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학 무작정 따라하기 - CEO를 꿈꾸는 당신의 선택! 쉬운 경영학 원론! 길벗 MBA 무작정 따라하기 시리즈 1
미아자키 데츠야 지음, 이우희 옮김, 고욱 감수 / 길벗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하다. 간접경험을 쌓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 여가생활로, 혹은 선생님이 시켜서 등등등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책을 읽는다. 누군가 나에게 지금까지 무슨 이유로 책을 읽어왔느냐?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물리적인 시간상으로는 '학교에서 시켜서' 혹은 '먹고살려고'가 1순위였겠지만, 자발적으로 읽은 책은 대부분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서'읽게 된 것 같다.(그래서 아직도 '입문서'인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만) 

그런의미에서 내 독서생활이 경영학과는 꽤나 거리가 있었던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던것 같다. 학부시절 전공은 커녕 교양으로도 경영학 어쩌고 하는 수업은 들어본적도 없거니와, 아버지께서 사업을 하셨던 집안 사정상, 언제나 집에서 발에 치이는게 '자기계발서'였던 유년시절의 경험은 나에게 경영서는 너무 '뻔한것' 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특별한 내용은 없는데 그럴듯한 편집으로 번지르르하게 내놓고 사람들 낚는 책, 뭐 이런 생각. 

헌데 하늘아래 무가치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그것이 수많은 학생들이 학점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학문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사실, 재무는 뭐며, 회계는 뭐며, 생산이나 품질 프로세스는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이해는, 현장에서의 체험 외에 어떠한 정리가 필요한 것이기는 하다. 사실 모든 학문이란게 결국 정의하고 구분하는 것 아니던가. 아, 물론 그저 구분하고 정의하는게 경영학의 전부다라고 말하기에는 이 부문의 나의 지식이 너무 일천하기에 굉장히 건방진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먹고살기 위해서와 직장에서 이야기되는 것들의 몇몇 부분을 대충이라도 총체적으로 캐치해내고 싶어서 이것저것 뒤져보다가 우연히 처음 집어든게 이 책이다. 사실 나는 경영학 원론수준조차도 건드려본적조차 없고, 그 분야가 어떤 걸 어떤 식으로 배우는지 매우 '이례적으로'모른다.(그러니까, 경제학이나 법학 분야 뿐만 아닌, 문과계열의 어지간한 전공에서 어떠한 분야가 존재하는지 예의 그 스노비즘이랄까, 그런 것 때문에 어느정도 알고 있음에도 경영학에 대해서는 아주 깡통이다) 때문에 여기서 이 책이 어떤점이 좋다 나쁘다, 경영학은 이런것같다 저런것같다 운운하기는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조금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 같다. 하지만 굉장히 쉽게 쓰여져 있으며, 솔직히 중고등학생이 봐도 괜찮겠다 싶을정도로 평이하다는 이야기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아울러 본서는 굉장히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는 편인데 개인적으로 일본인 저자에 대해 언제나 갖게 되는 편견-거대담론을 언급하는 데에는 서툴지만 기존의 담론을 요약 정리하는데에는 굉장히 탁월하다-을 재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사실 이 책이 얼마나 시장성(?)이 있을지 조금 의문이기는 하다. 비전공자들한테 치여서 언제나 폭발 직전(?)인 경영대학의 상황을 보면 이 정도는 요즘 재학중인 어지간한 학부생들은 죄다 꿰고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직장에 다니시는 분이라면 이미 조직적으로 돌아가는것을 짧지않은 기간 경험하면서 이미 파악하셨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쪽계열(?)에선 비교적 변화가 빠른 축에 드는 경영학이라는 학문에 있어 새로운 용어에 대한 소개같은 것도 어느정도 본서에 소개되고는 있지만 깊지 않은 수준이고 그런 부분을 생각해보면 본서는 이 부문에 대해서는 별반 생각조차 안해본채, 경영학=자기계발서 정도로만 생각해와서 애초 이 부분에 대한 어떤 프레임 조차 존재하지 않은 나같은 초짜들한테 딱 적당한 책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은 이 책을 접하기 전에 영화를 '접한'적이 있다. 근데 그게 그야말로 정말 '접한' 수준인데, EBS에서 두번이나 방영(한번은 '제5도살장'으로, 한번은 '죽음의 순례자'라는 제목-그러고보니 주인공의 이름이 Pilgrim이다-으로 방영한바 있다.)하는 동안 두번다 '일부분'만 봤기 때문이다. 일부분만 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계속 봐주기 괴로울 정도로 다소 그로테스크한 인물이 (중간부터 본 입장에선)어른이 되었다가 나이어린 병사가 되었다가 외계로 갔다가 하는데 이거 뭐 종잡을수가 있어야지. 아무튼 그런 인연이 있는 본서를 이제와서 갑자기 접하게 된 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추천이 있기도 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결정적으로 알라딘 반값할인 행사도 큰 이유가 되겠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기회를 부여해주신(?) 알라딘에 특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정말 오랜만에 한달음에, 책장 넘어가는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게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장르가 SF라고는 하는데 정말 SF라고 하기엔 뭔가 석연찮은(?!), 아울러 포스트모던의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포스트모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또 무엇한, 그렇게 모호한 성격의 본 소설은 적어도 '반전(反戰)소설'이라는 점에서는 명확한 것 같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 반전의 메시지를 전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허무주의적이고 냉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는 외계인에게 납치된, 모든 시간을 왔다갔다하는 능력을 지니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미 다 알게 된 소설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가는거지'라는 말이 이 소설에서 가장 빈번히 쓰이는 문구라는 점을 미루어 생각해 보아도 그러한 '허무주의'가 뭔가 의도적으로 비춰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힘빠지는 운명론이나 허무주의가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다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없지않다. 역자 해설에도 언급된 바이지만, 저자는 팔십이 넘은 나이에(그는 2년 전인 2007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반전집회에 열렬히 참여하고 부시의 애국법에 반대하여 '나는 미국인이 아니다'는 캠페인에 참여한, 일반인이 보기엔 굉장히 '열혈'이라고 비칠 정도의 활동을 한 사람이다. 그런 저자가 이야기하는 허무주의? 그런 허무주의라면 우리가 기존에 알고있고, 흔히 이야기하는 내용의 '허무주의'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상적으로 우리들이 마주치는 '허무주의'와 '허무주의자'들은 본질상 그것이 지시하는 바와 다른 의미를 가진 경우가 많다. 아닌게 아니라 세상이 다 그런거지, 니들이 그렇게 악다구니 쳐봐야 어쩔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치고 세속적 욕망을 충족할 기회를 굉장히 열정적으로, 호시탐탐 노리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우리안의 허무주의는 대부분 사안마다 선택적으로 현현하기에, 따지고보면 그러한 허무주의를 우리는 허무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 든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내비치는 허무주의는,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언급되는, 그러니까, 부도덕하거나 무신경한 자신의 태도를 면피하기위한 방패로 종종 쓰여지곤 하는 허무주의와는 다른 독특한 구석이 있다. 책 초반에 언급된 바, 저자의 아버지가 저자에게 악당이 등장하는 소설을 쓴적이 없음을 이야기하자, 저자는 대학시절 내내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도 없고, 구역질나거나 나쁜 사람이 없음을 배웠기 때문이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저자의 숙명론적 허무주의의 그 무차별적 성격이다. 

