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하하. 영화 포스터 정말 잘 만들었다. 영화의 줄거리를 이렇게 재밌게 단촐하게 요약해준 포스터도 없을 것이다. 대개 영화 포스터는 실제 영화 속 장면의 일부분을 따가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언젠가부터 영화 속의 장면보다는 영화의 줄거리와 내용, 장르를 한꺼번에 잘 보여줄 수 있는 설정형의 포스터들이 많아지고 있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포스터 또한 그와 같은 종류. 최강희가 무식한(?) 부엌칼을 들고 생닭을 도마위에 올려놓고 살벌한 표정으로 요리하려 들고, 한쪽에선 냉장고로 추정되는 폐쇄된 공간에 구석에 찌그러져 묶여있는 잔뜩 쫄은 박용우가 올려져있다.
"수상한 남녀의 예측불허 연애담" 이라는 짧은 수식어 또한 영화의 줄거리를 매우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저자본으로 만들어졌다는, 대박 배우도, 대박 감독도 없는 이 영화가 이만큼의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영화에 대한 올바른(?) 기대감을 심어줬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재미도 재미지만 개봉이전의 포스터를 비롯한 광고에서부터 영화는 110분의 줄거리를 한 컷의 설정 사진에 적절하게 담아내고 있다. 영화에 대한 관객의 기대와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의 감상이 딱 떨어지게 만든 것이다. 올바르지 못한 기대감을 갖게 하여 극장 좌석에 앉힐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의 실망감은 어찌 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영화판 상황이다. 이미 영화를 보고난 관객의 입소문은 그 무엇보다 확실한 영화 광고다. 그러니 괜한 기대감을 갖게 만들어 영화를 보게 만드는 것보다 이렇게 제대로 된 기대감과 그에 맞는 만족감을 선사하는 영화가 오래간다. 백만 스물 둘, 백만 스물 셋. 힘세고 오래가는 건전지 에너자이저.
* 대학 영문학 강사 황대우. 앞좌석에서 그가 지켜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업은 듣지 않고 문자질을 하고 있는 여학생을 쳐다보고 있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 아휴. 한심한 것들.
* 우아한 저 자태. 와인잔을 살짝 손에 쥔 포즈하며, 깔끔하고 단정하면서도 섹시한 흰색 강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적당한 조명 아래 와인 한 모금의 맛을 느끼는 그녀. 그녀가 살인자라고요? 어떻게 믿어요?
살벌녀 최강희. 본명 이미자. 가명 이미나. 나이는 20대 후반으로 이탈리아에서 그림공부를 하려고 계획중이다. 정말? 옛 남자친구 처리하기가 특기이며 남자 꼬시는데도 일가견이 있다. 칼 좀 쓸 줄 알고 김치냉장고를 사랑한다.
달콤남 박용우. 이름 황대우.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대학교에서 영문학 강사를 하고 있으며, 닭살커플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연애라는건 유치한 애들이 하는 짓거리라는 그가 경험한 첫 연애는 과연 어떤 연애? 허리다치고 갑자기 연애가 하고 싶어졌다는 그는 아랫집에 사는 신비한(?) 분위기의 그녀에게 푹 빠져 얼떨결에 데이트를 하게 되고, 닭살 커플을 제일 싫어한다는 그가 영화도 같이 보고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도. 그런 그가 어느날 이렇게 말한다면. 전 세상에서 김치냉장고가 제일 싫어요.
선수녀와 순수남의 만남. 전혀 선수 같아 보이지 않는 그녀는 연애에도 선수지만 살인에도 선수다. 손잡고 키스하고 혀 집어넣고 껴안고 온갖 스킨쉽의 여왕이면서 이렇게 달콤한 면모 이면에는 눈깜빡하지 않고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냉정함(?)을 갖추고 있다. 이 절묘한 조화. 최상의 조합인가. 확실히 선수는 선수다. 이런 선수에게 공부만 했던 순수남이 걸려들었으니 어찌 벗어날 수 있으랴. 죽음은 면할 수 있을까. 뭐 그가 그녀에게 잘만한다면야 죽이기야 하겠어.
영화는 매우 재밌다. 달콤하게 키스하면서도 살벌하게 칼부림하고 코믹한 대사 던져주는 센스. 두 주인공 못지 않게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한 커플이 있으니, 그들은 장미와 계동.
