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경고

  암울한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 한판의 복수극. <브이 포 벤데타>를 한 줄로 설명하자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워쇼스키 형제가 각본을 담당하고, <매트릭스> 사단의 신인감독 제임스 맥티그가 지휘한 <브이 포 벤데타>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 영화 역시 또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은, 대부분 <매트릭스>를 떠올리며 '워쇼스키 형제'라는 광고문구를 보고 극장을 찾을 것이다. 나 역시 포스터 중간에 걸친 '워쇼스키 형제'라는 문구에 혹 하고 끌렸으니. 처음 듣는 감독의 이름, 또 별로 관심없는 나탈리 포트만과 휴고 위빙. 절대로 '워쇼스키 형제' 없이는 지금의 예매율 2위를 기록할 수는 없다.

  나는 이런 영화를 좋아한다. 암울한 미래 사회와 복수극. 내가 관심있어 하는 두 가지 소재가 한 영화에 모두 담겨있으니 더더욱 끌릴 수 밖에. '워쇼스키 형제'는 나로 하여금 이 영화에 대해 처음 관심갖게 만들었지만, 영화가 다루고 있는 소재는 나를 극장으로 불러들였다. 이 영화는 매트릭스 사단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워쇼스키가 그러하고, <매트릭스>의 제작진이었던 초짜 감독이 그러하고, 이 영화에서 결코 얼굴 한번 드러내지 않는 휴고 위빙이 또 그러하다. 그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요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니 <매트릭스> 사단의 영화라고 볼 수 밖에.



* 총과 칼의 대결, 일대 다의 대결. 하지만 승자는 브이. '승리의 브이'는 그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총알세례를 받고도 끄덕없던 브이는 모든 총알을 막아내진 못했다. 결국 이 싸움으로 인해 영웅은 잠든다.

  2040년의 통제된 사회. 미국에 의해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의 영국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다양성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사회. 피부색과 종교와 정치적 성향과 성적 취향 등등의 것은 모두 무시된다. 오직 한 가지만 존재할 뿐. 정부의 지도층과 취향을 같이 하지 않는 이들은 '정신집중 캠프'로 끌려가 자취를 감추고, 이들이 사는 거리과 집안 곳곳에는 감시 카메라와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어 엄격히 통제받고 있다. 사회는 매우 평온하다. 아무도 불평불만이 없고, 전쟁과 시기, 미움, 다툼, 증오, 분노를 찾아 볼 수 없다. 마치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의 사회와 같다. 사람들의 감정까지 통제하진 않지만 모든 사람들은 감시와 통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편으로 조지오웰의 <1984년>을 토대로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암울한 미래 사회를 그려낸 대부분의 영화들은 모두 조지오웰의 <1984년>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마치 화이트헤드가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모든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린 작품들은 조지오웰의 주석이다.



* 브이의 그날의 연설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나보다. 일년 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혁명은 성공했다. 수많은 브이들은 새 시대를 맞이했다.

  통금시간을 넘긴 어느 밤, 이비는 PD를 만나러 갔다가 거리에서 정부요원에게 붙잡힌다. 그러나 어디선가 나타난 괴력의 사나이로부터 도움을 받고 그와 함께 대법원의 폭파 장면을 감상(?)한다. 국회 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사형당한 가이 포크스라는 사나이의 얼굴을 한 가면을 쓰고, 검은 모자, 검은 망토, 검은 부추를 신은 이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도대체 누구? 횡설수설 이런저런 문구들을 붙여다가 자신을 소개하는 정신나가 보이는 이 사나이의 이름은 '브이'. 그는 셰익스키퍼의 <맥베스>의 대사를 술술 읊어대고, 이런저런 고전 속의 유명 문구들을 인용하며 세상에 맞서 싸우는 자신을 정당화한다.

  아무도 불평불만이 없는 조용한 사회. 그럼 태평천하가 아니던가? 아니 누가 이런 평온한 우물가에 커다란 돌덩이를 던지려 하는가. 브이는 테러분자인가. 시민들은 아무런 불만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브이의 출현으로 인해 서서히 깨달아간다. 우리는 정부의 통제 아래 자유를 빼앗겼음을. 그리고 1년 뒤를 기약한다. 혁명의 그날을.

  브이는 스스로 정의로운 복수를 감행한다 하지만 정의로운 복수란 것이 가능한 것일까? 영화는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리며 국민들 각자의 가슴속에 자유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한편, 복수의 문제,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거 생체실험의 도구로 쓰였던 브이 자신은 지금 정부 고위 지도자가 되어있는 그들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감행함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자유를 되돌려주기 위한 정의의 복수를 시도한다.

