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진동에 트라우마가 생긴 듯하다. 수시로 정지동작을 하고는 진동이 느껴지는지 신경을 초집중하고, 갑자기 뭔가 울렁이는 기분이 들면 생수병의 물이 찰랑거리는지 살펴본다. 내 몸에서 나는 약간의 근육경련에도 깜짝깜짝 놀란다.

 

지난 7월 울산 앞바다 지진 때도 엄청 공포였는데 이번엔 연속으로 두 번 겪으니 정말 심장이 쪼그라들고 눈물까지 났다. 당일엔 잠도 안 올 것 같아서 새벽까지 내내 폰으로 계속 뉴스 검색하면서 불안해했는데 어느 새 잠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그 때의 기분이 아직도 잘 잊혀지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고 잠시 가만히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았는데, 기분이 뭐라 말할 수 없이 묘했다. 거짓말처럼 돌아온 일상의 편안함.

 

그 날 저녁 7시 반쯤 첫 진동이 왔을 때 나는 방에서 막 운동을 하려고 사이클에 올라 페달을 몇 번 구르던 참이었다. 갑자기 양쪽 벽에 죽 늘어선 책장들이 한꺼번에 쓰러질 것처럼 마구마구 흔들렸고, 잠시 공포에 휩싸여 사이클에 엎드린 채 얼음이 되었다가 얼른 정신 차리고 사이클에서 내려왔다. 세상 편하게 코 골면서 자고 있는-_- 다롱이를 깨워 안아 올리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진동이 멈췄다.

 

운동할 생각이 싹 사라져 뉴스 틀어놓고는 카톡도 안 돼서 문자하면서 또 계속 뉴스만 검색해서 봤다. 다시 진동이 오더라도 이거보다는 약하겠지 싶어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두 번째는 완전 더 세게 와서 집 전체가 말 그대로 요동을 쳤다. 거의 패닉상태 비스무리하게 된 채로 당장 앞으로 넘어질 것 같이 기우뚱하게 흔들리는 책장 하나만 꼭 붙들고 있었다. 그 책장이 넘어지면 다롱이가 깔려버릴 위치에 있었어서 아까처럼 데리고 나가야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내가 겁에 질린 채 책장을 온 몸으로 받치고 있을 때도 다롱이는 여전히 고운 자태로 코골며 꿈나라... 어휴 그 모습 진짜. 저 눔 시키의 안위가 내 생존보다 중요한 것이 나의 본능임을 서글프게 깨달으며 진동이 멈추기만을 빌었다. 질끈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찍. 공포의 순간은 아무리 짧아도 길고 길었다.

 

이거보다 강력한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하니 무섭고 불안하다. 양산단층이네 무슨 단층이네 하는 것들이 부산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는 사진을 볼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영남에 다른 단층들도 많이 몰려있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 단층밀집에다 원전밀집까지 아주 환상이네? 영도에는 땅이 갈라진 곳도 있다는데 마음을 완전히 놓고 살 수 있을라나 모르겠다. 이러다 잊고, 지진이 오면 공포에 떨었다가, 또 잊고, 그렇게 살 게 될런지. 차라리 공포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을 일본이 부럽다. 익숙하다고 괜찮은 건 아니지만... 그나마 전국이 거의 완벽하게 내진설계가 되어있으니 마음 놓고 익숙할 수 있다는 것이.

 

지난 번 7월 지진 때 책장 흔들리는 거 보고, 좋아라 산 책들이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여실히 느꼈다. 저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압사하기도 전에 책 모서리에 맞는 것만으로 기절할 것 같아. 그래서 책을 줄이거나 책장을 낮은 걸로 바꿔야겠다 생각했는데 이게 또 낮은 걸로 바꾸자니 각이 안 나오고 쉽지가 않아서 미루다가 또 지진이 왔다. 책장 바꾸는 게 힘들면 책장을 벽에 고정이라도 해놔야할 것 같다. 책 가득한 책장 막막 흔들리는 거 진짜 무서움 ㅜㅜ

 

자기 전에는 책장 칸칸이 앞쪽 공간에 놓인 잡동사니들을 다 치우고, 유난히 심하게 흔들렸던 책장 앞을 사이클로 막아 놓고, 중요한 물건들을 대충 가방에 넣어 방문 옆에 두었다. 그러는 내가 참 웃겼지만 웃겨도 웃을 수 없는 상황 ㅜ 일본이 괜히 매사에 미니멀한 게 아니구나 싶고.

