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도중에 몇 번이나 악, 이럴 수가를 외쳤던지. 각 장의 끝은 이야기의 완결처럼 충격을 던지고 작가는 궁금하시면 다음 장을 이라며 파안대소. 대단하다는 명성을 듣고 구입한 책이지만 기대 이상으로, 2007년의 첫발은 <핑거스미스>가 완승.


이제까지 읽은 소설 중에서 등장인물들의 대다수가 악당인 경우는 처음이다. 특히 세 명의 대표적 악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라니. 거기다 매력적이기까지. 핑거스미스(소매치기) 수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일장에서는 백치 같은 모드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다고 믿고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그러나 이장에서 속은 것은 모드가 아니라 수였다는 사실에 기함을 하고. 그런데 삼장에서 그 모드조차도 석스비 부인에게 속았다는 것에 뒤로 넘어갈 정도가 되어. 수와 모드에 대한 연민과 조바심으로 안절부절 하게 만들더니. 그 석스비 부인이 사실은. 결국은.


작가 스스로 찰스 디킨즈의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설정의 많은 부분을 차용했노라 밝혔듯, 빅토리아 시대의 가난과 무지, 차별이 어떻게 사기와 협잡, 모함과 살인을 불사하게 만들었는지를 기막힌 속도와 필력으로 보여주는 <핑거스미스>는 <올리버 트위스트>와 교차하여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그 이상의 대단한 소설이다. 출생의 비밀이 있고, 엄청난 유산이 있다는 건 비슷하지만 그 모든 걸 뛰어넘는 로맨스, 사랑이 있다는 것이 다른 점. 더구나 두 여자, 수와 모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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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1-07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올해 첫 책은 김훈의 <자전거 여행>이군요.

겨울 2007-01-08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는 <강산무진>을. 김훈의 책을 일년에 한 번은 읽는 거 같아요.
 

 

간만에 겨울 냄새 훅 끼치는 날. 창문 너머로 흩날리는 눈을 바라만 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검은색 터틀넥셔츠와 검은색 패딩코트를 걸치고 메말랐던 입술에 핑크색 립글로스와 눈썹 위에는 검은색을 짙게 덧칠한다. 화장이란, 살아있다, 살고 싶다는 소극적이지만 간절한 소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뜬금없이 하면서. 가능한 짧게, 라고 주문을 넣은 머리가 덩그마니 온통 검은색 일색의 옷 무덤 위에 솟아있다. 바라볼수록 맘에 쏙 든다. 짧은 머리가 어울리는 한 머릴 기를 생각은 이제 없다. 점점 짧아져 가벼움의 극치를 이룬 머리를 느낄(?) 때마다 자그만 희열이 솟구친다. 얼마만의 외출인가. 연말부터 지금까지 옴짝달싹도 못했다. 아니, 안했나? 미적지근한 날씨가 그 한몫을 했고, 상황이 어쩔 수 없노라 핑계를 댄다면 그것도 그렇겠지만 결국은 그럴 맘이 전혀 없었다.


오늘이 주말인 것을 잠시 망각하여 은행에 들렀다가 되돌아 나오고, 마트에 가서 귤 한 박스, 두루마리화장지, 세제, 등등 무게가 나갈만한 것들을 골라 배달을 주문했다가 주말에는 불가라는 말에 다 취소시키고, 가방에 넣을 만한 가벼운 것 몇 가지만 골라 계산한 뒤 월요일에 오겠다고 했더니 계산대의 아가씨 친절하게 그러세요, 한다. 떡집에 들러 할머니 좋아하시는 기피인절미를 사고(기피?), 눈을 맞으며 하릴없이 동네를 돌았다. 그러다가 생각난 김에 약국에 들러 활명수를 한 박스 사고, 기분 상으로는 백화점까지 다녀왔으면 했지만 그럴 만큼의 여유가 없는 지라 느릿느릿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옛날에는 건강히 오래오래 사세요, 라는 말 무심코 남발했지만 이제 그런 말 쉽게 뱉어내지 않는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에게 건강히는 더 이상 덕담이 아니다. 대신 지금처럼만 사세요, 라고 말한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지금처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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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01-07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처럼만,,,이라는 말도 얼마나 고마운 말인지요.

비로그인 2007-01-0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몽님!!!!

