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 -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
수잔 앨리스 왓킨스 외 지음, 안찬수 외 옮김 / 삼인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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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3학년때였고, 따라서 그 해는 내가 68혁명(혹은 위기?ㅋ)을 처음 접한 해이기도 한 셈이다. 포디즘이 어느정도 안정적인 틀을 갖추어 제1세계 노동자들은 전반적인 경제적 풍요로움에 젖어 그 혁신성을 잃게 되었던 서구의 60년대,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탈권위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학생들이 감행한 근본주의적인 비판과 행동은 당시의 나에게는 굉장히 낭만적으로 보여졌고, 일종의 동경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사실 1968년은 인류사에서 굉장히 신기한(?)해인 것만은 사실이다. 인류가 전지구적 차원에서의 '지배'를 기획하고 그 기획을 어느정도 실현한 것은 인류 역사에서 종종 보여지는 사실이지만, 1968년만큼은 전지구적 차원의 '저항'의 기획이 세계에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미친, 어찌보면 지금까지도 유일무이한 해로 기록될만 할 수 있을 것 같다.(물론 여기서의 '전지구적'이라는 말은 지극히 서양중심적인 담론임을 부인하진 않겠다.)

하지만 1968년의 저항은 분명히 정치적으로 '실패'한 흐름이었다. 레이몽 아롱의 말마따나 이들의 혁명적 기운은 드골의 연설한번으로 완전히 잠재워졌고(덕분에 프랑스 우익은 이어진 총선에서 기록적인 압승을 거둔다) 독일 SDS는 고작 수배 해제를 조건으로 학교로 돌아왔다.(그리고 남아있는 이들은 '적군파'로 남아 테러행위를 일삼게 된다) 체코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소련의 탱크가 프라하에 진주함과 동시에 없던일이 되어버렸고, 미국은 부도덕한 보수주의자인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무정부주의적 좌파 몇몇은 국가에 대한 불신을 가교삼아 신자유주의자로 변신하여 그들의 국가에서 그들이 예전에는 그렇게도 비난해 마지않던 레이건같은 존재가 되었고,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사회라는 모토에서 사회는 사라지고 그저 이기적인 개인만 남아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 혁명은 다른 여느 혁명과 마찬가지로 실패한만큼 이뤄내고 만 것은 사실이다. 실패한 혁명은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혁명의 기억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모두들 자연스레 그러한 흐름으로 따라가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은 그 실패가 처절할 수록 더욱 공고한 기반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그런 점에서 난 진정한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라고 믿는다) 68년 이후 분명 인류는 이전에는 보지못했던 억압과 부당한 권위를 비판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목소리가 없었던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갖게 되었으며, 인간의 관계는 한층 민주적이고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모든것들은 어느덧, 우리도 모르는 사이 '상식'이 되어있다.

저자인 타리크 알리와 수잔 왓킨스는 이러한 68혁명을 시간순으로 배열하여 그 해에 일어난 일들을 나열하듯 서술하고 있다. 물론 과거의 역사가 오늘 그대로 재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그때만큼의 희망조차 보이지않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상상력에 무언가 자극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그 결과는 글쎄, 모르겠다.