 

추석 때 보기 싫은 사람이 온다고 해서 혼자 조용히 보내려고 호텔을 예약해두었는데 그것도 신경이 쓰였다. 설마 호텔이 무너질 리 있을까마는... 이미 세게 여러 번 터뜨렸고 여진도 300회-_- 넘게 발생하고 있다니 당분간은 괜찮지 않을까, 단층에 쌓였다는 응력인지 뭔지 에너지가 많이 해소된 상태일테니, 싶고, 집이나 호텔이나 지진 앞에서 다를 것도 없어 그냥 왔다. 어쨌거나 보기 싫은 사람 안 보고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무지하게 컸으니까.

 

비상구부터 살펴봐야할 것 같아서(앞으로는 습관이 될 듯ㅡㅡ) 편의점 가면서 계단으로 내려가봤는데, 돌아와서 보니 호텔방 문에 붙은 대피도에 계단은 표시가 안 돼있고 완강기로 내려갈 수 있는 출구만 안내가 되어있었다. 계단을 이용해야할 때는 몰라서 우왕좌왕할 게 뻔하고, 계단 말고 완강기를 이용해야할 경우에도 복도에는 두 방향 모두 비상구표시등이 있어서 헷갈릴 수 있기 때문에 계단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표시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홀로 추석

 

어제 추석 전날이라 식당이 문 닫은 데가 많아서 먹고 싶은 건 못 먹고, 떡볶이랑 충무김밥이랑 샌드위치 대충 사들고 들어와 샤워하고 에어컨 빵빵 틀어놓고 빈둥대다가 자고 일어나 오늘도 열심히 빈둥대고 빈둥대고 빈둥대고 있다. 곁에 누군가 있다면 더 좋을 것도 같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시간이 주는 극강의 행복감이 있어서 그렇게 아쉽지는 않다.

 

연휴 내내 머리 텅 비우고 티비를 볼까 아님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책 없이 왔다. 책장에서 책을 고르고 있으려니 무섭게 진동하던 잔상이 남은 건지 어지러운 느낌도 들고, 그 탓인지 딱히 땡기는 책도 없고, 노트북이 생각보다 부담스러워서 책까지 싸오기도 싫고. 드라마나 하나 몰아서 볼까, 송재정이 W 대본을 풀었다던데 그것도 한 번 꼼꼼하게 보고 싶다 생각했지만 지금까지는 계속 티비 틀어놓고 그냥 뒹굴모드. 설레며 계획하는 시간은 늘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무한하게 느껴지는데 정작 실제로 하는 일은 별 게 없다. 사실 뭘 할지 생각하면서도 진짜 속마음은 별 거 없이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하고 싶은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거지.

 

컴퓨터가 고장나서 AS를 맡기려다 그냥 노트북을 샀었다. 맥북을 사려다, 내가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마치 기계처럼 맥북만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검색을 해보니 의외로 엄청 저렴하면서 사양도 괜찮은 엘지 노트북이 있었다. 두 개 중에서 잠시 갈등하다가 엘지 노트북을 선택. 스펙 차이라고 해봐야 속도나 소음 문제일텐데 나는 좀 느려도(그래봐야 별 차이도 아닐) 아무 상관없고 저장용량은 엘지 쪽이 더 컸기 때문에 내가 쓰기에는 훨씬 적당해보였다. 거의 영화를 보거나 쇼핑할 때만 쓰니까 모니터도 더 큰 게 좋고. 맥북이 참 예쁘고 매력터지긴 하지만 저 사과로고 하나를 위해 70만원을 더 지출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짓인가..를 생각하니 답은 쉽게 나왔다. 실제로 받아보니 더 마음에 들었고 그렇게 지금까지 만족하면서 잘 쓰고 있었는데

