적으로 일본의 위협)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인가가 우리가 아는 냉전 형성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48-49)


이 책을 집필한 2017년의 시점에 베스타는 유럽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 모습을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10년 정도가 지난 현재 시점에서 유럽과 독일의 미래를 보자면,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ür Deutschland, AfD) 등 다양한 극우 세력의 약진과 위협은 작은 문제가 아니고 이는 냉전 시대 이해와 뗄 수 없는 질문이다. 이런 변화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트럼프의 재등장과 밀접한 관계에 있고 결국 NATO 형성기의 질문을 불러낸다. 193233.1 퍼센트 득표로 집권에 성공한 히틀러의 길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유럽은 20퍼센트 지지율을 넘어서 나치당 궤적을 따라가는 듯 보이는 AfD의 약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리고 이는 왜 냉전의 종식 이후에 등장한 것일까. (49)


냉전 해체 이후, 그리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세계는 균질적이지 않다. 상대적으로 안정적 지대로부터 완전히 무정부적 정글의 지대까지 분화하고 있고, 이 현실 또한 얄타 구상으로부터 시작한 2차대전 종결 질서에 대한 이해 없이 분석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여기서도 중요한 논점 중 하나는 2차대전 전후 처리에서 독일과 일본의 처리 방식의 차이가 왜 발생했고, 그것이 이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다. 독일은 군정 체제로, 일본은 총사령부하의 내각 부활 방식으로 점령이 이루어졌다. 이를 시작으로, 1951년 강화조약이 체결된 일본(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대비해 독일의 경우 강화조약은 1991년 통독 이후에야 가능했다. 유럽의 전후 체제가 소련을 지목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독일을 유럽의 틀 속에 가두는 '이중 봉쇄'로 작동했다면, 동아시아는 미국과의 개별적 군사동맹 체제로 일본의 관리가 이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동아시아의 안보적 질서가 중국의 반대로 1951(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1953(한국전쟁 정전협정), 1954(제네바회담)이라는 계기에 어떻게 중단되어 이 지역의 현재적 쟁점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동서 냉전의 비교 연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50)


결국 냉전 시대를 다시 묻는 이유는, 이 시대를 자기 방식으로 끌어가고자 한 두 세력 즉 미국과 소련 공히 19세기 위기를 돌파하는 각자의 대안이 경합을 벌인 이 시대에 어떤 나름의 해결책이 모색되어 일정 시기 특정한 질서가 유지되었는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질문의 핵심은 19세기 위기를 낳은 '자기 조정적 시장경제'의 무오류성이라는 신화를 유지할 수 있는지, 인민 주권의 시대를 정치의 틀 속에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지, 그리고 식민주의 시대를 탈피해 민족자결의 틀을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였다고 할 것이다.

냉전의 두 진영은 이 문제를 나름의 방식으로 대응하기 위한 시도를 보였는데, 서로 접속하지 않는 떨어진 분리-독립된 공간에서 작동해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오해와 달리 내적으로 영향을 받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분리된 듯한 착시효과를 주는 통일된 체계 내에서 작동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한 축의 붕괴는 다른 한 축의 승리가 아니라, 두 세력을 묶은 한 시대의 종료와 위기의 재도래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냉전사를 연구하되 냉전적 사유에서 벗어날 필요는 이 때문에 제기되는 것이고, 베스타의 냉전을 읽으면서 지속적으로 느끼는 아쉬움도 여기에 기인한다. (53-54) 



25.11.3.

서리북 18호 읽기. 김용구라는 정치학자의 생애도 흥미로웠지만, 오늘날의 연구자들의 모습을 꼬집는 글쓴이의 촌평이 더 인상적으로 남았다. <미키 17>에 대한 글은 나도 본 영화에 대한 평이니만큼 더 흥미롭게 보았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재생산에 대한 논의, 금융 자본주의와의 연결점 등은 영화를 보며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애초에 영화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지 않아서 그랬나.

 















옥창준_오지의 지질학자가 남긴 연구 기록


요즘 연구자들은 시대를 꿰뚫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탐구보다는 각자의 관심사에 더 집중한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세계 학계의 중심부인 미국에서 최근 유행하는 주제에 맞추어 자신의 '연구 핏'을 조정하고, 이와 관련된 다양한 스펙을 이르면 학부 때부터 준비하고는 한다. 이렇게 하면 더 좋은 대학원에 들어가고, 더 유명한 저널에 논문을 싣고, 인용 횟수가 많은 논문을 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라면 이런 부류의 연구자가 쓴 회고록을 굳이 따로 찾아 읽고 싶지는 않을 듯하다. 연구자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의 탄생을 시대라는 맥락과 개인의 삶과 연결 지어 해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58)


김용구는 루소의 사상에서 전쟁과 '전쟁 상태(L'état deguerre)'를 구분했다는 점을 더 의미 있게 보았다. 실제 전쟁과 구분되는 잠재적 전쟁을 뜻하는 전쟁 상태라는 개념은 한반도에서 냉전을 경험한 김용구에게 그 현실을 잘 설명해 주는 틀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루소를 읽었더라도, 국제정치의 중심에서는 권위체가 없는 상태를 규명하고 이를 이론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반면, 국제정치의 주변이었던 한반도에서는 현실을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김용구는 루소를 빌려 전쟁상태를 평화 상태로 바꾸는 방법까지 함께 고민했다. (60)


1960년대 근세한국외교문서총목이 주로 문서의 수집과 정리에 가까웠다면, 30년이 지난 후 김용구는 한반도를 둘러싼 외국세력들이 매우 독특한 정신적 특성을 보이고 있음을 더욱 강하게 의식했다. 그는 서구의 몰락을 쓴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사상을 빌려 먼 곳의 상대를 정복하려는 욕망, 탐험을 향한 집착, 더 많은 생산을 위한 발전, 신속한 이동을 위한 기계 발명의 욕구를 지녔다는 측면에서 유럽 문명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파우스트(Faust) 박사와 비슷하다고 보았다.(227)

그리고 20세기 주도 국가인 미국은 유럽 문명권에 속하면서도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여기는 미국 예외주의를 주장한다고 보았다. 러시아는 유럽에서의 소외감을 아시아에서 보상받고자 했으며, 이는 19세기 러시아가 한반도로 진출한 배경에서도 잘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전통적인 사대교린 질서에 익숙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유교 문명권의 변화, 그리고 유교 문명권 바깥에서 활동하면서 '탈아입구'에 성공한 일본의 사례는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사가 단순히 국가들 간의 대립이 아니라 문명들 간의 이중, 삼중의 대립이라는 점을 잘 보여 주었다. 한반도는 주변에 위치해 있어, 오히려 문명의 충돌 속에서 작동하는 세계사의 조류를 가장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장소였다. (64-65)


그러나 한국은 김용구의 표현대로 주변 지역에서 정신이 가장 낙후된 '오지(奧地, borderland/hinterland)'였다. 오지는 슈펭글러가 말한 '가정(假晶, Pseudomorphosis)'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현장이었다. 가정 현상이란 광물학에서 가져온 말로, 외래 문화가 겉으로는 전파되는 듯 보이지만, 실제 내부에서는 이에 저항하는 문화가 축적되는 현상을 지칭했다. (111) 한반도는 유럽 제국주의의 전 세계적 팽창 지역 중 오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폭력을 직접적으로 경험했고 그만큼 이에 대한 저항도 컸다. 그 결과 서양의 사고방식과 개념을 표면적으로는 수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본래의 의미가 '가정'되는 현상이 자주 일어났다. (65)



한윤아_시간 축적의 악몽, 유예된 정치적 상상: <미키 17>

(*영화 <미키 17>의 스포일러가 있음*)


첫 장면에서 귀에 걸린 또 다른 부분이 있는데, '냉동고기 꼬치(meat popsicle)'라는 표현이다. 'popsicle'은 아이스바나 얼음과자인데, SF 장르에서 종종 극저온으로 여행하는 사람, 냉동 인간을 표현하는 말로 나온다. 물론 경멸적으로 부르는 클리셰이다. (76)


우리 시대가 생산해 내는 돈의 가치는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모바일 통장과 주식 차트, 부동산 가격의 숫자들이 실상 아무런 실물 가치를 재현하지 못한다는 공공연한 체제 비밀에 의문을 가지지 못한 채, 억과 조라는 단위는 일상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79)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는 일종의 무대이자 공기처럼 파시즘이, 혹은 괴상하지만 정교하게 디자인된 파시스트 캐릭터가 등장해 왔다. <살인의 추억>(2003)의 전두환 정권, <괴물>(2006)의 미국 제국주의와 대리자들, <설국열차>(2013)'엔진의 아버지'라 불리는 기술 엘리트 월포드, <옥자>(2017)<기생충>(2019)의 자본가 등, 얼굴과 성격과 직업을 바꿔 가면서 계속해서 출몰한다. 그의 영화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묶어 본다면, 어쩌면 그 파시스트들은 사라지지 않는 삶의(영화의) 조건이며, 영화의 서사는 궁극적으로 그들을 제거하는 데 계속해서 (어쩌면 일부러) 실패하고 있다. 영화 말미, 미키를 복사하던 프린트기가 파시스트를 복사하는 악몽 같은 장면은 세계를 이어가기 위해 어쩌면 그를 없애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히기도 한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이야기들은 서민의 직업적 사명감, 가족의 책임감, 아나키스트의 허세 등 작은 감정들이 우연하게 지속적으로 마주하는 모순에 반응하다 각성하는 방식이다. <미키17>의 경우 이 둘의 캐릭터 대결이 굉장한 볼거리를 주는 데다, 상황적으로 현실의 파시스트들과 겹쳐 가며 웃음을 중폭한다(독재자 사령관, 그를 조정하는 아내와 검은 뿔테 안경을 쓴 민머리 2인자 등). 그럴수록 미키의 삶의 비극과 행성을 지구화한다는 괴상한 계획을 만들어 낸 구조는 리무진 밖의 소음보다 더욱 뭉개져서 흩어진다. (80-81)


실비아 페데리치와 낸시 프레이저 등은 자본주의야말로 역사적으로 형성될 때부터 여성과 연결되어 있는 재생산을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만들고 그것을 수탈하면서 관리해 왔다고 설명한다. 우리 시대 낙태금지법이나 동성애 혐오가 다시 의제로 부상하는 것도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여성의 자궁을 통제하려는 건 경제위기를 의미한다. 인구라는 요소가 생산과 가치의 모든 계산을 흘어버리는 핵심적인 변수이기 때문이다. <미키 17>의 인간 복사기는 재생산 '관리'를 위한 도구로 기술이 윤리 '어쩌고저쩌고' 하든 말든 이미 인간의 가치 분류가 끝났으며, 현재 기술이 인간 해방을 위해 복무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82)


행성 연설 장면은 사실, 남아 있는 갈등 요소를 억지로 봉합하고 슬로건을 외치는 아침 조회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서로 눈을 맞추고 박수를 치며, 웃는 서로를 교차하는 편집, 그들이 모두 바라보는 가운데 '문젯거리' 프린터를 폭파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러한 숏(shot) 이미지의 배치는 미국의 문화 다양성을 재현하는 편집의 관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 문화의 복잡한 맥락이나 현실적인 문제들은 숏과 숏 어딘가에서 재현되지 못하고 숨어 들어간다. 미키가 영원히 고통의 삶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 시간의 형벌을 받는 이유는 파시스트의 죽음과 함께 간단히 소거되어 버린다. 결국 마지막 장면은 파시스트가 사라지면 불평등이 사라질 것이라는 가짜 약속을 재확인하는 시간일 뿐, 행성 개척의 자본주의를 폭파하지 못했고, '상호 감염'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실현되는지 상상을 봉쇄했다. (84-85)



25.11.5.
















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았다. 요동치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겨우겨우 달래며 보았다. 책을 읽었을 때만 쓰려고 했지만 오늘은 영화를 본 날짜를 기억하기 위해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도 Sheep may safely graze를 들으면 마음이 일렁일 정도.

 



25.11.9.















