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건너는 법 - 서경식의 심야통신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한겨레출판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태어날 때부터 배울 수 밖에 없는 '모어'와 자신의 뿌리에서 배우는 (혹은 배워야 할) '모국어'를 엄밀하게 나누고,  그 모어와 모국어가 다른 '디아스포라'들에 대한 안쓰러움을 보여준다. 물론 단순한 안쓰러움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디아스포라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지난 일들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결코 원해서 선택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모어와 모국어 사이의 갈등, 즉 정체성의 갈등을 겪고 있는 전세계 수많은 디아스포라에 대한 애정은 넓게 보면 인류애이기도 하다. 

지은이가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또 한가지는 추악한 인류의 과거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얼마나 극악한지, 얼마나 망각을 잘하는지, 얼마나 추한 존재인지를. 인류는 진보하고 있다지만, 그럼에도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으니, 끔찌한 과거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을 반드시 되씹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타자에 대한 상상력' - 전쟁을 겪지 못했다 한들, 타인이 겪은 고통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만 진보할 수 있음을. 그리고 타인이 받고 있는 고통을 모른체 하지 말 것을.

 

구구절절 아픈 말씀을 많이 해 놓으셔서 한겨레에 실렸을 때마다 두세번씩 거듭 읽곤 했는데, 책으로 묶여 다시 읽고 있으려니 가슴이 아프다. 저자의 가족사는 아픈 조선 역사와 다름 아니고,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데, 책의 구절구절이 다 나를 꾸짖는듯 하다.

 

'나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있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러한 상상을 시도하거나 노력할 수는 있을 터. 지금 내 처지가 평온하다고 과거 혹은 현재의 누군가도 똑같이 평온하지 않음을 기억할 것. 모른 척 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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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찌 말할까.

감동적이고 충격적이고 놀라운 작품이다. 하루 반 나절동안 모두 읽어버릴 수 있었던 것은, 소설인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흡입력이 대단한 작품인 탓이다.

누구에게라도 권해주고 싶은 책.
 

사실 이 세 권은 하나의 장편으로 발표된 것이 아니다.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차례로 발표된 것인데, 각각이 하나의 장편으로 완결성이 있으면서 동시에 세 권은 연작으로 볼 수 있을만큼 연결도 매끄럽다.

첫 권, 어린 쌍둥이 형제 이야기는 전쟁이 아이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전쟁이 사람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담담하고 건조하게. 등장인물 누구도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저 '우리' '엄마' '할머니' '토끼 주둥이' 등등. 가슴이 시큰했다.
 

그 녀석은 우리에게 다가와서, 물통 안에 침을 뱉으려 했다. 그러나 우리 중 하나가 녀석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자, 다른 하나가 모래주머니로 녀석의 머리를 갈겼다. 녀석은 쓰러져서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다른 두 놈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중 한 놈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다른 한 명이 말했다. - 조심해! 저 더러운 자식들은 못 할 짓이 없다고. 한번은 저 새끼들 돌에 내 관자놀이 뼈가 금이 갔어. 저놈들은 면도칼도 가지고 다니면서 막 그어대. 맘만 먹으면 네 목이라도 딸러 덤빌 거야. 저것들은 완전히 미친 놈들이라고. 녀석들은 가벼렸다. 우리가 물을 가득 받은 물통을 토끼주둥이에게 내밀었다. 소녀가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왜 진작 날 도와주지 않았니? 
-네가 어떻게 하나 보려구. 
-덩치 큰 세 녀석이 덤비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니? 
-네 물통을 놈들 대가리에 던져버리든지, 손톱으로 얼굴을 온통 할퀴어놓든지, 불알을 발로 걷어차든지, 그도 저도 안되면, 고함을 치고, 울부짖기라도 해야지. 아니면 아예 달아니버렸다가 나중에 다시 오든가.   - (상) 비밀노트 63쪽
  

 


두 번째 권. 국경을 넘지 않고 남은 쌍둥이 중 하나인 루카스의 이야기. 몇 년이 지나 성인이 된 루카스는 그 쌍둥이가 맞나 싶게 사람들을 도우려들고, 매우 감성적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과 달리 가슴 아픈 일도 생기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전쟁은 지나갔지만, 사람들에겐 여전히 상처가 남아있다. 그런데, 어째서 루카스는 이토록 다른 사람이 된 걸까? 
 

난 이제 쉰살밖에 안 됐어. 내가 담배와 술을, 그래, 술과 담배를 끊는다면, 난 책 한 권쯤 쓸 수 있을 거야. 여러 권도 쓸 수 있겠지만 어쩌면 단 한 권이 될 거야. 난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나.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 (중)타인의 증거 133쪽 


세 번째 권- 어릴 적 국경을 넘은 클라우스의 이야기로 시작해 루카스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루카스와 클라우스(Claus)와 클라우스(Klaus)의 관계를 밝힌다. 그들은 정말 쌍둥이인가? 아니면 형제인가? 아니 같은 인물일까? 모두 허구일까? 50세가 넘은 클라우스와 루카스의 과거를 밝혀가면서 그들의 가족사와 함께 어린시절의 트라우마와 비밀이 벗겨진다. 그래서? 루카스가 클라우스이고 클라우스가 루카스인가? 아니면....

