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와 역사의 종말 이제이북스 아이콘북스 7
스튜어트 심 지음, 조현진 옮김 / 이제이북스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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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제이 북스에서 나오는 아이콘 시리즈는 적어도 제목만 놓고 봤을 때 독특한 구석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 '푸코와 이반이론', '하이데거 하버마스 그리고 이동전화' 뭐 이런걸 보면 호기심도 일지만 한편으론 그 적은 분량에 난해한 사상가의 사회적 논란에 대한 입장을 어떻게 다 수록하나 싶은 걱정도 든다.

'데리다와 역사의 종말'도 제목만 보면 흥미로우면서도 역시나 한편으로는 위와같은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사상에 관한 입문서보다는 살짝 수준이 높고, 그렇다고 본격적인 논의를 전개해 나가는 책이라고 보기에는 분량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부족한점이 많다고 할 수는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시종일관 '데리다 사상 사례풀이(?)'정도로 생각이 되었는데, 실제로도 저자는 본서의 주제를 '데리다와 역사의 종말'로 정한 이유에 대해 '종말론 논쟁에 대한 데리다의 공헌은 문화적으로 극히 중요할 뿐만 아니라 해체로 가는 길을 열어주며, 그 길은 대중의 평판과는 달리 해체를 훨씬 덜 난해한 지적 활동의 영역으로 보이게끔 해줄것이다.'라고 언급하여 그러한 목적을 넌지시 밝히고 있다.

사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론'은 데리다의 유명한 신조어(?)인 '차연'개념만 생각해봐도 이미 까일(?)준비를 하고 있는 개념처럼 보이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책은 비단 후쿠야마의 '종말론'뿐만 아니라 일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종말론'도 비판하고 있다.(곰곰히 생각해보면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실질적으론 그들이 그렇게 비판해 마지않는 해겔의 역사개념과 그 궤를 거의 같이 한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다 싶다) 암튼 본서를 통해 하여간 데리다에 관해 개인적으로 정리가 안되고 있던 수많은 부분들-이를테면 '메시아없는 메시아주의' 같은 것-이 은근슬쩍(?) 정리되었던 터라 꽤나 만족감을 느꼈다.

저자는 해체론도 적극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 즉 정치적 논쟁이나 윤리학적 측면에 있어서도 유의미한 결과를 해체론 그 자체로부터 도출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역사의종말'학파(?)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을 소개했다는데, 확실히 그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압축적이고 간결하게 이러한 논의들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목적'에 비추어 개인적인 감상을 논한다면, 데리다는 '해체'를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활용했을 따름이지 정치적 기반이나 윤리적 측면에 있어서는 데리다 본인 스스로는 밝히지 않았을지라도 해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떠한 확고한 기반(?)을 근거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사실 애초 알튀세르등과 빈번한 교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구가 무너진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맑스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그의 행위 자체가 굉장히 사려깊은 '정치적 고려'가 있었던 행위였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저자가 보여주려던 해체의 적극적 측면 대신, 개인적으로는 해체가 부당한 도덕적 우월성을 파괴하는 데에 굉장한 '방법론적'유용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어찌되었거나 이러한 해체가 가치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데리다처럼-그것이 분명하진 않더라도-해체 외부에 존재하는 어떠한 확고한 기반에 의지하여야 하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시나마 해보게 되었다. 데리다에 대한 기초적 이해가 모호한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봐도 후회하진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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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스튜어트 홀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5
제임스 프록터 지음, 손유경 옮김 / 앨피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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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피에서 나온 'Critical Thinkers'시리즈는 영국 루틀리지 출판사의 동명의 시리즈를 번역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이후 두번째 읽은(완독은 처음)책인데, 개인적으로는 특정 인물에 대해 특별히 추천된 소개서가 없는 경우 이 시리즈를 선택하신다면 후회는 안하시리라 보장한다. 그만큼 책은 구성면에서나 내용면에서나 쉬우면서도 알차다. 지금까지 제젝, 사이드, 스피박, 바르트, 그리고 지금 리뷰를 올릴 홀까지 다섯권이 나왔고, 들뢰즈의 경우 태학사에서 별개로 번역되어 있으며(이 또한 들뢰즈 개론서로서 굉장히 호평을 받는 것으로 알고있다.) 앞으로 데리다, 하이데거, 보드리야르, 리쾨르, 폴 드만, 프레드릭 제임슨 등등등 기라성같으면서도(?) 만만한 개론서를 찾기 힘든 사상가들의 소개서가 나온다는데 개인적으로는 기대 만빵이다.