 

호텔에 갖고 오려니 모니터가 큰 게 정말 짜증이었다. 가지고 다닐 일도 별로 없고 그럴 일이 있어도 그럭저럭 들고 다닐 만할 것 같았는데 막상 노트북 가방에 넣으니 완전 짐덩어리 ㅜ 그냥 노트북만 가져가려고 해도 내 백에 넣기엔 너무 크고, 그래서 달랑 하나 있는 커다란 백팩을 찾아 꺼냈는데 이건 또 같이 두었던 까만 가죽가방에 이염이 돼서 카멜색 가죽이 얼룩덜룩해져있네... 아 스트레스...... 보기 싫은 사람을 피하는 것도 이렇게 스트레스라면 그냥 보는 것보다 나을 게 뭔가 했지만.

 

추석에 처음으로 가족이나 친척들 없이 오롯하게 혼자 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너무 좋다. 제사문화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데는 동의하지 않고, 나의 부모, 부모의 부모,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의 부모를 1년에 몇 번쯤 생각하고 예를 갖추는 것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굳이 의무적으로 한 자리에 온 친척 일가가 모일 필요도, 또 굳이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을 차릴 필요도 없이 어느 곳에서든 간소하게 애도/감사하는 시간을 가지면 충분한 거 아닌가 싶고, 지금처럼 제사를 위한 모든 노동을 특정인이 짊어지는 것도 몹시 불합리할 뿐 아니라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피똥을 싸는 일은 정말 좀 바보같다는 생각. 제사 안 지내서 조상이 노해 후손이 벌을 받는다면 명절 연휴 때마다 외국으로 여행떠나는 사람들 다 폭삭 망하것네... 먹지도 못 할 음식 안 바친다고 후손들 저주하는 심뽀의 조상이라면 대접할 이유가 없고.

 

하... 그나저나 시간이 흐르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정말 좋다 좋아. 영혼이 평화로움... 나이 먹을수록 조금이라도 번잡스러운 걸 더 못 참게 되고, 이런 고요함을 점점 더 절실히 원하게 되는 듯하다. 앞으로 명절 때마다 이렇게 혼자 나와 버릴까. 어차피 방콕에 의미를 두는 시간이므로 외국까지 갈 필요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외국으로 나갈 수 있다면 더 좋고, 그게 힘들다면 최소한 이렇게라도. 하루종일 어제 사온 떡볶이와 샌드위치를 깨작대고 있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천국이다. 다음엔 먹을 거나 좀 충실하게 준비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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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워서 축 늘어져있다가 갑자기 땡겨서 만든 대충대충 카프레제. 영원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연어 크림치즈와(맛있음 ㅜ) 통밀 크래커도 곁들이고 냉장고에 와인이 없어서 좀 아쉬웠지만 홍초로도 괜찮았던 오늘의 점심.

이렇게 더운 날 상큼한 한 끼, 좋다 좋아.

* 북플에서 글쓰기할 때 제목칸 좀 있었으면 좋겠다. 이게 그렇게 어려운 기술인가? 앱에서는 사진첨부가 안 되고. 기분 좋았는데 급 피곤해짐..

*제목칸 있었네 ; 모르고 타박해서 미안해요 알라딘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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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8-07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런 정갈하고 아름다운 상차림이라니!
건조기후님, 북플앱에 제목 넣는 칸 있어요!! 제가 지금 스맛폰이라 나중에 피씨로 접속하면 알려드릴게요!!

건조기후 2016-08-08 09:08   좋아요 0 | URL
아, 글쓰기라고 적힌 칸이 제목칸이었군요! 이런 무지랭이 ㅎㅎ 고마워요 다락방님 ^^

단발머리 2016-08-07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충대충이 이렇게 예뻐도 되나요~ㅎㅎ
호텔이 부럽지 않네요.
요즘은 밥 먹으면 더 더운것 같아요.
(밥 차리기 싫은 주부의 마음인가요?)
딱 건조기후님 상처럼 먹고 싶어요.

