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오후, 산책을 다녀오다.
먼저 뜨거운 물을 끓여 마신다. 겨울 바람에 언 몸이 녹는다.
차갑게 식은 카레를 데우고, 잘 익은 김장 김치를 썬다.
허기 졌던 몸과 마음이 포만감에 부푼다.
영화, 벌새는 이미 내용을 알고 보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가슴을 후려치는 묵직한 아픔을 느꼈다. 묻어 둔 기억과 영화의 내용이 겹쳐지며 공감 백 배였다. 저 때의 내 모습은 사실 영화보다 더 슬프고 아팠다. 은희는 부모가 있고 중산층의 부유한 가정이지만, 난 부모의 부재와 가난, 그리고 혹독한 사춘기를 지나왔다. 그 시절을 딱 한 단어로 표현하면 어둡고 긴 ‘터널’이었다. 사는 건 다 그래 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을 정말 오랜만에 영화를 통해 바라보는 경험은 특별하고 신비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은희는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난다. 동복이 하복으로 바뀐 햇살 가득한 날, 구김 없이 웃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렇게 모습일 뿐, 그들은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을 터였다. 누군 가는 죽고 누군 가는 살아남았다. 죽음은 죽은 자의 몫이다. 기억은 점점 희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