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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내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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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 사춘기 중학생들의 성에 대한 호기심을 재치있게 다룬 '몽정기'란 영화를 본적이 있다. 마리 다리외세크의 <가시내>는 조금 더 솔직한, 소녀 버전의 몽정기를 연상케 한다. 게다가 소설 속 배경이 한국이 아니라 1980년대, 5월 혁명 후 프랑스이다 보니 더욱 파격적이다.


작가의 소개에 따르면 “당시 80년대는 68혁명이 가져온 성 해방과 나중에 대두할 에이즈의 출현 사이에 끼인 무렵이어서 인류 역사상 성적 자유를 가장 크게 만끽한 시기다. 젊은 여자아이들은 어서 빨리 처녀성을 버려야 한다는 조급증에 시달렸다. 그 아이들이 혼란 속에 성에 대해 경험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가능한 한 솔직하게 그리고자 한 작품이 ‘가시내’”라고 한다.


제목부터 과감하다. 원제는 클레브(clèves)라는 극중 가상의 마을인데, 클리토리스와 레브르(lèvre ; 입술, 복수로 쓰일 땐 음순이란 뜻도 있음)의 합성어라며, 작가는 극중 화자인 솔랑주의 입을 빌어 설명한다.
 


책은 3부로 이루어져있다. 1부 '시작하다'에서는 사춘기 소녀가 초경을 시작하면서의 심경변화와 당혹스러움을 그렸고, 2부 '사랑하다'에서는 또래 남자아이들과의 데이트와 첫 경험, 3부 '다시 시작하다'는 성인 남성인 비오츠와의 관계를 다룬다. 이야기 전반에 걸쳐 동급 여학생들끼리 속닥속닥 얕은 성 지식을 공유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읽으면서 어쩜 이리 성에 대해 무지할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들에게는 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가르쳐주는 어른도, 제대로 된 콘텐츠도 없다. (특히 솔랑주가 비오츠와 관계를 갖고 성병에 걸릴 지경에 이르러도 어머니는 무관심했다. 그녀 친구인 로즈 어머니도 눈치챘는데.)


솔랑주는 성기를 뜻하는 정확한 단어도 모른 채 비속어를 사용하고, ‘몸을 활처럼 휘고’, ‘숨을 헐떡거리는’, ‘난폭하게 소유하는’, ‘몸을 꼬며 신음하다’와 같은 주워들은 문장으로 관계를 묘사하며 자신을 성적매력이 넘치는 여성으로 상상한다. 친구들과 비오츠씨 앞에선 성경험이 많은 척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시쳇말로 ‘중2병’ 환자 같아 실소했다.


소설의 첫 장면은 마을 축제에서 만취한 아버지가 꺼낸 성기를 보고 충격을 받은 솔랑주의 기억이었다(그게 솔랑주만의 기억일 수도, 다른 사람들은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는 걸, 독자는 친구 로즈의 말을 통해 뒤늦게 알게 된다). 이와 대비를 이루는 마지막 장면은 실질적으로 아버지를 대신해 그녀를 양육한 비오츠 씨를 배신하고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모습이다. 솔랑주는 그의 사랑(혹은 책임감)을 깨닫고도 그 이상 생각하기를 귀찮아한다.


병문안 가기 꺼려하는 그녀에게 어머니는 ‘꼭 네 아버지 같다’며 혼을 낸다. 누가 뭐래도 아버지가 비행사라 믿고(실은 공항 포터였는데) 자랑스러워하던 그녀는 어쩌면 아버지와 하나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솔랑주의 문제는 부모의 불화와 그녀의 애착 대상인 아버지의 부재가 불러온, 섹스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하는 비정상적 자존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직업이 '정신분석가'라지 않나. 그녀는 솔랑주를 통해 이 사회에, 문학에 질문을 던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문학은 답을 제시한다기 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같은 질문을 계속 던질 수도 있습니다. 다만 세상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질문이라도 맥락은 변하겠죠.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상투적이고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답들에 대한 투쟁을 하는 게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ㅡ 저자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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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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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이라는 다소 특별한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특정 주제에 대해 움베르토 에코가 기고한 담화, 칼럼을 재구성해 소개한다. 각각의 글은 하나의 주제어와 연관된 신화, 역사, 기호학, 철학, 때로는 신학적인 측면으로도 조명된다. 그런가 하면 상상의 나래를 펼쳐 픽션같은 세계를 선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글에서 소개하는 작가의 서술방법을 이해시키기 위해 똑같은 서술방법을 택하기도 해 독자를 미소짓게 만든다.