참, 저도 북플에 제목 넣는거 위의 댓글보고 알았어요 ㅋㅋㅋ

건조기후 2016-08-08 09:24   좋아요 0 | URL
실제로 보면 예쁘진 않고요 ; 치즈를 너무 막 썰어서 울퉁불퉁 지 멋대로에요 ㅎㅎ 여름엔 밥이라는 글자 자체가 더운 느낌이 들어요.. 그러게요 여름에 밥 차리는 거 일이지요 일 ㅜ 저는 집에 혼자 있을 때가 많아서 요즘은 특히 더 간단하게 먹어요. 간단하게라고는 해도 이거저거 잘 챙겨 먹습니다 ㅋㅋ

북플 제목칸에 왜 `글쓰기`라고 뜨게 해놨을까요? 제목입력 뭐 이랬으면 처음부터 쉽게 알아보고 썼을텐데.
 

 

치즈

 

 

다락방님 뽐뿌질로 주문한 치즈치즈들 ♡

어제 집에 늦게 들어왔는데 확인하자마자 당장 먹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 시간은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고 내일 먹을 것이냐 지금 깔 것이냐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까기로 ㅋ 주방 소리에 민감한 엄마 깰까봐 방으로 다 짊어지고 옴.

 

 

도마가 생각보다 작아서 약간 당황했는데, 진정하고 다시 보니ㅋ 칼이 생각보다 컸던 거지 도마는 적당량의 치즈를 썰어 먹기에 딱 알맞은 크기다. 처음에 식물성 오일로 한 번 닦고, 사용 후 세척은 레몬주스랑 소금으로 해야하고, 앞으로 6개월간은 월 1회 정도 규칙적으로 오일을 발라 관리를 해줘야한다고 한다. 나무니까 잘 말리는 것도 필수겠지. 아... 그냥 보기만 해도 귀엽고 치즈를 썰어 놓으면 정말 예쁘긴 하지만 관리하기 까다로운 니가 참 밉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어차피 사용하고 나면 씻고 말리는 거 다른 식기랑 똑같고 한 달에 한 번 기름만 발라주면 되는데 뭐가 그렇게 힘들고 밉나, 급 반성.

 

 

딱딱한 고다치즈 자르기 전. 책상이 밥상역할을 한 지 오래되긴 했지만 한밤중에 도마에 칼이라니 이건 또 무슨 짓인지 ㅎ

근데 이 매트가 본래 금색실이 섞여서 되게 예쁜데 불빛에 반사되니까 꼭 만들다 만 거 같이 숭숭숭해 보이네.

 

 

치즈가 한두 종류일 땐 도마에서 자르고 바로 먹는 게 간편하고 좋다. 기왕이면 예쁘게 담아 먹는 게 맛있으니 데코용으로도 더 낫고. 하지만 나는 주문한 치즈들을 다 맛보고 싶으니까 ㅋㅋㅋ 자른 건 일단 접시에 두고 나중에 다시 도마로 옮길 것임.

 

칼은 하드치즈용이라고 했는데 용도별로 나온 이유가 다 있을 테지만 그걸 다 구비해 놓을 게 아니라면 구멍이 난 걸로 사는 게 좋을 듯.. 구멍 없는 칼은 어차피 집에도 쌔고 쌨으니깐.

 

이라고 썼지만 이 칼이 하드치즈가 아니라 소프트치즈용이네 ㅋㅋㅋㅋㅋ 다른 데서 칼 검색했을 때는 저런 식으로 구멍난 게 하드용이어서 이것도 하드용이려니 하고 설명을 제대로 안 봤는 갑다. 사실 소프트치즈용이라고 하지만 이 칼도 잘 들러붙기때문에 구멍이 더 큰 걸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사진 찍는 사이 까망베르가 좀 녹아서 약간 지저분해졌다.

