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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식 ㅣ 메피스토(Mephisto) 2
척 팔라닉 지음, 최필원 옮김 / 책세상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죽어라고 넘어가지 않는 책장의 마지막을 넘긴 후 한동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가 도대체 뭘 읽었는지 등장인물이 누구누구였는지. 유쾌함, 상쾌함, 통쾌함은커녕 제목 그대로 질식해 죽을 것 같은 압박감이 전부다. 혹 살면서 무언가에 중독 되었던 적이 있었다면 달랐을까.
‘나는 중독자들을 존경한다. 모든 사람이 예상치 못한 뜻밖의 재난이나 불시의 질병으로 죽는 이 세상에서, 중독자들은 자신들의 인생의 끝이 어떨 거라는 것을 알기에 위안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최후를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으며, 중독증으로 인해 그들의 사인은 항상 분명하다. 어떻게 보면 중독자가 되는 것은 적극적인 행위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선 듯 삶이 위태로울 때가 있다. 한발자국만 더 가면 고달픈 현실에서 탈출할 것 같은데, 과연 내가 상상하는 게 거기에 있는지 두렵고 다시는 뒤돌아 올 수는 없을까 겁이 난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대개의 사람들은 모두 평범하고 정상이다.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이성적이고 행복하고 무난하다. 설령 그들의 정신세계에서는 처절하게 고군분투하는 영혼이 있을지라도. 평화롭고 태연한 외양 안의 내가 실상은 불안하고 숨이 막히고 가면을 벗어던지는 충동에 시달린다 해도. 한발자국의 유혹은 강하지만 결코 건너지 않을 경계선의 한발자국이다.
빅터 맨시니가 사는 방식은 복잡한 듯하지만 단순 명료하다. 스스로가 섹스 중독자임을 자각하고 시인한다. 정신병원에 있는 엄마를 부양하기 위한 손쉬운 수단으로 질식를 연기하고 동정과 위로금을 당연히 챙긴다. 그것은 자신을 괴롭히는 행위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사기나 범죄는 아니다. 제 자식을 납치 유괴하고 거짓말과 사기를 일삼던 범죄자이며 병자인 엄마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아들이라니, 그래서 그는 중독 되지 않고는 살수가 없었나? 중독에 이르는 극단적인 행위에서 얻는 쾌감에 비루한 현실 따위가 설 자리는 없으니까. 끔찍한 나를 탈출하는 도구로서의 중독은 찰나의 환타지를 선물하므로.
진짜로 빅터가 신의 아들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이야기가 그렇게 쉽게 흘러갈 리가 없다. 무엇보다 아이다는 성처녀가 아니다. 단지 그녀는 빅터를 유모차에서 훔쳐냈을 뿐이다. ‘한심한 인생에서 구제하기 위해서 너를 유괴 했어’라고 고백하는 엄마를, 아이다를 빅터는 푸딩을 먹여 질식 시킨다. 그것은 복수가 아니다. 어쩌면 중독 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