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네스뵈

그리고 해리 홀레

 

처음 <스노우맨>을 통해 요 네스뵈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장르소설을 잘 읽지 않는 편인데 무슨 이유에선지 <스노우맨>을 본 순간 이끌려서 주문을 했고, 펼치자마자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 단숨에 읽어내렸던 기억. 지금도 이 책을 보면, 당시에 다 읽고 나서 책에 손만 대도 차가운 설원의 공기가 느껴질 것 같았던 기분이 그대로 되살아난다. 그러다가 최근에 <박쥐>와 <네메시스>가 동시출간되어 주문한 김에 <레드브레스트>, <레오파드> 까지 논스톱으로 다 읽어버렸다. 쉴 수도 없었고 쉬고 싶지도 않았던... 내내 흥분됐던 시간. 이런 건 정말 행운인 거다. <스노우맨>을 읽지 않았다면 요 네스뵈에게 관심을 갖기 힘들었을 것이고 (결국엔 읽게 되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보다 빨리 만난 것 역시 행운인 것이다) 이토록 재미있는 책들을 놓친 채 살았을테니까.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는 총 열 권인데 현재까지 다섯 권이 국내 출간돼있다(아래 책 중 우리나라에 미출간된 책에 관한 내용은 요 네스뵈 홈페이지의 책소개를 옮겨온 것이다). 홀레 시리즈가 아닌 단권으로는 <헤드헌터>와 최신작 <The son>이 있는데, <헤드헌터>는 아직 읽기 전이고 <The son>은 4~5월 경에나 발간이 되는 것 같다. 국내 번역까지는 더 요원한 듯하고.

 

 

1. <박쥐>

 

해리 홀레의 탄생, 시리즈 1권. 노르웨이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던 요 네스뵈가 홀연히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 6개월 후 가져왔다는, 소설가로서의 첫 작품. 소설의 배경도 오스트레일리아다. 노르웨이 여성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해리 홀레가 파견돼 나가는 것인데, 아무래도 시리즈의 시작이라 그런지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기보단 캐릭터 구축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해리의 첫 여인인 비르기타와의 대화를 통해 해리 홀레의 과거를 찬찬히 보여주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비극적인 역사가 만들어낸 '잃어버린 세대' 이야기를 바탕으로 범인의 캐릭터에도 무게감을 주고 있다.

 

타국으로 파견근무를 나간 처지라 이방인으로 겉돌다보니 본래 성격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면이 있지만 삼십 대 초반의 해리 홀레는 확실히 다른 책에 비해 밝고, 충동적이다. 자기 감정에도 솔직해서(특히 이성에게) 불과 3년 후 -레드브레스트에서- 라켈에게 첫 눈에 반해 상사병 앓는 소년처럼 굴었던 것이 어색할 정도. 그러나 규정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이단아적인 모습,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며 자기 감각과 판단을 믿고 불같이 달려드는 무서운 외곬수 기질은 여전!하다. 그러다가 헛발질을 하기도 하지만, 작품 전체의 재미를 위해 한 두 번의 헛발로 반전을 만들어내는 것 역시 해리 홀레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니까. ㅎ

 

범인이 금발의 백인 여자들만 살해한 연유에는 의외로 '대의명분'이 있다. 그 방법은 분명 잘못됐지만 국가와 역사에 대한 분노, 증오, 복수심 모두 이해가 될 만하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며 원주민 애버리진을 배척하는 한숨 나는 백인 우월주의, 주객이 전도된 괴상한 정책들. 세상에, 원주민의 자녀들 중 백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떼어내 국가에서 관리한다는 발상은 도대체 뇌의 어느 부분에 장애가 있어야 나오는 것일까? 백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저질러지고 있는 추악한 역사를 보면, 확실히 '어떤 면'에서 우월하긴 우월한 것도 같다.

 

 

2. <Cockroaches>

 

내년에 국내 출간 예정이라는 해리 홀레 시리즈 2권. 태국 주재 노르웨이 대사가 방콕의 호텔에서 시신으로 발견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노르웨이 당국에서는 이것이 외교적인 스캔들로 번지기 전에 가능한 한 사건을 빨리 덮고 정리하기를 원하지만 해리는 그것이 단순한 살인이 아님을 알아챈다. 무언가 다른 것이 있고 그 무언가가 계속 퍼지고 있으며 눈앞의 현실 뒤에서 그것들이 부스럭부스럭..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호텔방 안에 보이는 바퀴벌레가 전부가 아니라 벽 뒤에는 그보다 더 엄청난 수의 바퀴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것처럼.

 

가만히 바퀴벌레를 쳐다보면서 사건의 이면을 읽어내려는 해리의 기다란 실루엣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귓가를 스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그의 머리 속에 어떤 식으로 형상화되어 사건을 해결해나갈지... 두근두근 기대기대.

 

내년이 기다려진다.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쯤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놈의 나이 먹기 싫다고 안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책이라도 얼른 볼 수 있으면 좋은 일.

 

 

3. <레드브레스트>

 

처음엔 기대했던 것보다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패전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던 나치 신봉자들의 이야기는 지루하고 힘들었다. 열 줄이 넘어가던 문학상 수상 이력을 떠올리며, 역사의 아픔을 다루었다고해서 작품성이 높아지는 것인가.. 삐딱선을 타려던 찰나, 책 반절까지 꿋꿋이 읽어낸 독자에게 제대로 보상을 해주겠다는 듯 이야기는 폭풍처럼 전개되기 시작한다. 아름답고 똑똑했던 동료 엘렌의 죽음으로 어둡게 웅크리고 있던 해리 홀레가 슬픔을 벗고 나와 긴 팔다리를 휘저으며 종횡무진하는 과정을 따라다니다보면, 언제 덮을 수 있을까 막막했던 마지막 장을 어느 새 내 손이 잡고 있는 걸 보게 된다. 몹시도 벅찬 가슴으로.

 

다중인격장애자의 살인과 엘렌의 죽음이 40년대 나치즘과 2000년대 신나치즘의 고리로 엮이면서 전쟁과 역사와 인간의 삶이 시간을 넘나들며 아프게 흐른다. 전쟁을 겪지 못한 세대가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혼란과 상처를 얼마나 깊이 이해할 수 있겠냐마는, 거대한 위기상황 속에서 어느 한쪽으로의 선택을 강요당하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버린 삶이 그저 안타깝고 서글플 뿐이다. 그 무간지옥에서 살아남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평범한 생활을 이룬 것처럼 보여도 전쟁 한복판에 대한 살벌한 기억은 평생을 지배하는 강력한 트라우마로 남아 인간의 정신을 또 다른 전쟁으로 몰아넣는다는 사실도 새삼 아연하고.

 

노르웨이의 역사도 우리만큼이나 얄궂다. 우리가 일제강점기 일본, 중국, 소련 등 중첩된 '적'들 사이에서 복잡한 선택을 해야했던 것처럼, 노르웨이도 나치 치하의 암흑기에 독일로부터의 독립을 우선해야할지 독일의 적인 소비에트 공산주의와 싸워야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야했다. 조국이 공산주의가 될바엔 차라리 전체주의가 낫다고 생각한 노르웨이 청년들은 나라를 위해 삶을 바쳤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독일이 패전국이 되면서 나치에 부역한 죄인으로 낙인찍힌다.

 

요 네스뵈는 이들의 선택이 개인적인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한 진정에서 나온 선택이었음을 인간적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개개인에 대한 심정적인 이해의 범위를 넘어 역사적 평가까지 온정적으로 타협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종청소를 자행하며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던 나치즘을 공식적으로 용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잔인하게 파괴된 개인의 삶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

 

 

4. <네메시스>

 

네 번째 이야기. 원제는 소르겐프리(Sorgenfri, 슬픔의 자유)라고 한다. 요 네스뵈가 이 책을 주로 쓴 거주지가 있는 오슬로 거리의 이름이자, 해리의 전 여자친구 안나의 집이 있는 곳.

