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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꽃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까짓 나라, 해준 것이 무엇이 있다고 돌아가겠는가. 어려서는 굶기고 철드니 때리고 살 만하니 내치치 않았나. 위로는 되놈에, 로스케 등쌀에, 아래로는 왜놈들 군홧발에 이리 맞고 저리 굽신, 제 나라 백성들한텐 동지섣달 찬서리마냥 모질고 남의 나라 군대엔 오뉴월 개처럼 비실비실, 밸도 없고 줏대도 없는 그놈의 나라엔, 나는 결코 안 돌아가려네. -p.84
언제부터 개인이 나라를 선택했지? 미안하지만 국가가 우리를 선택하는 거야. -p. 260
정말 영원한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이봐, 정치는 모두 꿈이야.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무정부주의든 다 마찬가지야. 서로 총질을 해대기 위해서 만들어낸 거란 말씀이지. 미겔은 총을 들어 보였다. 이게 먼저고 말은 나중에 오는 거야. -p. 276
1905년 4월 4일 1033명의 조선인들이 제물포항에서 화물선 일포드호를 타고 멕시코로 건너간다. 스러져가는 대한제국의 운명처럼 조선 땅에선 아무런 희망이 없으므로. 하지만, 어쩌자고 난리통을 피해 지옥을 향했던 것인지 에네켄 농장으로 팔려가기 전까지도 아무도 몰랐다. 대륙식민회사의 사기(이건 명백히 사기 아닌가!)로 4 년간 채무노예로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노동력을 착취당한다. 부당하고 굴욕적인 대우를 받는 조선인 노동자들은 지금 이 땅에서 그 보다 더 심한 고통을 겪을지도 모르는 동남아시아 이주 노동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왜 굴욕마저도 반복되는 것이며, 어째서 인간은 이리도 잔인한지 모르겠다. 조선에선 다양한 계급이었던 이들은 모두 동등한 노동자로 전락했으며, 그 중 약삭빠른 인간들은 새로운 계급으로 신분상승하기도 한다.
4년의 계약기간이 끝난 후에도, 이들은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4년 전의 꿈과는 달리 돈도 모으지 못했다. 에네켄 농장 노동자로 남거나, 도시 일용직으로 떠돌거나,멕시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용병 아닌 용병 노릇을 하게 된다.
용설란이라고도 부르는 에네켄, 속칭 에니깽은 당시 아시아와 남미를 제 손에 넣으려는 열강들의 탐욕의 상징이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필수요소로 배가 필요하고, 그 배에서 쓰일 밧줄이 필요하고, 그 밧줄을 만드는 원료인 에네켄이 엄청나게 필요했으므로. 이 대목에서 다시 자본주의에 대해 쓸데없이 고민한다. (젠장!)
1부 이민자들의 고난은 어쩐지 심드렁하게 읽었지만, 2부와 3부에 설명되는 멕시코의 정치, 역사는 이후 내가 읽어야할 (읽고 싶은) 마르코스와 관련이 있어 조심히 읽어 두었다. 왜 난 심드렁했던가. 그건 역사를 들이대며 교훈을 주려고 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때문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고난을 겪었다, 민족을 잊지마라, 뭐 이딴 소리 했다간 바로 덮어버리겠어....
이야기는 나름의 속도감을 가지며, 마치 TV 다큐멘터리를 보는듯 하다. <고래>와는 또다른 냉철함이다.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며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인공이 따로 없으며, 모든 등장 인물이 주인공이며 동시에 그 모두가 또한 역사의 배경인물일 뿐이었다. 화자는 담담하고 짤막하게 이야기를 서술하고, 역사서인 듯 꼼꼼하게 당시 세계 정세와 멕시코의 정치사회를 서술한다. 인물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이나 뜨거운 동포애 따윈 없다. 건조하다. 읽는 내내 건조하다고 중얼거렸다.
1부를 읽으며 의심하던 나는 2부와 3부에 더 몰입이 되고, 결국 힘없이, 희망없이 남미 어딘가에서 사라져 버린 이들의 결말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더불어 스페인의 침략으로 소멸되어 가는 마야인들의 운명에도 한숨을 쉴 수 밖에)국가? 혁명? 정치? 그 모든 것들은 힘없는 이들의 피를 먹고 자라는 괴물일뿐이란 생각이 든다. 남미 밀림 한복판에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자던 조장윤은 동지들을 사지에 끌고가서는 막상 자신은 이들을 남겨두고 도망친다. 무엇을 위한 공동체인지, 누구를 위한 공동체인지.
김영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지난한 멕시코 이주 노동자들의 역경이 아니라 정치의 속절없음은 아니었을까? '먼 곳으로 떠나 종적 없이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에 나는 언제나 매료되었다'라는 작가 후기를 보며 사라진 사람들이란 이제 사라져버릴 '우리들'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 모든 것이 다 아무것도 아님을 얘기하고 싶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