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자본주의 - 자본은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는가
에바 일루즈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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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과 감정은 과연 양립 가능한 것일까. 감정이나 가치가 계산 가능한 것일까. 로맨틱한 사랑과 계산이 공존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스, 이다. 이 책은 오늘날  자본이 사람의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얘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심리학은   이제  정신분석, 자기계발서, 국가(범죄와 관련하여), 상담산업, 제약산업, 인터넷 테크놀로지등 제도와 결탁해 다방면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책은  심리학이 어떻게 가족관계와 페미니즘에 끼어들어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프로이트가 정신고통을 어떻게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지적 야바위꾼같으니라구!)  

 이전에는 자본과 분리되는 개인적 영역이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자본은 조직 구성원의 시간과 공간마저도 식민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회사는 경제적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개인의 시간을 응축하고 사람들의 사적공간마저도 인정해주지 않으려 한다. 이런 예로는 개인 블로그를 검열한다거나 하는 현상이 대표적일 것이다. 인터넷 테크놀로지가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 시켰다. 한편, 시장은  노동자  자신의 감정관리까지도  작업능력, 즉 노동능력으로  치환하여  사적자아와  공적자아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오늘날  정신건강 및 심리학과 관련된 자기계발서가 넘쳐나는 현상을  저자는  ‘치료 내러티브의 유통’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자아를 건강한 자아와 병든 자아(=신경증적자아, 열등자아)의 층위로 나누게 된 내러티브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치료내러티브를 이해하기 힘들다면, 간단히 ‘오프라 윈프리 쇼’를 떠올리면 된다.  어떤 이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아를 병리로 정의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마저도 정신의학의 잠재적인 수요자로 정의되는 것이 치료 내러티브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심리학의 발전?경향에 힘입어  감정지능 혹은 감정능력이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의 경계에 있는 아비투스의 한 형태로 자리잡고 있는 현상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연애와 사랑에 있어서도 감정의 계량이 가능할까. 에바 일루즈는 그 가능성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로맨틱한 관계들 자체가  대량생산, 소비되는  상품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인터넷은 취향을 사물화하기 때문에  인터넷 데이트에서  ‘언어’와 ‘감정적 친화’는 로맨틱한 끌림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로맨틱한 끌림에 있어서는  여전히 육체적인 요소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앞서 말했듯이, 소비자본주의 자체가  사적자아와 공적자아를 불분명하게 하고, 로맨틱 감정과 소비경험을 불분명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집주인의 딸과 하녀 중에서 연애를 더 잘 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게 살아온 하녀이다. 집주인의 딸은 리비도에 대한 억제 때문에 신경증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연애를 잘하는 것은 문화자본을 갖고 있으면서  감정양식에 대해 잘 알고있는 집주인의 딸이라고 말한다. 그가 아비투스를 갖기 때문이다.

 심리학이 자아를 상품화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무엇보다도  정신의학담론은  멀쩡한 사람들까지도  환자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저자인 에바 일루즈는 푸코식으로 쾌락을 권력의 측면에서만 정의하지는 않는다.  사회영역이 다르면  각 영역마다  정의의 영역이 다르고, 그보다 정치언어와  문화언어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문화를 정치영역으로 끌어들여 설명하려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제도와 감정이 뒤범벅이 되어 그 경계가 불분명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은 아닐 것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정체를 알면서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 냉소이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상품 사용에 대한 특수한 감정구조이다) 하지만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일을 또 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건 강박충동이라고.  어쨌든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덧. 매슬로우나 마스터스&존슨 등 심리학, 여성학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들에 대해 알고 읽으면 편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사회학`의 관점에서 씌어진 것이고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만 대략  알아도 이해하기에 큰 무리가 없을 듯 싶다. 논증 과정은  비교적 자세하지만  일반독자에게  언술된  개념을  이해시켜가며 쓴  다정하거나  친절한 책은  절대 아니다. 
 덧덧.  이  모든 복잡한 논증과정이  벤담의  파놉티콘 모델과  공리주의로  어느정도 분명하게 설명된다는 사실. (2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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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4-25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주인의 딸과 하녀의 얘기가 흥미롭군요. 저 사두었는데 친절한 책은 아니라고 하셨으니, 각오하고 읽어볼게요. :)

