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종교 살림지식총서 99
공일주 지음 / 살림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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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중립적인 입장에서 아브라함의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대한 소개와 비교가 나올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저자 스스로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자기점검 하면서 쓰려던 듯 싶지만, 별로 성공적이지는 못한 것 같다. 즉, 이 책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고 근본주의적 기독교 정도 될 것이다.

본 책은 또한 유대교와 이슬람교에 있어서도 그 근본주의적인 측면을 주로 논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유대교건 이슬람교건 그들의 주류적 입장은 어떤지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우리네 상황에서 이처럼 그 종교의 '근본주의적'인 측면만을 안다는게 어떤 의의가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는 오히려 또다른 편견만을 조장하지 않을까?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무엇보다 이 책의 내용이다. 번역투의 문장도 종종 보이고, 인용문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숱하게 많은데 각주는 달려있지 않은 경우가 자주 보인다. 주어와 술어의 호응도 나무 자주 어긋나며 체계적인 서술 또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때문에 읽고 난 후 책 전체에 대해 드는 느낌은 전혀 없었고 몇가지 '상식'들만 개별적으로 파편화되어 기억에 남았을 뿐이다. 분량 적은 문고본의 한계 때문일까? 아니면 저자의 불성실함때문일까? 종교학적 지식이 일천한 나의 무식함 때문일수도 있겠지? 하여간 다소 실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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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선언 - 백산고전대역 1
마르크스.엥겔스 지음, 남상일 옮김 / 백산서당 / 198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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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2학년때 책을 보곤 다소 놀랐던 점 몇가지. '선언'이라는데 생각보다 길더라는 것,(물론 백산서당에서 출판된 공산당 선언은 영문까지 있어서 더 그렇다는 점도 있긴 하다만) 오늘날에도, 이 책 속의 몇몇 문구들이 종종 인용이 많이 되는 편인데, 많이 인용되는 책 치고는 생각보다 어렵더라는 것, '공산주의자'가 기대했던 것 보단(?) 꽤나 타협적이고 연대를 중시하더라는 것(사실, 내용만 보면 공산당선언이라기보단 공산'주의자'선언이 더 옳은 표기가 아닐까 싶기도. 실제 직역하면 그렇지 않나?), 마지막의 요구조건(물론 '잠정적'요구조건이긴 했다만)이 생각보다 덜 급진적이더라는 것.

레닌은 이 책을 일컬어 '이 작은 소책자가 전집 전체와 맞먹는다.'고 했다지. 하지만, 쉽고 짧은 반면 이것만 보고 맑스를 이해했다는 것은 맑스를 오해했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라고 평하는 학자들도 있었고. 아마도, 이 양쪽의 말 그 어느 쪽에 대해서라도 강하게 부정할 사람은 없지 않을까?? 즉, 그 중간지점 정도에 이 책의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에 이 책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읽혀질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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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야르와 시뮬라시옹 살림 H classic 1
배영달 지음 / 살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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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야르의 주저인 '시뮬라시옹'의 도입부 경구(?)는 굉장히 매력적인 구석이 있다. 사실, 남얘기처럼 써놓긴 했는데, 실은 이건 전적으로 내 얘기다-_-;;;; 즉, 그러니깐, 어느날 서점에서 민음사 판 시뮬라시옹 책 초입의 문구-시뮬라크르는 진실을 감추는 게 아니라, 진실이야말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길 뿐-에 완전히 뻑가서 구입했었는데, 그 수없이 많은 각주를 보고 질려서 포기하였던 전력(?)이 있었으니깐. 그러던 중 살림출판사에서 시뮬라시옹의 개론서로 보이는 본서가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주저없이 바로 구입하게 되었다는.

보드리야르는 현대 사회를 '소비의 사회'로 규정한 후, 우리가 소비하는 상품은 상품이 아닌 기호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코카콜라를 구입할 경우 우리가 구입한 것은 거품있는 검은 액체가 아닌, '젊음'이라는 상징, 즉 기호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실재는 기호와 이미지의 안개 속으로 사라지'게 되며 결국 실체는 아무것도 없이 시뮬라크르가 시뮬라크르를 생산하는 상황 즉, 시뮬라크르의 자전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사고를 급진적으로 진행하여 '디즈니랜드는 미국 사회 전체가 디즈니랜드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그 곳에 존재한다'는 방식으로 까지 나아간다. 즉, 고위 공직자의 부패는 정부가 온통 부패 천지인 것을 감추기 위해 존재하고, 전쟁은 온 세상이 전쟁으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에 대한 저항은? 저항마저도 시뮬라시옹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으면 우리는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 아닌가?

