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정군님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노련한 어떤 여행가의 기록보다 진솔하고 따뜻한 글들입니다. 한번 씩은 읽었던 내용임에도 종이에 인쇄된 활자로 읽는 즐거움은 역시 인터넷 상의 글 읽기와 엄청 다르더군요. 아무리 멋진 글도 모니터로 일게 되면 적당히 무성의하게 마련이지요. 정군님 특유의 물 흐르듯 부드러운 문체가 오롯이 담겨 잔잔한 호기심과 즐거움을 선물하네요. 언제나 정군님의 글에서 느꼈던,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는 생각이 역시 들면서, 새로이 둥지를 튼 곳에서의 삶이 의미와 열매로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을 시작으로 더 멋진 곳으로의 여행 계속하시고, 그 여행의 기록 꼭 책으로 엮으심이 어떤가요. 


‘책 읽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는 말을 생활신조로 삼는다고 하셨지요. 그것은 정군님이 만난 수많은 책을 읽는 사람들의 선함을 믿는다는 것이겠지요? 살아보니 세상에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썩 많은 편이 아닙니다. 그래서 간혹 그런 사람을 만나면 일단은 호감을 표시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열에 아홉은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나 책을 보는 안목이나 비슷하다고 봅니다. 저절로 좋은 사람을 찾아서 교류를 하게 되는 거지요. 책 읽는 모든 사람이 선하다는 말에 코웃음 칠 인간도 적지 않겠지만 내가 선택하여 혹은 우연으로 만난 책 읽는 사람들은 모두 다정하고 친절하고 선했습니다. 그러므로 정군님의 신조 절대 버리거나 배반당하지 마세요. 책에 대한 정군님의 열정 꼭 기억하겠습니다.  


PS. 그리고 먼 나라에서 온 다른 한권의 책도 아주 흡족합니다. 올해는 다양한 나라의 다양한 책을 읽자고 마음먹고 있었거든요. 주구장창 일본소설을 읽어댄 작년에 대한 반작용이지 싶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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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1-31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몽님. 정군님 저도 보고 싶습니다. 님의 글을 잘 읽고 갑니다. 아마도 정군님은 잘 계시겠죠. 늘 책에 대한 열정 하나만 가지고 살기에는 부족했던 나를 늘 일깨워주셨던 분인데 그립습니다. 우몽님도 좋은 하루 되시기를 바래요.

잉크냄새 2007-01-3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티아고면 카리브 지역을 여행하신 모양이네요.

겨울 2007-01-31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군님의 책이라서가 아니라, 여행은 쥐뿔도 안 하면서 여행기는 좋아라 하는데요.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의 길' 위에서의 좌충우돌 고난기는 읽는 내내 웃음을 머금게 합니다. 정군님은 고생을 하거나 말거나, 폭신한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리고요.
 

 

제 몫의 밥이나 사료를 먹은 후, 갸릉갸릉 골골 대는 소리를 내며 눈을 지그시 감고 누워서 제 손을(고양이에게 앞발은 영락없는 손이다) 맛있게 빠는 양군을 보며 드는 생각. 너는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 살다가 이곳으로 오게 되었니. 그렇게 홀연 표류하는 배처럼 살던 곳을 떠나 생전 처음 보는 집의 문 앞에서 울었던 이유는 뭘까. 전에는 정말 몰랐는데, 고양이도 존귀한 생물이다. 살아서 배고파 울고, 성내고, 심심하면 놀자고 방방 뛰고 구르는 귀여운, 때로는 장난이 지나쳐 날카로운 송곳니와 손톱으로 상처를 내기도 하지만 그 행위에 적의란 눈곱만치도 없음을 안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홀로 깨어 살금살금 손을 건드리고 옆구리를 툭툭 쳐서 잠을 깨우는 성가신 녀석. 제 밥그릇을 집어 올리면 와, 밥이다 하면서 칭얼칭얼 양양 대면서 종종 거리고, 그런 애교가 통하지 않는다 싶으면 이내 제 자리로 돌아가 드러눕는다. 이럴 땐 녀석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알고 싶다. 녀석의 이런 행동을 기억하는 전 주인이 누구인지, 왜 그 사람은 녀석을 버렸는지(혹은 녀석이 그 사람을), 왜 찾지 않는지, 궁금하다. 물론 들은 바에 의하면, 고양이는 원래부터 그랬다고들 한다. 