스튜어트 홀은 표지에 소개된대로 '이렇다 할 저서 한권 없는 이 시대의 대표적 문화이론가'이다. 사실 그가 이렇다할 저서 한권이 없는 것은 그의 전략이기도 한데 그는 권위나 상식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며 스스로 권위가 되기를 거부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공동작업'으로 수행하였으며, 또한 그는 영구적 단행본을 통해 자신의 사상에 일관성을 부여하기 보다는 변화되는 상황에 변화되는 해결책을 내놓기 위해 잠정적 논문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그 '수많은 홀'하나하나가 모두 오늘 우리의 문제에 굉장히 많은 시사점과 상상력의 단초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문화주의와 구조주의를 '절합'하고,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 볼로시노프의 다액센트 개념을 융합하여 문화와 언어를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닌 하나의 투쟁의 장으로 보아 지속적인 실천적 함의를 지닌 이론들을 만들어낸 그의 면모였다. 물론 오늘날 그에 대해 '문화적 포퓰리즘'의 혐의가 있다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는 그 자체로 비 정치적인 것이 아니며 문화건 언어건 끊임없는 투쟁의 장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울러 미디어를 단순히 발신하고 수신하는 것이 아닌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발신자의 메시지가 다 발신자의 의도대로 수신되는 것은 아님을, 결국 수신자에게도-발신자만큼 크지는 않지만-다악센트성을 지닌 언어를 가공할 여지가 있음을 밝혀낸 그의 이론 또한 관심이 갔다. 대처리즘에 대한 그의 분석과 비판도 꽤나 흥미로웠는데, 왜 노동계급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보수정당에 몰표를 줄까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을수없는 우리의 정치 현실에 대해서도 도움이 될만한 해결책의 단초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처럼 몇 개의 노랫말만 배우고 음악은 잊어버리면 안되겠지만.

사실 다양한 국면마다 다양한 입장을 가지고 있던, 즉 오늘의 실천과 문제해결을 위해 핵심적 입장에 지속적인 변화가 있었던 홀을 한권의 책으로 쓴다는게 쉬운일은 아닐게다. 그럼에도 저자는 묘한 줄타기(?)를 통해 그 홀의 수많은 모습들과 그 속에서 묘한 일관성 아닌 일관성(적어도 일관된 이론이 변화하는 정치에 비현실적일 따름이라는 사고에 기반한, 그의 무지개처럼 수가지의 경쾌한 연구'방법'론 만큼에는 일관성이 있는것 아닐까?)을 부여하여 저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오늘의 우리 사회, 정치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어찌보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울러 홀이 원채 이런저런 입장들을 많이 취해 온 터라(?^^)문화이론의 입문서로도 적당할 듯 싶다. 하여간에 일독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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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황보영조 옮김 / 역사비평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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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에 나와있는 소개에 따른다면 본서는 스페인 근대 철학의 3대 명저 중 하나라고 하며, 옮긴이가 인용한 잡지의 언급을 빌린다면 '20세기를 대변하는 책'이라고 한다. 다소 과장된 감이 없잖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간에 20세기가(그리고 이어지는 21세기도) 대중의 시대였다는 점에서 본서의 통찰이 무의미하다고 할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본서가 다소 보수적인, 아울러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을 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이랄만한 출판사인 '역사비평사'에서 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책 표지의 소개 또한 진보진영에 속하는 임지현 교수가 썼다는 것인데, 실제로도 본서는, 그만큼 보수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진보적 관점에서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갖고 있는 듯 싶다.