  복수는 가능하다. 복수의 문제, 정의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 함무라비 법전을 인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고 실험을 당한 브이는 그들에게 복수를 행함에 있어 그 수단으로 화학적 독극물을 사용한다. 하지만 고통이 없는 죽음. 주사기를 통해 독극물을 투여하고, 고요히 잠든 그들의 가슴 위에 주황장미를 얹어놓고 떠난다. 좋다. 내가 당한 만큼 돌려주는 개인의 복수는 납득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로운가?

  아무도 불평불만이 없는 사람들, 하지만 브이는 지금의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라고 진단을 내리고, 잘못된 사회를 고치기 위해, 정의로운 복수를 한다고 말한다. 정부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속였고, 통제했으며, 자유를 박탈했다. 그러니 그들에게 복수를 해야한다. 잘못된 사회를 바꿔놔야 한다고 말한다. 오직 브이 혼자만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는 테러분자인가, 정의의 영웅인가. 우리가 보기에도 아무도 불만이 없지만 억압과 통제가 자유를 대신하고 있는 그 사회는 분명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이의 정의로운 복수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어보인다. 잘못되었다는 진단엔 동의하겠는데 이에 대고 정의로운 복수를 하겠다고 홀로 나서는 브이의 처방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진 않는다. 무엇이 잘못일까. 그가 행하고자 하는 것은 혁명이다. 사람들에게 깨우침을 주고 일년이 지난 뒤 함께 정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열자는 것이다. 자유의 세상을 열자는 것이다.

  혁명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혼자 할 수 있다고 해도 혼자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잘못된 사회를 뒤바꾸기 위한 노력은 다수의 국민들이 깨닫고 나서서 행동할 때 비로소 결실을 맺는다. 소수의 사람들의 진단만으로 사회를 뒤바꿀 수는 없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 그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지라도 많은 이들이 사회에 불만이 없다면 그 사회는 별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국가를 이루고 있는 국민들의 몫이다. 북한 사회가 독재체재라고, 아랍계 국가들이 일부다처제를 실시한다고 그들이 그르다고 말 할 수는 없다. 각 사회마다, 국가마다 문화와 정치체제는 다를 수 있다. 그 사회와 국가를 이루고 있는 다수의 국민들이 그 체제에 불만이 없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괜.찮.다. 자유를 박탈당한 영국의 미래사회가 비록 문제가 있어 보이긴 하나 많은 이들이 불만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도 그 자체로 괜.찮.다. 영화는 브이를 정의의 영웅으로 칭송하려는 듯 하다. 브이가 만약 국민들에게 호소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정의를 실행에 옮겼다면 그것은 정의실현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호소했고, 일년 뒤 국민들은 가이 포크스의 가면과 검은 망토, 검은 모자를 쓰고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혁명은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혁명은 성공했고, 혁명의 방법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것은 정의로운 복수였는가. '정의로운 복수'라는 말 속엔 이미 복수 그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앞서 개인적인 복수가 옳다할 순 없지만 납득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은, 복수를 하는 브이의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복수가 정의 실현의 한 방법임은 틀림없다.  복수라는 말 ekdikesis는  ek는 영어 from과 dikesis=justice의 합성어이다.  복수는 정의로부터 왔다. 복수 또한 정의실현의 한 방법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방법이 되는 것과 그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는 서로 다른 문제이며, 복수를 그 자체로 옳다고 볼 수는 없을 듯 하다. 복수를 하는 방식엔 여러가지가 존재한다. 브이의 '피의 복수'(vendetta)를 옳은 방식의 복수라 볼 순 없지 않을까.

 복수의 문제, 정의의 문제, 과연 정의로운 복수란 가능한가와 같은 문제는 내 머리 속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확실한 결론은 없다. 여전히 내 머리 속은 정리안된 복수와 정의의 문제로 뒤엉켜있고 고민은 계속된다. 브이의 방식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불가피한 방법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현재 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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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경고

  오랫만에 당첨된 시사회였다. 빔 벤더스와 샘 셰퍼드의 20년만의 해후라고 자꾸 강조를 하고 있는데, 난 그들을 모른다. 하지만 자꾸 강조하니 관심이 갈 밖에. 그래서 뒷조사 들어갔는데, 내가 본 빔 벤더스 감독의 유일한 영화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뿐. 또 들어본 작품으로는 <파리 텍사스>와 <베를린 천사의 시>가 있는데, 내가 아주 어릴적 영화인지라 이름만 들어본 듯 하다. 꾸준히 영화를 한 감독이고 이런저런 큼지막한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럼 샘 셰퍼드는 누군데? 역시 조사들어갔더니 이 사람 역시 꾸준히 영화는 했지만, 띠엄띠엄 했다. <블랙 호크 다운>과 <스텔스>가 익숙하다.