과거의 나한테 동물은 관심 밖의 생물이었다. 귀찮고 성가신, 있는 것보다는 없는 게 편한 냄새나고 더러운. 개털, 고양이털이 묻으면 온몸이 가려운 기분이고 그네들의 오줌이나 변을 보면 질색을 했다. 그랬던 내가, 현관 앞이지만 모래 속에서 고양이 변을 골라내고 마루에 흩어진 모래를 쓸고 닦는다. 노란 곰돌이 푸우 방석에 엎드려 있던 녀석이 반쯤 감긴 눈으로 느릿느릿 걸어와 발치에 서는 건 안아달라는 신호라는 것도 알았다. 무릎 위에 올려놓으면 이내 둥글게 몸을 말고 다시 손을 빤다. 그토록 만족스런 얼굴이라니. 

 

 

 > 고양이라서 좋은 이기적인 생각. 애정을 강요하지 않고 주면 받고 안 줘도 그만이라는 태도. 저 혼자 묵묵히 놀며 있는 듯 없는 듯. 밥 때가 되면 아주 맛나게 먹는 거. 기척에 민감하여 한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화장실까지 쫓아와 닫힌 문을 긁어주는 섬세함(아님 호기심?). 독립적, 개인주의적, 자유분방함, 고고하고 도도하게 앉아있는 자세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까지. 대충, 이 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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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7-01-28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고양이 이름을 양군이라 지으셨군요..^^
양군의 행동 묘사해놓으신거 읽으니 넘 보고싶습니다..

겨울 2007-01-2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고양이라는 동물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마냥 신기합니다.
(사실, 고양이는 무섭고 사납고 얄밉다는 편견이 있었어요.)

잉크냄새 2007-01-31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똥오줌이나 털 생각을 하면 절대 못키울듯 싶네요. 마당이 있다면 모를까...

겨울 2007-01-3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그런 생각 하시면 절대 못 키워요. 코를 박고 들여다봐도 냄새를 몰라야 해요. 애견 애묘가들이 '반려'라는 말을 너무도 당연하게 쓰는 것도 전엔 별꼴이다 싶었는데, 이제는 그럴수도 해요.
 
녹색시민 구보 씨의 하루 - 일상용품의 비밀스러운 삶
존 라이언.앨런 테인 더닝 지음, 고문영 옮김 / 그물코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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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엔, 나름대로 대안적 소비에 대한 상식이 있으므로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읽고 배워 실천에 옮기면 되겠지 했다. 물론 그 안일한 생각은 곧 뒤집어졌다. 저자도 말했지만, 이 책은 정말 최대한 쉽게 재밌게 써서 독자를 이해시키려는 흔적이 엿보인다. 학교에 처음 들어가 칠판에 쓴 것을 지휘봉으로 짚어주는 선생님처럼 친절하다. 문제는 내용의 질과 무게가 그들의 노력과 비례하여 결코 만만치가 않다는 것이지만.


요는, 진실로 대안적 소비자로 불리기 위해선 흔히 삶의 질이라 불리는 즐거운 요소들 상당 부분을 포기하라는 권고다. 커피 대신 녹차, 음료수 대신 물, 자동차 대신 자전거, 옷이나 신발은 생활에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세탁도 적당히, 패스트푸드 대신 유기농산물을 이용해 음식을 만드는 것에서 한발 더 나가서 태양을 제외한 어떤 에너지도 사용하지 않는 농작물을 기르자는. 막연히 생각하기엔 이상론 같은 결론이고, 능동적으로 생각하면 소비에 있어 최대한 쓰레기를 줄이라는 거다. 그것조차도 미비하지만 재활용, 분리수거 같은, 지극히 소극적인 실천방법의 하나가지고 잘 한다 큰소리쳐 박수칠 상황 아니라는 거다.