우리는 유치원에서부터 사람은 다르지 않고 전쟁은 나쁘며 빈곤과 독재는 척결되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한 사실을 우리는 모르는 것이 아니다. 돕는 것이 좋은 것이고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고 배운다.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함을, 선량하게 사는 삶이 좋은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배워서 안다. 그게 힘들건 어쩌건 그렇게 살아야 함을, 그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임을 우리는 어렸을때부터 알고있다. 엊그제 지하철역에서 본 행려가 냄새나고 무서워서 싫고, 의견이 다르면 때려주고 싶고, 좋은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완력을 동원해서라도 관철시키고 싶은게 사람마음이어도 어려운 사람을 돕기위해 노력하고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고 독재에 저항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다. 물론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저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모순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엇하나 바꾸기 쉬운 일도 아니고, 우리가 평생 아무리 이런저런 활동을 한들 나아지는 구석은 아주 천천히, 일부분이나마 개선되는듯 마는듯 할 것이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든 그런 것들에 반대하고 저항하며 더 나은 삶을 살기위해 노력하는, 그래서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는 그런 것들이 인생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인생을 묵묵히 받아들이기에는 세상 일이란게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단순히 세속적인 이유에서 뿐만아니라 양심의 충돌 또한 우리를 제지한다. 거시폭력에 맞서다 벌어지는 미시적이거나 국소적인 폭력과 불합리는 거시적인 대의에서조차 우리를 물러서게 만든다. 오늘의 현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거대한 계획에 비추어보면 우리들 하나하나의 일상은 보잘것없고 모순과 역설의 연속이기에 우리 스스로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런 것들이 개인의 세속적 안위와 거대담론의 실현가능성과 엮이다보면 간단한 신념을 '대체적으로라도'지키며 살기조차 쉬운일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누구는 '허무주의'라는 탈을쓰고, 누구는 '현실주의'라는 탈을 쓰고 우리가 알고있는 '좋은 삶'의 지향점을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내팽개치고 살게된다. 내가 보기엔 저자가 내비치는 숙명론적 허무주의는, 이처럼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그만큼 허약한, '올바름'을 향한 우리의 이상과 그에 따른 삶을 지켜나가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점에서 저자의 허무주의야말로 지극히 근본적이고 지극히 상식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삶은 너무 우울하지 않을까, 근본적인 허무주의로 우리의 상식과 이상을 방어하며 살아가는 것은 암담하지 않을까. 그에 대한 답을 저자는 트랄파마도어 인의 삶의 자세를 통해 제시하는 듯 하다. 즉 '끔찍한 시간은 외면해버리고 좋은 시간에 관심을 집중'하라는 것이다. 하루하루 우리가 아는 상식과 이상에 기초해 살며, 그러한 이상의 좌절과 진보의 역설조차 인간적인 것으로, 우리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되 낙관을 잃지말자는 것. 이런 식의 삶의 자세라면, 나도 허무주의자가 되고 싶다. 그리고 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의 재기발랄한 문체와 독특한 구성, 참신한 내용만큼이나 즐거운 책이다. 하지만 라이프지의 말마따나 본서는 '웃어서는 안되는 웃기는 책, 눈물을 흘릴 수 없는 슬픈 책'이기도 하다. 모순적이기는 하지만, 저자의 '허무주의적인 열정'과 그에 따른 삶의 자세가 솔직담백하게 느껴져서 개인적으로는 더더욱 좋았다. 어찌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그렇게 모순적인 것일테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그레고리 헨더슨 지음, 박행웅.이종삼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리영희 선생님의 '대화'를 읽다보면 리영희 선생님께서 저자인 헨더슨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며 이 책을 '당대 한국 정치에 관심있던 미국 지식인들의 필독도서'라고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아울러 개인적으로는 다소 머뜩찮게 생각하는 어느 보수 언론인도 이 책을 20대에 꼭 읽어야할 책으로 꼽았던 기억도 난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사회의 '소용돌이구조'에 대한 이해가, 딱히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더라도 종종 이런저런 경로로 언급되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본서가 그렇게 많이 읽혀지는 것 같지는 않다.(참고로 2000년에야 초판 번역본이 나온 본서는 한동안 절판이다가 작년인 2008년 새판이 나왔다)  