그 해의 '사실'들만을 서술한다고 했지만, 사실을 선택하고 서술함에 있어서 저자가 개입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때문에 저자들의 '사실'에 대한 나름의 '중립적인' 선택과 서술은, 그들이 설령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을 살고있는 독자에게는 분명 죄다 매혹적이고 낭만적으로 보이기만 할 것이다.(대표적으로 내가 그랬다) 하지만 사실, 68년의 대학에는 하버마스가 '좌파 파시즘'이라고 지적한 요소가 분명히 존재했었고, 진지한 기획없이 '저질러진'부분도 적지 않았음이 사실이었다만 책에는 그러한 현상들에 대한 서술은 하나도 없다. 때문에 책은 일견 과거를 통해 현재를 고찰하고 반성하여 새로운 변혁운동을 추동하기보다는 외려 혁명을 스타일리쉬하게 '소비'하는데 도움이 되는 도구처럼 보여지기도 한다.(또한 돌이켜보건데, 실제 68은 우리 사회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기보다는 '소비'되어 온 것이 사실인듯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1968년의 흐름에 언제나 벗어나 있었고,(당시 우리에게 베트남전 참전은 이슈꺼리도 되지 못했다. 심지어 야당 당수들도 베트남 파병에 대해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 시대를 역사적 경험으로 '느껴보지'못한 우리에게는 어찌되었건 소중한 책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면 이 책을 읽고 이 책만으로 그치지 말고 68과 관련된 다른 진지한 이론서를 읽었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바람은 나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바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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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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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말마따나 아렌트는 20세기에 반(反)했기에, 21세기를 선취한 사상가일런지도 모르겠다만, 그녀의 책이 원채 난해하기로 이름난지라 그간 회피해 왔었는데, 본서의 경우 분량도 얄팍(?)한데다가 초입의 '옮긴이의 말'에서 아렌트의 책 중에서는 비교적 쉽다는 언급이 있어 구입하게 되었다. 난이도에 대해서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쉽다는 것보다는 '비교적'이란 말에 강조점을 찍어야 할 듯 싶다. 아렌트의 저서들 중 본서가 '비교적' 쉬운건지 어쩐건지는 그녀의 다른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 터라 무어라 말하긴 어렵지만, 확실한건 여타 사회과학 서적들과 비교해 볼때 결코 쉬운 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리뷰를 자신있게 올리기는 다소 부담스러운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일단 정리된만큼만 올리고 본다. 책이 쓰여진 해는 1970년으로, 당시는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이어진 정세가 평화로 귀결되기 보다는 냉전을 통한 군비의 확장으로 인해 '전쟁이 외교의 연장'이던 과거는 전복되고 외려 '평화가 다른수단을 통한 전쟁의 연속'이 된 시기였다. 이러한 파국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과 이래서는 안된다는 문제의식이 당시 대학생들을 자극시켰고, 이는 '폭력적'학생운동으로 이어졌으며, 파농이나 사르트르의 '폭력의 필요성을 역설하는'(?)주장 또한 위력을 발하고 있을 때였다. 문제는 그들이 '폭력'의 성격을 전혀 모른다는 점, 아울러 그 '폭력'을 사상적으로 규명할 생각도 하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그들의 '기획'이 그 취지상의 올바름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다는 측면을 지적한 후, 그녀는 폭력의 반대는 비폭력이 아님을, 외려 폭력의 반대는 권력임을 논증해 낸다.

'폭력의 반대는 권력'이라는 테제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상식과 다소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지금까지의 많은 사상가들은 폭력을 권력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말한다.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권력이 아니라고. 권력이 없는 곳, 권력이 균열을 일으키는 바로 그 곳에서 폭력은 발생한다고. 아렌트가 말하는 권력은 '다수의 동의'에 기반한다. 반면 폭력은 순전히 '도구'에 의존한다. 때문에 미국은 베트남에서 그렇게 압도적인 '폭력'을 행사하였음에도 '권력'은 베트콩에게 손쉽게 넘어갔다. 이러한 폭력과 권력의 개념은 "권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사람에 반하는 다수이며,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모든 사람에 반하는 한사람이다."라는 아렌트의 언급에서 권력과 폭력이 서로 대립되는 개념임을 우리는 좀더 쉽게 알 수 있다.