#1
장미 "칼질도 해본 년이나 잘하지. 입맛이 좀 없네요. 넌 참 비위도 좋다 미나야. 어제는 쑤시고 오늘은 썰고."
#2
미나 "지금 나한테 씨발 이라고 그랬어요?"
대우 "네 씨발이라고 했어요. 나도 화나면 욕해요. 씨발."
계동 "씨발이 욕이랜다. 씨발"
#3
대우 "이게 뭐에요?"
미나 "혀요. 혀 싫어요? 빼요?"
대우 "빼지마요. 빼지마. 혀 너무 좋아."
#4
대우 "참 너도 키스할 때 입에다 혀 집어넣고 그러니?"
#5
미나 "땀 때문에 씻어야 되는데"
대우 "괜찮아요. 저혈압이라서 짜게 먹어도 돼요."
아주 대사들이 어쩜 장면장면과 그렇게 딱딱 떨어지면서 웃음을 자아내는지 110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봤다. 너무나 적나라하고 솔직한 대사 때문에 웃고, 또 너무나 재밌는 상황에 살벌한 대사 때문에 웃기도 하고. 웃음을 자극하는 요소는 각각 다르지만 공통점은 웃기다는 사실. 살벌해도 웃기고 적나라해도 웃기고. 두 사람의 표정이며 행동이며 대사 하나하나며 어쩜 이렇게 코믹할 수가 있는지. 또 보고 싶다.
<이 영화를 통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 >
하나. 평생 공부하느라 연애 한번 못해본 사람들은 순수하다. 그리고 쉽게 넘어간다. 그리고 푹 빠진다. 작업에 성공하기 위한 비법 하나. 순수남, 순수녀를 공략하라. 살짝 작업들어가도 금방 넘어온다.
둘. 공부남, 공부녀는 연애에 관심없다? 노 노 노. 관심있다. 그런데 관심 없는 척하는 거다. 연애에 관심 없는 남녀가 어딨어.
셋. 이쁜 여자는 살인해도 된다? 된다 된다 된다 안됀다. 되긴 뭐가 안돼. 안돼지. (무슨 소리야) 어떤 의도에서 살인을 했건 살인은 용납되지 않는다. 영화는 두 남녀의 재미난 연애담을 담아내느라 살인을 저질러버린 미나에 대해 너무나 관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살인'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영화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묻어가게' 되는건 안된다. 사랑하면 살인도 용서가 된다? 그건 아니지. "과거는 상관없어. 사람만 안죽였음 돼지"라던 대우의 첫날밤의 대사는 영화 말미에 "괜찮아 뭐 죽일 수도 있는거지." 로 치환된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영화는 코믹한 요소를 자아내기 위해 살인이라는 소재를 삼아 살벌함과 달콤함을 버무렸지만 그렇다고 살인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뭐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그리 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넘어갈 수만은 없는 부분인 것은 사실.
영화가 관객에게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또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니지만, 실제 범죄자들은 어떤 영화나 음악, 소설을 통해 살인을 결심하게 되는 사례들이 실제로 있다. 마릴린 맨슨의 음악을 듣고 총기난사를 했던 미국의 어느 고등학생 이야기나 영화 <친구>를 보고서 죽이는 법을 배웠다는 한 젊은이의 말은 영화나 음악, 소설 등의 문화적 매체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 또한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박용우와 최강희. 두 사람 모두 영화계 거물은 아니다. <여고괴담>으로 얼굴을 선보인 최강희는 이후 드라마와 영화에서 종횡무진하며 그녀만의 매력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그다지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연말마다 상을 받는 드라마나 영화는 없었지만, 그녀가 출연한 작품들은 모두 나를 포함한 그녀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매니아층을 만들었다. 드라마 <광끼> <학교> <단팥빵>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와니와 준하> 등. 오히려 영화로 얼굴을 선보였지만 영화보다 드라마에서 더 강세를 보였던 그녀. 난 그녀가 너무 좋다. 특히나 일요일 아침마다 했던 <단팥빵>을 보기 위해 꼬박꼬박 8시에 일어나던 그때가 생각난다. 최강희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