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이후 노안이 시작되고 안경이 없이는 더이상 읽기가 불가능해지면서 읽기는 더이상 즐거움만은 아닌 괴로움과 불편을 동반했다. 책을 대신하는 볼거리 읽을 거리는 아이패드와 스마트폰으로 부족함이 없다. 중독이 될 지경이다. 눈을 뜨고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는 존재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걱정과 불안이 들지만 곧 잊혀지고, 반복이다. 편리함과 자극은 언제 어디서나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눈 앞에 펼쳐진다. 신세계다. 어쩌면 이렇게 살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새해가 시작되고부터 절식 끝의 폭식처럼 허겁지겁 읽는 중이다. 여전히 닥치는대로다. 당분간은 그렇다.
68년생 11월 생이라는 김영하는 동갑내기다. 태어난 달도 비슷해서 묘한 전우애도 느낀다.
그의 소설 보다는 팟캐스트에서의 듣기 좋은 목소리로 그를 만났다. 그의 낭송은 고즈넉한 밤의 적요를 깊이있게 만들어줘서 한동안 정말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텔레비젼 속의 박식함과 여유, 보편적 상식,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하는데 뭔가 특별하게 들리는, 설득과 설명에 능숙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동의하곤 했다.
그리고, 여행의 이유라는 소설이 아닌 에세이를 읽었다.
짐작보다 훨씬 더, 그는 여행을 일상처럼 즐기는 정착하여 머물기 보다는 떠나서 방랑하는 유목민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작가라서 저렇게도 사는구나 했다가 아니 태생적으로 저런 사람이구나 납득했다. 일 년, 혹은 몇 개월에 걸쳐 홀로, 때로는 아내와 더불어 살기 위해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여정이 오히려 여행인 사람.
여행의 이유는 어디를 가서 이런 곳을 보고 느꼈다는 류의 글과는 달리 김영하는 작가, 사람에 관한 글이다. 떠나는 이유, 떠날 수 밖에 없는, 태생적인 사람이라는 거다. 도시와 도시, 나라와 나라를 훌쩍 떠나 살다가 돌아와 한 권의 소설, 에세이를 쓰는 작가라는 이름의 사람에 관한 고백에 가깝게 읽혔다. 내게는. 단편적으로 조각으로 알던 한 사람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 납득하게 된 셈이다.
어떤 작가의 글을 읽든 결국은 그 사람의 정체에 의문과 궁금증을 품곤 한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레 이런 글을 쓰는지 알고싶어진다. 그러면서 읽지 못한 다른 글들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인터넷에는 온갖 인터뷰와 강연들이 있다. 재미있는 세상이다.
아쉬움이 있다면 책이 얇다. 그는 기본적으로 수다쟁이는 아니다. 말에서도 글에서도 표현을 아끼고 아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