Alicia 2010-04-25 22:06   좋아요 0 | URL

리뷰는 읽은 내용을 그대로 정리한 수준이구요, 책에서 의외로 건질만한 문장들은 조금 있어요. 그런데도 읽다보면 왜 이 책을 읽고 있는거지? 이런 생각이 드는 책이에요. 아는데서 만족하고 무엇도 바꿀 수 없다면 대체 내가 책을 읽는 이유가 뭐지? 요즘 부쩍 이런 생각 많이해요. 그래도 다락님께는 흥미로운 책일거에요!
 
백석의 맛 - 시에 담긴 음식, 음식에 담긴 마음
소래섭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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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에서 보듯 백석 시에는 '밝고, 거룩하고, 그윽하고, 깊고, 맑고, 무겁고, 높은'것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며 , 그가 찾고자 하는 전통이기도 하다.백석시는 결국 그 마음들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 마음들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를 풍요로 넘치게 하며 과거의 행복했던 시대를 가득 채웠던 그 마음들은 그의 시대에는 아우라로만 남아있다. 그것은 음식이나 맛을 통해 인식되는 순간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로만 포착될 수 있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백석이 유품 수집이나 추상적 이념의 발견을 통해 전통을 발명해내려 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전통의 존재 방식과 그것을 인식하는 방법을 깊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그는 맹목적 서구 추종으로부터도 충분히 거리를 둘 수 있었다.
-246-247쪽

물론 그 '마음'들을 찾기 위해 백석은 끊임없이 유랑해야 했다. 그의 유랑이 관광을 위한 여행이나 생존을 위한 이주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유랑을 과거의 행복했던 시대의 아우라를 보아버린 자의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그의 운명론을 허무의식이나 식민지 체험의 소산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의 후기 시에 보이는 운명론을 두고 역사적 유토피아를 믿지 못한데서 비롯된 허무의식이라는 지적이 많지만, 아우라는 유토피아에 대한 지향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의 체념은 속물적인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을 단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토피아와 현실의 낙차는 그가 유랑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동력이었다.
-246-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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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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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는 처음엔 그런 신학 논쟁에 별 관심이 없었으나 이내 예수가 하느님의 지위를 얻으면 자신의 지위도 함께 격상된다는 점을 간파했다. 교리의 통일을 통해 자신의 통치력을 한껏 강화할 수 있다는 점도. -24쪽

예수는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고 ,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내 삶의 태도와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회개'로 번역된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는 '길을 바꾸다, 되돌아서다'라는 뜻이기도 하다.-29쪽

세리는 대단한 세속적 야망이나 기득권을 구하기 위해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먹고 살기 위해 그 짓을 하는 사람이다. 만일 다른 품위 있는 일을 해서 비슷한 벌이를 할 수 있다면 세리 노릇을 지속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비난받아야 할 그들의 배후보다 더 심한 비난과 경멸을 받아야 했다. -47쪽

체제는 개혁은 수용할 수 있어도 변혁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개선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뒤집어 다시 세우려 한다. 예수는 사회에서 배제되고 나아가 제거될 위험 속으로 발을 디딘다. -57쪽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나 품위있게 살고싶은 욕구는 바리사이인들보다 적지 않았지만 먹고 사느라고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바리사이인들 앞에서 죄의식과 열등감에 젖어야 했다. 바리사이 인들은 인민들의 그런 죄의식과 열등감을 기반으로 여느 인민들에게서 자신을 '분리'하여 품위를 유지했다. 예수는 그 공공연한, 그러나 아직 단 한번도 문제시되지 않은 억압의 체제에 분노한다. -59쪽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두가지 위험을 수반한다. 하나는 외형적 성장과 운동의 정체성 훼손이 비례하는 경향이다. 또 하나는 운동의 외형적 성장은 기존의 사회체제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운동의 껍데기는 커졌지만, 알맹이는 사라져버린 비대한 운동조직이 사회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운동조직 스스로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61쪽

