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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 - 막심 빌러의 짧은 이야기
막심 빌러 지음, 허수경 옮김 / 학고재 / 2008년 9월
평점 :
신부
서정주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 당기는 거라고 ,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자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여고시절 얼굴은 정말 못생겼지만 노래 하나는 끝내주게 잘했던, 낭독 하나는 멋드러지게 잘했던 노처녀 국어선생님이 낭독해 주신 이후로 좋아하는 시 중 하나가 된 서정주님의 시.
이 책을 읽는내내 이 시가 떠올랐었다. 찰나의 오해로 사랑의 감정은 사라지고, 차라리 깨어져 버렸다면.. 조각이 난다면 어찌 붙여보고 예전 상태로 비슷하게나마 고쳐라도 볼 터인데 산산히 조각나다 못해 가루가 되어버려 어찌해 보지도 못하는 이 스산함...
막심 빌러의 짧은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그랬다. 먼지가 되어 날아가 버릴까봐 알면서도 억지로 붙들고 있는 관계, 이미 먼지가 되어 날아가버린 관계, 먼지가 되어 날아가 버렸다가 다시 돌아온 관계, 그러나 먼지가 되어 날아가면서 많은 가루들이 흩날려 사라져 버려 결코 그 예전으로 똑같이 돌아갈 수 없는 관계를 다룬 27편의 짧은 사랑 이야기들.. 도시에 떠도는 먼지가루마냥 매캐하고 애매한 사랑 이야기들, 혹은 사랑이라 믿었던 순간들의 이야기들..
결코 낭만적이고 행복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복잡하지만 섬세한 도시의 모습 그대로 도시인들의 사랑 이야기, 혹은 사랑이라 믿었던 그 순간의 이야기들이 참으로 섬세하고 매혹적이다.
먼지가 되어버린 사랑 이야기가 매혹적이라니.. 막심 빌러라는 이 이야기꾼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졌던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