책이 쓰여진 시기는 1930년으로, 당시는 저자의 말에 따르자면 과학기술의 발달과 자유민주주의라는 훌륭한 제도(저자 또한 이 두가지가 인류사에 둘도없는 업적임을 인정하고 있다)로 인해 인류는 수적으로 급격하게 늘었을 뿐더러, 그 인간 한명한명의 가능성의 영역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과거에는 단순히 소수자가 이끌어가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수동적으로 이끌려가던 대중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모든 부문을 잠식하고 지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즉, 교양있는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시기는 갔다는 이야기다.(물론 흔히 오해되듯 이 소수자는 특정 계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계급에서도 이러한 소수자는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 왔다고 그는 언급한다)

문제는 바로 이 시대와 그 지배자인 대중의 성격이다. 인류는 이제 과거 그 어느 시기에 비해서도 우월함을 느끼며, 때문에 과거는 모두 숨쉬기 곤란한 답답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한것은 이처럼 자신만만한 인류가 한편으로 그 넓어진 가능성 때문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과거와의 단절로 인해 외로워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의 시대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다. 이전 시대에는 시대가 불만족 스러울 경우 과거로의 회귀를 외치거나, 전통적 가치의 복원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에 사람들은 과거도 부정적이지만 미래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의 지배자인 대중은 현재의 완벽함 때문에 자신이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고, 어떻게 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는지 무관심해진다. 교양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며, 역사에 대한, 세상에 대한, 순수과학에 대한 고마움도 잊는다. 어디 그 뿐인가, 대중의 집단적 우월감은 근거없는 자신감만 북돋워 자만심을 부추기고, 교조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일삼게 하며, 남의 충고는 무시하게 만든다. 반면 대중은 자신의 존재 속에 내재된 불안감으로 인해 여기저기 휩쓸리게 되고 자신의 자주적인 규범을 갖지 못한 이들은 국가에 의지하려고만 든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유도 내팽게치고 암울한 야만의 세계에 스스로 빠져든다. '전문가'의 양산은 이러한 '대중시대'의 명암을 확실히 보여주는 좋은 예인데, 이러한 전문가들은 자신의 전문분야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우월감을 갖게 되지만, 사실 그 분야를 제외하고는 과거보다 더욱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그 이전의 교양인 보다 아는 것이 더 없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한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저자는 책을 통해 망해가는(?)유럽문명에 대한 푸념을 그치질 않는다. 그렇다면 저자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바로 새로운 도덕규범의 정립이다. 분명 19세기에 인류가 이뤄낸 진보는 눈부시며,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미친 짓이란 것은 저자도 인정하는 바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시대의 지배자인 대중은 자신의 도덕을 알지 못한다. 즉, 대중의 사회는 무도덕의 사회이고 질서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철부지같은 대중은 똥오줌도 못가리면서(?), 아무런 대안조차 없으면서,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자는 기존 질서, 즉 유럽의 지배가 해체된다는 것은 그저 무규범의 사회로 가는 것이고, 이러한 대중시대를 불러온 그 진보마저 파괴하는 야만으로 가는 첩경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장한다. 유럽을 하나의 국가(?)로 묶자는 것이다. 기존의 편협한,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여 소국의 경계를 운운하려 하지 말고 통합적인 공동체를 이루자는 것이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기획으로부터 '시대의 충만함'을 되찾고 새로운 미지의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면, 한때는 진보적 함의를 담는 그릇이었지만, 지금은 기존의 넓어진 가능성을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국민국가는 발전적인 방향으로 해체될 것이고, 이는 무도덕의 대중 사회를 벗어날 탈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본서는 그 화려한 찬사와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부장주의, 인종주의, 서구중심주의에 푹 빠져 있다는 것은 그 시대 서구인들 대다수의 한계였으니 좀 많이 봐준다고 하더라도, 그가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대중의 능력을 너무 우습게 알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저자의 예측대로 독일이나 이탈리아 등 서구에서는 '대중의 반란'에 기반한 파시즘이 맹위를 떨쳤고 동구에서는 스탈린주의가-그의 걱정대로-어느정도 경제적인 성공을 거둠으로 인해 또다른 '대중의 반란'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며, 때문에 그로 인해 어떠한 야만적 결과가 일어났는지는 우리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대중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배웠으며(참고로 그는 본서에서 '경험'을 굉장히 무시하고 있다) 오늘날 더욱 훌륭한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다. 