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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다른 아이들 1
앤드류 솔로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평점 :
<21세기 심리학적 권리장전의 초석>이라는 극찬을 받은 이 책은, 저자인 앤드루 솔로몬의 표현에 따르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를 키우는" 부모, 300여 가정을 십여 년에 걸쳐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터뷰 기록만 4만여 페이지에 달한다고. 저자가 탐구한 10가지 범주는 정신적(자폐, 정신분열, 천재성), 육체적(청각장애, 왜소증, 다운증후군) 질병 뿐 아니라 아이의 충격적인 출산(강간)이나 충격적인 행동(범죄)까지도 다룰 정도로 연구 스펙트럼이 방대하다.
10년에 걸친 연구의 결과를 소개한 책이다 보니 분량도 상당했다. 총 두 권으로 이뤄져 있는데 1권은 7개의 장을 통해 청각 장애, 소인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그외의 장애(주로 중도 중복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과 그 부모가 직면하는 문제들을 다뤘다. 두 번째 책에는 신동, 강간, 범죄, 트랜스젠더 등을 소개한다. 단숨에 읽어낼 만한 분량도 아니었고, 다루고 있는 내용의 무게도 상당해 1권을 완독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 책을 읽는데 중요한 키워드는 "정체성"이다. 저자는 수직적 정체성과 수평적 정체성을 예로 든다. 수직적 정체성은 부모세대가 자녀세대에게 물려주는 유전적 특징으로, 민족성(피부색, 자아상, 언어 등)과 종교까지 넓은 범위를 지칭한다. 그러나 가끔 부모와 이질적인 선천/후천적 특징을 갖고 태어나 동류 집단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이러한 특징을 수평적 정체성이라 한다. 수평적 정체성의 대표적인 예로 저자는 '게이'를 들었다. 대부분 게이 아동은 이성애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만(당연히) 성적 취향은 수직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가족이 아닌 다른 문화를 관찰하고 그 문화에 동참함으로서 게이로서 정체성을 습득하며 자존감을 되찾는다는 것이다. (서론에서 저자가 본인의 경험을 진솔하게 털어놓았고, 이는 책을 관통하는 핵심주장을 보다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또 하나의 핵심 키워드는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 "양육"에 대한 행위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모든 부모는 두 가지 행위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첫째는 자녀를 '변화시키는 행위'로 옳은 것(예의)을 가르치며, 도덕적 가치관을 심어주는 등 아이가 사회에서 올바르게 자라날 수 있도록 훈육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자녀를 '지지하는 행위'다. 부모는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사랑하고, 스스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려 노력한다. 이 두 가지 행위는 자녀양육의 매순간 맞닥뜨리는 문제겠지만, 특별한 요구를 지닌 아이들을 양육하는 부모는 더욱 극단적인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녀의 어떤 면을 변화시키고 어떤 면을 축복할 것인지,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적 모델에 의지할 것인지 아니면 자녀의 앞날을 위해 차이의 제거를 약속하는 의학적 모델에 의지할 것인지.
