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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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렵고 지루한 미학을 상당히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다는 진중권씨이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주저라할만한 미학오디세이를 '미학'그 자체의 난해함과 내 입장에선 굉장히 모호할 따름이었던 그 목적성(?) 때문에 2권 중간에서 읽다 관둔터라 그 책의 응용편 격으로 보이는 이 책을 읽을 생각은 애초에 추호도 없었다.-_-v 하지만 어느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서점에서 기다리다가 그 예쁜 표지 디자인과 말랑말랑한 제목, 아울러 어쨌건 '진중권'이라는 호기심 때문에 서점에서 스리슬쩍 읽는데, 오호라? 재미있더라. 그리하여 이 책은 결국, 내가 처음으로 완독한 진중권씨의 책이 되고 말았다.

책을 쓸때마다 일종의 형식실험(?)을 한다는 진중권씨는 이 책에서 또한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무지개 색깔만큼 놀이들을 7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그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물론 단순한 소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엄청 학술적이고 난해한 분석을 하는 것 또한 아니다. 스쳐지나가는 수필같기도 하고, 서사시를 쓴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한건 제목만큼이나 개방적이고 즐겁게, 우리와 '함께' 이야기한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미학 오디세이'에서도 그랬지만, 미학관련 서적을 통해 보여지는 진중권씨의 모습은 익히 '사회적으로'혹은 '정치적으로' 알려진 그 '까칠한' 진중권씨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이처럼 놀이를 소개하고, 이에 대해 설명하며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근대의 화두는 오로지 '이성'이었고 '합리성'이었다. 상상력이나 환타지, 몽상같은 것은 그야말로 어린아이의 장난일 뿐이었으며,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시간낭비였을 따름이다. 이런 사고는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요즘도 아이들의 유희와 규칙없는 놀이는 그저 시간낭비, 혹은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 정도로 종종 언급되곤 한다. 하지만 오늘 우리주위를 둘러보자. 시간낭비로만 보였던 상상력은 하나, 둘 현실이 되기 시작했고 장난같은 발상들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시작했다.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특성을 보이는 상상력은 종종 일원적이고 배타성인 특성을 드러내는 이성을 극복한다. 게다가 '노동해방'이란 노동이 유희가 되는 사회임을 생각해 본다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상상력이 중요함을 재삼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상상력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사실, 오늘날 우리가 상상력을 '갖는다'라는 것은 따지고보면 '되찾는'것일 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어린시절 했던 수많은 놀이들과 몽상들 속에 이미 화려하게 빛났었기 때문이다. 정해진 사고, 정해진 틀, 그에 따른 정해진 호기심과 정해진 놀라움을 벗어나, 상상력을 통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은 결국 어린시절의 눈을 되찾는 것 아닐까? 그래서 저자는 마지막에 이야기한다. "창조적 인간이 되고 싶은가? 그럼 성숙의 지혜를 가지고 어린 시절의 천진함으로 돌아가라. 500년 전에 이미 기술적 상상력을 갖고 있었던 다빈치. 그는 호기심에 한계가 없고 상상력에 구속이 없는 ‘영원한 소년’이었다"라고.

사실 거창한 의미를 찾을 필요없이, 그저 즐기기 위해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책은 쉽고 굉장히 재미있다. 개인적으로도 인문학 서적을 '한달음에'읽은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아마 처음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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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 유학과 서학의 창조적 종합자 e시대의 절대사상 5
금장태 지음 / 살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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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살림출판사의 'e시대의 절대사상'시리즈를 보면,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두 시리즈의 취지는 비슷하지만, 재야(?)학자들이 경쾌하고 개방적으로 써내려간 '리라이팅'시리즈에 비해, '절대사상'시리즈는 강단학자(?)들의 성실한 설명이 돋보이는 편인데, 두 시리즈 간의 같은 취지속의 수많은 '다름'들은 독자에게 뜻하지 않는 즐거움을 준다. 특히나 이 책의 경우, 이전에 읽었던 고미숙씨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 읽는 내내 생각나서, 비교를 안할래야 안할수가 없었다.^^

책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져 있는데 먼저 1부에서는 정약용의 사상과 생애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뒤 2부에서는 정약용의 주요 저작들 중 읽어볼만한 부분들을 저자인 금장태 교수가 추려서 수록하고 있다. 2부에 수록된 글들은 주로 1부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관련된 글들이 대다수이기에 옛 글임에도 불구하고 쉬이 읽힌다.