권력은 그 시초로부터의 '정당성'을 획득해야 하지만, 폭력은 미래의 어떠한 목적을 통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즉, 폭력은 단순한 수단이기에 다른 '목적'이 요구된다. 하지만 권력은 그 자체가 애초의 목적이다. 권력은 권력 자체만으로도 정당화된다. 이러한 정의는 매우 중요하게 보여지는데, 이는 권력을 파괴할 목적을 지닌 폭력이라는 수단이 성공을 거두어 폭력에 의해 권력을 획득했다면, 권력을 획득한것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보여지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사실, 애초 폭력으로만 맞붙는다면 국가를 이길만한 조직체는 없다.) 즉, 권력과 폭력은 애초 다른 개념이기에, 폭력을 통한 권력 획득은 이미 사라진 권력을 재창조하거나 이미 넘어온 권력을 접수하는 과정일 뿐인 것이 된다.(즉 권력은 폭력의 정당화가 예정된 그 현장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20세기가, 그리고 그 부산물(?)이라 할만한 21세기가 전쟁과 쿠데타로 점철된 폭력의 세기가 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권력이 권력답지 못하기에, 권력이 권력이 되는 과정인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했기에, 아울러 권력이 한곳(그것이 자본이건, 관료건)으로 집중되었기에, 역설적이게도 권력이 부재하는 수많은 틈이 생겼고, 그 틈에서 폭력이 횡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독 20세기가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정치적 자유를 총체적으로 억압하고 권력이 독점되는 '관료제', 올바른 합의의 장이 붕괴되고 사적이익만이 횡행하는 시민사회 때문이다. 아렌트는 이야기한다. "권력의 독점화는 나라 안의 진정한 권력 원천들을 고갈시켜서 없어지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즉, 우리가 지금 보는 야만적인 폭력은 '권력'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권력이 존재하지 않기에, 대중의 소통을 통한 합의가 이루어지는 공적영역이 붕괴되었기에, 그러한 공적영역을 지속적으로 붕괴시키는 사회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폭력을 단순히 비폭력 담론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때문에 폭력만큼이나 폭력적이다. 한편 권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는 맹목적인 폭력이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합의에 기반한 능력있는 권력, 다원화되고 분산된 민주화된 권력, 바로 그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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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
페리 앤더슨 지음, 류현 옮김 / 이매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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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한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서구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정도 될 것 같다. 책은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라는 제목과는 달리 그닥 맑스주의 사상가들의 사상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전개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몇몇 맑스주의자들-그람시, 아도르노, 마르쿠제, 사르트르 그리고 알튀세르 등등등-이 만들어낸 몇가지 독창적인 '개념'을 하나의 장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책은 개개의 사상을 설명하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전후 서유럽 맑스주의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이유는 저자도 밝혔듯 자명하다. 즉, 이론가들과 학파사이에 다양한 견해 차이와 적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건 서구 맑스주의의 통일성을 규명할 수 있는 구조적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 유산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정리하자면 서구 맑스주의는 따지고보면 유럽좌파의 '패배의 산물'이었다. 1차대전 이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실패, 러시아 혁명의 고립화, 이후 스탈린 치하 소련의 관료주의화에서 서구 맑스주의는 이론과 실천이 완전히 분리된 채 발전되었고 이론의 영역 또한 정작 고전적 맑스주의가 주력해왔던 분과였던 경제학과 정치학은 외면되고(그람시정도가 여기에서 예외가 된다) 맑스 본인조차 그닥 많이 다루지 않았던 철학분야로 그 중심이 이동한다. 아울러 서구 맑스주의자들은 이전의 그들의 선배세대와는 달리 노동자들의 삶과는 유리되어-이는 당시 유럽 좌파정당의 행태에도 상당부분 책임이 있다-과거와는 달리 알아먹지 못할 이야기들로 도배(?)