  영화는 한때 아주 잘 나갔으나 지금은 어느 덧 늙어버린 한 서부영화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늙었지만 아직도 그의 영향은 대단해서 어딜 가나 사람들이 알아보고, 여자들이 뒤따른다. 사막 한 복판 촬영 중 갑자기 말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하워드 스펜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걸까? 계약된 영화를 찍어야 하는데 대뜸 말을 타고 도망가서는 30년만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향한다. 왜? 충동적으로 떠났지만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놀라운 말을 듣게 되는데, 서부 어딘가에 자신의 아이가 있을거라는.   또다시 앨범 속 사진 한장을 가지고 무작정 떠나는 그.

  이제 늙었기 때문일까. 늙어서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싶었던걸까. 그는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서부의 아이를 찾아 떠돈다. 예전에 아주 젊었을 적에 촬영했던 그곳으로. 그리고 옛 애인과 자신의 아들, 그리고 또다른 이미 죽은 여자의 딸을 발견한다. 젊은 시절의 술, 마약, 여자, 온갖 스캔들로 점철된 방탕한 삶의 종지부를 찍자. 그에게 안겨졌던 명성과 돈은 그의 삶을 방탕하게 이끌었고 그는 다 늙은 지금 도피처를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동안의 삶을 후회하며.


 * 옛 애인과 스펜스의 만남. 아줌마 기막혀 하며 곧 있으면 그를 팰 기세다.

 

 

 

 




 * 당황, 황당, 좌절, 우울, 분노. 방안에 있는 모든 집기 다 내던지고 밖에서 꼬마엠프에 앉아 담배꼬나 물고 기타 연주하고 있는 아들놈. 그리고 도너츠 사왔다며 먹으라고 건네주는 스펜스의 또다른 딸.

 

 

 

 

  카페를 하는 옛 애인과 서부 마을 호프집에서 노래를 하는 자신의 아들, 그리고 엄마의 유골을 품에 안고 다니는 한 여자아이. 잘나가는 영화배우였던 하워드 스펜스는 그렇게 자신의 삶과 마주한다. 가족을 찾아간 스펜스야 그렇다치고, 갑작스레 나타난 그를 마주하는 아들과 또다른 딸, 옛 애인은 어찌하라고. 오히려 안가는 것이 더 나았는지도 모른다. 평온한 그들의 삶을 깨뜨렸다. 어릴 땐 아빠가 없는 게 이상해서 물어보곤 했지만 지금은 적응되어 그냥 그럭저럭 악기연주하고 노래하며 살고 있는 아들놈은 갑작스레 나타난 작자가 자기보고 니 애비다, 그러니 오죽 황당할까. 또다른 딸은 되려 담담하다. 오히려 아비를 따라다니며 그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아비는 그 아들만 자신의 아이인줄 알았지 여자아이까지 자신의 딸인줄은 몰랐던 것.

  방탕과 방랑을 끝마치고 이곳에서 가족을 찾는 스펜스와 그들은 예고된 갈등을 겪게 되지만 이내 화해의 국면으로 접어든다. 촬영장을 떠난 그를 쫓는 사설탐정에게 걸렸다. 다시 나머지 장면 찍으러 돌아가야한다. 작별이다. 안녕. 끝내 그를 거부하며 분노를 표출하던 아들놈은 결국 그와 화해를 하고, 딸은 그의 품에 안긴다. 잘나가던 영화배우 스펜스는 자신을 구원해줄 가족의 사랑을 되찾았다.

  영화는 무덤덤하고 약간 지루한 듯 하고 밋밋하지만, 영화 속 캐릭터들이 너무나 재밌다. 스펜스를 제외하고도, 그를 찾아다니는 검은 선그라스를 낀 사설탐정의 말 한마디와 행동은 고요한 호수에 퐁당 돌맹이를 던진 듯한 웃음을 선사한다.

"여기는 스펜스의 트레일러. 여느 배우와 마찬가지로 방탕하게 논 흔적들이 보인다." 녹음.
"이 요리와 이 요리는 어떻게 다르죠?" (한참 가게주인이 설명하자) "그럼 물 한잔만 주세요"


 ← 바로 이 아저씨. 저 장면은 스펜스의 트레일러에서 녹음기에 대고 말하는 장면.

 

 

 

 

 

  또 그의 아들이랍시고 나오는 놈이나 그의 머리텅빈 애인,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또다른 딸의 말과 행동도 같은 상황에 처했지만 서로 다른 각자의 행동패턴을 보여준다. 특별히 흥겹지도 우울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밋밋한 이 영화는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살펴보는 재미만으로 대신할 수 있다.

