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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리뷰오브북스 1호》의 이슈는 '안전의 역습'이었다. 'ISSUE RE-VIEW'의 처음을 장식한 것은 김홍중 교수의 〈무해의 시대〉였고, 이 글은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진희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갈 때, 볼펜을 이리저리 돌릴 때 미주는 자신이 진희를 안다고 생각했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그때가 미주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196쪽
김홍중의 진단으로 보면, '무해한 사회'에 대한 지향은 21세기 한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형성된 안전에 대한 욕망의 결과물이다. "사회적 삶은 '이웃에게 무해하라'라는 새로운 인륜적 명령으로 재구성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피해에 대한 공감, 가해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해에 대한 의지가 일상적 삶을 지배하고 있다."(24쪽) 안전과 무해에 대한 "강도 높은 욕망은 진실, 도덕, 미학의 규범 그 자체를 찢고 변형"(26쪽)시키고 운동을 이끌고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바꿔나간다.
'우리' 중 누군가의 죽음은 광범위한 애도를 낳았고, 죽음을 야기한 유해의 구조에 책임을 묻는 분노 어린 집합 행위가 발생하였다. 이것은 반복적 파동으로 물결치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사회 공간에 풀어 놓았다.
왜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왜 가난한 청년들이 부유한 부모를 만난 자들보다 더 많은 사고를 겪어야 하는가? 왜 여성이 남성보다 더 쉽게 살해되어야 하는가? 왜 택배 노동자의, 콜센터 직원들의, 요양원 수용자의 호흡기는 바이러스에 더 쉽게 노출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사회적 평등을 '안전의 평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신체가 몰래 촬영되어 불법 사이트에 공개될 것을 걱정하지 않을 자유,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지 않고 연애를 할 수 있는 자유,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지 않고 연애를 할 수 있는 자유, 혹은 라돈에 의한 저선량 피폭을 걱정하지 않고 침대에 누울 수 있는 자유가 아닌가? 왜 안전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은 동시에 자유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가? (우리는 '안전으로부터의 자유' 혹은 '자유로부터의 안전'이라는 매우 독특한 관념에 도달했다.) 우리가 누군가와 연대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위험, 불안, 공포를 함께 겪는 자들의 연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안전이 결핍된 존재자들의 새로운 연대, '무해의 연대'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27~28쪽)
이러한 관점에서 김홍중은 21세기의 정치를 '생명정치'의 시대, 위험사회의 틀로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기를, "신체에 가해지는 환경의 유해성을 통치"(24쪽)하기를 원하고, 전방위적인 안전망을 구축하기를 원한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는 데 실패한 권력에 우리는 완강히 저항하고 '탄핵'한다. 팬데믹 상황에서 안전을 향한 욕망은 더욱 증폭된 듯하고, 욕망하는 우리는 "관리되는 세계의 완벽한 합리성"(30쪽)을 기대하는 위험사회의 시민과 닮았다. 하지만 파놉티콘과 같은 위험사회를 비판해 온 유럽의 비판적 지성들과 달리(김홍중은 여기에 슬라보예 지젝과 조르조 아감벤을 포함시킨다), 김홍중은 '무해'라는 시대적 키워드에서 "유사한 위험을 공유하는 타자들과의 연대감"(33쪽)을 발견한다. '우리가 겪는 유해'에 대한 인식에서 '우리가 가하는 유해'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 이러한 인식을 공유하며 여러 형태의 유해와 위험을 걷어내기 위해 새로운 실천을 감행하는 것. 이 흐름 속에 페미니즘이 있고, 장애에 대한 이해와 권리투쟁이 있고, 비거니즘과 동물 해방이 있다. "무해를 향한 욕망이 강해질수록, 인간이 환경에 가하는 유해에 대한 윤리적 인식은 그만큼 더 선명해져 간다. 무해의 감각에 눈뜬 자는 자신의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 다른 존재의 삶이 삭감되어야 한다는 이 사태를 윤리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34쪽) 이러한 성찰에 레비나스가 이야기하는 윤리학이, "내가 있는 자리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었던 자리의 점유"(34쪽)라는 윤리적 인식이 있다. 윤리는 점차 인간 너머로 확장되어 가고, 내가 보장받는 무해가 타자에게도 보장되길 바라는 연대의식이 있다고 김홍중은 보는 것이다.
김홍중은 '무해의 시대'를 바라보며 윤리적 연대를 찾고 있지만 과연 우리 사회의 무해지향성은 거기로 나아가고 있을까?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가 시시때때로 보았던 뉴스들은 "봉쇄된 자아의 순수성에 대한 환상, 완벽한 면역 체계에 대한 비현실적 열망, 비자기非自己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과도한 '안전주의'"(33쪽)에 더 가까웠던 것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재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의료서비스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는지, 어떤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혐오에 얼마나 노출되어 있는지, 어떤 형태의 가난을 겪었는지/겪고 있는지, 어떤 제도와 정책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어떤 정책이 부재한 채로 그 부재의 영향을 받으며 사는지 등등이 전부 명命의 조건"(황정은, 《일기》, 34쪽)인 사회에서 우리는 나의 안전만을, 나의 무해만을 신경쓰며 거리두기라는 이름 아래 울타리만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김홍중의 주장에 마냥 동의할 수 없는 것, 무해의 시대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나의 부정편향 때문일까? "팬데믹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 사회의 구조를 드러내는 재난"(황정은, 《일기》, 35쪽)이듯이, '안전'과 '무해'는 우리 사회의 인식론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어임에는 틀림없다. 김홍중이 '무해'에서 발견한 낙관론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타자를 향한 윤리적 예민함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만이 위험사회에서 "타자와의 건강한 관계를 맺을 능력을 상실한 '후기 자본주의의 나르시시즘적 주체'"(30쪽)로 전락하지 않는 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위험사회》를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비인간의 얼굴들, 도처에서 ‘우리도 살고 싶다, 죽이지 말라‘고 외치는 이 얼굴들도 이제 외면할 수 없다. 고통의 자리는 역동적으로 분열되어 간다. 거기에는 절대적 경계도 없고, 특권적 위치도 없다. 더 괴로워하는 존재는 언제나 어딘가에 있으며, 반드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무해의 시대는 고통이 회피되는 시대가 아니라, 이제껏 인정되지 못했던 새로운 고통을 기왕의 것들과 연결하는, 강인하고 질긴 망網이 엮어지는 그런 시대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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