1968년 쓰여지고 1987년~1988년 사이 보완이 이루어진 본서가 무려 30년이라는 시간터울을 두고 우리나라에 번역된 데에는 군사정권의 편협함도 한몫했겠지만, 그보다는 너무 옛날에 쓰여진 책이라는 점에도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흘러간 시간을 핑계 삼기에 본서의 분석은 매우 도발적이고 문제적이며, 무엇보다 흥미진진하다. 책은, 새로운 장이 덧붙혀진것이 아니라 60년대 판을 80년대 상황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정했기에 시차마저 혼동되고, 오늘날 보기에는 틀려버린 듯한 저자의 예상도 없진 않지만 그런 단점은 정말 하잘것 없어 보일정도로 개인적으로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삼국시대부터 한국의 사회와 정치문화를 주도면밀하게 고찰한 저자가 이야기하는 한국의 정치패턴은 한국만의 특수한 두가지 성격, 바로 동질성과 중앙집권성에 기원한다. 이러한 두 축은 한국 사회의 모든 주변을 중심으로 빨아들이는 소용돌이같은 사회구조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권력은 중앙으로 집중되고 계급, 인종, 종교 그 어떤 것으로도 구분할 수 없는 동질적인 사회는 역설적으로 개개인이 파편화, 원자화되어 어떠한 매개체 없이 상승기류로 휩쓸려들어간다는 의미에서의 '소용돌이'는 조선시대 이후 지금까지 내부의 수많은 제도 변화와 외세의 침입, 민주화의 확립에도 불구하고 큰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해서, 똑같은 제도나 규정도 애초 서양이나 기타 제3세계 국가에서 처음 도입했을 때의 의도와 취지와 달리 한국에 이식된다. 계급을 구분하기 수월했고, 인종이나 민족이 명확히 구분되었던 서양의 경우, 대부분의 제도는 상이한 것들간의 응집과 구분되는 것들간의 타협을 위해 존재한다. 각각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이익단체가 자신들의 이익을 평화적으로 얻어내기 위한 일종의 타협책으로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바라본다면, 이는 한국정치와 다소 상이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대부분 동질적인 구성원에 의해 이루어진 한국 사회는, 정당을 만들고 노조를 결성하며 자신의 이해관계에 기반하여 주장하는 것 자체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때문에 그러한 동질성에 의한 원자화가 유구한 전통을 지니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통에 결합되는 순간, 정당이나 노조 등 중간매개집단의 존재의의는 자신의 이해관계보다는 오로지 권력을 향한 도구로서만 그 가치를 가지게 된다. 

