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희망제작소 프로젝트 우리시대 희망찾기 7
김두식 지음 / 창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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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 불멸의 신성가족. 김두식 교수의 책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되어있고 경험과 사례가 풍부하고, 유머와 위트가 있으며 일반 시민들의 앎의 의지, 투쟁의지를 독려한다는 것. 
  
희망제작소의 ‘우리 시대 사법찾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사법 분야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를 시도한 이 책은 법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도그마틱은 찾아 볼 수 없고, 사례와 경험에 대한 해석이 주를 이루며 저자의 주관성이 상당히 많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법률사무소 김앤장이 대형로펌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있었다면 이 책은 법원 조직에 대한 해부와 고발이다. 책의 내용은 크게 법원 내부 시스템이나 가치체계의 문제, 전관 변호사를 위시한 변호사업계와 브로커의 문제, 법조계를 둘러싼 결혼시장 및 언론과 검찰간의 유착문제, 법률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이겨내야 할 역정 정도로 나눠 볼 수 있을 것이다.   
 
 법원 조직 내부의 문제에 대해 김두식 교수는 의사소통의 부재, 법관의 의사소통 능력의 부재를 가장 큰 문제점으로 들고 있었다. 일테면 원․피고, 피고인, 심지어 변호인에게까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지 말라는 식으로 호통을 치기도 하고, 아예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귀를 닫아버리는 등의 태도를 일컫는다. '국민이 법원에 바라는 건 자신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  저자는 일관되게 이 점을  강조한다,  법관들은 이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자는 법관들의 소통능력이 떨어지는 원인으로 토론문화의 부재를 들었다. 여기에 약간 첨언하자면 현대판 과거제인 사법시험제도가 독서와 토론, 기타 사회경험을 통한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법률가를 뽑는 것이 아니라 성적이 좋은 순서대로 법관을 뽑는 관리선발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원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과거제에 의해 선발된 관료로 구성된 조직에 ‘관존민비’의식은  팽배해있을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민사 재판실무에서  신모델을 도입하면서 개선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법원의 시스템은 구두변론 아닌 서면심리 위주로 돌아가고 있으며, 신모델은 사건심리를 1차변론기일에 집중(이 내용이 정확한지는 다시 책을 찾아봐야겠다)함으로써 재판의 신속과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만 기여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구두변론 중심의 시스템으로 바뀐 것이 아니다.  
 
또한 법원 내부에서 문제 되는 것은 도제식 교육방식이다. 선배 판사가 후배판사에게 사건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방식은 사건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법원리나 재판의 기술을 전수하는 차원을 넘어 일상에서의 상하관계로 이어지며(의전이나 전관예우),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의 권위주의적 태도까지 대물림된다는 것이 김두식 교수의 지적이었다. 
  
  
 
법원, 검찰에 있던 사람들이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개업 후 1년동안 벌어들이는 돈이 천문학적 수치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다. 그러나 이들 밑에서 일하는 사무실 직원들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면서도 성과급을 받지 못하고 전관변호사로부터의 부당 해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 노동착취구조는 법조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법조비리를 해결하고 변호사 수임료를 낮추며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목으로 로스쿨제도를 도입했지만 합격생수를 기존 사시 인원으로 맞춤으로써 오히려 법조계로의 진입장벽만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싼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서민계층, 머리는 좋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운 고학생들은 이제 법조인의 꿈마저 꿀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집안 안좋고 머리좋은 사람은 밀어주어야 한다는 한국 사회의 기현상을 실력주의,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로 소개하고 있는데 나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나 자신이 특별하고 선택된 사람이라고 믿는 머리 좋은 고시생들의 선민의식이 별반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한다. 실패했어도 법조계 신화의 아우라를 먹고 살면서 내가 법대를 나오고 고시공부를 했다는 것에 이상한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은 반성해볼 일이다. )
 
