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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 Mr. Know 세계문학 15 ㅣ Mr. Know 세계문학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책 제목만큼은 못들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추리소설이다. 그러나 이토록 무게감 있고 가벼이 보지 못할 추리소설도 따로 없을 것이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 소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많고, 이 책을 산 사람이 많아도, 이 책을 본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는 감독이 영화를 설명하며 그런 말을 했다. 사실 이 소설에 등장하지도 않는 부분(영화에만 있는)에 대해서 움베르트 에코에게 편지를 써서 그 부분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고 말 한 독자(?)도 있었다고 한다. 영화 <장미의 이름>은 봤어도, 소설 <장미의 이름>은 사놓고 보지 않은 것이다. 영화와 소설이 정확히 일치 하지 않으니 원작 소설을 보지 않은 채 영화만을 가지고 <장미의 이름>을 논하는 것은 위험하다.
세계적인 지성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는 움베르트 에코. 그는 정말 천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다재다능하다. 엄청난 지식을 소화해내고 많은 글을 생산해내는 다작가이지만, 글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글을 쓰는 작가는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한 권의 책을 내놓는 부류가 있고, 글쓰기를 글읽기 하듯 다작을 하는 부류가 있다. 아무래도 전자의 글은 좀더 깊이가 묻어나게 마련이고, 후자의 글은 깊이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움베르트 에코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솜씨를 보인다. 유럽의 유명 언론에 칼럼을 쓰는가 하면, <장미의 이름>과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도 하고, 본업인 기호학자로서의 이론가이기도 하며, 동시에 철학과 문학과 역사와 미학의 전문가이며 이 분야에서도 많은 글을 토해내고 있다. 중세철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컴퓨터도 잘 다룬다. 더불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는 물론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라틴어, 그리스어, 러시아어까지 능숙하다. 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학자다. 그가 쓴 책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번역되어 있다.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논문 작성법 강의> <미의 역사> <소크라테스 스트립쇼를 보다> <포스터 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 <철학의 위안> 등 일일히 언급하기도 힘들 정도다.
<장미의 이름>은 그의 여자친구의 권유로 재미삼아 시작해 본 작품이다. 누구는 재미삼아 쓴 작품이 이 정도이니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고. 본래 그는 이 이 작품의 제목을 <장미의 이름>으로 잡지 않았다. <수도원 살인 사건> <아드소의 수기> 와 같은 혹은 그와 비슷한 제목을 붙이려다 갑자기 떠오른 것이 <장미의 이름>이었다. 제목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것이 주는 어떤 비밀스러움과 중세적인 분위기가 소설을 대표할 수 있다고 믿었던게다. 서양에서 '장미'는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미 전쟁>에서의 장미, <그대는 병든 장미> 에서의 장미, <장미는 장미이고 장미는 장미이다>에서의 장미, <장미 십자단>에서의 장미 등등. 후에 제목을 붙이고, 베르나르의 '속세의 능멸을 위하여'의 싯구절 '어디에 있느뇨'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에코는 밝힌 바 있다. 아벨라르는 '장미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통해, 언어가 ㅔ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존재했지만 사라진 것을 드러내는지 설명했다. 제목을 붙이고 나니 <장미의 이름>에서의 '장미'의 존재는 매우 알쏭달쏭한 하지만 한편으로 깊은 의미를 지닌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에코가 우연히 접하게 된 어떤 중세의 책자가 이 소설의 발단이었다. 그는 실제 기록된 사건을 토대로 하여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여나갔다. 중세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당연히 중세를 배경으로 한 수도원 살인사건의 소설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고, 라틴어 지식 등 그가 가진 다른 재능들도 이곳에 집적되었다. 그 누가 이런 소설을 쓸 수 있겠는가. 에코가 아니면 안된다. 이 소설 속에는 중세 수도원의 분위기와 역사, 그리고 아리스텔레스의 시학에 관한 내용 등 풍부한 지적경험이 녹아있다. 하나의 어려운 고대, 중세의 철학자의 1차 서적을 읽는 듯 어렵기도 하다. 무슨 소설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앞부분의 그 역사와 배경에 대한 길고 긴, 지루하기까지 한 글은 출판사에서 잘라내자는 제의까지 했으나 에코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장면이 없다면 소설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독자는 900쪽에 달하는 두 권 짜리(한글판)의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을 읽어야만 했다. 