 

<레드브레스트>도 그렇지만 중첩에 중첩을 거듭하며 구성된 플롯이 굉장히 탄탄하고 치밀하다. 구석구석 장치해둔 복선과 암시와 속임수는 추리소설의 재미를, 사건의 저변을 뜨겁게 휘감아 도는 혈육 간의 애증은 인간 본연의 감정을 통찰하는 고전문학같은 미학을 선사해준다. 이야기는 은행털이범의 강도살인사건과 자살사건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약간 복잡해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두 사건의 본질은 하나의 이름 아래 가지런히 놓인다. 마치 두 개의 자석 주변으로 자기장이 형성되면서 철가루들이 일사불란하게 그림을 그려내듯, 두 사건이 애너그램(앞뒤 어느 쪽부터 읽어도 같은 단어가 되는 것)을 만들어내는 결말.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라는 이름 아래 아모로마(AMOROMA, 영원히 당신의 것)... 장관이다.

 

라스콜의 절대신같은 전지전능과, 그와 해리 간의 동지적 의식이랄까 의리랄까 하는 것이 조금 뜬금없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고 들면 끝도 없고 재미도 없으니 의구심따위는 버리자. ㅎㅎ

 

 

5. <The devil's star>

 

아직 출간 전인 시리즈 5권. <Cockroaches>가 내년이니 이 다음으로 이어지는 국내 미출간 책들은 마흔 넘어서야 읽게 될 듯. 마..흔...... 흠.

 

역시 배경은 오슬로. 찌는 듯한 더위의 여름 어느 날 아파트에서 한 여자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여자의 손가락 하나가 잘려있고, 옆 표지에서 보듯 눈꺼풀에 별모양의 작고 붉은 다이아몬드 표식이 있다. 그리고 5일 후 한 남자가 아내가 실종되었다며 신고를 하고, 또 잘린 손가락이 발견된다. 그 손가락에 똑같은 다이아몬드 표식이 있는 반지가 끼워져있는 것을 본 순간 해리는 연쇄살인으로 이어질 것을 예감한다. 꼭짓점이 다섯인 별모양의 다이아몬드 표식은 손가락이 다섯 개인 것과 5일 간격으로 살인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말해주는 상징.

 

이 책에서 드디어 톰 볼레로와의 진검승부가 이뤄지는 모양이다. <레오파드>를 보면 해리와 경관의 스쳐가는 대화에서 톰 볼레로가 결국 어떻게 됐는지 나와 있다. 겉으로는 전도유망한 형사지만 실상은 총기를 밀매하고 살인과 폭력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악한 신나치주의자 볼레로. 그의 추악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갔던 엘렌이 그에 의해 죽었고, 본능적으로 볼레로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해리는 그의 간악한 술수로 인해 위험에 처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결코 섞일 수 없는 두 형사가 어떤 스토리를 거쳐 대결의 종지부를 찍게 될 지 궁금하다. 궁금하다고!

 

 

6. <The redeemer>

 

14세 소녀가 구세군에서 개최한 여름캠프 도중 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 후 12년이 지나 오슬로 광장의 크리스마스 공연에서 구세군 군인 한 명이 군중들 속에서 한 남자에 의해 살해당한다. 신문사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 중 하나에 범인으로 의심되는 자의 모습이 포착되지만, 사람 얼굴을 기억하고 구별해내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베아테 뢴마저도 사진마다 다르게 찍힌 얼굴을 보며 혼란스러워한다.

 

소개글을 보면 범인은 자신이 영원히 혹은 찰나의 순간이라도 무언가에 의해 구원되기를 바라는 자인 것 같은데, 이번에는 종교나 신앙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인 듯 하다. 구세군이 주요 소재인 것도 그렇고. 범인이 혹 저 소녀일까? 남자인 듯 여자인 듯 구별하기 어려워서 베아테 뢴의 안면인식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인지.

 

책소개 말미에 요 네스뵈의 인터뷰가 짧게 붙어있다. 구세군은 노르웨이에서 아주 대중친화적인 기구지만 진실을 은폐하고 통제하려는 폐쇄적인 조직은 언제나 흥미로운 소재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포커스를 맞춰 소설을 썼다고. 하지만 실제로 구세군에서 만난 직원들은 매우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으며, 살인청부업자는 아랍에서 만났던 사람을 모델로 했다는 변명 아닌 변명. ㅎ 하긴, 우리나라에서 이런 책이 나와 인기를 얻었다면 구세군단체에서 명예훼손이라고 소송을 걸었을 지도 모르겠다.

 

 

7. <스노우맨>

 

일곱 번째 해리 홀레 이야기, 드디어 <스노우맨>이다. 요 네스뵈의 책 중에서 가장 박진감이 넘치고 몰입도가 높았던 책. 10여 년 간 11명의 여자가 실종된 사건이 일련의 연관을 가진 연쇄살인사건임을 알게 된 해리의 활약상이 그려진다. 제목답게 온통 눈으로 뒤덮인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설경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해서, 말 그대로 "북유럽 특유의 서늘한 스릴러"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막판에 라켈이 처한 위험은 하하호호 동심의 상징인 눈사람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살인도구로 쓰일 수 있는지를 살 떨리게 보여준다.

 

후편 <레오파드>에서처럼 생소하고 낯선 기구가 주는 공포감도 크지만 일상의 물건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용도로 쓰이며 갑자기 공격적으로 돌변할 때의 아찔함이란 차원이 다른 것 같다. 우리가 어린 시절 설레며 깔깔거리며 만들었던 눈사람이 무서운 현장의 기념비처럼 이용될 때, 닭을 잡을 때 쓰던 올가미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될 때, 치료를 위해 방문한 병원에서 내 진료기록이 역으로 내게 위해를 가하는 유용한 정보로 활용될 때 뒷덜미를 내리치는 서늘함. 일상의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어느 순간 나를 찌르고 들어오는 것들, 그 친숙함 때문에 더 소름이 돋았던 <스노우맨>.

 

 

8. <레오파드>

 

오슬로 외곽의 호바스 산장에 묵었던 사람들이 차례로 살해당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800 페이지에 육박하는 소설의 길이만큼 플롯도 복잡하고 등장인물과 배경도 다양하다. 이제 좀 익숙해졌다 싶은 노르웨이인 이름들도 한꺼번에 쏟아져나오니 피해자들의 이름이 헷갈릴 정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가 산만하거나 늘어지는 법이 결코 없이 매순간 긴장과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과거 콩고의 탐욕스러운 국왕이 고문기구로 사용했던 '레오폴드의 사과'가 살인도구로 등장하는데, 이런 잔악한 도구를 만들어낸 자의 놀라운 창의력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은 심정. 24개의 바늘이 정확하게 어디를 얼만큼 찌를 것인지 그 각도와 길이를 얼마나 섬세하게 조절하고 또 조절했을까? 오로지 사람을 잔인하고 색다르게 죽이기 위한 열정과 노력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표지를 보면 빨간 공 위로 작게 물음표 모양의 철사고리가 알파펫 D에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저 매끈한 공의 무시무시한 본색을 목격하고 나면 표지 디자인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아슬아슬함을 단칼에 표현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책 읽는 중에 저 사과 이야기만 나오면 턱이 뻐근하고 목구멍이 갑갑... 해리의 입으로, 레네의 입으로, 끝까지 누군가의 입에 들어가있던 공 때문에 나도 내내 숨이 좀 찼다.