물질의 소비를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는 살아가면서 늘 잊어버리기 쉬운 비물질적인 것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더 나은 어떤 것이 없기 때문에 소비를 즐긴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선 솔직히, 아직도, 소비가 미덕이라는 충동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외로움, 불안, 불만, 이런저런 상처에 대한 회복에는 크건 작건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리는 소비만한 특효약도 없다. 소비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선 정서와 정신의 충만감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당장 산으로 들로 떠날 수도 없잖은가. 당장 먹고 사는 눈앞의 문제만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삶임에야. 과도하고 불필요한 생각 없는 소비가 경제를 살린다고 믿지는 않지만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같은 오늘 혹은 내일의 썩은 동아줄 정도랄까. 그것이 썩었다는 자각이 시작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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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1-26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퇴근하기 전 우몽에 올라온 글을 읽었습니다. 참 저에게는 부끄러운 생각만 듭니다. 집에 있을때에는 자동차를 타지 않고 자전거를 이용하기를 철석같이 약속을 해놓고도 지키지 못하고 자동차를 이용합니다. 또한 가족을 생각해 어머님이 순천에서 직접 채소며, 농사 짓은 쌀이며 여러 가지 보내주시는데 여은이에게 패스트푸드 음식을 가끔 사다가 주는 못된 부모랍니다. 이제는 정말로 환경을 생각해야 될 때가 되었는데 안일하게 생활을 하고 있으니 우몽님의 글을 읽고 깊은 반성을 하고 갑니다. 또한 너무 집약적으로 잘 써 주셔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힘을 받고 갑니다. 여우님의 글이나 우몽님의 글들을 요즘은 기다리면서 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앞으로도 우몽님의 글들이 언제나 올라올지 그날을 기다리며...... (헤헤~~ 빨랑 올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저는 그럼 이만 퇴근하도록 하겠습니다.

파란여우 2007-01-27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리뷰 쓴다면 '세 문단'이 제 화둡니다.
우몽님 리뷰의 압축파일을 흉내낼꺼에요. 대안적 소비, 덜어내는 소비욕심으로부터
지구의 환경보호는 시작되겠지요. 행복한 하루 되세요(이건 산타님 흉내^^)

겨울 2007-01-29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은 절대 불가능이어요.^^
산타님, 자각한 이상은 벌써 한걸음을 떼신 겁니다.의
 

 

살면서 흔치않은 일이 생기면, 난 비교적 빠르게 운명 내지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근래에 현관문을 긁으며 우는 고양이를 집안으로 들인 사건도 그랬다. 마르고 초라하긴 했지만 분명 길에서 사는 고양이는 아니고(겁도 없이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는 도둑고양이는 없으니) 무슨 사연인지 몰라도 집 혹은 길을 잃은 고양이임이 분명했다. 일단은 집에 있는 검은깨 두유를 먹여 놓고 고심 하다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시킨 다음, 계속 배가 고파보여서 사다놓은 빵을 잘게 부셔서 먹였다. 처음엔 뭐든 맛있게 먹는 게 예뻤는데 그렇게 아무거나 주면 안 된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살면서 애완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다. 시골에 살 때에 마당에서 기르던 개나 고양이 말고는. 사실 키우는데 따르는 책임감에 지레 겁을 먹고 시도조차 해 본적이 없다. 남의 개나 고양이를 보면 안아주고 귀여워는 하지만 거기서 끝. 하지만 이제 눈앞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연민을 자아내는 맑고 순진한 눈망울을 가진. 내 발뒤꿈치를 물다시피 따라다니고 손짓, 눈짓 하나에도 반응을 보이는. 저를 위해 놓아준 방석 위에서 저녁 내내 쿨쿨 자다가도 한밤중이 되면 내 요 위로 슬그머니 올라와 옆구리로 파고드는. 이질적이지만 팔딱팔딱 숨을 쉬는 한 생명. 어찌할까.