모든 것의 중심은 중앙권력이고, 주변부는 중앙으로의 상승기류에 속절없이 굴복한다. 지방은 서울이라는 권력에 휩쓸리고 입법부는 입법보다는 권력에 대한 견제에 집중한다. 정당은 정강이나 이념, 계급의 이해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집권당과 그렇지 못한 정당간의 권력을 향한 이전투구로 날밤을 지샌다. 중앙은 중앙대로 이러한 상승기류를 적절히 통제하기 위해 상층부 관료기구를 무분별하게 확대하고 각 부서의 업무를 전문화하기보단 빈번한 인사교체로 자체의 능력을 감소시킨다. 민주주의는 균형과 책임, 기본권과 계층계급의 이해관계에 의해 지탱되기 보단 중앙을 향한 더 많은 기회로 이해된다. 조선시대 이래 아직까지도 수많은 정당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불문하고(심지어 거스르면서까지) 오로지 반대당의 권력을 앗아가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이런 부분에서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중앙으로 향하려는 개개인의 야망이나 동질성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색깔없는 권력을 위해 국가도 이념도 관습도 일찌감치 버리는 개개인의 행태들 또한 좋게보면 '개방성'으로 볼 수도 있다.(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지배나 미국의 지배 때 반만년 역사를 지닌 국민들의 행태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속절없이 그들의 교육기관과 행정기구에 들어가려 노력하고 또 실제로 들어가서 그것을 평생의 자부심으로 알고 살았다지만, 같은논리로 전근대적인 양반제도 같은 신분제 또한 아무론 충돌없이 조용히 사라졌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나도 심각하게 한국정치, 한국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모든 제도와 관행의 취지나 목적은 사라지고 파편화된 개인의 권력을 향한 무한경쟁만이 반복된다. 정치는 언제나 중앙 권력을 향한 경쟁에 의해 교착상태고, 사회는 간단한 합의를 위해 언제나 불필요한 비용을 너무 많이 치른다.

이것을 통제하여 그나마 행정의 수월성이라도 달성한 시도로 저자가 든 모범적인 사례는 역설적으로 일제등 외세와 독재정치다. 토착 공산주의가 한때 그러한 역할을 하며 한국 정당사상 유례없이 긴 25년의 기간동안 어느정도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그나마도 외래에서 온 공산주의에 의해 완전히 '박살난다'. 아울러 독재와 외세는 자체의 행정효율성을 높이고 소용돌이적 구조만 완화시켰을 뿐, 인권이나 민주주의,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사법권 독립을 위시한 삼권분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이처럼 난맥상에 빠진 한국정치에 대한 저자의 대안은 무얼까. 바로 중간매개그룹의 강화다. 거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지방분권이고 나아가 저자는 자본주의 발전에 의해 한반도에 새로 발생한 가장 특이한 조직이랄법한 대기업집단, 즉 재벌에까지도 기대를 건다.  

