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얼굴 서정시학 서정시 108
최동호 지음 / 서정시학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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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첫 시집으로 최동호 선생님의 "얼음 얼굴"을 읽었다. 양면적이다. ‘선생으로서 설교할 때는 참 불편한데, 노시인으로서 추억을 더듬을 때는 아름답다. 이런 분류로 보면 시집의 1부는 주로 설교조의 시들이고 2~4부는 추억을 노래하는 시들이다. 검집에서 검을 빼지 않아야 검이라는 시론으로서의 "명검"이라는 첫째 시부터 시인보다 30년 이상 어린 나로서는 답답할 따름이다. 검은 써야 제 맛 아닌가? 특히 오늘날 같은 시대에 말이다.

 

지인(至人)

 

옛날의 지인들은

죽음을 진짜로 알고

삶을 가짜로 여겼는데

오늘의 지인들은

죽음도 삶도 다 가짜로 안다

 

잘나고 똑똑한

가짜들이 인터넷 속에서도 티브이 속에서도

사랑하고 알을 까고

술집과 백화점을 누비며

마네킹 미인에게 돈을 뿌리고

죽음도 삶도 없는 화려한 스크린 인생을

 

멋지게들 신바람나게 살고 있다.

 

 

오늘의 지인들은 죽음도 삶도 다 가짜로 안다, 라는 판단은 곱씹어볼 만하다. 至人, 즉 지극한 위치에 선 사람들. 예전 지인들, 예를 들어 석가모니나 예수와 같은 이들은 지상에서의 삶이 헛되며, 죽음(또는 죽음 뒤의 삶)을 진짜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은 삶을 그냥 허비해 버릴 뿐이라는 지적. 옳은 말씀이시지만, 이 시의 발화 위치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화자는 그 오늘에서 벗어난 어떤 초월적 위치에서 이 모든 것은 가짜라고 말한다.

이러한 설교보다는 오히려 들국화의 "이것만이 내 세상"이라는 단언이 더 공감이 간다. 우리는 쉽게 남이 삶이 가짜라고 단언하기 힘들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삶이 있고 아픔이 있을 것이다. 멀리서 나는 내 삶과 아픔으로서 그들의 그것들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그게 시의 자세가 아닐까.

그러나 앞서 말했듯, 노시인이 추억을 노래하기 시작할 때, 즉 자신의 삶에서 시를 시작할 때는 참 아름다운 시편들이 흘러나온다.

 

들꽃에 숨겨진 히말라야

 

히말라야는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베니냐 칸막이 옆방에서 소근거리는 소리로

며칠째 밤잠을 설치고 일어나

키 낮은 산집 주인들과

구름 인사 나누고

바람과 함께 밤이슬 털고 있던

 

마당가 낮은 돌담 앞에서

발걸음 막 옮기려 할 때 알 수 없는

미소가 한순간 언뜻

내 콧등을 스쳐지나갔다

 

그 엷은 바람의 기미, 그때 알아채지는

못하였으나 십 년 너머 지나

우연히 꺼내 본

그날 사진에

높고 신성한 산의

가장 아름다운 미소가 살랑거리고 있었다

 

돌담 사이 홀로 핀 꽃에 숨겨진

산의 미소, 콧등을 건드리는 꽃잎처럼 다가와

환하게 햇살 퍼트리며

이슬도 채 말리지 못하고 가는 사람에게

 

설산의 정상으로 향하는 오솔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원채 이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모티프를 좋아한다. 영화 "러브레터에서처럼, 함께 있었고, 경험했지만, 나는 몰랐고 상대는 알았던 일들. 그래서 상대의 반응을 사소하게 흘려보냈지만, 훗날 알게 되는 상대의 마음에 의해 과거의 그 반응들이 다른 의미로 다가오며, 과거가 일회적으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의미를 띄고 그 순간이 생생하게 다시 살아난다. 주관의 파편적인 경험이, 총체적으로 다시 구성되는 느낌.