청각 장애아들 중에는 독순술에 능하고 남들이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 발화를 할 수 있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런 능력이 부족하고 따라서 역사나 수학, 철학을 배우는 대신 청력학자나 언어 병리학자와 마주 앉아 연이어 몇 년을 허비한다. (중략)
소리를 뇌에 전달해 주는 인공 와우 이식수술이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청각 장애아의 부모들은 이 기술을 가혹한 장애에 대한 기적의 치료법이라면서 환영했고 청각 장애인 단체는 활기 넘치는 청각 장애인 커뮤니티에 대한 종족 학살이라고 맹비난했다. (중략)
인공 와우 이식수술이 어릴 때, 이상적으로는 유아기에 이루어질 경우 가장 효과적이며 따라서 장애를 가진 당사자가 충분한 정보를 접하거나 의사 표시를 할 수 없는 시점에 대체로 그 부모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된 논의를 지켜보면서 만약 게이를 이성애자로 만들 수 있는 비슷한 초기 치료법이 있었다면 나의 부모도 망설임 없이 치료를 선택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2-23쪽)
평소에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이슈에 대한 질문으로 머릿 속이 혼란스러웠다. 청각 장애 아동에게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유전자 변이로 생겨나는 장애(다운증후군)를 가졌거나 아이를 키울 능력이 부족한(자폐증) 자녀에게 불임수술을 해도 되는 건지, 스스로 움직일 수도 의사표현을 할 수도 없고 인지능력도 떨어지는 중도 중복 장애 아이가 더 자라지 못하게 호르몬제를 주사하고 자궁적출수술을 한, 애슐리 치료법을 무조건 비난 할 수 있는지. (애슐리의 경우는 심지어 부모가 아이를 너무 사랑하기에, 기계로 들어올리고 내리는 것보다 부모의 직접적인 스킨십으로 이동하는 걸 아이가 기뻐하기 때문에, 아이가 사춘기 이후 겪을 생리에 대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결정한 일이었다.) 그리고 만약 나라면, 임신 중에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날 것임을 미리 알고서 출산을 선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아마 리뷰 작성을 마치고도 한참은 이에 대한 생각이 쉽게 정리 되진 않을 것 같다.
한편으로, 미국의 장애에 대한 사회인식과 제도가 우리 나라보다 훨씬 진보적, 선진적이어서 놀라웠다. 청각장애인 커뮤니티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조직되어 있고, 청각 장애를 '청능의 부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청각 장애의 존재'로 보는 인식, 농문화를 하나의 삶과 언어로 보는 사회 분위기가 부럽기까지 했다. 왜소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커뮤니티를 통해 소인의 권리 옹호 활동을 하고, 같은 수평적 정체성 내에서 결혼하기도 하며 오히려 자녀에게 정서적 안정성을 심어주는 모습도 보였다. 또한 장애를 가진 자녀를 돌보는 부모에게 무조건적 헌신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위탁가정, 도우미, 복지시설 제공으로, 양육에 지친 부모에게 그들의 '삶'을 돌려주는 모습에 감탄했다. 컨트롤이 불가한 아이를 시설에 보냈다고 손가락질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도 휴식시간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걸 존중하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한 다수의 부모는 아이에 대한 사랑과 절망을 동시에 경험한다고 한다. 아이에겐 장애가 괴로움일 수 있겠지만 부모인 자신에게는 한층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고백도 있었다. 중도 중복 장애를 가진 첫째 아이와 건강한 두 동생을 키우는 한 부모는 "한 아이가 가진 의존성 덕분에 나머지 두 아이의 자립성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배우자와 이혼하고도, 묵묵히 왜소증을 갖고 있는 딸 키키를 돌봐온 엄마 크리시가 유방암 진단을 받고 나서 한 인터뷰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키키와 오래 지내다 보니 암을 이겨 내는 일은 오히려 쉬웠어요. <암은 내가 처리하고 극복해야 할 또 다른 문제에 불과해. 계속 움직이자>라는 식이었죠. (중략)
키키는 화학요법을 시작하기 전에 크리시가 머리를 삭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이 직접 해주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크리스의 삭발이 끝나자 자신도 삭발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크리시가 만류했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키키가 말했다. "엄마는 내 수술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그 일 때문에 엄마가 암에 걸린 게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면서 오랫동안 지내 왔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아요. 그래서 나도 엄마처럼 머리를 깎아서 엄마 혼자만 다르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어요." (306쪽)
남들과 달라,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를 데리고 집 밖에 나오지도 못하고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부모들이 이 책을 읽고 용기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거리를 활보하는 장애 아동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뿌리는 한국인들이 이 책을 읽고 시선에 변화가 생기길. 관련 연구와 권리옹호단체가 많아져 장애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인식 변화가 이루어지길. 부모와 다른 아이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뒷받침되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