이 책을 내가 접한 것이 이번이 두번째. 처음 접했을 땐 도통 무슨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용 파악 조차 하기 힘들었다. 중세에 대한 지식도, 고대에 대한 지식도 가진 것이 없는 채로 이 지적고통과 지루함을 안겨주는 소설을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다 읽긴 했다만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는 그런 경험이었다. 지금은 다행히 '완전히' 라고는 못하지만 내용파악과 그 의미를 해독했다고 생각한다. 추리소설을 읽으며 이것을 '즐김'의 대상이 아닌 '해독'과 '이해' 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우습지만.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윌리엄 수도사. 그는 매우 근대적인 사람이다. 안경과 나침반을 사용하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 위에 사건을 조사하며, 이성을 사용한다. 하지만 수도원의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그와 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믿음, 신, 구원 등 철저히 기독교적 교리에 의한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사건을 바라본다. 그 극단에 있는 이가 베네딕트 수도회의 베르나르 귀이다. 화려한 언변과 찍 소리 못할 카리스마로 순식간에 한 수도사와 여인을 악마와 마녀로 둔갑시키는 그에게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 사건을 바라보는 또다른 인물 아드소. 아직 10대인 아드소는 윌리엄 수도사를 따라다니며 세상을 배운다. 이 소설은 이 어린 아드소가 어린 시절 윌리엄 수도사의 곁에서 겪었던 사건을, 윌리엄의 나이가 되어 과거를 회상하며 서술한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다양한 측면에서 이 책을 바라 볼 수 있다. 이성과 신앙, 과학과 종교, 중세 수도원의 역사와 갈등, 마녀재판, 금해야 할 것과 금지된 것들, 책의 가치, 도서관의 역할, 사랑, 지식, 기호와 텍스트, 사물의 본질, 앎과 지식 등등.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사색하려면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매번 반복되는 독서를 해야 할 터이다. 너무나 많은 주제들이 집적되어 일일히 다 살피지 못하는, 수많은 지적체험으로,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뭔가 뿌듯하면서 머리가 가득찬 느낌과 동시에 아무 것도 알게 된 것이 없는 듯 벙찐 모습을 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매력이다. 두 권의 이 책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직도 그 때의 그 느낌이 묵직하게 나를 눌러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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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화학자 이윤기 씨는 이 책을 86년 처음 번역하고, 이후 여러차례 손을 보며 재차 번역을 하며 틀린 부분을 고쳤다. 또 이윤기 씨의 이 수고에는 철학자 강유원의 도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 텍스트를 공부하며 원전번역의 잘못을 지적한 책자를 만들어 출판사 측에 전달해줬고 이윤기 씨는 이를 바탕으로 번역을 시도하였다.
2. <장미의 이름>을 통해 철학공부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도 재밌는 작업일 듯 하다. 기호와 텍스트의 측면에서 해석학을, 또 소설의 사건의 중심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또 소설의 배경이 된 중세 기독교와 철학을 신학을, 또 이성과 신앙, 과학과 종교의 관점에서 과학철학과 신학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을 듯 하다. 900장 짜리 두 권이라는 책이 주는 무게감은 이 소설 속에 들어있는 갖가지 지식의 양념이 주는 무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터이다. 다른 묵직한 책보다 이 두 권의 책을 바라봤을 때 느껴지는 무게감은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일게다.
3.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이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때는 내가 좀더 내 머리 속에 철학지식이 쌓여있기를, 그리고 이를 토대로 많은 철학적 고민들을 했길 기대한다. 미래의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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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몇 구절을 첨부한다.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이 없더라." (서문) (상권 p23)
들판에 가을이 오면 꽃이 시들어 꽃대에서 사라져 버리듯이, 인간 또한 그렇게 사라져 버릴 터인즉, 인간의 외양만큼이나 덧없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 (보에티우스) (상권 p37)
진정한 앎이란, 알아야 하는 것, 알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야. 알 수 있었던 것, 알아서는 안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 윌리엄 수도사) (상권 p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