물론 저자의 대안제시가 살짝 힘이 빠지는 구석이 없지 않다. 지방분권은 언제나 개혁파의 화두가 되어왔고, 일부 시행되었다고는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되돌아 평가하건데 어찌되었거나 중앙에서 제기되어 시작한 분권화가 진정한 분권화인지 자문해볼 일이다. 지방은 여전히 서울로 가기위한 교두보일 뿐이며 지방으로가는 국도 주변의 흉물스런 공사판은 그 대표적인 상징이다. 지방자치는-적어도 지금까지는-그러한 중앙으로의 욕망을 자체적으로 재조직하고 흡수하기보단 더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기재로 보인다. 중간매개집단으로서 재벌에 재삼재사 기대를 거는 저자의 입장 또한 맥이 빠진다. 리버럴 계열이라 할법한 저자의 정치적 포지션과, 냉전시대라는 책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은 저자의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를 너무 나이브하게 끌고 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벌은 21세기 한국 사회 소용돌이 구조의 정점이 되었으며, 재벌은 정부가 아니다라는 저자의 입장은 '비즈니스 프렌들리'한 정부에 의해 다소 무색해보이는 것도 사실이다.(그러니까, 현실은 외려 재벌과 정부가 하나의 '평의회'로써 권력의 정점에 함께 서 있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그렇다고 저자의 분석이 흘러간 옛노래라고 하기에는 핵심을 찌르는 구석이 있다. 물론 몇몇 근거는 소용돌이 구조에 맞추기 위해 너무 의제적으로 끌어쓴 듯한 느낌도 들고, 사료적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더군다나 책이 쓰여진 이후 시대상황은 급변하여,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는 두번이나 있었고, 더이상 한국정치에 군부가 개입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책이 쓰여질 당시만해도 최첨단(?!) 조직이었던 군대는 오늘날 가장 전근대적인 조직 중 하나로 남아있다) 노조는 그 잠깐 사이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협상에 임하는 계급과 자신의 어렴풋한 이념과 스타일을 가진 정당도 그 맹아를 보이고 있다. 다양한 시민단체도-정부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것 같다만-사회 곳곳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소용돌이 구조로 인한 한국정치의 전통적인 특성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보이는 것은 사실이고 그 폐단은 전사회적으로 어느정도 수정을 요구하고 있는 듯 하다.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의 '중간매개집단 강화'라는 화두 자체는 이 부분에 대해 어느정도 부합하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에 관한 것이다. 

결국 중간매개집단의 강화가 중앙의 계획과 지시에 의해 주도될 경우 이는 다시 새로운 소용돌이 구조를 복제하던지 아니면 소용돌이의 상승작용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것이라는 것은 자유당-공화당-민정당 등의 여당과 현재의 지방자치제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자체가 독점화, 일원화적 지향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집단 또한 한국사회의 소용돌이 구조를 악화시키고 있으며, 사회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소용돌이 구조의 중심에는 관료가 아닌 재벌이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기에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결국 중간매개집단이란 결국 아래로부의 필요로 형성되고 자신의 필요에 의해 스스로의 존립근거를 찾을 때에야 진정한 중간매개집단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자생적인 생협이라던지 시민단체, 지방에서의 다양한 운동등은 실패와 좌절을 반복하고 있지만 이런 것이 어찌보면 소용돌이 정치구조를 해체하는 작은 싹이 될 수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신의 계급에 대한 자각과 연대의식으로 뭉친 노조 또한 역설적으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강조하는만큼 소용돌이 구조의 폐단을 중화시켜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오늘의 현실은 그 어느하나 쉽지 않아 보인다. 소용돌이 패턴은 소위 '옛날사람들'의 복귀와 함께 외려 부활, 조장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저자도 밝혔다시피 우리의 정치 패턴은 그 오랜 역사와는 무관하게 '유전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의 노력과 상상력으로 충분히 극복가능하며 이러한 한국 특유의 패턴은 어느정도 조절될 경우 외려 독특한 하나의 '가능성'으로 현현할수도 있다. 짧지 않은 책이고, 오래전에 쓰여진 책이지만 여전히 참신하고 무엇보다 재미있다.(물론 마냥 웃어넘기기엔 우리의 '역사'와 '현실'에 관한 문제라 그런지 떨떠름한 구석도 없지 않지만, 저자의 유머가 묻어난 조선시대 이후의 정치패턴과 그에 얽힌 다양한 일화들은 정말정말 '재미있다') 한국정치, 혹은 한국 사회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누구라도 일독을 권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永革 2009-08-10 09:3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한우는 이 책을 좀 이상한 맥락에서 추천한 느낌이에요. 한국 정치학자들은 전부 작금의 민주주의 문제만 집착하는데, 핸더슨은 조선 시대부터 살펴보고 있다면서 전통에 관심을 가지라고 일갈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뭐, 에둘러서 최장집을 비판하고 싶었던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나중에 보니까 조선시대 군주 열전 시리즈를 쓰고 있더군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더라죠. ㅎㅎ

시대가 변하면서 세부적인 사실에서 좀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 생기기는 했지만, 소용돌이라는 틀로 한국 정치를 분석한 부분은 아직도 유효하고, 그런 점에서 수도권에 모든 것이 집중되는 현상을 고민한다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일 것 같습니다.

