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 & 하이데거 : 현상학, 철학의 위기를 돌파하라 지식인마을 21
박승억 지음 / 김영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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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시덥잖아 보이는 동기로 도입된 제도가 괜찮은 결과를 내놓는 것을 목도할 때가 종종 있다. 아마 이런 유형의 책의 출판도 그러한 사례로 들법한데, 본서는-특히나 말미의 '영어로 보는 원문'같은 꼭지로 유추해볼 때-상당부분 논술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도 염두해 두고 출판된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논술을 준비하는 고등학생이 오로지 논술만을 위해 현상학 씩이나 들춰볼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하여간 시리즈의 목차라던지 구성을 볼 때 본서의 출판에 그러한 구매층을 어느정도 고려한 것도 사실인듯 싶다. 여하간에 그런 의도로 본서가 출판된 것이라면, 본서는 입시의 한 제도로서 도입된 논술이 얼마나 좋은 결과물을 내놓았는가에 대한 괜찮은 사례로 꼽힐 듯 하다.

사실 전공자가 아니라면 현상학이나 구조주의같은 철학이론이 우리 삶에 어떤 실천적인 의미를 갖는지 잡아내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나 그것이 독일어라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언어에 기반하여 수많은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철학을 전개해나간 하이데거나 당대 유럽의 정신적 위기상황 속에서 철학적 돌파구를 모색한 후설 같은 경우라면 더더욱 난망한 일이다. 결국 후설이나 하이데거를 위시한 현상학자들의 경우, 그들의 철학이 괜한 시간적 정신적 노력을 들여 그저 지적 사치나 즐기기 위한 도구 정도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말로, 우리 현실에 적합한 실천적 방향을 제시해 줄만한 해설서가 더욱 절실하다는 이야기인데, 이 책은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는 듯 보인다.

본서를 후설이나 하이데거에 대한 충실한 '해설서'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사실 이런저런 내용을 빼고 본서에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철학'이론'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는 부분은 채 60페이지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현상학의 문제의식과 오늘날의 실천적 함의를 논하는데 할애되는데 이것은 본서의 독자가 대부분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실 현상학이라는 것이 현상학적 운동으로 발전할 정도로 윤리적 색체를 강하게 띄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더군다나 객관주의나 물신화로 인해 '존재'의 문제마저 수치로 계산하는게 익숙한, 그리고 그것이 굉장히 '객관적'인 시각이라는 착각이 만연한 오늘의 우리사회에 현상학적 시각은 윤리학적 측면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후설과 하이데거는 같은 현상학자이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측면에서 묘한(아울러 합의될 수 없는)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둘의 철학은 각각의 보편적 기획과 특수성의 강조라는 측면에서 윤리적 실천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상보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모든이가 자신만의 객관을 내세워 상대와 소통하기를 거부하는 시대, 끊임없이 질문하기보다는 빨리 답을 내리는데 익숙한 오늘의 우리의 시대는 다른 어느 시공간보다 현상학의 '실천'이 절실히 요구되는 곳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어렵잖게 후설과 하이데거를 설명하며 그들의 철학의 실천적 함의를 서술하는 본서는 한번쯤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한마디로 잘쓰여진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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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협력인가 - 비시 프랑스와 민족 혁명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87
박지현 지음 / 책세상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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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구의 전간기는 어찌보면 또다른 세계대전을 이미 예정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혼란의 시기였다. 자본주의 발달의 극점이 결국 대공황으로 귀결되고, 다른 한편에선 볼셰비키의 혁명이 성공함에 따라 기존의 지배계층이 보기에는 절대로 수용할 수 없는 이념이 대안으로 제시되는 당시의 분위기는, 어찌보면 애초부터 자본주의나 기술혁신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위기이자 기회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황에서 공교롭게도 당시의 서구 보수주의자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대체적으로 '민족혁명'을 위시한 '정신적 측면의 혁명'을 내세운다는 점에 공통적인 특징을 보이는데, 본서는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비시정부'에 대한 역사와 정신을 논하고 있다.

비시정부의 수립과정과 역사, 그리고 그 정부의 정신을 서술하는 저자가 결론적으로 비시정부에 대해 내리는 판단은 '우리가 알듯 그렇게 단선적으로 악(惡)이라 명명할 성질의 정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혼란스러운 시대, 토크빌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른바 새로운 '모럴'을 세워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당대 프랑스 보수세력의 일종의 정치적 운동이었으며, 따라서 간단하게 '나치 부역자' 혹은 '나쁜놈'으로 몰아세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흐름은 프랑스에서만 있던 것도 아니고 당대의 영국, 이태리, 독일 등에도 있었고,(독일의 경우 전진성씨의 '보수혁명'에서 잘 서술되어 있다.) 저자 말마따나 미테랑 등 당대의 좌우파를 막론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실험에 적극적이건 소극적이건 동조한 것도 사실이다.