위 시의 은유들은 새롭지는 않지만(최동호 시인의 거의 모든 은유가 그렇다), 친숙해서 적절하다. 산의 미소로서의 들꽃. 사소해서 당시에는 스쳐지나갔지만, 오랜 후에 그 장면을 찍었던 사진으로 과거의 경험이 재해석 된다. 그때 내 콧등을 스쳐지나갔던 엷은 바람의 기미는, 당시에는 너무 작고 일상적이라서 스쳐지나갔던 꽃이었다. 그래도 그 순간 나는 어떤 작은 설레임을 느꼈을 것이고, 곧 지나치고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10년이 더 지난 후에 꺼내본 그때 찍힌 사진에는 내 얼굴 옆으로 작은 들꽃이 피어있었고, 그 들꽃은 히말라야 정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들꽃이야말로, 히말라야의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던 것이다!

낮은 산집 주인들과 낮은 돌담과 들꽃과 오솔길이라는 어찌 보면 상투적인 '친숙함'과 히말라야와 설산의 정상이라는 대조가 너무 극명해서 감동이 조금은 휘발되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러한 대극이 실제 일어났던 일이었던 것을.. 그리고 이는 어쩌면 시인의 태극적인 사유 속에서 설명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극은 다른 극으로 통한다.

이러한 극과 극을 대조시며, 동시에 연결시키는 시편들과 함께 눈에 띄는 것은 불교적인 사유인 티끝 안의 우주가 담겨있다는 생각이다. 시인은 매우 작은 것 안에서 무수히 많은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것을 본다.

 

가을빛 목소리

 

가을빛 속에는 쩌렁쩌렁 울리던 할아버지 목소리가 숨어있다

숨죽이고 대청에 기어들었던 유년의 강물도

운행을 늦추고 스러져가는 빛을 잡으려고

잔 물살 참방거리고 있다

 

저무는 가을빛 속에는 낮잠에 빠져 먼 길 가다가

불현듯 멈춘 내 발걸음이 있다

해질녘 등 돌리고 기다리던,

어린 시절 물에 빠져 죽은 동무가

 

장독대 뒤에서 연기처럼 살아나와

하염없이 스러지는 빛 속에서 가냘픈 목소리로

잠깬 나를 부르고 있다

불러도 대답하지 않던 동무가

 

돌연히 고개 돌려

등뒤 제 목소리를 묽그러미 들여다보는 가을빛 속에는

물에 젖은 노란 낙엽처럼,

숨어서 듣지 않으려 해도 등에서 떼어낼 수 없는 애잔한 목소리가 있다

 

나에게는 위 시가 이 시집 "얼음 얼굴" 중 가장 아름다운 시이다. 연 안에서의 도취법과 연 밖에 행이 걸려 중의적 의미를 적절하게 살려낸다. 해질녁 등 돌리고 기다리던 동무는, 내가 낮잠을 자는 바람에,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다 혼자 강물에서 놀다 죽었을까? 그가 그렇게 부르던 나, 내가 그렇게 부르던 그. 이것이 겹쳐지며 환청처럼 들리는 목소리. 이는 모두 가을빛 속에 다 숨겨져 있다. 이러한 사유는 다음과 같은 시에서 직접적으로 들어나 있다.

 

지구 뒤꼍의 거인

 

어린 시절 우주에 거인이 살고 있다고 상상했다.

 

지구를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거나

태양을 한 점 불쏘시개로 여기는 거인이

 

지구의 뒤꼍 우리 집

장독 감나무 옆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줌 흙이나

바람에 날려 보이지 않는 먼지 속에는 지금도

 

우주를 움직이는 힘을 가진 거인이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 치마폭에 숨어서 장독대 옆 감나무 잎을 반짝이게 하고

 

메주 덩어리 곰팡이를 발효시키는 바람의 씨앗을 키우며 살고 있을 것이다

 

 

지구를 공깃돌처럼 가지고 노는 거대한 거인, 그 우주의 신비와 같은 거대함은, 메주 덩어리 곰팡이를 발표시키는 보이지 않는 먼지와 같은 작은 세계에도 들어있다. 온 우주가 한 띠끝 안에 들어있는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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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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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방인에는 세 층위의 이방인이 있다. 주인공 뫼르소라는 이방인, 뫼르소가 '아랍인'과 무어인'이라고 부르는 이방인, 그리고 이국의 독자인 '나'라는 이방인.

