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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9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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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99년말에서 00년 초로 기억한다. 붉은색 배경 속에 그야말로 '꽃미남'이라는 말 외엔 설명할 수 없는 한 인물이 대학가를 휩쓸던(?)시절말이다(따져보믄 고작 4년전 일인데, 무지 예전 일처럼 쓴것같아 좀 민망하다.^^)그 인물의 이름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흔히들 줄여 체 게바라라고 불리우는 바로 그 인물이다.

서구의 60년대를 수놓았던 체게바라의 깃발이 그의 사망 30주기라는 시기적인 이유와 RATM이라는 걸출한 밴드로 인해 우리의 2000년대를 장식하던 그 시절, 대학 초년생을 지냈던 우리들의 책꽂이엔 시쳇말로 '운동권이건 비권이건' 마치 교과서인양 그의 평전이 꽂혀 있었다. IMF와 모집단위 광역화로 인해 학내 분위기가 그 어느 때보다 개인주의화, 파편화, 우경화로 치닫고 있다는 선배들의 걱정이 한창이던 그 때, 낭만적인 혁명 이야기가 주 내용을 이루고있는 그의 평전이 대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는건 꽤나 역설적으로 보여진다. 허기사, 자신의 얼굴이 찍힌 티셔츠나 사진집이 상업적으로 엄청 성공한걸 체게바라가 봤다믄 뭐라고 했을지, 진부한 의문이긴 하지만, 정말 궁금한것만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는 친구 하나가 이 책이 출간되기 적어도 3년전(?)부터 자신의 필명을 죄다 'Che'로 써놓는 바람에 유행보단 조금 일찍 그를 접하긴(-_-;;) 했지만, 책을 읽고 나자 그를 일컬어 '금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했다던 사르트르의 말이 수긍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심한 천식에 굴하지 않고 갖가지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의사, 불굴의 혁명가, 경제관료, 외교관, 그리고 다시 혁명가로.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또다시 '투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러 나아가는 성품,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와 남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외모까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그야말로 '완벽'한 인간 됨됨이와 삶의 자세, 이상에 대해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일관되게 노력하는 너무나 모범적인 그의 인생이 이 평전의 '재미'를 감소시키는 하나의 요소인 것만은 분명해 보이며, 덕분에 개인적으로도 이 책을 참 재미없게 봤던걸로 기억한다. 더군다나 그의 인생이 우리와 지구 정반대편에 존재하는 미지의 지역인 남미와 연관되어 있다보니 제반지식의 결여는 물론이거니와 모른다고 해서 특별히 관심가는 부분이 있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는 것이-_-;;;; 때문에 글쎄, 모르겠다. 정말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던 후배 하나는 이 책을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책으로 꼽던데, 난 읽으면서도 정말 아니다 싶었던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더군다나 작가인 장 코르미에의 매우 프랑스틱한 서술(왜, 다소 오바(?)하고 종교적으로 성스런 단어를 종종 사용하는 그런 거-_-;;)또한 자꾸 머릿속에서 충돌하는데 꽤나 제어하기 힘들었음이다.

외려 내가 주목하는건 이 책의 문학적인 면, 혹은 사회적인 영향력이 아닌 출판사(史)적(?)인 의의다. 실천문학사의 평전시리즈 10번째였던 이 책은 출판사마저 놀라 뒤집어질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이 책의 성공은 이후 우리나라 출판계의 새로운 조류, 즉 평전문학의 르네상스라 부를만큼 평전이 우후죽순 격으로 출판되는 세태를 낳기에 이르렀다. 갠적으론 이러한 평전문학의 르네상스적 상황이 그리 오래 갈 것이라 예상치는 않았지만, 지금도 면면히 그 유행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러한 평전문학(?)의 르네상스(?)라는 조류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인 편이다. 무엇보다 그러한 평전이라는 것들이 그 인물이 직접적으로 하고자 했던 말들인 1차 문헌에 대한 독자들의 접근 자체를 직, 간접적으로 제한하는 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그 첫번째 이유요. 권위를 가진 작가의 주관이 인물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필연적으로 개입하게 됨에 따라, 독자가 그 인물을 나름대로 평가할 수 있는 여지 자체를 제한하게 만든다는 점이 그 두번째 이유다. 사견이지만, 적어도 카프카나 맑스는 자신의 평전보다 그들의 저서가 읽혀지기를 더 바랄 것이라는 것, 오노 요코는 자신의 미술품들이 감상되어 많은 사람이 나름대로의 생각을 할 수 있기를 자신의 인생이 읽혀지는것보다 더 선호할 것이라 확신한다.