 

  * 영화를 보고 난 뒤 알게 된 재밌는 사실 하나 : 영화 속 스펜스와 그의 옛 애인은 실제로도 부부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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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경고

  이번달에는 별로 영화를 보지 못했다. 보고픈 괜찮은 작품들은 꽤 있었지만 한번 외출에 쓰이는 비용과 현재 해야만 하는 일의 압박, 또 여러가지 신경써야하는 것들 등 정신적 여유의 부족에 기인한다. 오랫만의 가족들의 나들이. 아침에 운동을 다녀오고 밥을 먹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영화볼까, 그러신다. 당연히 영화 좋아하는 나는 귀가 솔깃, 분명 어제 해야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보고 갔다와서 하면 되지, 라는 마음으로 승락. 택한 영화는 뮌헨이었다. <홀리데이>를 볼까 했는데 롯데씨네마에서도 이 영화는 저녁 몇 타임 밖에 상영하지 않았다. CGV랑 갈등을 일으키더니 이번엔 롯데씨네마? 보고픈 영화가 극장을 점거하고 있는 자본의 힘에 따라 간판을 올렸다 내렸다 늘였다 줄였다 하는 것이 영 못마땅하다.

  1972년 9월 5일.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그날, 전 세계는 침묵했다. 그러나 2006년 지금 전 세계는 흥분한다. 왜 그때 세계가 침묵을 했는지는 모른다. 나는.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곳에서 벌어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작고 큰 충돌들, 아랍권 국가 사이에서의 수많은 다툼은 더이상 특별할게 없는지라 뉴스감이 될 수 없다. 자동차가 처음 생겼을 때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그것은 뉴스감이 되었겠지만, 자동차가 사람숫자에 버금갈(?) 지금에 와서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는 것은 동네에서 보던 익숙한 고양이가 어느날 길거리에 죽어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불행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은 언제나 있어왔고,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는 않을 듯 하며, 여기에 관심 갖는 이도 소수일 뿐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작품이라고, 에릭 바나가 나온다고 해서 섣불리 이 영화를 봤다간 실망감과 짜증과 지루함이 엄습하리라. 이 영화는 절대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문제에 관심이 없는 이가 재미삼아 볼 건 못된다. 테러영화라고, 액션이라고 해서 헐리우드 특유의 화려한 총격장면이나 전쟁씬이 등장하진 않는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다. 밋밋하고 지루하게 진행되는 이 영화가 두시간 반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는 건 재미를 기대한 관객들에겐 고역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별 하나가 수두룩하다. 아무리 유명한 감독과 배우가 영화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관객들에겐 '따분'과 '지루' 가 현실을 지배한다.  

  나름 잘 알지는 못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심지어는 스타벅스 10% 할인되는 신용카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스의 회장이 유대인이며(그건 죄가 아니다), 두 나라간의 전쟁에 이스라엘측 무기구입비를 대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다. 촘스키의 수많은 미국비판과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책들에도 관심(만) 있어 하는 나로서는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다.



* 아브너에겐 사랑스런 아내가 있다. 막 태어난 아기가 있다. 그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국가의 평화를 위해 테러단의 대장이 되지만, 그것은 평화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 아브너의 이스라엘 테러단. 왼쪽에서부터 차량 도주 전문 스티브, 대장 아브너, 뒤처리 전문 칼, 폭탄제조가 로버트, 문서위조 전문 한스. 저들 중 살아남을 자는 과연 몇이나 될까.

  72년 뮌헨 올릭픽 선수촌에서 테러가 발생, 이스라엘 선수단 9명이 사살되었다.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은 이곳에 침입, 선수단 9명을 인질로 잡았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모두 살해했다. 이후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는 이후의 사태를 다룬다. 물론 여기까지만 사실이고, 뒤의 이야기는 허구다. 11명의 검은 9월단이 모두 생존한 것으로 보고, 이스라엘은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복수를 가한다. 아브너(에릭바나)는 이 테러단(?)의 대장이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장난감 제조자에서 폭발물 전문가로 변신한 로버트, 차량도주전문가 스티브, 뒤처리 전문가 칼, 문서위조 전문가 한스로 구성된다. 총 5명의 소규모 테러단은 11명 중 6명에게 복수를 가하는데 성공한다.

  팔레스타인의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 그리고... 테러는 끝이 없다. 살육은 살육을 부른다. 피는 피를 부른다. 검은 9월단을 하나하나 찾아 복수에 성공하기만 하던 아브너에게도 두려움은 찾아온다. 나의 사랑스런 아내와 태어난 딸이 위험하다는 생각, 내가 도청을 당하고,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는 생각. 그래서 그는 침대를 들추고 찢고, 전화를 분해하고, 텔레비젼 뒤를 뜯는다. 자기 조직이 테러에 성공했던 방법들로 똑같이 당할까봐.