 

 

완성. 잘라놓고 보니 한가득이네. 까망베르, 스모크치즈, 크림치즈, 고다치즈 순서이고 맨 위에는 말린 무화과. 크림치즈도 까망베르처럼 좀 녹아서 저 꼴.. 나는 일단 생으로 먹어 보려고 자른 거지만 그냥 버터 나이프로 떠서 빵이나 크래커에 발라 먹는게 제일 낫지 싶다.

 

치즈가 하나하나 다 너무 맛있다. 뭐 특이한 거 산 게 아니라서 맛도 특별할 게 없긴 한데 기본적으로 모든 치즈가 굉장히 진하고 첫맛과 뒷맛이 다르며 뒤로 갈수록 깊어지는 맛이 예술.. 까망베르는 고소한 풍미 짱이고 스모크도 원래 훈제를 좋아하는데 쫄깃쫄깃 식감도 좋고 담백하고 정말 맛있다 ㅜㅜ 바게트 위에 올려서 살짝 녹여 먹으면 환상일 거 같다. 크림치즈는 누구나 아는 그런 크림치즈로 저건 갈릭과 허브가 들어간 거. 흔하게 먹는 크림치즈보다 진하고 고소하다.

 

다락방님이 강추하신 고다치즈는 평소에 짠 거 안 좋아라하는 내 입에 정말정말 짠데, 짠맛 이외에 고소하고 깊고 진한 맛이 우러나오는 데 반하고 나니 왜 추천하셨는지 알겠다. 소금알갱이가 씹히면서 짠맛이 습격하듯 쳐들어올 때는 아 짜도 짜도 너무 짜다 막 이러다가 금세 입 안을 휘감는 향이며 맛을 즐기고 있다. 치즈들이 정말 하나같이 입에 착착 감기는데 어후 ㅜㅜ 속절없이 말린다 말려. 와인이랑 같이 먹으니 그냥 천국이고. 세상에 이보다 더 맛있는 치즈가 얼마나 많을 거며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너무 설레고 좋다. ㅎㅎㅎㅎㅎ

 

고다도 짠 데다 그린올리브도 너무너무 짰는데, 근데 이것도 짠데도 맛있더라. 치즈든 열매든 숙성되면서 안으로 품고 품고 품는 고유한 풍미라는 게 얼마나 신비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깊다 깊어. 깊어... 그린은 짰지만 블랙올리브는 안 짜고 맛있어서 푹푹 퍼서 담고, 담으면서도 하나 둘 막 주워 먹었다. 문득 생각드는 게 난 뭐가 이렇게 다 맛있지. 어떻게 사람이 맛없는 걸 모르니.

 

생으로 맛은 다 봤으니 스파게티나 뭘 한 번 만들어 봐야겠다. 까나페 하려고 "의미없는 과자"도 사왔는데 치즈 썰다가 어느 새 내팽개치고 ㅋㅋㅋㅋㅋ 의미없는 과자를 더 의미없게 만들었네...

 

 

캐롤

 

 

 

 

 

 

 

 

 

 

 

 

 

 

 

 

 

정리를 하고, 다운받아두었던 영화 캐롤을 봤다. 어딘가에서 본 캐롤 책 역자후기가 병맛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보니 요즘 참 병맛 번역가들 풍년이네... 언제나 중요한 것은 결국 기술적인 재능이 아니라 그 사람 내면의 가치관, 철학을 이루는 인문학적 소양과 약간의 시대정신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본인의 가치관에 맞지 않는다면 번역을 하지 않는 최소한의 예의 내지 성의, 자기 주관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그런 것도.