에코의 방대한 지식은 익히 알고 있으니 논외로 하고, 책을 읽으며 내가 주목한 건 그의 다양한 서술방식이었다.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책에 실린 열네 편의 글 중 인상 깊은 부분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불꽃의 아름다움>

밀라네지아 축제의 주제인 4대원소(불, 공기, 흙, 물)중 하나를 선택해 서술한 이 글에서는, ‘불꽃’과 관련된 신화, 중세 미학, 우주, 성서, 고전문학, 과학, 예술, 설화 등을 순차적으로 소개하며 다양한 각도로 조명한다. 저자도 예상치 못했지만 불꽃이라는 주제에 뜨겁게 매료되었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멋진 도전”이라 밝히기도 했지만, 읽는 이에게도 즐거운 담화였다. 대체 그 지식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에코의 옆자리에 앉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

 

 

2. <오, 빅토르 위고! 과잉의 시학>

빅토르 위고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인데, 에코가 소개한 후로 더 좋아졌다. 밀쳐뒀던 위고의 소설들을 다시 읽고 싶을 정도로. 에코는 위고 문학의 특성으로 “과도하게 기술하는 방식과 신의 관점에서 보려는 불굴의 의지”를 꼽았다. 재밌는 점은 위고의 ‘과잉의 기법’을 소개하는 그자신도 부연설명을 과다하게 늘어놓음으로써 위고의 ‘과잉 문체’를 흉내내는 모습이었다. 글 분량도 조금 과했던 것 같기도 하고..?

 

 

3. <상상 천문학>

천문학의 역사라는 진부한 내용은 다루지 않는다. 에코의 세계에서는 “천문학에 관한 상상의 역사”와 상상의 지리학이 펼쳐진다. 태양은 차갑고, 우주의 행성은 회전하며 음계소리를 내고, 지구는 평평한 원판이고, 지구의 남반구에는 거대한 남방대륙이 있고... 지금 들으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결국 이러한 상상 천문학, 지리학이 집념의 탐험가를 양성했고, 실제 역사를 창출한 위력이 있노라고 에코는 감탄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통찰력에 감탄한다.

 

 

4. <속담 따라 살기>

이어지는 상상의 세계는 속담으로 건설된 행복 공화국 이야기를 다룬 가상의 책을 읽고 남긴 상상 서평이다. 모든 속담은 지혜의 소리라는 이념으로 건국된 공화국, 그러나 이러한 유토피아는 몇 년 가지 못했다. ‘배가 익으면 스스로 떨어진다’고 여겨서 농업에 위기가 닥치고, ‘냄비는 악마가 만든다’는 말에 구리 세공인은 냄비 뚜껑만 만들어 파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갚을 시간과 죽을 시간은 늘 있다’고 했기에 상인들은 외상값 때문에 쫄딱 망한다. ‘일을 급히 서두르면 망친다’는 말에 차량 통행은 금지되고, ‘침묵은 금’이기에 사회생활은 몇 마디 단음절만 교환하게 됐다. 이런 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속담으로 건설된 유토피아가 속담으로 망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재치에 웃는 건 기본이고, 우리나라에는 없는 속담을 접하는 새로움은 덤이다. 

 

 

이 책을 번역한 역자는 능동적인 읽기를 제안했다. 상당 부분 공감하며, 이 책을 읽을 (예비)독자들께 적극 권하고 싶다.

첫째, 저자의 새로운 시도를 즐기라. 에코의 칼럼, 잡지 기고문, 강의 등 제한된 시간과 지면을 할애하여 쓴(게다가 뚜렷한 주제도 없는듯한) 글이니. 둘째, 현장에 있는 나를 상상하며 읽으라. 친절하게도 글 끝에 발표기회(장소)와 날짜가 수록되어 있다. 잡지에 실린 글을 읽을 때는 깐깐한 독자가 된 듯, 강연 발표문을 읽을 때는 청중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하며 읽기를 권한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역자의 추천으로 각 글을 읽기 전에 맨 뒷장을 펼쳐 날짜와 장소를 보고, 독자층을 예상하며 읽었는데, 앞뒤를 오가며 페이지를 넘기려니 불편함이 있었다. 글 앞쪽에 먼저 소개했다면 좀 더 편하게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독자, 주제에 대해 풀어놓는 에코식 접근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스트레스 받지 않을 자신이 있는 독자, 나처럼 에코의 은근한 유머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분명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일독을 권한다.  

