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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 황정은 작가의 소설집 『아무도 아닌』의 리뷰를 쓰면서 나는 그의 소설세계를 내 나름대로 분류한 적이 있었다(https://blog.aladin.co.kr/amour91/9018361). 땅에 발을 딛기 시작한 두 번째 경향에 대한 나의 견해는 동일하지만, 『디디의 우산』에서 이 경향은 변화를 맞은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패턴으로 맞물려”(35쪽) 있는 고유한 개인을 하찮게 만들어버리는 세계의 엄혹함 때문일까. 소설에서 세계는 ‘재구성’이라는 체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세계-현실의 압도적인 힘이 소설로 틈입해 온 결과이기도 하고, 무자비하고 적나라한 세계(특히, ‘한국’이라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는 작가의 결단이기도 하다. 그동안 책에서 빠져 있던 작품 해설과 작가의 말이 들어갔다는 점, 두 작품에 담긴 최근 한국 사회의 편린들을 보고 있으면 최근 몇 년 동안의 한국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았던 작가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디디의 우산」과 단편 「웃는 남자」의 뒤를 잇는 「d」는 dd를 잃고 난 뒤 d가 살아가는/버텨가는 모습을 다룬다. 이웅평 대위의 귀순, 세운(世運)상가, 광화문 촛불시위 등 다양한 이야기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환멸’이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환멸과 좌절.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웅평 대위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시나요? 이웅평 대위가 전투기를 몰고 남한으로 넘어온 이유가 환멸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북측에서 해변을 산책하다가 남쪽에서 생산된 라면 봉지를 주웠는데 이런 안내문이 적혀 있었대요. 불량품은 판매처에서 교환이나 환불을 해드립니다. 그것을 읽고 남쪽에 라면을 쌓아놓고 파는 장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기가 속한 체제에 깊은 환멸을 느끼게 된 나머지 귀순을 결심했다고 하네요. 그 내용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가 부러웠습니다. 두 손으로 조종간을 붙들고 목적지를 향해 전투기를 몰아갔을 그 새끼가 너무 부럽다…… 남쪽의 가요를 방송하는 라디오 채널에 주파수를 맞춰두고 음악이 흐르는 전투기에 실려 북측과 남측의 경계를 향해 날아가던 순간, 그 아득한 허공을 날던 순간의 그가 말입니다.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
내게는 그것이 없어.
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 (113-114쪽)
“전쟁은 완전하게 중단된 적이 없는 것 같”(28쪽)은 이 세계는 세운(世運) 그 자체인 인간 개개인이 아니라 상권과 자본만을 되살리려 할 뿐, 인간을 하찮음에 가두고 자신의 부재만을 기다리게 할 따름이다. ‘혁명’이라고 말했던 dd는 “세계의 잡음이 거센 물살처럼 그 뒷모습들을 쓸어버”(45쪽)렸고, d처럼 “애인(愛人)을 잃”(144쪽)고 하찮음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격벽에 가두었다. 탈출의 가능성, ‘바깥’을 상상할 가능성마저 차단해버리는 격벽. 저항하려 하였으나 “저 차벽이 만들어낸 흐름을 충실하게 따라 찌꺼기처럼 여기 도착”(133쪽)하게 만들어버리는 세계. “혁명을 거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혁명”(133쪽)을 구축해버린 세계. '애인'을 잃었기에, 그래서 함께 연대할 사람이 없기에 d는 이러한 세계에서 “권태, 환멸, 한 조각의 정나미도 남지 않은 삶”(138쪽)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한 조각의 불빛 같은 희망을 남기는 것은 마지막을 매듭짓는 진공관의 이미지 때문이다. 이는 소설의 맨 처음, dd와 d가 함께 본 번개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dd와 d를 만나게 했던 번개의 뜨거움과 흐르는 빛과 신호로 채워진 진공관(眞空管)의 뜨거움. 세계는 공간(空間)을 만들어 수많은 ‘목소리’들의 흐름을 막으려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하찮음에 저항하는 고유한 개인들의 뜨거움은 “피부를 뚫고 들어온 가시처럼 집요하게 남아”(145쪽) 환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나아갈 것이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그것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가 제시하는 답이기도 하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 날 수밖에, 여기서 마찰하는 수밖에 없어.”(292쪽)
「d」가 한국 사회의 혁명 직전의 세계를 다룬다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혁명 중과 직후의 세계까지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작품은 1996년부터 이어져 온 세계의 탄압, 특히 소수자를 향한 탄압이 혁명 이후까지 진행형임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책과 신문 기사의 인용이 이어지는 이 작품은 단상처럼 보이기도, 에세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반복되어 호명되는 롤랑 바르트의 문장이 작품의 기저에 흐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말하는 것입니다. (…) 산다는 것은 (…)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들을 받는 것입니다.˝(242쪽,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아니야 언니.