 

 

9. <Phantom>

 

이제는 형사가 아닌 해리 홀레 시리즈 9권. 전편 <레오파드>에서 천성적으로 살인마 기질을 타고난 잔인무도한 범인을 정말이지 힘겹고도 힘겹게 '처리'하면서 너덜너덜 만신창이가 된 해리는 오슬로를 떠나 홍콩에서 나름대로의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동안의 거칠고 험난한 형사생활로부터 벗어나 스스로의 심신을 안정시키고 있던 중, 청천벽력같은 일이 일어난다. 올레그(해리가 사랑하는 라켈의 아들)가 살인혐의로 체포되었다는 것. 해리는 올레그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진짜 살인범을 잡아내기 위해 오슬로로 돌아온다.

 

경찰을 떠났지만 해결해야 할 사건(올레그 사건인지 또 다른 사건인지..) 때문에 해리는 오슬로의 마약세계로 깊이 들어가게 되고, 마약이 범람하는 거리에서 조사를 벌이던 중 해리는 그의 과거와 더불어 올레그와 자신의 가슴 아픈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까지가 책 소개글. 올레그와 해리의 진실이라는 게 뭘까. 우리나라 드라마처럼 실은 내가 니 아빠.. 넌 내 아들.. 일리는 없고, <스노우맨>에서 겪었던 일들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긴 것일까? 제목이 유령인 걸 보면 어떤 기억, 환상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 것도 같고. 이제나 저제나 책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릴 밖에. ㅜ

 

 

10. <Police>

 

제목과 같이 이번에는 경찰이 살해되는 사건이다. 예전에 한 번 조사를 벌이다가 미제로 남아있던 사건의 범행 장소에서 그의 시신이 발견되고, 잔인한 살인자에 대해 언론은 극도로 분노에 찬 기사를 쏟아낸다. 경찰은 다급해지고, 그들 당국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수 년 간 오슬로 범죄조사국의 주요 사건들을 주도적으로 해결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온 것만은 명백한 해리 홀레의 도움이 필요해진다. 직업에 대한 사명감과 명민한 통찰력을 겸비한 타고난 형사 해리 홀레. 그러나 지금 그는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고 해리 스스로가 가장 그런 지위를 원하지 않는 상황.

 

하지만 늘 그랬듯, 아무리 피하려해도 이미 범죄에 대한 반응 패턴이 기계적으로 세팅되어 있는 해리의 두뇌는 자동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을 것이고 결국엔 범죄현장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레오파드>에서 사건에 관심 없다며 자료뭉치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다시 욕설을 내뱉으면서 쓰레기를 뒤지고 찾아내 읽고야 만 것처럼. 범인이 반드시 현장에 다시 나타나듯 그의 몸 속에 흐르는 어쩔 수 없는 피가 그를 그 곳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에.

 

 

etc. <헤드헌터>, <The son>

 

해리 홀레 시리즈가 아니라 그런지 아직은 그다지 땡기지가 않아서 안 읽고 있는 <헤드헌터>. 해리 홀레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창조하고자 하는 의도로 쓴 책이라고 한다. 세상살이의 법칙에 도통 순응하려 들지 않는 해리 홀레. 그러나 진심으로 자기 안에 담은 상대에게는 온전히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순정의 해리 홀레. 이런 해리와 반대라면 세속의 때에 절어 입은 웃지만 눈은 웃지 않는 그런 사람이겠지. 평생 아무런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진심같은 것은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을 사람. 어딜 가나 누구에게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만 신경을 쓸 사람. 한 마디로 재미없는 캐릭터. 그나저나 책을 볼 때마다 이 헤드헌터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쓰는 그 헤드헌터인지 살인자에게 어울릴 법한 헤드.헌터.인지 궁금했..지만 책소개를 보니 쓸데없는 생각이었구나.

 

업계 최고로 인정받는 직업에 아름다운 아내와 풍요롭고 화려한 삶을 살지만 실상은 내적인 불안과 컴플렉스에 시달리며 밤낮이 다른 생활을 하는 주인공. 아마도 이 세상 대부분 남자들의 욕망과 그 이면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닌가 싶은 그는 나중에 좀 더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 만나는 걸로. <The son>은 홈페이지에도 아무 정보가 없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역시 해리 홀레 시리즈가 아니니 국내 출간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건 문제없을 것 같다. 그렇더라도 가능한 한 빨리 나와준다면 참 고마운 일일 것이다.

 

 

*

 

책을 읽다가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대충 끼워 맞추면서 그러려니 하고 넘기다가 <레오파드>를 읽을 때는 여러 개가 나와서 메모를 해뒀는데 메모종이가 어디 갔나 모르겠네. 암튼 기억나는 건,

 

p.279

야를레 안드레아센같은 프로 잠수대원의 경우에는 통신선이 전면 마스크까지 이어져 있어, 팀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야를레는 인명 구조 과정을 수료한 지 겨우 6개월밖에 되지 않아, 아직도 이런 잠수를 할 때면 맥박이 빨라졌다.

 

프로 잠수대원인데 과정을 수료한 지 6개월밖에 안 돼서 맥박이 빨라진다는 건... ;

잠수는 프로인데 인명구조는 새내기란 말인가. 프로라도 시신을 찾는 일은 항상 긴장된다 뭐 이런 맥락도 아니고. 이해가 좀 안 된다.

 

p.510

스노모빌 자국을 발견했다. 거대한 송곳니 모양의 두 바위 사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이었다.

p.511

땅이 움푹 파였거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 언덕 능선과 같은 몇몇 곳에서는 자국이 워낙 또렷해 빨리 나아갈 수도 있었다.

 

p.510 처럼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자국을 발견하는 것이 정상인데 p.511 문장은 모순된다. 움푹 파인 곳에는 자국이 남을 수가 없고 바람이 심하면 자국이 지워져서 '워낙 또렷할'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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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 칸 그리고 나머지들
    from Oasis 2016-05-21 20:57 
    요 네스뵈 신간 리뷰에 같이 올리려고 찍었는데, 김영사 비채 이벤트가 있길래 나머지들도 같이 올려본다. 요 네스뵈로 가득한 요 한 칸. 요 칸. ㅎ 그리고 나머지들. 신간도 별로 없구만 읽은 책보다 안 읽은 책이 더 많다. 얼른얼른 부지런히 읽자. 안철수의 책이 새삼 눈에 띄네. 저 책이 출간되었을 때 물량 빠지는 속도가 거의 광속이었다고 하는데 꽃시절도 그 때로 끝이었나보다. 나는 아직도-_- 안철수와 다른 국민의당 소속들을 구분해서 보긴 하는데, '
 
 
다락방 2014-03-1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노우맨을 재미있게 읽었으면서도 다음 책들 읽을 생각을 안하고 있었는데, 건조기후님 덕에 해리 홀레를 한 번 쫓아가며 읽어봐야겠네요. ㅎㅎ 저는 국내에 출간된 해리 홀레만 다 읽어도 마흔 넘겠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건조기후 2014-03-18 09:54   좋아요 0 | URL
저도 스노우맨 이후로 그냥 책만 사뒀지 읽지는 않았거든요. 이번에 맘먹고 다 읽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다 재밌을 수가 있는지 ㅜㅜㅜㅜ 다른 책들도 얼른얼른 번역돼 나왔으면 좋겠어요 아흑
 

글자를 조합하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김훈의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문장을 만들어낼 수가 있냐며 왠지 모를 좌절감에 휩싸였던 그 때를 다시 한 번 마주했다. 정제된 언어가 자아내는 감성과 이성이 촘촘하게 짜여, 마침내 책을 덮었을 때는 포근한 스웨터 하나를 선물받은 기분... 좋구나.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감동은 '시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긴 세월을 살아온 만큼 많은 것들을 품고 있는 작가 덕분일 것이다. 이제 2014년이 되었고 우리는 또 저마다의 1년을 살아가겠지만, 2014년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작년부터, 저 멀리로는 2002년부터 이어져왔고 1987년, 1945년, 1910년 그리고 1000년, 100년, B.C 수백 년 수천 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시간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 내가 시작된 것이 아니라 나같은 개인의 일생이 수없이 쌓여온 결과물 속에 내가 잠시 들어와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느껴질 때면 잠시 아연한 기분이 된다. 내 삶으로부터 떨어져서 관조하는 마음으로 나를 되돌아본다. 내가 앉아 있는 방이 보이고, 방이 있는 집, 집이 있는 동네, 동네가 있는 도시, 도시가 있는 나라, 나라가 있는 지구, 지구가 있는 우주, 우주가 있는... 또 어딘가까지 떠올려본다.

