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라 속으로 들어간다




벌 하나가 웽 날아가자 앙다물었던 밤송이의 몸이

툭 터지고




물살 하나가 스치자 물속 물고기의 몸이 확 휘고




바늘만 한 햇살이 말을 걸자 꽃망울이 파안대소하고




산까치의 뾰족한 입이 닿자 붉은 감이 툭 떨어진다




나는 이 모든 찰라에게 비석을 세워준다




오랜만에 내 맘을 홀리는 시집(가재미)을 샀다. 근데, 가재미가 어떻게 생겼더라.




***엄마가, 도토리묵을 쑤어 오셨는데 함지박 안에서 출렁거린다. 적당히 굳어야 모양 좋게 잘라낼 텐데, 하룻밤을 재워도 출렁거린다. 시외전화를 걸어 왜 이러느냐 하소연을 했더니 엄마의 한숨 섞인 말; 누가 도토리와 밤을 반반으로 섞어 묵을 만들면 맛이 좋다하길 레 덥석 사고를 쳤노라고.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굳지를 않아 썩은 밤새 한잠도 못 잤노라고. 그리하여, 당분간 흐물흐물 출렁거리는 도토리와 밤이 섞인 묵을 열심히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는 묵 맛을 알고 먹었나. 간장 맛으로 겨우 먹었지. 청포묵, 메밀묵은 아는데 밤묵은 처음이다. 그런 묵이 정말 있기는 한 건가. 아님 울 엄마가 순진하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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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는 주위가 어두워져 가는데다 피로가 겹쳐 우울해졌지만, 해가 저물어버리자 오히려 조금씩 힘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주민이 된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낮의 세계는 끝났지만, 밤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언제나 기대에 가득 차 있다. (105쪽)

그들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 태어남과 동시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인 관계. 아무리 외면해도 없던 일로 되돌릴 순 없는. 그 소년과 소녀가 밤의 피크닉을 떠난다. 그리고 길 위에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들이 치뤄내는 성장통이 어찌나 달콤한지.

낮보다는 밤을 좋아한다. 밤의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마법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일반적인 피크닉은 상식적으로 낮에 이루어진다. 일본의 고등학교에 이런 행사가 정말 있는 건가. '밤의 피크닉'은 멋진 발상이다.   

중학교 2학년인 현에게 책을 건넸지만 그 아이가 어떤 방식으로 읽어낼지는 모르겠다. 작고, 약하고, 울보였던 현이는 어느덧 남자의 모양을 갖추고 목소리를 깐다. 요즘은 한창 농구에 열중인데, 성장을 지켜본 입장에서는 길쭉길쭉한 손가락 발가락만 봐도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예쁜 건, 간간히 건네는 책들을 대부분 소화해 낸다는 것. 운동과 공부하는 틈틈히 소설을 읽는 소년의 모습은 아름답다.   

'도서실의 바다'는 묘한 단편들이다. 위의 책 외에는 온다 리쿠를 몰랐기에 더욱 생경하다. '밤의 피크닉'에도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과 엇갈리는 미스테리 요소가 끼어 있다. 그 부분이 중요한 열쇠라서 뜨악스럽기도 했다. 단편들은 하나같이 미스테리와 판타지가 버무려진 영화의 줄거리를 읽는 느낌이다. 이 작가의 책만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몰아서 읽으면 재미있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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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긍정파워 - 행복과 성공을 부르는 긍정의 심리학
미아 퇴르블롬 지음, 윤영삼 옮김 / 북섬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서평단 도서에 이 책이 떴을 때 무조건 손을 든 이유는 제목의 포스 때문이다. 절대적으로다 내게 부족한 ‘자기 긍정 파워’. 제목만으로도 뭔가가 속에서 불끈 하지 않는가. 사실 이런 책은 읽을 기회가 없었다. 문학, 추리, 감상적인 산문 류가 취향인지라. 책읽기에 배어든 일정부분의 허영심은 그 이름이 ‘책’인 이상은 당연한 거라고 본다.

평소 자존감이 낮다는 자각을 해서인지 책은 흥미진진이다. 누군들 보다 나은 삶을 꿈꾸지 않고, 누군들 자신감이나 자존감의 가치를 모르랴. 아는 얘기다. 익히 아는 단순한 얘기지만, 그 가치만큼 실천하거나 얻기 어려운 거니까, 이렇듯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면서 세뇌훈련을 시키는 것이리라.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주변사람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은 지극히 사소한 비방에도 거의 인생이 끝장난 것처럼 울부짖으면서 말이다. (36쪽)

성격형성에서 자존감이 결여된 경우인가. 애초에 자신감이건 자존감이건 어려서부터의 훈련이 중요하단 건 누구나 아는 얘기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자신감)’이나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가치에 대한 인식(자존감)’이나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자신감이 아무리 높아도 자존감이 낮으면 비록 성공한 인생을 살아도 행복하거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게 요지다. 부와 명예를 거머쥔 사람들의 탈선이 그 예다.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라. 살면서 수없이 듣고 읽는 말이다. 자기 학대, 반항, 좌절감, 질투심으로 타인에게 보이는 것 이상으로 스스로에게 가혹한 사람들을 종종 본다. 그러면 충고랍시고, 당신이 가진 것, 누리는 것의 가치도 대단하다고 떠들지만 당사자에겐 소귀에 경 읽기가 대부분이다. 그만큼 말, 충고, 코치는 쉽다.