 
김두식 교수는 청탁과 관련해 ‘거절할 수 없는 돈’이란 돈을 받고 싶은 욕망이 만들어 낸 일종의 중화, 합리화 기술이라고 말했다. 청탁을 거절할 수 없는 관계의 바탕에는 한국사회의 학벌, 족벌 시스템의 문제가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욕망을 줄이는 삶을 통해 나는 진정성이 깃든 관계가 사람의 인생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배웠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폭이 동문수학한 법조계 사람들로 극히 제한된 집단 안에서 ‘관계 맺지 않고 살아가기’에 대해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점점 어떤 답을 얻기는 어려워진다. 외길을 걷는다는 것은 ‘관계’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일이며, 자유롭지만 지독하게 외롭고 동시에 무한책임이 따르는 일일 것이기 때문에. 그 고독은 돈과 명예를 선택한 당연한 결과로서 책임져야 할 문제와는 구별되며, 어떤 천형天刑과도 같이 느껴진다. 
  
이것에 대해서는 김두식 교수의 책속 말을 빌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모방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며 대열을 무너뜨리기 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존재입니다.   p97  
   

얼마 전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찾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가면  되는  거라고.  나는 어둠속에서 혼자 남는 것에 대해 거의 공포에 가까울 정도의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김두식 교수 같은 분들을 보면서 필요하다면 갈 수도 있겠다란 생각에 이르렀다. 
 
 
개인적으로는 귀납적인 접근 방법을 정리하는 가닥으로 법원조직내부의 문제, 변호사업계의 문제, 기타 문제로 나누었더라면 하는 편집상의 아쉬움이 있고, 계급론에 여성은 빠져있는 것처럼 이 책에서도 여성법조인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다는 아쉬운 점이 있다. (이건 페미니즘으로 다루어져야 하는 건가. 여성문제가 언제나 사회현상과 분리되어 따로 놀면서 논외로 다루어지는 현실에 대해서는 좀 화가 나기도 한다.) 
 
배에서는 내렸지만 항구에서는 떠나지 않은 법률가로서의 김두식. 이것이 저자나 그의 작업의 가치를 폄하하는 말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는 이 책을 통해 경계인으로서 자신의 고발의 임무를 다했다. 그를 보면, 나는 자꾸만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길이 되는 것이라는 루쉰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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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6-2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어요...참 여러가지를 알게 해주는 책입니다. '법대로'가자는 세상에서 법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조계를 보는 것은 참 씁쓸하네요...

Alicia 2009-06-22 18:51   좋아요 0 | URL

머큐리님/
지금 읽고 계시는군요... 나날이 시민들의 의식은 성숙해가고 있어도 법치주의가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은 법원, 검찰, 변호사업계가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있어 법원조직부터 먼저 바뀌지 않으면 변호사업계를 단속한다고 해도 법조비리는 줄어들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법관들 머릿속엔 학벌의식이 뿌리깊게 박혀있고 이 의식구조를 흔들어놓을만한 제도개혁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쉽게 바뀌지 않을거라고 생각해요.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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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기행을 두 번 읽는다. 이 책은 서경식이 런던, 광주, 카셀, 브뤼셀, 잘츠부르크를 여행하며 프리모레비, 장 아메리, 펠릭스 누스바움, 파울 첼란, 조양규, 문승근 등 한 시대를 힘겹게 걸었던 디아스포라들에 대해 적어나간 기행문 형식의 글이다. 서경식은 태평양전쟁 당시 중국과 일본의 관계를 웅덩이에 비유한 루쉰의 이 글로 책의 첫머리를 열고 있었다.


장자는 "말라가는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 속의 붕어는 침으로 서로의 몸을 적신다"고 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덧붙였다. "흐르는 물과 넓은 호수에서 서로 잊어버리는게 낫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서로를 잊을수가 없다.


그리고 디아스포라인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무국적자인 재일조선인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서술한다. -자신을 설명하는 행위는 인위적이다. 대개 자신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말은 자기를 과대포장하는 허위의식이거나 구색좋은 자기변명처럼 들릴 때가 많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경식은 자신의 근원에 대해 설명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을 파괴와 살육이 일상화 된 시대, 이 세계에 절망한 사람들이 자살과 자폭으로 극단적으로 저항하는 시대, 그 저항조차도 금새 진부하게 만들어 버리는 시대로 정의한다. 이때 '국민'중심의 내셔널리즘은 정작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한편으로 죽지 못하게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실체이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언어와 혈통, 문화에 대한 보존의 욕구로 치환시켜 전쟁의 도구로 만드는 것이 내셔널리즘인 것이다.