겨울 2007-01-08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그것조차도 과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정군님. 뜻하시는 바 모두 이루는 멋진 날들이 되기를.
 

 

 

 

 

 

 

 

사 놓은 지 한참이 지나서야 읽게 되는 책에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은 어렵지는 않지만 타의 혹은 자의에 의해 망명, 유랑하다 죽은 자와 죽음에 대한 사색들이 상당히 암울하다. 그래서 저조했던 당시의 상황과 기분으로는 제대로 몰입하여 읽을 수가 없었던 것. 그러다보니 연이어 다른 읽을거리들에 점점 책장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다. 읽다 만 책들이 시간이 흐르면 마치 다 읽은 듯 뻔뻔히 바라보기 마련인데 소설이 아닌 다른 것을 찾는 내게 딱 걸려들어, 이 12월에 온전히 만났다.


그의 여행이 언제는 고독하지 않았냐마는 이번 글에서는 유난히 쓸쓸함이 짙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텅 빈 마음이 느껴진다. 어쩌면 나이 듦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형제애나 가족애, 어떤 사상이나 이념으로도 건드릴 수 없는 수 없는 영혼의 서글픔 같은. 그의 디아스포라적인 감정과 사색은 태생의 우울이 아닐까. 그것이 역동적인 힘이 되어 살아 왔지만 찰나의 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음을 그는 고백한다. 그가 말하는 죽음과 삶과의 거리는 너무 가깝다. 


이렇게 나를 이 세상에 잡아매두는 끈들은 그 어떤 것도 인공적이고 불투명한 것이다. 내가 ‘죽음’을 향해 몸을 내밀었을 때, 그 끈들이 나를 꽉 잡아줄 것인가. 그럴 것 같지 않다. 내 쪽에서 손에 쥐고 있는 끈을 살짝 놓으면 그걸로 그만일 것이다.


국적이나 고향, 가족의 뿌리 안인들 그와 같은 방황이 없을까? 어디서 어떤 삶을 산들 천성이 고독과 죽음을 끌어당기는 사람이 있다. 똑같은 사물을 보고 상황에 처해도 누군 절망을 하고 누군 낙관을 하듯이. 그리고 나는, 세상은 낙관하는 이보다 절망하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위안을 얻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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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2-21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이 책을 읽고 나시면 많은 실항민을 생각하기게 될 것 같습니다. 저도 이 책 읽으면서 고향을 떠나 사시는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여집니다.

잉크냄새 2006-12-2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생적인 외로움과 우울함, 고독을 천형으로 타고난 사람들...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이 생각나네요.

겨울 2006-12-2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년 동안의 고독', 잊고 있었어요. 집에 있는 낡은 책을 처분하기 전엔 다시 읽을 수가 없노라 생각했던 책 중의 하나였는데, 올해가 가기 전엔 반드시!

산타님. 저도 집을 떠나 살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 책을 읽고 있어요. 혼란한 역사 속의 한장을 기록하지 못한 삶일지라도, 인간 대다수의 삶은 디아스포라임을 생각하면서요.
 

 

먼 옛날이야기지만. 나는 삼십 세가 되는 날, 서점으로 달려가 한 권의 책을 샀다. 그리고는 연필을 들고 열심히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어떤 문장을 가슴을 후려치고, 어떤 문장은 모호하거나 어렵고, 지루해지면 몇 장을 건너뛰어 읽기도 했다. 그건 삼십 세가 되는 나를 위한 일종의 의식 같은 거였다. 목적이나 의미는 없는 그냥, 자기 만족감을 위한.


30세에 접어들었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보고 젊다고 부르는 것을 그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그 자신은 일신상 아무런 변화를 찾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불안정해져간다. 스스로를 젊다고 내세우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라고 시작하는 그 유명한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삼십 세>다. 그리고 사실, 그 당시 보다는 지금이 읽기가 수월하다. 물론 30세에 그어 놓은 밑줄을 찾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기저기 많이도 그어 놨다.