   줄거리는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쏘아죽이게 되는 것이 1부. 2부는 재판과정과 독방에 갇혀서 독백과 신부와 대화를 하면서 죽음에 대한 단상들이다.

  탈식민주의의 세례를 받은 독자로서는, 뫼르소가 '아랍인'이나 '무어인'이라고 지칭하는 인물들이 신경쓰일 수밖에 없다. 뫼르소는 다른 프랑스인으로 여겨지는 인물들은 이름을 부르는데, 유독 '무어인'과 '아랍인'들은 도드라지게 국적이나 인종으로 지칭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 소설에서 다른 프랑스인들은 이름을 부르는데, 유독 '아시아인' 몇명이 나를 보고 있었다. 라는 문장을 마주했다고 해보자. 이것이 어떤 느낌이겠는가? 불어로 쓰인 것을 한국어 번역으로 읽고 있는 이방인 독자로서는 이것이 매우 도드라진다. 이방인 독자로서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밤을 새는 것도, 이것이 의례 그렇게 하는 것인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나중에 재판정에서 사람들이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전혀 울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시삼는 것도, 이것이 얼만큼의 문화적 일탈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이 두 층위의 이방인과 서술자가 표나게 강조하는 뫼르소의 이방인성이 만나면서, 더욱 이 텍스트는 혼란스러워진다. 서술자가 강조하는 뫼르소의 이방인성은, 아마도 타인의 시선 내지는 문화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솔직함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이방인성은 한편으로는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의 이방인성과도 닿아있다. 사람을 죽여놓고,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양심의 가책을 꾸미지도 않는 것. 반사회성, 비사회성의 이방인성은, 독자로서 시공간의 거리가 있는 문화권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과연 이것이 얼마만큼의 이방인성인지를 의아하게 한다. 마지막에 타인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아무도 없다는 깨달음을 위해 이 소설은 지금까지의 줄거리를 전개해온 것과도 같은 모양새를 띤다. 


"참으로 오랜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방인의 마지막 대목이다.사람은 모두 홀로 죽는다는 이 아포리아. 그럼에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시지프스의 신화가 여기에 슬쩍 암시된다. 모두와 홀로. 그리고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이라는 역설. 모두와 홀로라는 대립은 정다운 무관심이라는 역설과 연결된다. 그리고 이 둘의 긴장은 급작스럽게 '행복'이라는 감정으로 해소되고 만다. 그리고 이는 다시,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행복감과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증오라는 대립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결말은 급작스럽고, 모순적이라, 소설적이라기 보다는 시적이다. 혹은 종교, 특히 불교적이거나 역경의 태극 등을 떠올리게 한다. 의미없는 삶의 의미있음, 내지는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불치병이 모든 생명에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다. 모든 것은 사소하지만, 그 사소함이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 이 필멸자의 행복감이 구경꾼들의 증오의 함성을 맞이하기를 희망하는 것은, 그 구경꾼들이 죽음을 잊기 위해 혹은 그 사소한 '사회'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양으로 점찍은 자신을 바라보는 무지한 시선을 느끼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그러한 증오가 결국은 본질적으로 죽음이라는 것 자체를 향해 있다는 것을 통해, 오히려 그 군중들과 연대해서 자신의 죽음을 증오하기 위해서일까. 혹은, 모두 홀로 죽지만, 정말 홀로 죽지는 않게, 즉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다만 자신보다 조금 늦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 동료들이 자신의 죽음의 순간에 주위에 있기를 바라는 것일까.