率路 2009-08-12 00:52   좋아요 0 | URL
오옷, 감사합니다. 서평쓰다보면 이런 리플을 받게되어서 참 좋은것 같아요. 이한우는 최장집 이야기가 나오면 나올수록 자신한테 마이너스일텐데 그걸 아직도 에둘러 비판하고 싶을 정도라면 은근 트라우마가 심한가봐요. 사실 책읽으면서 조선시대부터 살피는게 좀 신선하긴 했던 것도 사실인데, 그렇다고 그쪽(?)분들 가끔 조선시대부터 거슬러가는걸 보면 이건 뭐 거의 환타지라..(이를테면 지역감정의 기원이나 좌파의 기원 혹은 우리에겐 민주주의가 왜 안맞는가! 뭐 이런소리 하고 싶어서 거슬러 올라가 자신만의 소설을 쓰시니..-_-;;;;)

노이에자이트 2009-08-20 17:10   좋아요 0 | URL
오...이 고전을 읽으셨군요.제겐 그가 한국사에 대해서 쓴 50년대의 논문과 말년인 1987년에 쓴 논문이 있어요.요즘은 구할 수 없는 책에 실려있지요.헨더슨은 한국의 문민전통이 강해서 군사정권은 예외적일 거라고 했고 군사정권에 매우 비판적이었지요.박정희가 제일 싫어한 미국인이었습니다.

率路 2009-08-22 18:43   좋아요 0 | URL
예, 대학 1학년때 박명림 선생님 강의 들으면서 소개받아(?그보단 그냥 언급하고 넘어간 수준이었죠)구입한 책을 얼마전에 다 읽은거니 텀이 꽤 길었던 셈인데, 생각보다 재미있더라구요. 따지고보면 헨더슨이 급진주의자나 좌파(?)도 아닌 것 같은데, 결국 독재정권의 입장에선 이념의 간극보다 우리편이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문제였던것 같아요.
 
만들어진 현실 - 한국의 지역주의,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문제가 아닌가
박상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전체적으로 혼란스러운 책이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혼란스럽게 '읽힌'책이라고 말해야 옳겠다. 사실 이러한 혼란스러움에는 저자의 책임도 일정부분 있는 듯 싶은데 '지역주의', '지역할거' 나아가 '지역패권'까지, 우리가 정치적으로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지역주의의 정의라는 게 매우 모호하고 어찌보면 사람마다 각양각색일텐데도 불구하고 본서의 경우 그러한 개념정의를 거의 넘어가다시피 한 후 내용을 전개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본서가 문제로 삼고 있는 '지역주의'의 개념은 책을 다 읽고나면 어느정도 어렴풋이 추측이 가기는 한다만 그래도 조금 석연찮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아마도, 그 점이 이 책이 가진 유일한(그런데 조금 치명적인것 같기는 하다) 단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본서는 참신하고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있기도 하다.