따지고보면 박지원에 비해 정약용은 '모범생'이었다. 비록 그는 젊은 시절, 당시로써는 금단의 학문이었던 서학을 공부한 경력이 있는 터라 그로인해 주변으로부터 수없이 모함을 받고 실제로 말년의 삶은 귀향지에서 보내긴 했지만, 아울러 실제 정조에게 벼슬에 물러나고자 하는 의사를 수없이 표명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어쨌건 기본적으로 벼슬자리 언저리에 계속 머물렀던 '주류적'인 인사였고, 다소 유쾌하고 여유가 있었던 박지원에 비해, 정확하고 엄격하며 성실성을 그 장점으로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디오니소스와 프로메테우스? 박지원과 정약용의 인간형을 '거칠게' 비유하자면 이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듯 싶기도.

아울러, 그가 자식들에게 쓴 편지 등을 보면, 그는 자신이 시간이 지나 죽어'잊혀지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 했던것 같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지식들이 후세에 이어지는 것에 대해 가히 '편집증적'으로 집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누군가가 다룬다면 꽤나 흥미있는 주제가 될 듯 싶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 점이, 어쩌면 개혁적이면서도 또한 시종일관 '주류지향적'??이었던 그의 삶을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의 학문적 방향(?)-학문의 표준은 어쨌건 경전 그 자체에서 논해야 한다는-은 다소 꽉 막혀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그런식의 학문 방향이 자칫 교조적이고 보수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어보이기도 했지만,(이런 측면에서 개인적으로는 그의 '모범생'적 인상이 더욱 강해지기도 했고) 이러한 발상은 당시 사정에 비추어본다면 온갖 설들로만 어지러워져 난삽해져가고만 있는 조선의 사상적 논란들을 교통정리 할 수 있는 유일한 실현 가능한 해결책이었기에 어느정도의 진보성을 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건 결국, 모두들 알다시피 그의 치열한 애민사상과 학문적 노력들은 오늘날 그를 '영원하게'만들었다. 그는 하늘에서나마 만족하고 있을까? 하지만, '민'을 언제나 그 중심에 두었던 그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구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것을.

책은 정약용에 대한 간단한 소개정도에 주력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의'(?) 사상가라고 하지만 아는바가 거의 없는 나의 무식함 때문이었다. 허기사, '근대'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그 소중했던 우리의 과거들을 얼마나 많이 '밀어버렸'던가. 근대화의 수많은 폐단들이 새삼스럽지만도 않은 오늘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발상의 전환을 위해서라도 정약용은 한번쯤 읽혀질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단절되어버린 조선의 철학적 전통은 '이제부터' 만들어나아가야하는 것이기에.