이를 읽으며 떠올랐던 것은 윤동주"서시"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라는 대목이다. 한명의 사형수를 둘러싼 증오의 함성과 전혀 반대되는 위치에 있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


죽어가는 것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 그리고 그것의 위대함. 그러나 한편으로, 윤동주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자신과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저 멀리 별처럼, 가슴 깊이는 자신도 죽어가는 것임을 깨달았어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기독교적인 신의 자리에서 그것들을 사랑하는 것. 윤동주 시의 순교자 이미지들은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완전한 소멸로서의 죽음을 거부한다. 순교를 한다는 것은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뚜렷한 증거이며 따라서 영원한 천국의 약속이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에, 윤동주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며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정다운 무관심의 세계에서 모두 홀로 죽어가며, 덜 외롭도록 증오의 함성이라도 기대하는 이방인.

하느님의 따뜻한 눈 아래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시를 쓰는 시인.

안타깝게도 나는 전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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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위안부 - 식민지지배와 기억의 투쟁
박유하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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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서 여러가지 지점을 배웠고, 동의하는 부분도 많다.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압적인 물리적 폭력을 이용하여 납치당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일본군도 문제지만(구조적인 강압성), 조선인인 경우가 많은 주인(포주)가 직접적인 강제력이라는 것. 또 이 '위안부'는 상당부분 조선에서도 하위층 여성으로서 조선인 부모-사회에서도 버림받은 존재라는 점이다.
  이것은 동의하는 것이고, 만약 기존 논의나 담론들이 이를 고의적으로 은폐함으로써, 위안부 문제를 조선 vs 일본의 구도로만 이해하도록 했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위안부 문제에서 민족단위로 선을 긋는 것은 핵심적인 문제들을 은폐한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섹슈얼리티, 계급들이 심층적으로 얽혀있는 것이고, 그 위에 부차적으로 민족의 문제가 감싸져있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일본인 위안부도 있었다. 이 문제에서 조선인 남자 자본가보다는 일본인 하위 여성이 조선인 위안부에 가깝다. 

조선 vs 일본의 구도 속에서 위안부가 '가녀린 조선의 소녀'로써, '우리'가 '지켜주지 못했다'라는 기존 민족주의적-가부장적 담론을 공격하는 것은 중요하고, 위안부들의 일상 속에서 일본 군인들과의 '동지적'(박유하 선생의 표현. 그런데 이 개념은 문제가 많다. 분명 구조적 강압성은 일본군에 의해서 제기된 것이고, 성구매자도 일본인이다. 이는 현대 성매매 현장에서 성매수자 남성과 성매매 여성 중 일부가 서로 사랑하게 된다고 해서 '동지적' 관계라고 지칭하기 어려운 지점과 유사하다. 즉 일부 사례의 표면적 관계를 일반화해서 개념화할 수는 없다. 둘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는 결국 성판매를 강요당한 것과 성구매자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관계가 있었다는 것도 인정할 수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를 기억하는 방식 자체가 '상처받은 자신만을 기억하는 일은 협력하고 순종한 기억을 배제하고 배척한다. (..) 하지만 그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고 등신대의 자신을 마주하지 못한다. 그건 자신의 신체에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가능한 한 보지 않으려고 하는 심리와 한없이 닮아 있다' (134)는 대목은 곱씹어볼 대목이다.