 

공간과 함께 시간도 다시 느껴본다. 지은 지 30년은 된 이 건물에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머물다 갔을까.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100년 전인 1914년에 있었던 일들, 1014년에 있었던 일들, 그 때의 거리와 사람들도 불러내본다. 낡은 짚신으로 종종거리며 물을 길어 나르던 종들이 실제로 이 길 위에 있었을 것이다. 도포 자락 휘날리며 팔자걸음 걷던 양반들도 이 길을 다녔을 것이다. 구한말 개항으로 몸살을 앓았을 부산을 그려보고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되었을 거리도 떠올려본다. 누군가 태어난 자리이기도 하고 누군가 죽기도 한 자리일 것이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여기에서 과거의 수많은 누군가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먼 어느 날에, 나의 삶을 궁금해하는 누군가도 있을까?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지난 주 <무한도전>에는 출근한 지 갓 하루가 된 신입사원이 등장했다. 김태호 피디를 닮은 이 청년은 무한도전을 보고 자란 세대일 것이고 10년 가까이 쌓여온 무한도전의 시간이 그 자신 안에도 고스란히 쌓여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눈 앞의 무한도전에서 자기 안의 무한도전을 보기도 할 것이고 그렇게 현재를 과거와 함께 살게 되기도 할 것이다. 또 그것이 섞여 앞날로 이어져 가겠지. 그 미래는 다시 누군가의 현재가 될 것이고, 누군가의 과거가 될 것이다. 시간이 쌓여가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 같아서 아련하고, 설레고, 목도 좀 메어왔다. 이 책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방송국 피디로 막 첫 발을 내딛는 신입사원마저도 무심히 보아 넘기지 못하게 했다. 생각을 자꾸만 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책이다.

 

그리고 어제의 <1박2일>은 시간이 쌓이는 아름다움의 정점에 있었다. 아들의 과거였던 아버지의 현재가 다시 아버지와 아들의 현재가 되었다. 젊은 시절 연애하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명동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었고, 그 시절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은 아들이 다시 명동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래 사진은 제작진이 부모의 사진에 아들을 합성해 선물한 '시간'이다. 공간이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쌓인 장소들을 보존하는 일은 낡은 건물을 밀어버리고 살기 좋은 주상복합아파트를 짓는 일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꿋꿋이 아파트를 지어대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공간의 소중함에 눈을 돌려 진심으로 보듬어내는 사람들이 있고 같은 시간에 같은 마음으로 눈가 촉촉해진 사람들이 있다는 건 커다란 감동이었다...

 

 

아름답고, 고마운 이 책에는 아쉬운 점도 있다. 아쉬움의 크기가 작지 않아서 더 아쉬운, 아쉬움. 내내 부드러운 마음으로 읽어가다가 마치 과속방지턱처럼 덜컹거렸던 부분은 "강원도의 힘" 꼭지에서였다. 200305강릉, 이라고 적힌 사진 한 장에 관한 작가의 감상에서, 예기치못한 이율배반을 보았을 때.

 

작가는 아주 오래 전, 지금은 태백으로 편입된 강원도 황지라는 곳에 잠깐 다녀온 경험으로 강원도 전체에 관한 애잔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강원도의 자연이 훼손되는 것도 못마땅하고, 경포호수가 난잡한 상가건물에 둘러싸인 광경도 보기가 싫다. 나는 여기서부터 그의 아름다운 문장 드라이브가 조금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조악한 건물들이 자연환경을 훼손하는 현장을 볼 때, 누군가가 미워져야 한다면 그것은 철학이 없고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행정책임자이지 환경같은 것을 돌아볼 겨를없이 오로지 생계만을 위해 달려야하는 영세자영업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조건 먹고 살기만 하면 되는 그들의 무지몽매함을 경멸할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기 힘든 강원도의 구조적 문제를 짚어 내는 것이 이 책의 흐름에 자연스러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글은 부자연스럽다고, 나는 느꼈다. 그래서 약간 거북했다가, 결국엔 마지막을 장식한 이 우아한 구절에서 마음이 몹시 좋지 않아져버렸다.

 

그래서 이 뻔뻔한 아이스크림 수레는 한때 호수를 포위하고 있던 저 가건물 횟집들의 오만을 한데 압축해놓은 것과 같다. 내가 끝내 보지 못한 다섯 개의 달 또는 일곱의 달이 저 수레의 통 속에서 아이스크림과 함께 달콤하게 얼고 있으리라. 그래서 그 언 달을 담을 고깔과자들이 강원도의 자연에 담겨 있을 모든 힘과 맞먹을 힘을 날카롭게 뽐내며 저렇듯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것이리라. -p.143

 

 

책을 읽기 전 후르륵 한 번 넘기다가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마치 합성해 넣은 듯한 이 촌스러운 아이스크림 수레가 몹시도 고단하고 슬퍼보였다. 아이스크림 장사를 하기 위해 나왔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와, 그의 아들딸과, 그의 노부모가 떠올랐고, 곧 다른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딸에게 아이스크림을 팔게 될 그 장수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악착같이 벌어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다는 책임감과 욕심이 그대로 묻어나, 좋은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초라한 수레를 불쑥 밀어놓은 장수의 뻔뻔함마저도 애틋하게 느껴졌다.

 

내게는 고단하고 슬프게 보였던 저 아이스크림 수레를, 강원도의 자연을 압도적으로 망치는 흉물로 보는 작가의 눈이 낯설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겨울의 개"를 쓴 작가와 동일인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사진 너머의 삶과 역사를 가지런히 담아 내어주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백사마을'의 깊이를 어루만지던 그 사람이 아니었고, 청계천을 시멘트로 덮었던 박정희와 청계천을 열었으나 다시 시멘트로 막아버린 이명박을 비판하던 그 사람도 아니었다. 그 수레를 바라보는 사람은, 풍경의 정취를 온전히 감상하지 못해 마음이 상한 나머지 고달픈 생계를 '덮어버린' 사람이었다.

 

그 전까지 참 가슴을 뭉클하게 해줬던 그의 아름다운 문자들이 이제는 비아냥을 가득 담아 누군가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 슬펐다. 날카로운 것은 수레 위의 고깔과자가 아니라 사진을 해석하는 작가의 글이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다시 조곤하고 온기 넘치는 문장들이 내게 다가와주었지만 과속방지턱의 충격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이 올바르고도 아름다운 책이 담고 있는 수많은 글 중에서 유독 하나를 문제삼아 이렇게 길게 토로하는 아쉬움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다. 애초부터 사진작가가 그런 뜻으로 찍은 사진일 수도 있고, 사진을 글쓴이와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별 생각없이 지나치며 내가 과민하게 군다고 여길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시 읽어봐도 아쉽다. 찬물에만 계속 담갔던 손보다, 따뜻한 물에 담갔다가 찬물에 담글 때 손이 더 차갑게 느껴지는 것과 같다... 아름다움 뒤에 오는 아픔이라서 더 씁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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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4-02-11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밥 차리면서 이 글을 읽는데..참 좋네요. 묘하게 뭉클거렸어요....