물론 '평전'이라는 것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혹은 잘못 알려진 인물을 재조명하고 새로운 논의를 제공하는 측면이 있다는 장점은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현 세태는 무언가 거꾸로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수는 없다. 체게바라 평전 서평쓴답시고 갑자기 평전문학의 과도한 열기(?)를 비판하는 글이 되어부렸군. 하여간 우째꺼나 함 읽어볼만한 책이긴 한 것 같다만, 아주 꼭 읽어봐야 한다고 추천하긴 갠적으로도 좀 글타. 아니 머 내가 이 책 별로라고 한다해도 새내기라믄 예의상 호기심에 다 한권씩은 사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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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 희망의 시절, 분노의 나날
수잔 앨리스 왓킨스 외 지음, 안찬수 외 옮김 / 삼인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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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 책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 3학년때였고, 따라서 그 해는 내가 68혁명(혹은 위기?ㅋ)을 처음 접한 해이기도 한 셈이다. 포디즘이 어느정도 안정적인 틀을 갖추어 제1세계 노동자들은 전반적인 경제적 풍요로움에 젖어 그 혁신성을 잃게 되었던 서구의 60년대,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탈권위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학생들이 감행한 근본주의적인 비판과 행동은 당시의 나에게는 굉장히 낭만적으로 보여졌고, 일종의 동경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사실 1968년은 인류사에서 굉장히 신기한(?)해인 것만은 사실이다. 인류가 전지구적 차원에서의 '지배'를 기획하고 그 기획을 어느정도 실현한 것은 인류 역사에서 종종 보여지는 사실이지만, 1968년만큼은 전지구적 차원의 '저항'의 기획이 세계에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미친, 어찌보면 지금까지도 유일무이한 해로 기록될만 할 수 있을 것 같다.(물론 여기서의 '전지구적'이라는 말은 지극히 서양중심적인 담론임을 부인하진 않겠다.)

하지만 1968년의 저항은 분명히 정치적으로 '실패'한 흐름이었다. 레이몽 아롱의 말마따나 이들의 혁명적 기운은 드골의 연설한번으로 완전히 잠재워졌고(덕분에 프랑스 우익은 이어진 총선에서 기록적인 압승을 거둔다) 독일 SDS는 고작 수배 해제를 조건으로 학교로 돌아왔다.(그리고 남아있는 이들은 '적군파'로 남아 테러행위를 일삼게 된다) 체코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소련의 탱크가 프라하에 진주함과 동시에 없던일이 되어버렸고, 미국은 부도덕한 보수주의자인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무정부주의적 좌파 몇몇은 국가에 대한 불신을 가교삼아 신자유주의자로 변신하여 그들의 국가에서 그들이 예전에는 그렇게도 비난해 마지않던 레이건같은 존재가 되었고,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사회라는 모토에서 사회는 사라지고 그저 이기적인 개인만 남아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 혁명은 다른 여느 혁명과 마찬가지로 실패한만큼 이뤄내고 만 것은 사실이다. 실패한 혁명은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 혁명의 기억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모두들 자연스레 그러한 흐름으로 따라가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은 그 실패가 처절할 수록 더욱 공고한 기반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그런 점에서 난 진정한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라고 믿는다) 68년 이후 분명 인류는 이전에는 보지못했던 억압과 부당한 권위를 비판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목소리가 없었던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갖게 되었으며, 인간의 관계는 한층 민주적이고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모든것들은 어느덧, 우리도 모르는 사이 '상식'이 되어있다.