즉, 대중은 우매하고 과격한 행동을 해 온 만큼이나 현명하고 정의로운 행동을 해온것도 사실이라는 거다. 아울러 소유권에 기반한 민주주의는 그의 예상만큼 평등을 보편적으로 이루어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외려 다른 측면에서의 문제가 더 심각한 상태인 것도 사실이기에 그의 예측이 오늘날 완전히 정합성을 지닌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결국 다른 것에 기대지 않는 '자신의 도덕'을 가져야 한다는 것. 대중에 기대고, 국가에 기대며, 시류에 기대어 '대중'에 편입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오늘의 민주주의사회(그리고 대중사회)는 그 진정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는 측면에서 본서는 그 함의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통합적 공동체(물론 여기선 유럽에 국한된 이야기지만)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 담긴 '2부:누가 세상을 지배하는가'는 이 책의 백미이며, 좌파진영에서도 이 책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로 보인다. 여기서 펼쳐진 저자의 역사관과 국가관은 수많은 상상을 가능하게 만들며, 기존의 편협한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변증법적 대안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대부분의 사안에서 다소 보수적으로 기운 결론을 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분석은 다른 여러가지 대안을 가능하게 하며, 그 대안의 수많은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아울러 그의 대중 전반에 대한 분석 또한 절반 혹은 그이상의 진실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하기에 이 책은 아직도 읽혀질만한 가치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본서를 '고전'이라 부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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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심리
귀스타프 르 봉 지음, 이상돈 옮김 / 간디서원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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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당 출신의 독일 전 총리 헬무트 슈미트는 젊은 시절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과 본서를 읽고 매료되었다고 한다. 특히나 본서에 대해서는 특별히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본서가 히틀러와 나치가 유발한 대중의 심리를 분석한 선구적인 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라고. 다른 한편, 본서는 정작 저자인 르봉이 살던 시기에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숱한 비난을 받았다고 하는데, 저자의 주장이 민주주의에 반하는 귀족주의적 시각에 기반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당대에도 그렇거니와 오늘날까지도 좌-우 양쪽으로부터 찬양과 비난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그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책이기에 본서는 오늘날에도 고전으로 남아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책이 쓰여진 시기는 1895년이다. 당시는 프랑스 혁명의 기반이 되었던 계몽과 이성의 기획이 그 수많은 정치적 부침과 혼란 속에 회의되고 재검토되기 시작한 시기였으며 이러한 혼란은 저자의 시각 속에서도 녹아있는 듯 보인다. 사실 본서를 읽고 르봉을 어떤 '주의자'로 해석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그는 책속에서 오로지 현상 혹은 사실만을 이야기 할 뿐 결코 당위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언한다. 새로운 시대는 군중의 시대일 것이라고. 좋건 싫건 우리는 그 시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저자가 이야기하는 군중은 그저 수많은 인파가 모인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조직은 아니다. 심리적으로 어떠한 근본적인 원인이 작동할 경우에야 군중은 군중으로서 등장하는데 이는 숫자의 다소를 묻지 않는다. 군중은 그저 맹종하기만을 원하며(심지어 '무신론'까지도 신의 위치에 놓고 맹종한다), 단순한 암시에 의해 좌우되는 존재며, 감정에 휩쓸려 극단적이면서도 언제나 유동적이기에 믿을 수 없으며, 집단 논리에 의해 '멍청하게도'자신의 이익에 반해 뜻하지 않게 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존재이다. 즉, 이성은 없이 행동만 빠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그 구성원의 도덕성이나 전문성이 얼마나 탁월한지 여부에 의해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이런건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본다) 모든것은 군중과 연관되면 극단화되고 단순화되며, 심지어 훌륭한 사상도 군중의 윤리가 되는 순간 타락한다.(수많은 종교에서 이미 목격한바 있다.) 더군다나 작금의 시대는 '군중의 시대'. 아무리 고고한 사상가도, 철학자도, 사상도 이 틀을 크게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난 자의 현실은 그저 고달플 따름이다. 물론 그가 죽고난 한참 후 그 사상을 군중들이 수용함으로써 뒤늦게 알려질 수는 있겠지만.