건조기후 2014-02-11 12:00   좋아요 0 | URL
생각을 많이 하게 해주는 책이었어요. 여운이 기네요..

치니 2014-02-11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솔직히 이 책을 끝까지 완독하지 못하고 말았어요. 문장이 아름답다는 점이 원체 부각되니 섬세하고 매끄럽게 잘 깎인 연필 바라보듯 곱구나 싶기는 한데 전반적으로 (제게는) 지루한 걸 못 참은 것 같아요. 그러던 와중에 이 분이 신형철 씨가 진헹하는 팟캐스트에 나온 방송을 들었는데 아 - 건조기후 님이 불편해한 그 지점을 만난 거에요. 책에서 그가 보여준 올곧음과 배치되는 이율배반이랄까 그런 지점. 자식들 이야기를 하는데 '딸은 딸이니까 연극을 한다고 해도 말리지 않았으나 아들은 음악을 하고 싶다는데도 말렸다. 아들인데 먹고 살 길 요원한 가난한 음악가가 되게 그냥 둘 수 없어서. 그리하여 현재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를 한다' 뭐 그런 내용으로 얘기하셨는데 그런 식의 단편적인 발언에 대해 조금도 부끄럽거나 자신의 책과 배치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노인 같아서 너무 생경했어요. 신형철 씨는 딱히 뭐라 대답하지 않았고요. 흠.

건조기후 2014-02-12 20:49   좋아요 0 | URL
저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건 아니에요. ㅎ; 항상 책을 읽을 때는 여러가지 느낌이 들기 마련이고 책에 대한 평가는 결국 어떤 쪽으로 선택하게 되느냐하는 문제인데 (말이 뭐 이렇게 거창하담) 저는 미문을 택했던 것 같아요.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던 것도 좋았고요.

꼭 저 부분이 아니더라도.. 삶의 안과 밖이 다른 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었어요. 치니님 말씀 들으니 더 그렇네요..

페크pek0501 2014-02-1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좋은 글을 보니 그냥 추천만 누르고 가기가 섭섭할 것 같아 흔적을 남깁니다.
저도 이 책을 가지고 있어서 님이 말씀하신 꼭지를 찾아 봤답니다. (저는 앞부분 몇 꼭지만 읽고 참 잘 쓰는 분이구나, 했지요. 그리고 마저 읽어야지, 했지요.)

결국 인간이란, (제가 자주 생각하는 건데)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또 들었어요.
님의 의견에 공감하면서 많이 배우고 갑니다.
추천을 백 번쯤 누르고 싶은 글이지만 한 번만 누르고 갑니다. ^^

건조기후 2014-02-11 14:53   좋아요 0 | URL
아핫, 저 역시 그 생각을 했어요. 저 자신부터가 완벽하게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라 할 수도 없고..; 어차피 머리부터 발끝까지 똑같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다들 이랬다 저랬다 하며 살다 가는 거지.. 싶다가,

근데 그러면 뭔가 의문이 나도 그러려니 해야하고 할 말이 생겨도 그러려니 해야하고, 세상에 아무 말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저런 생각을 그대로 써버렸어요. ^^

다락방 2014-02-11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우리 건조기후님 글 참 잘쓴다.
:)

joy3928 2014-02-16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고갑니다 깊고 아름다운 님의 시선에 감동
 

 

지난 화요일 오랜만에 PD수첩을 봤다. 수 년에 걸친 치졸한 탄압을 지켜보면서 결국 피디수첩에 관심을 꺼버렸지만, 우연히 <벼랑에 선 사람들, 주거취약자>라는 부제가 눈에 띄어 보게 됐다. <안철수의 생각> 대담자로 잘 알려진 제정임 교수와 단비뉴스취재팀의 책 <벼랑에 선 사람들>을 읽은 후였고, 그 처절한 기록이 아직도 머리에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에 피디수첩이 그 서러움을 어떻게 영상에 담아낼지 궁금했다. 시용PD, 시용기자라고 비하되는 이면에 그래도 조금쯤 다른 모습이 있지 않을까 기대도 잠깐.

 

일단 제목과 아이템을 그대로 갖다 쓰고 있었으므로 이 책에 관해 한 번이라도 언급이 나올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책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주거 불안정에 관한 기사는 뉴스에도 많이 나오는 거고 사회비판적인 보도프로그램 성격상 사회과학 책과 아이템이 겹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라 하더라도, 제목까지 저렇게 똑같이 쓰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을까? 실제 시사 프로를 제작하는 현장에서 이런 문제가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직접 "만화방 숙식"을 체험하고 쪽방과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니면서 주거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아픔을 깊이 있게 담아낸 이 책의 저자들이 방송을 봤다면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더라도 방송 자체로 내용이 좋았다면 이런 사소한(?) 트집같은 건 잡을 마음이 생기지도 않았을텐데. 많이 부실하더라. 국가의 주거정책에 문제점을 제기하는 것도,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것도, 하다못해 힘든 사람들의 사정과 입장을 진지하게 알아보려 노력하는 것도 아닌, 그냥 "이 사람들 참 불쌍하다" 였다. 선진국의 사례와 전문가의 의견을 토대로 실천가능한 해법을 충실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에 비해, 최대한 비참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 이외에 어떤 지점에서 그들의 철학이나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방송이었다.

 

<벼랑에 선 사람들>이라는 책이 훌륭한 이유는, 소외계층의 현실을 가감없이 전달하면서 그들의 삶이 그토록 내려갈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냉정하게 지적하고 그를 위한 해결책까지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도 우리처럼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허약한 사회안전망 안에서는 누구나 이렇게 하루아침에 삶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공감과 비판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참 좋은 책이었다. 취재 대상이 곧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쓰여진 글과 취재 대상은 말 그대로 취재 대상일 뿐이라는 거리를 두고 만들어진 방송은 그대로 수준의 차이를 보여줬다.

 

MBC 사태의 본질을 잘 모르거나 알고도 모른 척하며 언론 탄압의 빈 자리를 꿰찬 자들에게 무슨 언론인의 소명과 자질을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애초부터 권력의 충복이 될 것임을 직간접적으로 맹세하고 들어간 자리에서 권력감시역할을 할 리도 만무하지만, 뻔한 민생르포를 특집처럼 내놓으면서 그나마도 이렇게 아무런 방향성 없는 방송이라니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예전같은 대담한 주제나 심층적인 보도를 기대하지도 않았으나 저렇게 남의 것을 도용하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뒷북 겉핥기 방송을 만들 줄이야. 국가나 권력이 불편해하는 영역에는 그 근처도 얼씬거리지 않겠다는 각오를 확고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비판정신이 사라진 저널리즘... 소망교회를 취재하다가 전출된 최승호 피디가 본다면 가슴에서 피눈물이 날 것 같다. 화면에 크게 박힌 PD수첩이라는 글자가 마치 남의 나라 언어인 양 낯설게 느껴졌다..