저자인 타리크 알리와 수잔 왓킨스는 이러한 68혁명을 시간순으로 배열하여 그 해에 일어난 일들을 나열하듯 서술하고 있다. 물론 과거의 역사가 오늘 그대로 재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그때만큼의 희망조차 보이지않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상상력에 무언가 자극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그 결과는 글쎄, 모르겠다.

그 해의 '사실'들만을 서술한다고 했지만, 사실을 선택하고 서술함에 있어서 저자가 개입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때문에 저자들의 '사실'에 대한 나름의 '중립적인' 선택과 서술은, 그들이 설령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오늘을 살고있는 독자에게는 분명 죄다 매혹적이고 낭만적으로 보이기만 할 것이다.(대표적으로 내가 그랬다) 하지만 사실, 68년의 대학에는 하버마스가 '좌파 파시즘'이라고 지적한 요소가 분명히 존재했었고, 진지한 기획없이 '저질러진'부분도 적지 않았음이 사실이었다만 책에는 그러한 현상들에 대한 서술은 하나도 없다. 때문에 책은 일견 과거를 통해 현재를 고찰하고 반성하여 새로운 변혁운동을 추동하기보다는 외려 혁명을 스타일리쉬하게 '소비'하는데 도움이 되는 도구처럼 보여지기도 한다.(또한 돌이켜보건데, 실제 68은 우리 사회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기보다는 '소비'되어 온 것이 사실인듯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1968년의 흐름에 언제나 벗어나 있었고,(당시 우리에게 베트남전 참전은 이슈꺼리도 되지 못했다. 심지어 야당 당수들도 베트남 파병에 대해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 시대를 역사적 경험으로 '느껴보지'못한 우리에게는 어찌되었건 소중한 책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개인적인 소망(?^^)이 있다면 이 책을 읽고 이 책만으로 그치지 말고 68과 관련된 다른 진지한 이론서를 읽었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바람은 나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바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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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학사 -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역사학은 끝났는가?
게오르그 이거스 지음, 임상우.김기봉 옮김 / 푸른역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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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사학사'라는 제목보다 외려 부제-'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 역사학은 끝났는가?'-가 이 책의 성격을 더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단순히 지난 시대의 사학사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공세 속에서 '역사학은 끝났는가'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지난 시대의 역사학을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랑케로 인해 하나의 전문 분과로서 출현한 고전적 역사학은 그 특유의 형이상학적 가정과 관념성, 정치위주의 서술, 그리고 무엇보다 랑케 스스로 '실제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데 만족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어떤 역사가도 그 자신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인 이상 '판단'하는 것을 회피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위기를 맞았고, 이러한 고전적 역사학의 위기는 당시 각광받던 사회과학에 의해 '구제'된다. 이러한 역사학과 사회과학의 결합은 독일의 사회경제학파와 미국의 신사학파에 의해 조악하게나마 그 모습을 보이다가 프랑스의 아날학파, 마르크스주의 사학파, 독일의 역사적 사회과학 학파에 의해 만개하지만 이는 60년대 말 크나큰 도전을 받게된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라는 야만과 이어진 베트남전의 부조리, 관료제의 모순은 계몽의 기획 자체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아울러 서구 중심, 근대적 합리주의 중심, 거대담론 중심의 사고의 부당함과 야만성이 재조명되면서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사조는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듦으로써 이전의 역사서술 방식 전반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역사적 분석과 이야기가 동일하며 언어가 실재를 반영하기보다는 구성한다고 보는 언어학적 고찰에 기반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친다. 역사학은 애초 그 대상자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객관성을 지니지 못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에 대해 어찌되었건 역사가들은 사실과 관련하여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고,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결과적으로 정직한 학문과 선전, 선동을 구분하지 못한 '목욕물 버리느라 애까지 버린'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포스트모던의 역사학을 해체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비판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포스트모던의 '역사학'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받아들여 지난시대의 역사학의 단선적 구성방식이나 협소한 문제의식에서 벗어나 역사학의 범위를 더 넓혀 더 풍요롭고 더 다원적인 역사학을 탐구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때문에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신문화사'에 대해서는 의외로(?) 굉장히 호의적인 입장을 내비치는데, 이는 저자가 신문화사의 문제의식이 어떻건간에 결과적으로는 역사학의 틀안에서 역사학을 더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보고있기 때문인 듯 싶다)