카페 인텔리젠시아에서 과학산문을 읽고, 영화 <세계의 주인>을 다시 보았다. 키링이 탐났었으나 이미 소진되어 받지 못하고, 쪽지 굿즈를 받았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나의 감정을 더 이상 주체하지 못하게 만든 쪽지.





과학은 답이 있는 문제를 다룹니다. 근대과학은 물리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물리는 세상을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움직이는 물질로 기술합니다. 주어진 순간에 물질이 배열된 상태를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순간 우주에는 하나의 사건만 일어나야 합니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는 어느 한 순간 오직 한 장소에 있습니다. 수능 물리 시험문제의 정답이 반드시 하나만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물체의 위치에 대한 문제를 풀었는데 답이 두 개 나온다면 뭔가 잘못되었거나 둘 중 하나의 답을 버려야 합니다. 답이 아예 없다면 물체가 있을 위치가 없다는 이야기이니까 물체는 존재조차 할 수 없습니다. (81)


과학은 인과율을 가정합니다. 특별한 결과에는 특별한 원인이 있어야 하죠. 물체의 속도가 변한다면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뉴턴은 그 이유를 ''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과율은 결과에 대한 원인이 반드시 있다고 말해줍니다. 원인에 대한 질문,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과학의 질문에는 답이 있습니다. 때로 어떤 질문은 답을 모른 채 오랜 시간이 지나기도 하는데, 대개 질문이 틀려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81-82)


이제 중요한 순간입니다. 아이가 자신을 믿을 수 있다면, 방안에 열쇠가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용기가 있다면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문제 밖으로 나가기'입니다. 밖으로 나갈 용기는 방안에 답이 없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모든 가능성을 철저히 탐색했기 때문이죠. (85-86) 


답을 찾기 위해서는 모든 가능성을 탐색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문제와 관련된 내용을 모두 알고 이해함은 물론, 지겹도록 반복되는 고된 작업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노가다'라고 부른다면 그 분야의 노가다를 즐겁게 하는 사람이 천재입니다. 과학의 창의성은 노가다에서 나옵니다. (87)


1800년대 말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의 여행가 겸 지리학자 이저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조선인이 활짝 웃고 있다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조선을 여행중이던 비숍은 어느 날 배를 타고 이동할 예정이었지만 문제가 생겨 당장은 배를 띄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을 전하러 온 이는 너무도 난처한 나머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의 내용과 행동의 극심한 부조화에 처음에는 혼란스러웠겠지만,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세상에는 다양한 문화가 있음을 몸소 겪어왔던 비숍은 그 사람이 이상한 게 아니라 조선인이 으레 그렇다는 점을 파악했던 모양입니다. (92-93)


관찰하되 판단하지 않는 것, 그리고 열린 태도로 데이터를 수집한 다음 패턴을 찾아내는 것. 조선인의 웃음을 대하는 비숍의 태도는 과학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태도를 지녔기에 그녀는 단순한 여행가 이상의 존재로 남은 것이죠. 1894년 비숍의 방문으로부터 70여 년 뒤 우리를 관찰한 또다른 기록으로 폴 크레인의 Korean Patterns(한국의 방식들)라는 책이 있습니다. <알쓸별잡> 촬영차 들렀던 미국 뉴욕의 한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했어요. 1장은 한국에 관한 전반적인 소개이고, 뒤이어 본격적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2장의 제목은 'The Importance of Kibun(기분의 중요성)'입니다. 한국인에게 기분이란 내면의 감정, 체면, 사람으로서 인정받고 있다는 인식, 주변 사람들에게 받는 존중 등이 복합된 것이며, 기분이 심리 상태는 물론 신체의 기능까지도 크게 좌우한다고 적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가장 흔한 인사,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계세요'는 몸뿐 아니라 마음의 평안을, '기부니'가 좋으시기를 바란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93)


지하철에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명 덕분이라고 하더군요. 인쇄술이 보편화되기 전 필사본은 너무나 귀한 것이라 개인이 소유하기 힘들었고, 크기가 커서 휴대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손으로 쓴 글을 빨리 읽기는 어렵기에, 인쇄술 시대 이후에나 속독이 보편화됩니다. 더구나 필사 문화에서 책은 하나의 사물이라기보다 이야기하는 방식의 일종으로 간주되었다고 합니다. 필사본에는 제목 페이지가 대개 없고, 보통 'incipit(시작)'이나 '서두의 말', "친애하는 독자여와 같이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구술 문화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책은 아직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죠.

인쇄술이 보편화되자 휴대 가능한 종이책이 대량으로 보급됩니다. 인쇄된 책은 손으로 쓰기 힘든 작은 글씨로 제작 가능했죠. 제목 페이지는 구술 시대에 거의 존재하지 않다가 인쇄와 함께 나타납니다. 인쇄술 초기에는 제목 페이지에도 여전히 구술의 흔적이 있었답니다. 1534년 출판된 토머스 엘리엇의 책 The Boke Named the Governour(통치자의 책)의 제목 페이지를 보면 제목을 이루는 글자들의 크기가 제멋대로고, 저자 이름이 하이픈으로 쪼개져서 줄을 바꿔 쓰여 있기까지 합니다. 아직 글을 시각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책은 사물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책은 개인의 소유물이 되었고 사람들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책을 빨리 혼자 조용히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묵독默讀, 그러니까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만 책을 읽는 방법이 널리 퍼진 것은 인쇄술의 결과랍니다. 제가 지하철에서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이유이죠. (100-101)


책의 오류는 중쇄에서 바로잡을 수 있지만, 논문의 출판은 한 번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연구를 하는 것은 인류의 지식을 함께 체계적으로 쌓아올리는 것이라서 누가 한번 잘못된 벽돌을 놓으면 그 위에 쌓는 모든 벽돌이 흔들릴 수 있죠. 그래서 논문의 오류는 책에서처럼 슬쩍 바로잡지 못합니다. 논문에 잘못된 것이 있었음을 알리는 정정공지 Erratum를 다시 한번 발행합니다. 단순한 실수라면 수주 만에 정정하지만, 드물게는 수 년 뒤에야 정정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자 입장에서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본인이 잘못했다는 것을 수용하고, 알리고, 기록에 남기는 거죠. 동료 연구자들과 후학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 본인의 치명적인 실수를 스스로 지적하는 그런 정정공지에는 저자의 당혹감이 배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숭고함 같은 것도 느껴집니다. (113-114)


흰색은 빈 공간의 색이기도 합니다. '전자'는 원자 주위를 돌고 있는 작은 입자입니다. 사실 세상은 전자로 빈틈없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위를 둘러봐도 전자가 보이지 않을까요? 물리학은 세상이 무언가로 빈틈없이 가득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물고기는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물의 존재를 알기 힘듭니다. 공기 방울, 그러니까 물의 부재가 생기면 비로소 그 존재를 간접적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전자의 부재로 생긴 빈 공간은 '양전자'라는 새로운 입자가 됩니다. 양전자는 반물질反物質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빈 공간은 그 자체로 실체가 됩니다. 흰빛의 본질은 색으로 빈틈없이 가득한 것입니다. 따라서 흰 캔버스는 '색의 부재'이자 '그림의 부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가는 흰색의 부재로 색을 만듭니다. 화가는 흰 공간의 부재로 그림을 만듭니다. 이렇게 부재는 실체가 됩니다. (121-122)


칸딘스키는 흰색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은 것이 아닌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라고요. 흰색은 시작하기 전의 무, 태어나기 전의 무라고도 했습니다. 칸딘스키는 물리학의 혁명이 일어나던 20세기 초에 활동했습니다. 당연히 과학기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원자의 분열은 나의 정신에서 전 세계가 허물어지는 것과도 같았다. 갑자기 단단한 장벽이 허물어졌다며 양자역학이 야기한 과학혁명에 흥분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흰색은 모든 색을 품은 가능성이자 '백색소음'의 침묵이었습니다. (123)


백색소음white noise은 소음의 일종입니다. 소리는 '진동수'에 따라 음의 높낮이가 바뀝니다. 진동수란 1초 동안 소리의 파동이 진동하는 횟수입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는 각각 진동수가 다른 음들입니다. 모든 진동수의 소리가 한꺼번에 울린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소음이 될 겁니다. 이것을 백색소음이라고 합니다. 앞서 빛을 '백색광'이라고 부를 때 정확히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색광은 모든 색을 가진 빛이고, 색은 빛의 진동수가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123-124)


침묵과 무음無音은 다릅니다. 침묵 안에는 백색소음이 담겨 있습니다. 벽을 흡음재로 감싸 소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무향실에 들어가보셨나요? 완벽한 무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일상에서 무음의 상태에 놓여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요한 장소에서 귀기울이고 있으면 설명하기 힘든 미세한 소리가 들립니다. 이미세한 배경음이 백색소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소음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죠. 침묵은 흰색의 소음과 관련 있습니다. 한강 작가는 (문학동네, 2025)에서 하얀 조약돌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83). 침묵의 감촉이 희다는 뜻일까요? (124)


'''하얀'''으로 표현될 수 있지만,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174)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의 육체는 대개 흰 천으로 덮습니다. 유령도 종종 흰 천을 뒤집어쓰고 등장합니다. 흰색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고통은 죽음의 가족이죠. 그래서인지, 고통에 색이 있다면 흰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고열로 고생하는 동안 세상이 하얗게 보이던 기억이 납니다. 이럴 때면 시간의 감각이 날카로워지죠. 통증을 견디는 동안, 한 방울씩 떨어져내리는 시간은 면도날을 뭉쳐 만든 구슬들 같(11)습니다. (124-125) 


이제 ''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사실 '' 이야기를 깔끔하게 마무리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14)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이 글에는 한강의 에서 가져온 문장들이 있습니다. 볼드체로 나타냈습니다. ''을 소재로 한 글에 을 섞어주면 흰 얼룩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얼룩이 지더라도 흰 얼룩이 더러운 얼룩보단(14) 나을 테니까요. 얼룩은 불완전한 흰색일 수도, 부주의한 검정일 수도 있습니다. 빛이 어둠이 없는 것일 수도, 색으로 충만한 것일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죠.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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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14.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완독. 각각의 책들의 읽은 정도를 기록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iReaditNow’ 앱에는 102일부터 읽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지난 일기들에 작성을 안 해놓은 것을 보니 작성하는 것을 빼먹은 모양이다영국의 학교 현장, 지역 공동체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문제, 계급 문제를 이제 막 아들을 중학교에 보낸 학부모의 입장에서 생생한 목소리로 풀어낸 글들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유럽이나 여기나 학교와 마을 공동체가 겪는 문제들은 비슷하구나, 라는 생각을 첫 번째로 했고(적나라하게 말하면 여기도 우리처럼 난장판이네.’라는 생각. 이는 드라마 소년의 시간2화를 보았을 때도 했던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영국이군..), 그럼에도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우리와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시민 사회의, 민주주의의 경험이 우리보다 더 길기 때문일까. 특히 시민권 관련 수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심퍼시와 엠퍼시를 수업 시간에 논하고, 학교 안과 밖에서의 정치적인 문제를 가정에서 이야기하는 장면들. 다문화 사회를 먼저 맞이하고, 브렉시트를 거쳐가는 영국에서 한국의 현실을 돌아본다. 범위를 좁혀서 학교 공동체를. 이미 도래한 문화 다양성의 문제를 아직도 오는 중이라고 착각하는 모습들을.


노인은 모든 것을 믿는다. 중년은 모든 것을 의심한다. 청년은 모든 것을 안다." 아일랜드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지만, 여기에 아이들은 모든 것에 직접 부딪친다."라고 덧붙일 수 있지 않을까? 아들의 학교는 어디부터 손대면 될지 아득할 정도로 어렵고 복잡한 이 사회의 축소판이다. 그런 학교생활에 맨몸으로 부딪치는 아이들의 무모해 보이는 용기는, 외려 세태에 찌든 어른들에게 커다란 힘을 북돋워준다. (정작 본인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기겠지만.) (11-12)


이런 풍조 탓에 오늘날 영국의 지방 도시에서는 '다양성격차'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인종의 다양성이 있으면 우수하고 부유한 학교'라는 기묘한 구도가 생긴 것이다. '구 밑바닥 중학교' 같은 곳은 얼핏 보면 백인 영국인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견학 행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들이 거의 다 백인이더라.” 하고 툭 내뱉기도 했다. (26)


대처 정권은 공영주택을 판매하며 주민에게 구입할 권리를 부여한다."라고 했다. 그때 집을 구입한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도 있다. 집을 구입한 사람들 중에는 계속해서 그 집에 거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집을 팔고 이사를 간 사람도 있다. 그렇게 영국의 공영주택지 내에 '얼룩덜룩 현상'이 진행되었다.

