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룬과 이야기 바다
살만 루시디 지음, 김석희 옮김 / 달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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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저 인생은 둥글게 살고 볼일이라는 신조를 가진 나로써는 까칠한(?) 지식인들에게 묘한 컴플렉스(?)혹은 경외심 같은것을 가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저자인 살만 루시디 또한 예외는 아니라 할 만 한데, 가끔씩은 루시디가 우리로 치면 이문열(?)과 비슷한 유형의 컴플렉스를 겪고 있는 지식인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고 해서, 개인적으로는 그간 그닥 가까이 하고픈 작가는 아니었다.(구체적으로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되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의 아랍권 비판은 지당하면서도 종종 뭔가 핀트가 안맞는 경우가 가끔씩 보인다는 개인적인 '느낌'때문일 것 같긴 하다)

그럼에도 동생이 모 북클럽 가입 선물(?)로 본서를 구입한 터라 나도 겸사겸사 우연찮게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뭐 사실 이거 딸랑 한권 읽고 그를 접해보았다고 말 할수 있는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여튼 그가 이란의 호메이니로부터 파트와(이슬람의 종교적 판결이라고 한다)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고 망명과 '은둔생활'(그가 각국의 '근본주의자'들의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단순한 '망명'정도(?)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을 하던 도중 쓰게 된 첫번째 작품인 본서는 애초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류의 소설이 늘상(?) 그렇듯 책은 단순히 아이를 위한 동화라기보다는 어른을 위한 동화로 읽힌다.

이런 계열(?)의 소설은 처음이었던지라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재미있게 봤고, 읽는 내내 아주 오래전에 봤던 영화 '네버엔딩스토리'를 보는 듯 뭔가 환상적이고 꿈결같은(?)느낌이 들었다. 아울러 주인공 '하룬'의 말마따나 아버지의 그 '사실도 아닌 이야기'가 알고보니 사실이었던, 때문에 주인공이 '수다'족과 '잠잠'족 사이에서 수많은 모험을 겪게되는 본 내용은 몇년 전 나름 인상깊게 봤던 영화 '빅 피쉬'가 생각나기도 했고. 흥미로웠던 것은, 읽던 도중-이런 류의 이야기가 흔히 그렇게 결말을 내듯-주인공이 꿈을 깨는 것으로^^ 결말이 나지 않을까 예상을 해보았으나, '너무도 당연하게' 실제 벌어진 일로 서술된다.(그런 면에서 저자는 자신의 말을 뒤집지 않았다. 사실, 아닌게 아니라, 이것이 모두 '꿈'으로 결말이 났으면, 이야기 속에 나왔던 그 수많은 '뼈있는' 정치적 우화들은 살짝 빛이 바랠 뻔 했다.)

하지만 작가가 처한 극한적 상황의 산물이랄 법한 본 작품은, 작가 본인의 그 극한적 상태 만큼이나 설정자체도 극한으로 밀고들어간 면이 없지 않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다소 실망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물론 그건 저자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필연적인 결과였고,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이해는 한다.) 번역자 말마따나 언론의 자유와 창작의 자유에 관한 정치적 우화로도 읽히는(아닌게 아니라, 굉장히 '노골적'이다ㅋ) 본서는 시종일관 아군과 적군, 선과 악을 극단으로 분할한다. 침묵은 나쁘고, 수다는 건전하다는 식의 극단적 이분법은(물론 수다족의 왕자 허랑과 바락공주, 잠잠족의 무드라라는 예외적인 인물도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또한 부차적일 따름이다.) 솔직히 아쉬움이 남았다. 잠잠족 하나하나에게도 침묵의 악덕만큼 미덕이 존재하고 있으며, 수다족 하나하나에게도 대화의 미덕만큼 악덕이 존재함을 드러내 주었다면, 그래서 그들의 전쟁과 화해 속에서 양자간의 일종의 변증법적 결합(?)을 이루어내는 식의 결론이 아쉬웠다는 것은 동화에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이었을까?