사실 따지고보면 포스트모던의 근본에 대한 문제의식은 '근본주의적'이고 굉장히 '관념적'이라는 데에서 랑케의 고전적 역사학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는 포스트모던의 근간이 된 문학이론이나 랑케의 역사학이 애초 상아탑 속의 고답적인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어 실재를 보지 못한 점도 없지 않기에 그런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계몽이 그 이상적인 측면만큼이나 야만적인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러한 이중성은 인간이 하는 사유인 이상 포스트모더니즘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단적으로 '홀로코스트'마저 부인하고야 마는 포스트모던의 문제제기는 모더니즘보다 얼마나 덜 야만적인지 묻고싶다) 어찌보면 포스트모던은 인류(엄밀히 말하자면 '서구문명')의 숱한 실패에 대한 책임회피이고,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지적 유희는 아니었을까? 반성과 고찰을 넘어서 계몽을 '부정'해버리는 것은 무책임과 무능에 대한 변명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계몽의 단죄를 넘어 계몽을 부정하는 것은 야만일 뿐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지고보면, 역사학이야말로 철학과 함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의 근원을 해명해 줄 수 있는 몇안되는 학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사학의 태동과 발전과정을 서술하고 현 시점에서 역사학을 복원하고 있는 저자의 시도는 매우 소중하다. 더군다나 포스트모더니즘이 '60년대 말의 사회적 운동에 의해 적극적으로 사유된 서구에 비해 '90년대 사상의 공백기에 수동적으로 수용되어-그 급진적인 언술에도 불구하고-보수적이고 다소 퇴폐적(?)인 색체마저 띠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있어 저자의 계몽주의에 대한 '의지'는 다시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사학을 다루고 있다는 본서는 '21세기'우리 사회에 여전히 유의미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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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의 라이벌 - 역비의 책
역사문제연구소 / 역사비평사 / 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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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역사문제연구소 주최로 자그마치 14년 전(!) 열렸던 '한국사 교실'의 17기 강좌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출간된 책이다. 소재가 소재였던지라 다른 강좌에 비하여 일반인들의 호응이 좋았다고 하며, 그러한 호응은 책의 출판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언급된 인물들은 12명으로, 1.김구-김원봉 2.안재홍-송진우 3.여운형-이승만 4.정인보-백남운 5.박헌영-김일성 6.장준하-박정희의 6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물들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 이념적인 면과 정서적인 면 모두에서 당대 라이벌로 칭해지던 인물들 뿐만 아닌, 이념적으로 같은 편이었지만, 정서적으로 라이벌이었던 이들, 정서적으로 친했지만 이념적으로 라이벌이었던 이들의 쌍 등 다양한 유형의 '라이벌'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는게 특기할만한 측면이다.

이 책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면, 화자에 따라 스타일이 너무도 다르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여운형-이승만이나 장준하-박정희의 경우 각각 이기형씨와 백기완씨가 강의를 해주셨는데, 두 분 모두 위 인물들 중 한분(이기형씨는 여운형선생, 백기완씨는 장준하 선생)과 친분이 있으셨던 터라 깊이있는 강의보단 인물과 화자간에 있었던 에피소드-그것도 두명중 한쪽으로만 편중된-에 지면이 할애되고 있으며, 반면 김구-김원봉, 박헌영-김일성 같은 경우 다소 아카데믹한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들은 경우에 따라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에서는 단점이 다소 두드러져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안재홍-송진우와 정인보-백남운, 박헌영-김일성 관련 강의가 마음에 들었었고, 장준하-박정희 및 여운형-이승만의 경우는 다소 불만족스러웠다. 천편일률적인 역사서에 다소 지루해진 분들의 경우 머리 식힐 겸사겸사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괜찮을듯 싶다. 책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좌여서 그런지 매우 쉬우며, 강의 뒷부분마다 수록된 질문과 답변은 강의의 내용을 조금 더 구체화하는데 충분히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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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프로이트 평전 - 제2판
에리히 프롬 지음, 김진욱 옮김 / 집문당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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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웬 맑스? 아니 웬 프로이트? 이 사람들 개론서는 이전에도 읽었었다면서 왜 또 새삼스레 평전? 하지만 이 책의 정확한 면모를 알려면 본 제목보다 '환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부제(원서는 외려 부제가 제목이다)와 저자인 '에리히 프롬'에 주목하는 것이 더 이로울 듯 싶다.