그들은 '변화를 위한 보다 현실적인 선택들'을 제시한다. 그런 선택들은 많은 사람들에게서 지지를 받는다. 그런 선택들은 대단한 변화를 일으키는 듯 하지만 실은 현실의 모순을 순화하고 인민들의 정당한 분노를 누그러트림으로써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 되곤 한다. -79쪽

예수의 치유이적이 그들과 다른 점은 그 이적을 행하는 자신을 감춘다는 점이다. '나'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는 단 한번도 '내가' 혹은 '내 능력으로' 병을 고쳤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예수는 언제나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병을 고쳤다, 라고 말한다. "딸아,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 평안히 가시오/ 그리고 당신의 병고로부터 건강하게 나으시오." 믿음이란 무엇인가?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상대에게 나를 연다는 뜻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하느님을 잘 믿으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하느님이 축복한다'고 말하는게 아니라 하느님은 이미 축복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그걸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바로 고통과 비참에 빠진 당신 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믿고 힘을 내세요. 하느님은 당신이 어느 누구에게도 함부로 누릴 이유가 없는 당당한 권리와 자존심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라십니다.'

-92쪽

중요한 건 이적 자체가 아니라 그 이적에 담긴 믿음과 소통이기 때문이다. 이적은 하느님이 실은 잘나고 힘센 사람들이 아니라 무시당하고 억압받는 내 편이며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건이다. 이적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97쪽

부모들은 제 아이가 부자가 되길 바라는 욕망을 '부자가 되어 불쌍한 사람을 도우라'는 식으로 우회하여 표현하곤 하는 것이다. 물론 당장의 적선이나 자선이 금세 굶어죽을 사람을 살리거나 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긴급한 조처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가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110쪽

종교개혁의 좀더 중요한 본질은 십자군 이후 봉건사회가 점차 무너지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왕과 귀족들을 제치고 서서히 서양 세계의 주인으로 나타난 도시 상인들, 즉 부르주아들이 왕과 귀족의 교회인 가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이해와 정체성에 맞는 교회를 세운 사건이었다. 말하자면 종교개혁은 자본주의 사회 탄생의 서막이다.
-159쪽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의 그런 소망조차 일축한다. '좋은 지배'를 꿈꾸지 마라. 그런 건 없다. 오로지 섬김만이 있다. 진정으로 인민을 위하고, 세상을 위하고 싶다면 섬겨라, 가장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에 함께하라.
-172쪽

믿음이란 어떤 대상에게 나를 완전히 여는 것이다. 하느님의 의지와 행동에 거리낌없이 참여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교회에 나가거나 기독교인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차원이 아니다. 교회나 기독교가 하느님을 믿는 한 방식일 순 있지만, 유일하거나 완전한 방식은 아니다. 하느님은 교회나 기독교의 성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온 세상에 관련하며 온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준비하는 존재다. -185쪽

먼저 분명히 분노해야 한다. 진정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용서할 줄도 모르며, 진정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 분노할 줄 모른다. 분노와 용서는 실은 하나다. -189쪽

마르크스 이래 사회주의자들이 기독교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 건 사실이지만, 그건 현실 속에서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지배체제의 앞잡이였거나 그 지배체제 자체였던 기독교를 대상으로 한 것이지 예수를 대상으로 한 건 아니다. (중략)
자본주의는 예수의 이웃사랑과 적대적인 사회체제이며, 그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셔려는 사회주의의 기본 정신이 예수의 이웃 사랑에 닿아있다는 건 분명하다. 예수의 이웃사랑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어떤 것' 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선량한 자본주의자'가 아니라 '특별한 사회주의자'인 것이다. -204쪽