해방 이후 '우리'가 식민지를 기억하는 방식 자체는, 민족주의적 정통성을 지닌 국민-주체로써, 협력-친일을 단죄하며 나머지 조선인들은 순진무구한 피해자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일상은 '회색'지대로 남겨져 있는 부분들이 분명 많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일본인들 중에도 착한 사람들이 있고 나쁜 놈들도 있다. 조선인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러한 재구성은 상상적으로 민족을 구분선으로 해서 피해자-조선/가해자-일본을 나눈다. 하지만 여기서도 본질은 민족이 아니다. 이완용과 같은 친일파-지주계급은 얼마나 잘먹고 잘 살았는가? 여기서도 본질은 피지배층과 지배층의 문제이고, 조선이 피지배이고 일본이 지배로 환원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조선인 엘리트층이면서 일제와 협력한 이들 또한 지배층으로서 조선 민중을 착취하고 탄압했고, 이는 해방 후 '지금-여기'에까지 이어지는 계보이다. 따라서 비판하는 지점은 '일본'뿐만 아니라, '일제', 즉 일본 정부와 지배층과 이에 협력해서 공동으로 통치작업을 한 조선인 지배층이다. (그리고 이들의 계보는 지금 오늘날의 한국에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논의가 동의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문제는 그런 동지적 상황을 그저 예외적인 것으로서 배제해버린 일이 '동지적' 측면에만 혹은 '매춘부'적인 측면에만 주목하려 했던 이들의 반발을 불렀고, 대립을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위안부의 증언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은 것이, 다시 말해 위안부의 '피해'에만 주목하고 나머지는 외면했던 것이 일본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문제의 해결을 가로막은 셈이다.' (139)

앞서 말했듯이, 그런 동지적 상황은 '예외적'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이다. 즉 층위가 다르다.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의 본질, 즉 어떤 특정 위안부와 어떤 특정 일본군의 관계가 아니라,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라는 규정 자체의 본질적인 측면이 있고, 그 본질과는 구분되는 다른 층위의 일반화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이것이 마치 여러가지 '본질'들이 있는데, 한 측면만 부각했기 때문에 다른 측면을 부각한 이들의 반발과 대립을 심화시켰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오히려, 위안부와 일본제국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인 구조적 폭력성이라는 그 본질을 부각하고, 이를 고발해야 한다. 

박유하 선생이 앞서 '총체적'으로 위안부의 증언을 보아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부언하자면, 총체성이란 본질과 관계 되는 것이지, 통계적으로 모든 특성들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

때문에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를 '동지적'이라거나, 그들은 (자발적) '매춘부'라고 하는 이들은, 본질을 무시하고 특수한 관계만을 지적함으로써, 구조적 폭력에서는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배울 점은 분명 있다. 위안부 문제는 '민족' 문제이기 이전에, 섹슈얼리티와 계급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 섹슈얼리티와 계급의 문제, 그 구조적 폭력성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위안부와 일본군의 관계의 한 '부분'이 동지적인 관계였고 매춘부적인 특성이 있음을 지적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위안부와 일본군 관계의 '본질'을 파고들어야 한다. 만약 나라면 이를 현대의 성매매 노동자(이 개념도 문제적이지만, 일단은 사용하도록 한다.)들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는 것을 통해 더 사유할 지점등을 생성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해외 원정 성매매는 '해외 원정'이라는 측면 때문에 위안부와의 공통점/차이점을 더 잘 사유해서 그 본질에 대해 고찰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여기에 제국주의 문제도 중요한 차원이 있다. 일본 내지 여성과 조선인 여성 사이는 분명 법적인, 실제적인 차별이 있었다.)

성매매 노동은 과연 자유로운 선택일 수 있는가? 역사적 사례로서, 그 구조적 폭력성의 단계가 극심했던 위안부와 어떻게 같고 다른가? 위안부 문제는 여러 차원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당사자가 아직도 생존해 계시고, 고통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는, 많은 성매매 여성들이 유사한 '구조적 폭력' 속에서 성매매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속되고 있는 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판금에는 반대한다. 이를 한국의 나아가 일본의 공론장에서 논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열차게 논의해야 한다. 박유하 교수는 분명, 처음에는 일본어로 일본의 '중도'내지 '우익'을 향해 이 글을 썼고, 그 와중에 그들의 논리와 감성을 이용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단 박유하 선생의 대상독자는 위안부에 대해서 심정적 동정을 지니고 있으면서, 일본군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국인 뿐아니라, 오히려 더 중요하게 말을 걸고 있는 대상은 일본의 우파 지식인 내지, 자신이 합리적인 사유를 하고 있다고 믿으며 위안부의 존재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일본인이다. 한국 독자들은 당연히 '한국어'로 쓰였기 때문에, 이것을 한국 대상독자로 인식하고 왜 '우리' '한국인' 교수가 이렇게 '친일'적으로 썼는지 분노하는 것이지만, 사실 이 책의 원고는 일본어로 2011년에 연재되었던 것이고, 선생은 거의 고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물론 일본어로 썼다고, 일본인만 보는 것은 아니고, 한국어로 썼다고 또 한국인만 보는 것은 아니다. (전자가 더 독자가 넓기는 하다.) 그럼에도 박유하 선생이 글을 쓸 당시의 대상독자가 일본인임을 인식하고 읽었을 때, 말을 걸고 있는 위치 때문에 선생의 몇몇 무리한 논점들이 일종의 논리적, 감성적 설득의 일환으로 도입된 것일 수도 있다는 짐작을 하게 한다.