다시 말해 구 공영주택을 부동산에서 민간주택으로 구입하여 살고 있는 주민과 (대처 시대 이후 몇 번씩 주인이 바뀐 집도 있다.) 지금까지도 지방자치단체에 집세를 내고 있는 공영주택의 주민이 한 동네에 얼룩덜룩하게 섞여서 공존하게 된 것이다. 후자는 지금도 자신들이 공영주택지에서 산다."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해 영국의 공영주택지에는 대부분 ''를 붙여야 한다. (49)


노동당이 집권했던 2000년대에 '차브chav'라는 용어가 생겨나 영국에서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는 차브를 무례하고 상스러운 언동이 특징인 하층 계급의 젊은이"라고 정의하지만, 지금은 앞서 이야기한 공영단지 같은 곳에 거주하는 백인 노동자 계급을 통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처음에는 BBC나 전국지에서도 망설임 없이 썼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논쟁의 여지 없는 차별 용어로 문제시되고 있다.

지식인들은 "그들의 패션과 생태를 일반화하여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된다."라며 문제의 용어를 쓰지 않으려 하는데, 실제로 그들 곁에서 살며 겉모습이나 생활상을 보면 어쩔 수 없이 다양성이 풍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단언하지만,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을 기준으로 폭탄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차브라는 단어를 회피한들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제의 근원은 현실적인 빈곤에 있기 때문이다. (51)


자신만이 정의라고 집단으로 믿어버리면, 인간은 미쳐버리거든." (59)

어느 한쪽을 고르라든가 그중 하나를 내세우라며 서로 옥신각신하는 세상이 된 건 분명하다. 저기 축구장에도 동유럽인의 피가 흐르는 아이, 몇 대를 거스르면 인도계 선조가 있는 아이, 아일랜드인의 아이 등이 분명 있을 것이다. 유복한 집의 아이도, 그렇지 않은 아이도, 양친이 모두 있는 아이도, 싱글맘이나 싱글파더의 아이도 있을 것이다.

분단이란, 여러 정체성 중 하나를 타인에게 덮어씌운 다음 그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정체성을 골라 자신에게 둘렀을 때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75)


키 스테이지 3에서는 의회제 민주주의와 자유의 개념, 정당의 역할, 법의 본질과 사법제도, 시민활동, 예산의 중요성 등을 배우는 모양인데, 이렇게 정치적인 사안을 어떻게 열한 살짜리 꼬맹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일까.

"시험에는 어떤 문제들이 나왔어?"

내 물음에 아들이 알려주었다.

"엄청 간단해. 기말시험의 첫 번째 문제는 '엠퍼시empathy란 무엇인가?'였어. 그다음은 '아동의 권리를 세 가지 적으시오'였고. 전부 쉬운 문제들이라 누워서 떡 먹기처럼 백점 받았어."

자신만만해하는 아들 옆에서 배우자가 말했다.

"그게 뭐야. 갑자기 엠퍼시가 뭐냐고 물으면 나는 한마디도 못할걸. 그거 엄청 심오하다고 할까, 어렵지 않냐? 너는 뭐라고 답을 적었는데?"

"스스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

'스스로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이란 영어에서 쓰이는 관용적 표현으로 타인의 입장에 서본다는 뜻이다. 엠퍼시는 흔히 '공감', '감정이입, '자기이입' 등으로 번역되는데, 확실히 남의 신발을 신어보는 것은 매우 적확한 표현이다. (84-85)


옥스퍼드 영영사전의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면 심퍼시는 다음처럼 정의되어 있다.


1. 누군가를 가엾게 여기는 감정, 누군가의 문제를 이해하여 걱정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

2. 어떤 사상, 이념, 조직 등에 대해 지지하거나 동의하는 행위.

3. 비슷한 의견이나 관심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우정이나 이해.


한편 엠퍼시의 의미는 매우 간단하다.


타인의 감정이나 경험을 이해하는 능력.


결국 심퍼시는 '감정' 또는 '행위' 또는 '이해'지만, 엠퍼시는 '능력'인 것이다. 전자는 평범하게 동정하거나 공감하는 것을 가리키지만, 아무래도 후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케임브리지 영영사전의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면 엠퍼시의 뜻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타인의 입장이었다면 어떨지 상상함으로써 누군가의 감정이나 경험을 함께 나누는 능력.


즉 심퍼시는 가여운 사람이나 문제를 떠안고 있는 사람, 자신과 비슷한 의견을 지닌 사람을 보며 품는 감정이기 때문에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하지만 엠퍼시는 다르다. 자신과 이념이나 신념이 다른 사람, 또는 그다지 가엾지는 않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상해보는 능력인 것이다. 심퍼시가 감정적 상태라면, 엠퍼시는 지적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86-87)


갓 부임한 일본인 기자가 '파키'라는 호칭이 무슨 뜻인지 혹시 금기시되는 말인지 그 영국 청년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파키''파키스탄인'을 가리키는 말이며 실제로는 파키스탄인뿐 아니라 인도와 방글라데시 등 남아시아 출신자들, 그리고 겉모습이 닮은 중동 출신자들에게도 쓴다고 답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지만, 그다음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파키'가 흑인을 비하하는 '니거nigger'처럼 금기시되느냐면 그렇지는 않아요. 영국인은 그 말에 친밀한 감정을 담기도 하거든요."

뭐라고!"

옆에서 여러 신문의 사설을 가위로 자르며 스크랩하던 나는 무의식중에 소리쳤다.

그렇지는 않지. 그건 너무 난폭한 말이야."

"난폭하지 않아. 예를 들어 우리 집 앞에 파키스탄인이 경영하는 잡화점이 있는데, 나와 친구들은 그 가게를 '파키 숍'이라고 불러. 딱히 차별하려는 건 아냐. 점원들하고도 친해진 단골가게라서 친숙하게 부르는 거라고."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꾸밈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를 보며 ', 그랬어. 이 녀석은 옥스브릿지를 졸업한 엘리트에 친구들과 셰어하우스에서 살고 있었지.' 하고 생각했다. 이런 젊은이들은 정말로 아무런 악의 없이 와인잔을 기울이면서 친애하는 감정을 담아 파키라고 부를 것이다. 그런 광경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파키'는 애초에 타블로이드 신문에서 구 식민지 출신 이주민을 차별하려고 만든 부정적인 단어야."

"그렇긴 하지만 아주 오래전 1960년대의 이야기야. 시간이 흐르면서 호칭의 용법도 바뀌었다고."

아니, 아니, 아니. 당신네 계급에게는 시간이 음속으로 나아가는지 모르겠는데, 하층 계급이 사는 마을에서는 아직도 1960년대랑 그리 다르지 않게 쓰일 때가 많답니다. 내심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나중에 탕비실에서 몰래 일본인 기자에게 일러주었다. (136-137)


"아까 시인지 뭔지 말할 때 자기 입으로 '자포자기하게 되었다.'라고 했잖아? 자포자기해서 '어차피 싫어할 거라면 너희들이 맘껏 싫어하게 해주겠어.' 이런 생각으로 올리는 거 아냐?"

배우자는 과자 봉지에 손을 넣어 땅콩을 찾으면서 계속 말했다.

동정을 원해서 그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모두들 열 좀 받으라고 하는 거야. 하하하, 반항적이라서 좋네.”

웃고 있는 배우자에게 아들이 말했다.

만약 그렇다 해도 반격하면, 그만큼 상처가 늘어나 반격하고 상처 입고, 또 그것 때문에 누굴 미워해서 반격하고 상처 입고, 또 미워해서 반격하고, 이런 일에 끝이 있긴 해?"

나는 ', 뭔가 굉장히 심오한 일이 되었는걸.' 하고 생각했다. 저 두 사람은 반세기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난다. EU 탈퇴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 영국에서는 탈퇴파가 많은 중장년층과 잔류파가 많은 10, 20대의 사고방식 차이가 계속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 집에서도 마치 사회의 축소판 같은 대화가 펼쳐지는 것 아닌가.

EU에 반란을 일으킨 탈퇴파 세대를 향한 젊은 세대의 물음과 비슷한 아들의 질문에, '반역과 보복의 반복에 끝은 있는가?'라는 질문에, 배우자는 과연 어떻게 답할까?

숨죽이며 주목하는 우리에게 배우자가 한마디로 말했다. "나도 몰라." (235-236)
















과학산문읽기 시작.


물리학자는 우주와 물질의 근원을 찾아 세상을 잘게 쪼개어갑니다. 항상 우리 주변에 있었던 것들에서 예기치 못한 속성을 찾아내고 이유를 설명하죠. 필요하다면 대상을 부수거나 변형하며 완벽히 통제하고 제어하면서 실험합니다. 나아가 이렇게 알아낸 속성을 이용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인류 기술문명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문학자는 우주에서 가장 거대하고 너무 멀리 있어 직접 가보기 어려운 세상을 다릅니다. 천문학자는 대상을 부수거나 변형할 수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쳐다볼 뿐입니다. 원한다면 마음대로 외부 세계를 바꾸는 물리학자와 달리 천문학자가 내면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요? (21)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문제를 관찰자와 관찰대상으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관찰자가 관찰대상을 측정하면 대상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핵심 원리죠. 문제는 관찰자가 자신을 관찰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겁니다. , 관찰자는 자신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측정이라는 행위 자체가 관찰자와 관찰대상이라는 두 존재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죠. 축구를 하려면 두 개의 팀이 있어야 하듯이요. 양자역학에서 내가 나를 관측한다면 관측하는 ''와 관측당하는 ''는 달라야 합니다. 논리학에서도 자기 자신을 다루면 큰 재앙이 일어납니다. 괴델의 불완전성정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크레타인이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면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으니까요. 내가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모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결국 양자 세계, 논리 세계의 나르키소스는 자신과 다른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23-24)


지금은 과학자들에 둘러싸여 과학계 종사자로 살고 있지만 저는 과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빗면 위에서 미끄러지는 나무토막의 가속운동 문제에서 단, 마찰은 무시한다고 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마찰이 없는 경사면이니 빙판이니 하며 둘러대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잖아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는 걸. 입안의 혀도 때로 박자를 못 맞춰 깨물어가며 사는데, 우리의 어떤 움직임에 마찰이 없을 수 있을까요? 그림 속 나무토막의 중심점으로부터 아래로 또 옆으로, 두 개의 화살표를 그으며 문제 풀이를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종이와 연필심 사이의 마찰 덕분인데 말입니다.

교과서 밖에서 살아가는 나는 옹이가 잔뜩 나고 결도 휘어진 나뭇조각처럼 이리 못나고 저리 불퉁해 세상에 부대끼며 허덕이는데, 책 속 나무토막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직육면체인데다 내부의 물질 분포가 균질해 마찰이라곤 고려할 필요도 없는 매끈한 내리막길에서 미끄럼을 타고 똑바로만 간다니요. 교과서는 우리를 기만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눈앞의 명료한 현실도 제대로 모사하지 못하는 물리법칙으로 온 우주를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28-29)


자연의 물리법칙에 대처하는 인간의 법칙은 이처럼 임시변통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미봉지책이 삶을 어떻게든 굴러가게 만들어 나를 구원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4년에 한 번 나타나는 229일이나 그보다 드물게 나타나 더 짧게 지속되는 235960초처럼 느껴질 때, 그 작고 소중한 윤일과 윤초 덕분에 인간이 자연의 리듬에 잘도 박자를 맞추며 살아갈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31)


이제는 저도 압니다. 과학은 무시할 것을 무시하고, 생략할 것을 생략함으로써 세상 만물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기틀을 세우고 초석을 닦는다는 것을. 상욱님과 제가 서로 다르게 갖고 있는 각자의 넓은 스펙트럼을 물리학자, 천문학자라는 누르개로 납작하게 만들어버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직장 밖 사람들에게 이만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을 겁니다. 근사값의 근사함을, 이제는 압니다.