이 녀석 날래기가 보통이 아니다. 색연필 한 자루를 던져주니 족히 십여 분을 놀고, 그러다 심심하면 모니터 위로 올라가 빼꼼 바라보고 앉았다가, 방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전력질주를 몇 번 하다가(왜 그러는지 궁금했지만 묻는다고 대답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제 꼬랑지를 잡으려고 공중 제비돌기를 시도하는가 하면, 밥솥 위에 올라앉는 건 기본이요, 식탁 위, 싱크대 위, 책상에서 화분으로 도움닫기, 등등 졸거나 잘 때 빼고는 종일 야단법석이다. 어쩜 이렇게 어린 애기들 노는 것과 같을까. 용변 보는 모래를 신발장 근처에 놓아두었지만 녀석이 볼일을 볼 때마다 신경이 쓰여 죽겠다. 나도 모르게 녀석을 끌고 욕실로 가서 씻겨주고 있음. 깔끔 떠는 결벽증은 없지만 이불이며 옷에 묻어나는 털도 아직은 신경 무지 쓰인다. 근데 참을 수 없이 귀여운 짓 하나. 이 녀석은 잠들기 전 제 앞발바닥을 한참동안 쪽쪽 빤다(아주 심하게). 어미젖을 무는 아기처럼. 덩치를 보건데 아기고양이 시절은 한참 전에 졸업했을 텐데. 그렇다면 애정결핍증을 가진 정서적으로 불안한 고양이? 


여기저기 뒤져 고양이 키우는 법을 찾아보았는데 보통 일이 아니던데. 일단 인간의 먹이는 가능한 먹이지 말아야할 것과(당장 전용사료를 샀는데 꽤나 맛있게 먹는다) 늘 깨끗한 물을 공급하고 용변처리만 잘하면 될 듯. 그런데 이렇게 정들여 놓고 슬그머니 다른 집 찾아가면? 그런 경로로 왔으니 그럴 가능성 상당히 농후하지만 그것도 너의 운명이라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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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1-15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를 키우는 님의 마음이 정말 아름다워 보이네요. 저희는 제 옆지기가 알러지가 있어서 고양이를 키우지 못한답니다. 부럽네요.

날개 2007-01-15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고양이인가요?+.+
아아~ 예쁘게 키우시길...^^ (사진이라도 한번 보고싶지만...)

겨울 2007-01-16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산타님. 알러지는 괴로워요. 저도 알러지 비염이 심합니다.

날개님. 처음에 볼 땐 어려보였는데, 다 자란 것 같아요. 벌써 사고뭉치 기질이 다분해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계속 안돼, 안돼 하면서 따라다닙니다.

파란여우 2007-01-1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는 잘해주면 안떠나요. 사고뭉치라는 건 건강하다는 증거에요.
아웅, 사진으로 보고파요.*.*

잉크냄새 2007-01-16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정 결핍증 고양이라는 새로운 학명이 생기겠네요.ㅎㅎ

겨울 2007-01-16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고양이 가만 바라보면 연구대상 감이에요. 영화나 만화 속의 고양이 이미지가 마구 떠오르며 금방이라도 말을 내뱉을 것 같기도 하고요.

여우님. 작은 동물이 이렇게 귀여울 수 있구나, 하고 새삼 놀라고 있어요. 사진은 디카는 커녕 폰카도 없는 관계로. 그냥 이쁘고 영리하고 잘생긴 고양이 상상해 주세요.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만약 내 눈이 먼다면. 어린 시절의 어설픈 장님놀이 말고도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만약 내 눈이 먼다면, 라는 가정은 사실 단 일분도 실행을 지속시킬 수 없다. 방 안에 가만 앉아서 눈을 감는 수준 말고 거리에서의 눈 먼 흉내는 어떤 모험심일지라도 잔인하고 무서운 경험이다. 그래서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한동안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한때 원인을 알 수 없는 시신경의 마비로 하던 일을 전폐하고 절망의 구렁에 빠진 적이 있다. 지금은 꿈같은 일이 되었지만 병원을 전전하고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호전되기를 기다리는 동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 내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어.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읽기도 전에 그 기억들이 되살아나면서 감회랄지, 동병상련이랄지, 최초로 눈이 먼 남자에게 연민과 동정을 느끼며 남이 쓴 나와 관련된 얘기를 훔쳐보는 야릇한 기분이었다.