깨어 기도한다는 건 그런 스승의 모습을 모조리 본다는 것, 스승으로 하여금 품위를 잃은 제 모습을 제자들에게 모조리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은 다만 잠들 수 밖에, 이 속 깊은 갈릴래아 청년들은 잠시 잠든 체 함으로써 스승에 대한 마지막 예의를 갖출 수밖에. -233쪽

우리는 공포와 번민을 낳는 '색의 세계'를 뛰어넘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에게 감탄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경지는 공포와 번민을 그대로 느끼면서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다. 약하고 흔들리는 인간이기에 공포와 번민은 당연하다. 그러나 또한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기에 그 공포와 번민을 끝내 이겨 낼 수 있다. 우리는 가장 인간적일 때 신적일 수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신적일 수 있다. -235쪽

로마에 의해 탄압받고 있던 그들은 자신들의 그리스도가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된 사람이라는 사실이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정치적 반역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며 로마총독도 예수를 죽이고 싶어 죽인 게 아니라 유다 지배세력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음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종교과 로마와 적대적이지 않음을 애써 주장한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분명 사실과 다르지만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되진 않았다. 그들은 이미 역사 속에서 실제로 살아 숨쉰 예수보다는 '죽음으로 내 죄를 대속한 그리스도'예수, 즉 신학과 교리 속에 갇힌 예수를 선택한 상태였기 때문이다.-249쪽

예수가 영성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가 비폭력주의자인데 왜 사형당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사형당하는 비폭력주의자'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서 예수의 모습에서 제 마음에 드는 한 부분만 똑 떼어내어 예수는 사랑과 용서의 결정체입네, 예수는 영성가입네, 예수는 평화주입네 하는 것은 예수를 욕보이는 일이다. 사형은 커녕 1년내내 뺨 한번 맞을 일 없이 안락하게 살아가면서 예수 흉내로 세상의 존경과 명예를 구가하는 건 예수를 팔아먹는 것이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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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희망제작소 프로젝트 우리시대 희망찾기 7
김두식 지음 / 창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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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 불멸의 신성가족. 김두식 교수의 책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되어있고 경험과 사례가 풍부하고, 유머와 위트가 있으며 일반 시민들의 앎의 의지, 투쟁의지를 독려한다는 것. 
  
희망제작소의 ‘우리 시대 사법찾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사법 분야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를 시도한 이 책은 법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도그마틱은 찾아 볼 수 없고, 사례와 경험에 대한 해석이 주를 이루며 저자의 주관성이 상당히 많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법률사무소 김앤장이 대형로펌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있었다면 이 책은 법원 조직에 대한 해부와 고발이다. 책의 내용은 크게 법원 내부 시스템이나 가치체계의 문제, 전관 변호사를 위시한 변호사업계와 브로커의 문제, 법조계를 둘러싼 결혼시장 및 언론과 검찰간의 유착문제, 법률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이겨내야 할 역정 정도로 나눠 볼 수 있을 것이다.   
 
 법원 조직 내부의 문제에 대해 김두식 교수는 의사소통의 부재, 법관의 의사소통 능력의 부재를 가장 큰 문제점으로 들고 있었다. 일테면 원․피고, 피고인, 심지어 변호인에게까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지 말라는 식으로 호통을 치기도 하고, 아예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귀를 닫아버리는 등의 태도를 일컫는다. '국민이 법원에 바라는 건 자신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  저자는 일관되게 이 점을  강조한다,  법관들은 이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자는 법관들의 소통능력이 떨어지는 원인으로 토론문화의 부재를 들었다. 여기에 약간 첨언하자면 현대판 과거제인 사법시험제도가 독서와 토론, 기타 사회경험을 통한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법률가를 뽑는 것이 아니라 성적이 좋은 순서대로 법관을 뽑는 관리선발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원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과거제에 의해 선발된 관료로 구성된 조직에 ‘관존민비’의식은  팽배해있을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민사 재판실무에서  신모델을 도입하면서 개선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법원의 시스템은 구두변론 아닌 서면심리 위주로 돌아가고 있으며, 신모델은 사건심리를 1차변론기일에 집중(이 내용이 정확한지는 다시 책을 찾아봐야겠다)함으로써 재판의 신속과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만 기여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구두변론 중심의 시스템으로 바뀐 것이 아니다.  
 