겉도 속도 이상적이지 않은 나를 더 못나 보이게 만들곤 하던 그 완벽한 나무토막을, 조금의 마찰도 없이 매끄럽기만한 빗면을 거침없이 내려오며 지구로 돌진하는 그의 가속운동을, 이제는 똑바로 응시하며 미소 지을 준비가 됐습니다. (34-35)



25.10.15.

과학산문읽기. 은하 이야기를 하다가 면으로 차원을 낮추는 이야기를 읽으며 글에서도 면발에 대한 진지함이 느껴져 웃었고, 발레리나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참기 힘든 고통을 견디며 기어코 해야 할 일을 해내는 모습에 뭉클해졌다. 저자의 말마따나 나는 언제 저렇게까지 최선을 다해본 적이 있던가생각해보았고, 앞으로는 나도 발레를 볼 때 사람이 보이겠구나, 동작 하나하나를 어떻게든 해낼 때의 고통이 보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된 면발이란, 씹을 때 국수 전분을 이루는 포도당의 글리코사이드 결합이 가벼운 반발력으로 치아에 뉴턴의 제3법칙에 따른 반작용력을 가하는 차가운 기운이 있어야 합니다. 굵기 또한 중요한데, 면의 원통형 대칭이 살짝 깨진 상태로 그 두께의 변화가 예측 가능한 패턴에서 아주 조금만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쉽게 말해서 면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면의 길이는 한 번의 흡입으로는 입안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두 번이면 완전히 사라지는 정도가 좋습니다. 하지만, 흡입의 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에 일정 정도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또한 가위로 면발을 난도질하는 것은 국수의 본질을 훼손하는 행위로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1차원은 '길이'라는 단 하나의 물리량으로 그 존재가 규정됩니다. 면을 자르는 것은 1차원 구조가 가진 유일한 특성을 제멋대로 재단하여 면의 자존심을 꺾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지 편히 먹기 위해 근본을 버리는, 쉽게 말해서 UFO의 이상한 움직임을 이해하자고 물리학을 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입니다. (41-42)


KBS 다큐멘터리 <인사이트 아시아-누들로드>에 따르면 국수는 중국의 탕문화와 서역의 빵 문화가 결합하여 탄생한 거랍니다. 서역에서 밀가루는 빵으로 만들어 구워먹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중국인은 뭐든 끓여먹길 좋아합니다. 밀가루를 끓여먹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 국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밀가루에 국물 간이 잘 배도록 부피 대 표면적 비율을 최대로 만들어야 했는데, 그런 기하학적 구조가 바로 '1차원' 국수였던 겁니다. 차원 낮아지는 것은 싫지만, 차원을 낮추면 공간적으로 주변과 소통하는 능력이 늘어납니다. (44)


우리가 보지 않을 때, 별은 반짝인다고 할 수 있을까요? 빛은 입자여서 저멀리 별에서부터 출발한 빛 알갱이 몇 개가 우리의 각막에 와 닿는 것일까요, 아니면 빛은 파동이어서 저멀리의 별빛이 우리에게까지 전파되는 것일까요? 대기의 성분과 밀도와 움직임에 따라 별빛은 나름대로 직진합니다. 내비게이션도 없는데 매 순간 가장 빠른 경로를 찾아서 곧장 앞으로 나아갑니다. 가장 빠른 길은 수시로 변합니다. 그러면 별빛은 찰나마다의 가장 빠른 길을 따라 지표면상의 여기에도 닿고 저기에도 닿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지 않을 때는 그렇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별빛은 반짝이는 게 아니라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별은 오로지 우리가 보고 있어서, 우리가 보고 있기 때문에, 그토록 찬란히 반짝입니다. (50-51)


저린 것과 쥐가 난 것은 다릅니다. 보통은 쥐가 나면 바로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는 한참 전부터 종아리 근육이 뒤틀리는 고통에도 준비한 음악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 모든 동작을, 미소 짓는 것까지 잊지 않고, 완수했습니다. 나는 살면서 한 번이라도 저렇게까지 최선을 다해본 적이 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밤새 공부를 해본 적도 있고, 이사 비용을 아끼려고 티브이도 세탁기도 그 금이 간 채로 아이를 안고 다닌 적도 있지만, 뭘 하기가 너무 고통스러워 울면서까지 기어코 해야 할 일을 해내고야 말았던 적이 있는지 생각했습니다. 저보다 한참이나 어린 그 아이를 존경하게 되는 데에는 한 곡의 음악이 끝나는 시간이면 충분했습니다. (52-53)


회전하는 발레리나는 각운동량을 잃지 않기 위해 발끝으로 섭니다. 바닥에 닿는 면적을 최소화해서 마찰을 줄입니다. 회전하는 움직임에 따라 알맞게 팔을 오므렸다 폈다합니다. 회전하기 위한 중심축으로 삼은 다리는 꼿꼿하게 딛고, 다른 다리를 던지듯 뻗었다가 재빨리 감으면서 회전관성은 줄이고 각속도를 빠르게 합니다. 팔다리를 벌리면 느리게 돌고, 몸에 붙이면 계속해서 빨리 돌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어느 쪽이든 마찰 때문에 점점 느려집니다. 그럴 때는 내 몸의 일부를 과감히 던져야 합니다. 물론 다음 순간 재빨리 되가져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음악이 다 끝날 때까지, 있는 힘껏. (54)



25.10.17.

과학산문읽기.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하지만 신이 없다는 증거를 보며 기뻐하는 사람은 아니길 바랍니다. 인간을 사랑해줄, 삶의 의미를 제시해줄 신이 없기 때문에, 이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별빛이 별빛답지 않은 시대, 인간에게는 인간이 필요합니다. (62)


사실 21세기에 제조된 자동차의 깜빡이 소리는 대개 인위적으로 꾸며진 것입니다. 자동차에 전자제어 장치를 도입하는 등 많은 부분이 전자장치로 대체되어서 그렇습니다. 디지털 릴레이에서 기계적인 소리가 날 리 없습니다. 그러나 운전자는 방향지시등이 켜져 있는지 여부를 인지해야 하므로 깜빡이 소리는 꼭 들려야 합니다. 그래서 자동차 회사는 음원을 만들었습니다. 기계식 깜빡이 소리를 감쪽같이 재현해, 깜빡이를 켜면 박자에 맞춰 같은 소리가 나게 만들었죠. 요즘은 그에 더해 문을 열거나 시동을 켜고 끌 때 효과음을 내기도 합니다. 컴퓨터를 켤 때 나는 소리, 넷플릭스에 로그인할 때 나는 소리처럼 차의 시그널 음향을 만듭니다. 기분에 따라 음악 테마를 바꿀 수도 있겠죠.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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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29.
















일인칭 가난읽기.


어쩌다 한 번씩 엄마는 내게 '교양'을 전수했다. 김밥천국 돈가스를 두고 포크와 나이프 쥐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허연 각질이 들고 일어나지 않게 얼굴에 바르고 남은 로션을 팔꿈치나 무릎에 바르라고 일러주었다. 가난이 표가 날까 봐 그런 것들로 얼기설기 기웠다. (65) 


가난하고 어린 사람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와 온도는 이렇게 요동치곤 했다. 취소했다가 사과했다가, 깔보았다가 추어올렸다. 사무적이었다가 다정했다가, 냉했다가 끓어올랐다. 끓어오른 자신에게 도취되었을 뿐, 사실 가난하고 어린 사람에겐 관심이 없었다. (77) 


연애 옹호론자들은 주창할 것이다. 자취방에서 떡볶이만 먹어도 행복한 것이 연애다! 하지만 애인과만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자취방을 그리 쉽게 얻을 수 없으며 '지지리 궁상''지난한 가난'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럼 연애 옹호론자들은 충고할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게 진짜 가난한 거야! 나도 충고하자면, 지갑이 허한 게 진짜 가난한 거랍니다.

20대는 왜 이렇게 해야 할 일이 많을까. 돈이 부족해도 마음은 충만해야 하고, 최저임금을 받아도 사서 고생을 해야 하며, 학점에 취업 걱정을 하면서 연애도 해야 하고, 마른 지갑을 쥐어짜서 애인과의 기념일도 챙겨야 하고……차라리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편이 낫다. (98)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완독. 갑작스럽지만 보니것스러운 마무리가 인상적이었다. 요상한 재벌집 아들에서 시작해 상속 다툼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핵심은 세계에서 낙오한 사람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는 엘리엇 같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우리의 눈에는 바보 같아 보이지만 오늘날의 세계에는 더욱 필요한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부제가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



25.9.30.

일인칭 가난완독. 담담하고 건조한 서술 안에서 오랜 시간 일렁였을 울분과 설움이 언뜻 눈에 비친다. 일인칭이라는 것은 가장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기에 보편성을 결여한 진술이라고 누군가는 말하겠으나,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큰 파동을 남기고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바라보게 한다. 가난 때문에 좁아진 기회와 상상력의 폭, 어떤 범위의 꿈은 넘볼 생각도 못하게 하는 복지 제도의 굴레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했던 시간.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와 겹쳐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난을 말할 때 가족을 맨 뒤에 배치한다. 가족이 그 모양이니까 그렇게 됐지 따위의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불행한 가족과 가난을 세트 취급하는 클리셰가 지겹다. 내 가난은 가족이 아니라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과 세트였다. 날 불행하게 했던 것은 교통사고, 알코올중독,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임금, 젠더폭력 및 가정폭력이었다. (116) 


사실 진짜 부족한 것은 시간이라는 자원이었다. 다음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질 좋은 식사를 할 시간, 질 좋은 수면을 할 시간, 질 좋은 대인관계를 통해 정서적 안정을 되찾을 시간이 없었고, 미래를 계획할 시간도 없었다.

'취업 준비'라는 말이 그래서 어색하다.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입시 과외를 받아본 적 없고(문예창작입시 과외가 월 70만 원이었다), 합평에도 나가본 적 없다. 그 시간들이 엄마의 시급과 나의 시급으로 환산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에도 돈과 시간은 필수다. 내가 각종 행사를 거절하는 상용구는 하나였다. 시간이 없어서요. 이 말은 곧 돈이 없어서요, 와 동의어였다. (122)


가난한 사람은 누구보다 강력하게 지금의 현실을 벗어나고 싶지만 누구보다 강하게 현실에 묶여 있다. 살기 위해 했던 학원 일로 이력을 채워온 나는 언젠가 학원을 창업하겠다고 생각한다. 이 계획이 의외로 자연스러워서 깜짝깜짝 놀란다. 학원 일이 언제부터 나의 장래 희망이 되었나.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어떤 사람으로 살지 고민을 이어갈 시간이 없다. 내가 미래를 고민하다가 써버린 시간에 돈을 쳐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123)


부자들이 제 돈 갖고 무슨 짓을 하든 아랑곳할 바 아니지만 가난을 희롱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지 않은가...더군다나 내 가난은 그게 어떤 가난이라고. 내 가난은 나에게 있어서 소명(召命)이다. 박완서의 도둑 맞은 가난''는 나다. (146)



25.10.5.















바움가트너읽기 시작.

 


25.10.6.















3분 철학 2완독.



25.10.7.

마이시크릿덴 방문. 연휴 기간이기도 하고 날씨가 좋지 않을 것이란 예보가 있어서 전날 부랴부랴 예약하고 방문했다. 덕수궁 바로 옆에 있는 공간은 약간 어두우면서 운치 있게 꾸며져 있었고, 날씨도 궂으니 아무도 안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어느새 다 채워진 자리를 보며 사그라들었다. 조용하게 대화의 소음을 걱정하지 않고 읽을 수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서울광장의 행사음이 그대로 다 들렸고, 시위가 있는 날이면 집중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시간 동안 있으면서 바움가트너읽기.





25.10.8.