라고 김소리는 말했지.
사람들은 그런 걸 상상할 정도로 남을 열심히 생각하지는 않아.
그것을 알/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263쪽)
그것을 알 필요가 없다.
나는 그 태도를 묵자墨字의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267쪽)
우리는 그것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
묵자의 상태가 상식이라서 그걸 부를 필요도 없어, 그것이 너무 당연해 우리는 그것을 지칭조차 하지 않는다. (274쪽)
이 작품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세계의 태도는 점자(點字)와 반대되는 묵자(墨字)의 세계관, 즉 상식(common sense)의 태도이다. 동성애, 여성 문제와 같은 화제를 대하는 다수의 태도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닌 상식, 즉 감(感)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265쪽)는 것이다. 상투어를 말할 때 드러나는 “말하기, 생각하기, 공감하기의 무능성”(220쪽). 한나 아렌트의 말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상투어가 곧 이 세계가 우리에게 휘두르는 ‘툴’이라는 것일 테다.
그렇지. 툴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툴을 쥐지 못한 인간 역시 툴의 방식으로…… (189-190쪽)
1996년부터 시작된 봉쇄라는 툴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벽으로 형태를 완성시켰고, “물리적으로 고립시키고, 폭력이라는 틀을 씌운다.”(188쪽)는 툴의 원리는 툴을 가지지 못한 시민들에게까지 작용해 강박에 가까운 “평화적 시위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302쪽)을 낳는다. 시민들의 꾸준한 저항과 승리의 역사로 기록될 촛불 혁명에도 묵자라는 이름의 툴은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착한 시민이라는 자부”(302쪽)로, “惡女 OUT”(304쪽)이라는 팻말로 여전히 존재한다. 툴과 권위와 상투가 휘두르는 폭력이 1996년의 모습 그대로 여전히 존재하는데, “우리는 지난 계절 내내 새로운 문장을 써왔고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 문장은 이제 완성되었다”(314쪽)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때라는 건 도래할 수 있는 것인가. 롤랑 바르트의 말을 다시 받자면, 산다는 것이 “우리보다 먼저 존재했던 문장들로부터 삶의 형태를 받는” 것이기에, 이토록 상투적이어서 폭력적인, 지금껏 우리가 이어받아온 삶의 형태와 단절하고 새로운 문장을 끊임없이 써야하는 것이 아닐까. 강지희 평론가의 해설을 빌려 말하면,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혁명의 감격이 날카롭게 단절되는 지점들, 혁명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부스러기 같은 존재들”(328쪽)이 손쉽게 지워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세계와 마찰한 기록이자, 그들까지 끌어안고 새로운 문장을 쓰려는 작가의 노력이다. 상식과 묵자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공격하는 혐오와 폭력을 막아주는 우산과 같이.
서수경과 나는 그 침묵 속에서 함께 침묵하는 동안 평화적 시위를 원하는 사람들의 갈망에서 상처를 보았다. 누군가 다치는 광경을 우리는 너무 보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누구도 다치게 하지 말라, 우리는 이미 너무 겪었다고. (309쪽)
“열세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159쪽)고 쓴 김소영의 이야기는 12장으로 끝난다.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 “누구에게도 소용되지 않아, 더는 말할 필요가 없는”(316-317쪽) 열세번째 이야기는 가능할까. 여전히 혁명은 미완성이기에, 여전히 묵자의 세계가 고유한 개인의 존재를 지우고 있기에, 혐오가 상식의 탈을 쓰고 존재들을 지우고 밀어내고 있기에,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가 아닌 ‘모든 것을 말할 필요가 있는’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지난 격변의 시기를 거쳐 온 우리의 증언이자,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265쪽) 가까운 상식-묵자를 휘둘러왔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고,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세계에 부딪치며 우리가 일으키는 마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d」의 마지막 문장은 세계가 비-존재로 만들어왔던 존재들이 이어갈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처럼 들린다. “무척 뜨거우니, 조심을 하라고.”(1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