저자의 재치있고 명랑한 표현만큼이나, 엉성한 직역투의 번역으로 자칫 '동화'로서의 본분이 잊혀질 뻔한 본 작품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재미있고 생동감있게 읽혀 질 수 있게 된 데에는 역시나 성실하고 적절하고 재치있는 번역을 해준 번역자의 공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간 별 생각없이 읽을 수 있으면서도 마음속에 무언가 하나 건질 것이 있을 법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본 작품은 '재밌다.' 때문에 일독을 권함~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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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자의 임금실태와 임금정책 - 민주노총 임금정책방향
김유선 지음 / 후마니타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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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후마니타스' 출판사 행사기간이었던 관계로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하종강씨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을 산 덕분에 '공짜로 얻은 책'되겠다.^^;;; 사실 책의 분량에 비해 가격이 만만치 않은 편인데, 가격만큼이나 자료 하나만큼은 정말이지 알차다.

책은 노동자 비중이 증가하고 있지만 노동자들의 임금 몫은 줄어들고 있다는 점, OECD국가 중 가장 불평등한 임금소득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는 정규직의 임금인상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정작 정규직의 임금인상이 '경제성장율+물가상승률'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사회적 안전망 구축 이전에 임금정책 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시작으로 1부에서는 임금실태, 2부에서는 임금정책, 구체적으로는 정규직 노조가 임금투쟁에 임함에 있어서 어떠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임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부록으로 '노사정의 임금수준 정책 검토'와 '비정규직 고용에 대한 여섯가지 신화'가 있는데 이는 대부분 앞의 본문의 내용을 다시 편집,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리의 사회담론 속에서 노동문제, 그리고 그에 따르는 임금문제 등은 실증적 자료보다는 대부분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의지하고 있다. 그 이데올로기적 오바질(?)은 종종 국제적으로도 웃지못할 상황을 낳곤 하는데 이를테면 IMF마저도 종종 우리나라에선 꽤나 '진보적'인 권유를 하게 만들고 외국계 기업 CEO가 우리나라 노조를 옹호하는 언급을 하게 만들 정도다. 생각없는 기자님들의 기사를 보면 자료는 하나 없이 근거없는 전제 속에서 가혹한 주장만 되풀이할 뿐이고, 자본가들의 언어는 아무래도 우리가 서있는 현실과는 꽤나 동떨어져 보인다.(물론 자본가 자신에게는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일것이다.) 이런 수많은 뜬금없는 주장과 전제를 책은 수많은 실증적인 자료와 그래프, 표 등을 이용해 뒤집는다.

사실 곰곰히 따져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할만큼 해도 노동시장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있는것도 맞고, '귀족노조'라고는 하지만 조합원들의 실생활을 보면 차라리 강남사는 불가촉천민(?)이 되고싶은 맘이 굴뚝같아진다. 비정규직 취업이 정규직으로가는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이라는 헤어나오지 못할 함정에 빠지는 길임을 우리 또한 이미 느끼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처럼 우리가 느끼고는 있지만 콕 찝어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던 것들-임금상승률이 생산성만 못하다는 것이나, 최저임금제가 적지 않은 경우 유명무실하다는 사실, 성별 학력별 임금격차는 확대되고 이는 연령이 많아질수록 심해진다는 사실, 근속효과보다는 경력이 임금차이에 더 큰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사실 등-을 수많은 실증적 자료들이 제시하며 비로소 우리 '눈앞에' 드러내고 있고, 이러한 작업은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에 푹 빠져있는 우리의 현실을 돌아볼 때 정말이지 소중해 보인다.