허나 석연찮은 것은 이 사실을 다루는 저자의 태도다. 비시정부가 시도한 민족혁명, 혹은 정신혁명이란 것이 당대의 좌우파를 막론한 많은 유명 인사들이 지지를 보냈고, 아울러 그것이 단순히 '유태인 나쁜놈' '독일 착한놈'이란 감정에 기반해 이루어진 정권이 아닌 나름의 이론과 기획을 근거로 구성된 정권이라 한들, 그 정권의 행태와 그 정권이 낳은 역사적 결과물이 합리화 되느냐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비시정부 뿐 아닌 이탈리아 파시즘에 대해서도 종종 '진지하게'제기되는 문제이기도 한데, 위기에 빠진 이탈리아를 하나로 묶고자 시도했고, 역사상 그나마 어느정도 하나로 묶어내는데 거의 유일하게 성공했다는 이탈리아 파시즘이 과연 그 생각보다 진지한(?) 동기와 결과물로 인해 합리화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동기가 선하다면 모든 것이 무죄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국가주도의 민족혁명을 위시한 가부장적 색체를 띤 정신적 혁명이 하나같이 파시즘이나 반민주, 불관용적 정치문화, 혹은 인종차별이라는 깊은 골을 남기는 것으로 귀결되어버린 역사적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동기 뿐 아닌 그것이 잘못된 길을 걷게 되는 과정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 인간의 정신과, 그 정신의 복수성을 무시한 채 자신들의 '좋은 명분'을 내걸고 '아버지'의 성격을 가진 국가와 민족 아래 그 구성원을 하나의 기계처럼 돌아가게 만들기를 원하는 보수주의적 '정신혁명'은 그 자체에 이미 파시즘으로의 예정된 경로를 노정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비시의 유산이 아직도 프랑스에 이어져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유산이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 유산으로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저자가 조금이나마 더 고려했다면, 이렇게 나이브한 서술을 하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오늘 우리 사회의 비시정부에 대한 담론이 종종 친일청산문제의 소극성을 공격하는 근거로서 단순화되어 쓰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근거가 되는 비시정부의 성격이 구체화된들, 우리 사회가 적극적인 친일청산을 함에 있어 제지할만한 근거가 될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든다. 저자는 프랑스의 역사는 그들의 역사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며, 우리의 친일청산과 그들의 나치 부역자 청산이 다른 문제임을 강조했지만, 이는 그저 뜬금없이 읽혀질 따름이다. 외려 저자 자신이 너무 우리의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책을 서술하느라 다소 중언부언하면서 중심을 잃게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점에서 참신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다소 아쉬움이 남는 책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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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개정판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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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속지의 저자소개에 따르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수'라고 평가되고 있는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본 소설은 저자의 약력만큼이나(책 말미의 저자 약력은 정말이지 '포스트모던'했다-_-;;;)심상치 않은 소설이다. 1985년 한신타이거즈의 우승(알만한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일본의 한신타이거즈는 열성적인 팬들로보나, 만년 하위권이라는 성적으로보나 우리의 롯데자이언츠와 흔히 비견되는 팀이다.)을 모티브로 하여 쓰여진 본 소설은(해서, 당시의 야구선수 실명이 그대로 다 쓰여진다) 정말이지 '혁명적'이라 할만큼 당황스러운(?) 언어실험과 형식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본 소설의 시간은 1985년 뿐 아닌 태고적부터 21세기까지를 '동시에' 망라하고 있으며, 본 소설에서 한신타이거즈는 우승하기도 했고, '동시에' 하지 못하기도 했다. 다층적인 시간과 사건들이 동시에 존재하며, 모순적인 어법과 이야기들이 중심적인 플롯없이 각개약진하는 본 소설은 통상적인 소설독법으로는 도무지 꿰어지지 않기도 하거니와,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이런저런 전문적인 서평이 이루어지고 있는 텍스트이긴 하지만, 저자의 말마따나 '한번 쓰여진 작품은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법, 때문에 능력이 안되더라도 용감하게 개인적인 서평을 올리고 본다.

