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하면 떠올리게 되는 것은? 프라하의 연인. 그리고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연인이야, 보지 못했으니 그냥 '떠오르기'만 할 뿐이고, 프라하의 봄도 '보지' 못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쿤데라가 나에게 왔다.
68년 소련의 체코 침공.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 시기의 이야기이고, 농담은 '국가 사회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한 작품이다.
이를, 나는 프라하가는 비행기 내내, 프라하에서 묵었던 호텔 밤에, 프라하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에서 조금씩 읽었다. 어찌보면, 나에게 '동구권 붕괴'가 현실감으로 다가온 것은 요즘의 일이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느냐? 80년대 후반학번 선배들의 회의와, 90년대의 이른바 '서태지 세대'선배들에게 너는 무엇을 배웠느냐? 소련이 망한 것을, 소련이 '나쁜 놈'들이라는 것을, 사회주의 '실험'은 모두 '실패'했다는 것을, 너는 몰랐느냐?
아니 그 이전에, 최인훈의 '광장'을 읽고 너는 무엇을 느꼈느냐? 밀실 없는 광장과 광장 없는 밀실!
눈을 감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쪽의 박정희, 전태일, 광주는 이것이 아닌 '다른 곳'에 대한 열망을 그것이 NL친구들처럼 직접적인 '다른 곳'은 아니었지만, 직접적인 '소련'도 '국가 자본주의'라고 비난하고, 아직 없고 언젠가는 도래할 '그 곳'에 대한 열망으로, '이 곳'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비루함을 비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어디로 갈 지 모른다면, 우리의 '보편적 가치'를 담지할 수 있는 체제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변혁시킬 주체와 함께 운동하고 있고, 세상의 변혁에 대한 '과학적' 법칙성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사소한 눈 앞의 악에만 분노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분노'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 사회주의의 기획 자체가, 나는 지금 비로소, 우리가 다다를 '그 곳'에 대한 적확한 묘사인지, 방법론인지 회의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 '회의'라는 것이 절망의 무의 지대로 이르지는 않았다. 아니 않아야 하기에, 나는 다시 맑스부터 레닌, 스탈린을 거쳐 마오, 그람시, 알튀세를 횡단해서 현대의 맑시즘에 이르러야만 한다. '자율주의'로 빠져나간(?) 선학들에 너무 쉽게 빨리, 동의하지 않아야 한다.
어제는 파시즘에 동의했던 춘원이, 일제의 패망시기 즈음에 불경공부로 나아간 것을 비로소 공감할 수 있었다. 이런 젠장, 다 때려치고 불교로!;; 어제는 '아직'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후배들과 잠시 이야기할 시간이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었다. 남들이 이제 학생운동 다 망했네해도, 그 이야기는 90년대 초부터 나왔던 이야기라, 나는 현실감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지금 학생운동하고 있는 3,4 학년 친구들을 만나보니, 정말 끝났다. 나는 왜 이리, 늦게 실감하고 또 회의하는가?
아직 '휴머니즘적 개인주의' 또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라는 '오류'가 내 인식체계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밀란 쿤데라의 '고발'이 아픈지 모르겠다. 아렌트가 '전체주의'라 고발하고, 이는 모든 이들이 경멸적 단어로 발음할 때, 이 지점을 넘어서는 사유를 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맑스의 말처럼, 사회주의에서야 비로소 회복되는 전인적 인간성을 내세워야 하는지도.
정말 잘 모르겠다. 모르겠으니, 다시 시작할 수 밖에.