 

 

 

 

장 폴 사르트르는 희곡 『닫힌​ 방』에서 가장 비관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현존을 통해서 비로소 우리 자신을 인식할 수 있으며, 여기에 근거하여 공존과 순응의 규율들이 세워진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서 못마땅한 구석을 더 쉽게 발견한다. 그들은 우리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적으로 만들고 지상에다 산 자들의 지옥을 건설한다. 사르트르의 작품에서 3명의 남녀는 죽은 뒤에 출구가 없는 한 방에 갇히게 된다. 이후 그들 중 한 명은 그곳에서 무서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끔찍한 지옥은 그들 서로라는 것, 즉 타인이 곧 지옥이라는 것이다.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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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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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서 1위 타이틀과 700쪽 두께의 압박으로 선뜻 손대지 못했던 책이다. 게다가 천문학이라니. 생물학 전공자로 이공계 생이고, 노력하는 독서가라 자부해왔지만 끝까지 읽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책은 100페이지만 견디면 완독할 수 있다는 지론을 증명해보고자 힘차게 책을 펼쳤다. 걱정은 기우였다. 물론 100페이지마다 새롭게 마음을 다져야 했지만.

   

코스모스는 우주보다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인류 등장 이전의 지구 역사, 인류의 시작, 문명의 발전과 대항해시대, 지구를 넘어선 우주탐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수학과 과학, 천문학을 양념삼아 지구와 인류의 역사를 맛깔나게 풀어낸다. ‘인류사의 위대한 발견과 대면하게 될 때마다 우주에서 인류의 지위는 점점 강등’되어 결국 ‘나’라는 인간이 대우주의 티끌같이 작은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우리의 과학하기는 아직 완벽하지 못하므로 잘못 사용될 수 있다. 과학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도구이다. (660쪽)


지구탐험을 마친 인류는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다툼을 멈추고 발전된 과학기술을 도구삼아 우주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인간의 단차원적인 욕망을 부드럽게 꾸짖고 지구를 넘어서 코스모스를 바라보도록 격려한다.

   

30년 전, 책이 발간될 당시보다 지금은 과학발전이 이루어졌지만, 인간의 욕심은 이전과 다르지 않다. 저자는 과학의 발전에 감사하는 한편, 과학을 이용해 자멸의 길을 자처하는 인류에 경고한다.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되면 대기가 황산안개로 가득 찬 금성처럼, 지구도 변할 수 있다. 로켓을 위한 추진체가 핵탄두가 되고, 탐사선에 전력을 공급하는 방사능에너지가 핵무기로 악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에너지를 죽음과 파괴가 아니라 삶을 위해서 이용해야 한다.’는 외침이 유난히 마음을 울린다.

   

저자가 대학 때 인문학을 전공해서일까, 과학자가 썼다고 하기엔 인문학적 지식과 감성이 돋보인다. 덕분에 과학이 대중에 가까워졌다. 특별히 이집트 문명을 중심으로 인류의 지구탐험 역사를 서술한 부분은 반갑기도 했다. 이집트에 체류할 당시 내가 보고 경험했던 유적들이 떠오르며 칼 세이건과 나란히 현장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했다.

고고학자 샹폴리옹의 창의적인 히에로글리프(역자는 상형문자라 소개) 해독처럼 우주에도 로제타석이 되어줄 단서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모습, 세상의 모든 지식을 탐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유실되지 않았다면 우주의 비밀에 한결 접근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모습, 이교도라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여과학자 히파티아를 소개하며 과거 세대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는 모습에서 인간다운 면을 엿볼 수 있었다.

   

과학서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인문학서, 과학철학서인 코스모스. 읽을 때는 간간이 위기가 혜성처럼 오고, 읽고 나면 감동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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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수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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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모티브가 된 동명의 이야기 <푸른수염>은

대저택에 혼자 사는 푸른수염에게 시집 온 어린 신부가 금지된 방에 몰래 들어가

살해된 전 부인들의 시체를 발견한다는 내용의, 아이들이 읽기엔 너무 수위가 높은 잔혹동화다.

노통브는 이야기를 각색해 현대판 푸른수염을 창조해 냈다.

저렴한 월세에 끌려

파리의 고풍스러운 저택에 입주한 여주인공 사튀르닌.

이전에 입주한 여덟 명의 여자가 모두 실종되었다는 말을 듣고도 쿨한 척,

집의 안락함을 포기하지 못해 위험에 한 발자국씩 다가가는 벨기에 여인으로 나온다.

집주인은 스페인 귀족 출신이지만 세상과 담을 쌓고 저택에 은둔하는 돈 엘리미리오.