재일조선인이 일본인이 되고싶어하는 마음, 유태인이 독일인이 되고싶어 하는 마음. 그것은 그들 자신이 주류가 아니라는 사실, 한 국가의 국민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중심적인 인간, 상승지향적인 인간이라고 비난하지는 말자. 그 소수자의 마음까지도 철저하게 이용하려는 것이 권력이고 다수자라고 서경식은 말한다.


소수자라는 자기정체성과 국민이라는 강요된 의식. 자기자신임에서 추방당한 자들, 디아스포라들은 이 극단적인 관념의 자기분열사이에서 자기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눈물로 쓰고 있었다. 서경식이 2002년 광주 비엔날레 전시회에 찾았던 경험을 술회하며 이 책에 소개한 작품들 중에 유난히 내 시선을 끌었던 것은 이란계 미국인 여성인 시린 네샤트의 비디오 설치작품인 <환희> 와 재일조선인 2세인 문승근의 무제, 펠릭스 누스바움의 <유대인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이었다.


시린 네샤트는 여성과 남성, 전근대와 근대, 이슬람과 서구세계의 강한 대조를 통해, 누스바움은 막다른 담벼락에 몰려 자신을 억압하는 대상을 향해 두려움에 떨며 자신의 정체성을 호소하는 듯한, 그러나 절망에 찬 시선으로 인간의 존엄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문승근은 자신의 저항과 고뇌를 수묵화처럼 표현한 점 속에 거리와 생활과 정갈한 웃음소리로 담았다. 그리고 그런 그가 나는 너무나 아팠다.


서경식은 프란츠 파농의 말에서 아직도 나는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왜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가, 는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자기자신임으로부터 추방당한 자들은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를 물을 수밖에 없다. 디아스포라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시대를 증언하기 위해 살았다. 죽음이 두려워서 죽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죽음을 유예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모국을 상실한 그들은 오로지 언어에 의존해 그들 자신을 시로 썼다. 오직 쓴다는 행위를 통해서만 그들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자기자신을 쓰는 그 언어마저도 모어가 아니라 강요된 모국어였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한다. 파울첼란이 그렇고 서경식이 그렇다.


이 책이 주관적이고 다소 감상적이라는 이유로 불편한 심경을 토로하며 거리두기를 통해 추방당한 자들의 시선을 외면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말하는 바가 진실인가를 의심하는 마음이라기보다 그것을 보고싶지 않은 마음 아닐까. 과연 그런 우리는 나치하의 독일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저항하기 위해서 내셔널리즘을 필요로 하는 상황. 이것이 무엇인지 알것만 같다. 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그간의 내 삶에 대해 자신을 모델로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주류일 수 없으면서 소수자는 아닌, 그 이분법적 갈래 안에서 내 자신을 써야만 했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또한 왜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지 알 것 같다.


고국과 모국에서 추방당한 이산자로서 그의 고뇌를 우리는 이해할 수는 없다. 그의 슬픔은 온전히 그의 것이다. 추방해 낸 사람들이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시선은 늘 불편하다. 그러나 그 시선을 통해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내셔널리즘을 극복할 것인지 그것또한 우리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문승근의 다른 작품 한점을 싣는다. <무제> 실크스크린, 1978 , 광주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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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 - 한 젊은 역사가의 사색 노트
이영남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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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때 몸을 담그고 있었던 독서실에서는 몇 가지 내규가 있었다. 그 중에 나를 감탄하게 하고 동시에 경악하게 만들었던 것은 출석부에 아침에 입실한 시각과 저녁에 퇴실할 때의 시각을 적어 다음 월요일에 조교가 공부시간을 평균내고 주당 평균 14시간이 되지 않으면 퇴실해야한다는 것이었다. 학생 개개인은 자본주의적 효율기계였고 매일 감시자에 의해 수치화되고 계량화되는 시스템의  부속물이었다. 이런 시스템에 대한 발상은 독서실의 면학 분위기 조성과 체제유지를 위한 강제성이라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내 시각에서보기에 굉장히 전근대적인 유물처럼 보였다. 나도, 개별자인 타인들도 권력관계의 하위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푸코는 이렇듯 일상적 권력관계에서 감시당하는 ‘개인’에 주목했다. 그 이전의 철학사가 칸트식의 이성과 합리만을 강조했다면 푸코는 시선을 돌려 이성과 합리가 우리의 인식세계에서 쫓아내버린 광기와 비합리성에 주목했다. 그 세계는 죄수와 빈민, 정신병자와 동성애자가 머무는 세계였다. 
 