  테러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테러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내가 누군가를 테러하면 나 또한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테러당할 수 있다. 운이 좋아 살아남는다 해도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누군가 나를 죽일 거라는 두려움에 떨며, 내가 죽인 그 많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살아가야한다. 죽음과 다를 바가 무엇이랴.

  복수는 정의로운가?

  이스라엘 아브너의 테러단은 정의실현을 위해 복수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복수는 정의로울 수 있는가. 정의의 문제는 몫의 문제이다.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데서 비롯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가 성지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내가 상대에게 불의를 입었을 때, 나는 상대에게 불의를 돌려줘야하는가? 만일 돌려준다면 그것은 복수가 될 것이요, 돌려주지 않는다면 불의는 나에게서 그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이라는 불의를 당했지만, 이에 불복하거나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탈옥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불의를 행하는 것이라 하여. 나는 아테네로부터 불의를 당했지만, 내가 불의를 당했다고 상대에게 불의를 되돌려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나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버리므로.

  복수가 정의 실현의 한 방법임은 틀림없다.  복수라는 말 ekdikesis는 ek + dikesis 의 합성어이다. ek는 영어 from을, dikesis는 justice를 의미한다. 복수는 정의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복수는 정의 실현의 한 방법이다. 하지만 정의실현의 많은 방법 중 하필 복수를 택하게 된다면, 나는 상대에게 당한 불의를 갚기 위해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은 불의를 행한 상대와 내가 다를 바 없다는 의미이고, 내가 상대를 같은 인격체로서 대하지 않는 순간 나 역시 그가 된다.

  그들은 안다. 내가 당한 만큼 상대에게 똑같이 갚으려 한다면, 그와 나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도 테러를 한다. 복수를 한다. 왜냐면 내가 당한 것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해서. 결국 돌아오는 것은 더 큰 테러일 뿐인데도. 이 영화는 끊임없는 복수의 참상을 잘 보여준다. 내가 테러의 영웅이 되었다고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아브너는 뒤늦게 깨닫는다. 절망감과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면서. 두 나라 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선, 테러를 중단해야한다. 상대와 같이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 스필버그는 유대인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을 테러하는 것을 영화 줄거리로 삼고 있다. 영화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이 시작했고, 이스라엘인들은 그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 뿐이라고. 그러면서 아브너를 비롯한 5명의 테러단과 이스라엘에 면죄부를 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영화를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잘생긴 에릭바나의 테러단에게 동정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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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2-19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생각보다 별루었었죠. 스필버그의 지나친 휴머니즘 강조가 넘 역력해서.
가족애 부분도 그렇고. 아무리 중립적이려고 해도 이스라엘인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띄어서 더욱 그러했구요. 쩝.

마늘빵 2006-02-19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생각보다 별로였어요. 그냥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어떤지를 알려주는 정도였죠. 전 이걸 재료로 삼아 테러와 복수, 정의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본거구요. 원래 그럴 의도로 영화를 봤지만, 그렇지 않은, 재미를 찾기 위해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크게 실망했을거에요. 저도 실망했어요. 지루했고.

balmas 2006-02-22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스포일러 경고 때문에 페이퍼 본문은 안읽고 댓글만 읽는 나의 센스~~ ㅋㅋ

마늘빵 2006-02-22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발마스님 영화 보세요. 생각할 거리는 좀 있습니다. 박진감이나 흥미, 재미를 기대할 순 없지만.

balmas 2006-02-22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까요? 사실은 한번 보려고 했던 영화예요. :-)
 

 

* 스포일러 경고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 제목을 잘못 알고 있었다. 타임 투 러브로. 그리고 그 다음엔 타임 투 리브인데 그 '리브'가 'live'인 줄 알았다. 영어제목을 먼저 보지 않고 한글 제목만 얼핏 봤기 때문에 일어난 오해. 그러니 난 이 영화가 처음에 멜로인줄 알았고, 그 다음엔 죽음에 관한 영화인줄 알긴 했지만 leave 를 live 로 착각했다. 결과적으로 사랑이야기도 맞고, 죽음이야기도 맞다. 

  77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우리나라의 영화를 포함하여 최근의 영화들은 지나치게 러닝타임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다. 꼭 필요한 장면이라면 모르지만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하나의 유행처럼 러닝타임이 기본 두 시간을 훌쩍 넘긴다. <타임 투 리브>는 최근의 추세를 거스른다. 77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은 영화를 접하지 않은 이들에겐 아니 무슨 애니메이션이야, 라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은 아직 없다. 왜냐면 제목이 애니메이션 같지가 않잖아) 

  우리나라의 박찬욱 감독이 복수 3부작을 냈다면, 프랑소와 오종 감독은 죽음 3부작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미 2000년 <사랑의 추억>을 통해 죽음 1부를 내놓았고, 이번에 개봉한 <타임 투 리브>는 그의 죽음 2부작이라 한다. 감독의 이름도 처음 들었고, 그가 죽음 시리즈를 다루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이미 본 영화 <타임 투 리브>가 죽음 3부작에 들어간단 사실도 처음 알았다. 미쳐 보지 못한, 개봉했었는지 안했었는지 모르지만, 1부작을 찾아 보고 싶다. 