핑계를 갖다 붙히다 보니 결국 고려시대 훈요10조까지 거슬러 올라가곤 하는 옛 기록상의 지역차별논리부터 1971년 대선을 거쳐 1987년 정초선거에의 지역주의 관련 자료를 실증적으로 아우르며 저자가 제기하는 질문은 간단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우리에게 '망국적'이랄 법한 지역주의라는게 존재하기는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지역주의 관련 '자료'라고 해야 1987년 이후에나 급증했고, 유권자들이 지역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것도 1987년 선거 이전이 아니라 이후의 통계에서부터나 잡히기 시작한다. '71년과 '87년 선거의 경우 권위주의대 민주주의라는 다수의 유권자가 선거 초기 수용한 명명백백한 이슈가 있었음에도 언제나 그 결과는 지역할거 운운하며 해석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러한 해석이 얼마나 온당치 못한 이야기인지 저자는 무려(!) 게임이론 같은것까지 동원해가며 비교적 흥미롭고 합리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한국의 지역주의적 투표는 외국과 같이 한번도 분리지향적인적은 없었고 외려 중앙권력지향적이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이는 굳이 따지자면 '경제투표'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그러니까, 저자에게 이러한 투표행태는 지역주의가 '아니다'.) 아울러 역대 선거과정에서의 투표행태도 언제나 지역보다는 다른 이슈가 중심이 되어왔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 결과에 대한 해석은 '올해도 망국적인 지역감정'운운하는 단선적인 논리에만 의존하다보니 가끔씩 우스꽝스러운 일이 생기기도 한다. 2004년 총선에서의 조순형씨가 갑작스레 지역감정을 극복하겠다며, 아무리 입법부 의원의 역할이 지방자치단체장과 다르다고는 해도 연고도 없고 그 지방의 사정도 잘 모르는 동네에 출마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일게다. 

한마디로 지역주의적 '해석'이 지역주의적 '현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서 저자는 과연 누가 지역주의적 해석을 도모했는가, 누가 어떠한 의도로 이러한 현실을 만들었는지를 묻는다. 그에 대한 저자의 근본적인 답은 아마도 '구체제'정도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87년 당시 민정당과 그 밖의 정당이 선거정국에서 보인 태도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듯, 아울러 87년 대선 당시의 조선일보 사설에서 조금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과도한 권력의 집중화와 권위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구체제 그 자체는 민주화라는 그 자체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지역주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조장해왔다. 여기에 차별성이 없는 보수독점적 정당체제 또한 이러한 지역주의 담론을 유통시키는 데에 한몫을 했는데 정당간의 정책적 무차별성은 결국 정당 지도자의 출신지역이 과다대표(?)되는 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추가로 90년대 중후반 재야세력의 극우정당 가입에 지역주의가 인기있는(?) 알리바이로 쓰여지면서 지역주의 담론은 정치적 신념과 세력에 관계없이 소비되었다.  

'모든 문제를 지역주의로 설명하면서 상황의 어려움을 지역주의 때문으로 합리화하려는 집권세력의 욕구'가 결국 지역주의적 현실을 주조했다고 보는 저자가 제시하는 지역주의에 대한 처방은, 그러한 비판만큼이나 명쾌하고 간단하다. 지역정당체제의 등장을 지역주의에 의한 결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지역정당체제 극복 또한 지역주의 해소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당이 정책으로서 자신의 선명성과 정체성을 갖추고, 기존의 모든 이슈들을 그저 지역주의 때문으로 치부해버리는 폭력적인 담론에 진지하고 성찰적인 자세로 맞서자는 것이다.  

민주적인 선거를 치르는 어느 국가건 특정 지역에 특정 정당이 강한 경향이 존재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미국에선 이를 일컬어 '섹셔널리즘'이라고 한다) 지역마다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차이와 우선을 두는 가치관에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여기에 부응하는 정당 또한 그리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투표행태를 분석하며, 여타의 현안에 대한 고려는 없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망국적인 지역감정'이라며 매번 유권자들의 '멍청함'(?)을 성토하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이런식의 담론의 해악은 비교적 커서, 정당 그 자체의 주요 목표가 어떠한 정책입안이라거나 이념적 지향의 달성이 아닌 까놓고 '전국적으로 고른 득표를 받는 것'으로 보일 지경인 웃지못할 상황이 구축되기까지 했다. 이는 우리 정치를 현실로부터 괴리시키고 역설적으로-현실과 괴리되었다는 의미에서-이데올로기화 시킬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지역주의라는 괴물은, 그것이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져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시민을 정치로부터 괴리시키고 소외시킨다. 이는 곧 민주주의의 약화와 위기를 의미한다. 지역주의적 담론이 '진지한 수준으로' 만연하기 시작한 87년 선거 이전과 이후의 투표율이 천차만별인 것은 괜한 이유가 아니다. 지역주의 하나만 해결된다면 뭐든 해결될 것이라는 잘못된 기대를 버리고, 오늘의 정치 현실을 바로 보는 것, 아마도 그것이 이 열망-절망의 싸이클을 깨고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민주주의 구축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보다 굉장히 재미있게(?!!) 쓰여진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러니까, 따지고보면 일종의 신파극이 될법했던 메인스토리가 괴상하게 변해버린 것은 오로지 미디어라는 매개체가 등장하면서 부터였다.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지극히 얌전하고 성실한 아가씨가 술집에서 처음만난 탈주범 청년과 사랑에 빠져서 그가 도피하는 것을 도와 곤경에 처한다는 스토리 자체는 그 누구라도 기시감을 느낄법한 뻔하디 뻔한 고전소설의 반복되는 패턴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은 황색언론에 의해 가공되고 부풀려져 급기야 평범한 한 여인을 '실제' 살인자로 만들어버리는 바, 결국 본 소설은 아마도 '언론'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굳이 우리에게 읽혀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70년대에 쓰여진 본 소설은 독일에서 거의 조중동을 합한 수준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빌트지를 대놓고 비판하고 있다. (애초에 소설은 본 소설상의 신문인 '차이틍'과 '빌트'지의 관련성을 '굳이'부인함으로서 그 목적을 노골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자신의 구미에 맞게 이미 정해놓은 수순대로 취재원의 언급을 왜곡하고 잡범(?)을 정치범으로 둔갑시키는 거대 언론의 횡포라던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과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이, 심지어 너무나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카타리나의 생활 자체가 언론 자체에 의해 이미 덧씌워놓은 이미지와 맞지 않자 그마저도 '악마의 주도면밀함'으로 해석해버리는 과정은, 그저 소설로 치부하고 읽기에는 굉장히 리얼하게 다가왔다.(첨언하자면, 저자의 언급-일종의 '팜플렛'이라는-이 무색하게도 본서는 소설적으로도 꽤나 재미있게(?) 읽힌다.)