바움가트너완독. 백조의 노래가 언제나 절창(絶唱)은 아니지만, 읽는 동안 과거의 내가 떠올라 내내 묘한 감정이 들었음을 부인할 순 없겠다. 달의 궁전, 공중 곡예사, 뉴욕 3부작을 읽을 때의 나는 저 멀리에 있어 이제 보이지도 않지만, 바움가트너의 생의 단편들을 따라가는 동안 그때의 느낌이 잔상처럼 부유했다. 안타깝게도 잔상에서 더 선명해지진 못했지만. 그때의 저력을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었으나, 그 사이 내가 빼먹은 오스터의 작품들을 다시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마침 개정판도 나온다는 소식이 있으니..


두 달 뒤 그는 환지통 에세이를 쓰는 일에 파묻혀 있다. 은유적 적합성이 점점 분명해졌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환지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게 어디로 튈지 지금 시점에서는 알 수 없고 이걸 끝낼 수 있을지 조차의심스럽지만 당장은 이것이 어떤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있으며, 이것만으로도 그에게는 뇌 지도, 감각 수용체, 신경 회로 연구를 계속해 나갈 동기가 된다. 이것은 정신적, 영적 통증을 몸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노력의 한 부분이다. 그는 죽은 자식을 애도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죽은 부모를 애도하는 자식, 죽은 남편을 애도하는 여자, 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남자를 떠올리며, 이들의 고통이 신체 절단의 후유증과 얼마나 닮았는지 생각해 본다. 사라진 다리나 팔은 한때 살아 있는 몸에 붙어 있었고, 사라진 사람은 한때 다른 살아 있는 사람에게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절단된 일부, 자신의 환상에 속하는 부분이 여전히 깊고 지독한 통증의 원천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치료가 가끔 이 증상을 완화해 줄 수는 있지만 궁극적 치료법은 없다. (68-69)


그러니까, 인간 삶이란 외로움과 잠재적 죽음이라는 고속 도로를 따라 빠르게 달려가는 통제불가능한 차라는 독한 비전으로부터. 그러다 자동차automobile라는 단어에 관해 생각하게 되면서 비로소 그의 생각이 구체화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결국 운전대의 신비가 되었다. 자동차. 이것은 고대 그리스어 autos, 라틴어 mobilis, 19세기 프랑스어 mobile의 혼종 복합어로 스스로 움직인다는 뜻이며 일반적으로 차를 가리키는 공식 용어이기도 하다.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 움직이는 생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두 가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생각들을 가져와 하나의 억지스럽고 명백히 우스꽝스러운 관념으로 뭉뚱그리며 바움가트너는 자신의 책을 앞으로 밀고 나갈 은유적 엔진을 발견했다. 사람으로서의 차, 차로서의 사람. 이 둘은 지그재그를 그리는 유사 철학적 담론을 통하여 서로 대체할 수 있는데, 이 담론을 관통하는 것은 독자들이 물구나무를 서서 똑바로 선 세계를 다시 상상하도록 이끌기 위해 세상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스위프트, 키르케고르를 비롯한 지적 장난꾸러기들의 정신이다. 익살꾼 바움가트너. 슬프게도, 지금은 풍자가 득세하는 시기는 아니기에, 그 우스개를 알아들을 사람이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 (228-229)


그는 차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인간 자아의 표상으로서의 차, 나아가 어두운 밤을 뚫고 혼자서 저돌적으로 빠르게 달려가는 수백만 명이 모는 다른 차 수백만 대와 함께 주간 고속도로가 서로 얽힌 방대한 망을 따라 돌아다니는 차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미국 사회의 축도였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분노하여 제정신을 잃고 도로의 규칙을 내팽개친 채 영원히 이어지는 <파괴 경주>, 그 뉴에이지 최고의 때려 부수기 스포츠에 참여하게 되면서 <자유민의 나라>는 잉크처럼 검은 아스팔트의 띠, 하얀 줄이 그어진 그 띠를 따라 미쳐 날뛰고 있다. 그것이 바움가트너 책의 중심 은유다. (236)

















3분 철학 3읽기 시작.
















모비 딕읽기 시작.


샘물에 비친 아름다운 영상을 붙잡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물에 뛰어들어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이야기에는 훨씬 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바로 그 영상을 우리는 모든 강과 바다에서 본다. 그 영상은 결코 잡을 수 없는 삶의 환영이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의 열쇠인 것이다. (46) 


아마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것에 아무 자극도 받지 않았겠지만, 나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에 시달리고 있다. 나는 금단의 바다를 항해하고 미개인들의 해안에 상륙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좋은 것도 외면하지 않지만, 두려움에 대해서도 민감하다. 그리고 상대가 허락해준다면 그것과 친하게 사귈 수도 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의 모든 주민과 사이 좋게 지내는 것은 어쨌든 좋은 일이니까.

이런 것들이 내가 고래잡이 항해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이제 경이의 세계로 들어가는 거대한 수문이 열렸다. 그 목적지를 향해 나를 몰아대는 분방한 공상 속에서 두 마리씩 짝을 지어 내 영혼의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오는 고래의 끝없는 행렬이 보였다. 그리고 그 행렬의 한복판에는, 하늘로 우뚝 솟은 눈 덮인 산처럼 거대한 두건을 쓴 거대한 유령이 하나 떠다니고 있었다. (51)


! 죽은 이들을 초록빛 풀밭에 묻은 사람들, 꽃 속에 서서 "여기 이곳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쓸쓸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검은 테를 두른 저 대리석 밑에는 한 줌의 재도 들어 있지 않으니, 그 공허감은 얼마나 쓰라린가!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저 비문 속에는 얼마나 큰 절망이 숨어 있는가! 객사하여 무덤조차 없는 이들에게 부활을 거부하고 모든 신앙을 갉아먹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 속에는 얼마나 지독한 허무감과 자발적인 불신앙이 담겨 있는가! 저 명판들은 여기보다는 오히려 엘레판타 동굴 속에 세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죽은 자들이 살아 있는 자들의 인구조사에 포함된 적이 있는가. 죽은 자들은 굿윈 사주의 모래알보다 더 많은 비밀을 안고 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속담이 세계 어디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어제 저세상으로 떠난 사람의 이름 앞에는 그토록 의미심장하고 이단적인 단어를 덧붙이면서, 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 인도양으로 항해를 떠나는 사람에게는 그런 단어를 붙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생명보험회사는 무엇 때문에 불멸의 인간에게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인가. 오랜 옛날 60세기 전에 죽은 아담은 아직도 꼼짝하지 못하고 영원히 마비된 채 얼마나 치명적이고 절망적인 혼수상태 속에 누워 있는 것인가. 우리는 죽은 자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 자들을 침묵시키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무덤 속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난다는 소문만으로도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결코 무의미한 의문들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신앙이란 것은 승냥이처럼 무덤들 사이에서 먹이를 찾고, 이런 죽음의 회의 속에서도 가장 활기찬 희망을 주워 모으려고 한다. (89-90) 



25.10.11.

모비 딕읽기.


설교단은 이 세상의 이물이고, 그 밖의 것들은 모두 그 뒤를 따를 뿐이다. 설교단이야말로 세상을 이끌어간다. 신의 노여움의 폭풍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곳도 이곳이고, 그 노여움의 화살을 정면으로 받는 곳도 이곳이다. 순풍이건 역풍이건 마음대로 불게 하는 신에게 구원의 바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곳도 이곳이다. 그렇다. 세상은 항해에 나선 배이거니와, 그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설교단이야말로 그 배의 이물인 것이다. (94)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긴 항해가 끝난다는 것은 두 번째 항해가 시작된다는 뜻이니, 두 번째가 끝나면 세 번째가 시작되고, 그렇게 영원히 계속된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견딜 수 없는 세상의 노고인 것이다. (120)


그래서 그들, 특히 남자들 중에는 성서에서 따온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고─이 섬에서는 특이하면서도 흔한 일이다그들은 퀘이커교도 특유의 '자네''그대'니 하는 엄숙하고 연극적인 말투를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래도 그 후의 생활은 대담하고 끝없는 모험으로 가득 차 있고, 그것이 성장한 뒤에도 변하지 않는 천성과 융합되어, 거기서 스칸디나비아의 해적왕이나 서사시의 주인공인 고대 로마의 이교도에게도 뒤지지 않는 대담무쌍한 성격이 나온다. 그리고 이런 자질들이 놀라운 재능을 타고난 사람, 이를테면 먼바다에 나가 북반구에서는 본 적이 없는 별자리 아래서 오랫동안 수없이 밤번을 서면서 적막과 고독을 겪은 덕분에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사색할 수 있었던 사람, 그리하여 자연이 자발적으로 내맡기는 순결한 젖가슴에서 갓 나온 달콤하고도 거친 자연의 느낌을 모두 받아들이고, 게다가 우연한 모험의 도움도 조금 받아서 대담하고 간결하며 고상한 언어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이런 사람은 한 나라의 전체 인구 가운데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하지만안에서 지구 같은 두뇌 및 무거운 가슴과 결합할 때, 숭고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에 알맞은 강력하고 화려한 인물이 되는 것이다. 극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런 인물은 선천적이든 다른 상황 탓이든, 그 성격의 근저에 거의 의도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압도적인 우울함이 숨어 있지만, 그것도 그 인물의 가치를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비극적으로 위대한 인물은 병적인 우울함을 통해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야망을 품은 젊은이들이여, 명심하라. 인간의 위대함이란 질병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138-139)


거칠고 사나운 대서양의 추운 겨울밤, 내 발은 젖었고 재킷은 더 많이 젖었지만, 그때는 피난할 수 있는 유쾌한 항구가 앞길에 많이 준비되어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들판과 골짜기는 영원히 푸르러서, 봄에 돋아난 풀이 발에 밟히지 않고 시들지도 않은 채 한여름에도 그대로 남아 있을 것만 같았다. (175)


항구는 자비롭다. 항구에는 안전과 안락, 난로와 저녁식사, 따뜻한 담요, 친구들, 우리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그 강풍 속에서 항구나 육지는 그 배에 가장 절박한 위험이 된다. 배는 모든 환대를 피해서 도망쳐야 한다. 배가 육지에 닿으면, 용골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배 전체가 몸서리칠 것이다. 배는 돛을 모두 펴고 전력을 다해 해안에서 멀어지려 한다. 그러면서 배를 고향으로 데려가려는 바로 그 바람과 맞서 싸우고, 또다시 거친 파도가 배를 때리는 망망대해로 나가려고 애쓴다. 피난처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위험 속에 뛰어든다. 배의 유일한 친구가 바로 배의 가장 고약한 원수인 것이다! (178)



24.10.12.

모비 딕읽기. 이제 에이해브 선장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키토의 날씨에 대한 묘사가 아름다워 구글 지도로 검색해보았을 정도. 고래학에 대한 설명은 너무 본격적이어서 훑기만 했다.


'피쿼드'호의 뒷갑판 양쪽, 뒷돛대 버팀줄 가까이에 있는 널판에 지름이 1.5센티미터쯤 되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는 고래뼈로 만든 다리를 그 구멍에 끼우고, 한 손을 들어서 밧줄을 움켜잡고 꼿꼿이 서서는, 끊임없이 곤두박질하고 있는 뱃머리 너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앞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두려움 모르는 눈길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정신, 단호하고 양보할 수 없는 무한한 고집이 담겨 있었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선원들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심란한 선장의 지휘를 받는 것이 고통스럽지는 않지만 불편하다는 자각을 지극히 사소한 몸짓과 표정으로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기분이 언짢은 에이해브 선장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표정을 얼굴에 띠고 그들 앞에 서 있었는데, 그에게서는 어떤 강력한 슬픔이 지닌 위엄,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당당하고 압도적인 위엄이 풍기고 있었다. (200) 


따뜻하면서 시원하고, 맑고, 온갖 소리가 울려 퍼지고, 향기롭고, 넘칠 듯이 풍족한 낮 시간은 마치 장미 향수를 뿌린 눈으로 만든 페르시아 빙과를 수북이 담은 수정 그릇 같았다. 별이 빛나는 장엄한 밤은, 보석으로 장식한 벨벳 옷을 걸치고 집에 홀로 남아, 자긍심 속에서, 정복하러 떠난 백작들, 황금빛 투구를 쓴 태양들의 기억을 끌어안고 있는 도도한 귀부인들 같았다. 낮은 그렇게 매력적이고 밤은 그렇게 유혹적이어서, 잠을 언제 자는 게 좋을지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시들지 않는 날씨의 모든 매력은 바깥세상에 새로운 매력과 효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영혼에도 작용했고, 특히 고요하고 온화한 저녁 무렵이면, 맑은 얼음이 대부분 조용한 황혼녘에 형성되듯 기억은 수정처럼 맑은 결정체를 쏟아냈다.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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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22.