무엇보다 책이 돋보이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정부나 기업의 책임으로 돌리고 해결하라는 목소리로 결론을 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자본과 정부가 지난 몇년간 해 온 행태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목소리가 얼마나 공허한 주장인지는 누구나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이러한 문제 해결에 있어 정규직이 나서야 함을 촉구하고 있다.(물론 정규직 때문에 비정규직이 양산된다는 식의 지극히 계급적인-노동자가 가져갈 몫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봐야 정해져 있다는 사고에 근거해 있기에-19세기 '임금기금설'적 견지에서의 주장은 아니다. 사실 정규직 근로자의 임금 또한 경제성장율+물가상승률에 미치지 못함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정규직의 임금문제가 발등의 불임은 인정하더라도 비정규직의 차별 확산을 막지 못하면 노동계급의 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상황이 올 수 있으며, 나아가 올바른 민주주의와 사회통합 및 경제성장이 저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정규직의 임금투쟁은 '임금인상을 통한 생활조건의 유지, 개선'을 넘어서, '노동소득 분배구조 개선과 임금격차 해소'라는 보다 분명한 목표의식적 지향점을 가지고 추진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뿐만아니라 저자의 대안은 사회보장기금 설치나 숙련노동자와 단순노동자간의 임금구조 차별화 등 단순한 추상적 담론 뿐 아닌 구체적 대안제시로 이어져서 꽤나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책의 내용에 대해 좀더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하고, 그 대안들이 하나의 상식으로 여겨졌으면 한다는 소망에 비하자면 책의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물론 인터넷 서점을 뒤져보다보면 '1+1'로 '거저주는'(?)행사가 아직도 있을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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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우리시대의 논리 2
하종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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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니타스의 '우리시대의 논리'시리즈 중 두번째 책이다. 저자인 하종강씨는 한울노동문제 연구소 소장으로 계시면서 한해에 300회 이상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노동교육'을 하고 계신 분이며, 그처럼 바쁘시기에 사실 책을 낸다는게 불가능해 보였으나 후마니타스 출판사 측에서 하종강씨가 이런저런 매체에 지금까지 기고해 온 글들을 모아 편집해 책으로 낸 것이다. 보통 이런식의 글모음이 두서없고 나온 이야기가 또 나오곤 해서 쉽게 지루해지고는 하는데 이 책은 이상하리만치 끝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읽을 수 있다. 이 부분은 하종강씨의 공도 있겠지만 출판사측에 대해서도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는.

책은 정말이지 '우리시대의 논리'라는 시리즈 제목에 걸맞게 우리 사회가 흔히들 범하고 있는 노동문제의 '오류'에 대해 적절하고도 정확한 지적을 해내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이라면 버젓이 들어와 있는 노동3권을 마치 국익에 해가 되는 양, 국가를 전복시키기라도 하는 양 병적으로 오바를 떠는 언론과 권력, 그리고 자본에게 일침을 놓는 하종강씨의 '논리'들은 그 어이없는 자본 나름의 '논리적'공세를 쉽고 간단하게 일축해낸다. 정말이지 개인적으로도 불가사의했던 현상-하향평준화 운운하는 기업들이 정작 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를 통해 실질적인 '대량'의 하향평준화를 도모한다는 것, 기업은 이윤을 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노조와 노동자는 무슨 자선사업가라도 되야 하는 양 희생을 강요한다는 것, 쟁의에 대한 책임을 경영 제대로 못한 경영자에게서는 전혀 찾을 생각을 안한다는 것 등등등-과 그 현상에 일조하는 사람들의 어이없는 주장들을 지적해내는 하종강씨의 글을 보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고, 뿐만아니라 거대 노조의 이런저런 비리나 이기주의로 인해 정말이지 '노동계급에 안녕을 고해야할'듯 해 보이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다수의 헌신적이고 모범적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며 진정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책에 나오는 논리가 다소 치우친듯 해보이는 논리일지도 모르겠고, 실제 가끔씩 그런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파업 얘기만 나오면 금전적인 문제로 자살하는 사람까지 귀족으로 모는 사회, 노조를 무슨 자선사업 단체로 아는지 노조의 자기 권리 주장 얘기만 나오면 국가에 반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회, 오랜기간 중요하고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오로지 '노동자'란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에게 주어지는 저임금이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사회, 집값 올려보겠다고 부녀회만들어 담합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집단 이기주의를 성토하는 사회에서 어떤것이 진정 '균형잡힌'의견일까? 때문에 하종강씨의 논리야말로 진정 우리시대의 논리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며, 그런의미에서 책의 출간이 늦었다는 감마저 들었다. 노동문제에 관심이 있는분께도 그렇지만, 관심없는 분에게는 더더욱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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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황보영조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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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에 나와있는 소개에 따른다면 본서는 스페인 근대 철학의 3대 명저 중 하나라고 하며, 옮긴이가 인용한 잡지의 언급을 빌린다면 '20세기를 대변하는 책'이라고 한다. 다소 과장된 감이 없잖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간에 20세기가(그리고 이어지는 21세기도) 대중의 시대였다는 점에서 본서의 통찰이 무의미하다고 할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본서가 다소 보수적인, 아울러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을 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이랄만한 출판사인 '역사비평사'에서 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책 표지의 소개 또한 진보진영에 속하는 임지현 교수가 썼다는 것인데, 실제로도 본서는, 그만큼 보수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진보적 관점에서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는 듯 싶다.