  제목에 관한 오해를 앞서 밝혔듯 이 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 채 본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꽤나 인상적이었고, 가슴에 스며들었으며,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잠시 더 머물며 영화가 남긴 여운을 즐겼다. 나 뿐 아니라 거기에 앉아있던 다수의 관객들이 그러했다. 물론 극장 측에서 불을 환히 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 그의 죽음을 유일하게 말했던 할머니. 그녀는 로맹에게 말했다. "오늘 밤 너랑 같이 죽고 싶다."

 

* 로맹. 마지막으로 나의 가족들, 그리고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젊고 능력있는 사진작가 로맹은 어느날 갑자기 쓰러진 뒤 의사로부터 말기암 판정을 받았다. 평균적으로 남아있는 수명은 3개월. 젊고 잘 나가는 그가, 아직도 살 날이 한참 남을 것이라 당연하게 여겼던 그가, 사형선고를 받았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 지금 그에게 소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 앞으로 3개월 동안 내가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 무엇을 하며 생을 마감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열심히 일하던 회사도 휴직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주변 사람들을 하나 둘 찾아가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항상 그를 걱정해주시는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고, 아웅다웅 만나기만 하면 다투던 여동생과 그녀의 어린 아이들을 몰래 카메라에 담는다. 여동생과는 전화를 통해 화해를 하고. 사랑한단 말을 전한다.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암선고를 밝힌 이는 할머니. 할머니는 나와 같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분이다. 그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사실이다. "오늘 밤 너랑 같이 죽고 싶다." 라던 할머니의 말은 죽음선고로 괴로워하는 로맹에겐 참 고맙다.




* 고속도로 식당 웨이트리스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로맹. 로맹은 그녀를 통해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어느날 고속도로에서 식사를 하던 중 웨이트리스로부터 긴급 제안을 받는다. 남편이 아이를 못낳으니 남편 대신 씨를 제공해달라는. 정자은행을 통해 수정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방법도 있건만 그녀는 왜 그런 방법을 택했을까. 전혀 모르는 낯선 젊은이에게. 하지만 이런 의문을 제기할 여유는 없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마감하기 전에 나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이다. 그는 처음에 거절했지만 다시 찾아와 세 사람은 섹스를 한다(그는 동성애자다). 로맹, 웨이트리스, 그의 남편. 쓰리섬 섹스를 통해 절정에 도달하고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있고, 로맹은 담배를 한 대 문다.

   시간은 흘러 3개월의 끝무렵. 암으로 인한 고통은 멋진 그의 모습을 빼짝 마른 병든 몰골로 만들어놨다. 삼각팬티를 입고 바다에 들어가 마지막 삶의 숨결을 느낀다. 파도치는 물결이 그의 피부를 자극한다. 찰싹찰싹. 이것이 살아있다는 느낌이다. 차갑게 속삭이는 바닷물. 모래사장에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고 눕는다.

  살아있다는 건은 어떤 것일까, 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엄마 뱃속에서 세상을 향해 나오는 순간 처음 숨을 들이마시는 것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일까. 우리가 숨을 쉬고 음식을 먹으며 생을 연명해나가는 것.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살아있다는 것은 삶과 어떻게 다를까. 영화는 매우 짧지만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살아있음, 죽음, 삶, 관계, 사랑 등. 그에게 남은 3개월은 그가 살아온 기간에 비하면, 또 그가 앞으로 살 날에 비하면 매우 짧지만 그는 3개월 동안 '살아있었다'. 죽음 선고를 받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홀로 남은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매우 고독할 것만 같다. 왜 그랬을까.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지 않도록 숨겼던 것일까. 아니면 남은 인생을 혼자서 즐기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죽은 다음 제 3자를 통해 그의 죽음을 접해야 하는 가족들은 어떤 심정일까. 그는 때로 침대에 누워 아파하기도 하고, 홀로있음에 슬퍼하기도 하며 운다. 매우 조용하고 차분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담담한 나머지 강렬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눈물을 자아내진 않는다. 하지만 가슴 먹먹하게 만든다. 차라리 죽음 앞에 엉엉 울어버렸으면 좋겠건만 그는 절대 소리내어 크게 울지 않는다. 나의 죽음을 모든 이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삶의 끝을 준비할 뿐이다. 죽음 앞에 담담할 이는 아무도 없다. 담담한 듯 보이지만 그것은 더 큰 슬픔을 안고 있다. 가슴 속에 홀로 담아가야할 많은 추억들. 만일 내가 3개월 뒤에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스물 여덟의 창창한 나이에 나는 죽음을 생각진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도 죽음은 닥칠 수 있다. 내가 과음을 하지 않는다고, 담배를 피지 않는다고 해서 암이 나를 피해가는 것은 아니다. 암이 아니더라도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들은 수없이 많다. 다만 사람의 평균수명을 나의 수명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의 죽음을. 내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언젠가 난니 모레티 감독의 <아들의 방>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 또한 죽음을 다루고 있다. 아들의 죽음을.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이 아닌 아들의 죽음을 맞이한다. 아들의 싸늘한 시신이 들어있는 관을 손수 닫고 어루만진다.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의 가족의 삶을 일상 속에서 그려낸 영화였다. 죽음을 다루는 감독의 시선과 죽음의 주체와 과정은 다르지만, 두 영화 모두 인생의 종착역인 죽음에 대해 차분하게 그려냈다. <타임 투 리브>는 아름다운 이별의 모습, 아름다운 죽음의 모습을 그려냈다. 당신은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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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리 2006-02-12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리뷰 읽다보니 눈물이 나네요.. 아~ 주책.. 눈물 땜에 안보여 사라집니다... 죄송!