 

LGBT 운동이 시작된 지 벌써 50년쯤 됐으면 이제 세상에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도 되지 않았나. 굳이 "인간적으로 끌려서" 라는 둥 "정이 들어서" 같은 말도 구차하게 붙일 필요는 없다. 그 사람들은 그래서 사랑을 하는 게 아니고, 그 사람들의 사랑이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첫 눈에 반하고, 저절로 눈길이 가고, 잘 모르면서도 어쩐지 신경이 쓰이고, 자꾸 생각나고, 손길이 닿으면 온몸이 곤두서고, 무언가를 계속 해주고 싶고, 어두운 표정에 걱정이 되고, 사소한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고, 그러면서도 함께 하고 싶고, 보고 싶고, 어느 새 빠져 나갈 수 없음을 깨닫고, 꿈을 꾸고. 꿈을 꾸고... 꿈을 꾸고.

 

사랑을 느끼는 대상이 다른 걸 어쩌라는 것인지. 이성애자이길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처럼 동성애자이길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간단한 논리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어째서 그렇게 온 힘을 쏟아 남의 소중한 사랑을 부정하고 혐오하는지 나는 아무리 봐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왜 그러지? 열성적으로 지지하고 축복해줄 수 없다면 적어도 생긴 대로 살게 그냥 좀 냅둬요...

 

근데 갑자기 딴 얘기인데, 캐롤은 테레즈에게 줄 카메라를 선물로 내밀면서 왜 가방을 발로 미는 거니. 성격하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고하게 흐르는 우아함에 몹시 어울리는 행동이었지만, 사랑을 느끼는 상대에게 그럴 수 있나? 사소한 발길질 하나를 자꾸 떠올리며 곱씹고 있다.

 

테레즈와 그녀의 남자친구, 캐롤과 그녀의 남편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라면 내 애인이, 내 남편이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떠나려고 할 때 순순히 보내줄 수 있을까 생각을 해봤다. 과연 그 때도 '그런가보다'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태어난 사람인데 어쩌라고' 할 수 있을까? 드디어 정체성을 찾았다는 사실을 축하해줄 수 있을까? 그런 상황이 닥치지 않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지금 생각으로는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람을 피워도 굳이 잡을 생각이 없는데(의미없다..) 자기 성 정체성 찾아간다는 걸 어떻게 잡아(이건 더 의미없지).

 

나는 좋은 여자사람들이 좋고 좋은 남자사람들도 좋지만 사랑을 느끼는 것은 좋은 남자사람들이고, 여자가 여자를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을 그저 그들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동성과 자는 것이 이성과 자는 것보다 어떻게 더 좋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고, 남녀가 음양이 화합하도록 만들어졌다는 "고리타분한 법칙"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존재했던 "또 하나의 법칙"도 부정하지 않는다. 진보냐 보수냐의 정치적 문제따위도 아닌 것 같다.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으니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존재하는 것을 부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저 받아들여야할 문제일 뿐이다. 자기 자신의 모습대로. 타고난 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대도.

 

캐롤이 결국 그토록 소중한 딸 앞에서도 자기 존재를 잃지 않아서 좋다. 중년 남자들 앞에서 더 이상 나를 부정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해서 좋다. 테레즈가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걷다 택시를 타고, 호텔직원의 제지에도 아랑곳없이 캐롤을 찾아 들어가서 좋다. 넓은 홀의 복잡한 사람들 사이로 보였다가, 가려졌다가, 보였다가 하는 캐롤의 얼굴과 오로지 한 곳만 응시하는 테레즈의 시선이 눈물나게 아름다웠다. 한껏 물기를 머금어 오래도록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엔딩이었다.

 

싸고 맛있는 와인과 더 맛있는 치즈와 아름다운 영화 한 편이 채워 주었던 어제의 여름 밤. 