책이 쓰여진 시기는 1930년으로, 당시는 저자의 말에 따르자면 과학기술의 발달과 자유민주주의라는 훌륭한 제도(저자 또한 이 두가지가 인류사에 둘도없는 업적임을 인정하고 있다)로 인해 인류는 수적으로 급격하게 늘었을 뿐더러, 그 인간 한명한명의 가능성의 영역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과거에는 단순히 소수자가 이끌어가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수동적으로 이끌려가던 대중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모든 부문을 잠식하고 지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즉, 교양있는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시기는 갔다는 이야기다.(물론 흔히 오해되듯 이 소수자는 특정 계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계급에서도 이러한 소수자는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 왔다고 그는 언급한다)

문제는 바로 이 시대와 그 지배자인 대중의 성격이다. 인류는 이제 과거 그 어느 시기에 비해서도 우월함을 느끼며, 때문에 과거는 모두 숨쉬기 곤란한 답답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한것은 이처럼 자신만만한 인류가 한편으로 그 넓어진 가능성 때문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과거와의 단절로 인해 외로워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의 시대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이전 시대에는 시대가 불만족 스러울 경우 과거로의 회귀를 외치거나, 전통적 가치의 복원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에 사람들은 과거도 부정적이지만 미래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의 지배자인 대중은 현재의 완벽함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고, 어떻게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는지 무관심해진다. 교양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며, 역사에 대한, 세상에 대한, 순수과학에 대한 고마움도 잊는다. 어디 그 뿐인가, 대중의 집단적 우월감은 근거없는 자신감만 북돋워 자만심을 부추기고, 교조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일삼게 하며, 남의 충고는 무시하게 만든다. 반면 대중은 자신의 존재 속에 내재된 불안감으로 인해 여기저기 휩쓸리게 되고 자신의 자주적인 규범을 갖지 못한 이들은 국가에 의지하려고만 든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유도 내팽게치고 암울한 야만의 세계에 스스로 빠져든다. '전문가'의 양산은 이러한 '대중시대'의 명암을 확실히 보여주는 좋은 예인데, 이러한 전문가들은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우월감을 갖게 되지만, 사실 그 분야를 제외하고는 과거보다 더욱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그 이전의 교양인 보다 아는 것이 더 없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한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저자는 책을 통해 망해가는(?)유럽문명에 대한 푸념을 그치질 않는다. 그렇다면 저자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바로 새로운 도덕규범의 정립이다. 분명 19세기에 인류가 이뤄낸 진보는 눈부시며,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미친 짓이란 것은 저자도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시대의 지배자인 대중은 자신의 도덕을 알지 못한다. 즉, 대중의 사회는 무도덕의 사회이고 질서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철부지같은 대중은 똥오줌도 못가리면서(?), 아무런 대안조차 없으면서,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자는 기존 질서, 즉 유럽의 지배가 해체된다는 것은 그저 무규범의 사회로 가는 것이고, 이러한 대중시대를 불러온 그 진보마저 파괴하는 야만으로 가는 첩경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장한다. 유럽을 하나의 국가(?)로 묶자는 것이다. 기존의 편협한,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여 소국의 경계를 운운하려 하지 말고 통합적인 공동체를 이루자는 것이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기획으로부터 '시대의 충만함'을 되찾고 새로운 미지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면, 한때는 진보적 함의를 담는 그릇이었지만, 지금은 기존의 넓어진 가능성을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국민국가는 발전적인 방향으로 해체될 것이고, 이는 무도덕의 대중 사회를 벗어날 탈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본서는 그 화려한 찬사와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부장주의, 인종주의, 서구중심주의에 푹 빠져 있다는 것은 그 시대 서구인들 대다수의 한계였으니 좀 많이 봐준다고 하더라도, 그가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대중의 능력을 너무 우습게 알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저자의 예측대로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 서구에서는 '대중의 반란'에 기반한 파시즘이 맹위를 떨쳤고 동구에서는 스탈린주의가-그의 걱정대로-어느정도 경제적인 성공을 거둠으로 인해 또다른 '대중의 반란'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며, 때문에 그로 인해 어떠한 야만적 결과가 일어났는지는 우리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대중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배웠으며(참고로 그는 본서에서 '경험'을 굉장히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 더욱 훌륭한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다. 