ps.여담이지만, 정약용이 서학을 공부했던 죄로 주변으로부터 모함을 당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단지 사회주의, 혹은 맑스를 공부했다는 이유만으로 '빨갱이'라는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는-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런 류의 비난을 하는 사람 대부분은 '사회주의'가 뭔지도 모른다-오늘의 우리사회가 떠오르는건 나뿐인건가? 우리사회에서 오늘날까지도 불온시되고 있는 어느 서양의 현인은 '역사는 되풀이된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라고 했다지만, 되풀이되는 역사마저 희극으로 봐줄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인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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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하룻밤의 지식여행 19
제프 콜린스 지음, 이수명 옮김 / 김영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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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상의 난해함도 그렇지만,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저서들이 대부분 오역으로 뒤범벅 되어있다는 점에서 꽤나 자자한 명성을 얻고 있는 데리다는, 그럼에도 철학, 사회학, 정치학, 문학등등등 적지않은 분야의 수많은 서적들이 그의 사상을 독자들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라 전제한 채 서술해나가고 있기에 평범한 독자들에게 있어선 또한 난감하기 이를데 없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런 와중에 제대로 읽자니 부담스럽고 지나치자니 호기심을 참을수 없기도(?)해서 '하룻밤의 지식여행'시리즈에 나와있는 데리다를 읽게 되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생각보다 괜찮았다.

우선 김영사의 '하룻밤의 지식여행'시리즈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본다면, 이 시리즈는 영국 아이콘 북스에서 발행된 말랑말랑한 만화(?)형식의 철학/사상 입문서인데,(사실 이 책의 경우 만화형식이라고 하기에는 같은 시리즈의 다른 책들에 비해 텍스트가 지나치게 많은 감이 없지 않았다. 텍스트만 뽑아도 문고본 한권 분량은 거뜬히 될 듯) 실험적인 일러스트레이션과 갖가지 시각적 효과를 이용하여 간단 명확하게 인물의 사상이나 어떠한 학문 분과를 전달하고 있는 듯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전에 이 시리즈 중 다섯번째인'철학'과 여섯번째인 '사회학'을 서점에서 친구기다리면서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해치운적이 있는데, 그 책들 또한 나쁘지 않았다는점에서 일단 어느정도 신뢰할만한 시리즈라는 생각은 든다.(성급한 일반화의 오류?ㅋ 아울러 여담이다만 이런 책이 출판될 수 있는 영국 출판 시장이 조금은 부럽기도 하다.)

책은 데리다가 케임브리지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을 때 벌어진 흥미로운 해프닝을 시작으로 그의 사상 및 개념들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정도의 입문서 한권 읽고 데리다 철학이 어떻네저떻네 하는 것이 얼마나 웃긴 일인지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만, 그래도 무리해서(?) 그의 주된 작업이었던 해체에 대해 논하자면 책 서두에 소개된 수많은 설명들 중 하나만큼 진실에 근접하게 설명된 것이 없어보인다. '당신이 해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어떤 것'.

데리다의 해체작업은 솔직히 말하자면 '말장난'이었을런지도 모른다.(때문에 그의 명예박사수여에 대한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들의 반응 또한 이해못할바도 아니다.) 실제 데리다 자신도 그의 작업을 해체'놀이'라고 한다.(물론 개인적으론 뭐 이런 놀이가 다 있냐 싶긴하다-_-;;;) 아울러 책의 말미에 언급된대로, 정의를 하는 순간 미끄러지는 이 해체라는 개념이 윤리적, 실천적 함의를 갖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비해체적인 가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모순 또한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인 듯 싶다. 하지만, 모든 분류의 사이사이에 있는 '결정불가능한' 수많은 항들의 다발들을 이야기하여(사실 그것들마저도 곧 해체가 가능하다) 현대철학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던 그의 작업은 충분히 매혹적이었고 실제 상당한 의의를 지녔던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세간의 말마따나 설령 '해체는 죽었'다 하더라도 해체 그 자체는 좀더 오래 존속하게 될 것 같다. 그가 열어젖힌 또다른 사유의 영역은-우리도 모르는 사이-이미 우리 모두의 사유의 영역에 들어왔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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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심리학 하룻밤의 지식여행 4
딜런 에반스 지음, 이충호 옮김, 오스카 저레이트 그림 / 김영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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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화심리학'이 엄밀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면서도 웬지 끌렸었지만, 학창시절 생물과목은 언제나 잼병이었고 덕분에 이쪽에 대한 공포심은 가히 병적이었던지라 그것과의 만남(?)을 차일피일 미뤄오던 차, 김영사의 '하룻밤의 지식여행'시리즈 4번째 책으로 진화심리학이 출간되어 있길래 별 생각없이 구입했다. 여담이지만, 김영사의 '하룻밤의 지식여행'시리즈 중 이전에 읽은 바 있던 '데리다'에 비해서는 확실히 '그림'이 많아서 읽기 편했다.(학교가는 지하철 안에서 오가며 다 읽을 정도였으니)