 

 

작년 1월 17일 이후 붕 떠버린 시간을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가슴이 신산해진다. 광우병 보도를 시작으로 잔인하게 짓밟히며 그토록 긴 암흑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진실이라는 든든한 빽.. 뿐만 아니라 정권교체라는 절대당위성과 확신에 있었을 텐데 ㅜㅜ 앞으로의 시간을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견뎌낼 지 내가 다 막막 ㅜㅜㅜㅜ

 

20주년 기념으로 출판된 인터뷰집을 읽으며 한없이 존경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며 외부 압박이며 심지어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사회 곳곳을 그토록 끈질기게 파헤치고 다니는지... 일상이 처절하게 너덜거릴지언정 스스로에게 사명을 부여하고 양심을 지켜가는 삶은 아름답다. 제 역할에 열심이었다고 오히려 핍박을 당하는 뒤틀린 세상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은 이들(중 일부는 '변절'하기도 했으나)을 보며 이 사회와 그 안에 속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도 된다. 기자도 아니고 피디도 아니지만 그냥 한 시민으로서의 시선, 삶의 방향도 다시 한 번 다잡게 된다.

 

재작년에 이사를 하면서 책 책 책 책에 너무 진저리가 나서(이사업체에 책은 손대지 말아달라 한 건 나였지만ㅜ) 이제는 읽은 후 웬만해선 중고샵에 팔아버리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간직하고 있는 책 중의 한 권이다. 또 이사를 하게 되더라도 기꺼이 이고 지고 다니면서 곁에 늘 두고 싶은 책.

 

이 책을 읽던 즈음에 20주년 특집방송도 했었다. 촛불집회, 용산, 미네르바와 함께 PD수첩 그 자신이 탄압의 대표상품이었던 지난 5년. 그 때 MB정권 몇 년이나 남았네, 이제 몇 년만 참으면 되네 했던 말들이 귓가에서 부서진다. 하. 내 30대가 고스란히 이명박근혜로 점철되어버리다니 ㅜ 여차하면 그냥 신경끄고 밥벌이 일상으로 돌아가도 그만인 소시민의 심정이 이런데, 사회정의를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언론의 역할을 박탈당하는 동시에 유치한 밥벌이위협까지 받는 당사자들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할까.

 

먼 훗날, 또 몇 주년의 특집에서는,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시절의 이야기도 아프게 오고가겠지. 다시 또 "시간은 흐른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해결책"일지 모를 5년을 보내게 되었지만, 변함없이 언론인의 자리를 지키며 제 역할을 하는 것 이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역시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잊지 않는 것 이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뉴스타파 등 대안언론의 외연이 조금씩 확장되고 있고, 국민TV 창설을 위한 논의도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다. 하나하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꼼꼼하게 하는 것이 18대의 비극을 저지하고 19대의 희망을 만들어가는 길이라고, 다시 눈 똑바로 뜨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괜히 비장해지는 마음에 웃음이 나고 한숨이 난다. 하... 무슨 이런 다짐같은 걸 해야하는 상황이라니. 안철수와 문재인 사이에서 행복한 고민을 하던 때가 불과 몇 달 전인데. 세상에, 안 철 수 도 있고 문 재 인 도 있었는데. 안철수가 사퇴하던 때 충분히 절망했던 나로선 선거결과에 남들만큼 심한 멘붕을 겪지는 않았지만,

 

아직도 가끔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꿈일 리가 없어서 더 잔인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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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31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건조기후 2013-01-31 21:38   좋아요 0 | URL
^^

순오기 2013-02-01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텔레비전 어떤 프로도 기억하고 지켜보지 않은지 오래라 뭘 하는지도 모르겠어요.ㅜ
그래도 이렇게 상세하게 알려주시니 방송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잡히네요.
건조기후님 30대는 이명박근혜, 우리딸은 20대를 몽땅 이명박근혜가 점령했다고 절망했어요.ㅠ

건조기후 2013-02-03 13:22   좋아요 0 | URL
아 이명박근혜의 20대 ㅜㅜ
그나마 김대중 노무현의 20대를 보낼 수 있었던 건 축복인 거였네요. 그러네요 -_-

transient-guest 2013-02-04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뻔뻔스럽게 저 방송을 다시, 그러나 뇌와 신경계는 몽땅 바꿔버리고서 다시 하는것이네요. 이름만 PD수첩이네요. 언제 다시 '수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앞으로 5년간은 no로군요. 이명박근혜라...진정한 잃어버린 10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힘이나마, 분별이나마 우리 젊은 친구들에게 남아있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up-and-down을 반복하지만, 발전하는 것이 역사라고 믿고 싶어요.

건조기후 2013-02-05 16:36   좋아요 0 | URL
이제 피디수첩의 수첩은 수첩공주의 그 수첩입니다. ;
저 역시 단기적으로 후퇴할지언정 역사의 거대한 흐름은 항상 진보한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다만 국민도 국민이지만 야당도 이명박 욕하고 박정희(근혜) 욕해서 반대급부로 권력얻으려는 거지근성에서 제발 벗어났으면 좋겠네요. -_- 정말 혁신하고 국민들의 실질적인 삶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키운다면 지지율은 자연히 올라갈텐데 말이에요.
 

제목도 그렇고 또 청춘 특강인가 싶어서 자세히 보지 않았는데, 저자 면면이 그냥 넘겨버릴 분들이 아니라서 주문하고 보니... 잘못 생각했던 거구나. 청춘은 웬 청춘. 특강의 첫 주자인 김진숙부터 피와 땀이 철철 흐르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크레인에서 309일을 버텨낸 기적이 나는 아직도 남의 일같고 낯설다. 그 기간 동안의 수많은 기사와 사진을 접하면서 가슴으로 눈물 한 번 흘려본 적이 있었나 되돌아보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사를 눈으로만 읽고 말은 입으로만 했다. 목숨을 이어가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그 1년여의 기간이 그녀에게, 그녀의 동료들에게, 또 이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슴 깊숙한 곳은 흔들림없이 무지했고 입으로만 뻔한 단어들을 주워섬겼다.

 

내가 사는 부산의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났던 작은 전쟁. 나는 그 때 편안한 내 방에서 모니터로 기사를 보고 마우스나 깔딱거리며 얄팍한 위로와 응원을 보내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그녀의 이야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고 해서 그 시간들의 절박함을 감히 이해한다고 할 수가 없다. 살아서 내려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가던 상황이 담담하게 이어질수록, 깃털보다 가벼웠던 내 '지지'가 수치스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메마르고도 뜨거운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녀의 토로에 가슴이 아프게 뛰었다. 그리고 이 말이 머리를 쾅. 쳤다.

 

1월 6일에 크레인에를 올라가는데, 아까 말씀드린 대로 춥단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것도 새벽 3시에. 6시에나 올라갈걸, 그럼 세 시간은 덜 추웠을 것 아니에요.(웃음) 그 때는 무슨 대의명분, 이런 것 없었어요. 2003년도에 그 일 있고 나서 크레인을 어찌나 단도리를 해놓았는지, 자물통을 큼지막한 걸 매달아 놓고 쇠사슬을 몇 겹 둘러놓은 거에요. 그걸 자른다고 한 시간을 씨름하다가 올라갔는데요. 계단으로 사수대들이 있던 중간 지점을 지나서, 제가 있던 공간까지 올라가려면 원통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통이 20미터 높이에요. 그런데 거기는 깜깜절벽이거든요. 크레인의 동력선 자체가 끊어져 있으니까요. 사다리도 없어요. 철근 하나 끼워놨는데, 거기 올라가는 게 엄청 힘들어요. 안나푸르나를 타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그녀가 올랐던 CT-85호 크레인은 동지 김주익이 2003년 10월 정리해고에 항의하는 농성을 129일간이나 벌이다가 결국 목을 매 자살했던 그 크레인이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죽음을 투쟁의 수단으로 삼던 시대는 지났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의 문재인은 청와대의 모든 일을 정리하고 나와서 제2의 인생을 즐기기위해 안나푸르나로 트레킹을 떠났다.