즉 '우리'의 입장에서 이 책의 몇몇 대목들은 위안부=참전 병사의 고통을 동급으로 놓는듯 하여,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의 의도는 참전 병사에 더 심정적으로 가까운 일본 우익들에게, 그들과 거리가 먼 타자인 '위안부'를 다가가게 하기 위한 장치로도 읽힐 수 있다.

이렇게 의도를 '이해'한다고 해서, 박유하 선생의 논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박유하 교수의 이 책과 논쟁하면서 일본의 중도와 우익의 논리를 논파할 수도 있다. 한일 위안부 학회, 한일 위안부 토론회 등을 만들고, 관련 논점들이 더 철저하게 파헤쳐져야 한다.


이 책이 판금되면 누구에게 이득이 될 것인가?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이 한국의 우익 내지는 이 책을 '친일'이라고 낙인 찍는 것에 만족하는 자들은 '정의는 이루어졌다'라고 생각하며 변화하지 않을 것이고, 일본 우익과 극우는 저러니 한국과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하고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자신들의 방향이 고착될 것이다.


민주사회에 시민이라면, 이러한 이슈에 대해서 사유하고 따져봐야만 한다. 당연히 힘든 일이다.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는 한국같은 엄청난 '피로 사회'에는 더 그러하다. 그럼에도, '닥치고 친일' 그러니 '판금' 같은 논리가 확장되면, 이 사회는 더 파쇼화되고 말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자의 무서움이 아우슈비츠를 일어나게 한 중요한 요소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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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4-07-16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 논란이 되고 있는 그 책이네요. 저자의 이름은 서경식 선생의 저서에서 하도 언급이 되어서 알고 있었는데... 한번 읽어 봐야할 것 같네요.

기인 2014-07-16 23:10   좋아요 0 | URL
네 판금이 아니라 널리 읽고 많은 논의가 필요한 책 같습니다 ㅎㅎ
 
감자 먹는 사람들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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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경숙의 소설들은 자전적 이야기의 형태를 (가장하고) 띄고 있다. 여성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하여 소설쓰기가 소설에 등장하며 소설을 쓴다. 반복적인 문장 구조, 형태에의 고민,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등. 언젠가 본격적인 작가론을 써봐야 할 인물.


모여 있는 불빛, 에서 모여 있는 불빛이란 무엇인가.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던 세대.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을 탈출해야 했고, 또 돌아오는.


정지용의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이 아니라는, 화자의 변화. 산업화 시대. 일종의 디아스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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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구된 휴지 문학의 탐정 한국문학 1
이범선 외 지음, 이지훈 엮음, 김형준 그림 / 삼성출판사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시골의 영감이 도시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휴지)를 표구한 화가의 이야기이다.

그 화가의 친구인 은행원이 화가에게 표구를 부탁한 것이데, 이 휴지는 순박한 지게꾼이 돈을 싸고 온 종이였다.
지게꾼을 바라보는 은행원의 시선, 그리고 화가의 시선, 이를 읽는 독자의 시선들이 얽힌다. '순박'이라는 형태로 단순화하는 시선이 불편하다. 모든 시대적 상황이 지워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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