를 하고, 이론적 탐구는 상부구조, 그 중에서도 맨 꼭대기라 할만한 미학적 영역에 집중하였으며, 과거의 국제주의적 전통은 외면한 채 협소한 강단에서만 맑스를 언급하게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맑스주의의 '타락'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사변적인 방식으로의 궤도이탈은 유럽의 상황과 맞물려 시종일관 염세주의적 색체를 드러냈고, 이는 따지고보면 애초 서구에서의 맑스주의가 '패배의 산물'로서 발전된 것이기에 어찌보면 당연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처럼 애초의 고전적 맑스주의로부터 상당한만큼 궤도이탈을 해버린 서구의 맑스주의가 일종의 보편적 맑스주의로 세계 각국에 수용되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처럼 그 대상적, 지정학적 범위면에서 '협소'했던 서구 맑스주의가 '국제주의'적으로 언급되는 현상을 비롯하여 60년대 서구의 5월 '봉기'의 영향으로 이론과 실천의 괴리가-만족스럽진 않지만-다소 좁혀졌다는 점,(여기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시종일관 이론과 실천의 간극을 좁히기위해 노력했던 트로츠키가 비로소 '발견'된다.) 정치이론이나 경제학에 관심을 갖는 젊은 맑스주의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서구맑스주의가 비로소 청산-즉,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것은 취하여 조금더 나은 맑스주의로 발전한다는 의미에서-되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라며 조심스럽게 낙관적인 견해를 밝힌다.(여담이다만, 책이 쓰여진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자가 여전히 낙관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을지는 조금 의문스럽다ㅋ)

아울러 저자는 서구 맑스주의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 이후, 책이 다소 오독될 수 있겠다는 노파심 때문인지 '후기'를 덧붙히고 있다. 서구 맑스주의에는 수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때문에 저자는 본서를 통해, 이론과 실천의 간극을 줄여야 하며, 혁명이론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뒷받침이 될 때라야 비로소 올바른 것이 될 수 있다고, 그리고 이는 개혁주의에 빠지지 않은 '혁명적인'대중이 존재할 때, 그와의 연합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언급이 이론과 실천 속에서 또다른 한쪽 편향 즉, '활동가적'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음을 저자는 바라고 있다. 즉, 이론과 실천간에는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저자는, 서구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전통적인 맑스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며, 서구맑스주의만큼이나 고전적 맑스주의 또한 끊임없이 재평가가 요구된다는 전제하에 대표적으로 맑스와 레닌, 트로츠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아무튼 책은 일반적으로 잘 다뤄지지는 않아왔던 서구 맑스주의의 사상사적 측면을 깔끔하면서도 나름 깊이있게 정리하고 있으며, 맑스주의가 해명해야 할-즉, 서구맑스주의에서건 고전적 맑스주의에서건 해명되지 못한-사안들을 자세하게 나열하고 있다. 맑스주의와 관련하여 아무런 지식이 없으신 분이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기도 하겠거니와, 놓치는 부분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이 들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리 어려운 책은 아닌 듯 싶다. 맑스주의와 관련하여 어느정도 개론적 이해를 가지고 계신 분은 한번쯤 읽어보시면 앞으로의 학습(?)에 괜찮은 방향타가 될 듯 싶고, 그게 아니더라도 맑스주의와 관련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개괄적으로 검토할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을 듯 싶다. 30여년 전에 쓰여진 책이지만, 놀랍게도 오늘, 우리의 시대에 정합성(?)을 갖고 있는 듯 싶은데, 따지고보면 맑스주의가 양차 세계대전 후 '서구'맑스주의로 귀결되는 과정과 80년대 이후 맑스주의가 '우리'의 맑스주의로 귀결되는 과정이 묘하게 흡사한 면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ps.얼마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 본서의 저자인 페리앤더슨과 '상상의 공동체'로 유명한 베네딕트 앤더슨은 형제지간이라고. 뜬금없게도 참 엄한(?) 집안이라는 생각이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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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 2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사회평론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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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의 '스타 인문학자'라고 하며, 본업은 문학평론가이지만 인문학의 '대가'라 불리우는 학자의 저서라면 늘상 그러하듯, 책은 자신의 분야를 넘어서는 광범위한 부문에 대한 코멘트가 이루어지고 있다. 