나는 지금까지 수치스러운 일을 겪어왔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경험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정신적, 육체적 학대로 얼룩진 관계에 대해서도 후회하지 않는다. (51쪽) 정말, 균형 잡힌 높은 자존감을 가지면 저렇게 될까. 가정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학대를 당하는 당사자들에게 자존감이 부족해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의 자존감이 높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지 자존감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지 않나. 저자는 마약 중독자였다고 고백한다. 사랑은 계속 실패하고, 교도소에 가는 등의 결코 평범하지 않는 경험들과 그녀가 리더십코치로서 만난 사람들과의 결과물이 일명 ‘자존감 프로그램’인 이 책이다. 그녀가 설득력 있는 언변가라면 글보다도 말이 호소력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의 내용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 과거를 디딤돌 삼아 현재의 삶을 무조건 긍정하고 즐겨라. 자기애를 극대화 시켜라.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니’라고 물으면 그 대답은  ‘바로, 당신’이라는. 세뇌를 넘어 최면을 걸어라?  




진실과 자신의 생각은 상당히 다를 수 있다. 자신이 너무 솔직해서 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이러한 솔직함은 정직과는 아무 상관없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느끼는 생각을 주변사람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이러한 솔직함이다. 어떤 사람의 스웨터가 마음에 안 든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 생각? 의견일 뿐이다. 굳이 이야기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106쪽)

그러고 보니 생각이나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타인의 험담을 꽤 한 듯싶다. 인성의 결여도 자존감을 높이는 적이라는 말씀이다. 어째 뒤로 갈수록 공자님 말씀 투다. 어떤 사람은 맨 앞장만을 읽고 던져버릴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직접적인 사례를 통해 고개를 주억거릴 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저 제목만으로도 한 권의 가치와 맞먹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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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 다녀오는 길. 몇 걸음 앞에 할머니와 손녀가 걸어가고 있다.




할머니; 오늘은 엄마한테 가서 자.

손 녀 ; 왜?

할머니; 그래야 엄마가 안 나가지.

손 녀 ; 싫어.

할머니; 엄마 붙잡고 나가지 말라고 울기도 하고 그래.

손 녀 ; ............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유치원생이거나 초등학교 1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가엾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 입장에서야 며느리를 잡아놓을 수 있다면 무슨 말인들 못하랴 싶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너무 가혹한 현실이 아닌가. 보아하니 엄마랑 함께 사는 것도 아닌 듯한데. 옛 기억 속에 나도 싸우고 틀어진 부모님 사이에서 왔다갔다 말을 옮기느라 고달팠던 적이 있다. 그때야 시키는 대로 했지만 지금 같아선 확! 가출해 버린다. 어른들의 사정에 아이를 이용하는 건 진짜 잔인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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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글 곳곳에는 장애로 인한 시린 기억들이 묻혀있다. 그것은 그녀의 진솔한 삶과 책읽기에서 배어 나오는 향기처럼 자연스럽다. 문학의 숲을 거니는, 한가로운 산책처럼 친근하지만 심심하기도 해서 이 책에는 일찌감치 재미없음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기대한 것은 아마도 권태로운 일상을 뒤흔드는 치열한 글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모르는, 혹은 알아도 간과한 무엇을 발견하기를 바랐는지도. 그건 사사로운 욕심이다. 읽는 책들 중에서 정말로, 정말로 맘에 쏙 들어 열광하는 건, 열에 하나 있을까 말까다. 다 읽은 책을 차마 놓기 싫어 머리맡에 모셔두거나, 그 책의 여운으로 잠 못 이루는 밤 같은........ 이건 단지 순전히 투정이다. 엄한 책을 붙들고 하는 엄한 투정이다. 왜 감동할 수 없는가. 서글프지만 말라버린 감성 때문이다. 책읽기는 점점 음식과 닮아간다. 편식이다. 어려서도 하지 않던, 스스로 차려 먹는 밥이니 고칠 길은 멀지 않을까. 책읽기에 타이밍이 있다면 이 책은 훨씬 오래 전, 이십 대나 십 대의 뜨겁고 팔팔한 청춘에나 어울리려나. 아니다. 사람마다 기호가 있으니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건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내게는 늦은 감이 있다.




그녀는 장 영희라는 이름 앞에 붙는 장애인이라는 말을 싫어하지만 타인은 그녀와 그녀의 장애를 따로 분리해서 바라볼 수가 없다. 그건 가령 특이한 머리모양이나 눈의 쌍꺼풀처럼 그녀를 결정짓는 인상 같은 거다. 어려운 문제다. 보면서 보지 않는 척,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 하는 것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오지'는 영화에 대한 내 기억과 사뭇 다르다. 꽤나 좋아라 했던 영화..... 다시 봐야지.  

 

   
 

그러나 막상 현지에 도착하니 상황은 말로우가 상상했던 것과 판이했다. 커르츠는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었다. 문명의 계율을 벗어난 '암흑의 오지'에서 그는 온갖 무자비한 수단을 다하여 상아를 긁어모으고, 총으로 제압한 원주민들로부터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 받고, 불복종하는 원주민들을 죽여서 목을 잘라 장대에 꽂아 울타리를 치는 등 악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커르츠는 여전히 자신의 위대한 명분을 웅변으로 떠들며 "야만인들의 씨를 말려라"라고 적혀 있는 문서를 말로우에게 준다. 그러나 커르츠는 콩고 강 귀항선상에서 "정말 끔찍하다. 끔찍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열병으로 죽는다. 문명의 가면을 벗은 인간의 악마성과 19세기 제국주의, 인종차별의 광기를 상징하는 인물 커르츠는 죽음의 순간에서야 자신의 삶에 대한 통렬한 자기 반성에 다다른 것이다.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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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04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장영희 교수님 정말 존경하는 분입니다... ㅠㅠ

로그인은귀찮아 2007-10-06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기도 많고 평도 너무 좋은데 말이죠. 책 속의 책들의 기억이 식상해서 일까요.
그나저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기소침하지 마시길.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어딜 가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법. -몽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