 

문체는 건조하고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여성 작가의 책이라니 참으로 놀랍다. 그녀는 혹시 이들 클라우스와 루카스의 모습이 아닐까? 그녀는 오빠와 자신의 이야기를 쌍둥이 형제로 고쳐 썼다고 한다. 아이들은 이유없이 잔인해지고, 또 이유없이 너그러워진다. 아이들뿐 아니라 전쟁에 휘말린 모든 이들이 그렇다. 전쟁이 지난 후에는 삶이 그들을 갉아먹는다. 삶을 즐기지 못하고, 허우적 거린다. 30여년 흐른 뒤, 그들은 또 가족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전쟁을 겪은 유럽인들의 삶이기도 하겠고, 일반적인 삶의 모습이기도 하리라. 작가의 건조한 문체, 그리고 풍자. 섬뜩한 묘사.
 

누군가의 정체성에 관한, 혹은 거짓과 진실에 관한 게임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그리 보면 전 3권을 가로지르며 추리소설처럼 읽는다면 재미있으리. 물론, 겁 많은 나는 이 책으로 '전쟁'이 더 많이 보인다. 전쟁이 어떻게 사람을 변하게 하는가, 전쟁이 인간성을 어떻게 파괴하는가에 관한  보고. 어차피 독서는 주관적이고 개인적 활동이니 어찌 읽거나 그것은 읽는 자의 몫. 내겐 이리 인상적인 책이 누군가에겐 엄청 지루한 책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지인들에게 추천하곤 한다.

 
같이 일하던 언니가 추천하길래 골랐는데, 촌스러운 표지와 달리 매력이 가득한 소설이다.
이후 김영하의 <랄랄라 하우스>를 보니, 김영하도 추천했더라. 섬뜩하면서 매력적인 작품인데 절판되었던 책이 다시 나와 반갑다고.

다행이다. 재출간 된 책을 볼 수 있게 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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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곳을 정리할 에너지가 없으므로

끄적임은 모두 네이버블로그 tomboywho 에 남겨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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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문
렌죠 미키히코 지음, 김현희 옮김 / 더블유출판사(에이치엔비,도서출판 홍) / 2004년 12월
평점 :
품절


어느 블로거가 올려 둔

   
  활자 하나하나는 섬세하고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다  
   
라는 리뷰에 홀려서 사전 정보 하나도 없는 이 책을 덜컥 사 버리고 말았다. 과연! 기대가 없이 읽었다면 더 아름다웠을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 다섯 편이다.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  자신의 남편을 결혼시키거나. 40년 전의 사랑과 닮은 사위를 몰래 가슴에 품는다거나, 자신도 모르는 아들이 입양동생이 되어 13년이 흐른 상황,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다른 가정에서 아버지 노릇을 함으로써 보상받으려는 남자, 오로지 아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는 방법으로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남편, 결코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조카와의 사랑을 19년 후 그녀가 낳은 딸을 받아들임으로써 완성하려는 삼촌. 하나도 평범하지 않고, 그 어느 것도 정상이라고는 쉽게 말할 수 없는 사랑들이다. 그런데 그 사랑들이 마치 꽃비 내리듯 아련하고 잔잔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시 감각적인 문체 탓일까?

 

84년에 발표한 '러브레터'로 나오키상을 받았다는 48년생의 작가가 놀랍다. 벌써 20년 전의 작품이 국내에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은 번역작품이 없어서인가. 그나마 이 작품집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러브레터'를 원작으로한 드라마 <연문>의 인기 때문인 모양이다. 책의 띠지 역시 그 내용을 광고하고 있더라. (그러고보니 처음 나를 인도한 리뷰의 주인공 역시 드라마 때문에 이 책을 택했다) 드라마를 보지 못한 나로서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러브레터'로 드라마를 만든다면 참 잔잔하고 고운 이야기가 될 터. 물론 한국산 드라마라면 울고불고 한바탕 난리 부르스인 드라마가 나오겠지만. 그만큼 이야기들이 잔잔하게 펼친다는 말이다. 마치 꿈처럼. 그게 별일 아니라는 듯. 어쩌면 한참 세월이 지난 후 회고라도 하는 듯 담담하게.

 

한 때, 난 소설을 전혀 읽지 못했었다. 너무 뻔한 느낌, 시시한 느낌. 게다가 일본 소설들이라고는 베스트셀러들을 통해 알게 되는게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또 왜 그리도 맘에 안 들던지. 요즘의 나는 좀더 뻔뻔해 졌는지, 아님 인간사 그래봐야 별 것 아니라는 깨달음인지 소설을 많이 읽게 된다. 그리고 그다지 실망하지도 않는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 그런거지'라는 느낌과 함께, 혼자 잘 난척 하지 말아야겠다는 깨달음이랄까.

 

결국은 모두 사람의 일인게다. 내가 거미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닌 다음에야, 내가 늘 잊지 않고 돌아봐야 할 일은 결국 사람의 일이다. 혼자 잘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내 상처의 원인도, 그 치유의 시작도 모두 사람이었다. 여전히 두렵고 쉽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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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8-03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이렇습니다 책을 도통 안읽다 보니 님의 리뷰를 지금에서야 접하게 되었네요..^^
재미있게 읽으셨나 모르겠어요..전 참 대단한 작가다..라고 생각했는데요..^^
 

한 학기 동안 읽어봅시다.


5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학교에 간 개돌이
김옥 글, 김유대.최재은.권문희 그림 / 창비 / 1999년 9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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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겨질 뻔했어요- 마주이야기 시 2
박문희 엮음, 이오덕 / 고슴도치 / 2000년 8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4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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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냥짜리 거짓말- 어린이 고전 마당 01
서정오 지음, 고후식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2월
7,500원 → 6,750원(10%할인) / 마일리지 37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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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 짬뽕 탕수육
김영주 지음, 고경숙 그림 / 재미마주 / 1999년 7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4월 2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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