칸트의 미학과 철학을 통해 21세기 새로운 윤리학의 지평을 열고자 한 본서는, 저자 말마따나 '칸트의 윤리학'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며, 아울러 칸트를 내세워 말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본서에서 언급되는 칸트에 대한 수많은 인용과 설명에도 불구하고 칸트에 대해 다소 알고 있을 필요는 없다.(물론 모르는거보다야 아는게 낫긴 하겠지만) 저자는 칸트를 '빌어다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고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일본인 답게) 전쟁책임이라는 문제를 고민하다가 책임은 무엇이며 윤리란 무엇인지라는 생각을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러한 생각의 도중에 칸트에 관심을 갖게 되어 본서를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한다면 이 세상에 진정 자발적인 인간의 행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원인을 따져들다보면 정신분석학적, 사회학적, 시공간적 요인 등으로 인해 개인의 자발적인 의도로 이루어진 행동은 사라지며, 따라서 책임도 사라진다. 그렇다면 '자유'란(그리고 그로인해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되는 '책임'이란) 진정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저자는 그러한 자유는 실천적인 차원에서만 존재한다는 칸트의 주장을 언급한다. 즉, 자유란 '자유로워지라'는 의무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자유'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에 따른 '책임'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에 기반하여 저자는 우선 도덕과 윤리라는 말을 구별한다. 저자가 말하는 도덕이란 공동체적 규범이라는 의미로, 윤리라는 말은 '자유'라는 의무에 관련된 용어로 이해된다.(물론 이것은 저자의 자의적인 개념설정이다)

그리고 저자는 우선 칸트의 미학적 관심에 주목하여 윤리와 도덕의 문제를 논한다. 우리는 잔인한 장면을 그린 고전 영화를 보며 아름답다거나 쾌감을 느낀다. 이는 그 영화를 보는 동안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잔인함에 대한 분노나 공포를 '괄호에 넣었기'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는 단순히 예술의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닌것이 이를테면 의사들은 어찌보면 징그러운 수술도 가볍게 해내고는 저녁으로 편안히 삼겹살을 구워먹곤 하며, (바람직한) 판사들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그 친구에 대해 공정한 판결을 내릴 줄 안다. 이는 같은 대상을 판단함에 있어 다른 부문을 '괄호에 넣어'판단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여기에는 굉장히 많은 훈련이 필요함은 자명한데, 저자는 윤리와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러한 훈련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즉, 모든 원인을 탐구하여 무엇이 진짜 원인임을 밝히는 것과 별개로, 그러한 원인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하여 책임의 영역이 논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적 기준 앞에서 모든 것을 동일시하여 결국 '오십보 백보'로 모든 실천적 영역까지 상대화하여 책임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원인에 대한 철저한 탐구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상대론적 결과와는 별개로, 그러한 연구들을 토대로 한 '책임'영역의 검토가 엄중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저자는 "인간을 수단으로 뿐만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여기서 저자는 칸트가 "수단으로가 '아니라'"가 아닌, "수단으로 '뿐만아니라'"라고 말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즉, 칸트는 같은 대상을 바라봄에 있어 다른 영역에 다른 시각이 필요함을 전제로 했다는 것이다.)는 말에 기반하여, 공리주의적 윤리관이나, 하버마스나 아렌트 식의 '내부적 합의'에만 주목하는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 사실 하버마스나 아렌트의 합의론에는 외부인에 대한 배려는 없다. 결국 사회 안에 존재하는 자들간의 합의만이 중시되어 어찌보면 '자유로워지라는 의무'의 결정적인 판단기준이라 할 수 있는 집단의 외부인-여기에는 죽은자나 다음세대도 포함된다(이 점이 본 저서의 또 하나의 '탁월함'이라는 생각이 든다)-이 배제되는 결과가 도출되어 책임문제는 사라지고 말게 된다. 아울러 공리주의는 자유, 즉 자기원인적인 것이 아닌 외생적인 요소(그러니까, 주변과의 비교를 통한 이익?)에 의지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간을 피폐시키며 수많은 문제-이를테면 환경이나 생명-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저자의 지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더 절실하고 유의미하게 다가왔다.