본서는 단순히 개인과 언론간의 관계뿐 아니라 메카시즘적인 마녀사냥이 어떠한 구조로 돌아가는지, 그 과정속에서 보수정치인들과 언론인은 어떻게 유착되는지를 굉장히 미시적인 사건 속에서 그럴듯하게 표현하며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무엇에 의해 돌아가는가, 현대사회가 가하는 폭력은 얼마나 기만적이고 또 그만큼 얼마나 주도면밀한가, 아울러 우리는 그 속에서 과연 자신을, 그리고 우리의 생활세계를 방어할 수 있는가. 마치 한편의 다큐멘터리같은 본 소설은, 저자 스스로도 표현했듯 팜플렛이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노골적으로 정치적이지만 그만큼 섬세하고 상징적이다. 

역시 뭐니뭐니해도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떠오르는건 오늘 우리의 현실일게다. 상황이 더 비관적으로 보이는 것은 오늘날의 언론이 카트리나 블룸의 이야기가 쓰여지던 시절보다 더욱 주도면밀해졌다는 점 때문이다. 이제 더이상 언론은-카타리나 블룸에게 행했던 것처럼-노골적으로 기사를 부풀리고 취재원의 말을 조금 비틀어 자신의 목적을 충족시키는 '촌스러운'방법을 쓰지 않는다. 오늘의 언론은 오로지 진실만, 진실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진실에 의해 거짓을 말한다. 그게 뭔소리냐고? 다들 미네르바 사건을 통해 그러한 부분을 끔찍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목도했을꺼다. 전문대에 백수, 골방에 앉아 혼자 책만파던 네티즌이라는 '사실전달'자체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 전달 자체가 왜곡이었다. 진실을 보여줌으로써 진실을 왜곡하는 언론의 파괴적인 힘은, 말과 글이라는 도구로 이루어진 근대적으로 가장 고도화된 수단 즉, 법률과 규정에 의해 통제되는 것조차 어불성설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68혁명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대적 배경과 저자의 지독했던 경험 속에 쓰여진터라, 본서에서는 중점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은 문제 또한 오늘의 우리를 고민하게 만든다. 개인에 대해서, 소수자에 대해서는 사악하다 싶을 정도의 잔인성을 보여주면서도 권력과 자본에는 알아서 굴종하는 언론과 거기에 길들여진 우리의 시각은 또 어찌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언론은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하지만, 미디어는 현대사회에 필요불가결한 수단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의 미디어는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조차 딱부러지게 이야기 할 수 없는 현실, 그 현실속에 국회는 지난주 미디어법을 지들말로는 '강행처리'했단다. 이런. 눈앞에 빤히 보이는 김이박씨의 잃어버릴 명예를, 그리고 부당하게 살아날 또다른 김이박씨의 때이른 복권을,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그리고 그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