마늘빵 2006-02-12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리님. 아. 영화 본 저도 눈물까진 흘리지 않았는데 리뷰보고 눈물 보이시면 어떡해요. 영화 좋습니다. 기회되면 보세요.
 



   왜 몰랐을까. 그때 사랑이었다는 것을. 왜 지나쳤을까. 그 사람인줄 알면서도.
   사랑은 언제나 '후회'입니다.
 


   
   지금의 난 과거의 나보다 사랑고백에 있어선 서툴지 않다. 해보고 또 해보고 그러다보면 아 고백은 이렇게 하는거구나, 이렇게 해서는 안되는구나,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게 된다. 대학 3학년, 첫사랑이 다가왔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매우 늦은 시기였다. 멜로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지만 첫사랑의 기억은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도 너무나 뚜렷하다. 그리고 소중하다. 상처받지 않게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해놓아야만 할 것 같은 기억이다. 소중했고 조심스러웠기에 난 멜로 영화를 볼 때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지도 모르겠다.

   3학년 시절, 한살 어린 다른 학교의 여자아이에게 사랑고백을 했다. 일년간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다른 사람이 있었기에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고, 그저 그냥 연락하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러다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 그 전화가 상황을 바꿔놓았다. 함께 만나 영화를 보고, 대공원에 놀러도 가고, 함께 한 우산을 쓰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난 고백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고백이 쉽지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참 둘다 고생했다 싶다.  

  어느 쌀쌀한 초겨울의 날씨. 그녀와 난 여의도 공원에 있다. 걷다 걷다 벤취에 앉았다. 날씨는 참 추웠지만 사람들이 하나 둘 우리 앞을 지나다녔다. 난 그곳에서 고백할 생각이었으나 사람들이 자꾸만 지나다니는 통에 한동안 말 없이 멍하니 위 아래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글쎄 시계를 볼만한 여유는 없었으니 모르겠지만 적어도 40분 이상이 그렇게 지났을 거다. 어쩜 한 시간 정도 될지도. 그리고 너무나 가슴이 답답하고 터질 것만 같아 고백했다.

 

  "나 할말이 있는데..."
  "뭔데...?"
  "...... (또 한동안 적막) 나... 너... 좋아해." 
  "그래서?"
  "음....... (또 한동안 적막) 우리... 사귀자..."



  아휴 그 말이 뭐 그리 어렵다냐. 그런데 정말 어려웠다. 그 말을 하려고 마음먹기까지도, 하려고 그 추운날 그 공원 벤취에 가기까지도, 가서 40분가량을 침묵하며 앉아있는 것도, 그리고 막상 말을 꺼낸 것도 너무나 너무나 어려웠다. 그러나 말하고나니 후련했다. 답답했던 가슴이 펑 뚫릴 것만 같았다. 고백하기 어려운 것은 상대방이 나의 사랑을 거절할까봐서다. 나 역시 그랬다.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면 이 사람이 도망갈까봐. 나한테서 멀어질까봐. 그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무서웠다. 거절당하느니, 그녀가 나에게서 멀어지느니, 지금 이대로가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러자니 내 가슴은 너무나 답답했고 터질 것만 같았다. 말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래서, 고백했다.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차마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 말은 좋아한다는 말 보다 더 힘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추운날 손 꼽 붙잡고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고, 버스에 타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집에 데려다 줄때까지.  