물론 저자는 윤리적인 판단과 실천을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님을 인정하고 있다. 사실 윤리적인 실천을 하는 일은 공동체의 도덕에 상충하는 경우가 많으며, 때문에 윤리적 실천은 종종 그러한 실천을 한 사람 본인을 불행에 빠뜨리곤 한다.(심지어-그 어려움때문에-칸트는 '윤리적으로만큼은' 종교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저자는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한 '윤리적 개입'이 더더욱 절실히 요구됨을 역설하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윤리적 개입은 맑스의 사상에도 알게모르게 이어져, 그는 단순히 결정론적으로 사회주의를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자연상태 그대로라면 빠지게 될 수 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야만을 제거하기 위해 '윤리적 개입'의 요청으로서 사회주의를 이야기했다고 주장한다.(저자는 이러한 주장의 결정판(?)으로 얼마 전 '트랜스크리틱'이라는 두툼한 책을 출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참고로 이 책 또한 여기저기서 호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사실, 본서는 이러한 짧은 서평으로는 차마 그 내용의 일부조차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광범위한 의미를 담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도 한두번 더 읽어봐야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20세기의 '야만'이 채 제거되지 못한채 21세기를 겪어 나가고 있는 오늘(지금도 중동에서는 '20세기의 여파'로 인한 또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저자가 말한 윤리적 요청이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되기에, 본서는 더더욱 읽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가끔씩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다소 두서없이 엮어져 간다는 느낌도 들고 다소 산만하게 읽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읽다보면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있음이 느껴질 것이다. 어렵지 않은 책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수많은 모티브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그 어떤 책보다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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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 현대사상신서 2
윤평중 / 교보문고(단행본)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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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사회에 '근대', '근대성'이라는 말처럼 남발되는 말도 없지만, 그 담론들이-남발되는 만큼-충분한 이해에 기반하여 언급되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글쎄, 부정적인 답변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본서는 지금까지 내가 읽어 본 '근대'에 관한 저술 중 그야말로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저자인 윤평중 교수는'서구적 합리성의 문제와 관계된 사회비판의 전략을 메타이론적으로 천착'해 보고자 본서를 집필했다고 하는데, 그 집필의도는 내용과 명확히 부합한 것으로 보이며, 개인적으로는 난이도로 보나 내용의 적정성 측면으로 보나 이런 분야의 책 중에서 이 책보다 나은 책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저자는 우선 베버와 호르크하이머, 그리고 아도르노의 근대성에 대한 분석을 소개하며 서양 근대성에 대한 초기의 논의를 설명하고 있다.  이들의 근대에 대한 이해는 날카로웠지만 너무 일면적이었기 때문에 근대성이 무엇을 구체적으로 침식하는지 알지 못했고,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대책없는 비관론과 주의주의로 수렴되게 되었는데, 하버마스는 여기에 '생활세계'라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세계를 상정하여 선배 학자들의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근대성에 대해 보다 포괄적이고 균형잡힌 논의를 해내게 된다. 책은 하버마스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하기 전에 하버마스의 이론 전체를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카를 포퍼의 신실증주의(물론 포퍼 본인은 이를 '비판적 합리주의'라 명명했다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실증주의의 조금 더 발전적인 변형에 불과해 보이기는 한다)와 하버마스의 논쟁, 포퍼와 쿤의 논쟁, 뿐만아니라 해석학적 통찰을 재구성하고자 한 하버마스와 가다머 사이의 유명한 논쟁을 소개 한 후 합리성의 개념을 확립하고 그 토대 위에 사회 합리화를 위한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 하버마스의 사상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를 한다.