실상 훨씬 젊었을 한때에 그는 꽤나 늙은 것처럼 느껴졌었고 머리를 떨구고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사상과 육체가 너무나 그를 심란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한창 젊었을 때 그는 일찍 죽기를 소원했었고, 30세가 되고 싶다고는 조금치도 바란 적이 없었다. (68쪽)


마침내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나는 진정 살아 있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더욱 오래 살고 싶다는 것이다. 하나의 고통, 초로의 밝은 증거인 이 흰 머리. 이것이 도대체 왜 나를 이토록 놀라게 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은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이삼 일 지나 그것이 빠져버리고 새로운 흰 머리가 그렇듯 쉬 나오지 않는다 해도, 나는 이 시식의 맛을 잊지 않으리라. 그래서 구체화되어가는 나의 과정에 대해 다시는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되리라. (69쪽)............. 내 그대에게 말하노니- 일어서서 걸으라. 그대의 뼈는 결코 부러지지 않았으니.(70쪽) 


도대체, 이 글을 읽으며 당시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위안이나 허영을 채워주는 감미료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재미는 있다. 이 책을 사서 정성스레 밑줄을 긋고 읽고 있는 나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리고 책 모퉁이에 베껴 적은 시 한 구절.


철없어 흘리던 피는 달디 달지만

때로는 몇 개의 열매도 맺었지만

철들어 흘리는 피는 왜 이리 쓰디쓸까. (최 승자, 삼십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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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12-19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른은 뭐니뭐니해도 김광석의 노래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군요. 그나저나 최승자님의 시는 항상 살벌하네요.
 
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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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어느 지점에선가 남자와 여자의 대화중에 ‘늦어도 11월에는.......’이라는 서글픈 말줄임표를 붙인 말이 나온다. 여자의 다그치는 질문에 대한 남자의 대답이다. 잔뜩 긴장을 하고 읽어나가다가 만나는 의미심장한 제목은 가슴에서 덜컹하는 소리가 나게 한다. 그때에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드시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징후도 없지만, 갑자기 숨이 딱 멎는 강렬한 느낌만은 생생하다.


책을 읽기 전부터 슬픈, 비극적인 이야기일 거라는 짐작으로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하다가 번잡스런 일들을 다 끝내고 한가로워진 늦은 저녁부터 책장을 펴들었고, 결국은 밤을 새워 다 읽었다. 누구라도 이 책을 읽던 중에 손에서 내려놓기란 힘들 것이다. 누구라도 그녀, 마리온을 비난하거나 미워할 수 없는 것처럼.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며 말은 건넨 남자를 따라 나서는 소설의 시작은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근사하지만, 불행히도 그건 시작이다. 부와 명예와 남편과 아이를 버린 여자의 미래란 아무리 그럴싸한 미사여구로 포장을 해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가 끝이거나 이야기의 마지막이라면 상상을 그만두면 되지만, 잔인하게도 작가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해 버린다. 책을 읽다가 맨 앞의 작가소개로 돌아가 작가의 흑백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본 것도 처음이다. 주름으로 뒤덮인 거친 얼굴이다. 눈썹은 짙고 눈은 깊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지만 마리온이란 여자는 이제까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미묘하고도 독특한 인물이다. 작가의 어떤 상상력을 통해 태어났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사진이 그 의문을 풀어줄리는 없지만.


그리고 우린 어딘가로 날아갔다. 아프지는 않았다. 전혀 아프지 않았다. 고통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376쪽)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의 시작과 절대적으로 어울리는 끝. 이보다 더 멋진 사랑과 죽음은 있을 수 없다. 언제나, 가장 멋진 연애소설의 끝은 어느 한쪽만을 남겨놓는 불완전보다는 함께 죽거나 사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황홀할 정도로, 찰나에 이루어진, 불안한 온갖 요소들을 일시에 거둬가는 마법 같은 그들의 최후에 탄성을 질렀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이 소설을 읽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갑자기 12월이 마구 풍성해진 기분이다. 어떤 선물보다도 가슴 벅찬 소설이다. 권태로운 삶에서, 쏟아지는 졸음에서, 이유모를 배신감과 불안과 공허에서 단숨에 탈출하고 싶다면 누구라도 좋으니 이 책을 집어 들고 밤을 새워 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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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12-19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태로운 삶, 쏟아지는 졸음, 이유모를 배신감고 불안과 공허에서 탈출하고 싶다라니....책의 내용보다는 이 구절에서 마구 구매욕이 일어나네요.

겨울 2006-12-2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십대와 이십대에 읽은 로미오와 줄리엣,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주드 등과 함께 삼십대에 읽은 가장 멋진 연애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