이러한 허무주의의 함정으로부터 헤어나오기 위해 보드리야르는 '급진적사유'를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급진적 사유'가 설명된 부분은 내 역량으로는 도저히 이해불가였다. 실은 위의 정리한 내용들도 무지 자신있게 아는 척하고 썼다만, 그게 확실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즉, 이 책은 초보자를 위한 시뮬라시옹의 개론서라기 보단, 일단 시뮬라시옹을 읽은 사람들을 위한 책인 것 같다는 소리다. 시뮬라크르의 자전이나 내파같은 중요한 개념들이 앞에서 이미 다 사용된 후 뒤에 그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것만 봐도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_-;;;

결국 시뮬라시옹을 읽은 후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는 숙제아닌 숙제가 다시 생긴 셈이다. 물론, 그 숙제를 언제쯤 해낼 수 있을지 기약은 없다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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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살림지식총서 76
홍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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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부르디외에 대한 호기심은 있었지만 그의 원 저작을 보기엔 그 짧은 '강의에 대한 강의'를 읽고 하얀건 종이고 검은 건 글씨구나 외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 끔찍했던 개인적인 기억 때문에 꺼려졌고, 그렇다고 그에 관한 뾰족한 개론서 또한 그 누구로부터도 소개받지 못했던 나였기 때문에, 살림 지식총서 76번째 씨리즈로 부르디외와 관련된 책이 나오는 순간 주저없이 냉큼 샀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소감은??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문고본'이라는 양적 한계 때문에 부르디외 사상에 대한 소개 이외에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부르디외 사상을 한국 사회에 적용하여 비평까지 감행(?)하고, 그의 사상에 대한 꽤나 깊은 수준의 평가까지 해내고 있다. 심지어 저자는 마지막 부록처럼 덧붙혀 있는 '저자후기'에서 우리 학계의 고질적 병폐-학문 분야의 자리싸움?-까지 비판하며 앞으로의 연구방향까지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부르디외의 핵심 개념으로 저자가 꼽은 것은 아비투스와 상징폭력, 그리고 장이론이다. 이 세가지 개념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변혁 이론에 있어서도 적지않은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찌보면, 정치적인 세력 확대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문화로 그들의 정치를 둘러 싸는 것이 아닐까? 자본의 논리가, 자본의 문화가 도처에서 관철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설령 좌파정당이 집권한다 해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오해는 마시라, 정치적 운동 자체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니깐. 하지만, 누군가는 부인한다 하더라도 아비투스, 그리고 상징폭력의 중요성을 우리는 너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적은 분량의 책이지만, 그 어떤 책보다 오랜, 진지한 생각을 해보게 만드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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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살림지식총서 25
양운덕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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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적으로 구입했던 푸코의 '감시와 처벌', '광기의 역사'가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푸코에 관한 개론서로 산 것이 바로 본서이다. 물론, 본서는 그 분량이 매우 적어서 푸코의 모든 사상을 담기에는 역부족일수도 있겠는데, 때문에 저자는 과욕을 부리기 보다는, 푸코의 중기 작업에 해당하는 '권력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에 포커스를 맞추어 서술하고 있으며, 이는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보여진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이란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도처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대부분은 질서유지인이나 감시자가 없어도 줄을 서며, 경찰이 없어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하기까지 훈육되고 단련되어 스스로 감시하고 스스로 체제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데, 푸코는 우리가 그러한 행동을 하는 그 순간순간 권력은 그 곳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푸코는 이 모든 감시와 억압구조란 근대적 계몽주의의 소산이라며, 계몽주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의 사상이 그렇듯, 이 부분은 독자에게 뚫려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한건 권력과 감시는 단순히 권력자를 교체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누군가가 들어선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그래봐야 권력의 '머리'만 바뀔 뿐이란 얘기 되겠다) 즉, 진정한 '해방'이란 단순히 정치나 경제차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문화, 사회, 성, 경제, 사상 등등 모든 영역에서의 변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나저나, 감시와 처벌하고 광기의 역사는 언제 다 읽는다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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