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입학 한 후, 내가 둘러본 나라는 중국(2번), 북한, 그리고 체코다. 우연찮게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거나 그랬던 국가를 둘러봤다. 모두 나름 설레임이 있었는데, 체코를 다녀오고 나서는 감회가 새롭다. 이것은 아마, 가는 비행기와 밤에 호텔에서 읽었던 쿤데라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거기에 카프카도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그 멀리까지 가서, 책이나 읽었냐고 한다면. 장소에 따라서 감회가 다른 법이고, 그 곳이 아니면 그런 느낌을 못 받았을 책이니, 가서 '책이나' 읽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짜피 일주일쯤의 여행이란, 보여주고 싶은 것이나 보는 '관광' 이상이 되기 힘들다. 내가 정말 준비를 많이 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을 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애인이 체코로 교환학생을 가는데 유람겸해서 다녀온 것.
중국(2002년) -> 북한(2005년) -> 중국(2006년) -> 체코(2007년)
처음 중국에 갔을 때는
"여행을 다녀와서 방학 동안의 몇가지 계획을 잡았다.
맑스 <<자본론>>을 이제는 꼼꼼하게 분석적으로 읽어볼 계획이다. 다행히도 똑똑한 선배들과 후배와 같이 읽게 되어서, 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포퍼의 날카로운 비판을 내 눈에서 벗겨내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다시 집어 들어야 되겠다. 아니, 조정래 '선생' 말이다.
아무래도 중국은 제2의 루쉰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
라는 감상이었고, 그 후 자본론을 열심히 읽고 나름 '맑시스트'라고 스스로 규정하게 되었다. 그 전에도 맑스에 기울어져 있었고, 주위 사람들도 그렇게 보았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던 시기.
그 후 북한에 갔을 때는, 학교 행사의 '간사'역할로 간 것이라 정신없기도 했지만, '언어 민족주의'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면서 '우리'라는 의미를 곱씹어보았던 계기였다.
그리고 또 중국에 다녀왔을 때는, '자본주의'의 기린아로서의 중국에 대해 감탄했었다.
"5년전 북경을 여행했을 때만 해도, 이를 실감하지 못했었는데, 오히려 중국의 '중상'정도의 경제발전을 하고 있는 산동성의, 그것도 소도시들을 여행해보니 중국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고속도로에는 차가 거의 없었고 한국의 휴게소보다 10배는 됨직한 휴게소에는 차가 한두대 있었지만, 기반시설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한국의 소도시들은 대도시의 식민지로 보잘 것 없지만, 중국의 소도시들은 위용이 위풍당당하다. 상해와 북경같은 경제도시가 아님에도, 산동성의 조그마한 도시들도 인천이나 부산보다는 훨씬 세련되고 깨끗했다.
지도 교수님은 이런 중국이 '무섭다'라고도 하셨지만, 오히려 나는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고나 할까. 애인은 미국이 패자가 되는 것보다 중국 제국이 더욱 무섭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중국에 대해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자신이 제국임을 인정하지도 않지만,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포장을 통해서 '민주주의'라는 지상 가치를 내세우면서 이 '민주주의'에 자신들이 합당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잘낫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중국은 자신들이 '중국'이기 때문에 자신이 잘났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럼에도 그 중국 문화라는 것에, 완전히 상업주의적 발상으로 치장된 문화라고 하더라도 왠지 더 정감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 전공과 관련해서, 중국을 깊게 탐구하는 일은 별반 없을 것이다. 고전문학과 근대문학의 갭은 여기서 발생한다. 고전문학 전공자라면 중국문화에 대한 탐구가 필수이지만, 개화기 이후의 근대문학 전공자에게 중국은 낯선 존재다. 그럼에도, 중국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 그리고 일말의 두려움이 생길 수 밖에 없고 이를 밀고 나가야 할 것이다.
중국은 강국이고 대국이다. "
석사논문을 쓴 직후이고, 이후 '중국 공부'라는 것도 군입대와 지금까지 다른 공부 때문에 시작하지 못했지만 정말 중국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문화대혁명 전후 말고, '현대 중국'에 대해서 내가 읽은 책이라고는 전무하다. (아래 몇몇 소설들 또한 문화대혁명 전후)
그리고 이제 체코다. 감회가 다르다. 우울하다. 여행이 나에게 준 어떤 열망, 그 곳에 대해서 더 알아보고 싶다는 열망 그 뜨거움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의 감정인 서늘한 우울. 그러나 이 또한 내가 감지하고 있지는 못했지만 내 안에서, 혹은 나라는 주체를 둘러싼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변화였을 터. 어디로 가야 할까.
그토록 루카치가 애타게 읊조리던 것을, 몇십년 후에야 나는 다시, 언제나처럼 뒤늦게,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다음 글로, 프라하 여행기 마무리 ^^; 계속 프라하 여행기 쓰는 것을 지연시키는 이유는 아무래도, 그 우울을 객관화하고 대상화하는 것에 대한 지연이겠지요. 쩝. 그 우울의 정체를 짐작하실 분들은 이미 다 짐작하시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