예술 도둑완독. 평범한 도둑과 다른 예술적 안목을 가졌다고 자부했던 천재가 행위 자체에 중독되어 잠식당하고, 한낱 장물아비로 전락하기까지의 과정이 상세히 담겼다. 놀랍도록 대담했고 섬세했던 절도가 집착에 허우적대며 그 예리함을 잃었을 때의 추락. 그리고 아들의 애정을 원했던 어머니의 끔찍한 선택. 예술품을 어머니가 어떻게 했는지가 드러났을 때의 충격과 허망함이란. 에필로그까지 읽으면서 정말 많은 노고가 들어간 노작이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중간중간 미술품 절도의 역사나 예술에 대한 관점을 설명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다만 절도의 규모와 시간, 그리고 브라이트비저의 절도 철학(?)을 제외하면 서사에 그만의 독특한 무언가가 있었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전형적인 전락의 서사로 느껴졌다는 이야기.


예술은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에 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이론에 따르면 자연계의 혹독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비효율성과 낭비를 없애야 한다. 그런데 예술은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 없는 부분에 시간과 노력, 자원을 소비한다.

그럼에도 지구상의 어느 문화에나 예술이 존재하며, 그 형태는 실로 다양하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드러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예술 이론가들은 예술이 이토록 널리 퍼진 것이 인류가 자연선택을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믿지만, 사실 예술은 짝을 유혹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다윈주의에 부합한다. 예술은 생존의 압박과는 거의 무관하며 여가 시간에 나오는 부산물이다. 인간이 더는 포식자를 피해 도망 다니고 먹을 것을 찾아 헤매지 않게 되면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도구라고 알려진 대뇌를 이용해 상상력을 펼치고 탐구하며 깨어 있는 동안에도 꿈을 꿀 수 있게 되었고 신의 생각을 나눠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예술은 인간의 자유를 상징하고, 진화 전쟁에서 인간이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149)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 신경과학 교수 세미르 제키Semir ZekiMRI 촬영을 이용해 실험 참가자들이 화면에 비친 예술 작품을 보는 동안 뇌에서 일어나는 신경활동을 추적했다. 그 결과 뇌에서 미적 반응이 일어나는 정확한 지점을 알아냈다. 눈 뒤에 위치한 콩알만 한 크기의 엽葉이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그다지 시적이진 않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는 사람의 내측 안와전두피질medial orbital-frontal cortex에 달려 있다. (150)


브라이트비저가 훔치는 담뱃갑과 포도주잔, 그리고 여타 가정용 물건은 실용적인 형태에 아름다움을 간직한 것들로 대부분 1800년대 초기 유럽 산업혁명 직전에 만들어졌다. 그때까지는 모든 물건을 수작업으로 만들었고 거기에는 정교한 솜씨와 막대한 노동력이 들었다. 브라이트비저는 산업혁명 이후 엔진과 전기의 발명, 그리고 대량 생산 시스템 덕분에 사람들의 삶이 수월해졌을지 몰라도 세상은 점차 보기 흉해졌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장인이 제자에게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며 서서히 독창적 스타일을 구축해갔다. 요즘은 공장에서 값싸고 하나같이 똑같은 일회용 제품을 찍어낸다. 브라이트비저는 기계가 세상을 점령하기 직전의 시기에 인류 문명이 이미 아름다움과 기술 면에서 최대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기의 물건과 작품을 훔친다. 시간은 무자비하게 흘러가지만, 한적한 마을의 작은 다락에서만은 멈추기를 희망한다. (152)


앤 캐서린은 경찰 조사에서 예전에는 브라이트비저의 미학적 안목을 존중했지만, 이 시점부터는 그가 "더러운" 방법을 써서 "병적으로도둑질을 했다고 말한다. 한때는 아름다움을 숭배하며 작품 하나하나를 귀한 손님처럼 대하던 브라이트비저였지만, 이때부터는 마치 사재기를 하듯 그저 무엇이든 끌어모으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집에 가져오는 물건 대부분은 앤 캐서린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중 일부는 추하기까지 했다.

무분별하게 절도를 일삼고 차를 허락 없이 사용해도 앤 캐서린은 브라이트비저를 버리지 않고 자기 아파트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2001년에는 두 사람 모두 서른 살이 된다. 앤 캐서린은 75일생이고 브라이트비저의 생일은 101일이다. 이 무렵에는 브라이트비저가 특별히 보여주지 않는 한 새로운 물건이 다락에 들어와도 앤 캐서린은 신경 쓰지 않는다. 한때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실 하나를 따온 것 같던 두 사람의 다락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쓰레기장이 되었다. 끝도 없이 물건이 줄지어 들어올 뿐인. (198-199)


이번에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미 잃어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없어 슬프다. 도둑질을 하던 시간이 아니라, 도둑질을 멈췄던 시간이 아깝다. 브라이트비저는 루벤스의 집 정원에서 깨닫는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가 바로 인생의 정점이었다. <아담과 이브>를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차창을 내려 바람을 맞으며 앤 캐서린과 집으로 달리던 그때보다 더 화려한 순간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젊고, 승리감에 차 있었다.

포스터 침대에 드러누워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하곤 했다. 훔친 작품들에 둘러싸여,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방 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장면이다. 그는 떠나겠지만 그의 작품들은 영원히 남는다. 브라이트비저는 늘 다락 안 물건들이 자신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멀리 갔고 어머니는 알자스 숲에서 불을 지폈다. “한때는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었어요.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요." (288)



25.9.23.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읽기 시작.


모두에게 유토피아가 되리라고 기대했던 미합중국이 한세기를 맞기도 전에, 노어 로즈워터와 그 부류의 몇몇 사람들은 건국의 조상들이 한 가지 면에서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음을 입증했다오. 불과 백 년 전의 그 조상들이 각 시민의 재산을 제한해야 한다는 내용을 유토피아의 법률에 넣지 않았다는 거였소. 그들은 값나가는 물건을 사랑하는 계층에 대한 나약한 동정심 때문에, 대륙은 워낙 광대하고 가치가 높은 반면 인구는 워낙 희박하고 진취적이라 행여 어느 도둑이 아무리 손이 빨라도 남에게 작은 불편을 끼치는 짓 이상은 할 수 없을 거라는 느낌 때문에 그런 실수를 저질렀소. (18)


이렇게 해서 한 줌밖에 안 되는 탐욕스런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관리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거머쥐고 관리하게 되었다오. 이렇게 해서 야만적이고 어리석고 완전히 부적절하고 불필요하고 유머 없는 미국 계급제도가 창출되었소.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평화적인 시민들은 최저임금만 요구해도 즉시 흡혈귀로 분류되곤 했소. 그 이후로 칭찬은 언제나 엉성한 법망을 피해 범죄를 저지르고 막대한 돈을 챙기는 방법을 고안하는 자들의 몫이 되었소. 이렇게 해서 아메리칸드림은 죽은 물고기처럼 허연 배를 내놓고 가스를 가득 품은 채 끝없는 탐욕의 더러운 수면 위로 떠오르더니 대낮의 햇살 아래 펑하고 터져버렸다오. (19)


노어는 새뮤얼을 낳았고, 새뮤얼은 제럴딘 에임스 록펠러와 결혼했소. 아버지보다 정치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던 새뮤얼은 공화당의 막후 실력자로 정력적으로 일했고, 공화당이 후보를 지명할 때면 미친 듯이 빙글빙글 춤을 추며 뜻 모를 바빌로니아어로 유창하게 지껄이는 무슬림 탁발승 같은 후보들, 가난한 사람들이 법 앞에선 그와 로즈워터 같은 자들이 평등하다는 말을 꺼낼라치면 즉시 군대에게 발포 명령을 내릴 후보들을 지명하게 만들었소. (19-20)


엘리엇은 술고래, 유토피아 몽상가, 허울 좋은 성인, 목표 없는 바보가 되었소.

그는 자식을 낳지 않았소.

부디 평안하기를, 친애하는 사촌 또는 아무개 씨. 관대하시오. 친절하시오. 예술과 과학 따위는 무시해도 상관없소. 그런 것들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소. 가난한 자들의 세심하고 진실한 친구가 되시오. (22)

















서리북 17호 완독. 두 권이 더 나오고 나서야 읽음. 3월부터 읽었는데 잠시 덮어두었다가 잊었다가 이제야 마쳤다. 고전의 강 코너에서 다룬 『마음의 사회』 서평은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어려웠고(여전히 기호주의와 연결주의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만교의 에세이를 보며 책만 쌓아놓는 내가 보여 잠시 안도(?)하기도.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속도보다 책을 구입하는 속도가 더 빠르다. 읽으면 유익할 책이다 싶으면 일단 구입해 둔다. 나는 이것이 독서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가장 읽고 싶은 책을 골라 구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가장 읽고 싶은 책이니까 저절로 읽고 싶어지고, 저절로 읽게 될 테니까. 가령, 내가 갖고 있는 책은 만여 권쯤 될 텐데, 이 중에서 읽고 싶어 구입했지만 아직 못 읽고 있는 책만 천여 권쯤 되는 것 같다. 그중에는 읽고 싶어 구입했지만, 막상 앞부분을 들춰보니 흥미가 줄어 미뤄 둔 책도 몇백권 있다. 그래도 절반 이상은 이제라도 읽어야지 하는 책들이다. (218)



25.9.24.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읽기.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에 나왔던 그 로즈워터가 맞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물론 거기서는 킬고어 트라우트의 광팬이라는 설정, 그의 석탄 철강 회사가 어느 지역의 땅을 몽땅 사들여 원성을 샀다는 내용 정도만 있지만, 여기서의 로즈워터는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주정뱅이 아저씨 정도로 읽히기 때문. 물론 책마다 다른 책에서 나왔던 인물이 나오는 것도, 전작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오는 것도 보니것 월드에서는 흔한 일이다. (타이탄의 세이렌5도살장의 트랄파마도어는 완전 딴판일 정도)


밀퍼드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 모인 개자식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오직 여러분의 소설만 읽습니다. 오직 여러분만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진짜 멋진 변화들을 이야기하고, 오직 여러분만이 인생이란 우주여행이라는 것. 잠깐 지나가는 여행이 아니라 수십억 년 동안 계속되는 항해라는 것을 아는 미친놈입니다. 오직 여러분만이 진정으로 미래를 걱정하는 배짱을 지녔고, 기계가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전쟁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도시가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단순무식한 생각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엄청난 오해, 실수, 사고, 재앙이 우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오직 여러분만이 무한한 시간과 거리에 대해, 결코 사라지지 않는 신비에 대해 번민하며, 바로 지금 우리가 다음 십억 년 동안의 우주여행이 천국이 될지 지옥이 될지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번민합니다." (28-29)


엘리엇이 말했다. "이 사람들, 이 미국인들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 아시오? 그들은 더이상 자신을 보살필 능력조차 없다는 거요. 어디에도 쓰일 데가 없기 때문이오. 강 이쪽의 공장, 농장, 광산은 거의 다 자동화되었소. 미국은 이제 이 사람들을 전쟁에도 써먹지 않소. 더이상 실비아, 나는 예술가가 될 거요."

"예술가요?"

"난 이 버림받은 미국인을 사랑할 거요. 비록 쓸모없고 볼품없는 사람들이지만. 바로 그게 나의 예술작품이 될 거요." (56)


정신과 의사는 이 시대에 이 나라에서 정상으로 통용되는 범주를 조사한 끝에, 정상인이란 부유하고 산업화된 사회의 상류계층에서 탈없이 살아가는 사람으로 양심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부류라고 결론지었다. (66)


상원의원의 얼굴 가득 고통스런 당혹감과 무력감이 차례로 번졌다. "엘리엇이 돕는 그 사람들의 좋은 점을 하나만 말해보거라."