 

2011년이 시작되던 겨울, 살기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던 노동자도 트레킹을 떠났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를 35미터 상공으로. 삶이 휘청이다 그대로 스러져버린 동지들을 보내놓고, 웃는 것도 죄고 등 따순 것도 죄라서 한겨울에도 냉방에서 자고 찬물로 머리를 감았다는 김진숙. 밧줄 하나에 의지해 저 동굴같은 원통을 오르던 그녀에게 안나푸르나가 떠오른 것은,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김주익의 죽음과 그녀에게 곧 닥칠 지도 모를 죽음을 관통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재인은 참여정부의 실책을 잘 알기에 더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솔직히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지지하는 분이긴 하지만, 그 뼈아픈 후회를 얼마나 극복할 수 있겠느냐에 관해서는 아직은 회의적이다. 예전에 <운명> 북콘서트에서 하셨던 말씀도 불현듯 떠오른다. 경제정책 실패를 아프게 인정하고 노동문제를 소홀히 다뤘던 부분에 통감하면서도, "노동자들이 노무현은 다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너무 한꺼번에 많은 요구사항들을 들고 나왔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그거 받아달라고 하는 것이 잘못이었을까? 또, 받아주면 안 될 일이었을까? 나라가 망합니까?...

 

한때는 노동자들의 든든한 빽이었던 노무현. 한창 노동운동의 변호인으로 활약하던 시절, 김진숙이 수감되었을 때 면회를 와서는 재판 이야기는 안 하고 시시콜콜한 수다만 한 시간 동안이나 늘어놓는 것이 의아해 "대체 왜 오신 거냐"고 묻자 "진숙씨 수감생활 지루할까봐 놀아줄라고 왔지요" 라고 했다던 노무현. 그러던 노무현이 정치계로 떠나고 노동운동을 하던 '똑똑한' 사람들도 다 정치하러 가면서 노동자들은 외롭고 잔인한 섬으로 남았다. 살기 위해 싸우다 죽어나가는 동지들을 보면서 "시대가 변했다"는 대통령 노무현의 말을 들어야 했다. "당신들이 좀 너무했다"는 유력 대선 후보 문재인의 말도 들어야 했다. 눈 앞에서 여전히 동지들이 일자리를 잃고, 생활을 잃고, 가족을 잃고, 삶 전체를 잃어버리고 있는데, 어떻게 시대가 변한 것이며 우리가 너무한 것인가. 당신이 휴식 차 떠났던 안나푸르나보다 더 힘든 크레인을 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당장 살고 있는 현실인데.

 

김진숙의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는 동안, 정리해고는 살인이다, 라는 처절한 문장을 그저 늘 그렇게 심각한 사회문제의 하나로만 보아왔던 시간들이 사정없이 너덜거렸다. 그리고 편의점에서 일일 체험을 했던 문재인의 사진이 떠올랐다. 편의점에 잠깐 서있으면서 그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기업 본사와 점주와의 계약이 얼마나 불공정한지, 그 불공정계약으로 인한 손해를 결국엔 아르바이트생이 처참한 시급으로 부담하고 있는 약자착취 구조에 대해 관심이라도 갖게 되었을까? 개혁의지가 샘솟았을까? 최저임금 보장, 비정규직 철폐 따위의 추상적인 구호를 위한 형식적이고 일시적인 이벤트에 불과한 건 아니었을까.

 

올해 대선의 주인공이 누가 되든 실제 노동자들의 삶을 철저하게 한 번 들여다보시기를 바란다. 한걸음 물러선 자리에 앉아 머리로만 구상하지 말고 최소한 김진숙과 한번쯤 대화를 나눠보셨으면 좋겠다. 한 마디 한 마디가 피고 땀인 그녀의 삶을 듣다 보면, 당신들이 평생 글자로만 습득했던 지식이 얼마나 허울뿐인 것이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고 알바 체험따위 백 번 천 번 해도 알 수 없는 진짜 "사람이 먼저"라는 것이 무엇인지 뼛속까지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경영이라는 이름으로 사적인 부의 증대를 위해 숫자놀음이나 하며 피와 땀을 우습게 아는 자들의 징징거림에 속아넘어가는 "또 한 명의 바보"가 되지는 말기를... 다시는 노동자들이 안나푸르나보다 힘든 크레인을 타는 일이 없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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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2-07-20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건조기후님. 이렇게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해요.

박근혜와 차별화하려고 남성성을 내세우는 것도, 이해가 아닌 체험으로 그치는 것도 좀 아쉽네요.

건조기후 2012-07-22 21:19   좋아요 0 | URL
안나푸르나 라고 하는 순간 등골이 뻣뻣해지더라고요.. 무식하다고 고백하는 부끄러운 글이에요.

남성성을 내세운다고 하시는 것은 특전사 시절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와서 그런가 싶은데요 (혹시 다른 일이 있었나요?) 저는 그런 점은 의식하지 못 했고요.. 우리나라 고위공직자들이 워낙에 아들들까지 신의 아들이 많아서 차별화라면 그런 부분에서 차별화되는 거 같아요.

인간적으로 굉장히 훌륭하신 분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민주당도 그렇고 여러모로 못 미덥긴 해요. 지금이야 또 다른 훌륭한 대'안'이 있으니 다행이다 생각하고요. 어떻게 될 지는 지켜봐야 하겠지만요..

Arch 2012-07-24 09:38   좋아요 0 | URL
댓글 달면서 '한줄만 쓸걸' 했어요. 뒷부분은 건조기후님 글을 읽다 생각난거지만 앞 구절의 '남성성' 부분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쓴거라서요. 건조기후님이 짚은 부분이 맞아요. 남성성을 내세웠다기보다는 특전사 시절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온 부분을 언급하려고 했던거였어요.

건조기후 2012-07-25 13:57   좋아요 0 | URL
저는 여러가지 군사행정이 비합리적인 게 많고 군대문화라는 것도 좀 몰상식하고 비인간적인 부분이 많아 혐오스럽긴 하지만 국방력 자체는 강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군대에서 적응 잘 하는 남자들 능력있는 군인들 멋있더라고요. ㅎ 제 바람 중의 하나가 민족주의적 사고로 무장하고 문무를 겸비한 제대로 된 군인 한 번 보는 거에요. ㅎㅎ 어딘가에 있긴 있겠죠?

스스로 남자답다고 내세울 거라곤 군대 갔다온 것 밖에 없는 저질 마초들은 답이 없지만요 ; 병역의무가 있는 나라에 태어나 젊은 시절 희생해가며 충실하게 수행한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는 것같아요.. (아치님께서 그랬다는 뜻은 아닌데 말이 좀 엉뚱하게 흘렀네요;;)

아그리젠토 2012-09-19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 대'안'에도 회의적...안철수씨가 과연 노동자에 관한 발언이나 액션이 있었던가요..?
 

이번 달부터 한겨레신문 월구독료가 올랐다(15,000원→18,000원). 지지난 주인가 신문 1면에 안내문이 실렸길래, 공고 전에 1년 계약으로 구독하던 사람까지 적용하는 건 좀 부당하다고 고객센터에 글 올렸더니 이번 계약기간 동안은 기존 구독료대로 납부하라고 했다. 대신 스마트폰 사용자에게 제공되는 한겨레가판대앱 무료이용은 못 하고, 구독료납입은 본사로 자동이체하던 방식에서 지국에 지로납부하는 방식으로 해야한다고. 난 뭐 앱은 상관없고, 지로납부는 귀찮지만 어차피 인터넷으로도 되니까 그러겠다고 했는데

 

오늘 지로용지가 신문이랑 같이 왔길래 은행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납부를 하는데 지로 청구인명으로 뜨는 것이 [중앙일보고객서비스센터]. -_- 지국에서 여러 신문 함께 취급하는 걸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만.. 내 계좌의 거래내역에 저런 이름이 찍히는 건.. 좀.. 싫다. 그냥 기부하는 셈치고 인상된 요금대로 낼 걸...