사실 책은 제목처럼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형식의 '평전'은 아니다. 맑스나 프로이트의 생애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나오지 않는다. 에리히 프롬의 사상적 자전(?)이라 할 수 있는 본서는 에리히 프롬이 어떤 연유로 맑스와 프로이트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각각의 문제의식과 사상적 특성은 무엇인지, 양자의 차이는 무엇이며 공통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들이 제공한 사상적 무기(?)를 이용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서술되어 있다. 처음에는 양자간의 비교와 대조에서 시작해서 점점 가면갈수록 양 사상이 융합되어가며 마지막에는 에리히 프롬의 사상이 등장(?)하는 듯한 형식은 독자로 하여금 갈수록 흥분(?)에 빠지도록 만든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도 초반에는 다소 지루했던 것도 사실이지만(그나마 초반은 목차가 잘게 나누어 있어서 견딜수 있었다) 가면갈수록 속도가 붙었고, 마지막에 가서는 가히 감동감동감동이었다는.

그의 사상에 있어서 물론 주(主)를 이루는 것은 맑스이다. 하지만 맑스는 사회에 대한 통찰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이데올로기적인 상부구조로 변환하는지를 밝히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주로 사회의 공통된 상태와 그 사회의 특수한 체계에서 오는 특수한 상태에 관심이 있었는데 반해 개인의 상태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 부분에 있어 프롬은 프로이트를 끌어와 맑스와 프로이트 간의 실천적인 이론을 만들어낸다.(그리고 누구나 잘 알고 있듯, 이러한 맑스와 프로이트간의 사상적 연대의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이어져오고 있다.) 새로운 사회를 위해선 새로운 인간부터 존재해야 하는 법을 인지해서일까? 저자는 맑스의 기획을 주로 삼으면서도, 책의 많은 부분을 맑스보단 외려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에 관한 설명과 논증에 할애하고 있다. 때문에 그만큼 책은 개개인에게 '구체적인' 행동과 마음자세를 촉구한다.(이 점에서 본서는 다른 고답적인 주류 이론서의 틀을 벗어나 있다)

그가 보는 맑스와 프로이트의 기획(아울러 그의 기획이라 할만한)은 '해방'과 '휴머니즘'이다. 그는 그의 눈을 흐릴 수 있는 이런저런 요소들을 물리치고 세심하고 균형감있게, 그러면서도 강한 신념으로 무엇보다 '실천적인'이야기를 해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맑스와 프로이트에 관한 언급은 줄어들고 이 두 거장이(뭐 지금은 에리히 프롬도 거장이라고 불리워질만하지만)제공한 무기를 통해 오롯이 서게된 자신의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단순히 사회적 기획수준으로써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개인의 행복론이나 윤리학적 측면에서도 놓치기 아까운 글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저서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내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자면 굉장히 많이 팔리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듯 싶으며, 이는 다른무엇보다도 그의 저서가 그의 다른 동료들의 저서에 비하자면 비교적 쉽게 쓰여졌다는 점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유가 과연 그것 뿐일까? 요즘 구하기 썩 쉬운 일만은 아니겠지만(그래도 알라딘엔 있더라) 한번쯤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이다. 올해 베스트까진 아니어도 원오브더베스트는 된다고 볼만한 책. 솔직히 이런류의 책읽고 감동먹기는 정말 간만이었다는.

ps.여담이다만, 애초 혁신적이었던 심리학이 당시 미국에서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개탄하는 에리히 프롬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현실이 오버랩되었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프로이트가 그렇게 걱정한바대로 환자들의 신으로 군림하며 개인을 해방시키려 하기보다는 적응시키려 한다. 지극히 상업적인 심리학 서적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오늘, 우리의 시대에, 따지고 보면 정신분석학 서적이라고 볼만한 본서는 어떤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굉장히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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