그는 결혼은 하지 않고 세입자를 바꿔가며 사랑을 고백하는 집주인이자

저녁 요리와 지난 여자들에게 어울리는 옷을 짓는 걸 즐기고 컬러에 집착하는 괴짜다. ​

이 둘이 매일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사랑(?)에 빠지고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금지된 방의 비밀은 조금씩 풀린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약간씩 일그러진 모습이다.

상처없는 사람은 없고, 악한 마음이 없는 사람도 없다지만 

그가 그리는 인물은 그 비뚤어진 내면을 극대화해 보여 준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도 그렇다.

겉으로는 고상하게 대화를 나누며 즐거워 하지만 자기의 내면은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비밀을 알고 싶어 하면서도 듣고 싶어하지 않고, 위험한 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사튀르닌.

자기만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살인도 가리지 않고, 

죽더라도 컬렉션을 완성하려는 돈 에리미리오. 

​​

노통브 스타일대로 눈에 보일듯 이야기의 흡입력은 강하지만

막상 읽고 나면 저자가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 

대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 곰곰히 되새기게 만드는 책이다. 

​ 

 


사랑에 빠지는 건 우주에서 가장 신비로운 현상이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은 그나마 설명이 크게 어렵지 않은 형식의 기적을 경험한다. 말하자면, 그들이 이전에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은 상대방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시한폭탄처럼 나중에 찾아오는 벼락같은 사랑은 이성에 대한 가장 거대한 도전이다. 돈 엘레미리오는 사튀르닌이 계란 노른자와 금의 결합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자 그녀에게 반하고 만다. 우리는 사튀르닌의 노여움을 이해할 수 있다. 고작 그런 걸로 사랑에 빠져? 사실, 돈 엘레미리오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따지는 건 부질없는 짓이니까.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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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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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한강 다리 위에서 시작된다.
투명인간이 된 사실을 감추려 싸이클 복장으로 위장한 한 남자는
도로 건너편에서 우연히 아는 얼굴을 발견한다.
금방이라도 뛰어내릴듯 강물을 내려다보는 이는, 투명인간 김만수다.
 
소설은 김만수의 탄생부터 현재까지
주변인들이 그에 대해 회상하며 증언하는 형태로 전개된다.
가족, 친구, 선생님, 동료, 상사 등 
그를 인생의 일부로 기억하는 이들의 증언에 따라 독자는 김만수를 들여다 본다.
3남 3녀의 차남으로 온갖 궂은 일을 하며 형제들을 뒷바라지 하는 고단한 그의 인생을.
 
독립운동을 하다 낙인이 찍혀 야반도주를 한 할아버지부터
농사짓고 소팔아 자녀를 대학보낸 아버지
학교폭력에 시달리고 컴퓨터의 노예가 된 아들까지
김만수의 가족사는 한국사이고, 서민의 일반적인 삶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에게서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본다.
 
읽으며 한 가지 특이했던 점은
등장인물들은 각자가 겪은 김만수에 대해 속내를 털어놓지만
정작 주인공인 김만수는 서술자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삶을 관찰하고 유추할 뿐 진짜 속마음은 알 수가 없다.
속을 모르니 미련하도록 헌신적인 그가 이해도 공감도 되지 않아, 화가 나기도 한다.
 
똑똑하진 않지만 착하고 순수한 김만수. 인정이 많은 김만수.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믿음이 그를 삶에 대한 강한 의지로 붙든다. 투명인간이 되기까지.
 

 ̄나는 오래도록 신용불량자였고 그때 은행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경제적으로는 투명인간이었다. 사실 돈 모아서 부자 될 게 아니고 남들한테 자랑할 게 아니면 돈 많이 필요 없다. 투명인간이 되면 어차피 보이지 않는데 사람들에게 옷 자랑, 돈 자랑, 피부 좋다 자랑할 일이 뭐 있는가. 기본적인 생활만 해결되면 끝이다.
                                                           - 싸이클 복장을 한 남자와 김만수의 대화에서
 
저자가 김만수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지 생각하게 된다.
그는 속마음을 드러내는 방법을 몰랐던 게 아닐까? 
그에게는 속내를 읊조리는 것조차 사치였을까?
어쩌면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써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을지 모른다.
진짜 인간됨이 무엇이냐고.



죽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사는 게 훨씬 쉽다. 나는 한번도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게는 아직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지지하고 지켜줘야 한다. 내가 포기하는 건 가족까지 포기하는 것이다.  

고통의 비명으로 가득찬 김만수의 속을 차마 들여다보지 못해서라  
짐짓 결론냈던 난, 크게 한 방 맞았다.

그는 내 아버지였다. 코끝이 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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