  처음에는 그냥 관심이었는데 그게 어느새 내 마음 속에 사랑으로 자리잡은 걸 알았을 때, 난 너무나 행복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하지만 또 두려웠다. 그녀에겐 다른 사람이 있었고,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1년이 지나고 힘들게, 힘들게 고백했다. 사랑을 고백했다. 우리는 '인연'에서 '연인'이 되었다.

 



* 이 사람이 내 사람일까 고민하는 사이, 내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 사랑은 용기 있게 고백하는 자의 몫이다.  



* 나 할 말 있어. 알아 무슨 말 할지 알아. 그러니까 하지마.

 

  사랑하지만 사랑이라 말하면 도망칠 것만 같았다는 연수, 그리고 1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사랑인줄 알았다는 우재.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나 답답하다. 내가 가서 얘 너 사랑하고, 너도 얘 사랑해,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이 먹으면 뭐하냐. 사랑고백 하나 못하고. 사랑에는 나이란 아무 것도 아니다. 나이를 먹어도 사랑고백을 쉽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렵게 힘들게 한 마디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은 나이를 먹는다고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새롭고 조심스럽다. 놓치면 추억으로 남고, 잡으면 사랑으로 머문다. 추억을 간직할지, 사랑을 이룰지는 나에게 달려있다. 추억은 혼자 가지지만, 사랑은 둘이 갖는다. 한쪽에선 머뭇 머뭇 거리다가 말 못하고, 한쪽에선 눈치 못 채서 모르고. 사랑은 너무나 어렵다.

 

* 선술집 한 구석에서, 이별을 고하는 남자와 받아들일 수 없는 여자

   이 사람이 과연 나의 사람일까? 생각하고 고민하며 시간 보내는 사이 사랑은 떠난다. 이 사람이다 싶으면 잡아야 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다. 여자건 남자건 이 사람이다 머리에 번쩍이는 순간, 가슴이 아련한 순간 잡는거다. 내가 어떻게 먼저 고백해, 에이 나랑 얘랑 비교가 돼나, 머리 속으로 계산하고 고민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은 떠난다. 우재가 연수와 하룻밤을 지새고, 연수가 우재의 집을 찾아갔을 때, 계단을 올라오던 우재가 연수에게 하는 말. "미안하다..." 연수 되뇌인다. "미.안.하.다......" 그리곤 계단을 내려간다. 살며시 젖은 눈으로. 언젠가 내가 누군가에게 했던 말이다. 미안하다. 우재에게 미안하단 말을 듣고 계단을 내려가는 연수에게 나는 너무나 미안했다. 나에게 미안하단 말을 듣고 되돌아가는 그녀에게 나는 너무나 미안했다. 미안하다. 참 쉬운 말이다. 내뱉기 쉬운 말이다. 미안하단 말 한마디면 다 되는 줄 알아? 그렇다. 미안하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것은 그녀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그녀에 대한 미안함 마음을 조금 줄여볼 수 있는, 나를 위한 한 마디다. 난 그 말을 함으로써 모든 것이 해결됐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믿고 싶은 것일 뿐이다.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쉽게 내뱉을 수 있지만 쉽게 내뱉어서는 안되는 말이, 바로 '미안하다' 이다.

    우리 그만하자. 우리 헤어져. 쉽게 말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상대방의 가슴에 너무나 큰 가시를 찔러넣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별을 고하는 사람은 이별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에게 쉽게 그 말을 내뱉는다. 그만두자. 헤어져. 영화 속에서 우재와 연수가 다시 만나 선술집에 들어갔을 때, 한 쪽에선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그만두자. 여자는 말한다. 내가 잘할게. 이별을 고하는 남자와 어떻게든 이별을 막으려는 여자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다.

   추창민 감독은 말한다. " '내가 이 여자를 정말 사랑하나? 모르겠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나중에 결국 헤어지고 나서 '아, 내가 이 여자를 정말 사랑했구나' 하고 깨닫는거죠." 그래 맞다. 사랑은 이별 뒤에야 비로소 느껴진다. 아 이 사람이 내 사람이었구나. 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내 사람은 나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곁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고민된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인가? 정말 그럴까? 그러지말고 잡아라. 그 사람이 네 사람 맞다. 고민하고 머리 굴리지 말고 잡아라.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고민된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해버리면 도망갈까봐. 그러지말고 고백해라. 그 사람 도망가지 않는다. 너에게 감동받는다. 갈등하지말고 고백해라.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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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 2006-02-06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찮아도 이 영화를 보려고 했는데 아프락사스님의 글을 보니 더 보고잡네요^^ 퍼가니다

마늘빵 2006-02-06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네. 이 영화 정말 좋았어요. 추창민 감독은 의외지만 이런 재주가 있군요. 송윤아와 설경구도 좋은 캐스팅이었습니다.

하늘바람 2006-02-06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고 싶은 영화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