저자는 푸코가 이런 소수자들의 고통으로 점철된 일상적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그 자신의 고통스런 실존적 생애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말한다. 주지하다시피 푸코는 동성애자였고 자신의 그런 성적취향 때문에 정신적 방황을 겪었다. 푸코는 타자들에게 동질감을 느꼈으며, 타자적 관점에서 이들의 삶을 기술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같지만, 마르크스는 이성의 관점에서 노동자들을 변혁의 주체로 보고 ‘생산성’의 측면에 주목한 데 반해, 푸코의 타자들은 ‘생산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에 차이가 있었다.

특히 그 자신이 직접 죄수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경험을 토대로 한, <감시와 처벌>은 매우 흥미롭다. 18세기 계몽주의 이전에는 잔혹한 형벌이 횡행했다. 행형은 응보형주의에 입각한 것이었으나 계몽주의 이후 범죄를 식민화하여 관리하는 목적형주의로 전화(轉化)했다는 것이다. 과거에 한국에서 재소자 수용소를 형무소라는 명칭에서 교도소로 바꾼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교정을 통해 인권이 개선되었는가가 아니라 개인을 제도권적 질서에 편입시키기 위해 사육하는 메커니즘 그 자체이다. 그리고 이런 일상적 권력체계는 감옥 뿐만 아니라 가족, 학교, 기업, 병원, 행정기관등에 널리 퍼져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권력에 대해 하나의 혁명이 아니라 타자들이 연대를 통해, 다양한 저항을 해야한다는 것이 푸코의 주장이었다.

저자는 푸코가 방대한 역사자료의 검토와 실증을 통해 일련의 사유를 펼쳐 보인 것에 대해 , 초월이 아닌 포월적인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현실적인 것을 내버려둔 채 새로운 것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껴안고 넘어서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뜻이다. 더불어, 저자는 한국의 역사학이 취약한 기록학, 계보학에 기초하여 고증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며, 푸코의 실증적 연구방법을 역사에도 적용해 볼 수 있을 거라고 덧붙이며 역사가의 역사적 상상력을 강조한다. 
 

앞부분의 절반이상이 푸코의 생애와 저작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후반부에 서술되어 있는 역사와 한국의 현대사에 논리를 적용해보기 위한 일종의 전제인 셈이지만, 처음에 이 책을 읽으면서 이것이 평전인지, 역사서인지 철학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요는, 분과학문의 관점에서 특정범위를 한정해서 역사나 사회상황을 한정해서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접학문을 포괄하는 범위에서 거시적이고 불연속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지만 그것이 만만치 않은 작업임은 분명해 보인다.

푸코가 <말과사물><감시와 처벌><광기의역사><성의역사>등의 저작을 낸지 30-40년이 지난 뒤에도 지금까지 학자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에게 던져준 담론이 오늘날의 구조적 모순을 설명하는데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푸코에게서 배운 것은 결코 진리가 하나의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것들로 관념화될 수 없다는 것과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기에 타인에게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 그리고 우리 사회의 저변에는 지금도 제도적 규율과 감시에 맞서 저항하는 개인들이 많다는 것, 그들과의 연대를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게 있어, 푸코의 저작들을 소화해내는 일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이 책을 발판 삼아 도전해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긴다.