사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의도하건 안하건 심리학적 혹은 진화론적 견지에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을 종종 봐왔고, 어찌보면 그만큼 진화심리학이 단순히 학계에서 뿐만 아닌, 사회 저변에 각광받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책을 읽은 결과 그만큼이나 '진화생물학'에 대한 오해도 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오해에 있어서는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_-v)

진화생물학과 인지심리학이 결합된 학문인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유전자는 행동을 직접 일으키지는 않지만,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를 속에서 마음의 '모듈'을 만드는데 기여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간의 마음은 수많은 모듈을 지니게 되며 결국 이러한 수많은 모듈을 탐구하는 것이 진화심리학이다.(맞나요?^^) 문제는 이것이 모듈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모듈의 파생효과에 의한 것이냐는 건데, 책은 이에 대한 설명도 간략하면서 명확하게 잘 해내고 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도 책을 읽으면서 진화심리학의 몇몇 부분은 다소 갖다 붙힌다는 느낌이 들었고 어떤 부분은 다분히 의제적이라는 생각도 종종 들곤 했지만, 인간의 마음을 '진화'와 '적응'이라는 색다르지만 합리적인 틀 속에서 살펴본다는 점에서 인간이라는 '동물'은 기본적으로 어떤 동물인가를 파악해 나가는데 크나큰 역할이 기대된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문제는 진화심리학의 '아픈 과거'이다. 스펜서류(類)의 사회적 다윈주의는 '적자생존'을 내세우며 가혹한 자유방임주의에 기여하기도 했으며, 나아가 나치시대 대학살에 일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책은 사람들이 진화심리학에 이러한 딱지를 갖다 붙히는 것은-역사적인 이유로-이해는 가긴 하지만 옳지 못한 지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사실 저러한 유전자 결정론은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며 그 보편적인 마음이 어떻게 환경적 요인에 의해 달리 표출되느냐를 탐구하는 진화심리학과는 출발부터 다른 것이 사실이다. 진화심리학은 그 자체로 어떤 정치적 의미를 담고있는 학문이 아니며, 문제는 그 학문을 탐구하는 인간이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결국 이러한 마음모듈을 지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는 연구자를 비롯한 인간들에게 맡겨진 문제로 보인다.

아무튼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서건 유지하기 위해서건 '우리'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야 함은 자명하고, 그러한 질문에 대해 철학이나 사회학적 접근만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진화심리학은 인문학의 그러한 부족함을 채워줄 구세주같은(?)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때문에 앞으로도 수많은 발전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그리고 이루어 질 학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튼 읽어보시라. 무엇보다 책에서 소개된 진화심리학의 모듈들은 '재미있다.' 실제 진화심리학이 갖는 그 '재미'의 지나침은 종종 진화심리학 비판자들의 먹잇감(?)이 된다고 한다ㅋ(여담이다만, 개인적으로는 역시나 남성과 여성 관련 모듈 부분에 특히 흥미가 갔는데, 뭐 나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ㅋ 하여간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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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토론의 법칙 원앤원북스 고전시리즈 - 원앤원클래식 1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최성욱 옮김 / 원앤원북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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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주저라 할만한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구경조차 해본적 없고, 그의 사상이라거나 생애에 대해서도 문외한인 나이지만, 이상하게 '쇼펜하우어'하면 뭔가 괴팍한 무엇인가가 느껴지곤 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의 꽁해보이는 인상, 헤겔에 대항(?)하여 같은 시간 강의를 편성했다가 와장창 깨진 전력, 아울러 그를 '염세주의자'로 축약하고야 마는 교과서의 못되먹은 관행(?) 때문이 아닐까 싶은 추측을 하곤했다. 그리고, 이 책은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쇼펜하우어의 그 괴팍한 인상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하는데 적잖은 기여를 했다고 볼수도 있겠다.^^