저자는 이 작품을 통해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의 한 시대의 정신풍경을 그려보고자 했고, 그 도구로서 야구를 택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소설에서 말하는 야구란 무엇인가. 그 야구란-소설에서 말하는 바-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속에도 있는 것이며 포르노 비디오 속에도 있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야구'란 우리가 통상적으로 언급하는 야구와 동떨어져 있는 것임을 암시한다. 무려 76타수 3안타의 빈공에 시달리던 4번타자가, 공이 너무 잘 보이기에, 야구를 너무나 제대로 알게 외었기에 자신이 슬럼프가 아니며 더이상 좋을 수 없는 상태임을 자각하는 부분에서도 이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저자는 소설을 통해 묻는듯하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언급하는 야구가 과연 야구인가. 우승을 위해,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돈벌이의 수단, 즉 교환의 수단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 프로야구가 과연 야구인가. 그렇다면 그러한 '야구'를 우승한 85년의 한신타이거즈는 과연 '야구'라는 스포츠의 우승을 한 것인가. 여기서 1985년 당시 한신타이거즈의 용병이었던 랜디바스가 하는 말은 매우 시사적이다. "리치, 네 말대로야. 아무도 시합같은건 보고 있지 않아. 시합 경과는 집에 돌아가서 프로야구 뉴스를 보면 알게돼. 모두, 응원하러 나온거야."

그렇다면 '진정한 야구'를, 나아가 주체로부터 소외된 주체, 삶으로부터 소외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가 소설에서 보여주듯 언어파괴와 형식실험을 통해서나 가능할까? 저자는 이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듯 싶다. 존재하지 않는, 기발한 이름으로 새로운 선수명단을 짜던 두 여자가 완성된 선수명단을 읽고는 다음과 같이 내뱉는다. '생각보다 감동적이 아냐'라고. 언어는 그것이 말해지는 순간 본질로부터 소외되는 신묘한(?)기능을 가지고 있다. 언어는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그 순간 끊임없이 미끄러져 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소외된 삶, 소외된 정의, 소외된 야구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러한 열망-실망의 사이클마저 기쁘게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고 새로이 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은 아닐런지.

괴이한 내용과 실험적인 형식으로 다소 난해하게 읽힐 수도 있는 본 소설은, 그만큼 독자의 참여를 이끄는 매력이 있는 듯 하다. 더군다나 그 참여는, 재기발랄한 문체와 유머러스한 내용덕에 매우 즐겁게 이루어질 수 있다. 사실 '포스트 모더니즘 소설'이니, '제1회 미시마 유키오상 당선작(여담이지만, 이 소설이 유명한 극우파 소설가의 이름을 딴 상의 첫회 수상작이란 것도 참 아이러니하다.)같은 타이틀을 빼고, 그저 이야기를 따라 흘러흘러 읽는다면 누구나 굉장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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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와 이기적인 유전자 이제이북스 아이콘북스 6
에드 섹스턴 지음, 이용철 옮김 / 이제이북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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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만큼 쉽게 읽히면서도 그에 대해 말하기 어려운 책도 없을 듯 싶다. '이기적 유전자'는 물론 도킨스의 간명하고도 유려한 문체가 빛나는 책이기는 하지만, 그의 설명자체가 우리의 기존 상식을 뛰어넘는 측면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도킨스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부분을 신조어를 만들어 풀어내기보단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언어로 설명하곤 하는데, 이것이 기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언어의 의미나 뉘앙스와 묘한 화학작용을 일으켜 독자의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곤한다.

본서는 그처럼 숱한 오해를 받아온 '이기적 유전자'를 독자로 하여금 좀더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도움을 주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게다가 본서는 단순히 '이기적 유전자'에 대해 가장 대중적이고 보편적으로 가해지는 비판인 윤리적, 수사학적 측면에서의 해명에만 주력하고 있지는 않다. 유전자 환원론이라던지 자연선택에 관한 학계의 비판에 대해 도킨스 입장에서의 방어까지 이루어지고 있는데-그럼에도 물론 상당부분 윤리적 측면이나 사실과 당위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할애되고 있기는 하지만-이는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독자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어렵잖게 설명되고 있다.