서양 근대성에 있어 도구적 합리성과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상호보완적 측면에 천착하여 앞으로의 사회 비판을 후자의 영역을 광역화 시키는 작업으로 파악한 하버마스와는 달리 푸코는 이러한 합리성의 범형을 몇 개의 주요 형태로 나누는 작업을 '쓸데없는 짓'으로 파악한다. 외려 푸코는 하버마스의 이러한 보편주의적 접근 방법의 뒷전에 자리잡은 숨은 의도에 강력한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푸코의 계보학은 하버마스의 비판이론과는 달리 서구의 합리성 자체를 의심하고, 어떠한 규범적 토대 위에 비판적 담론이 근거해야 한다는 하버마스 식의 사고 자체가 비판적 담론의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서양사람들의 경험과 인식 체계에서 이성과 비이성의 구별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면밀히 추적함으로써 서양의 근,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성과 합리성의 이념을 해체하려 하는데 저자는 푸코의 이러한 작업을 '해체주의'로 명명한다. 이러한 흐름은 라캉, 데리다, 리오타르에 의해 조금더 극단적으로(?) 계승되는데, 푸코를 위시한 해체주의의 합리성에 대한 급진적 시각과 그에 기반한 작업은 하버마스의 작업과 언틋 화해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동떨어져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저자는 하버마스와 해체주의 양자의 차이와 단점 속에서 공통으로 합의할 수 있는 지평을 탐색하여, 이를 훌륭히 상호보완적으로 소화해내어 결론을 제시하고 있다. 푸코의 급진적인 계보학적 분석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의 불안한 인식론적 토대를 하버마스의 사상을 통해 좀 더 명확히 정초하는 형식으로 말이다.(푸코도 말년에 조악(?)하게나마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해체주의는 하버마스를 의심했고, 하버마스는 해체주의를 '그저 도피하려는 것일 뿐'이라 치부해버렸지만, 저자는 이러한 서로간의 오해를 불식시켜 사상적 화해를 추동하여 조금 더 실천적이면서도, 조금 더 풍부한 사상적 기반을 지닌 근대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책을 읽던 내내 '노작'이라는 단어가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윤평중 교수의 정말이지 '노작'이라고 할만한 본서를 읽으며, 개인적으로는 '근대'나 '탈근대'에 대한 나의 이해가 너무 일면적이었고, 단순하지 않았나라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보면 결국 서양 철학자들의 논의이기에, 책의 내용이 우리 사회의 현실과 다소 거리가 있다라고 느낄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저자 말마따나 60년대 이후 산업화=근대화=서양적 합리화라는 단순 도식이 우리를 지배, 억압해 온 것이 사실이고 보면, 근대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다른 누구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제목은 '푸코'와 '하버마스'만을 강조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책은 사실상 오늘날 서양 철학의 '모든'문제를 다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근대'에 대한 관심이 있다면 놓쳐서는 안될 명저라는 생각이 든다. 일독을 권한다.

ps.책 말미에는 부록으로 다섯개의 논문이 엮여져 있는데, 특별히 언급할만한 것은 세번째 논문일 것이다.(첫번째 두번째 논문은 결국 본문에 다 있는 내용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푸코보다는 아무래도 하버마스 쪽에 치우친 듯한 결론(사실 푸코에 치우칠 경우 결론을 낸다는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면도 없지않기에 저자의 결론이 어쩔수없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을 내는데,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느라 본문에서는 다소 미진한 구석이 없지 않았던 하버마스 사상의 한계에 대해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버마스의 담화이론의 근본적인 난점을 해소하기 위해 유물론적 담화이론과의 결합을 도모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본문과는 달리 다소 어려웠다. 네번째 다섯번째 논문은 하버마스와 푸코의 논문을 번역한 것인데, 개인적으로 하버마스 논문은 살짝 어려웠지만 푸코꺼는 읽을 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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