2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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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정원 -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김용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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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나는  늘 고민하지만  그 상태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내 자신을  가만히  손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떤 두가지 선택의 갈림길에서  늘  무언가를 선택하지 못하고  두 개의 가치만  저울질 하다가  상황이  나를  끌고 가는 쪽으로  내 인생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무력감에서 허우적대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우유부단함이라  칭하지만  그건  내가  우유부단하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추상적인  것들을  몇가지  구별하기  쉬운 개념으로 너무  분명하게 구분지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다양한 선택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분법적  갈래의  사이로  내 스스로를  몰아갔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됐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끝까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다보면   목적 그 자체를 달성하는 경우도 있고,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연히  떠오르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죽을 때까지  답을  못찾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답을 찾는다는  결과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답을  찾기 위해서  소리  지르고,  달리고, 머리를  쥐어뜯어보기도 하는  -그  몸부림친다는  그 사실  자체에  있다는 것' 을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저자는  사유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고는  자유로워진다고  말했다.  이것은  이런 이치라고 생각한다.  사유가  깊어지는 것은  안으로 깊이깊이  뚫고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정태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둘러 싸여 있는  내 사고의  "벽을 깨고"  밖으로,  자꾸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것이라고.   그럼으로써  사고의 폭과  넓이는  '아래가 아닌  위로'  점차  확장되고  그 넓어진  사유의 공간에서  뛰어보기도 , 굴러보기도 하고, 춤을 춰보기도 함으로써  더 자유로워 지는 것이라고. 

 

선과 악,  지와 무지,  미와 추, 진실과 거짓, 진보와 보수 ...  모든 사물들을   이와 같은  이분법적  개념으로  단순화하 는 것은  그것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조금 오래 살다보면  사람들은 알게 된다.  세상은  프리즘을 통해  들어오는  빛깔과  같이- 몇가지  인식하기  쉬운  단어로  파악하기엔   너무나  복잡하고  다양하며,   모든 상황에  딱 들어맞는  그렇게  단순한  "법칙" 과 "이치"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김용석은  이  구별하기  쉬운  몇가지  개념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 어떤 두 존재 사이의  관계 즉,  벌어진  '틈' 에  주목하여    틈새시장을 노린다 .  보통 사람들이  '이것' 을  가리키면  그  손가락을  돌려  '저것' 을 보게 한다.  시간과  "함께"  공간을  얘기하고,  보편성과  "함께"  개별성을 논한다.  이것이  김용석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텍스트를  가지고  사상과  생각을  논한다는 것은   그것이  그  개념을  더  잘  보여줄 수도 있고,   저자의  생각  그  자체보다는  문학텍스트에 대한  해설에  그치게 될  우려 때문에  그 의미가  반감되게 할 수도 있다는  이중성을  갖고 있어  위험부담이  따르는 작업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는  이런  위험을  곧잘  비켜간다.  고전텍스트의  분석에는  포커스를  흐리고,  사유의  확장 쪽으로  포커스를  둠으로써   독자들에게   '철학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누구라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얘기한다.  이쯤되면, 철학의  대중화의  선두에  있다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다고 본다.  
 
  다만  아쉬운 것은  사유의 기반이 된  55가지  텍스트가  모두  서양 고전인 점이다.  동양고전, 한국고전은 왜 텍스트가 될수 없을까.  저자가  엄선한 자료라고 해도, 어쩐지 균형을 잃고 지나치게  한 쪽에 치우쳐있다는 느낌이 든다.  또,  사유의  바깥을  보여줄 뿐  우리 사회의  제반문제들- 공무원 부패, 국민의  누적된 정치 혐오증,  갈수록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 노동자, 시시때때로 바뀌는 변화무쌍한 교육제도  등-   한국적  현실에 대한  어떤  방향성을   보여주지는  않다는 점이  조금 아쉽다.  인식의  틀이 바뀌는  것만으로는  실천과  행동의 힘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  현실사회를  비추고, 현실 뒤엔  사상이  온다.  그리고  사상의  꼬리를  법과 제도가  좇는다.  그런데  저자가  가르쳐준   방식대로   이런  구조를  뒤집어 보면   이 구조는  선형적이 아니라  원형적이  될 수도  있다.   테이크 아웃 커피에  비닐이나  종이 자켓이  씌워져 나오는 이유를 아는가?   그것은  우리 중  누군가가  뜨거운 커피에  손이 데였고,  해당 회사에  계약책임을  묻는 것으로  법적인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작은 것이지만   제도 때문에  때로는  생활이, 그리고  현실이  바뀌기도 한다.  철학은  현실 앞에 오면 안되나?  철학도  때로는  아방가르드적일  필요가 있다.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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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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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전에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소감을 글로 남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쾌하면서도 진지하고 때로는 시끄러울 정도로 수다스럽고, 한 토막으로도 충분한 말을 반복, 장황하게 설명하려고 하는듯한 느낌. 처음엔 보통의 글쓰기 방식이 낯설어 속으로 욕도 많이 했음을 솔직하게 밝혀 둔다. 그러나 동의할 수 없는 어떤 부정적인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 작가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은, 표현방식의 독특함, 독자들의 예상을 넘는 빼어난 상상력, 뛰어난 유추능력, 우리가 알지만 말할 수 없는 갖가지 빛깔에 이름을 붙여주는 탁월한 능력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의 여러 책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행복의 건축' 인데, 이번 책은 전작들보다 더 노련하고 완숙미가 넘친다. 비틀지 않아서 편안하게 읽힌다. 