허나 아쉬운 점은 짧은 책의 분량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기적 유전자의 내용 자체를 요약하느라 이기적 유전자의 올바른 독법이라던지, 그 이후의 논의같은 것이 충실히 설명되지는 못해보인다는 것이다. 사실 본서에서 구구절절 설명한 사실과 당위가 다른 문제라는 것, 혹은 도킨스가 오해를 불러일으킨 수사학적 측면을 해명하는 것은, '이기적 유전자'자체만 읽더라도, 그리하여 도킨스가 짧게나마 경고한 것에 대해 유의하며 읽는다면 충분히 생각해 낼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다. 그럼에도 비판이나 해명을 더이상 이어나가지 못한 것은 책 분량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기존 '이기적 유전자'의 내용을 요약하는데 할애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대다수 본서의 독자들이 이미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독자일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다소 실망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때문에 본서는 이기적 유전자의 '요약서' 그 이상 많이 나간 것 같지 않으며, 이러한 점은 '이기적 유전자'를 이미 읽은 독자가 그 책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다시금 고려하기 위해 본서를 접한다면 필히 실망할만한 요소로 보인다. 따라서 외려 본서는-저자의 집필의도와는 걸맞지 않게-'이기적 유전자'를 아직 접해보지 못한 독자가 그 책을 읽기 전 에피타이저(?)로서 읽는다면 쏠쏠한 재미를 느낄법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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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문의 문학과 철학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181
박이문 지음 / 살림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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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라는 같은 구획 내에 있기도 하고, '불확정성'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적 담론의 영향으로 인해 더욱 모호해지기는 했지만, 문학과 철학의 애매한 관계는 그 역사가 깊다. 문학은 그 속에 언제나 철학적 의미를 담아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 왔으며, 20세기 이후에는 포스트모던적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그 틀거리 자체가 애매모호하여 사실상 철학적 해석의 매스가 가해지지 않는 한 기존의 소설 독법으로는 어떠한 의미를 찾기가 난망한 일군의 장르가 개척됨에 따라 철학과 문학에 대한 모호한 관계는 더욱 심화되고 있는 듯 하다.

본서는 이러한 문학과 철학의 모호한 관계에 대해 언어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섬세한 구분을 시도하고 있다. 사실 문학의 철학적 의미 혹은 철학적 텍스트의 문학적 성격이라는 것이 일단 많은 부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모호함에 기인하는 부분도 있는데, 형식자체가 철학적으로 해석되는 텍스트(본서에서 말하는 바 '문학철학')와 텍스트의 내용 자체가 철학적으로 해석되는 것(본서에서 말하는 바 '문학속의 철학')이 무차별적으로 혼용되는 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비롯하여 언어의 몇가지 기능을 제시하여 철학과 문학의 구분,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문학의 언어적 특징을 논하고 있다. 즉, 철학과 문학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문학이 철학적 텍스트 혹은 철학적 사유 방식과 다른 특징이 분명히 존재하며 그러한 특징은 다른 텍스트로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책은 문학의 특별한 의의와 기능에 대해 논하기 시작한다.(즉 분량의 절반 가까이는 문학과 철학 이야기라기 보다는 문학의 언어적 혁명(?)에 대한 특성과 당위를 논하고 있다) 문학의 특성은 결국 우리가 사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언어로 서술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표현해내는 미학적 측면에 가장 큰 효용성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문학의 극점은 산문이 아닌 시라고 하며 이러한 시적 표현들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어찌되었건 다시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진리에 절대 도달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언어적 혁명성은 우리의 인식과 삶을 변화시켜 한단계 도약하도록 추동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혁명보다 급진적이라는 것이다.

즉 저자가 문학을 대하는 방식은 많은 부분 언어적 혁명성과 미학적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아울러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 또한 그러한 측면에서 모색된다.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현상학이나 분석철학자들의 논의에 많은 부분 기반한 듯한 저자의 이러한 주장을 다시금 곱씹어 볼 때, 사실 저자의 주장은 사회에 대한 다소 노골적인 참여와-그에 연동하여-소설을 중심으로 진행된 바 있는 근대문학의 특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이 운위되는 시대, 즉 근대문학의 사회참여적 역할을 이제 다른 매체가 도맡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이 시대에 문학은 심지어 그 존립근거 자체에 위기를 맞은 듯 보이기까지 한다. 문학은 이제 더이상 사회적 의미를 담기보다는 여느 상업적 매체가 그렇듯 쉽게 소비되어 쉽게 사라져버리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보면 다소 복고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저자의 주장-문학의 언어적 기능에 대한 재조명-은, 나름의 의의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참신한 조망과 대안 모색을 기대한 독자라면 본서가 다소 지루하게 읽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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