이 이야기는 실명이 전염병처럼 도시를 덮쳐오자 일어나는 생지옥을 그려낸다. 격리, 감금, 무질서, 폭력, 굶주림, 강간과 살인 기타 등등.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악행이 눈 먼 자들의 세계에서 일어나지만 앞이 보이지 않은 자들에게 덮친 무기력과 더불어 정당화된다. 그리고 그녀, 도시 전체가 눈먼 자들로 가득 차는 와중에도 홀로 외롭게 눈을 뜬 채로 그 아비규환을 지켜보며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을 시작하는 의사의 아내가 있다. 왜 그녀일까, 라는 의문은 그녀가 아니면 누가, 라는 생각으로 잊혀졌다. 그녀의 관대함, 너그러움, 지혜와 용기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함께 지옥에서의 생존을 가능케 한다. 그녀는 눈이 머는 그날까지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눈 먼 자들을 돌보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는다. 신조차 사라진 세계다. 그러나 그녀의 헌신으로 인해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고 믿었던 눈먼 자들의 마음에 희망의 싹이 돋는다. 사팔뜨기 소년과 애꾸눈 노인, 검은색안경을 낀 여자와 최초의 눈이 먼 남자와 그의 아내, 그리고 의사는 의사의 아내로 인해 마음의 구원을 얻는다. 그들의 눈먼 삶의 마지막 며칠은 신성한 종교의식과도 같다. 이 특별한 몇 사람의 구원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들의 실낱같은 희망의 싹이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공포의 백색 빛을 꺼트렸다는 것 말고. 눈이 보여. 눈은 보이지만 그들은 보이는 것이 두려워 눈을 감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멀었던 눈이 보이기 전의 그 백색의 세상과는 달리 진짜 암흑천치가 되었다. 이후의 그들은 어찌될까.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은 책을 다 읽었을 때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내가 저 도시에 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떤 이는 악몽을 꾸었다고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명 전염병은 다른 이름으로 이미 우리 근처에 왔었고 올수도 있다. 이미 익숙해진 이름 사스나, 조류독감이 그것들이다. 몇몇 도시나 마을에서는 눈먼 자들에게 닥친 공포와 절망과 다를 바 없는 지옥의 체험했지만 그들의 정보는 걸러지고 누락된다. 모든 것을 다 보고 다 아는 시대에 산다는 착각 하에 우리는 정말 심각한 재난에 관련한 정보는 보지 못하는 우스운 세상에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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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1-10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짧게 쓴다면 전, 우몽님의 리뷰를 표본으로 삼을겁니다.
종종 훔쳐보고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을 어쩜 세 문단에 다 하실수가 있어요?
이 책을 읽기보다 우몽님의 리뷰 읽는 맛이 더 좋아요

겨울 2007-01-11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보다 길어지면 머리에서 쥐가 나기에. 하지만 칭찬은 기분 좋아요.^^

짱꿀라 2007-01-15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 이렇게들 글을 잘 쓰시는지 저기 위에 보이시는 여우님은 말할 것도 없고, 우몽님 또한 글들을 자주 들어와 보지만 격조 있는 문장이 내 마음의 와 닿습니다. 늘 읽는 재미와 즐거움을 주시는 우몽님, 감사합니다. 자주 읽고 있습니다. 즐거운 한 주 되시기를......

2007-01-15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 2007-01-15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늘 좋은 말씀만 주셔서 감사드려요.
요 며칠 매섭던 알라딘에 기가 질려서인지 산타님의 글이 위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