"그럴 수 없어요."

"그렇겠지."

"그건 비밀이에요." 그녀는 억지스럽게 계속되는 논쟁이 그쯤에서 끝나기를 간절히 원했다.

상원의원은 자신이 얼마나 무자비한지 까맣게 모른 채 실비아를 계속 몰아붙였다. "네가 우리의 친구라면, 그 엄청난 비밀이 무엇인지 말해보거라."

"그건, 그들은 인간이라는 거예요." 실비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이해의 눈빛을 구했으나, 그런 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무샤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샤리는 그녀를 향해 소름 끼치도록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탐욕과 욕정이 묻어나는 미소였다.

실비아는 급히 용서를 구하고 욕실로 들어가 울음을 터뜨렸다. (83)


"당신은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렇게 힘없는 우리를 돕고 있어요. 우린 그걸 알아요.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잘 자요." (94)


둠즈데이북에서 돈보다 훨씬 더 흔한 처방은 '아와'였다. 이것은 누구나 알 것 같지만 아무도 모르는 이유로 더러운 판잣집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엘리엇이 추천하는 다음과 같은 처방이었다. "잘 듣고 그대로 하세요. 아스피린 한 알을 입에 넣고, 와인 한 잔과 함께 삼키세요." (121)

















만화로 보는 3분 철학1권 완독. 만화로 설명하는 데 이 정도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읽었지만 기억은 가물가물한 게으르게 읽는 제로베이스 철학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잊기 전에 키워드들이라도 따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따로 노트를 만들어 정리를 시작. 3권까지 정리가 이어져야 할 텐데



25.9.25.















만화로 보는 3분 철학2권 읽기.

 


















일인칭 가난읽기 시작. 20년 동안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았던 저자의 이야기가 단편적인 일화들로 펼쳐진다. 당연히 모든 가난은 상대적인 것이고, 저자보다 더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일인칭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가난과 거기에서 어떻게든 살아내고자 하는 이의 전력투구는 일인칭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 그리고 한편으로 쓸쓸했던 것은, 어떻게든 더 배워보고자 아등바등 노력했던 저자의 여정은 대학원 석사(수료)까지였다는 점. 대한민국 사회의 구조에서 나름 똑똑하고 배우고자 노력한 수급자의 최종 위치는 거기까지라는 것으로 읽혔다. 천재였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졌을까?


기초생활수급자로 사는 동안 나는 다른 형태의 멸균우유들을 받아왔다. 전기요금과 통신요금 일부를 감면받았고, 매달 일반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다섯 장씩 지급받았으며, 1인당 5만 원씩 지원된 문화누리카드로 엄마와 가끔 영화를 봤다. 무료 급식, 수학여행비 지원, 대학교 장학금과 생활지원비가 있어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EBS 교재는 다른 참고서의 반값 정도였고, 개중 수능 연계 교재는 사회적 배려 대상 학생을 위해 과목별로 몇 권씩 학교에 납품되었다. 학생들이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선택 과목의 교재도 항상 여분이 있었다. 나는 이것을 '가난하니까 공짜 교재로 공부해라'라는 값싼 동정이 아니라, '너는 공부할 권리가 당연히 있으니 과목을 잘 고르렴' 하는 부드러운 격려로 느꼈다. 교무실에서 받아 온 것이 멸균우유가 아니라 수능 교재가 되었을 즈음, 나는 그것이 여전히 무거웠지만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동시에 가난에 체념한 나머지 이 "작은 선물들"에 순응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14-15)


노골적인 냉대와 마뜩잖은 동정의 눈빛은 한번 겪으면 잊기 힘들다. 나는 그 눈빛이 어리는 전조를 파악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랐다. 눈빛은 미간에서 시작했다. 억지로 웃는 입꼬리로는 숨길 수 없는 가난에 대한 혐오가 서린 미간. 눈이 먼 아빠를 부축해 행정복지센터에 가는 날마다 진지함을 가장한 그 미간을 보았다. 직원은 초등학생인 나를 자기 자리 앞에 세워두고 질문했다. 아버지가 진짜 눈이 안 보이는 게 맞지? 어머니가 진짜 교통사고 때문에 정규직으로 일하지 못하시는 것도? 지난달에 행정복지센터에서 받은 쌀은 진짜 네가 먹었고? 너 진짜 이 집에서 사는 거 맞지. 그치? 그들은 내게 진짜가 맞느냐고 되풀이해서 물었다. 가난이 '진짜'가 아닐 수가 있나. '가짜' 가난을 만나면 따지고 싶다. 할 짓이 없어서 가난을 도둑질하느냐고, 하다하다 가난마저 진정성 배틀을 붙이는 거냐고. (18)


원한 적 없는 가짜 동정이 모르는 손길과 함께 느닷없이 찾아오기도 했다. 친구들과 주공아파트 놀이터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스피커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아파트 대로변으로 나갔다. 곧 트럭 한대가 우리 앞에 서더니 남자 두어 명과 박근혜가 내렸다. 그는 덥석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밝게 자라는 아이여서 고맙다고 했다. 이후로도 종종 자신을 정치하는 아저씨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이 다가와 내 머리를 함부로 쓰다듬고는 했다. 지금도 나는 재해 지역이나 쪽방촌에서 생수며 연탄, 반찬 등을 나르는 정치인들의 사진을 보면 끔찍하다. 새것이어서 유난히 빨간 목장갑과 일부러 묻힌 듯 재가 거뭇거뭇한 기름진 얼굴들. 그들이 동정마저 전시하는 동안 가난한 이들이 죽고 더 가난한 이들이 태어난다. (18-19)


같은 금곡주공에 살았어도 복도 가장 끝 호에 사는 아이들은 곧 탈출할 애들이었다. 끝 호에는 방이 하나 더 있었고, 그 평수에 사는 이들은 대체로 1년을 넘기지 않고 주공을 떠났다. 오래도록 남게 된 아이들은 고통의 서열을 셈하는 데에 점점 능숙해지고 익숙해졌다. 전세 사는 아이가 월세 사는 아이를 깔봤고, 아파트 평수로 최고의 상태와 최악의 처지를 따졌다. 악한 어른이 아이들을 조종한 결과가 아니었다. 주위의 평범한 어른들을 보며 자연히 터득한 아이들 나름의 '지혜'였다. 몇 년 후 성인이 되어 '휴거'('휴먼시아 거지'의 준말. LH 공공임대아파트 휴먼시아 거주자에 대한 멸시이자 '거지'로 멸칭되는 빈곤층에 대한 낙인과 혐오를 동시에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라는 말이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출입구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혐오가 탄생하는 데 일조한 것 같아서. 이 죄책감이 모두의 것이 될 때쯤엔 세상이 바뀔까. 나는 회의적이다. (27-28)


책을 사거나 학원에 다니면 '진짜 가난'한 것은 아니라고 따지는 사람이 있을 것을 안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것이 힘에 부치는 가난이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렇다고 내가 엄마의 삯과 몸과 시간을 먹어치우며 학원을 다닌 2000년대에도 여전히 가난의 탈출구가 '교육'이었다는 점이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비를 받는 우리 집의 유일한 잉여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무릎이 아작 난 엄마로부터만 나왔다. 엄마는 돈 안 버는 나와 눈도 안 보이고 돈도 못 벌며 술도 마시는 아빠 중에 나를 잉여의 수혜자로 택해 학원에 보냈다. 이것을 기초생활수급비를 계속 받을 수 있는 선에서만 임노동을 했던 엄마가 벌인 국가 복지에 대한 기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 그렇다고 한다면 달게 받아들이겠다. (30)


수급비는 생활의 최저 수준을 가정한다. 이보다 더 가난하지 않으려면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일정 금액 이상의 수입이 생기면 수급비가 낮아지고, 그러면 보탬이 되던 월급은 줄어든 수급비를 채우는 수단이 되어버려 결국 생활의 수준이 빠르게 떨어진다. 엄마는 수급비를 받지 않아도 되니 돈을 더 벌길 원했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경력단절 여성에게 허락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내 눈에 엄마의 노동은 엄마의 팔꿈치나 무릎 그 자체로 보였다. 그런 엄마의 뼈를 갈아 넣은 시간 속에서 나는 부지런해야 했다. (31)


2003년 기초생활수급자에 '합격'할 수 있는 3인 가구의 월 최저생계비는 81만 원이었다. 아빠는 노동 능력이 없었고 엄마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했는데, 엄마의 노동 소득이 최저생계비를 넘었다면 수급자에서 '탈락했을 것이다. 그 이하의 노동 소득이 기초수급 가구에 100퍼센트 '추가' 소득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해진 공제 비율에 따라 적지 않은 액수가 기초생활급여에서 차감되기 때문이다. 수급자 가구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어정쩡하게 수급 기준을 넘는 일자리를 얻어 수급자에서 '탈락'하면, 기초생활 급여에서 차감은 되지만 적게나마 보탬이 되었던 수준의 벌이를 할 때보다 한 달 가용 생활비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2022년 청년 수급자를 대상으로 한 뉴스타파의 탐사보도가 이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공제 대상이 되는 40만 원 이상의 일자리는 구하지 않는 편이 낫고, 혹 버젓한 아르바이트 소득이 생기면 가족의 수급권을 잃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몰래바이트'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33-34)


한편, 이런 식으로 가난을 '수급'이라는 제도적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시야가 좁아진다. “가난한 사람이 공공부조의 수급자로 구획되면서 가난은 특정한 양식과 문법 안에 고이고" 말기 때문이다. “빈곤이 '우리의 삶'에서 '저들의 문제'로 고립되면서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빈곤을 끝장내자는 결의를 압도해"버리는 것이다. (34-35)


새로 취임한 젊은 남자 정교수는 석사논문을 쓰지 않고 수료를 택한 나를 못마땅해하며 충고했다. 다들 힘들어도 학위논문까지는 씁니다. 수료만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에요. 열심히 일과 공부를 병행해서 '겨우' 수료하는 것을 전부 '의미 없는 짓'으로 눙치는 그가 야속했다.

한 번도 차려입고 수업에 가지 못했던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멀쩡한 원피스를 입고 간 날은 종강일이었다. 갖춰 입은 모습이 보기 좋다던 그에게 일을 해야 해서 결국 학업을 잠시 쉬기로 결정했다고 말하자 그가 물었다. 그쪽을 선택하는 게 행복하고 현명한 선택입니까? (그는 늘 돈 버는 일을 그쪽 또는 그런 방법이라며 지시 대명사로 칭했다. 돈이라는 말을 입에 담기에도 저어된다는 듯이.)

 

글쎄, 나는 행복과 현명이 저토록 부드럽게 연결되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고, 그쪽이 아니라 이쪽에 과연 행복과 현명이 있는지는 해보지 않아 알 수 없다. 그렇게 멈춘 나의 최종 학력에는 필히 괄호가 붙는다. 문학 석사(수료). (62-63)



25.9.26.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읽기.


엘리엇이 말했다. "어쩔 수가 없었소. 다른 사람은 절대 안된다고 메리가 고집을 부렸다오."

"." 실비아는 마음을 놓았다.

무샤리는 쉽게 실망하지 않았다. 법정에서 세례는 엘리엇이 자신을 메시아라 생각한다는 증거로 내세우기에 충분했다.

엘리엇이 말했다. "메리에게 분명히 말했지.” 무샤리의 마음에는 역회전을 방지하는 톱니바퀴가 달려 있어 이번에 엘리엇이 하는 말은 증거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상력을 아무리 발휘해도 난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내가 어떤 일을 해도 천국에선 중요하게 안 볼 거라고 말이오.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소."

"뭐라고 말할 건가요? 어떻게 할 참이에요?"

"...... 모르겠소." 바로 그 순간 마법에 걸린 듯 후회와 피곤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의 입술에 묘한 미소가 흘렀다. "우선 그녀의 오두막으로 가야겠지. 그리고 아기한테 물을 뿌리면서 말하겠소. '안녕, 아가들아. 지구에 온 걸 환영한다. 여긴 여름엔덥고 겨울엔 춥단다. 그리고 둥글고 축축하고 붐비는 곳이지. 여기선 고작해야 백 년 정도밖에 못 산단다. 아가들아,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규칙을 말해줄까? 제기랄, 착하게 살아야 한다." (145-146)



25.9.27.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읽기. 엘리엇에서 갑자기 프레드 로즈워터로 넘어가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프레드가 목수에게 상기시켰다. "간단히 서명만 했는데도 꽤 큰 재산이 보장되었잖아? 그게 생명보험의 기적이라니까. 최소한 신부에게 그 정도는 해야지."