내 인생은 딱 이만큼.. 더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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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7-17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술상 넘나 근사해요!!!!! 역시 도마가 완성해주는구멍요 ㅋㅋㅋㅋㅌ 근사한 치즈 후기였어요. 고다치즈 마음에 드신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저도 어제 또 와인에 고다치즈 먹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소주로 1,2차 하고 들어와서 3차로 ㅋㅋㅋㅋㅋ

건조기후 2016-07-17 17:34   좋아요 0 | URL
치즈 다 맛있고 고다치즈도 정말 맛있어요. 짠맛을 압도하는 맛이에요!
도마는 괜히 도마가 아닌 것입니다. 그릇의 위력이란.. ㅋ 훨씬 맛있어 보이고 실제로도 더 맛이 나는 듯해요.
저도 올리브도 빨리 먹어야하고 와인도 빨리 먹어야하니(?) 오늘 또 먹으려고요 ㅋㅋㅋㅋㅋ

시이소오 2016-07-17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저절로 침이 흐르네요.
오늘은 저도 와인에 치즈로 ㅋ

건조기후 2016-07-17 19:41   좋아요 1 | URL
맛있는 치즈는 사람을 정말 행복하게 합니다! ㅎㅎ

2016-07-17 1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17 1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6-07-17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예요.
각종 치즈가 이렇게나 예쁘다니요~~ 맛은 또 어떡구요. ㅠㅠ
저도 그 때 주문했어야 하는데, 이렇게 뒷북을 칩니다. 다시 다락방님 방 들어가 볼려구요.
그 사이트 다시 가보려고 합니다. 도마는 행사 상품이었나요? 아니면 따로 구매해야 하나요....
아.... 너무 군침돕니다.

from 치즈가 그리운 어느 여름밤에, 단발머리~~~

건조기후 2016-07-17 23:08   좋아요 0 | URL
도마랑 칼은 따로 사는 거고요 이벤트상품은 그때 그때 다른 거 같아요 유통기한 짧게 남은 건 수시로 할인뜨고요. 저기 박스 두 개랑 고다치즈 두 개가 행사로 산 거에요 ㅎㅎㅎ 치즈 정말 맛있어요 ㅜ 또 벌써 다른 종류로 골라서 장바구니에 넣어놨어요. ㅎㅎㅎㅎㅎ
 

책의날 10개의 질문 이벤트에 당첨됐다고 지난 주에 알림이 뜨더니 오늘 이런 게 왔다.

책굿즈라고 해서 대충 예상을 했지만, 막상 칼로 박스 쭉 긋고 열기 직전엔 두근두근 ㅎㅎ

 

 

막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는 순간의 한 페이지를 베어낸 듯한 저 접시가 제일 마음에 들고

마우스패드는 가죽양장을 구현한 모양새가 고급지고 예쁘긴 한데 좀 두꺼워서 내 책상 위에 놓기엔 마땅치가 않네...

 

종이재질이라고 해서 내구성을 의심했던 독서대는 직접 보니 의외로 튼튼!

셜록 독서대 사은품이 떴을 때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 안타깝고... ㅜ

 

북커버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었는데 기왕에 생겼으니 써봐야지 싶지만 또 그렇게 잘 들고 다닐 지는 모르겠다.

일단 갖고 다니고 싶을 만큼 예쁘고 책도 때 덜 타고 덜 구겨지는 건 좋을 것 같지만, 워낙 습관이 습관이라서.

오거나이저는 볼펜꽂는 자리가 가운데인 게 불편해서 잘 안 쓰는데... 그래도 셜록이니까 또 봐도 예쁘다. ㅎㅎㅎ

 

주말에 행복한 선물, 고맙습니다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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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6-04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ㅋㅋㅋㅋ 축하합니다!!

건조기후 2016-06-05 00:19   좋아요 0 | URL
굿즈 7종 왔다고 외국에서까지 축하를 다 받고 말입니다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6-06-04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완전 알찬 선물 세트인데요~~~
축하드려요, 건조기후님^^

건조기후 2016-06-05 00:28   좋아요 0 | URL
갖고 있는 것이거나 필요없는 건 아니었음 했는데 어지간히 잘 쓸 것 같아요 ^^

시이소오 2016-06-05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조기후님, 축하드려요
굿즈하네요^^