또한 법원 내부에서 문제 되는 것은 도제식 교육방식이다. 선배 판사가 후배판사에게 사건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방식은 사건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법원리나 재판의 기술을 전수하는 차원을 넘어 일상에서의 상하관계로 이어지며(의전이나 전관예우),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의 권위주의적 태도까지 대물림된다는 것이 김두식 교수의 지적이었다. 
  
  
 
법원, 검찰에 있던 사람들이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개업 후 1년동안 벌어들이는 돈이 천문학적 수치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다. 그러나 이들 밑에서 일하는 사무실 직원들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성과급을 받지 못하고 전관변호사로부터의 부당 해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 노동착취구조는 법조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법조비리를 해결하고 변호사 수임료를 낮추며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로스쿨제도를 도입했지만 합격생수를 기존 사시 인원으로 맞춤으로써 오히려 법조계로의 진입장벽만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싼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서민계층, 머리는 좋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운 고학생들은 이제 법조인의 꿈마저 꿀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집안 안좋고 머리좋은 사람은 밀어주어야 한다는 한국 사회의 기현상을 실력주의,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로 소개하고 있는데 나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나 자신이 특별하고 선택된 사람이라고 믿는 머리 좋은 고시생들의 선민의식이 별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한다. 실패했어도 법조계 신화의 아우라를 먹고 살면서 내가 법대를 나오고 고시공부를 했다는 것에 이상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은 반성해볼 일이다. )
 
 
김두식 교수는 청탁과 관련해 ‘거절할 수 없는 돈’이란 돈을 받고 싶은 욕망이 만들어 낸 일종의 중화, 합리화 기술이라고 말했다. 청탁을 거절할 수 없는 관계의 바탕에는 한국사회의 학벌, 족벌 시스템의 문제가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욕망을 줄이는 삶을 통해 나는 진정성이 깃든 관계가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배웠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폭이 동문수학한 법조계 사람들로 극히 제한된 집단 안에서 ‘관계 맺지 않고 살아가기’에 대해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점점 어떤 답을 얻기는 어려워진다. 외길을 걷는다는 것은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일이며, 자유롭지만 지독하게 외롭고 동시에 무한책임이 따르는 일일 것이기 때문에. 그 고독은 돈과 명예를 선택한 당연한 결과로서 책임져야 할 문제와는 구별되며, 어떤 천형天刑과도 같이 느껴진다. 
  
이것에 대해서는 김두식 교수의 책속 말을 빌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모방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며 대열을 무너뜨리기 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존재입니다.   p97  
   

얼마 전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찾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가면  되는  거라고.  나는 어둠속에서 혼자 남는 것에 대해 거의 공포에 가까울 정도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김두식 교수 같은 분들을 보면서 필요하다면 갈 수도 있겠다란 생각에 이르렀다. 
 
 
개인적으로는 귀납적인 접근 방법을 정리하는 가닥으로 법원조직내부의 문제, 변호사업계의 문제, 기타 문제로 나누었더라면 하는 편집상의 아쉬움이 있고, 계급론에 여성은 빠져있는 것처럼 이 책에서도 여성법조인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다는 아쉬운 점이 있다. (이건 페미니즘으로 다루어져야 하는 건가. 여성문제가 언제나 사회현상과 분리되어 따로 놀면서 논외로 다루어지는 현실에 대해서는 좀 화가 나기도 한다.) 
 