 

암튼 한겨레에 3월부터 <조국의 만남> 코너가 새로 생겨서 좋아라하며 보고 있는데, 첫 인터뷰대상자였던 무한도전 김태호피디♡를 시작으로 강동균 강정마을 회장, 박원순 서울시장, 김성근 야구감독,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이신 전순옥 국회의원 당선자 그리고 지난 주 문재인의 인터뷰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거수일투족이 주목대상인 분인지라 신문에 본기사가 실리기도 전에 인터뷰 내용이 언급돼서 빨리 읽고 싶었던 차에, 막상 신문을 펼치고 눈으로 보게 된 사진 한 컷이 어찌나 훈훈하던지. 이 인터뷰들 어차피 나중에 모여서 단행본으로 나올테지만 그래도.. 하며 차곡차곡 모으고 있는데, 이번 기사는 완전 더 못 버리겠어..

 

<조국의 만남> 문재인 인터뷰 보기

 

정치인에 대한 지지여부 기준이라는 것이 당연히 그 사람의 철학과 가치관, 그것에 기반한 구체적인 정책이 되어야 하겠지만 개인적인 매력을 포함한 외적인 요소도 무시할 수는 없는 점을 감안하면 문재인은 여러모로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일단, 실언이 잦고 행동거지가 진중하지 못했(다고 비아냥을 많이 받았)던 고졸 노무현과 달리 이 곳 부산에서 꽤 먹히는 이유가 바로 저 중후한 외모 덕분이기도 하니까. '대졸' 법조인 이력에 안정된 이미지가 적극적인 지지로까지 이어지는 건 별도로 치더라도, 최소한 노무현에게 쏟아졌던 유치한 공격들을 받고 있지는 않다.

 

노무현의 걸음걸이조차 못마땅해했던 엄마도 문재인은 볼 때마다 인물 괜찮다고 좋아하시는데, 뭐 이건 그냥 엄마 한 사람의 반응에서 엿볼 수 있는 변화이고 아니 그 자체로 변화라고까지는 말 할 수도 없지만, 단지 인물에 대한 단순한 호감일뿐이더라도 결과적으로 바람직한 정치적 변동을 이뤄낼 수 있는 힘이 된다면 그것도 꼭 나쁜 건 아닐 거다. 물론 이런 방식은 분명 지양되어야 할 것이긴 하지만 이미지에 취약한 대중의 속성이 사라질 리는 없을 것이고, 결국 실제로도 존경할만한 분이 좋은 용모와 이미지로 어필까지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테니까.

 

근데 왜 새삼 외모 타령.. ㅎ 저 사진 보면서 어휴 진짜 그림 된다 그림 돼, 감탄했는데 다시 봐도 그렇구나. '그림 된다'는 게 오로지 생김새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살아온, 살아가고 있는 삶과 그 이야기들이 갖는 아우라 덕분에 빛나 보이는 것이지. 저런 외모로, 보온병을 진지하게 살펴본다거나 남의 집 아들 몰카 현상공모하고 MRI 불법입수해서 농간질이나 친다면 그림 되니 어쩌니 우스갯소리나 할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 속편하게 외모 운운 하는 건, 그저 존경할 뿐 달리 할 말이 없는 분들을 향해 순수하게 우러나오는 팬심의 일부. ㅋ

 

이렇게 좋은 분을 정치인으로 얻었지만 내 평생 그토록 마음을 다해 좋아한 적이 없었던 정치인을 잃은 슬픔은, 또 그저 슬픔. 마침 요 며칠간 [노무현 평전]을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다른 책을 고르느라 들락거리다가 이 책이 5월 23일 '오늘의 알사탕 도서'인 걸 알았다. 보자마자 웃겨서 큭 하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이제 알사탕까지 감동적인 알라딘, 3주기는 알사탕 덕분에 웃어요. 하하하 ㅜㅜㅜ

 

그리고 마침 이런 글이 올라와 있는 걸 봤다.

 

 "노무현 3주기, 그는 실패한 대통령일까" 


오는 5월 23일은 노무현 대통령 3주기다. 1주기가 슬픔을 잊지 못한 추모의 공간이었고 2주기가 조금은 무던해진 기억의 시간이었다면, 이번 3주기는 인간 노무현을 넘어 역사와 시대 속에서 성찰을 시작하는 새로운 계기가 아닐까 싶다. 마침 국내 유일의 평전 저술가 김삼웅이 노무현 탄생 65주년(2011년 9월 1일)에 맞춰 연재를 시작한 <노무현 평전>을 선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후 100여 권에 가까운 관련 도서가 나왔지만 ‘평전’이라 이름 붙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노무현 대통령의 일생 전반을 조밀하게 짚어가면서, 저자가 끊임 없이 되묻는 질문은 두 가지다. “노무현은 실패한 대통령이었을까?”, “노무현은 패배자일까?” 3년이란 시간, 섣부른 대답일 수 있겠지만, 후임을 겪어보고 수구언론의 덧칠을 벗겨보니 비로소 그가 성공한 대통령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뒤틀린 권력구조 속에서 보복성 토끼몰이에 갇혀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패배자였다는 게 이 책의 결론이다.

바보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정치학자 노무현, 사상가 노무현, 인간 노무현. 끊임없이 노무현과 노무현 정신을 말하는 우리 시대가 과연 노무현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충실한 사료를 바탕으로 서술한 <노무현 평전>은 기억과 추모를 넘어 성찰을 시작하는 괜찮은 출발점이다. - 인문 MD 박태근

 

<편집장의 선택>에 짤막하게 실린 글은 때론 전혀 와닿지 않아서 그냥 스쳐 지나가기도 하지만 때론 이렇게 가슴을 콕 찌르기도 한다. 책이 '노무현'의 평전인 탓이기도 하겠지만, 책소개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감상에서 '아마도 연필을 쥐었다면 힘주어 꾹꾹 눌러 썼을 것같은'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일 수 없지만 개인적이지 않을 수도 없는 이런 글, 단어 선택과 문장 구성마저도 새삼 눈에 박힌다.

 

노무현은 패배자일까. 이의는 없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의 실패가 우리에게 던져준 의미는 다시 천천히 살아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막연하고 값싼 위로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노무현으로 인해 희망에 부풀었고 노무현으로 인해 절망했으나, 그 과정에서 직시하게 된 현실을 통해 그의 꿈과 좌절을 한단계 더 나아가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노무현 안에서 꿈꿨던 세상을 노무현 밖에서 더 크게 꾸게 됐으니까. 우리가 노무현을 겪은 경험 자체가 하나의 의미이기도 할 거다. 그의 실패는 교훈삼아, 그의 성공은 모범삼아, 세상을 변화시켜나갈 새로운 방향과 에너지를 갖게 해주는 의미.

 

2000년대를 노무현으로 시작했고 노무현으로 끝냈던 세대가 지금의 2010년대를 거쳐 30대, 40대, 50대, 60대로 점차 넘어갈 때, 이 땅에서 이제는 실패하지 않을 새로운 노무현들이 탄생할 것이라고 믿는다. 시간이 흘러 나이 먹는 것이 노무현이 던져준 의미냐, 한다면 그것도 맞는 말이다. '노무현을 겪은 세대'가 살아가는 시간이기 때문에. 뜨거운 쇳물에 담금질을 반복하면서 견고해지는 검처럼, 뜨거웠고, 식었다가, 다시 뜨거워질 땐 예전의 무른 검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참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많이 고마웠고 결국엔 그리운 노무현... "잘 지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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