쇼펜하우어는 명확하게 정의한다. 토론은 '이기기'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본서에서는 토론에서 이기기 위한 38가지 방법들이 나오는데, 따지고 보면 참 틀리다고 할수는 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점잖지는 못한'방법들이 주를 이룬다. 토론학(?)의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할까나, 책에는 토론에 이기는 방법으로 상대의 주장을 과장해석해 비판하기, 화나게 만들기, 기정사실화하기, 두서없이 말하기, 뿐만아니라 심지어 마지막 38번째 방법으로 '인/신/공/격'까지 소개되는데 그가 소개한 방법들 자체도 그렇고, 그 방법에 대한 부연설명도 그렇고 꽤나 노골적이라 시종일관 실실쪼개면서 즐겁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럼 명색이 '고고해야할'철학자였던 그가 이렇게 어찌보면 '비윤리적(?)'이라 할만한 토론법칙들을 소개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애초 책을 읽으면서, '비윤리적인' 상대가 사용하는 이러한 '나쁜방법'들을 짚어내어 이를 무력화시키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책을 쓴게 아니었을까라고 지레 짐작했었지만,(책 뒤 날개에도 그런식으로 설명이 되어있다.)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한발 더 나가는 듯 싶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이 책을 저술한 목적을 넌지시(?)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서 저자는 아예 '토론 자체의 의의'에 대해 묻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토론을 하다보면 밀릴 때도 있고 몰아붙힐 때도 있다. 몰아붙힐 때는 제외하고 밀릴 때를 생각해보자. 그래서 당신의 입장이 바뀌었는가? 아닐 것이다. 아마 대부분은 '아, 내가 그 토론할때 왜 그 근거를 빼먹었지?','그런 예시는 생각해보면 말이 안되잖아? 근데 왜 내가 그걸 지적하지 않았지?'이런 생각을 하며 자책(?)하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혹여 토론을 통해 입장이 바뀌었다면 그것은 애초 토론자가 자신의 입장에 대해 명확한 확신이 없었을 것이거나, 애초 관심없는 사안에 대해 토론했을 경우, 혹은 형식은 토론이었지만 실질적으론 학습이 이루어졌을 때(즉, 애초 토론자 자신이 기본적인 정보에 무지할 때, 혹은 애초부터 토론자 스스로 배우려는 자세로 토론에 임했을 때)뿐이리라.

쇼펜하우어는 이야기한다. 논리학과 토론술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토론술은 객관적 법칙을 찾기 위한, 논리적인 주장을 하고 받아들여 진리를 찾기 위한 분야가 아니라고. 따지고보면 사실 그렇다. 올바르고 논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자면 한정된 시간을 정해놓고 청중들 앞에서 토론을 하기보다는 오랜 시간을 갖고 서로 글로써, 행동으로써, 혹은 말로써 협동하여 의논해 나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일일 것이다. 결국 그는 토론은 고상한 '싸움'일 뿐이고, 어찌보면 인간이 '확실하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시간을 갖고 고민하는 것은 물리적으로(그리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필요악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단순히 토론의 승패여부만 가지고 진리성을 판가름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토론술은 논리학이 아닌 토론술 그 자체-즉, 토론에서 '이기는 방법'을 논하는-로 다루어져야 함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종일관 즐겁고, 가볍게 읽었지만 그리 가벼운 결론이 나진 않았다. 과연 토론은 우리에게 그 자체로 선한 것인가 아니면 필요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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