배관공들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레드는 나가는 그들을 보고 낙담하지 않았다. 어딜 가든 그들도 양심이란 걸 가지고 다닐 테고, 앞으로도 항상 뉴스스토어에 들를 테니까.

그리고 이곳에 왔을 때는 항상 프레드가 있을 테니까.

"이 직업에서 가장 기쁠 때가 언제인지 아나?" 프레드가 목수에게 물었다.

"몰라."

"어떤 사람의 신부가 찾아와 이렇게 말할 때라네. '당신에게 아이들과 내가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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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15.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읽기. 내가 이 맛에 보니것을 읽었었지, 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선형성은 찾기 어려워도 이렇게 엉망진창인 세계에서 웃음을 찾을 수 있다면야.


트라우트는 겁에 질린 나머지 42번가의 그 자리에 그대로 못박혀 있었다. 나는 그에게 살 만한 가치가 없는 삶을 주었지만, 동시에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도 주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는 흔한 조합이었다. (107)


킬고어 트라우트는 한때 '바로 너 말이야'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을 쓴 적이 있었다. 그 소설의 배경은 하와이제도로, 미들랜드시티에서 드웨인 후버의 추첨에 운좋게 뽑힐 사람들이 가게 될 곳이었다. 고작 사십 명 정도의 사람이 하와이의 땅 전부를 소유하고 있었고, 트라우트는 소설에서 그들이 자신의 재산권을 완벽히 행사하도록 했다. 그들은 모든 것에 무단 침입 금지 표지판을 붙여놓았다.

이는 하와이에 사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끔찍한 문제를 일으켰다. 그들은 중력의 법칙 때문에 땅 위의 어딘가에 붙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물속으로 들어가 앞바다에서 까딱거려야 했다.

그런데 그때 연방정부에서 비상 대책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재산이 없는 모든 남자와 여자와 아이에게 헬륨이 가득 든 커다란 풍선을 주었다.


모든 풍선에는 하네스가 달린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었다. 풍선의 도움으로 하와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소유한 땅에 붙어 있지 않고도 하와이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었다. (108-109)


"진지하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군요." 운전사가 말했다.

"인생이 진지한 것인지 알기 전까지는 저도 답을 모를 겁니다." 트라우트가 말했다. "인생이 위험하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인생은 큰 상처를 주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이 꼭 진지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125)



툴러의 롱 플래그를 다시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양면이 모두 끈적거리기 시작했다. 오래 방치하면 이렇게 되나 싶기도 하고, 뜯지 않은 것이 하나 더 있는데 어떻게 하나 싶기도 하고...

 


25.9.16.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읽기.

 

한번은 뉴욕 주지사인 넬슨 록펠러가 코호스의 한 식료품점에서 트라우트와 악수를 한 적이 있었다. 트라우트는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 알았더라면 그런 사람이 자기 같은 SF 작가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록펠러는 한낱 주지사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행성의 그 지역에만 존재하는 법 덕분에 록펠러는 지구 표면의 광대한 지역뿐만 아니라 표면 아래의 석유와 다른 귀중한 광물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는 웬만한 나라들보다 행성을 더 많이 소유하거나 지배했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다. 그는 그런 터무니없는 소유권을 지닌 채로 태어났다.

"어떻게 지내나요, 친구?" 록펠러 주지사가 그에게 물었다.

"똑같죠, ." 킬고어 트라우트가 말했다. (149)


트라우트는 편안히 앉아서 방금 그 대화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는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었는데, 아주 늙은 노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것을 쓸 짬을 내지 못했다. 존재들이 소리에 완전히 매혹되어 언어가 계속 순수한 음악으로 바뀌는 행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단어는 음표가 되었다. 문장은 멜로디가 되었다. 단어의 뜻을 알거나 상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그들의 언어는 정보 전달이라는 역할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부와 상업계의 지도자들은 일이 제대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 음악으로 바꿀 수 없을 만큼 추한 어휘와 문장 구조를 가진 새로운 언어를 시종일관 만들어내야만 했다. (155)



25.9.17.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읽기. 여전히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뜬금없는 유머나 블랙코미디가 곳곳에 배어있다. 드웨인과 트라우트의 이야기가 주인 듯하지만 아닌 듯도 하고. 중간중간 나오는 트라우트의 단편들에 더 관심이 간다. 처음부터 창조자인 작가가 화자로 등장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더니, 갑자기 피조물들의 세계 한복판에 등장해서 잠시 놀랐다. 메타소설적 요소를 새롭게 활용한 것일까?


머릿속에 나쁜 화학물질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관한 한 드웨인은 분명 혼자가 아니었다. 역사를 통틀어 그와 같은 문제를 지닌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를테면 그가 태어난 이후 봐도 독일이라 불린 나라의 사람들은 한동안 나쁜 화학물질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사람을 수백만 명씩 죽일 수 있는 공장을 지었다. 그 사람들은 기차로 운송되었다. (183-184)


이것은 누구나 각자의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값비싼 일은 바로 병에 걸리는 것이었다. 패티 킨의 아버지 병원비는 드웨인이 하와이 주간이 끝나고 부담할 하와이 여행 비용의 열 배였다. (186)


드웨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 수년 동안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돈이나 구조물이나 여행이나 기계-혹은 다른 측정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를 제외하면 미들랜드시티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무슨 말을 입 밖으로 내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에게는 분명히 규정된 자신만의 역할이 있었다-흑인으로서, 자퇴한 여고생으로서, 폰티액 딜러로서, 산부인과 의사로서, 가스변환점화기 설치기사로서. 만일 누군가가 나쁜 화학물질 등의 이유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더라도 다른 모든 이는 그가 어쨌거나 기대에 부응하며 살고 있다고 계속 상상했다.

미들랜드시티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동료의 정신이상을 늦게 감지하는 것은 주로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루 만에 크게 변하는 사람은 없다고 고집스레 상상했다. 그들의 상상력은 끔찍한 진실이라는 덜커덩거리는 기계에 달린 플라이휠이었다. (195-196)


미국을 실제 삶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토록 위험하고 불행한 나라로 만들고 있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고 나서부터 나는 이야기 짓기를 멀리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인생에 대해 쓸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다른 사람과 똑같이 중요하게 취급될 것이다. 또한 모든 사실이 똑같이 중요한 무게를 지닐 것이다. 아무것도 제외하지 않을 것이다. 남들이야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대신 질서에 혼돈을 부여할 것이고, 실은 이미 그렇게 한 것 같다.

만일 모든 작가가 그렇게 한다면 문학에 종사하지 않는 시민들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질서 같은 건 없으며, 대신 우리가 혼돈의 요구에 적응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

혼돈에 적응하는 일은 어렵지만 가능하다. 내가 바로 살아 있는 증거다. 가능하다. (284)



25.9.18.















예술 도둑읽기 시작. 브라이트비저의 삶과 행적은 흥미롭지만, 아직까지는 책의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다. 탐미적 욕구와 천재(天才)가 만났을 때 어디로 나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 다만 인물 자체의 유년 시절과 심리는 평범해 보였기에.


브라이트비저의 맹점은 다른 사람의 평가를 의식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한 도둑 취급을 받는 이유는 예술계 관계자들과 경찰, 심리학자들이 모두 미학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스탕달 증후군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마음을 밖으로 꺼내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70)


그러나 이들이 '성공한 도둑'이 되는 데 크게 일조한 불편한 진실이 한 가지 있다. 그저 관람객의 양심을 믿고 보안에 신경 쓰지 않는 박물관이 충격적일 정도로 많다는 점이다. 특히 지방에 있는 박물관들은 더 그렇다. 사실 박물관 보안에는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박물관은 작품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유하기 위해 존재하며 관람객은 거창한 보안 장치의 방해 없이 가능한 한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물관 절도 사건을 거의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있다. 작품을 저장고에 넣고 문을 잠근 뒤 무장 경비를 세우면 된다. 하지만 이러면 당연히 박물관도 사라진다. 박물관이 아니라 은행이 된다. (85-86)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읽기. 드디어 세 인물이 한 자리에 모였다. 드웨인 후버와 킬고어 트라우트, 그리고 세계의 창조자 커트 보니것.


나 자신으로 말하자면, 나는 나 혹은 다른 어떤 인간에게도 성스러움은 없으며, 우리는 모두 충돌하고 충돌하고 또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의 기계일 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충돌 말고는 할일이 없어진 우리는 충돌의 팬이 되어버렸다. 때로 나는 충돌에 대한 좋은 글을 썼고, 그것은 내가 관리가 잘되어 있는 글쓰기 기계라는 뜻이었다. 때로 나는 나쁜 글을 썼고, 그것은 내가 관리가 잘되어 있지 않은 글쓰기 기계라는 뜻이었다. 나는 폰티액이나 쥐덫이나 사우스벤드 선반과 마찬가지로 성스러움을 조금도 품고 있지 않았다. (297)


이제 삶은 지구를 아주 단단히 감싸고 있는 중합체(重合體)이므로, 사람에 대한 모든 이야기의 적절한 결말은 바로 그와 같은 약어가 되어야 마땅할 것 같은데, 지금 내가 큰 글자로 써보고 싶어서 쓰는 그 약어는 다음과 같은 모양이다. (307)



덧붙이자면 우리는 모두 공의 표면에 달라붙어 있었다. 우리의 행성은 공 모양이었다. 우리가 왜 떨어지지 않는지 다들 어느 정도 이해하는 척했지만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똑똑한 사람들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있는 표면의 일부를 소유하는 것이 부자가 되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326)



25.9.21.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완독. 보니것의 팬이 아니라면 끝까지 책을 읽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었다. 끊임없이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새로운 인물들, 종잡을 수 없는 전개와 딴소리는 보니것의 장기이지만, 주된 흐름이 있는 듯한 5도살장이나 고양이 요람과는 달리 이 소설은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 친히(?) 내려와 피조물과 함께 하는 작가까지 실험적인 요소가 넘친다. 그래도 유머 코드가 맞는다면(그리고 블랙 유머 코드도 맞는다면) 세계에 대한 보니것의 촌평을 읽는 재미로 읽기엔 충분하다.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나는 리얼리즘 소설이 사소한 것을 꼬치꼬치 파고든다는 킬고어 트라우트의 의견에 동의한다. 트라우트의 소설 전 은하계의 기억 은행에서 주인공은 길이가 200마일이고 지름이 62마일인 우주선을 타고 있다. 그는 자기 동네의 공공도서관에서 리얼리즘 소설 한 권을 빌린다. 그는 그걸 60페이지쯤 읽다가 다시 반납한다.

사서가 그에게 왜 그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인간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374)


그리고 트라우트는 계단을 발견했으나 그것은 엉뚱한 계단이었다. 그것은 로비와 원무과와 선물가게 같은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온갖 상처로부터 회복하는 데 성공하거나 실패하고 있는 복잡한 방들로 그를 이끌었다. 그곳의 많은 사람은 잠시도 쉬지 않는 중력에 의해 지구로 내던져진 이들이었다. (379)


"트라우트 씨킬고어"내가 말했다. "제 손에는 완전함과 조화와 자양분의 상징이 들려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함의 측면에서 보자면 동양적인 것이지만, 킬고어,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입니다. 우리 미국인에게는 선명한 색깔에 삼차원적이며 흥미진진한 상징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노예제도나 대량 학살이나 범죄적인 태만처럼 우리 나라가 저지른 커다란 죄에, 혹은 겉만 번드레한 상업적 탐욕과 교활함에 오염되지 않은 상징에 굶주려 있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트라우트 씨." 나는 이렇게 말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킬고어?"

그 노인은 고개를 들었는데, 그는 내 아버지가 홀아비였을 때아주 늙은 노인이었을 때의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손에 사과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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