즉, 대중은 우매하고 과격한 행동을 해 온 만큼이나 현명하고 정의로운 행동을 해온것도 사실이라는 거다. 아울러 소유권에 기반한 민주주의는 그의 예상만큼 평등을 보편적으로 이루어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외려 다른 측면에서의 문제가 더 심각한 상태인 것도 사실이기에 그의 예측이 오늘날 완전히 정합성을 지닌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결국 다른 것에 기대지 않는 '자신의 도덕'을 가져야 한다는 것. 대중에 기대고, 국가에 기대며, 시류에 기대어 '대중'에 편입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오늘의 민주주의사회(그리고 대중사회)는 그 진정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는 측면에서 본서는 그 함의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통합적 공동체(물론 여기선 유럽에 국한된 이야기지만)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 담긴 '2부:누가 세상을 지배하는가'는 이 책의 백미이며, 좌파진영에서도 이 책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로 보인다. 여기서 펼쳐진 저자의 역사관과 국가관은 수많은 상상을 가능하게 만들며, 기존의 편협한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변증법적 대안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대부분의 사안에서 다소 보수적으로 기운 결론을 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분석은 다른 여러가지 대안을 가능하게 하며, 그 대안의 수많은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아울러 그의 대중 전반에 대한 분석 또한 절반 혹은 그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이 책은 아직도 읽혀질만한 가치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본서를 '고전'이라 부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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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심리
귀스타프 르 봉 지음, 이상돈 옮김 / 간디서원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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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당 출신의 독일 전 총리 헬무트 슈미트는 젊은 시절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과 본서를 읽고 매료되었다고 한다. 특히나 본서에 대해서는 특별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본서가 히틀러와 나치가 유발한 대중의 심리를 분석한 선구적인 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라고. 다른 한편, 본서는 정작 저자인 르봉이 살던 시기에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숱한 비난을 받았다고 하는데, 저자의 주장이 민주주의에 반하는 귀족주의적 시각에 기반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당대에도 그렇거니와 오늘날까지도 좌-우 양쪽으로부터 찬양과 비난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그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책이기에 본서는 오늘날에도 고전으로 남아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책이 쓰여진 시기는 1895년이다. 당시는 프랑스 혁명의 기반이 되었던 계몽과 이성의 기획이 그 수많은 정치적 부침과 혼란 속에 회의되고 재검토되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이러한 혼란은 저자의 시각 속에서도 녹아있는 듯 보인다. 사실 본서를 읽고 르봉을 어떤 '주의자'로 해석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그는 책속에서 오로지 현상 혹은 사실만을 이야기 할 뿐 결코 당위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언한다. 새로운 시대는 군중의 시대일 것이라고. 좋건 싫건 우리는 그 시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저자가 이야기하는 군중은 그저 수많은 인파가 모인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조직은 아니다. 심리적으로 어떠한 근본적인 원인이 작동할 경우에야 군중은 군중으로서 등장하는데 이는 숫자의 다소를 묻지 않는다. 군중은 그저 맹종하기만을 원하며(심지어 '무신론'까지도 신의 위치에 놓고 맹종한다), 단순한 암시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며, 감정에 휩쓸려 극단적이면서도 언제나 유동적이기에 믿을 수 없으며, 집단 논리에 의해 '멍청하게도'자신의 이익에 반해 뜻하지 않게 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존재이다. 즉, 이성은 없이 행동만 빠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그 구성원의 도덕성이나 전문성이 얼마나 탁월한지 여부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이런건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본다) 모든것은 군중과 연관되면 극단화되고 단순화되며, 심지어 훌륭한 사상도 군중의 윤리가 되는 순간 타락한다.(수많은 종교에서 이미 목격한바 있다.) 더군다나 작금의 시대는 '군중의 시대'. 아무리 고고한 사상가도, 철학자도, 사상도 이 틀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난 자의 현실은 그저 고달플 따름이다. 물론 그가 죽고난 한참 후 그 사상을 군중들이 수용함으로써 뒤늦게 알려질 수는 있겠지만.