건조기후 2016-06-05 00:25   좋아요 0 | URL
네 굿즈가 굿굿해서 굿즈인가봐요 ㅎ
 

한낮 최고기온이 30도를 넘었다는데 오후에 잠깐 나갔다 오는 길이 생각보다 덥진 않았다. 여름은 더워야 맛이긴 하지만 아직 5월인데 여름같으니 봄이 조금 아쉽다. 봄과 가을이 점점 짧아진다고 했던 건 오래 전부터였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봄을 만끽할 시간은 충분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확실히 다르다. 이렇게 피부로 느껴질 정도라면 앞으로 10년 후에는 아예 2계절 국가가 되어버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싫구나 ㅜ

 

 

볼일보고 돌아오는 길에 다이소 들렀다가 충동구매한 액자. 자세히 보면 저렴이 표가 나지만 볼수록 예쁨.ㅋ 사진찍(히)는 것도 싫어하고 내 사진 진열하는 것도 싫어하는 나는 모든 액자에 여지없이 다롱이 사진이다. 저 때가 3-5살이었는데 지금은 만으로 17살이고 햇수로는 18년 째니 세월 참... 사람 나이로 그렇지 자기 나이로 따지면 100살이다. 점점 천식도 심해지고 순간순간 마비증세가 와서 곁을 뜨기가 불안한 다롱이. 그래도 아직은 나이에 비해 건강한 편이어서 때 되면 밥도 잘 먹고 대소변 잘 가리고 잠도 예쁘게 잘 잔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요 이쁜 ♡ 궁뎅이. 산발한 내 머리는 바닥을 헤매고 있고 베개는 이 녀석의 차지가 되어있다. 나이 먹고 침대 오르내리기 힘들어질 즈음 때마침 이사하게 되면서 침대를 버렸는데, 이부자리 챙기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그냥저냥 감수할 만하고 매트리스 찝찝한 거 걱정 안 해도 되는 건 좋은 점. 무엇보다 다롱이가 편하니까 된 거.

 

자궁축농증때문에 큰 수술 한 번 한 거 말고는 별 탈이 없었는데 3년 전에 전신마비가 와서 온몸이 뒤틀린 채 움직이질 못 했었다. 병원에 가도 차도가 없어서 이제 마지막인가 했는데... 다행히 폭풍검색 끝에 좋은 병원 찾아서 치료 잘 받고 나았다. 그래서 더 애지중지가 되었다. 난 니가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할 수 있어... 그 때 밤새 대소변 살피고 물 먹이느라 잠도 못 자고 고생한 거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나 싶기도 한데, 후유증으로 고개가 약간 삐딱해진 거 보면 안쓰러워 죽겠다. 마비가 오는 건 노환때문이라서 딱히 예방법은 없고 약간 기력이 딸린다 싶으면 가서 침도 맞고 뜸도 뜬다. 얼마 전에도 한 번 갔다와서 등이 저렇게 거뭇거뭇하다. 천식에 좋대서 도라지액도 아침저녁으로 먹이는데 그렇게 좋아지지는 않는 거 같다...

 

강아지공장 기사를 뒤늦게 봤다. 현아가 눈물을 쏟고 어쩌고 하면서 이슈가 되었을 때, 현아가 울기 전에 너희 기자들은 뭐했니 욕만 해주고 기사를 안 봤다. 병들고 푸석푸석한 강아지들을 억지로 붙여 강제교배를 시키고 그게 실패하면 수컷의 정액을 주사기로 뽑아 암컷한테 주입했다. 그리고 암컷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이러면 잘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새끼를 낳을 땐 병원에도 데리고 가지 않고 공장주인이 직접 배를 가르고 핏덩이를 꺼낸 후 대충 꿰맸다. 보면 다 알지 대단한 일도 아니라고... 그렇게 평생 50번 가량의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며 만신창이가 된 몸은 목숨이 붙은 채로 매장되었다.

 

진심으로... 살의를 느꼈다.

 

동물을 사랑하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냥 내버려두기만 해줬으면 좋겠다. 돈벌이로 이용하려면 최소한 자연스럽게라도 지내도록 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번 돈으로 밥 사먹고 고기 사먹는 인생, 행복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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