군중이 종종 통계상의 합리적인 자료보다 이미지의 힘에 이끌린다던가, 언어에 의해 좌우된다던가, 실제의 영웅보다 전설의 영웅을 선호한다던가 하는 그의 지적은 정말 소름끼치게 적나라했으며, 군중의 리더는 합리적인 사람보다는 반미치광이 광신도가 더 적합하며 리더는 군중을 설득하려들지 말고 홀려야 한다는 그의 리더관(觀)은 그 솔직함(?)에 섬?했으며, 시험위주 교육을 비판하고 군중의 여론과 신조를 논하는 부분은 정말이지 흥미로웠다. 군중의 모든 행동을 이성적으로 해명하려 했던 당대의 주류적 흐름을 뒤집고 군중의 감정적 특성을 집어낸 저자의 주장은 오늘날의 독자가 읽어도 정말 탁월한 것만은 사실이다.(이런 점에서 본서를 읽는 내내 마키아벨리가 계속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현상을 이야기 할 뿐 당위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찌되었건 군중의 시대는 도래하였고, 종국에는 군중만이 남을 것이며 때문에 우리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군중'이라는 퇴폐적 존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대안을 내놓기는 하지만, 결국 뒤죽박죽 되고만다.(그 어떤 인간도, 사상도 '군중'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그의 주장에 기반한다면 이는 매우 당연한 현상일런지도 모르겠다) '대중이 범할 오류라면 전문가도 범할 수 있는 오류'라며 배심원제를 받아들이거나 의회제를 실컷 욕하고 어쨌건 탁월한 제도라 이야기하는 그를 보면, 혼란 상황 속에서 새로운 윤리를 찾지못한 당대 지식인의 고뇌가 느껴진다. 어쨌건, 때문에, 이 책을 '어떻게 이용할 것이냐'는 오늘의 독자에게 완전히 일임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의 독자는 본서를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 우선 본서의 한계를 염두에 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르봉은 당시까지 군중을 '이성적 인간'으로만 판단하던 당대 주류적 시각의 안티테제로서 인간의 감정적 측면을 부각시켰고, 이는 본서의 가능성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즉, 이성적 인간과 감정적 인간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해 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와 인종주의적 시각은 모든 군중을 이성적으로 보는 것 만큼이나 그의 논의를-그 탁월함에도 불구하고-관념적으로 만든것도 사실이다. 아울러, 의회주의에 대한 무관심을 민주주의의 병폐로 해석, 결국 의회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일시해버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준다거나 스펜서류(類)의 '사회 다윈주의'에 푸욱 빠져있는 것은 시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듯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르봉의 날카로운 지적과 그가 보여준 '절반의 진실'속에 어떠한 방향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먼저 새로운 '신조'의 확립이다. 즉 일종의 '종교아닌 종교'의 확립이다. 군중의 감정이 애초 무엇인가를 믿고 따르기를 원한다는 그의 주장은 틀린것 같으면서도 맞다. 따지고보면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질서에 따라 투표하고 결과를 따르는 것은 그러한 신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조는 확립되기도 어렵지만, 그만큼 한번 만들어진 신조를 붕괴시키기도 어렵다. 이러한 신조를 조금 더 합리적인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이성'의 힘을 빌린다면 어떨까? '군중'속에서도 '자아'를 잃지 않도록 하는 올바른 교육, 군중이 되기 전에 자유로운 개인이 되기 위한 주체적인 노력, 그리고 그들이 모여 군중을 이루었을 경우, 그 군중의 악덕이라 할만한 지나친 유동성을 안정화하고 개개인에게 책임감을 부여하게 만들 수 있는 '민주화된 민주주의'의 정립, 이러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군중의 시대는, 르봉의 묘사만큼 야만적이고 암담한 사회는 커녕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자유로운 개인의 자유로운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여하튼 책은 몇몇 부분만 제외한다면 오늘날 읽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만족스럽다. 아울러 번역 또한 자연스럽다. 여기저기 새로운 영웅이 뜨고 지며, '다른'사람에 대한 몰이해와 그로인한 폭력이 극에 달한, 때문에 '군중'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사건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는 오늘의 우리사회에서 한번쯤 꼭 읽어봐야 할 고전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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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8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率路 2011-08-24 13:31   좋아요 0 | URL
어휴 감사합니다 :)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