군중이 종종 통계상의 합리적인 자료보다 이미지의 힘에 이끌린다던가, 언어에 의해 좌우된다던가, 실제의 영웅보다 전설의 영웅을 선호한다던가 하는 그의 지적은 정말 소름끼치게 적나라했으며, 군중의 리더는 합리적인 사람보다는 반미치광이 광신도가 더 적합하며 리더는 군중을 설득하려들지 말고 홀려야 한다는 그의 리더관(觀)은 그 솔직함(?)에 섬?했으며, 시험위주 교육을 비판하고 군중의 여론과 신조를 논하는 부분은 정말이지 흥미로웠다. 군중의 모든 행동을 이성적으로 해명하려 했던 당대의 주류적 흐름을 뒤집고 군중의 감정적 특성을 집어낸 저자의 주장은 오늘날의 독자가 읽어도 정말 탁월한 것만은 사실이다.(이런 점에서 본서를 읽는 내내 마키아벨리가 계속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현상을 이야기 할 뿐 당위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찌되었건 군중의 시대는 도래하였고, 종국에는 군중만이 남을 것이며 때문에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군중'이라는 퇴폐적 존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대안을 내놓기는 하지만, 결국 뒤죽박죽 되고만다.(그 어떤 인간도, 사상도 '군중'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그의 주장에 기반한다면 이는 매우 당연한 현상일런지도 모르겠다) '대중이 범할 오류라면 전문가도 범할 수 있는 오류'라며 배심원제를 받아들이거나 의회제를 실컷 욕하고 어쨌건 탁월한 제도라 이야기하는 그를 보면, 혼란 상황 속에서 새로운 윤리를 찾지못한 당대 지식인의 고뇌가 느껴진다. 어쨌건, 때문에, 이 책을 '어떻게 이용할 것이냐'는 오늘의 독자에게 완전히 일임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의 독자는 본서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우선 본서의 한계를 염두에 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르봉은 당시까지 군중을 '이성적 인간'으로만 판단하던 당대 주류적 시각의 안티테제로서 인간의 감정적 측면을 부각시켰고, 이는 본서의 가능성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즉, 이성적 인간과 감정적 인간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해 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와 인종주의적 시각은 모든 군중을 이성적으로 보는 것 만큼이나 그의 논의를-그 탁월함에도 불구하고-관념적으로 만든것도 사실이다. 아울러, 의회주의에 대한 무관심을 민주주의의 병폐로 해석, 결국 의회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일시해버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준다거나 스펜서류(類)의 '사회 다윈주의'에 푸욱 빠져있는 것은 시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듯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르봉의 날카로운 지적과 그가 보여준 '절반의 진실'속에 어떠한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먼저 새로운 '신조'의 확립이다. 즉 일종의 '종교아닌 종교'의 확립이다. 군중의 감정이 애초 무엇인가를 믿고 따르기를 원한다는 그의 주장은 틀린것 같으면서도 맞다. 따지고보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질서에 따라 투표하고 결과를 따르는 것은 그러한 신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조는 확립되기도 어렵지만, 그만큼 한번 만들어진 신조를 붕괴시키기도 어렵다. 이러한 신조를 조금 더 합리적인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이성'의 힘을 빌린다면 어떨까? '군중'속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도록 하는 올바른 교육, 군중이 되기 전에 자유로운 개인이 되기 위한 주체적인 노력, 그리고 그들이 모여 군중을 이루었을 경우, 그 군중의 악덕이라 할만한 지나친 유동성을 안정화하고 개개인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게 만들 수 있는 '민주화된 민주주의'의 정립, 이러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군중의 시대는, 르봉의 묘사만큼 야만적이고 암담한 사회는 커녕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여하튼 책은 몇몇 부분만 제외한다면 오늘날 읽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만족스럽다. 아울러 번역 또한 자연스럽다. 여기저기 새로운 영웅이 뜨고 지며, '다른'사람에 대한 몰이해와 그로인한 폭력이 극에 달한, 때문에 '군중'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사건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는 오늘의 우리사회에서 한번쯤 꼭 읽어봐야 할 고전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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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8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率路 2011-08-24 13:31   좋아요 0 | URL
어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