영화와 비교했을 때 건축은 어떨까. 영화는 시각 언어와 청각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비전문가 입장에서는 주로 그것을 이루고 있는 내용적 측면- 그 안에 함의되어 있는 철학, 문학, 사회학적인 측면에 주목해 영화를 관찰하게 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그것을 이루는 것은 시청각적 언어이다. 이것들은 매우 기술적인 요소이긴 하나, 연출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샷 의 크기나 길이, 높이와 각도만으로도 충분히 표현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건축은, 건축을 이루는 언어를 굳이 이름붙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무엇이 될까. 공간언어?

알랭 드 보통이 그 공간언어에 대해 얘기하고자 했다면, 우리는 그것에서 어떤 지식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책은 시중에 나와 있는 책처럼 아주 평범하고 지루한 책이 되어버렸을 수도 있다.


시각적 경험과 정신적 가치. 과연 인간은 물질적인 것들에 눈감아버리고 살 수 있는가. 알랭 드 보통은 물질적인 것을 저차원적인 것으로 치부하면서도 인간은 늘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꼬집는다. 그의 그런 생각은 ‘시각적 경험을 경멸하는 그런 단호한 노력에도 늘 우아한 목적을 위해 물질세계를 꾸미려는 집요한 시도들이 짝을 이루어 왔다.’ 이 문장 안에 다 들어 있다.

너무나 빤히 보이는 거짓이다. 이런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시각적인 것의 영역과 윤리적 영역이 동등하다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인데, 매우 그럴 듯해 보이는 이 전제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꾸어 말한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그토록 건축을 동경하는 것은 모든 변해가는 것들 속에서 그래도 우리가 중요하다고 믿는 어떤 가치를 붙들어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2013.3.5) 때문일지도 모른다. 완전에 대한 지향과 이상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변덕스러운 기질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본질 아닐까. 디자인이나 스타일 자체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다양하지만, 어쨌든 어떤 형식이 보여줄 수 있는 숭고한 미적 가치. 사람들은 그것이 있다고 믿고 있는 듯하다. 


건축물 그 자체의 정체성보다도 관계적 개념에서 건축물을 설명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예술작품에서는 질서의 베일을 통해 혼돈이 아른거려야 한다' 노발리스의 이 말 한마디에 예술과 건축에 대한 모든 정의가 다 들어 있다. 플라톤이 말한 ‘에로스’가 이것이 아닐까. 지와 무지, 선과 악, 미와 추 양 극단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또 우리는 그런 중간자적 존재를 예술가라고 부른다. 


양립할 수 있는 카오스. 한때 내가 이상으로 삼았지만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명제.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은 '균형 잡힌 건물들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면 대립물 가운데서 뭔가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결국 살아가는 것은 생에 대한 욕망이고, 질서와 반복에 대한 권태와 혼란에 대한 불안을 견뎌내는 일이라면 살아 있는 한 인간은 누구나 아슬아슬하게 카오스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이 순간, 살아 숨쉬고 있는 자체가 카오스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20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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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2008-10-07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영국에서 알랭드 보통이랑 사진찍고 왔어요오(뜸금없는 자랑질 댓글 ㅋㅋ)

Alicia 2008-10-07 12:44   좋아요 0 | URL

어~어~ 너무 부럽당 니나님~~
여행사진 올려주셔야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