페리 앤더슨 지음, 류현 옮김 / 이매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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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한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서구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정도 될 것 같다. 책은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라는 제목과는 달리 그닥 맑스주의 사상가들의 사상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을 전개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몇몇 맑스주의자들-그람시, 아도르노, 마르쿠제, 사르트르 그리고 알튀세르 등등등-이 만들어낸 몇가지 독창적인 '개념'을 하나의 장을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책은 개개의 사상을 설명하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전후 서유럽 맑스주의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의 이유는 저자도 밝혔듯 자명하다. 즉, 이론가들과 학파사이에 다양한 견해 차이와 적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건 서구 맑스주의의 통일성을 규명할 수 있는 구조적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 유산을 평가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을 정리하자면 서구 맑스주의는 따지고보면 유럽좌파의 '패배의 산물'이었다. 1차대전 이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실패, 러시아 혁명의 고립화, 이후 스탈린 치하 소련의 관료주의화에서 서구 맑스주의는 이론과 실천이 완전히 분리된 채 발전되었고 이론의 영역 또한 정작 고전적 맑스주의가 주력해왔던 분과였던 경제학과 정치학은 외면되고(그람시정도가 여기에서 예외가 된다) 맑스 본인조차 그닥 많이 다루지 않았던 철학분야로 그 중심이 이동한다. 아울러 서구 맑스주의자들은 이전의 그들의 선배세대와는 달리 노동자들의 삶과는 유리되어-이는 당시 유럽 좌파정당의 행태에도 상당부분 책임이 있다-과거와는 달리 알아먹지 못할 이야기들로 도배(?)를 하고, 이론적 탐구는 상부구조, 그 중에서도 맨 꼭대기라 할만한 미학적 영역에 집중하였으며, 과거의 국제주의적 전통은 외면한 채 협소한 강단에서만 맑스를 언급하게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맑스주의의 '타락'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사변적인 방식으로의 궤도이탈은 유럽의 상황과 맞물려 시종일관 염세주의적 색체를 드러냈고, 이는 따지고보면 애초 서구에서의 맑스주의가 '패배의 산물'로서 발전된 것이기에 어찌보면 당연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처럼 애초의 고전적 맑스주의로부터 상당한만큼 궤도이탈을 해버린 서구의 맑스주의가 일종의 보편적 맑스주의로 세계 각국에 수용되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처럼 그 대상적, 지정학적 범위면에서 '협소'했던 서구 맑스주의가 '국제주의'적으로 언급되는 현상을 비롯하여 60년대 서구의 5월 '봉기'의 영향으로 이론과 실천의 괴리가-만족스럽진 않지만-다소 좁혀졌다는 점,(여기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시종일관 이론과 실천의 간극을 좁히기위해 노력했던 트로츠키가 비로소 '발견'된다.) 정치이론이나 경제학에 관심을 갖는 젊은 맑스주의자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서구맑스주의가 비로소 청산-즉,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것은 취하여 조금더 나은 맑스주의로 발전한다는 의미에서-되는 과정에 있지 않은가라며 조심스럽게 낙관적인 견해를 밝힌다.(여담이다만, 책이 쓰여진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자가 여전히 낙관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을지는 조금 의문스럽다ㅋ)

아울러 저자는 서구 맑스주의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 이후, 책이 다소 오독될 수 있겠다는 노파심 때문인지 '후기'를 덧붙히고 있다. 서구 맑스주의에는 수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때문에 저자는 본서를 통해, 이론과 실천의 간극을 줄여야 하며, 혁명이론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뒷받침이 될 때라야 비로소 올바른 것이 될 수 있다고, 그리고 이는 개혁주의에 빠지지 않은 '혁명적인'대중이 존재할 때, 그와의 연합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언급이 이론과 실천 속에서 또다른 한쪽 편향 즉, '활동가적'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음을 저자는 바라고 있다. 즉, 이론과 실천간에는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저자는, 서구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전통적인 맑스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며, 서구맑스주의만큼이나 고전적 맑스주의 또한 끊임없이 재평가가 요구된다는 전제하에 대표적으로 맑스와 레닌, 트로츠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아무튼 책은 일반적으로 잘 다뤄지지는 않아왔던 서구 맑스주의의 사상사적 측면을 깔끔하면서도 나름 깊이있게 정리하고 있으며, 맑스주의가 해명해야 할-즉, 서구맑스주의에서건 고전적 맑스주의에서건 해명되지 못한-사안들을 자세하게 나열하고 있다. 맑스주의와 관련하여 아무런 지식이 없으신 분이 읽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기도 하겠거니와, 놓치는 부분이 많을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이 들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리 어려운 책은 아닌 듯 싶다. 맑스주의와 관련하여 어느정도 개론적 이해를 가지고 계신 분은 한번쯤 읽어보시면 앞으로의 학습(?)에 괜찮은 방향타가 될 듯 싶고, 그게 아니더라도 맑스주의와 관련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개괄적으로 검토할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을 듯 싶다. 30여년 전에 쓰여진 책이지만, 놀랍게도 오늘, 우리의 시대에 정합성(?)을 갖고 있는 듯 싶은데, 따지고보면 맑스주의가 양차 세계대전 후 '서구'맑스주의로 귀결되는 과정과 80년대 이후 맑스주의가 '우리'의 맑스주의로 귀결되는 과정이 묘하게 흡사한 면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ps.얼마전에 알게 된 사실인데, 본서의 저자인 페리앤더슨과 '상상의 공동체'로 유명한 베네딕트 앤더슨은 형제지간이라고. 뜬금없게도 참 엄한(?) 집안이라는 생각이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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