배에서는 내렸지만 항구에서는 떠나지 않은 법률가로서의 김두식. 이것이 저자나 그의 작업의 가치를 폄하하는 말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경계인으로서 자신의 고발의 임무를 다했다. 그를 보면, 나는 자꾸만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길이 되는 것이라는 루쉰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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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6-2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어요...참 여러가지를 알게 해주는 책입니다. '법대로'가자는 세상에서 법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조계를 보는 것은 참 씁쓸하네요...

Alicia 2009-06-22 18:51   좋아요 0 | URL

머큐리님/
지금 읽고 계시는군요... 나날이 시민들의 의식은 성숙해가고 있어도 법치주의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법원, 검찰, 변호사업계가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있어 법원조직부터 먼저 바뀌지 않으면 변호사업계를 단속한다고 해도 법조비리는 줄어들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법관들 머릿속엔 학벌의식이 뿌리깊게 박혀있고 이 의식구조를 흔들어놓을만한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쉽게 바뀌지 않을거라고 생각해요.
 
내가 훔친 여름 김승옥 소설전집 3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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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떤 쾌락을 추구하는 행위라기 보다는 병에걸린 사람끼리 서로를 치료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것 같았다. 구경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음탕한 기색은 전연 없고 자못 엄숙하고 심각했다. 동학란을 일으키기 직전, 사랑방에서 녹두장군의 열변을 듣고 있는 머슴들의 표정이 아마 이러했으리라... 다시 말해서 목숨을 걸어놓고 자기의 인생을 구원해보려는 자들이 가질 수 있는 표정들이었다.
-390쪽

서양의 고전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형의 얼굴엔 지성이 만들어준 표정이 있습니다. 개가 개를 알아보듯이 저는 얘기가 통할 수 있는 사람과 그럴수 없는 사람을 가릴줄압니다...
-395쪽

그러나 도인으로서는 , 솔직히 말해서 그의 얘기가 단순한 신세타령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대중잡지 따위에도 그보다는 훨씬 고생한 사람들의 얘기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보다 더 고생한 사람들이 있다고해서 그가 고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신세가 다른 사람의 관심속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자리잡을 수 있는가, 쯤은 대강이라도 알고 있어야 예의가 아닐까?
-398쪽

미국은, 아니 외국이면 어디라도 좋습니다만, 생각하기조차 싫은 자기의 어두운 과거를-그런 과거가 있는 사람은 말입니다-더이상 부채처럼 지고 살지 않아도 되는 곳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말하자면 외국으로 가서 산다는 것은 가톨릭신자의 고해성사와 같은 것이죠. -404쪽

물질적인 면에서 그런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자기의 능력을 사용했다고 해서 나무랄 수 있을까요? 사랑은 어쩌면 '사기詐欺'와 사촌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이 다른 점은 하나는 자기도 돕고 사랑하는 상대도 돕는 결과를 수반하게 되는데 다른 하나는 자기도 파멸하고 상대방도 골탕을 먹는다는 결과를 수반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406쪽

진정한 혁명에서는 그것을 지배했던 이성과 지성의 빛이 무엇보다도 두드러져 보이듯이 인간을 무더기로 도살했던 과거 역사적인 사람들에게 공통되게 드러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정열이라고 도인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는 정열이란 말처럼 서먹서먹하고, 아니 두렵기까지 한 말은 없었다.
그는 자기 자신속에서 정열을 제거해버리려고 노력해왔으며, 모든 사람들이 정열을 내세우지 말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화학기사의 입에서 '당신은 정열이 없어보인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도인은 이상스럽게도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정열이 없어 보이는 사람은 무섭지 않다'는 얘기에선 패배감조차 느꼈다...중략
아니다. 이제야 도인은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열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과도한 정열이, 또는 정열로 위장한 추잡한 욕망이 빚어내는 인간에 대한 과오를 경계한 나머지 이제 그에게는 이성과 지성에서 나온 판단을 밀고 나갈 힘이 되어줄 최소한의 정열조차 닳아 없어져버린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416-4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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